• 최종편집 2024-04-25(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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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저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 입은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나중은 쑥 같이 쓰고 두 날 가진 칼 같이 날카로우며 그 발은 사지로 내려가며 그 걸음은 음부로 나아가나니 그는 생명의 평탄한 길을 찾지 못하며 자기 길이 든든치 못하여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느니라.”(5:3~6).

 

여기 꿀을 떨어뜨리는 입술입맞춤을 갖게 하는 입술을 의미합니다. ‘기름처럼 미끄러운 입말로 사람을 유혹하는 입을 말합니다. 입술이 육체의 관능을 말한다면 입은 정신까지 유혹하는 것을 말합니다. 최근 사무엘하를 강해하면서 다윗과 밧세바의 사건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침상에서 일어나 옥상을 거닐 던 어느 날 저녁, 다윗은 밧세바의 목욕하는 장면을 보았고 그의 아름다운 모습에 그만 홀리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둘은 불륜관계를 맺어 밧세바는 잉태하였고, 다윗은 그것을 감추기 위하여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맹렬한 전쟁터에 선두로 나가도록 하여 죽게 만듭니다(삼하11).

 

그토록 그를 괴롭혔던 사울을 죽일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지만, 다윗은 사울이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이유로 그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랬던 다윗이 왜 간음하고 살인할 지경에 이를 만큼 타락하고 말았을까요? 성경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 아들아 내 지혜에 주의하며 내 명철에 네 귀를 기울여서 근신을 지키며 네 입술로 지식을 지키도록 하라.”(5:1~2). 다윗이 넘어간 이유는 근신을 지키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근신의 반대는 방심입니다. 방심할 때가 죄짓는 때입니다. 다윗은 방심할 때 행인 곧 정욕이 들어와 주인 노릇하였고 거기에 굴복하고 만 것입니다.

 

정욕이라는 행인이 말하였습니다. “밧세바 참 아름답구나. 동침하고 싶구나. 너는 왕이야.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 이 나라가 이만큼 커지고 편안해진 것은 네가 싸움을 잘하였기 때문이야. 그러니 내가 원하는 여인과 하루 밤 동침 하도록 해줘다윗이 만일 근신하였더라면 무슨 소리야? 저 여인은 분명히 남편이 있는 여인으로써 옷이라도 만지면 하나님과 그의 남편에게 큰 죄를 짓는 것이야.” 하며 행인 곧 정욕의 요구를 물리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방심한 상태였습니다. 신하들은 전쟁터에 나가 싸우고 있는데 자신은 낮잠을 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삼하11:2).

 

방심한 결과 다윗은 자신의 행동이 가져올 결과를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나중을 보아야 했습니다. 지금 당장 주는 죄악의 낙에 속지 않고 그 후 결과를 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비록 왕일지라도 여느 백성과 다름없는 신분일 따름입니다.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말씀 앞에는 왕후장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동침을 요구하는 여주인의 간청을 거절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 순간 자신의 지위만 생각하였을 뿐 왕까지도 예외 없이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생각지 못한 것입니다.

 

그의 행동의 결과가 자신에게 미칠 것을 짐작하지 못한 것입니다. 거센 파도처럼 밀려오는 죄악의 낙에 가려서 밧세바가 잉태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잉태 된 후에도 전쟁터에서 우리아가 죽는다면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 되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드러내신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행동 결과를 미리 예측하고 행하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요셉은 자신의 행동이 가져올 결과를 예측하고 피하였습니다.

 

나의 주인이 가중 제반 소유를 간섭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임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 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39:9). 사람은 모를지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아시고 자신의 죄를 적발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캄캄했습니다. 그 결과 밧세바의 꿀 떨어지는 관능에 속아 쑥 같이 쓰고, 두 날 가진 칼같이 날카로우며, 사지로 내려가는 나중을 못 본 것입니다.

 

음녀는 비단 음심 있는 여인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4:4). 타락한 세상이 바로 음심 있는 여인이고 그들과 벗하는 것이 영적인 간음입니다. 육체의 간음은 사람들이 조심하지만 세상과 짝하는 것은 소홀히 여깁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와 신자들이 세상과 벗하고 나가기 때문에 세상과 교회가 전혀 구별이 서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세상과 벗하는 것은 세상 풍속 습관과 유행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사치 연락 돈과 명예를 추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 풍속 습관을 따라 살아가면 세상에 속하게 되며 세상 신 곧 마귀의 지배하에 놓이게 됩니다. 그 결과 혹독한 어려움을 당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인들은 세상이 주는 낙을 볼 것이 아니라 세상을 가까이 함으로 발생할 결과를 봐야 합니다. 애굽이 가져다주었던 고기 가마를 볼 것이 아니라, 바로의 학정 밑에 시달렸던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은 아담을 탓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2:17)는 내용의 말씀을 지금도 하십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8:13). 이 말씀이 그런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어 아담과 하와의 영이 죽은 것처럼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는 고통을 체험하게 됩니다.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는다는 결과를 마음에 새기는 사람은 육신대로 살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육신대로 살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주님께 부르짖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주님께서는 도와주십니다.

 

다윗처럼 죄를 짓지 않으려면 첫째 근신해야 하며 둘째는 고난으로 갑옷을 삼아야 합니다(벧전4:1). 그리고 주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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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행동의 결과를 예측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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