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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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모사 중에는 아히도벨과 후새도 있었습니다. 아히도벨의 모략은 하나님께 물어 받은 말씀과 일반이라.’(삼하16:23)고 할 만큼 뛰어났습니다. 반면 다윗의 친구 후새의 대하여는 어떠한 평이 없습니다. 압살롬이 반역을 하였을 때 아히도벨은 거기에 가담하였습니다. 짐작컨대 다윗이 아히도벨의 손녀 밧세바와 간음하고,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죽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일 이후 아히도벨은 다윗을 떠나 고향 길로에 머물렀습니다(삼하15:12). 이 모든 사실을 아는 압살롬이 아히도벨을 초청하여 의기투합한 것입니다.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말하였습니다. “이제 나로 하여금 사람 일만 이천을 택하게 하소서. 오늘 밤에 내가 일어나서 다윗의 뒤를 따라 저가 곤하고 약할 때에 엄습하여 저를 무섭게 한즉 저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이 도망할 것입니다. 내가 다윗 왕만 쳐 죽이고 모든 백성으로 왕께 돌아오게 하리니 무리의 돌아오기는 왕의 찾는 이 사람에게 달렸음이라. 그리하면 모든 백성이 평안하리이다.”(삼하17:1~2 내용).

 

압살롬은 다윗이 심어둔 첩자 후새에게도 말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상황은 매우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아히도벨의 말대로 다윗은 지쳐 있었고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요단을 아직 건너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만일 후새의 모략으로 아히도벨의 모략을 파하지 못한다면 아히도벨은 부하 12,000명과 함께 다윗의 목을 칠 기세였습니다. 이 순간 후새는 아히도벨의 모략보다 나아보이면서도 압살롬으로 하여금 치명타를 입힐 전술을 꾸며야 합니다.

 

이때만큼은 아히도벨의 모략이 좋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은 모두 용사들로서, 마치 새끼를 빼앗긴 야생 곰처럼 격분하였고, 왕의 부친은 병법에 익은 사람인즉 백성과 함께 자지 아니하고 숨어 있다가 무리 가운데 몇 명만 기습 공격하여 죽이면 사자처럼 용맹스러운 군사들도 겁에 질려버릴 것입니다.” 순간 압살롬과 무리들은 쥐죽은 듯 조용했을 것입니다.

 

계속해서 후새는 말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므로 저의 의견은 이렇습니다. 먼저 온 이스라엘 군사들을 불러 모으십시오. 그런 후에 해변의 모래알처럼 많은 군대를 이끌고 왕께서 친히 싸우러 나가십시오. 다윗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공격하여 온 대지에 내리는 아침 이슬처럼, 그를 덮쳐버리는 것입니다. 만일 저가 어느 성에 들었으면 온 이스라엘이 밧줄을 가져다가 그 성을 동여맨 후 끌어서 골짜기에 내동댕이쳐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읍이 서있던 그곳에는 돌멩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게 될 것입니다.”(삼하17:11~13, 쉬운말성경 요약).

 

후새의 모략에는 다음과 같은 허점이 있습니다. 그들이 온 이스라엘에서 군인을 모집할 동안 다윗으로 하여금 안전한 곳으로 피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점과, 둘째 다윗의 군사들이 주둔하는 성을 밧줄로 동여매기도 어렵거니와 그것을 끌어다가 골짜기에 내동댕이치기 전에 밧줄이 끊어질 수도 있고, 그들이 밧줄을 당길 동안 다윗의 군사들은 화살이나 창을 사용하여 공격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적처럼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후새의 모략을 택합니다.

 

이렇게 된 것은 순전히 다윗의 기도 때문입니다. “혹이 다윗에게 고하되 압살롬과 함께 모반한 자들 가운데 아히도벨이 있나이다. 하니 다윗이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삼하15:31).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간단한 기도 같지만 그 기도에는 엄청난 힘이 있었습니다. 그가 물매로 골리앗을 쓰러뜨리듯, 허점투성이 후새의 모략으로 완벽에 가까운 아히도벨의 모략을 깨뜨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의 기도드리는 습관 가운데 하나는 마귀의 권세와 궤휼을 눌러 주시옵소서.” 입니다. 왜냐하면 압살롬을 위한 아히도벨의 모략처럼 곳곳에 마귀의 속임수가 있다는 것을 체감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생각을 통하여 때로는 친절한 척, 지혜로운 척, 가장 선한 모습으로 가장하고 저를 유혹합니다. 주님이 깨닫게 하지 않는다면 도저히 알아차릴 수 없는 모습입니다. 그들의 간계를 조금이나마 알기에 주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앙인들 가운데는 마귀라는 말을 입에 담기조차 싫어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이미 다 이기셨는데 마귀는 무슨 마귀냐고 묻습니다. 그것은 마귀가 가장 좋아하는 모습입니다. 마치 사자가 두루 다니며 삼킬 양들을 찾아다니지만 양들은 사자라는 존재가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신앙인들이 알아야 할 것은 주님께서 십자가로 승리한 것이지 마귀 자체를 없앤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승리함으로서 마귀 권세를 깨뜨렸습니다. 신앙인들이 사탄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대적하는 한 어떤 사탄도 신자들을 괴롭힐 수 없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10:19). 사탄은 예수님이 그들의 권세를 깨뜨렸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난 날 자신의 종이었던 신자들을 지금도 주인인 양 속이고 있습니다.

 

어찌나 교묘히 속이던지 사탄의 음성인지 성령의 음성인지 모를 정도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사람의 일로 파고들기 때문입니다(16:23). 사탄이 신앙인들을 계속 속인다면 예수님이 십자가로 그들의 권세를 깨뜨리기 전과 무엇이 다르냐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 완전히 다른 세계입니다. 이전에는 신앙인들이 사탄에 대하여 무방비 상태였지만 이젠 사탄을 사탄으로 인식하고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대적하는 순간 그들은 더 이상 속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앙인들이 마귀의 권세와 궤휼을 눌러 주세요.” 라고 기도드리는 것은 보이지 않는 그들의 속임을 주님께서 막아주시고, 또한 사람의 일로 파고드는 그들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게 해달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들을 대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적을 모른다면 아무리 좋은 무기도 사용할 수 없듯 사탄의 정체를 모른다면 그들을 대적하는데 있어서 전능한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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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아히도벨과 후새’ (삼하17: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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