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
2021/07/04 07:15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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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률 목사 (신촌예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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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16:8).

 

누룩은 발효시키는 효소입니다. 밀가루에 누룩이 들어가면 부풀어 오릅니다. 누룩에 대하여 성경은 말합니다.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16:12). 이처럼 예수님이 말씀하신 누룩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교훈을 뜻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교훈은 부활도 있고, 천사도 있고, 영도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23:8). 어찌 보면 그들의 주장은 틀려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주장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는 원리를 부정하고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하며 모세의 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15:5). 그렇다고 그들이 율법을 잘 지켰던 것도 아닙니다. 주장만 하였을 뿐 정작 자신들은 율법의 정신과 전혀 상관없이 살았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니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 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23:2~5).

 

그들은 율법을 들이대며 비난하고 흠을 잡을지언정 자신들은 한 손가락으로도 행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가르치는 사람이지 행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과 아는 것으로 행하는 줄로 착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사람들은 사랑으로 행하며 남을 정죄할 틈이 없고 자신의 행위를 비추고 부끄러워하고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남의 잘못을 보고 오히려 자신을 회개의 기회로 삼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는 교훈만 아니라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외식입니다(12:1). 하나님께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행동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사람 앞에서는 신사며 숙녀지만, 사람이 보이지 않는 데서는 어떤 행동도 서슴지 않습니다. 그들의 두 번째 행동은 자랑입니다. 바울은 누룩이 부풀어지고 온 덩어리에 퍼지는 의미를 자랑으로 말하고 있습니다(고전5:6). 그들은 자랑하는 이유는 자신을 옳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18:10~12).

 

자신을 옳다고 믿는 사람들은 화를 잘 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1:19~20) 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성내는 이유는 의를 이루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 의는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자신의 의를 이루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자신이 옳게 여기는 바가 반대에 부딪히면 성을 냅니다. 병은 병의 원인이 있고 병의 증상이 있습니다. 사람이 성내는 것은 병의 증상이지 병의 원인이 아닙니다. 증상을 아무리 없애려 하고 고치려 해도 원인을 고치지 않으면 소용없는 일입니다. 성내는 원인은 자기 의 때문입니다. 화만 내지 않으려 하지 말고 자신의 옳은 것을 부인해야 합니다.

 

나병환자였던 아람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이스라엘에서 사로잡아온 여종의 말을 듣고 고침 받기 위하여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왔습니다. 엘리사는 사자를 저에게 보내어 말하도록 하였습니다.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왕하5:10). 나아만은 엘리사의 이런 행동에 화가 났습니다.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노라.”(왕하5:11). 그가 화가 난 것은 자신의 예상과 엘리사의 말이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의가 상한 것입니다.

 

웃시아 왕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한 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마음이 교만해졌습니다. 자신이 직접 분향하기 위하여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사실 그 일은 제사장들만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자 제사장들이 웃시아 왕을 막았습니다. 그는 돌아서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제사장들에게 노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이마에 나병이 발하고 말았습니다(대하26:16~19). 하나님이 강성하게 하자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한 채 자신의 의가 가득 찼습니다. 자신도 분향할 수 있는 위치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것이 막히자 화를 낸 것입니다.

 

이처럼 나아만과 웃시아 왕의 분노는 자기 의 때문이었습니다. 다행히도 나아만은 충성된 종을 통하여 자기 의를 부인합니다. 하지만 웃시아 왕이 철저히 회개하였다는 말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미련한 사람보다 미련한 사람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사람입니다(26:12). 마찬가지로 틀린 사람보다 더 틀린 사람 역시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성질만 없애려 한다면 평생 갑니다. 하지만 자신의 의를 부인하고, 자신도 잘 못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이 나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노를 잘 다스리게 됩니다. 분노는 참는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자기 의를 부인해야 합니다.

 

사두개인들은 철저히 현실주의자들이었습니다. 내세관이 없는 그들은 현실에서 만족하고 현실에서 누리고 현실에서 복 받는 것을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내일 죽으리니 오늘 먹고 마시자.” 하는 에서주의자들이었습니다(23:8). 마가는 사두개인의 누룩 대신에 헤롯의 누룩이라고 말합니다(8:15). 그것은 사두개인들이 얼마나 현실정치와 일치 되었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입니다.

 

지금도 현대판 바리새인들이 있고 사두개인들이 있습니다. 현대판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정통이고 옳고 바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말씀으로 자신을 비추기보다는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합니다. 반면에 현대판 사두개인들은 현세에 있어 잘 되고 번성하는 것을 큰 복으로 생각합니다. 내세에 대한 소망이 있을지언정 준비를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경건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려는 사람이며(9:31), 이런 사람은 말씀을 통하여 남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비춥니다. 자신은 말씀대로 도저히 살 수 없는 사람임을 알고, 주님의 불쌍히 여기심을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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