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혜암 이장식 박사(1921-2021)
2022/02/04 10:32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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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규 박사(서울교회사 연구소장/ 대신대 전 한국교회사 교수)

통전적, 통섭적 이해로 조화와 일치의 미 추구

지성 감성 덕성을 조화시키고 온전케 하는 영성 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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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서 100세를 넘기까지 활동한 교회사학자

20208, 그가 친히 설립 운영해온 '혜암 신학연구소'는 정기 학술연구지<신학과 교회> 13집은 혜암 이장식(惠岩 李章植) 박사의 동료와 후학들이 그의 100세 기념집으로 출간했다. 필자가 알기로는 한국교회 역사상 한국교회사와 세계교회 역사를 강단에서 가르쳐온 학자로서 여생을 100세를 넘긴 이는 이장식 박사가 처음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는 100세를 맞이한 회고담 속에 이런 말을 남겼다. "어렸을 때 철없는 생각 같았지만 목사가 되겠다고 다짐했는데, 목사는 되었으나 설교하는 목사가 되지 못하고 가르치는 목사로 한평생을 보낸 것은 나의 뜻으로 된 것은 아니었다"(신학과 교회, 13p.25).

 

혜암은 일제의 식민통치 시기였던 1921417일 경남 진해에서 태어났다. 그의 신앙은 돈독하기로 유명한 어머니로부터 였음을 고백한 바 있다. 그는 고향 마을교회였던 경화교회 주일학교를 ㅤㅇㅏㅈ지 못한다. 당시 담임목사였던 강상은 목사로부터 받은 감화는 오래도록 그의 신앙생활 한 모퉁이에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당시 어려웠던 경제 사정 속에서 호주선교회 선교부 장학금을 받아 대구 계성중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더우기 계성학교 설립정신인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1) 아래 예배와 성경공부를 할 수 있었고, 기독교적인 인격도야를 받은 것을 늘 감사하게 생각했다.

 

그는 다시 계성학교를 마치고 장차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되려는 꿈을 가지고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갔으나, 일본에서 쉽게 꿈이 이루어지지 않아 1943년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귀국 후 얼마 지나지 않아 1945년 대한민국은 8.15 광복을 맞았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조국은 좌익과 우익으로 분열되고 대립하면서 끝내 남북이 분단되고 혼란과 갈등을 겪고 있을 때, 모교인 계성학교 신태식 선생을 만나 스승의 추천으로 19469월부터 계성학교에서 국어교사로 활동하게 되었다.

 

조선신학교 시절부터 교수생활

그러나 얼마 후 혜암은 목사가 되기 위하여 계성학교 교사를 사임하고 서울의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교)에 입학했다. 혜암은 여기에서 자신이 신학교육자로서, 역사학자로서의 부르심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신학교 학부를 마칠 즈음, 교수회의 결정으로 전임강사로 학교에 남게 된다.

 

혜암이 조선신학교를 졸업할 당시의 학교는 시설면에서는 빈약하였으나, 학장이었던 만우 송창근 박사의 목회학적 열정에 감동하였고, 정통주의라는 보수주의 신학의 오류와 약점을 시정하려는 장공 김재준 목사의 신학 열정에 깊이 감동하였다.(이장식, 나의 신학 순례).

 

그는 조선신학교 재직시 교회와 교단의 문제를 다루는 일에서 송창근 김재준 한경직 함태영 등의 역사를 곁에서 지켜보며 배울 수 있었다. 혜암이 세계교회사와 한국교회사, 나아가 아시아교회 역사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토대를 조선신학교에서 터득했다고 보여진다.

 

혜암은 한신대학교에서 교수로 참여하고 가르치고 있었지만, 그는 항상 자신의 학문적인 향상을 위하여 유학의 기회를 노리고 었었다. 그러던 차에 카나다 퀸즈대학교로 유학의 길이 열려 퀸즈를 거쳐 미국 뉴욕에 있는 유니온신학교에서 본격적으로 교회사와 역사학에 심취하여 학문의 넓이와 깊이를 파고 들었다.

 

고신대학교에서 한국교회사 교수로 평생을 보내고 최근 은퇴한 이상규 박사는 혜암 100세 기념 학술지 <신학과 교회>(13)에 기고한 '교회사학사에서 본 이장식 박사의 학문의 여정- 이장식 박사의 저술과 신학'에서, 그의 대표적인 저서 <기독교사상사 1,2>(1963,1966), <기독교신조사 1,2>(1980, 1981), <현대교회학>(1969), <교부 오리게네스>(1977), 기독교와 국가>(1981), <한국교회 백년>(1987), <아시아 고대기독교사>(1990), <세계교회사 이야기>(2011)를 열거하면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1) 기독교사상사 제1권에서는 초 .중세 이야기, 2권에서는 16세기 이후 18세기까지 기술하되 주제 중심으로 기술하였다. (2) 아시아 고대기독교사는 학문적으로 크게 기여한 저술이다. 시리아와 페르시아, 아라비아, 아르메니아 지역의 기독교 연원을 추적한 연구이다. 여기에 곁들여 동방기독교, 특히 경교(景敎)에 대한 연구가 흥미롭다. (3) 기독교신조사 1,2(1980)는 사도신경을 비롯하여 기독교가 선포해온 각종 신앙고백 문서를 편집하고 번역 해설한 문서이다. 1권에서는 사도신경으로부터 16세기까지의 문서, 2권에서는 16세기 이후의 문서들, 즉 아르메니우스 신조, 도르트 신조, 웨스트민스터 신조, 스위스 일치 신조, 19세기 이후의 미국, 영국, 한국에서 제정된 장로교 신조들, 회중교회, 침례교회, 웨슬레주의, 퀘이커, 구세군 신조에 이어 1975WCC 5차 총회 폐회사까지 해설하고 있다. (4) 한국교회의 어제와 오늘(1977), 한국교회 백년(1987). 혜암은 생애 전반을 서구 기독교 역사에 천착하였으나 그의 후기엔 한국교회사 연구에도 저서와 글을 많이 썼다. 1958년부터 한신대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치며 한국교회 역사연구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그 증거가 바로 이들 두 가지 저서로 남았고, 이외에도 기독교사상 잡지와 다른 학술지 등에 꾸준하게 발표하였다.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은 모친과 만우 송창근

혜암의 교회사학의 특징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의 제자로서 한신대 명예교수인 김경재 박사는 그의 사관을 '통전적 특징을 지닌 역사관'이라고 하였다. 김 박사는 혜암의 사관 형성 배경을 언급하면서 먼저 혜암의 신앙과 신학 체질 형성에서 모친과 만우 송창근의 영향을 언급한다. 혜암의 교회사학에서 통전적인 혹은 통섭적 특징 형성에 큰 영향을 준 인물로서 모친의 경건 신앙과 그의 영원한 멘토요 스승이었던 만우 송창근 목사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고 보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혜암은 경남 진해 동쪽 해안에 있는 한 작은 어촌 덕산에서 태어났는데, 혜암이 태어난 가정은 기독교 가정이 아니었다. 경남지역의 선교를 분담했던 호주장로교선교회가 1900년 초, 경남의 진해와 웅천에 두 교회를 세웠는데, 하나는 순교자 주기철 목사를 배출한 웅천교회요, 다른 하나는 혜암 이장식 목사를 배출한 경화교회이다. 혜암의 어머니가 덕산으로 시집 오기 전 이미 기독교 신앙을 가졌고, 시집 올 때 성경과 찬송가를 간직해 가지고 와 어린 아들에게 신앙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이 가정을 기독교 가정으로 변화시켰던 것이다. 혜암의 어머니는 남편이 병으로 일찍 타계하자 행상을 하면서 가정을 이끌었다.

 

혜암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어머나의 신앙은 철저한 성수주일 신앙과 삼일기도회와 새벽기도회 참석, 사경회 때 강사 대접, 성미를 모아 드리는 경건, 목돈이 없어 교회 건축 헌금을 빚내어 드리고 다달이 갚는 분납의 생활을 하면서도, 이웃집에서 제사 음식을 가져오면 마다하지 않고 받으면서 감사하는 열린 신앙의 소유자였다고 했다.

 

혜암의 신앙과 신학적 특성을 강조하는 이유를 김경재 박사는 그의 학창 시절을 보낸 대구 계성학교에서 5년동안의 신앙훈련과 어머니로부터 전해 받은 신앙의 영향이라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당시 그의 계성학교 재학시 학교는 1년에 한번씩 저명한 인사들을 청해 신앙수련회를 개최하는데, 당대의 지성적이고 신앙적인 인격의 소유자들인 송창근 김재준 한경직 윤인구 채필근 등의 유명인사들의 명설교와 강의를 들으며 신앙집회를 경험했던 바를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중에도 송창근 박사와의 만남을 특기하고 있다. 혜암은 만우 송창근 박사가 한국교회와 신학계에 끼친 공헌을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첫째, 만우는 민족을 사랑하고 민족정신을 살리려고 고난도 겪였지만, 소위 민족주의자는 아니었다. 둘째, 신도들의 신앙각성과 교회개척과 북한전도를 열망하여 교회의 권위를 강조하였으나, 교권주의자는 아니었다. 셋째, 기독교 신앙의 정통을 지킬 것을 강조했으나, 소위 정통주의 교리주의자는 아니었다. 넷째, 신학교육의 질적 향상을 부르짖었으나, 소위 신신학자는 아니었다. 다섯째, 새로운 신학사상을 논했지만, 서양신학의 직수입이 아니라 기독교의 토착화를 생각했다. 여섯째, 교회의 목회자 권위와 예배와 신앙생활에서 경건을 강조했지만, 소위 경건주의자연 하지는 않았다. 일곱번째, 빈민과 소외된 자들을 위하여 헌신했고 사회개혁을 강조했으나, 사회주의자는 아니었다. 결론적으로 만우는 조화와 일치의 미를 추구하셨는데 애국심과 신앙생활의 조화, 신학과 설교, 문학과 신학, 교회와 사회, 전통과 개혁, 보수와 진보 등등의 조화를 희구하였다.

 

혜암은 2021917,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101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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