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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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57:15).

 

통회란 한자 그대로 해석하면 아프게 뉘우친다는 뜻이며, 히브리말로는 다카로써 깨어지고, 부수어지고, 잘게 쪼개어진 어떤 물건을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이 말이 통회하는 자로 쓰일 때는 상한 자’ ‘겸비한 자란 뜻으로 자신의 죄악성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괴로워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신앙인들이 돌이키고 반성을 해도 여전히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유는 돌이키고 반성하는 정도가 아프게 회개하는 정도가 아니라, 형식적이거나, 여전히 죄를 좋아하면서 단지 징계가 무서워서 하는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잘못을 저질러 놓고 반성하지만, 그 반성은 그 일이 잘 못 된 것이고, 옳지 않은 것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꾸지람이나 채찍이 무서워서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바로에게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보내라고 하셨습니다(5:1). 그러나 바로의 마음이 완고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애굽에 재앙을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바로는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러나 재앙이 끝나면 언제 약속했냐?”는 듯이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음에 더 큰 재앙을 내리셨고, 이때도 바로는 회개하는 척하였지만, 한숨 돌릴만하면 이전과 마찬가지가 되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애굽은 점점 더 황폐해갔고 마침내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은 후에야 비로소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보냈습니다(12:30-31). 바로에게 어려운 일들이 반복된 것은, 그 마음이 강퍅하여 거짓 회개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참된 회개는 단지 아픔 때문에, 징계가 무서워서 하는 회개가 아니라, 했던 일들이 옳지 않고 선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하는 회개를 의미합니다. 이런 회개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다시 죄를 짓지 않도록 함께 하십니다.

 

다윗은 비록 왕이 되었지만, 육신은 여느 사람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는 밧세바가 벌거벗고 목욕하는 것을 보았을 때 음욕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신하를 보내 밧세바를 궁으로 데려온 후 동침 하였습니다. 밧세바가 잉태하자 그녀의 남편 우리아를 맹렬한 전투 앞에서 싸우게 하여 죽게 하였습니다. 다윗은 감쪽같이 해치운 줄 알았지만, 나단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그를 강하게 책망하였습니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는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내가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고 내가 네 처들을 가져 네 눈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리니 그 사람이 네 처들로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이스라엘 무리 앞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삼하12:10-12).

 

다윗은 이 말씀을 들었을 때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삼하12:13) 하며 진심으로 회개하였습니다. 51편은 그가 선지자 나단의 책망을 듣고 회개한 시입니다. 그 시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51:1-3).

 

그는 비록 자신의 죗값을 톡톡히 치르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회개를 보고 용서하였습니다. 그는 죽지 않았고 하나님과 교제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죄를 보고 탄식하며, 통회하는 사람과 하나님은 함께 하십니다(57:15).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게 됩니다. 하지만 통회하지 않는 사람은, 어렵고 난처하고 힘든 환경에서 풀리면 이전 죄악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진심으로 하는 회개가 필요합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악인은 자기의 악에 걸리며 그 죄의 줄에 매이나니 그는 훈계를 받지 아니함을 인하여 죽겠고 미련함이 많음을 인하여 혼미하게 되느니라.”(5:22).

 

다윗을 무시하고 사울의 군장 아브넬과, 이모의 아들 아마사와, 압살롬을 죽인 요압은 그 때마다 무사한 듯 하였지만 최후 아도니아의 반란에 가입하여 솔로몬에게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왕상2:34). 성경에 요압이 자기의 잘못을 돌이켰다는 내용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자기 악에 자기가 걸리고 만 것입니다.

 

스스로 왕이 되려 하였던 아도니아는 솔로몬에게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러자 솔로몬은 저가 만일 선한 사람이 될진대 그 머리카락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려니와 저의 가운데 악한 것이 보이면 죽으리라.”(왕상1:52)라고 하며 용서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통회하지 않았습니다. 죄의 뿌리는 그대로 남아 있어서 아버지의 후궁과 다름없는 아비삭을 솔로몬에게 구하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죄악에 걸려든 것입니다.

 

이처럼 아프게 회개하지 않으면 죄의 꼬리가 결국 밟히고 맙니다. 자신의 죄가 자기를 적발하고 맙니다(44:16).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패역이 너를 책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2:19).

 

자신의 악이 자기를 징계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회개하되 진실한 회개를 해야 합니다. 통회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성령께서 함께하셔서 죄를 이기고 버리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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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통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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