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김광수 박사 (1926-2016)
2022/04/10 12:16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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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정규 박사(서울교회사 연구소장/ 대신대 전 한국교회사 교수)

한국기독교 100년사 속에 역사의 족적을 남긴 증인

한국교회 5부작 등 다수 저술 발간살아있는 한국교회사란 애칭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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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북도 한국교회 초기 신앙가문 출신

김광수(金光洙)1926720, 평안북도 의주군 피현면에서 한국교회 초기 신앙 가문에서 태어나 기독교 가정에서 고이 자랐다. 조부는 김광호 목사요, 부친은 김희선 목사이다. 어릴 때부터 정의유치원엘 다녔고, 초등교육도 장로교 계통의 숭덕학교(崇德學敎)를 다녔다. 숭덕학교는 사무엘 마펫이 세운 미숀스쿨이다. 그의 유년 시절의 놀이터는 숭실학교 운동장과 평양 장로회신학교 교정이었다. 사는 집 뒷문을 열면 바로 숭실학교 운동장이었고, 10분 거리에 평양 장로회신학교가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 통치하에서 경천애인(敬天愛人) 사상의 기독교교육으로 민족주의 배양을 목적한 사립학교 운영은 그리 용이하지 못하였다. 학교에서 일본 민속신앙을 숭배하는 신사참배 강요가 시작된 것이다. 신사참배의 명분은 국민의례라고 하면서 전 국민을 상대로 강요하였는데, 유일신 하나님만을 섬기며 예배하는 기독교인들에겐 큰 환란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와중에 꿈에도 생각 못한 8.15 광복이 도래하였으나, 얼마 안가 북한은 소련군을 앞세운 공산당이 모든 행정과 정치를 장악해 일반 인민들은 말없이 이에 순응했으나 교회는 핍박의 시작이었다. 19506.25 전쟁의 발발로 신앙의 자유를 원하는 교인들은 공산당의 눈을 피해 하나 둘 남쪽을 향해 3.8선을 넘기 시작하였다. 김 목사의 가족들도 다른 피난민 대열에 끼여 내려오던 중 외삼촌 가족을 만나 황해도 장연(長連)으로 피신해 많은 도움을 받았다. 해주(海州)에 이르렀을 즈음에 전쟁이 곧 끝난다며 해주로 가자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김 목사 가족은 그들이 공산당 선전원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청단(靑丹)을 향해 가다가 샛길로 빠져 3.8선을 넘어 무사히 개성(開城)까지 올 수 있었다.(나의 반평생과 한국교회사, p.273 이하, 2010).  

호남지방교회사를 기록한 한인수(韓仁洙) 목사는 스승인 김광수 목사를 "걸어다니는 교회사"라고 말한 바 있고, 장신대 총장을 역임한 장영일 박사는 김 목사를 일컬어 "살아있는 한국교회사"라고 말한 바 있지만, 김광수 목사는 가문이 이루어낸, 자연스런 몸으로 터득한 한국교화사가였다고 생각한다. 그의 외숙부가 김양선 목사요, 김양선 목사의 외할아버지가 초기 조선교회 7인 가운데 한 분인 백홍준이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 100년사 속에서 3대를 거쳐 한국교회 역사를 살아낸 몇 안되는 기독교 명문 가정에서 태어나 한국교회 역사의 족적을 남긴 증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월남 후 대구에서 교회개척

그가 피난 내려와 대구에서 이상근 목사를 만난 것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요 축복이었다. 그가 당시 이상근 목사가 시무하던 대구 대봉교회에 출석하므로 이상근 목사사와 인연이 맺어졌지만, 실은 이상근 목사가 대구에 정착하기 전, 평양 능라도교회 전도사로 있을 때부터 이 목사는 김광수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이상근 목사는 미국 유학 후 대구제일교회에서 시무함.) 이 목사는 대봉교회에서 그리 멀지 않은 봉덕동에 봉덕교회를 개척하는데 김광수를 전도사로 파송해 사역을 맡겼다.

 

대봉교회가 봉덕동에 교회를 개척하게 된 동기는 당시 한국의 무디로 불리던 성결교회 이성봉 목사를 강사로 초청해 부흥회를 하였는데, 그때 봉덕동에 60여평의 땅이 생겨 교회를 개척해 보라고 했다. 그는 친구 홍화성과 함께 흙벽돌로 담을 쌓고 깡통을 연결해 지붕을 덮고 비닐로 문을 달고 바닥엔 가마니를 깔고 확장주일학교를 시작하였다.

 

김 목사는 후에 그때 광경을 예수님이 탄생했을 때 베들레험의 마굿간이 연상되었다고 했다. 이런 모습으로 15평 짜리 개척교회가 시작되었고, 주위엔 피난민들이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당시 무산 아동교육의 선구자였던 권세열 선교사를 찾아가 '성경구락부'를 개설해 달라고 요청하여 전도와 교육을 겸한 사역을 시작했다. 1년 여가 지나자 교인이 50여명으로 늘었다. 아이들 부모들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1954년 초 새벽제단에 엎드려 새교회당을 건축하겠다고 하나님께 서약하였다. 건축기금이 문제였다. 김 목사는 시내에 있는 여러 재력가들과 아는 교인들을 찾아 가 모금을 요청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상당액의 모금이 진척되었고, 대구 약전골목 입구에 한약방을 경영하는 정규만 장로는 거금을 헌금해 주었는데, 혼자 모금액의 절반이 되었다. 그 돈으로 250평의 대지를 구입했는데 건축비가 없었다. 주위에선 땅을 너무 넓게 샀다고 불평하는 이들도 있었고, 심지어 대봉교회 당회에서도 무리한 계획이라고 걱정을 했다.

 

이런 와중에 이학우(李學祐)라는 교우가 미8군 사령부에 통역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6.25 전쟁 피해 복구사업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음을 알고 교회당 건축 자원 물자 신청을 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타진해 본 결과 'NO'라는 것이다. 이유인즉 교회는 구제나 전도를 위해 남을 도와야지 피원조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이때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우리는 성경구락부 교육을 하고 있지 않는가?' 전쟁 와중에 난민들의 자녀들을 모아 무산아동교육을 위한 교육용 건물이 필요하니 도와 달라는 취지로 다시 신청을 하게 되었다. 대표자 명함을 영문으로 박아 물자 공급 책임자와 군목과 사병으로부터 고위직에 이르기까지 수십명을 면담한 끝에 'OK' 싸인을 받을 수 있었고, 우여곡절 끝에 어마어마한 건축자재를 지원받게 되었다.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원서 '경교 연구'로 박사학위 받아

당시 김 목사는 영남대학교 철학과에 편입하여 학사학위를 받았고, 후에 경북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학을 전공하고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이 즈음에 계성학교 교장으로 있던 신태식 박사로부터 계성학교 교목 겸 교사로 초빙을 받고 부임했다. 그리고 얼마 후 미국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원으로 유학의 길이 열렸다.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 논문은 중국의 기독교 경교 '네스토리안 기념비문 연구'였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본격적으로 한국교회사 연구에 천착해 외숙부 김양선 목사가 다 이루지 못한 한국기독교 역사 연구와 자료 정리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한국교회 5부작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 첫 권이 <한국기독교전래사>(1974), 둘째 권이 <한국기독교성장사>(1976)<한국기독교수난사>(1978), 셋째 권이 <한국기독교100년사>(1978), 넷째 권이 <한국기독교재건사>(1981), 다섯째 권이 <북한기독교탐구사>(1994)이다. 이외에도 <세계장로교회역사>(1981), <동방기독교사>(1973) 등을 낸 바 있고, 미 간행본으로 '한국기독교발달사' 유고가 있다.

 

김광수 박사는 그의 제자 한인수 목사가 발행하는 '호남교회사 연구' 지상에 <나의 반평생과 한국교회사>란 글을 쓰면서 서언에 자신의 역사관을 피력한 바가 있다. "역사는 과거 사실을 그대로 객관적으로 기록해야 한다. 역사가의 최우선 입장은 19세기 초 랑케(Leopold von Ranke)가 말 했듯이 자신의 현재 관념과 사고 형식에 따라 과거를 평가해서는 안되며, 현재의 이해 관계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태도를 취해야 한다. 그렇지만 이것이 인간 인식의 한계성 때문에 각자 자신의 의식구조가 있어 객관성의 고수가 이미 고상한 꿈이 되어버린 것이 오래이다. 역사가에게 또 하나의 사명은 사건들의 복합적 관계성을 잘 관찰하여 그 진행을 역사 발전의 연속성 속에서 파악하고 절대보편주의적으로 서술해야 옳은 것이다. 사건들을 별개의 것으로 취급하여 한 시대의, 한 역사의, 한 영역의, 한 사고,의 한 이념의 편향적 대변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이것 역시 각자의 당파적 의식구조의 소유로 인해 공정을 기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2010 도서출판 경건 p.18).

 

숙부 김양선 목사가 다 이루지 못한 '한국교회 역사' 완성

"교회역사가에게는 더 큰 난점이 있다. 역사는 과거와 함께 역사에 포함되어 있는 현재를 말해야 한다. 그렇지만 현재는 전개되고 있는 진행 중에 있어 전체적 파악이 과거의 경우보다 어렵다.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인물의 평가는 신변의 위험마저 각오해야 한다. 교단마다 지배권력과 교파적 영향이 막대하여 상대방의 타도를 위해서는 과거 마틴 루터에게와 같이 파문선고로 귀착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의 숙부 김양선 목사가 한 말이 있다. 저자는 사가(史家)의 입장에서 냉정하고 공정하게 글을 취급하였다. 우리 교단 분열이 일부 교권주의자의 지나친 교권적 행동에 기인하였음을 결코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또 김광수 박사는 이렇게 고백하였다. 내가 처음 한국교회사 강의를 시작하자 신학생들은 나에게 "살아있는 한국교회사"라는 애칭을 붙여주더니만, 나의 위치가 중반쯤으로 원숙해 지니까 "움직이는 교회사"로 바뀌더니, 근래에 동료들은 "죽어가는 한국교회사"라고 빈정댄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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