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1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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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13:9).

 

얼마 전 경의선 숲길을 산책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제가 가는 길목에 어떤 어르신과, 이제 40대 정도 되는 남성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다투고 있었습니다. 젊은 사람이 말하였습니다. “당신 같은 사람 때문에 공원 문화가 망가지는 거야그러자 어르신이 때릴 듯이 덤비며 말하였습니다. “뭐라고? 내가 할 소리를 네가 하는구나.” 그러자 젊은 남성의 부인인 듯한 여성이 젊은 남성을 잡아끌며 사태를 수습하였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그들은 공원길을 마주하며 걷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팔이 닿을 만큼 가까이 왔을 때, 그들은 서로 길을 양보하지 않으려 했다는 것입니다. 서로가 얼마든지 피해갈 수 있는 길인데도 자존심 때문에 양보하지 않다가 그런 사고가 난 것입니다. 다른 분들도 그러하겠지만 이런 경우 저는 멀리서부터 아예 한쪽으로 비켜섭니다. 좁은 골목에서의 운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피할 길이 있다면 먼저 피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달고 사는 제가 그런 일들로 굳이 사람들과 마찰을 빚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그가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부터 조카 롯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들은 서로가 자신의 소유를 지니고 있으면서 한 집안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한 가족 두 세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가난할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서로의 소유가 많아지자 아브라함의 종과 롯의 종 사이에 소유권 분쟁이 있었습니다. 때로는 큰 소리까지 나갔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조카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13:9). 당연히 롯은 이렇게 말해야 했습니다. “삼촌, 제가 삼촌을 떠나다니요, 그럴 수 없습니다. 제가 우리 목자들에게 단단히 일러두겠습니다.” 그러나 롯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겼습니다. 그곳은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도 같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선택권을 롯에게 양보하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곳을 네게 주리라.”(13:14b-17).

 

자신의 유익을 따라 먼저 선택한 롯은 고작 자신이 선택한 곳과 그 주변에 머물 수밖에 없었지만, 양보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그가 바라보는 모든 것을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양보한 사람에게 넓은 곳을 허락하십니다. 우물들을 블레셋 사람들에게 양보한 이삭에게 장소가 넓음이라는 뜻의 르호봇을 주셨던 것과 같습니다(26:22).

 

하지만 신앙인들이 결코 양보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될 것들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의 배필을 위하여 충성된 종 엘리에셀을 하란으로 보낼 때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엘리에셀에게 그의 고향, 그의 족속에게서 이삭의 아내 택할 것을 구하였습니다. 그러자 종이 말하였습니다. “여자가 나를 좇아 이 땅으로 오고자 아니 하거든 내가 주인의 아들을 주인의 나오신 땅으로 인도하여 돌아가리이까?”(24:5).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습니다. “삼가 내 아들을 그리로 데리고 돌아가지 말라.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본토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네 앞서 보내실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지니라. 만일 여자가 너를 좇아 오고자 아니하면 나의 이 맹세가 너와 상관이 없나니 오직 내 아들을 데리고 그리로 가지 말지니라.”(24:6b-8).

 

종이 만일 여인이 가나안 땅으로 가려 하지 않을 때는 이삭을 데리고 돌아가야 하느냐고 묻자 아브라함은 깜짝 놀라며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 이유로는 하늘의 하나님께서 그를 그 고향과 본토에서 떠나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에게만 적용시키는 것이 아니라, 아들에게까지 자기에 관한 말씀을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이처럼 결코 양보해서는 안 될 부분 첫째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삭의 아들 에서는 야곱보다 더 사내답고 너그러운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양보해서는 안 될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에 판 결과 하나님의 자녀의 명분이 야곱에게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후회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12:16-17). 신앙인들은 범사에 관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며, 본질적이지 않는 것이라면 양보하는 것이 덕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의 명분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자녀의 명분이 가져오는 은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몇 가지만 나열한다면 하나님 나라의 상속(1:12, 6:17)과 기도(7:11), 찬미(10:19)입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며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3:17-18). 여기서도 화평과 관용이 중요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화평의 순서는 성결 다음이며, 관용 역시 성결과 화평 다음입니다. 신앙인들이 화평과 관용을 핑계로, 성결을 양보하는 것 또한 결코 안 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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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독연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양보할 때와 해서는 안 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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