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5(목)
 
해설 / 한국교회 기도원운동의 명과 암

기도원의 쇠퇴와 함께 기도소리도 줄어… 기도원운동 새롭게 조명돼야



한국교회 기도원운동 용문산 기도원이 효시
1945년 해방공간에 나타난 한국교회의 기도원운동은 일찍이 세계 교회사에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기관이다. 중세교회의 수도원운동과 유사하면서도 수도원과는 그 성격을 달리하는 기도원운동은 동양인의 입산수도 전통에서 유래된 것이다.
많은 목회자들이 영력을 충전하기 위해 기도원을 찾고, 또 교인들도 마음이 울적하고 영성이 컬컬할 때마다 기도원을 찾아 마음껏 기도해 왔다.
한국교회의 기도운운동은 1947년에 시작된 나운몽의 용문산 기도원이 그 효시이다. 용문산 기도원은 수도원적 이상을 내걸고, 민족계몽운동으로 출발한 애향숙과 접목되어 시작되었다. 이것이 6.25전쟁을 거치면서 강력한 성령운동이 동반되고 또 성령체험을 한 수련생(수도사)들이 전국에 흩어져 기도원을 세우면서 한국교회에 본격적인 기도원운동의 바람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또 은사체험이나 신비체험이 있는 기성교회의 중직들이 개인적으로 기도원을 설립한 것이 오늘에 이른다.
70년대를 지나 80년대에 이르러 기도원은 절정에 이르렀다. 어디서나 어떤 모양으로든 기도원을 세우면 거기에는 은혜받으려는 사람들로 들어 찼다. 맨손으로 세운 기도원이 얼마 후에는 수십억 수백억을 홋가하는 재산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 가운데 특히 치병집단은 더 많은 인기를 누렸다. 이로인해 2000년대까지는 가히 기도원 천국을 이루었다.
기도원 집회가 계속되는 한 호황이 지속될 것으로 보이던 기도원이 이젠 쇠퇴해 가고 있다. 2만불 시대에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서 기도하러 오는 사람들이 줄어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기도원운동 한국교회에 끼친 영향 양면성 있어
한국교회에서 기도원운동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한국교회 성장에 기여한 면과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을 훼손한 면이 그것이다.
기도원운동이 한국교회 성장에 기여한 면은 기도원이 교인들로 하여금 성경을 배우며, 마음껏 소리내어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영성훈련의 한 장(場)을 제공했다는 점이다. 답답한 도시에서, 또 기성교회 안에서는 남의 눈치가 보이는 것도 기도원에서는 얼마든지 영적 스트레스를 풀어놓을 수 있었다. 기도원에서 만난 사람들끼리 신앙을 상담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었다.
반면에 온갖 신비주의와 기복신앙이 기도원으로부터 양산되어 기성교회로 흘러들어 왔다. 설교라는 이름아래 성경이 자의적으로 해석되고 마치 기도원 운영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특별한 열쇠’를 받아 신도들의 제반 문제에 해답을 가진 것인양 ‘예언’과 ‘응답’이 남발됐다. 한국교회 기도원운동이 남긴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기도원운동이 남긴 문제점들
첫째, 대부분의 기도원이 상업적 목적으로 설립되고 세속적으로 운영되었다는 점이다.
대도시 대교회들이 자기네 교회 교인들의 기도처로 설립한 일부 기도원을 제외하고 개인이 운영하는 기도원은 대부분 상업적 목적으로 운영되어 왔다. 순전히 하나님의 ‘축복’만 믿고 운영자금 없이 기도원 건물만 달랑 세워놓다보니 운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고 헌금을 끌어내기 위해 온갖 편법이 동원되었다. 여기에서 비신앙적, 비복음적, 사이비적 근성이 개입된 것이다.
둘째, 계시를 빙자해 성경을 왜곡하고 지나친 신비주의와 개인의 체험을 ‘간증’이란 이름으로 남발했다.
이로 인해 복음이 심각히 변질되었다. 자신의 신비체험을 정당화 하기 위해 성경 구절을 찾아 합리화 하며 왜곡 해석하기도 해, 기도원 주변에서 끊임없이 이단 시비가 생겨났다. 자칫 영으로 시작하여 육으로 마치는 격이다.
셋째, ‘값싼 은혜’ 즉 샤마니즘적 기복신앙이 판을 쳐 왔다는 점이다.
기도원에서 강조되는 메시지는 구약의 성전예배와 제사장적 축복이 주를 이루었다. 솔로몬의 일천번제와 성막제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으로 대체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대제사장으로서 ‘축복’의 상징일 뿐, 십자가에서 단번에 희생제사를 드린 구원의 주님은 뒷전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단번에 자신의 몸을 드림으로써 율법이 완성되고 성전제사가 폐지되어 제사장적 축복이 더이상 필요없게 되었다는 사실은 외면되었다.
넷째, 예언기도제단으로 운영되는 도심기도원의 문제이다
도심에서 빌딩 등에 교회간판과 함께 운영되는 기도원은 거의 모두가 ‘가정제단’이라 불리우는 ‘예언기도제단’이다. 일상에서 영적 육적 문제로 시달리는 교인들에게 기도의 ‘응답’을 준다는 예언기도제단은 보편적 교회도 아니고, 도시인들이 언제나 찾아와 기도할 수 있는 기도공간도 아니다. 매일 오전 집회를 중심으로 하는 완벽한 샤마니즘적 기복집단이다. 여기에는 ‘헌금’이라는 이름의 ‘복채’가 없이는 어떠한 예언도, 응답도 없다. 복채와 문제해결을 맞바꾸는 곳이 예언기도제단이다.

기도원운동의 새로운 조명 필요해
전국에 기도원 매매 광고가 넘친다. 대부분의 기도원이 운영란에 봉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다시 기도운동을 일으키고자 한다면, 이제 교인들이 언제나 마음놓고 찾아가 기도할 수 있는 순수 기도원을 회복해야 한다. 그러려면 교단 차원 또는 지역의 대교회 차원의 기도원을 설립하여 지역교회(초교파)에 내어 놓아야 한다. 그 기도원의 운영은 기도하기 위해 찾아오는 래방 교인들의 헌금에 의존하지 말고 설립교회나 교단의 예산으로 운영되는 기도원이 되어야 한다.

한국교회 기도원운동 세계교회에 접목돼야
세계교회 역사에서 일찍이 찾아볼 수 없었던 한국교회의 기도원운동이 이젠 한국뿐 아니라, 한국 기독교인이 나가 있는 세계 모든 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기도원운동이 세계교회의 부흥에 기여할 수 있도록 기도원운동을 새롭게 조명할 필요가 있다.
해외에서 전개되는 기도원에는 한국인뿐 아니라, 현지 기독교인들도 참여할 수 있는 패러다임으로 바뀌어야 하고, 기복주의를 철저히 경계하는 프로그램이 필요한 것이다.
<강춘오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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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원운동, 한국교회 부흥에 기여했지만 폐해도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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