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설교자의 사회적 종교적 경험을 늘어놓는 것은 설교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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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종류의 말씀
기독교는 세 가지 종류의 ‘말씀’이 있다. 첫째는 기록된 말씀으로써 ‘성경’이고, 둘째는 보이는 말씀으로써 ‘성례전’이 있으며, 셋째는 들리는 말씀으로써 ‘설교’가 있다. 그래서 기독교는 설교를 종교강화나 성경강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당연히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즉 말씀은 곧 계시인 것이다. 기록된 말씀은 율법과 예언으로서 계시이고, 보이는 말씀은 성육신으로 우리 가운데 오신 특별계시이며, 들리는 말씀은 오늘 우리 삶속에서 선포되는 계시이다. 이 셋이 균형을 이룰 때, 건강한 기독교가 구현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원의 메시지인 설교를 인간이 세속적 유익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두말 할 필요 없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처럼 성경구절 몇 절 읽어놓고 기복(祈福)을 부추기는 설교는 구원의 메시지를 물화(物化)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결국 물신숭배(物神崇拜)이다.
흔히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이 있다. 가장 영적인 것이어야 할 종교가 가장 세속적인 것과 만나는 것이 기복이다. 기복은 인간의 세속적인 욕망을 충죽시키기 위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자식 낳기 위해 빌고, 출세하기 위해 빌고, 병 낫기 위해 빌고, 돈 잘 벌기 위해 빌고... 소시민들은 세상살이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신에게 빈다. 따라서 인간 삶의 세속적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모든 종교는 기복주의(祈福主義)이다.
그러다보니 예수 그리도의 복음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이렇게 자신의 욕망을 위해 비는 것이 곧 기도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것도 기도임에는 틀림 없다. 기도는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처럼 기복주의적 종교성을 가진 사람들은 언제나 그 기도가 현세적이고 이기적이 된다는 점이다.
복음서가 말하는 기도는 이 세상살이의 세속적 삶에 필요한 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요구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를 향한 구원(久遠)의 이상에 있는 것이다. 이는 마태복음 5장의 산상보훈만 봐도 알 수 있다. 산상보훈은 이렇게 말한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 이런 자들은 “기뻐하고 즐거워 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장).
그런데 설교가 이같은 예수님의 가르침은 외면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현세적 ‘축복’만 받으려는 이기적 욕심만 부추긴다면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되겠는가?
 
한국교회 강단에서 설교가 회복되어야 한다
우리는 흔히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 구원의 종교라고 말한다. 사랑과 구원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이다. 그런데 작금 한국교회의 설교는 사랑과 구원보다 ‘축복’에 더 많은 강조점을 두고 있다. 목회자는 우리사회의 다른 기복주의 종교와 마찬가지로 교인들에게 축복을 팔고, 교인들은 이기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기복을 한다. 기복이 심화되면 이웃에 대한 경쟁심만 늘어날뿐 사랑과 구원은 멀어진다. 그런데도 한국교회의 설교는 대체로 구약의 제사장적 축복에 맞추어져 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유일하게 한 군데 기복적인 의미가 담긴 발언을 한 일이 있다. 그것은 “마태복음 10장에서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해 받고, 내세에서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다”(29, 30)고 한 말씀이다. 누가복음은 이를 ‘하나님 나라’로 강조하고 있다(눅 18:29). 예수님의 복음에는 결코 오늘날 한국교회 강단에서  쏟아지는 ‘축복’같은 기복을 말한 예는 어디에도 없었다.
교회가 아무리 열심히 가르치고, 선교하고, 봉사한다 해도 말씀이 없으면 모두가 헛것이다. 이 말씀은 예배를 통해 선포된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예배의 성공이다. 설교자가 말씀이란 이름으로 자신의 사회적 종교적 경험을 늘어놓는 것은 설교가 아니다. 설교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보편적 역사적 기독교 공동체의 경험이 오늘날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여야 한다.
한국교회는 세계에서 제일 많은 성경이 보급된 교회이다. 교인들의 집집마다 몇 권씩의 성경이 쌓여 있다. 교인들도 그 말씀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지를 깨닫고자 갈급하다. 그래서 성경을 가르친다는 곳에는 어디나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러나 목회자의 설교는 천편일률적이다. 여기에서 만족하지 못하는 교인들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성경을 잘 가르친다는 신흥집단들을 찾는다. 그런데 그들 신흥집단들의 설교나 성경강해는 대체로 그 집단의 섹트화에 맞추어져 있다. 그래서 이단시비가 생긴다.
왜 한국교회는 예배를 반드시 한 시간에 끝내야 하는가. 설교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영감이 임하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말씀을 전하는 풍토도 조성되어야 한다. 그것이 영감있는 설교이다.

설교에 모든 답이 있다
우주도, 생명도 ‘말씀’으로 태어났다. 이 말씀이 구약에서는 ‘지혜’로 나타나지만, 신약에서는 ‘그리스도’로 나타났다. 설교만이 사람을 회개시킬 수 있고, 변화시킬 수 있다. 한국교회는 일제하 박해 아래서도 목회자의 설교가 진지했다. 또 해방 후 60-70년대까지도 그랬다. 그러나 기독교가 가장 왕성한 성장을 이룰 때인 80년대 들어서면서 설교가 변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사경회가 부흥회로 바뀌었다가 다시 심령부흥회로 바뀐 시기였는데, 이 때부터 소위 ‘딴따라’ 설교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설교자의 깊은 기도에서 우러나는 영성적 설교는 약화되고, 만담조의 온갖 세속적 성공담(?)이 하나님의 말씀이란 이름으로 강단을 장식해 갔다. 그리하여 80년대 이후 한국교회의 설교는 기복주의화 되고, 세속주의화 되어 교인들의 귀만 즐겁게 하는 테크닉만 늘어간 것이다.
설교는 인류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과 예언, 그 예언의 성취와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 그리고 그의 부활과 다시오심에 맞추어져야 한다. 이런 내용을 담지 않은 기독교적 윤리나 도덕적 가르침은 종교강화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의 개혁은 말씀으로 회복된 설교에서 찾아야 한다.
<강춘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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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한국교회 무엇이 문제인가? 3 -구원의 메시지를 세속적 물화物化하는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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