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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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안녕하신지요. 벌써 가을이 깊어가네요. 지난 주일저녁에는 익산 장로연합찬양단 90여명이 저희 교회에 오셔서 찬양공연을 하고 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찬양단의 지휘를 하셨던 분이 박영권 장로님이셨습니다. 그 분이 지휘를 참 잘하시고 낯익은 느낌이 들어서 여쭈어 보았더니 고등학교에서 음악선생님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혹시 군산제일고등학교 음악선생님으로 계셨던 000장로님을 아시는지요여쭈었더니 정말 친한 음악선생님이셨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등학교 시절 저에게 음악을 가르쳐주신 선생님이 이번 한 주간 내내 생각이 났습니다. 선생님은 그때에도 교회 장로님이셨죠. 당시 경건하게 신앙생활을 하시던 그 모습을 지금도 기억하며 마음으로 존경하고 있습니다. 훗날 선생님도 소명을 받고 목사님이 되셨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선생님을 한 번도 뵌 적이 없고 연락처도 모릅니다. 그런데 언젠가 선생님이 제 페이스북에 들어오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때 저에게 권면을 하셨죠. 제발 설교 시간에 대중가요를 부르지 말라고요. 선생님의 지적이 백번 천 번 옳으신 말씀이죠. 제가 왜 선생님의 진의를 모르겠습니까? 선생님 말고도 그걸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도 아시겠지요. 제가 아무 때나 대중가요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주로 전도설교를 할 때 부른다는 것을요.

저는 오래전부터 광대적 설교를 해왔습니다. 지금까지의 기존 설교학은 목회자의 고상함과 우아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품격과 본문의 메시지를 드러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설교자만 드러나게 되었고 하나님의 복음 능력이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말씀의 역동적 생명력이 약화되고 성도들의 가슴에서 은혜를 사모하는 열정이 식어지면서 한국교회가 점차 침체기를 맞게 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목회자가 설교를 할 때 단순히 지식이나 정보전달에만 그치는 딜리버리나 아나운서형으로만 전해서는 결코 가슴을 깨우고 감동을 줄 수 없습니다. 아무리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고 울어도 눈물 흘리지 않는 시대가 되었지 않습니까? 저는 일찍이 총신대 신대원 교수이신 심상법 교수님으로부터 저의 설교가 판소리 설교라는 평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의 은사이신 서철원 박사님도 소목사의 설교는 콘텐츠 면에서는 철저한 개혁신학을 지키면서도 전달방법이 현대적이고 소통과 감동을 중시한 설교라고 호평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또한 저희 교회에 몇 명의 설교학교수님과 실천신학교수님이 나오시는데 암묵적 동의를 해 주고 계십니다. 그러던 중에 저는 남아공 스텔렌보쉬대학 요한 실리에 교수가 쓴 하나님의 어릿광대라는 책을 통해서 광대설교론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책을 읽고 나서 제가 광대 설교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죠. 그렇다고 옛날 부흥사식이나 시골 장터형으로 하지 않고 인문학과 시학의 깊이가 있는 예술적 극장형으로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설교자가 자칫 광대설교를 잘못 이해하면 설교가 경박스럽게 느껴지고 강단의 권위가 실추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청중들에게 엔터테인먼트나 개그콘서트 같은 설교를 할 수 있는 위험이 있을 수 있는 거지요. 이런 설교학적 맥락에서 제가 가끔 전도설교 중에, 또 청중과 소통하고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대중가요의 한 부분을 부르거나 가사를 개사하여 노래를 하기도 합니다. 제가 비판을 받으면서까지도 그렇게 하는 것은 어떻게든지 성경 본문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뜻과 애틋한 마음,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아픔을 청중에게 실감나게 전달하기 위한 것입니다. 어떻게든지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애틋한 사랑과 마음을 제 가슴에 품고 하늘 광대가 되어 노래하고 몸부림을 치는 것이죠. 그래서 본문이 웃기면 웃기고, 슬프면 슬프고, 노래하면 노래하고, 춤을 추면 춤을 추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당시의 일상생활이나 문화와 가장 밀접한 언어와 비유들을 통하여 말씀을 전하시지 않았습니까?

과거의 설교학은 성과 속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고 어떻게 성경과 복음을 바르게 전달할 것인가에 주력했다면, 요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잘 전하면서도 다양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효과적으로 전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선생님 세대의 정서와 기존의식으로는 당연히 비판하시고 꾸중하셔야 된다고 봅니다. 저도 신학에 있어서는 당연히 보수정통신학이고 개혁신학을 지킵니다. 그러나 신학적 보수와 문화적 보수는 구별해야한다고 봅니다. 문화적 보수만을 지키려는 분들은 청중들로 하여금 닭병이 들게 하는 모습을 많이 보았습니다. 존경하는 선생님, 저는 여전히 선생님을 흠모하고 사랑합니다. 바람이 차갑습니다. 언제 기회가 되면 뵙고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늘 건강하시기를 바라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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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선생님, 안녕하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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