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5(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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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호보암이 나라가 견고하고 세력이 강하매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니 온 이스라엘이 본받은지라.”(대하12:1).

며칠 전 저는 어떤 목사님 댁에 방문하였습니다. 마침 그 목사님은 아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부자간에 한 참 대화를 나누는가 싶더니 갑자기 아들이 아버지, 그동안 저를 잘 참아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저는 둘의 눈을 피하여 어디론가 가더니 펑펑 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 나를 오래도록 참아주셨다는 생각이 밀려왔기 때문입니다. 꿈이었습니다.

 

왜 이런 꿈을 꾸었나 생각해보았습니다. ‘주사야몽이라고 전날 저는 해와달이라는 소책자에서 이도형 교역자가 쓴 덮어주신 은혜라는 글 속에 삽입되었던 박찬석교수(전 경북대 총장)의 아버지에 대한 가슴 뭉클한 회고담에 전염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전염병이 꿈에 나타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코로나19가 다소 멈추었나 싶어 사회적 거리두기에서 생활 속 거리두기로 전환한지 4일 만에 이태원 클럽에서 불씨가 일어나 여러 곳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국제화 시대라 어느 한 지역, 어느 한 나라가 안전하다 하여 안전한 것은 아닙니다. 백신이 개발되어 치료되거나, 지구 모든 지역에서 사라질 때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다 사라졌나싶어도 다시 일어나는 전염병, 몸의 전염병이 그러할진대 영적인 전염병은 더욱더 그러할 것입니다. 몸은 대면이나, 접촉이 필요하지만, 영적인 문제는 생각만으로 전염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지도자 위치에 있는 사람은 전염성이 더욱 강합니다. 그들은 슈퍼인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르호보암이 나라가 견고해지고 세력이 강해지자 하나님의 율법을 버렸다고 했습니다. 약하면 붙들려고 하는데 강해지니 스스로 선 줄 알고 버린 것입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왕도 하는데 우린들 어때?” 하면서 르호보암의 행동들을 본받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 후에 대부분의 제자들에게 이미 두 번이나 나타내 주셨습니다. 그러나 약속하셨던(14:28, 16:7) 갈릴리에서는 아직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은 그곳에서 주님을 기다리다가 지쳤는지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베드로의 이 말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나타내 주시지 않으면 어떡하지? 우린 무엇을 먹고살지? 다시 어부로 돌아가자.’ 영향력 있는 베드로가 이런 말을 하자 다른 제자들도 덩달아 나도” “나도” “나도하며 버렸던 것을 붙잡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의 근심이 그대로 제자들에게 전염된 것입니다.

 

전염을 한문 그대로 풀이하면 전달하고 물들이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염에는 이런 좋지 않은 전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종려주일에 두 제자가 예수님이 지시하신 나귀를 끌고 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옷을 벗어 나귀 위에 올려놓습니다. 그러자 두 제자의 행동을 본 많은 유대인들도 자신들의 옷을 벗어 예수님이 지나가실 길에 펼쳐 놓았습니다. 이에 못 미치는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로 대신하였습니다(21:7-8).

 

두 제자가 사람들에게 전염시킨 것입니다.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을 높이는 전염을 시킨 것입니다. 이처럼 전염은 우한코로나처럼 부정적인 전염만 아니라 제자들이 본을 보인 것처럼 좋은 전염도 있습니다.

 

성경은 너희 열심이 퍽 많은 사람들을 분발하게 하였느니라.”(고후9:2b)라고 말합니다. 신자들의 태도가 많은 사람을 분발하게 하기도 하고 나태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나는 어떤 전염을 몰고 올까요? 기쁨의 전염, 사랑의 전염, 감사의 전염일까요? 아니면 가룟 유다처럼 불평의 전염일까요?

 

형제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려면 십자가 지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옛사람이 다시 활동할 때에는 썩은 냄새밖에 피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나타날 때 비로소 생명과 기쁨의 전달자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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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전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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