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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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51:12).

 

제가 자주 가는 산 길 우측에는 신축 된 고급 주택들이 들어섰는데, 거기에는 제가 볼 때마다 촛불을 켜 놓은 집이 있습니다. 그곳을 지날 때면 향을 태운 냄새가 코를 자극합니다. 뒷길이어서 그 집 간판을 확인해보지 않았지만 아마도 무당이나 박수집이 아닐까 생각 됩니다. 애써 외면하고 지나가지만 냄새는 어찌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 집에서 우상을 빨리 치워주시든지, 아니면 저 사람이 다른 곳으로 이사 가게 해주세요.”

 

이렇게 기도하고 생각해보니 저의 기도가 옳지 않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순전히 저를 중심으로 세상을 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예수님의 입장으로 생각해보기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는 저 사람들도 사랑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들이 회개하고 돌이켜서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오기를 원하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저 분들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저들이 몰라서 저런 가증한 일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을 감동시키셔서 예수님을 믿고 돌아서게 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4:1 이하에는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모세가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계속 미적거리며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쥐고 있는 지팡이를 땅에 던지라고 하십니다. 모세가 땅에 던지자 뱀이 됩니다. 뱀을 보고 모세가 피하자 하나님께서 이제는 뱀을 손으로 잡으라고 하십니다. 모세가 뱀을 손으로 잡자 다시 지팡이가 됩니다.

 

그것은 모세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을 이스라엘과 애굽 사람들에게 보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한 편 우리는 그 이적을 통하여 하나님의 깊은 뜻을 찾을 수 있습니다. 지팡이를 손에서 던지자 뱀이 된 것처럼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버리면 뱀과 같이 됩니다. 사악해지고 우상 숭배자가 되고 배도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이 그런 예라 할 것입니다. 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뱀을 잡으니 뱀이 지팡이가 된 것처럼 아무리 사악하고 교활한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게 되면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 지팡이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붙잡힘 받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모세는 그가 하나님께 올린 기도문에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90:10)라고 아뢰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그가 말한 강건한 자도 죽는 나이(80) 때부터 무려 40년이나 이스라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 그는 노예들을 데리고 애굽에서 나왔고,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동고동락을 합니다. 그러다가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 세상을 떠납니다.

 

모세가 그렇게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하나님께서 그를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모압 여인 룻이 과부였음에도 불구하고, 남편과 두 아들과 전 재산을 잃은 나오미를 붙좇을 수 있었던 것은 시어머니 나오미가 섬기던 하나님께 붙잡혔기 때문입니다(1:14). 바울 역시 달려간 것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되었기 때문입니다(3:11). 주님은 어떻게 그들을 붙잡았습니까?

 

나 여호와가 옛적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기를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하였노라.”(31:3). 주님께서는 무궁한 사랑으로 신앙인들을 붙잡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는 사람은 사랑에 강권함을 받습니다(고후5:14). 강권함을 받는다는 것은 끌린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붙잡습니까? 42:1이하는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라고 말합니다. 바로 하나님은 종을 붙듭니다. 종은 자신의 주권이 없는 사람입니다. 순전히 주인 한 분의 뜻을 따릅니다. 주님이 오라하면 오고 주인이 가라 하면 가고 주인이 하라 하면 하고 하지 말라고 하면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종에게 성령을 주셔서 자신의 뜻을 행하게 하십니다.

 

주님의 종은 꼭 말씀 전하는 사람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인 모두가 주님의 피 값에 팔린 종입니다(고전6:20).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님의 종으로서 주님의 것으로 살기보다는 죄의 종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죄의 종은 사욕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6:12). 사욕이란 자신의 뜻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내 마음대로 살아간다면 그것은 죄의 종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남의 종을 쓰시지 않습니다. 죄의 종을 쓰지 않습니다. 자신의 종을 쓰십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쓰임을 받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자신의 마음대로 살아가는데서 벗어나야 합니다.

 

신앙인들이 무슨 일을 만나면 자신에게 유익이 된다 해서 무조건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지 싫어하시는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지 멀리하는지 정도는 분별해야 합니다. 이러한 분별이 없이 살아간다면 틀림없이 죄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죄를 주관하는 자는 마귀입니다. 마귀는 결코 복을 주지 못합니다.

 

본문말씀처럼 하나님께 잡힌바 된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자원하는 심령이 생깁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자원하는 심령이란 하나님의 소원이 나의 소원처럼 느껴지는 마음입니다(2:13). 하나님 한 분의 뜻만 바라는 주님의 종이 되어 주님의 사랑에 붙잡힌바 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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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하나님이 붙드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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