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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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13:13-14).

 

발은 가장 냄새나는 부분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팔레스타인 지역은 사막이 많았습니다. 지금이야 그곳도 자기 집에서 목욕할 수 있겠지만 당시에는 물이 있는 곳이 흔하지 않아 씻기 위해서는 우물을 찾아가거나 냇가나 강을 찾아야 했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샌들을 주로 신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목욕을 해도 오가며 발이 더럽혀지기 마련이었습니다.

 

그래서 귀빈이 오면 씻을 물을 떠서 발을 씻겨주었습니다. 그것이 사랑과 환영의 표시였습니다. 예수님을 초대하였던 바리새인 시몬은 그 동네 죄인으로 낙인 찍혔던 여인이 예수님 발치에 앉아서 눈물로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씻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에 대하여 혐의가 생겼습니다. ‘이 분이 정말 선지자였다면 저 여인이 저렇게 하도록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자 모든 생각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것이 있도다.” “주여 말씀하소서!” “채주에게 빚진 자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500데나리온의 빚을 졌고 또 한 사람은 100데나리온의 빚을 졌는데 둘이 갚을 것이 없어 다 탕감하여 주었다.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그러자 시몬이 대답하였다.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 받은 사람입니다.” “네 말이 옳도다. 이 여인을 보느냐?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지만 이 여인은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씻었으며.......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랑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7:36-50절 내용).

 

비록 바리새인 시몬은 예수님을 초대하였지만 그를 접대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발을 씻겨주기는커녕 발 씻을 물조차 주지 않은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초대한 이유는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짐작이 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신을 초대하는 사람에게는 응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고(3:17), 사람들과 함께 사시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1:23). 이처럼 발을 씻겨준다는 것은 당신이 우리 집에 오심을 환영합니다.”의 뜻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으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서로 발을 씻겨주는 것이 옳다고 하였으니 우리 역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발은 육신을 의미합니다. “여수룬이 살찌매 발로 찾도다.”(32:15). 여기서 발로 찾다는 것은 육신의 거역성이 나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신앙인들이 형제의 발을 씻겨준다면 어떻게 씻겨주어야 할까요? 발을 씻기는데 꼭 필요한 것은 물입니다. 물이 아니고서 깨끗하게 씻겨줄 그 어떤 것도 없습니다.

 

형제들의 발, 육신의 죄악성을 씻겨주려면 물로 상징되는 성령으로 씻겨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흠을 들춰내고 지적하여 씻겨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에 가뭄이 심할 때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사르밧에 사는 과부의 집으로 보냈습니다(왕상17:8-24). 과부가 그를 공궤하도록 하였습니다. 엘리야가 오기 전 과부의 집에는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이 조금 남았었는데 엘리야가 머무는 동안 통 안에 가루와 병 안에 기름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 과부가 엘리야를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왕상17:18). 엘리야는 이 과부의 죄를 한 마디도 지적하지 않았지만 이 과부는 엘리야를 보고 죄가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아들이 죽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을 한 여인은 물론 죄를 회개하였을 것입니다. 이 여인은 엘리야를 통하여 성령을 만진 것입니다. 그가 회개하고 씻을 성령의 물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말씀하셨습니다(16:7). 제자들은 갈릴리에 갔습니다. 그런데 여러 날이 지나도 예수님이 나타나시지 않자 제자들 가운데 지도자 격인 베드로가 말하였습니다. “나는 고기 잡으러 가노라.” 그러자 그동안 꾹 누르고 있었던 다른 제자들도 나도” “나도하면서 동참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날 밤에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날이 새어갈 무렵 모르는 분이 멀리 서서 물었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그러자 제자들이 대답하였습니다. “없습니다.” 그러자 그분이 말하였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21:6). 그러자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었습니다.

 

요한이 외쳤습니다. “주님이시다.” 그러자 베드로는 겉옷을 걸치고 90여 미터 되는 곳으로 헤엄쳐 갔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배를 타고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곳에서 숯불을 피워놓고 고기를 굽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무엇을 느꼈을까요? “이런 생선이 어디에서 나왔지?” “예수님께서 이미 생선과 떡과 숯불을 가지고 계셨구나” “예수님만 따르면 의식주에 걱정이 없는데 우리가 그사이에 참지 못하고 자발없이 나갔구나.” 생각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마디 말씀이 없으셨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그 행위에 스스로 회개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제이며 발을 씻겨주는 것입니다.

 

며칠 전 안산에 올라갔습니다. 그곳에 한 어르신을 만났는데 그 분은 저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곳에 화초를 심었는데 너무 가물어 물을 떠다가 주었어. 그런데 그것도 못 견디고 말라 죽고 말았어.”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분의 말을 듣고 저는 아무도 몰라주어도 이렇게 좋은 일을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둘레 길을 걷다가 개똥을 발견했습니다. 나무 색과 비슷한 색이어서 밟기 딱 좋은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나무로 젓가락을 만들어서 사람이 밟지 않을 곳으로 버렸습니다. 그 어르신을 만나지 않았어도 하였겠지만 더욱 선한 행동을 하고 싶은 마음이 그 어르신을 통하여 일어난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이처럼 서로 발을 씻기라는 것은 우리를 통하여 형제가 성령을 만지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산에 아름다운 화초를 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산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남겨놓은 꽁초를 보면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발을 씻기기는커녕 오히려 더러움만 묻게 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인들은 우리 자신을 통하여 선한 영향력을 상대에게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서로 발을 씻겨주는 행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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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독연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서로 발을 씻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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