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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과 요나단 그리고 다윗
- ‘성서’, 특히 ‘구약성서’를 역사서나 이야기책으로 읽노라면 뜻밖의 재미와 교훈을 얻게 되는 수가 없지 않다. 처음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 받은 사울과, 마땅히 뒤를 이어야할 아들 요나단, 그런데 정작 왕위를 이어 받은 것은 다윗이라는, 그야말로 “극적”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손에 땀을 쥐게 할 만하다. 신앙적인 교훈은 별개로 하더라도, 충분히 음미해 볼 만한 재미있는 줄거리가 아닌가. 다만 ‘성서’는 고대문서인지라, 독자들이 쉽게 터득할 수 있도록 정리를 해주지 않고 있어서, 더러 해설자들의 참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될 지도 모른다. 사울이 지휘하는 이스라엘 군이 블레셋 군을 추격하고 있을 때의 일. 사울은 ‘거룩한 전쟁’이니만큼 적군을 완전히 무찌를 때까지는 고삐를 풀지 말라며 병사들에게 “아무 것도 먹지 말라”는 군령을 내린다. 마침 군인들이 벌집에서 꿀이 흐르고 있는 것을 본다. 그러나 사울의 명령이 두려워 손가락으로 꿀을 찍어 입에 대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아들 요나단은, 부왕 사울이 군인들에게 맹세를 시키면서 까지 금식을 명했던 현장에 있지 않았기로, 막대기 끝으로 꿀을 찍어 먹었다. 눈이 번쩍 뜨이고 지친 몸에 원기가 솟아나는 것을 느낀다. 그때 한 군인이 사울의 지시가 있었음을 일러주자 요나단은 탄식한다. 지친 병사들이 적군에게서 탈취한 양식을 먹어 기운을 차렸다면 더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을 것이 아닌가 하고. ‘거룩한 전쟁’을 위해서, 딴은 잘한답시고 내 놓은 전략이 판단미숙의 결과였음을 요나단은 눈치 챈 것이다. “아버지께서 이 나라를 어렵게 만드셨구나!”(삼상 14:29)한편 사울의 지휘 하에 있던 군인들이 허기를 달래자고 약탈한 양과 소를 마구 땅바닥에서 잡아 피 째로 그 고기를 먹었다. 소식을 들은 사울이 큰 돌을 굴려오게 해서 그 돌 위에서 짐승을 잡게 했다. 하나님에게 범죄 하지 않기 위한 배려였다.그런데도 그날 밤 블레셋 군을 추격하자는 사울의 제안을 제사장이 거부한다. 하나님의 응답이 없다면서. 모범생의 답안 같은 사울의 작전이 제대로 먹혀들지 않고 있었다. 이야기꾼은 하나님이 사울의 길을 막고 있다고 본다. 사울은 하나님의 무응답은 곧 ‘이 허물’ 때문이라 여겼다. 우림과 둠밈으로 제비뽑기를 한 결과는 요나단이 범법자임이 드러난다.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서는 범법자가 아들이라 할지라도 처형하겠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백성은 요나단의 영웅적인 전투로 승리를 거두었으니 그를 죽일 수는 없노라 한다. 사울의 어리석은 맹세보다는 요나단의 진정한 용기에 무게를 둔 것이다. 사울은 백성들에게서 한 발 멀어지게 된다. 이야기꾼은, 사무엘이 공식적으로 사울의 왕권지지를 거두어들이기 훨씬 이전부터, 그가 제대로 된 왕재가 못 된다는 운을 띠운다. 어떤 해설자는 “명색이 통치자라는 자가, 자신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서, 자식을 희생시키려드는 그런 사람이 어떻게 제대로 왕 노릇을 할 수 있을 것인가”하고 말한다. 또 다른 해설자는 “요나단의 ‘아마도’하는 신앙이 사울의 밝지 않는 확실성에 대한 고집스러운 믿음 보다 더 신실하다”하고 해설한다.(삼상14:6) 그런 와중에서도 요나단은 “주께서 도와주신다면”하고, 하나님을 신뢰했다는 사실을 두고 한 평가이다.이야기꾼은 요나단이 사울을 대신해서 새 지도자가 될 것이라는 암시를 보여준다. 그러나 독자들은 곧 그 지도자가 다윗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16장) 읽어 가노라면 서로 상반되는 목소리가 없지 않아 읽는 이를 당황케 하는가 하면, 헷갈리는 듯해서 결론을 얻기 어려워질 경우와도 만나게 된다. 익숙하지 못한 상황과 부닥치면, 선입관이라 했던가, 기왕에 가지고 있던 생각에서 한 발 물러나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볼 필요도 생겨날 것이다. <사무엘서> 전반부에서는 사울을 비추었던 기대감이 실망으로 기울어지면서 그 기대가 요나단으로 옮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가 하고 읽어가노라면 어느덧 조명이 다윗으로 옮겨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성서 이야기는 자주 독자에게 더 깊고 넓은 시야를 요구할 때가 있다. 다시 말해본다면, <사사기>에서 부터 발원되는 “참 지도자의 모습”에 대한 비전을 이야기로 들려주고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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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과 요나단 그리고 다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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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티쉘토’와 하품
- 인터넷을 뒤지다가 <일본어로 번역할 수 없는 세계의 말들>이란 책을 만나 코티쉘토(COTISUELTO)란 단어를 알게 되었다. “카리브 스페인어인데, 셔츠 아래 깃을 절대로 바지 안으로 집어넣지 않으려는 사나이를 이르는 말”이라 했다. 얼른 ”칠칠치 못한 녀석“이란 이미지가 떠올랐지만 정작 삶이나 옷차림이 리렉스 한 사람이라는 뉘앙스를 지닌 단어라지 않는가. 언제부턴가 이 늙은이도 트레이닝 바지에 아무렇게나 셔츠를 걸치고 나서는 노릇이 잦아지게 되었다. 딴은 코티쉘토로 봐 주겠거니 하는 배짱이 생겨난 것일까. 어느 해 여름 냉면집을 나서다 후배 목사와 마주쳤다. “시원하게 입으셨습니다.”하는 인사말이 약간은 고깝게 들린 것은 아마도 “들켰구나!”하는 자책 때문이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은 깔끔한 정장차림이었는데, 나는 반바지에 셔츠 깃을 펄렁이며 샌들을 끌고 있었으니. 발길이 닿는 대로 주일예배에 참석하다보면 예정에 없는 축도 요청을 받는 경우가 있어, 서로의 번거로움을 덜자고 의식적으로 정장하지 않노라하는 나름의 핑계가 더러는 먹히고 있다고 자위해오던 터에…….젊었을 때 가까이 하지 않았던 알랭의 <행복론>을 요즘에야 자주 들쳐보게 된다. 조용하고 격조 있는 그러나 격식에 얽매이지 않으려 애쓴 흔적이 묻어나고 있는 문체들이 늙은이를 리렉스하게 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93꼭지 중에서 <하품 솜씨>를 골라본다. “벽난로 곁에서 개가 하품을 한다면, 그것은 이것저것 생각하는 일은 내일로 미루라는 사냥꾼에 대한 경고가 된다. 품위에 신경을 쓴다거나 주변을 개의치 않고 하품을 하는 이 생명력은 보기에도 아름답다. 덩달아 흉내를 내고 싶어진다. 함께 자리하고 있는 모두가 기지개를 펴고 하품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래서 잠으로 이끄는 전주곡이 되어준다. 하품은 피로의 징조가 아니라, 내장 깊숙이 공기를 끌어들여, 긴장과 논쟁으로 파고드는 정신과의 이별을 고하자는 몸짓이다. 이 정력적인 전환으로 말미암아 신체라는 자연이 삶에 만족하게 되고, 생각이라는 일에 지쳐 있음을 드러낸다.알랭의 이야기가 생활인들로 하여금 바깥세계와 담을 쌓게 하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한껏 마음을 풀어헤치고 바깥세계를 들락거리면서 유연하게 바깥세계와 관계를 이루어가려하는 그런 몸짓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닐까. 다음 문장을 보자. “하품은 긴장이나 집중에 대한 생명의 복수이고, 건강의 회복이다. 하품이 전염된다는 것은, 하품이 진지함을 포기한다는 것이고, 한껏 부풀려서 느긋함을 보여주는 몸짓이기도 하다. 줄서기는 포기해도 좋다는 신호이니 모두들 그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마음이 편해지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고 보면, 하품과 더불어 진지한 생각은 사라지게 마련이 아닌가” <하품 솜씨>라는 짧은 글이 하품을 하는데도 정해진 기법이나 요령이 있어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품이란, 그 상황이 지니고 있는 공기와 심신이 처한 사정을 따라, 거의 자연적으로 연출되는 현상임을 보여주는 그대로 인정해보잔 말이 아닐까. 전철에서 맞은편에 앉은 젊은이가 하품을 하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너무나 자주 보게 되는 광경이어서 더러는 당황스러울 때가 없지 않지만, 이제부터는 나도 크게 입을 벌려 맞음 하품을 해 주리라 다짐해본다.최근 일본 소도시의 한 중학교 교사가 재미있는 실험을 했다. 체육복 상의 아래 깃을 바지 안으로 에 접어 넣은 그룹과 그렇지 않은 그룹이 함께 운동을 하게 한 후, 체온을 재어 보았더니, 바지 안에 상의 아래 깃을 집어넣지 않은 다시 말해서 코티쉘토 그룹의 체온이 다른 그룹의 체온보다 자그마치 4도나 더 높게 나타났다고 보고했단다. 그러고 보니 1940년대 후반 서울시내의 남자 중고등학교의 여름 교복이 코티쉘토를 지지하는 편과 반대하는 편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양편은 각기 다른 교육적 주장을 내걸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된다. 불행하게도 나는 반 코티쉘토파를 대표하는 쪽에 있었다. 이 늙은이도 이제는 당당한 코티쉘토가 되어 남의 하품에 전염되기 전에 먼저 나의 하품 솜씨를 한껏 뽐내보리라 다짐해본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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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티쉘토’와 하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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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모어를 생각한다
- 토머스 모어(Thomas More,1478-1535)하면 <유토피아>의 작가이고 에라스무스의 친구로 기억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영화 <천일의 앤>에 등장하는 조역으로 기억하는 이도 있을 터. 사무엘 존슨 (Samuel Johnson,1709-1784)은 그를 일러 “지금까지 영국이 낳은 가장 고결한 인물”이라 했다는데. 법관의 아들로 태어난 모어는 아버지의 소원을 따라 자신도 법관이 된다. 명철한 두뇌와 인간적 매력이 두루 요직을 거치게 한다. 1529년 대법관에 임명되는데, 귀족도 성직자도 아닌 평민으로서는 최초의 일. 에라스무스의 친구답게 <유토피아> 와 <리처드 3세의 생애>를 저술하기도. 1504년, 국회의원으로 선출된 모어를 두고, 에라스무스가 말했다. “그의 두뇌가 세속적 야심에 좌우되지 않으면 좋을 터인데” 모어는 국왕 헨리 8세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아홉 살 난 국왕이 모어를 만나자 곧 친구로 사귄 것이다. 자주 케더린 왕비와 세 사람이 식탁을 둘러앉는 가하면, 왕이 몸소 첼시에 있는 모어의 집에 들러서는 밤을 함께 보내기도 했다. 들판을 거닐며 서로 찬사를 주고받는 모습은 영화들에서도 볼 수 있는 장면. 그러니까 1529년 왕이 그를 대법관에 임명했을 때에는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지 않는가. 바른 소리꾼 에라스무스 조차 “나는 마음으로 영국에 축복의 말을 보낸다. 그 보다 더 덕이 있는 재판관이 임명된 적은 없었을 터니까”했다나. 그럼에도 그가 대법관이 된 후에, 자그마치 여덟 사람이 이단자로 처형되었다는 사실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사가들의 말을 따르면 전임자 시절에는 단 한 사람도 이단자로 처형되는 일은 없었다지 않는가. 오늘의 의식으로 판단할 수만은 없는 사정이 있다면서 변명하는 이들이 없지 않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후련해지는 것은 아니다. 모어라 할지라도 완벽한 인간일 수는 없었으리라는 동정론에 멈출 수밖에.헨리 8세가 왕비와 이혼하고 앤 불린과 결혼하겠다고 의회에 떼를 쓸 때, 모어는 왕위계승권이 국왕이 바라는 대로 받아들여지도록 의회가 법을 개정하는 데는 찬성하지만, 국왕이 로마교황의 최고 권위를 침해할 수 있다는 주장은 물리쳤다. 오늘날이라면 논의의 대상도 되지 못할 치졸한 의안이지만 모어에 겐 중요한 양심의 문제였다. 아마도 화가 난 불린이 국왕을 꼬드겼을 터이지만, 아무튼 1532년에 헨리 8세는 모어를 대법관 직에서 물러나게 했고, 1534년에는 런던탑에 감금, 이듬해에 처형했다. 다들 말하고 있는 모어의 고결한 인격은 그의 생애 마지막 두 해, 특히 최후의 순간에서야 온전하게 영근다. 인간은 스스로 도덕적 결단을 할 수 있고 양심의 명령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모아적인 인간상이 그의 언동에서 배어난 것이리라. 그의 결단은 공리적이거나 정치적이지 않았다. 자신의 결단을 따라 자신의 의지를 통제하지만, 압력에 손상되는 일 없이, 자신과의 조화를 유지하여 온전한 통합을 이룬 것이다.습기 찬 감방은 을씨년스럽고 추웠다. 들락거리는 쥐들이 그를 몸서리치게 했다. 그러나 자신의 결단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라는 충고는 정중하게 그리고 조용하게 거절한다. 서책과 필기구조차 빼앗기고, 아내에게는 종잇조각에다 숯 조각으로 편지를 쓴다. 창문을 닫아걸어 나날을 어둠속에서 보냈다. 그러나 모어는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여 간수들에 대해서도 부드럽게 위트로 대할지언정 증오나 노여움을 쌓는 일은 없었다. 아내와 가족을 불행으로 몰았다는 사실은 문책 받아야할 지도 모르지만. 1535년 7월 6일 처형의 날, 왕은, 귀족의 긍지를 위해, 교수형 대신 참수형을 인정한다. 처형대 계단 앞까지 걸어간 모어가 형리들에게 말한다. “단상까지 만은 무사히 올라가게 안내 해주지 않겠소? 내려 올 때는 혼자 내려 올 터인즉” 달리 유례를 찾을 수 없을 형장에서의 모아. 1935년에는 성인으로 추앙받게 된다. 정치가로서 두드러진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는다. 왜? 색다른 자료를 소개하지도 새로운 해석을 내어 놓지도 못하면서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진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은 바로 이 물음의 답을 찾기 위한 몸부림일 뿐이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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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모어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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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치아노의 ‘회개하는 막달라 마리아’
- “르네상스가 비너스로 상징된다고 한다면, 바로크는 막달라 마리아로 상징 된다”는 말이 있다. 성녀로 추앙받는 막달라 마리아가 바로크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해서 미술과 문학의 주제가 되게 했다는 해석일 터이다. 종교적인 측면으로 본다면, 새롭게 유럽에 등장한 프로테스탄트가 가톨릭이 내세우고 있는 ‘고해’나 ‘성자숭상’을 못 마땅해 하는 자세에 맞서기위해서, 고해의 모범과 상징 ‘막달라 마리아 신앙’을 대대적으로 어필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란 해석이 있다. 유럽교회가 지금까지 목을 매달고 있던 ‘성 유물’로 부터 점차 예술작품 쪽으로 시선을 돌리려했던 시기와도 맞물린다. 그러나 바로크 이탈리아에서 불기 시작한 막달라 붐은 교회가 시도하는 교화를 위한 모범의 역할을 훨씬 넘어선다. <막달라의 집에서의 회식> <그리스도의 십자가형> <부활>과 같은 예수 스토리의 보조 등장인물로서의 막달라 마리아가 아니라, “성녀 막달라 마리아”가 독립적으로 그림의 주제로 등장하게 된다. 구체적으로는 막달라의 자태가 전신상, 반신상, 흉상 등 여러 모양으로 나타나는가 하면, 막달라 마리아 스토리는 설교나 종교서적을 떠나서 시나 희곡의 테마로서도 흔하게 다루어지게 된다. 성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내재하고 있는 “성과 속” “경건과 관능” “정신적인 면과 육체적인 면” “금욕적 신비와 감각적 희열”을 주제로 한 표현들이 이 시대만큼 다채롭게 표면화된 적은 이전에도 후에도 없었다. “서로 모순되는 원리와 대립하는 감정” “둘 혹은 더 이상의 의미”를 아울러 보려는 것이 바로크 문화의 특징이라 본다면, 그런 의도와 현상을 가장 잘 구현할 수 있는 심벌이 성녀 막달라 마리아였다. 바로크시대 이탈리아 문화의 토양은 막달라 마리아가 갖추고 있다고 믿는 성녀성과 창녀성이라는 잠재력을 가장 화려하게 꽃피우게 했다. 베네치아의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 티치아노가 그린 <회개하는 막달라 마리아>야 말로 그런 풍토를 대변해주기에 알맞은 대표적인 작품이라 할 것이다.이 그림을 보는 사람은 고전미술로 우리의 눈에 익숙한 <부끄러워하는 비너스>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르네상스의 꼬리가 꿈틀거리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다시 <회개하는 막달라 마리아>로 눈을 돌려보자. 막달라의 풍만한 육체에 성녀의 심벌이 되고 있는 풍요롭고 아름다운 머리칼이 그 살결을 애무하듯 상반신을 덮어준다. 동굴에서 명상과 고행에 몰두하고 있는 성녀의 자세라고는 하지만, 고통이나 아픔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하늘을 향한 눈물고인 눈하며 약간 벌린 입술은 과연 주를 사랑하는 희열을 표현하고 있는 것일까. 그림 왼쪽에 자리 잡은 향유 병이 아니라면, 당시의 감상자인들, 이 그림이 “성녀”를 그린 것이라고 인정할 수는 없을 지도 모른다. 실제로 같은 화가가 수년 전에 그렸다는 <바다에서 태어나는 비너스>의 비너스와는 마치 자매처럼 빼어 닮은 모습이다. 그러면 작가는 <막달라>를 오로지 에로틱한 감상자들의 눈요기 거리로 그렸던 것일까? 이제 이 그림이 생산된 연유를 더듬어 보아야 하리라. 1531년 3월 11일, 만토바공 페데리코 곤자가가 페스카라 후작 부인이며 시인인 비토리아 콜론나에게 편지를 쓴다. “더 없이 아름다우면서도, 한껏 눈물에 젖어 있는 ‘막달라 마리아의 그림’을 당대 최고의 화가 티치아노에게 의뢰했노라”고. 비토리아 콜론나가 누구던가. 훗날 미켈란젤로가 남몰래 연심을 품고 소넷을 지어 바치게 될 여인이 아니던가. 지성과 경건 그리고 미모로 그 이름이 알려지고 있는 여인이었다. 간추리면, 당시 최고의 화가 티치아노가 귀족의 주문을 받아 “감각적인 아름다움과 종교적인 경건, 그리고 회개의 마음이 최대한으로 표현된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다.그림을 받은 콜론나는 창녀들의 개종과 보호에 대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 여류시인이 남겼다는 막달라를 주제로 한 소넷의 일부를 소개해본다. “갸륵하게 고조된 여인/그녀는/영원히 진실하게 사랑하는 이가 원하지 않는 일에는 등을 돌리고/잘못이 많았던 속세로부터 멀리 떨어져/인적이 드문 거처에서 충족되고 있는 것처럼 내게는 보인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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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치아노의 ‘회개하는 막달라 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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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데이빗 소로
- 처음 소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대학 때 휘트먼을 읽으면서였다. 이후로 그에 대한 동경은 어설프게나마 나의 생각 밑바닥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었던 것 같다. 상당한 세월이 흐르고 나서, 서머셋 몸의 <독서안내>에서 소로를 폄하하는 듯한 평가를 읽게 되면서도, 소로에 대한 부러움에 가까운 공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오히려 대중작가 서머셋 몸 따위가 하면서 코웃음 쳤던 일을 기억한다. 그 때 읽었던 몸의 글을 대충 간추려본다.“소로의 <월든>은 남다른 경험을 지닌, 개성이 강하고 특수한 지식을 가진 저자가 아니라면, 쓸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책이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의 주제가 되어있는 실험을 아주 요긴하게 부각시킬 만큼의 감성적 능력을 소로가 갖추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의 욕망이란, 그 욕망의 수를 제한하기만 하면, 아주 작은 비용으로 만족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발견하기 오래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에머슨이 소로보다는 훨씬 착실한 인물”이라고도 썼다. 늙으막에 다시 소로에 관한 글들을 접하게 되면서, 한동안은 민망스러움과 당혹스러움을 번갈아가며 느끼게 되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오히려 그에게서 전에 맛보지 못했던 친근감을 느끼게 되어, 내심 멋적어하는 자신을 보게 된다. 여기저기에서 메모한 대목들을 소개해본다. “소로하면 그의 생애의 태반을 숲속 오두막에서 보내고 나머지는 감옥에서 보낸 줄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 그가 숲에서 보낸 세월은 2년 정도였고, 감옥에 있었던 것은 하룻밤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감옥에 갇히자 친구가 세금을 대납해주었기에 무죄석방이 된다. 이튿 날 아침 자신이 석방된 사유를 알게 된 소로는 그 세금은 자신이 납부한 것이 아니니 자신은 감옥에 있고 싶다고 떼를 써보지만, 오후에는 야생과일(cowberry)을 따러 숲으로 들어갔다. 연방정부를 상대로 큰일이라도 저지를 것 같았던 처음 기세와는 달리 편안한 결말을 남긴 셈이다. 소로의 시민불복종은 마하트마 간디와 루터 킹 목사에게도 영향을 끼쳤다고 하니 대단한 일이 아닌가. “ “헨리 데이빗 소로는 에머슨의 스승이자 가장 가까운 친구. 에머슨은 익살을 곁들어가며 소로에 대해서 말했다. ‘어떤 일에 대해 반대할 때에만 힘이 생겨났다....반대하는 대상은 여럿. 정치일 수도 종교일 수도, 노예제도나 화폐경제일 수도 있었다.’ 하여튼 누구보다 앞서 “아니”하고 반응하는 것이 그의 본능이고, 책임을 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이력서도 재산도 가족도 없었기에. ‘노’하고 말할 때 치러야할 대가는 전혀 가지지 못했다. 소로는 태어나면서 부터 이의를 달지언정 결코 굴복하는 일이 없는 타고난 전사였다.”에머슨은 소로에게서 많은 것을 보았다. “소로의 싸움에는 약간의 승리감과 뒷받침이 되어줄 북소리를 필요로 했다. 어떤 일에 반대하며 ‘홀로 일어섰다’는 스스로의 이미지에 종교적인 희열을 느꼈고, 이를 원동력으로 삼아 자신의 삶을 꾸려갔다. 찬사와 숭고한 사명감에 도취한 나머지, 자신에게 동조하지 않는 자는, 이웃이건 친구이건, 주저하지 않고 적으로 몰아 공격하는, 순수와 떳떳함이 그의 개인주의 종교의 특징이다.” “그는 하버드를 졸업한 인텔리였지만, 그가 속했던 대학이나 학문에 대해서는 아무런 은혜도 느끼지 않았다. 집안 사업인 연필제조업을 돕기도 하고 교사노릇을 한 적은 있지만, 제대로 된 직장을 가진 적은 없다. 호기롭게 자유를 부르짖지만, 구체적인 삶에서는 자립하지 않고 주변의 보살핌과 원조에 의지했다.” “기성종교에 대한 비판은 그의 선배 에머슨이나 제임즈보다 더 날카로웠다. 아마도 두 사람과는 달리 소로는 한 번도 조직에 속한 적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또 19세기 중엽의 뉴잉글랜드 사회는 비판의 대상이 됨직한 정통의 소재가 이미 뚜렷해지고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소로가 종교를 개인화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기존의 종교를 개인용으로 재창조하려는 것도 아니었고, 자기 나름의 종교를 만들어 보려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개인주의를 신성화하고 종교화 하려했다. 자신의 존재와 자유로운 표현에 지고한 가치를 찾아내고 개인이라는 사실에 종교적 사명과 정열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주변 사람들과 유대할 수가 없었다.”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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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데이빗 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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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끼고양이 죽이기와 거세하기
- 일본의 작가 반도마사코(坂東眞砂子,1958-2014)가 1977년에 <나오기상(直木賞)>을 수상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일본사회의 답답함을 벗어나고 싶다”며 다히치의 오두막에서 채소를 가꾸며 자급자족을 즐기고 있었다는데, 2006년에 <새끼고양이 죽이기>라는 글로 온 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일이 있었다. “3마리의 고양이를 기르고 있는데, 새끼가 태어나면 바로 죽였다”하고 고백한 것이다. “이따위 글이 어떤 비난을 가져 올지는 알고 있다....나는 새끼고양이를 죽이고 있다. 집 근처에 있는 벼락 아래가 빈터인 지라, 태어나면 바로 던져 버린다.”기르는 고양이 3마리에게 피임수술을 시키지 않은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암컷들의 삶이란, 발정하면 교미해서 새끼 낳는 일”이고 보면, 인간이 그들에게 피임수술을 가하는 짓거리는 그들의 본질적인 삶을 빼앗아 버리는 노릇“이라 생각했다. 그러니까 인간이 제멋대로 제 형편만 고려해서 고양이를 위협하는 것이라 했다. 멀쩡한 짐승의 난소와 자궁을 제거해버리는 노릇이, 그래서 발정기의 스트레스를 없애자는 짓거리가, 고양이에게나 사육하는 이에게 두루 이득이 된다는 판단이, 진정 고양이게도 행복이 될 수 있느냐하고 묻는다. “다히치섬, 집 언저리는 인가가 드물고 풀이 무성한 빈터와 숲으로 펼쳐져 있다. 들고양이, 들개, 들쥐의 시신이 예사로 널려 있는 터에, 새끼고양이의 시신이 더 해진들 인간의 생활환경에는 피해가 미치지 않는다....대신 새끼 고양이가 들고양이가 되는 날이면 인간의 생활환경을 해치게 마련. 기를 수 없는 새끼 고양이는 처음부터 태어나지 않도록 수술한다는 생각에 이의를 늘어놓고 싶지는 않다. 갓 태어난 새끼고양이를 죽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종(種)을 죽이느냐 새끼 고양이를 죽이느냐의 차이일 뿐이다.”독자들의 분노에 불을 지핀 것은 이 대목이었다. 그러나 작가가 말하려는 바는 “사람이 다른 생물에게 피임수술을 시킬 권리가 없듯이, 태어난 새끼를 죽일 권리 또한 없다”에 있었다. 새끼고양이를 들고양이화해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책임 또한 자각하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하고 묻고 있을 뿐이다. “인간은 신이 아니다. 다른 생물의 ‘삶’에 대해서 올바른 일 따위를 해줄 수는 없다. 어디선가 모순과 불합리가 움트게 마련”이기에 차라리 “새끼고양이 죽이기”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한 연구자에 따르면, 3마리의 암고양이에게 피임수술을 가하지 않는다면, 해마다 적어도 수십 마리의 새끼고양이를 죽여 왔을 것이란다. 고양이 피임수술의 목적에는 번식을 방지하자는 목적 말고, 들고양이 70%가 감염되고 있다는 “고양이 에이즈”나 “고양이 백혈병”에 감염되는 것을 예방하자는 목적도 포함하고 있다는 것. 현실적으로 일본에서는 많은 자치단체들이 기금을 내어 반려동물의 피임수술을 장려하고 있다지만, 들고양이의 수는 줄어들지 않고, 연간 30만 마리 이상의 개와 고양이가 보건소에서 안락사 처리되고 있다고 했다. 2006년에 그녀가 썼다. “나는 사람이 두렵다. 사람 앞에서는 긴장하게 된다. 사람을 사랑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고양이를 기른다. 사람에게 가야할 애정을 고양이에게 쏟음으로 간신히 하찮은 애정세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니까 갓 태어난 새기 고양이를 죽일 때, 나 자신도 죽이고 있다. 그게 아파 견딜 수가 없다.” 나치스가 동성애자에게 단종수술을 강요한 일과 일본이 한센병환자에게 그렇게 한 일을 회상시키면서, “타자에 의한 단종과 불임수술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자세는 인간이 인간에의 단종 불임수술과 연결된다. 반려동물에게 불임수술을 가하면서 ‘이것이 정의다’하고 뻔뻔스럽게 말하는 사람에게 나는 의문을 제공 한다.” 하고 말했다. 그녀의 글을 읽은 작가 히가시노(東野)는, 자신도 당연한 듯 고양이에게 거세수술을 시켜왔다면서, “나는 ‘새끼고양이 죽이기’는 하지 않았지만, 한 마리의 고양이를 계속 학대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하고 말했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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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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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끼고양이 죽이기와 거세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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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차라투스트라...’를 뒤적인다
- 나이답지 않게, 아니 나이 탓인지 모르겠으나, 새해 들면서 니체를 자주 들쳐보게 된다. 그냥 닥치는 대로 폈다가 접기를 되풀이 하면서 이곳저곳 밑줄을 긋다 보니 <차라투스트라>한 권을 다 읽은 것 같다. 그렇다고 컬컬한 속이 후련해지는 것은 아니란 것을, 그래서 쉬 책꽂이에 되돌릴 수 있는 책이 아니란 것을 짐작하지 못했던 것도 아닌 터에, 어쩌자고 다시 꺼내들었던가 하고, 경솔했던 처신에 혀를 차보지만, 그래도 꺼내 들기를 잘했다며 위로해본다. <차라투스트라> 2부에서 <타란툴라(독거미)에 대해서>와 3부 <스쳐 지나감에 대해서>를 중심으로 해서, 두서없이 몇 구절을 간추려보기로 한다. “보라, 이것이 타란툴라(독거미)가 사는 구멍이다! 저기 타란툴라가 스스로 기어 나오는구나…. 그대의 영혼에는 복수심이 숨어있다. 그대가 물면 어디든 검은 부스럼이 자란다. 그대의 독은 복수심으로 영혼에 현기증을 일으킨다.”“그대 평등을 설교하는 자들이여, 영혼에 현기증을 일으키는 그대들에게 나는 비유로써 말한다. 그대들은 타란툴라(독거미)이며 몸을 숨긴 채 복수를 노리고 있는 자들이다….그대들의 정의라는 말의 뒤편에서 그대들의 복수심이 튀어나오리라.”“인간을 복수심으로 부터 구해내는 것. 그것이 나에게는 희망으로 나아가는 최선의 교량이고, 오랜 폭풍우 뒤의 무지개다. 그러나 물론 타란툴라는 다른 것을 원한다. 그들은 서로 이렇게 말한다. ‘세상을 우리들의 복수심으로 가득 채우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들에게는 정의다’ “자신의 정의로움을 과시하기 위해 많은 말을 하는 자라면 누구든지 믿지 마라! 참으로 그들의 영혼에 결핍된 것은 꿀만이 아니다. 그리고 그들이 착하고 의로운 자임을 자칭할 때, 잊지 말라. 그들이 바리새인이 되는데 모자라는 것은 다만 권력뿐이라는 사실을!”“나는 사랑한다. 주사위로 우연히 행운을 잡았을 때, 수치심을 느끼는 그런 사람을. 그럴 경우 자신이 혹 부정한 내기를 한 것이 아닌지 하고 의심해보는 사람을.”언젠가 차라투스트라가 큰 도시에 이르렀다. 거기에서 민중이 “차라투스트라의 원숭이”라 부르고 있는 바보를 만난다. 바보는 차라투스트라의 말과 어조를 흉내 내고 그의 지혜를 꾸어서 연설하기를 즐겼다. 마치 차라투스트라가 연설하는 것으로 착각하리만큼 빼어 닮은 발상과 말씨로 현대 문화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늘어놓는 것이었다. 그가 차라투스트라에게 말한다. “당신은 영혼들이 더러운 누더기처럼 축 늘어져 매달려 있는 것을 보지 못합니까? 게다가 사람들은 이 누더기로 신문도 만들지요!…….그들은 모두 병약한 자들이며 여론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거품을 물고 열변을 토하는 바보의 말을 제지하면서 그의 입을 막았다. “…….그대는 무슨 까닭으로 개구리와 두꺼비가 되어야만 할 만큼 오랫동안 늪가에 살았더란 말인가?.....“나는 너의 그런 경멸을 경멸한다.” “거품을 품고 있는 바보여, 세상 사람들은 그대를 나의 원숭이라 부르고 있다지만, 나는 그대를 나의 투덜대는 돼지라고 부르리라…. 그대를 투덜대게 만든 것은 누구였던가? 아무도 그대에게 충분히 알랑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던가. 그래서 그대는 그처럼 요란하게 투덜댈 구실을 마련하기 위해 이 쓰레기 더미 위에 앉았던 것이다…. 나는 나의 경멸을 단지 “사랑 안에서 날아가게 하려고 하고 있다…. 입에 거품을 문 돼지여” “나는 그대를 알고 있다. 그대는 덜된 무리를 비판하며 바쁜 척 하고 있지만, 욕설은 그대에게 있어 쾌락이다. 쉼 없이 뭔가에 대해서 복수할 거리를 찾아내려고, 그대는 허영심에 쫓기고 있는 데 불과하다. 설사 그대의 말이 그럴듯하게 이치가 통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일세. “그러나 바보여, 이별하는 마당에 그대에게 이것을 가르쳐주고 싶다. 사람이란 사랑할 수 없는 경우라면 그곳을 지나쳐 버려야 하는 것을 ”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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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차라투스트라...’를 뒤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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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와 정치가’ 외…
- 1. 학자와 정치가Q. “레닌은 정치가일까 학자일까?”A. “정치가이지! 학자였다면 사람을 실험대에 올려놓기 전에 동물실험을 했을 것이 아닌가.”*소비에트에서 레닌은 학자로 떠받들지언정 정치가로 다루는 일은 금지되어 있었다. 2. 행복했던 소년시절의 진실노동절 행진에 참가한 유대인 노인이 들고 있는 플래카드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스탈린 동무, 행복했던 소년시대를 감사합니다.” 눈치 빠른 당원이 노인에게 시비를 건다. “노인동무는 우리 당을 조롱하고 있는 거요? 동무의 나이라면 소년시절에 스탈린 동지는 태어나지도 않았을 터이니 말이오.” 노인이 대답했다. “그 덕택으로 나는 ‘행복한 소년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오.”3. 스탈린이 모르고 있었던 일 스탈린이 노동자들의 삶이 어떤지 살펴보려고 크렘린을 빠져 나와 영화관에 들어갔다. 영화가 끝나자 소련국가가 흘러나오면서 스크린에 스탈린의 초상이 큼직하게 비치는 것이었다. 관객들이 모두 일어서서 국가를 부르는 가운데, 잔뜩 기분이 좋아진 스탈린 혼자 자리에 앉아 있는지라, 뒷자리에 앉아 있던 사나이가 몸을 굽혀 스탈린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동무, 우리도 당신처럼 앉아있고 싶은 마음이야 꿀떡 같지만, 동무도 일어서는 편이 귀찮아지지 않고 좋을 것이오!”4.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그리고 공산주의의 차이a.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에서는 옛이야기를 시작하는 양식이 다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옛날 옛적 어떤 곳에...”하고 시작하지만, 사회주의국가에서는 “먼 훗날 언젠가는...”하고 시작한다. b. 콜호즈(집단농장)의장이 연설했다. 공산주의가 되면 배불리 먹을 수 있소 하고. 한 당원이 말했다. “우리는 공산주의를 향해서 나아가고 있는 데 왜 식량이 부족하지요?”하고. 의장이 대답했다. “행군 중에는 식사를 하지 않는 법이오.” c. Q. “공산주의사회가 되면 비밀경찰도 없어진다는데 정말입니까?” A. “아시다시피 공산주의사회에서 국가는 그 억압수단과 더불어 폐지되고 맙니다. 그 단계가 되면 인민은 어떻게 해서 자기 자신을 체포할 수 있는 지에 대해서 알게 될 것입니다.”d. Q. “자본주의에 대해서 설명하시오.” A.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착취당하는 사회입니다.” Q. “그러면 사회주의에서는 어떻소?” A. “자본주의와 반대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착취하지요.” Q. “인간중심의 사회주의란 어떤 것인가요?” A. “인간을 어떤 방향으로라도 착취할 수 있는 조직사회이지요.”5. 대주교와 후르시초프의 공통점 우주인 가가린의 환영파티에 참석한 러시아정교의 대주교 알렉시스 1세가 가가린에게 물었다. “우주에서 하나님을 보았소?” “보지 못했습니다.” “아들아,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말고 가슴에만 묻어두게나”얼마 후 후르시초프가 가가린에게 같은 말로 묻자 이번에는 “보았습니다.”했다. “동무, 하나님의 모습을 보았다는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하지 말라우!” 9. 농민이 스탈린에게 바라는 선물 스탈린이 물놀이를 하다가 물에 빠졌다. 지나가던 농부가 살려내자 스탈린이 무엇을 선물로 주면 좋을지 말해보라고 했다. 농민의 말인즉, “내가 각하를 살렸다는 것은 비밀로 해주세요.” 10. 국가모욕죄와 기밀누설죄붉은 광장에서 주정꾼이 “브레즈네프는 바보야!”하고 소리치다가 KGB에게 체포 된다. 재판장이 22년 징역형을 선포하자 볼멘소리로 항의한다. “국가 모욕죄로 22년이라니 너무 하지 않소!” “아니야 국가모욕죄로는 2년뿐이고..”, 재판장이 주정꾼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나머지 20년은 국가기밀누설죄일세.” *나치와 유대인을 비꼰 조크들이 어느 틈에 무대가 소비에트 러시아로 옮겨지더니 배역도 바뀐 것 같다. 유머나 조크에는 국경이 없으니 판권도 없다지 않는가. 시대와 상황에 따라 적응하고 진화할 뿐.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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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와 정치가’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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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트리
- 크리스마스 트리가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약 3백 년 전 종교개혁 이후 어느 시기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1605년에 독일 엘자스 지방(현재 프랑스령)에서 밤에 전나무에 과자나 사과를 매달았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슈트라스부르크에서의 기록에 따르면, 트리를 색종이로 치장하고 사탕과 빵을 매달았다고 한다. 이후 하르츠 지방 등지에서 나무를 장식하는 기법이 발전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나무에 불을 켠 초를 매다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유럽의 12월. 짐승들은 동면에 들고, 거의 모든 식물들은 잎을 떨어트린다. 엄동설한에서도 푸르름을 유지하는 전나무, 당회, 두송, 소나무, 황양나무(회양목)는 생명의 상징처럼 보이게 마련이었다. 동지는 연중 낮이 가장 짧은 날이지만, 뒤집으면 낮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날이요, 겨울에서 봄으로 접어드는 날이기도 했다. 고대로부터 동지는 빛의 탄생일로 여겨왔다. 숲에서 전나무 가지를 꺾어와 문설주와 방 안을 치장하는 것은 숲의 정기를 받아들이자는 노릇이었다. 푸르름은 병을 고치고 생명력을 나누어주는 힘이기에. 로마인들은 고대로부터 계절이 변할 때면 월계수 가지를 문틀에 장식했었다. 크리스마스에 전나무 가지를 사람의 몸에 문지르거나 두들기는 것은 푸른 가지의 생명력이 재앙을 물리치고 축복을 가져 오게 한다고 믿어서였다. 성 니코라우스(산타크로스)의 시종이 버들가지로 버릇없는 아이를 두들기는 풍습이 있어 아이들이 두려워했지만, 원래는 아이가 잘 자라도록 생명력을 주기 위한 몸짓이었단다. 버들가지도 전나무 못지않은 생명력을 지녔다고 여겨, 부모와 자식이나 연인끼리가 그렇게 했다. 부활절과 성령강림절에는 창틀이나 문을 나뭇가지로 장식하고, 가축을 목장으로 내보낼 때는 그들의 등을 나뭇가지로 두들겼다. 이렇게 크리스마스에 전나무 가지로 집 안팎을 치장하는 일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유럽전역에 번져갔다. 1708년 하르츠 공의 딸 리제롯이 오를레앙의 대공비가 되어 파리에서 살게 되면서 쓴 편지 가운데, 크리스마스 장식에 대한 기록이 전해진다. “책상을 제단처럼 정돈하고, 새로 장만한 옷가지와 은제품, 인형, 사탕과자를 간추려 장식합니다. 책상에 황양나무를 설치하고 가지마다에 양초를 고정시키고 불을 붙이면 아주 멋지게 된답니다.”부군 아르레안 대공과 사이가 멀어진 여인은 태어난 하이델베르크의 옛일을 추억하며 독일에 있는 딸에게 많은 편지를 써 보낸 것이 용하게도 당시의 크리스마스의 모습을 전해주는 기록이 된 것이다. 전나무 말고도 황양나무나 당회나무도 쓰였음을 알 수 있다. 크리스마스 트리가 등장하기 전에는 피라미데라 불리는 특별한 촛대가 있었다. 굵은 촛대에 나뭇가지 모앙으로 여러 개의 작은 촛대를 꽂을 수 있게 한 것이다. 그것을 본받아 궁정과 귀족의 저택에 열리는 크리스마스 연회장에서도 상록수가지에 촛불을 장식하게 되었다고 한다. 아이디어는 곧 바이에른, 하노버, 오스트리아, 프랑스등지로 번져간다. 대공비 리제롯이 파리에서의 유행에 한몫 했을 것은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 아닌가. 얼마 후 신대륙으로 건너간 전나무 크리스마스 트리는 세계 곳곳으로 번져가서 크리스마스의 상징처럼 되기에 이른다. 중세의 아시시의 프란시스코는 처음으로 베들레헴에서 탄생한 아기 예수를 뉘인 구유를 떠받든 장본인이다. 이후 구유가 크리스마스의 중심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 크리스마스 트리가 눈부시게 발전하게 된 것은 종교개혁 이후 복음파가 조성한 풍조에 힘입은 바가 컸다. 가톨릭에서도 수목을 숭상하는 전통이 있어왔지만, 수목에 장식물을 매다는 원시 게르만의 주술행위는 이교적 습속이라며 금지하고 있던 터였다.게르만에서는 땅속 깊이 뿌리를 뻗어 하늘까지 닿는 거대한 나무에 관한 신화가 있었다. 이 나무를 이그드라실이라 일컬었다. 숭상하는 나무 아래에 모여서 신들에게 기도하고 춤을 추기도 했다. 나무는 부족과 가족이 융합케 하는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수목의 왕성한 생명력과 지속성은 외경의 마음을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었으리라. 그러는 사이 나무는 성서의 생명의 나무와 연관되고 마침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도 연결되었다. 훗날 가톨릭에서도 크리스마스 트리를 수용하게 된다. 촛불을 비롯한 화려한 장식은 금했지만.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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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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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미술에서의 유다의 모습
- 유럽을 여행하면서 오래된 교회나 미술관을 찾는 일은 극히 자연스럽고, 그곳에서 그리스도교 미술품을 감상하는 일 또한 그렇다. 어쩌면 적잖은 사람들에게 있어 그것은 가장 요긴한 여행 목적일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리스도교 미술을 감상한다는 노릇이, 그 방면의 전문가라면 모를까, 그렇게 간단하지 만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적잖은 세월을 목회자로 일해 오면서 나름대로는 교회미술에 대해서 다소의 관심을 가져 왔노라 여겨왔던 자부가 허무하게 무너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일행 중에 내가 목사인 것을 알고 그려진 혹은 새겨진 미술품의 미술적 가치에 대해서는 물론이지만, 그려진 내용에 대해서 물을 때 식은땀을 흘리게 되는 일이 어찌 없었겠는가. 우선 숱하게도 많은 “최후의 만찬”이란 제목이 붙은 그림 앞에 섰다고 치자. 많은 인물들이 그려진 화폭 속에서 예수를 찾아내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유다를 알아맞히는 일은 그리 녹록하지가 않다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유럽인들이 그림에서 제일 먼저 찾는 것은 하필이면 유다라고 하니 기가 찰 노릇이 아닌가. 일반적으로 유다의 모습은 까무잡잡한 얼굴에, 매부리코, 그리고 텁수룩한 턱수염을 기르고 있는 사나이를 염두에 두고 찾는다고 한다. 그러나 12사도 중에 예수를 배신해서 원수의 손에 넘겨 준 가장 악한 행위를 저지른 제자인 유다의 이미지가 교회 미술에서는 반드시 일정하게 나타나 있지 않으니 어쩌랴. 더군다나 “최후의 만찬” 장면을 그린 작품에서 제자들 틈에 섞여있는 유다를 영락없이 찍어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대체로 교회미술에서 유다를 식별할 수 있는 자료로는 앞서 열거한 얼굴의 특징 말고도, 예수와 비교해서, 키는 작게 그려져 있고, 예수와 다른 제자들의 머리에 따라다니는 후광이 없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 배신을 상징하는 누런 색깔의 옷을 입혀놓고 있다는 사실도 식별의 자료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유명한 지오토(Giotto di Bondone)의 그림에서처럼. 그러나 흔히들 가장 두드러진 표징으로 돈주머니를 들고 있는 유다의 모습을 떠올릴 터이지만, 그렇지만도 않은 경우도 흔하기 때문에 감상자는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유다가 스승을 배신한 인물이면서도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제자들과 비교해서 이렇다 할 결정적인 이미지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으니. 그러나 중세 이후에 그려진 그림이라면 조금은 판별하기가 쉬워진다. 화가들이 예수를 배신한 범인을 쉽게 찾아낼 수 있도록 유다에게 나름대로 정해진 위치를 정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즉 유다는 다른 제자들과 달리 최후의 만찬 식탁을 벗어나 멀찌감치 자리하게 하고 있는 것이 예사가 되고 있다. 유다 말고도 그리스도교 미술에서는 여러 악역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를테면 대제사장 가야바, 헤롯왕, 로마총독 빌라도, 그리고 예수를 팔아넘긴 유대인을 등장시키는가 하면, 예수에게 채찍을 가하며 비웃고 있는 병사들을 그려놓기도 한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대체로 이방인(아랍인)이거나 유대인을 상징하는 특정한 모자를 쓰게 하고 있다. 실제로는 그들이 로마인이었다 할지라도 그런 모습 그런 복색으로 그려놓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한 눈에 그들은 악한 자들임을 쉽게 식별할 수 있도록 손을 쓰고 있는 것이다. 교회미술은 글자를 해독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성서 이야기를 시각적으로 설명해야 하는 역할이 주어져 있어, 무엇보다도 감상자들이 화폭에서 선한 자와 악한 자를 명확하게 구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럼에도 유다는 이방인으로는 그려지지 않는다. 악마가 유다에게 들어갔다고 하더라도 유다자신은 악마로 그려지지 않는다. 로마의 총독이면서 예수의 십자가형에 소극적이었던 빌라도(누가 23장 13절 이하)는 악마의 꼬임에 넘어가는 아랍인으로 그리거나 추한 늙은이로 그리면서도 말이다. 유다는 대죄를 범했어도 예수의 사랑을 받은 제자였기 때문일까. 그래서인지 예수의 제자를 악마나 이방인으로 그리는 전통은 교회미술에서는 생겨나지 않은 것이리라. 사탄은 처음부터 악마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람들에게 시련을 주는 악역을 감당하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이기도 했다. 배신자 유다에게도 나름대로의 사명이 주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배려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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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미술에서의 유다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