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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혼밥” 유감
    “혼밥”이란 단어(?)를 처음 대했을 때 “혼”을 개(個)의 뜻으로가 아니라, 혼(魂)으로 이해했었다. 그런데 그게 가족을 떠나 홀로 밥을 먹는 행위를 일컫는 신조어란 것을 알고 나서는 입맛이 씁쓸해졌다. 사람인들 혼자 밥을 먹게 되는 경우가 어찌 없을까마는 그렇다고 그런 단어까지 만들어 흔들고 다니는 모양새가 그리 곱게 비치지 않았다. 밥을 먹는 행위는 단순히 생존의 수단만은 아니다. 문화인류학자들 중에는 가족이란 단위가 원래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는 인류 특유의 행위에서 형성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 날마다의 식사는 “가족이 가족임을 확인하는” 의미 있는 행위로 가족이 서로 교통하는 중요한 터전. “한 솥밥을 먹다”는 말이 있듯이, 식사를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끼리는 특별한 연결고리를 느끼는 법이다. 서로 속을 털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이들끼리의 식사처럼 즐거운 행위는 없는 것을. 식사를 함께 함으로 서로에 대한 친근감이 더해지게 마련. 얼마 전 문재인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여러 차례 혼밥을 먹었다는 보도가 있었고, 그것은 우리 대통령이 중국정부 인사로부터 홀대를 받은 일로 여기게 하지 않았던가. 외교적인 행사에서 공동식사는 가장 중요한 상징적 행위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조찬회를 비롯한 여러 모양의 회식들이 거래의 터전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고, 식탁을 함께 하는 노릇이 원만한 거래와 조직의 결속을 위한 요긴한 절차요 수단이란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얼마 전 친구의 빈소를 찾은 일이 있었다. 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 우리 말고는 다른 조객이 없는 지라, 부의만 전하고 그냥 돌아설까 망설이다가 차마 그럴 수는 없다 싶어 썰렁한 자리에서 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고인은 물론 상제와 공식(共食)을 나눈다는 의미에서. 더불어 끼니를 나눈다는 것은 산자와 죽은 자, 또 신과 인간이 연결되는 중요한 매개행위가 되어 왔기에. 사전에서 공식(共食)을 찾았더니, “같은 유의 동물이 서로 먹고 먹히거나 해치는 행위로, 동료끼리 서로 이익을 취하노라 결과적으로 함께 불이익을 얻게 되는 일”로 풀이한 것과, “원시 종교의식에서 제물로 바쳤던 희생을 공동으로 나누어 먹는 일”이라는 상반된 풀이가 있어 흥미로웠다. 우리나라에서는 제삿상에 차린 음식은 가족은 물론 이웃과도 함께 먹는 것이 예사로웠다. 우리 집은 일찍 예수를 믿었기에 제사를 지내지 않았던 터라, 아버지가 제삿밥 빚을 갚기 위해서 헛 제삿상을 차렸던 일을 기억한다. 서양에서 빵은 더 없이 요긴한 식품. “사람이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는 그리스도의 말은, 곧 빵은 삶을 위한 양식이고 일상적인 음식의 대명사일 뿐만 아니라, 생명의 떡인 그리스도 자신임을 상징한다. 예수는 잡히기 전날 예루살렘에서 12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았다. 어린 양을 잡고 누룩을 넣지 않는 빵을 공식하는 유월절 식사를 위해서였다. “그들이 먹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들어서 축복하신 다음에, 떼어서 그들에게 주시고 말씀하셨다: ”받아라, 이것은 내 몸이다." 잔을 들어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은 모두 그 잔을 마셨다. 그리고 예수께서 말씀 하셨다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다.” 이후 그리스도교회는 예수의 말씀에 따라 빵과 포도주를 나누는 의식 곧 “미사” 혹은 “성만찬”을 행하게 된다. 초기의 그리스도교인들은 공동체로서의 결속을 확인하기 위해 자주 모여 애찬 혹은 아가페를 나누었다. 이와 성만찬예식이 초기에는 뚜렷하게 구별되지 않았지만, 2세기 반경부터 애찬과 분리하여 감사의 기도를 중심으로 하는 유카리스트 예전이 된다. 예수의 생애에서 “가나의 혼인 잔치”나 “5병2어”와 같은 음식과 관계된 이야기가 강조되는 것은 아주 의미가 있는 일이다. 서양에서는 빵과 포도주가 가장 기본적인 식사였다. 빵과 포도주라는 가장 기본적인 음식물이 하나님의 몸이요 피라는 생각이 서양의 식사관을 결정한 것은 틀림없다.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배신자 고지”라는 드라마가 주제가 되어 있다. 그래서 <최후의 만찬>의 의미가 더 부각되고 있는지도 도 모른다. 금지된 음식을 먹어 실낙원을 한 인류는 성만찬을 통해 복낙원 할 수 있다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 아니던가.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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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2-03
  • 주지육림(酒池肉林)의 진실
    주(周)에게 멸망당한 은(殷)의 마지막 왕 제신(帝辛)을 흔히 주왕(紂王)이라 부르는 것은 시호(諡號)를 따른 것. 시호란 사후에 생전의 행실을 평가해서 붙여주는 이름. “주(紂)”는 잔의손선(殘義損善), 의를 손상하고 선을 깨뜨린 인물에게 붙여주는 시호였다. <사기(史記)>(殷本紀)는 그의 폭정에 대해서 이렇게 기술한다. “제왕 주(紂)는 행동이 민첩해서 맨손으로 맹수와 격투할 만한 완력을 지니고 있는데다, 머리를 잘 굴려 쉽사리 검은 것을 흰 것으로 바꾸어 놓을 만 했다. 자만하여 모든 사람을 자신보다 못하다 여겼다.....술과 여색에 절제가 없어 달기라는 여인에게 빠져 그녀가 하고 싶다면 무슨 일이든지 들어 주었다”그의 가장 두드러진 악행이 “주지육림”이요 “포락의 형(刑)”이었다. 술로 연못을 만들고, 고기를 걸어 숲을 만들어, 남녀가 벌거벗고 그 사이를 쫓아다니게 한 것”이 “주지육림”이라면, “기름을 바른 놋쇠 막대기를 불 위에 걸쳐두고 죄인이 그 위로 걷게 해서 불 속에 떨어지는 것을 달기에게 보여 즐기게 하는 놀이가 ”포락의 형“. 또 간언을 하는 신하의 심장을 도려내어 소금에 절이는 형에 처했다. 결국 주(周)의 무왕이 의병을 일으켜 목야(牧野)에서 주를 처 멸망케 했다는 것. 그러나 적잖은 기록에서 주지육림을 소개하는 내용들이 황당해서, 악행의 주인공이 걸(桀)인지 주(紂)인지도 분명치 않아, 사실에 충실한 기록이기 보다는 황당무계(荒唐無稽)한 이야기 같다는 시각도 있다. “고기와 술”을 키워드로 삼아 제멋대로 부풀린 문헌들이 저마다 다른 그림을 만들어 내어, 폭군의 열락과 사치가 한 나라를 망치게 했고, 그를 무찌른 이는 의인이었음을 보여주기 위한 과장된 이야기로 본다. 사기(史記)를 쓴 사마천(司馬遷)도 이와 같은 사실을 시인했다. 사기의 대원열전(大宛列傳)에는, 주왕이 각지에 외국의 귀빈을 데려가서 나라의 부를 보여주기 위해 여러 가지 흥행을 벌여 과시했는데, 그런 일들을 주지육림으로 표현했다는 것. 그러니까 “주지육림”은 문자 그대로의 구체적인 사건의 기록이기보다는 지나친 사치를 추상적으로 묘사했다는 것이다. 제신(帝辛)이 실제로 기록들만큼이나 포악무도했던가에 대해서도 이견이 없지 않다. <사기>를 비롯한 전국진한(戰國秦漢)의 문헌에서도 주왕을 폭군으로 그리고는 있으나, 다른 왕들에 대해서는 대체로 무미건조한 문장으로 기록한 반면, 유독 주왕에 대해서만 이야기조로 “주지육림”이나 “포락의 형”이라는 이미지를 그린 의도에 주목 할 필요가 있다는 것. 즉 주지육림이란 폭군 타도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이미지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은의 탕왕이 걸(桀)을 추방하고, 주의 무왕(武王)은 주를 주벌(誅伐)했다. 이것은 사실인가“ 하고 제나라 선왕(宣王)이 맹자(孟子)에게 묻는다. 맹자가 답하기를 “그런 말이 전해지고 있습니다.”한다. 선왕이 다시 “신하가 군주를 시해하다니 그런 일이 용납 될 수 있는가?”하자, 맹자가 답하기를 “인(仁)을 해침을 적(賊)이라 하고, 의(義)를 해침을 잔(殘)이라 합니다. 잔적의 무리를 일부(一夫)라고 합니다. 일부인 주를 주살했다고는 듣고 있지만, 군주를 시해했다고는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했다. 유가(儒家)의 논리로는 신하의 하극상은 결단코 허할 수 없는 노릇. 그러나 공자를 비롯한 유가가 이상적인 군주로 떠받드는 무왕은 은을 폭력으로 멸망시키고, 주 왕조를 이룩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그런데 주(周)가 주(紂)를 주벌한 사실에 대해서 질문을 받은 맹자의 답변에서 “그것은 전해지고 있습니다.”로만 답변한 것은, 비리를 저지른 폭군의 존재가 필요했음을 암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서 주왕(紂王)은 주(周)왕조 성립을 변호하는 희생 제물이었던 셈이다. 앞서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이 말했다. “주(紂)가 착하지 못함은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음에 틀림없다. 그 일로 말한다면, 군자는 하류(下流)에 거하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나쁜 일이 모두 흘러들어가기 때문이다. “하류란 모든 것을 책임지게 되는 불리한 입장을 말한다. 바로 주왕은 하류에 놓여 있어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비리 비도를 뒤집어쓴 인간으로 날조 되었다고 말한 것이 아닐까.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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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1-16
  • 두루마리 휴지와 NASA -유대인 조크-
    아더 케스틀러의 <백주의 암흑>에서..한 성주의 대공이 사냥을 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가, 도중에 성으로 되돌아왔다. 대공이 침실로 들어서는데, 침대에서 대공비가 가톨릭의 대주교와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대공이 발코니로 나가더니, 그 밑을 지나가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엄숙한 자세로 천천히 십자를 그었다. 놀란 주교가 발코니로 달려 와서 말했다. “대공 전하,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겁니까?” 그러자 대공이 말했다. “임자가 내가 할 일을 하고 있으니, 나는 임자가 할 일을 하고 있는 것이라오.” --------미국 NASA에서 있었던 일 록하이머는 젊었어도 뛰어난 항공기 설계사로 NASA에서 미국의 최첨단 하이테크 무인폭격기의 날개를 설계하고 있는 터였다. 유인기와는 달리 무인기는 콕 피트를 설치하지 않아도 되는 이점이 있어 극단적인 소형화가 가능한 지라, 적의 레이더를 피하는데 유리하고, 사람이 타지 않는 고로 인체가 견디지 못할 과격한 동작이 가능하기 때문에, 파일럿을 훈련하는 시간과 비용이 절약되는 이점이 있는 등, 수많은 장점을 지닌 프로젝트로 주목을 받고 있는 터였다. 그러나 정작 무인기를 만들어 시험비행을 해보면 날개의 뿌리부분이 계속 잘려나가는 것이었다. 록하이마와 동료들은 며칠 밤낮을 지새며 면밀하게 날개와 그 이음새부분을 조사하고, 거듭거듭 슈퍼컴퓨터로 계산해보지만 시험 비행 때마다 날개 밑 부분이 찢어지기는 마찬가지였다.국방부에 납품할 기한은 닥쳐오는데 사태는 난감하기만 했다. 신실한 유대교 신자인 록하이머가 의지해 볼 대상이라고는 존경하는 랍비밖에 없었다. 록하이마의 고민을 듣고 있던 랍비, 젊은이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얼른 대책을 일러주는데..... “그런 문제라면, 날개 밑 부분에 나란히 구멍을 뚫어보라고. 그러니까 날개와 동체가 붙어 있는 부분에 1센티미터 간격으로 나란히 구멍을 뚫어주면 문제는 바로 해결될 거란 말일세.”록하이마는 반신반의하면서도,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는지라, 랍비가 일러 주는 대로 해보기로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랍비의 충고를 따라 제작한 비행기가 무사히 시험비행에 성공한 것이다. 아무리 무리한 동작을 시도해보았지만, 다른 부분은 몰라도, 날개 이음새부분이 꺾이거나 찢어지는 일은 없었다. 다시 랍비를 찾아간 록하이마가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린 다음에 “어떻게 그런 해법을 알게 되셨습니까?”하고 여쭈었다. “그건 아주 간단한 이치이지, 아침마다 화장실에 앉아서 사용하는 두루마리 휴지는 힘껏 잡아 당겨도 일정 간격으로 가공되어 있는 점선부분이 잘려지지는 않았거든.”----------이 유머를 읽은 것은 절대로 2003년보다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다는 증거자료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두루마리 화장지의 점선 부분이 개량되어서 쉽게 잘려지게 된 것이 언제부터였는지에 대해서는 자신감 있게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두루마리 화장지의 점선 부분이 쉽게 잘려지게 된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말이다. NASA에서 시험비행이 성공했다는 무인 폭격기의 날개와 동체의 이음새 부분이 아직도 아무런 이상이 없는지를 물어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아뿔사! 유대인의 조크가 아니던가! 그러니까 이 조크는 처음부터 단순한 조크가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왜 진작 해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불과 며칠 전 여객기를 탔을 때였다. 공교롭게도 작은 창문으로 비행기 날개가 아니 날개 밖에는 보이지 않는 자리를 차지하게 되어서였는데......그 날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Do not walk outside this area” 번쩍 정신이 들면서, 적잖은 세월 동안 떠나지 않고 있던 의문이 한꺼번에 해결되는 듯 싶었다. 자세히 보았더니 날개 길이를 따라 한 가운데에 선명하게 선이 그어져 있었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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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1-09
  • ‘유브 갓 메일’과 ‘마지막 잎새’-가상현실과 현실-
    톰 행크스와 맥 라이언이 주연한 <유브 갓 메일(You've Got Mail)>을 보고 났을 때,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를 떠올렸다. 나름대로 ”데 자뷔“를 즐긴 것이리라.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아 “모퉁이 책방”을 경영하는 캐슬린 켈리에겐 연인이 있다. 그러나 “NY152”이라는 메일네임을 쓰는 남성에 대해서는 비밀로 하고 있다. 직업도 주거도 모르는 메일 상대와 쓰잘데기 없는 이야기를 즐기노라. 조 폭스는 대형 체인서점 “폭스”의 아들. <모퉁이 책방>가까이에 지점을 준비를 하고 있다. 그도 연인 패트리샤에게는 “shop girl”이라는 메일네임의 여성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어느 날 조가 친척 아이를 데리고 “모퉁이 서점”을 찾는다. 동네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는 캐슬린과 이야기를 나누지만, 그녀가 “폭스 서점”을 싫어하고 있음을 눈치 채자 자신의 이름은 밝히지 않는다.어느 날 그림책 작가의 파티에서 조와 캐슬린이 다시 만나게 되어 서로의 신분이 밝혀진다. 캐슬린은 조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은 일에 더해 그의 언행이 싫다며 잔소리를 해대자 조는 그녀가 싫어진다. 메일에서는 그랬던 일들이 토로된다. 그러나 상대방이 싫어하는 이가 바로 자신이라고는 알아차리지 못한다. 조가 만나자 해보지만 그녀는 응하지는 않는 가운데, “폭스 서점” 때문에 경영에 불안을 느낀 캐슬린이 메일에서 가게운영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조는 투쟁을 부추기고, 조의 말에 힘입은 그녀는 “폭스 서점”과 싸울 결단을 굳힌다. TV와 잡지에서 “폭스 서점”을 비난하고 대형서점 반대시위도 주도한다. 그러나 이렇다 할 효과가 없자 “NY152”와 만나기로 한다. 조가 약속한 카페에 와서, 기다리는 캐슬린을 보게 되어서야, 메일상대가 “모퉁이 서점”의 캐슬린 켈리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자신이 “NY152”라는 것은 숨긴 채, 우연히 만난 것처럼 말을 걸자, 그녀는 “폭스 서점”의 점주가 싫다는 심정을 털어놓는다. 메일을 주고받던 자상하고 유머러스한 남성이 오리라 기대했던 그녀는 자리를 마주한 조가 바로 그 당사자인줄은 모르고 욕설을 늘어놓자 속상한 조가 나가버린다. 캐슬린이 메일을 보낸다. “당신이 왜 오지 않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소. 대신 나의 사업을 망쳐버린 사나이가 나타나길래 험한 말을 퍼부어 버렸다오. 그가 상처 입었다면 나를 용서할 수 없겠지요. 우리가 메일로 주고받은 내용은 별 의미가 없는 것들이었지만 내게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다오. 고맙소.”메일을 받은 조, 망설이다가 끝내 답장을 보낸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젯밤에 가지 못한 것을 진심으로 사과하오. 당신에게는 상처를 입히는 결과가 되었군요. 당신은 친구를 만나러 갔다가 원수를 만난 셈이오. 모두 내 탓이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당신 편이라오.”가게를 접기로 결단한 캐슬린은 “NY152”가 마음에 걸려 애인 프랭크와 결별 한다. 그럴 즈음 조도 가치관의 차이를 느낀 연인과 작별했노라 “shop girl”에게 보고한다. “모퉁이 책방”이 문을 닫았다는 소식을 들은 조가 경쟁자였던 그녀를 찾아간다. 그녀가 메일상대인 자신을 좋아한다는 눈치는 채고 있는 터이지만, 자신이 당사자라고는 말하지 않고 “폭스 서점”의 주인으로서 그녀를 만난다. 그리고 좋아한다는 고백을 한다. “I like You very much, just as you are”영화 이름 <You’ve Got mail>은 메일이 도착했음을 알리는 신호음. 그러니까 현실과 가상현실을 갈라놓기도 하지만, 현실에서 가상현실로 들어가는 입구 구실도 한다. 영화에서는 넷 상에서 벌어지는 친밀한 가상현실과 현실에서 진행되는 두 주인공 사이의 칙칙한 관계가 평행선을 긋고 있다. 그러나 마침내 둘은 어우러진다. 오 헨리의 단편 <마지막 잎새>. 뉴욕 그리니치빌리지의 아파트에 사는 무명 여류화가 존시가 폐렴으로 사경을 헤맨다. 그녀가 창 너머로 바라보는 담쟁이 잎이 모두 떨어지면 자신의 생명도 끝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을 들은 노화가가 손수 그 벽에 나뭇잎 하나를 그린다. 그래서 그녀로 하여금 희망을 가지게 한다는 이야기. 담벼락에 물감으로 그려 놓은 가상현실 또한 그 어떤 현실 보다 아름답고 설득력이 있지 않는가. 하긴 위의 두 이야기 또한 가상현실이고 보면…….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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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범
    2018-10-26
  • 베토벤의 헌정 비즈니스
    다들 알고 있는 이야기가 때로는 새로운 뜻을 드러내며 다가오는 일이 없지 않지만, 알고 보면 베토벤도 나름대로는 비즈니스 맨이었다는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여 줄 사람이 얼마나 될까. 베토벤에게는 아무개 귀족에게 헌정되었다는 작품들이 유난히 많다. 동시대의 동업자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에게는 “헌정”딱지가 붙여진 작품은 수곡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헌정”현상이 유독 베토벤에게 두드러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게 하지 않는가. 당시 상황으로는 베토벤도 생활을 위한 수입을 귀족들에게 의존했다고 본다. 그러나 조금만 자세히 상황을 들여다보면 베토벤은 그때까지의 다른 음악가들과는 달리 처음으로 “예술가”라는 의식을 가지고 예술가로 자립하려 안간힘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위 “클래식 음악”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예술”이 된 음악, “예술”이고자 했던 음악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고, 곧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셋 중 “예술”로서의 음악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은 오직 베토벤만이었다고 단언해도 좋으리라. 하이든은 궁정악사로서의 그의 책무를 무난히 감당한 음악가. 다른 말로 표현해 본다면 하이든은 성공한 공무원이었다. 모차르트도 스스로 뛰어난 음악가라는 자부심은 지녔었어도 예술가라는 자각에는 이르지 못했던 것 같다. 너무 일찍 요절해버렸기에. 한 시대를 앞서 산 바흐 역시 솜씨가 빼어난 음악장인이긴 했다. 그러나 지나친 표현일지는 몰라도 당시의 구두장이나 빵가게 주인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감각으로 대를 이어가며 음악가라는 가업을 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다시 정리해본다면, 하이든은 에스테르하지가에게 고용되어 있었고,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 대주교의 악단에 속해 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름대로 정해진 수입을 취할 수 있었다. 이들과는 달리 역사적으로도 “궁정에 속한”적이 없는 작곡가로는 베토벤이 처음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독립된 “예술가 베토벤”으로 행세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 상황과 베토벤에게 “헌정”된 작품이 많다는 사실과를 관계 지어보면 그 내막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베토벤에게는 연주회 입장료와 출판사에서 지급되는 악보 원고료만이 수입의 전부였고, 그것도 먹고 살아가기에는 태부족한 액수였고 보면, 소위 파트론이라 일컬어지는 후원자를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향곡 4번>, <교향곡 5번>, <교향곡 6번>이 각기 다른 귀족에게 헌정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내막인즉 세곡 모두가 오즈펠트 백작에게 헌정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전적으로 경제적인 이유, 다시 말해서 다른 두 귀족이 더 많은 자금을 제공해주었기 때문에 최종에 변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비즈니스 감각이 개입되었었다는 말이다. 먼저 “헌정”부터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사례금을 받고 난 다음에 헌정되는 수도 있었다. <대공>으로 알려지고 있는 <피아노 삼중주곡 7번>은 루돌프 대공에게 헌정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뿐 곡의 내용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내막쯤은 모르는 이가 없을 터. 루돌프 대공에게는 꽤 많은 걸작이 헌정되었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피아노 소나타 26번 (고별)>과 <29번(하머크라비아)>, <32번> 그리고 <미사 솔렘니스>등. 얼마나 지불했는지는 짐작할 수밖에 없지만, 곡과 더불어 헌정한 이의 이름이 인용되는 고로, 적잖이 지불되었을 것이라 짐작하게 한다. 프로이센 대사 하츠펠트공이 오스트리아의 궁중고문관을 통해서 베토벤에게 “훈장과 50 다카의 금전 중 어느 쪽을 받겠느냐”고 물었을 때, 베토벤은 ”물론 50타카“라 대답했다니. 무릇 비즈니스의 속성상 베토벤에게도 적잖은 실패가 따랐다. 덜컥 헌정하고 나서 대가를 받지 못한 경우인들 왜 없었겠는가.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에게 3곡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를 헌정했지만 사례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13년이란 세월이 흐른 1815년에, “빈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황제가 빈에 왔을 때, 동행한 황후에게 신곡을 헌정하면서 편지를 동봉한다. “언젠가 황제에게 헌정한 소나타의 사례를 받지 못했습니다”. 독촉장은 밀린 사례금을 회수해왔다. 비즈니스맨 베토벤은 꽤나 끈질겼던 것 같다. 나폴레옹에게 헌정했던 <교향곡 3번(영웅)>을 두고 실패한 비즈니스로 단정지어 버린다고 해도 달리 반박할 자료는 별로 없지만, 적어도 베토벤의 치열한 삶을 아는 모든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할 것 같아서.....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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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범
    2018-10-19
  • ‘벌거벗은 목사님’과 “소집단의 논리”
    텔아비브 대학에서 심리학을 연구하는 아리엘 메라리가 알카에다의 테러리스트 수백 명을 추적 조사했다. 그 결과 그들 중 4분의 3이 기혼자이고, 3분의 2에게는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 했다. 그러니까 알카에다 테러리스트라고 남달리 특별한 어떤 사람이 아닌 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는 것.메라리는 말한다. “자폭 테러리스트는 머리가 이상하다거나, 신앙심이 두드러지게 높은 것도 아니다. 특정 종교 사상을 지녔거나 특별한 환경에서 성장한 경우는 지극히 드물다. 그들 대부분은 종교적이지 않거나 더러는 무신론자이기도 했다… 적지 않은 테러리스트들은 유복한 특권계급 출신, 대학을 졸업하고 의사나 엔지니어 혹은 건축가와 같은 전문직을 누리고 있었다.…그러니까 그들 중 다수는 쉽게 세뇌되어 명령에 복종하기만 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결코 아니었다.” 메라리는 그들이 정신적인 문제가 있어서 자살 테러를 감행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터널’에 갇혀 있기 때문이라 했다. 터널은 가늘고 긴 통로로, 외부와는 완전히 차단되어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출구까지는 빛이 비치지 않는다. 그 터널에는 두 가지 현상이 있어, 터널을 빠져나가는 동안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차단되고, 출구를 향해 가는 중 어느 지점에서는 시야 협착 증상이 나타나서 출구 한 점에만 눈길이 몰리게 된다. 다시 말해서 터널이란 어릴 때부터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분위기, 방송, 집이나 이발소 카페에서 나누는 잡담과 전쟁 이야기들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다고 했다.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자신도 모르게 터널에 갇혀, 스스로 자살 테러리스트가 되어 알카에다를 찾아온다는 것이다. 한편 “그와 같은 사람들이 왜 어떻게 자폭테러를 저지르게 되는지”에 대해서 연구한 자료들 중에는 “소집단의 논리”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는 설명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컬트교단이나 테러리스트 집단이 그들을 직접적으로 얽어매고 있는 것은 신앙이나 신조와 같은 관념적 이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공감이나 배타성과 같은 “감정적 결합“이라는 것이다. 높은 허들을 넘어 일단 멤버가 되고나면, 집단에서만 통용되는 특별한 “소집단의 논리”에 무조건 순종하게 된다는 것. 즉 집단을 위한다는 의식과 행동을 미화하고, 집단의 승낙을 받아 헌신하게 되는 것을 보람으로 여기게 된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인정받음으로 의미를 부여받고 싶은 숨겨진 뇌의 욕구에 따르는 이들이 어찌 자살테러범 만이랴. 기업의 임원, 용기 있는 병사, 이상주의 신봉자도 마찬가지. 종교나 애국심, 봉사가 행동의 동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만의 대의를 따라 결단하고 행동에 참여하는 것만이 평범함에서 벗어나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인식만 심어주면 그만이라는 것. 인터넷이 아무리 떠들어도 그들은 집단 동료에 대한 정보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진다. 정보가 많으면 많을수록 한정된 정보 외에는 거리를 두게 된다. 안데르센의 <벌거벗은 임금님>에서는 임금님이 벌거벗고 걸어도 아무도 벌거벗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임금님은 자기의 거짓을 숨기기 위해 벌거벗은 채로 거리를 누비고 군중 또한 자신의 거짓을 숨기려고 환호한다. 어린 아이가 “임금님은 벌거벗었어요.”하고 소리 쳐 보지만 퍼레이드는 계속된다. 임금님 대신 목사님을 대입하면 이야기는 훨씬 더 실감이 날지도 모른다. 그런데 웃음꺼리가 된 것은 임금님만이 아니었다는 점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임금님을 둘러싸고 있는 중신들, 퍼레이드에 참여한 국민들과 길거리의 구경꾼들도 마찬가지였다. 알카에다의 테러리스트들이 남달리 특별한 어떤 사람들이 아닌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듯이. 집단적 사고가 발생하는 첫 번째 징후는 자신이 속한 집단에 대한 과대평가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자신들을 불사조로 여기고 싶어 하고, 자신들 만의 윤리나 신앙을 쳐들어 보이는 짓거리라지 않는가. 그리고 그들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것은 완전 일치에 대한 환상과 자신감이란다. 정신분석가 융은 인간이 개성을 지니게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 있는 그대로의 성품, 본성, 자신의 전체를 찾아가는 것이라 했다. 즉, 개성화란 자기실현과 같은 의미이고 보면, 그 사람 본연의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이고, 무의식에 갇혀있는 자신의 숨겨진 욕구를 의식적으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현실의 삶에서 행동으로 나타내고 실현하는 것이라 했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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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범
    2018-10-05
  • 보청기를 쓰고 베토벤을 듣다니…
    생음악(生音樂)이라 했었다. 녹음된 음악이 아닌 연주회장에서 듣는 음악을 일컬어. 1950년대에 20대를 누린 세대는 음반을 통해서만 음악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어느 세대보다 몰입했었다. SP와 LP를 거치고, 하이파이에서 스테레오, 그리고 CD와 DVD를 거치면서. 이젠 녹음 기술이 너무나 발달해버려서 생음악 보다는 디지털 기술로 합성한 음향이 듣기에 따라서는 더 좋을 수도 있다. 다행한 일이 아닌가. 음반이 없었다면 그 심오한 소리의 세계를 모르고 살 뻔했을 터이니. 그런데 늦바람이 난 것이다. 나이 80을 한 참 지나서야, 그것도 보청기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된 연후에야, 기어이 본고장에서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생음악으로 듣기로 작심했으니. 마침내 소원을 풀게 된 당일, 빈 필 연주회장에는 나처럼 백발에 지팡이를 짚은 노인네들이 적잖이 눈에 뜨여서 반가웠다. 무대에서 6번째 가운데에 자리 잡은 나는 들뜨고 있는 자신을 달래노라 등에 땀이 고였다. 베토벤(1770-1827)이 <교향곡 제 9번>을 쓴 것은 54세, 젊어서부터 난청으로 고생하던 그가 그나마의 청력도 잃고 건강조차 좋지 않아서였다. 후원자들이 찾지 않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친구들도 그를 떠나고 있었다. 당시 유럽음악계는 롯시니의 밝고 경쾌한 오페라가 판을 치고 있어서, 베토벤의 심각한 음악은 대중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는 터였다. 장년기의 베토벤은 운명에 맞서보려는 격한 작품들을 내놓았고, 40대 후반부터는, 후기 피아노 소나타들이 보여주는 대로, 명상적이고 철학적인 곡들을 썼다. 그러나 베토벤이 프리드리히 실러의 시 <환희에 붙이는 송가>에 곡을 붙이고자 마음먹었던 것은 오래전 본 신대부터의 일이었다고 한다. 프랑스 혁명직후 고양된 분위기를 맛본 청년 베토벤은 “자유”와 “환희”가 서로 어울리는 꿈을 꾸었을 것이다. 그러던 그가 나이 54세가 되어서야, 즉 눈을 감기 3년 전에야 <제 9번 교향악>을 완성한 것이다. 아마도 생의 마지막을 예감하면서 인생과 예술에 대한 투지를 불사르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로망 로란은 베토벤이 정신적으로 고양될 때마다 거의 틀림없이 “환희의 멜로디”가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고 말했었고. 빈 필 무대에 지휘자가 올라섰다. 1악장. 도입부. 빈에서 빈 필이 연주하는 1악장의 도입부. “신비”란 단어 말고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으리라. 일찍이 프루트벵글러가 “우주창조”로 비유했다던 그 부분 말이다. 음반으로 들을 경우, 4악장을 재촉하노라, 건너뛴 적도 있었던 1악장이 이렇게도 신비한 메시지로 다가올 줄이야. 보청기를 쓰고 있는 이 늙은이의 귀에 말이다. 2악장. 짧지만 더 없이 극렬한 음향들, 팀파니의 처절한 울림이 온 몸을 흔들어 준다. 3악장. 다시 찾은 고요. 로맨틱한 주선율, 그러다 4악장의 길목을 다듬는 서정이 나를 완전히 다른 세계로 이끌어가는데..... 드디어 4악장. 현이 연주하는 저음 레치타티보를 떠 바치며 1악장의 선율과 2악장의 선율이 엎치락뒤치락 레치타티보에 밀려났다 다시 고개를 쳐들곤 하다간 다시 울리는 3악장의 선율…. 그런데 저 멀리서부터 “환희의 노래”가 숨바꼭질을 하며 다가온다. 이젠 나는 없어진다. 소리만 있다. 시간이 지난 후에 생각난 일이지만, 소리 성(聲)자는 귀 이(耳)자가 돌로 만든 연장을 이고 있는 형국이라지 않던가. 그러니까 원래 소리는 소리만으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의 귀가 있고서야 소리 구실을 하는 것이라 했던가. 그런데 4악장을 듣는 순간 소리를 듣는 주체인 나는 없어진 것이다. 소리가 나를 삼켜버린 것일까. 그래서 보청기의 구실을 의지할 필요가 없어진 것일까. 하여튼 “O Freunde! nicht diese Tone….”(친구여 그 곡조가 아닐세….) 이후로는 귀가 아니라 온몸으로 듣고 있었다. 그래, “그 곡조가 아닐세...”하는 너무나 엄숙한 부정. 그 부정을 받아서 응답하는 합창과 독창, 그리고 피날레…. 하긴 1824년, <베토벤 교향곡 제 9번>이 초연되었을 때도 청력을 완전히 잃은 베토벤 자신이 지휘했다고 하지 않는가. 정작 지휘를 받는 단원들은 베토벤 곁에 서있는 부지휘자를 따랐다지만. 연주가 끝나자 감동한 청중의 터질 듯한 박수를 듣지 못하는 베토벤. 알토 가수가 손을 잡아 청중석을 돌아보게 하자, 청중들이 열광하는 모습에 베토벤은 얼을 잃을 뻔 했다지 않는가.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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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범
    2018-09-14
  • 이번 일
    ‘사무엘서하’ 11장 1절은 “그러나 다윗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다.”로 끝이 난다. 그런데 “그러나”가 받치고 있는 앞의 문장을 다시 읽어보면 그게 다윗의 인생 후반을 크게 망치는 사단이 된다. “그 다음 해 봄에, 왕들이 출전하는 때가 되자, 다윗은 요압에게 자기의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의 군인들을 맡겨서 출전시켰다.”‘사무엘서’ 이야기꾼은 왕 다윗이 예루살렘에 도사리고 있음을 은근히 나무라고 있는 것 같다. 아예 “왕”이란 칭호 대신 “다윗”이라는 이름을 쓴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 날 저녁에 다윗은 잠깐 눈을 붙였다가 일어나, 왕궁의 옥상에 올라가서 거닐었다. 그 때에 그는, 한 여인이 목욕하는 모습을 옥상에서 내려다보았다. 그 여인은 아주 아름다웠다.” 그것이 다윗의 인생 후반을 완전히 갈라놓은 사단이 될 줄이야! 싸움터에 있어야할 통치자가 궁에 머물고, 전투를 치러야할 지휘관이 사랑에 빠진 것이다. 밧세바는 엘리암의 딸이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우리아는 다윗의 37인 특수부대의 대원으로 지금 싸움터에 있다. 기어이 있어서는 안될 일이 일어난다. 다윗이 밧세바의 임신을 엄폐할 요량으로 전선에서 우리아를 불러들인다. 그러나 우리아는 다윗의 뜻대로 아내 밧세바와 동침해주지 않는다. “우리아가 다윗에게 대답하였다.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모두 장막을 치고 지내며, 저의 상관이신 요압 장군과 임금님의 모든 신하가 벌판에서 진을 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저만 홀로 집으로 돌아가서, 먹고 마시고, 나의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 할 수가 있겠습니까? 임금님이 확실히 살아 계심과, 또 임금님의 생명을 걸고 맹세합니다. 그런 일은, 제가 하지 않겠습니다.” 우리아가 다윗에게 한 말이기라기 보다는 이야기꾼이 독자에게 들려주는 말로 들린다. 이야기꾼은 책임전가를 하려고 안간힘을 다하는 다윗의 처량한 몰골과는 대조적으로, 이방인이면서도 무인의 의리를 지키려 최선을 다하는 우리아를 의도적으로 그려낸다.최고 통치자 다윗은 일개 병사 앞에서 비굴해지는 자신을 어떻게 보았을까? 죄는 사람의 눈을 멀게 한다 했던가. 방해꾼을 제거하는 방법 밖에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게 된 다윗은 요압에게 편지를 써서 우리아의 손에 맡긴다. 우리아가 요압에게 가지고 간 다윗의 편지인즉, “너희는 우리아를, 전투가 가장 치열한 전선으로 앞세우고 나아갔다가, 너희만 그의 뒤로 물러나서, 그가 맞아서 죽게 하여라.” 이었다. 이야기꾼은 요압이 다윗의 의도를 짐작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와 같은 명령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함구한다. 이야기꾼이 전해 주는 후일담을 ‘사무엘서하’에서 간추려 본다. “요압은 적의 저항 세력이 가장 강한 곳에 우리아를 배치하였다. 그 성의 사람들이 나가서 요압의 군인들과 싸우는 동안에, 다윗의 부하들 쪽에서 군인 몇 사람이 쓰러져서 죽었고, 그 때에 헷 사람 우리아도 전사하였다.”요압은 다윗에게 사람을 보내어 전쟁 상황을 전하면서, 다윗의 노여움을 피하는 요령도 귀띔해 주는 등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임금님이 화를 내시며 네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왜 그토록 성에 가까이 가서 싸웠느냐? 적의 성벽 위에서 적병들이 활을 쏠 줄도 몰랐단 말이냐....’ 하시면, 너는 ‘임금님의 부하 헷 사람 우리아도 죽었습니다’하고 대답하여라.”염려했던 것과는 달리, 전령의 보고를 들은 다윗은 말한다. “너는 요압에게, 칼은 이편도 죽이고 저 편도 죽이기 마련이니, 이번 일로 조금도 걱정하지 말라고 전하여라.”하고.다윗이 말한 “이번 일”속에는, 요압이 사람을 보낼 때 혹 다윗이 화를 낼 지도 모른다고 미리 짐작한 “일”들이 모두 꿈틀대고 있을 것이었다. 다윗은 이미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죽이기 위해 덤으로 적의 화살받이가 되게 했던 병사들의 울부짖음조차도 들을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일까. “우리아의 아내는 우리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자기의 남편을 생각하여 슬피 울었다. 애도하는 기간이 지나니, 다윗이 사람을 보내어서, 그 여인을 왕궁으로 데려왔다. 그 여인은 이렇게 하여서 다윗의 아내가 되었고, 그들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다.” “그러나 주께서 보시기에, 다윗이 한 이번 일은 아주 악하였다.”enoin34@na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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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범
    2018-08-31
  • 올리브나무와 가시나무
    “하루는 나무들이 기름을 부어 자기들의 왕을 세우려고 길을 나섰습니다. 그 들은 올리브 나무에게 가서 말하였습니다. ‘네가 우리의 왕이 되어라.’ 그러나 올리브 나무는 그들에게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어찌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는, 이 풍성한 기름내는 일을 그만두고 가서, 다른 나무들 위에서 날뛰겠느냐?’ 그래서 나무들은 무화과나무에게 말하였습니다. ‘네가 와서 우리의 왕이 되어라.’ 그러나 무화과나무도 그들에게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어찌 달고 맛있는 과일 맺기를 그만두고 가서, 다른 나무들 위에서 날뛰겠느냐?’ 그래서 나무들은 포도나무에게 말하였습니다. ‘네가 와서 우리의 왕이 되어라.’ 그러나 포도나무도 그들에게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어찌 하나님과 사람을 즐겁게 하는 포도주 내는 일을 그만두고 가서, 다른 나무들 위에서 날뛰겠느냐?’ 그래서 모든 나무들은 가시나무에게 말하였습니다. ‘네가 와서 우리의 왕이 되어라.’ 그러자 가시나무가 나무들에게 말하였습니다. “너희가 정말로 나에게 기름을 부어, 너희의 왕으로 삼으려느냐? 그렇다면, 와서 나의 그늘 아래로 피하여 숨어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가시덤불에서 불이 뿜어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살라 버릴 것이다.”(사사기 9장 8절-15절) 미디안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해낸 카리스마적 영웅 기드온에게는 70인의 자식이 있었다. 기드온이 죽자, 평소에 서자 취급을 받던 아비멜렉이 나서서, 70인이 다스리는 것보다, 자기 한 사람이 다스리는 것이 낫지 않느냐며, 사람들을 부추기고, 은 70개로 건달들을 매수하여 쿠데타를 일으킨다. 그리하여 아비멜렉이 처음으로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칭호를 차지하게 된다.첫머리에서 인용한 “비유”는 기드온의 아들 중에 학살을 면한 막내아들 요담이 그리심 산 꼭대기에 올라가 서서, 아비멜렉을 따라 백성들이 일으킨 일련의 사건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마뜩찮은 일임을 백성들에게 알리자고 들려준 비유이다.요담이 호소한다. “여러분이 아비멜렉을 세워 왕으로 삼았으니, 이 일이 어찌 옳고 마땅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나의 아버지는 여러분을 살리려고 싸웠으며, 생명을 잃을 위험을 무릅쓰고 여러분을 미디안 사람들의 손에서 구하여 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이제 여러분은 나의 아버지의 집을 대적하여 일어나, 일흔 명이나 되는 그의 아들들을 한 바위 위에서 죽이고, 우리 아버지의 여종의 아들 아비멜렉을 여러분의 혈육이라고 하여서, 오늘 세겜 성읍 사람을 다스릴 왕으로 삼았습니다.”그러나 요담은 그 길로 브엘로 가서 피하였고, 아비멜렉은 이스라엘을 세 해 동안 다스렸다. 악을 다스리는 것도 악이라 했던가. “그 때에 하나님이 악령을 보내셔서, 아비멜렉과 세겜 성읍 사람들 사이에 미움이 생기게 하시니, 세겜 성읍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였다. 하나님은 아비멜렉이 기드온의 아들 일흔 명에게 저지른 포악한 죄과를 이렇게 갚으셨는데, 자기의 형제들을 죽인 피 값을, 아비멜렉에게, 그리고 형제들을 죽이도록 아비멜렉을 도운 세겜 성읍 사람들에게 갚으신 것이다.” 악이 오른 아비멜렉은 자기를 순종하지 않는 세겜 사람들을 죽이고 소금을 뿌리는가 하면, 지하 동굴에 피해있는 사람들을 불살라 죽였다. 그러나 끝내 아비멜렉은 한 여인이 내던진 맷돌 위짝에 맞아 죽는다. 그가 마지막으로 졸병에게 남긴 말은 “네 칼을 뽑아 나를 죽여라! 사람들이 나를 두고 여인이 그를 죽였다는 말을 할까 두렵다.” 이었다. 파스칼은 인간이 지닌 가장 큰 악덕은 ‘자기사랑’이라 했다. “인간은 ‘자기사랑’으로 해서 타자 앞에서는 결함에 찬 자신을 미화할 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조차도 그 참 모습을 위장한다. 그리하여 자신이 불완전한 존재임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자아는, 자신의 결함을, 자신은 물론 타자에 대해서도 감추기 위해 갖은 배려를 다한다. 그 결함이 타자에게 보이게 되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한다.”파스칼이 한 친구와의 대화를 가상한 이야기에서, 친구가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대로,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게만 대한다면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지 않을 것이 아닌가.” 하자 파스칼이 다음과 같이 대꾸한다. “이러한 우호적 자세는 타자의 눈에 비치는 불쾌감을 덜어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자아의 근본적인 ‘부정’을 없애 주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이웃에 대한 보은과 배려는 위장된 것일 뿐인 것을.”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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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범
    2018-08-23
  • 코헤렛은 예언자가 아니었다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오지만/ 세상은 언제나 그대로다./해는 여전히 뜨고 또 여전히 져서/ 제 자리로 돌아가며, 거기에서 다시 떠오른다.// 바람은 남쪽으로 불다가, 북쪽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고 저리 돌다가, 불던 곳으로 돌아간다.//...이미 있던 것이 훗날에 다시 있을 것이며,/ 이미 일어 났던 일이 훗날에 다시 일어 날 것이다./ 이 세상에 새 것이란 없다.”(전도서 1:4-9) 코헤렛은 역사를 알고 있다. 아니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그의 눈은 소용돌이치고 있는 현실을 응시하며, 동시에 그들의 과거와 역사를 성찰함으로 삶의 의미를 찾아보려 몸부림친다. 그런 의미에서 코헤렛은 그가 살던 시대 이전에 살았던 많은 예언자들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그는 예언자가 아니다. 아니 예언자인 척 하지 않았다. 히브리 사람들은 율법을 하나님의 명령이라며 지키고, 그들의 과거를 하나님의 뜻이라며 기억하였다. 그 시대 시대마다 선각자들이 있어, 고난과 실패로 얼룩진 민족의 역사를 기록하여, 민족의 유산으로 삼고 자녀들에게 가르쳐 그 역사를 정확하게 다음 세대에 물려주려 했다. 이런 선각자들을 그들은 예언자라 일컬었다. 오랜 세월을 입에서 입으로 전해온 민족의 역사적 전승과 이야기들은 후에 역사가들의 손에서 수집 정리 기록되었고, 그 기록들에 다시 이어지는 시대마다의 민족적 경험들이 첨가되었다. 역사가들은 다음 세대가 알 수 있도록 주석과 해석을 덧붙였다. 그들은 민족의 과거를 기억하고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일을 하나님의 율법이라 생각했다. 그러는 사이 히브리인들은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들과 그들 주변에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을 역사적으로 볼 줄 아는 유일한 민족으로 성장하게 된 것이었다.그들에게 있어 제사는 단순한 기복행위가 아니라, 과거의 체험과 역사를 민족의 기억으로 이어가는 공동체적 축제이기도 했다. 해마다 되풀이 되는 제사에 참여함으로써 그들은 과거를 기억하고 조상들의 체험을 그들의 것으로 이어나갔던 것이다.그들은 그들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천지창조의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히브리 민족의 탄생, 이스라엘 국가의 성립과 멸망, 포로로 지냈던 바빌로니아에서의 체험, 조국 팔레스틴에의 귀환과 수도 예루살렘의 재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건들을 전해주는 구약성서는 고대역사에서 달리 그 예를 찾아 볼 수 없는, 그들만의 역사일 뿐만이 아니라, 그 역사를 통해서 그들만이 들을 수 있었던 하나님의 음성의 기록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작업은 길고 긴 민족의 역사를 그 순서를 따라 역사적으로 관찰 정리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독립적으로 일어난 사건과 사건들 그 너머에 있는 서로의 유기적 연관성을 읽으려 했다. 히브리 역사가들이 하는 일은 단순히 과거 사건들의 나열에 머물지 않았다. 그 역사의 배후에 있는 의미, 즉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려 했던 것이다. 그들은 그런 일을 하는 이들을 예언자, 즉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라 불렀던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코헤렛은 역사가도 예언자도 아니었다. 그는 시인이었다. 전도서 7장 14-20을 읽으면서 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하고, 소인은 동이불화(同而不和) 한다는 공자의 말을 떠올렸다.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고 하고 공존하려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和)는 관용과 공존을 말한다. 이와 반대로 동(同)은 지배와 흡수합병의 논리이다.“생명체에는 직선이 없다.”는 말이 생각난다. 아메바가 생명체의 기본 형태라고 한다면, 우리는 아메바를 보면서 생명이 어떤 것이지를 느낄 수 있다. 음악을 들을 때, 유니슨이나 관악기의 투티는 힘이 있고 호소력이 강해서 듣기에 좋다. 그러나 오래 자주 듣게 되면 지루해지거나 귀에 거슬리게 된다.그러니까, 일사불란하게 한 목소리로 호소하는 유니슨이나, 투티도 결국은 음악전체의 다양성을 위한 여러 자료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 이상의 역할을 하려고 할 때, 밉상스러워 진다. 일본말로 “쯔루노 히도고애” 라는 말이 있다. “두루미의 외마디면 그뿐”이란 말로, 군주나 세도가가 한마디 하면 모든 논의가 끝이 난다는 뜻이지만, 반대로 “두루미는 단지 그 한마디 밖에 모른다.”는 뜻도 된다.더위에는 코헤렛이 제격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8-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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