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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셰익스피어의 ‘리어왕’ 다시 읽기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있지만,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이 다루고 있는 주제가 바로 그게 아닐까 싶다. <리어왕>은 사람을 “안다”는 것이 어떤 일인가를 다룬 연극. 우리가 “안다”하고 말할 때, “안다”가 무엇인지를 여러 장면과 대사들을 통해서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성서를 연구하는 이들에게 <성서 컨커던스(Concordance)>가 필요불가결의 자료이듯, 셰익스피어 감상자에게는 <셰익스피어 컨커던스>가 그렇다. 셰익스피어의 모든 희곡에서 “I Know +***”을 뒤질라치면 20개 항을 얻을 수 있다는데, 모두가 <리어왕>에서 얻을 수 있다니, 그래서들 <리어왕>이 “사람을 알게 하는” 연극이라 말하는지도 모른다. 작품은 두 부자관계, 리어왕과 세 딸(고너릴, 리건, 코디리어) 및 그로스터와 두 아들(에드거, 에드먼드)를 그리고 있는데, 양쪽 부친이 모두 자식에게 배신당한다. 한 쪽은 정신이상, 다른 쪽은 고문으로 실명하는데, 고유명사가 주어진 등장인물 14명 중 8명이 비명으로 죽게 되는 <리어왕>은 곧 “안다”가 잘못됨에서 오는 비극이라 할 수 있다. 감상자에 따라 다를 수 있겠으나, 작품 중 가장 인상적인 대사를 들자면, “너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지. 너의 이름은 글로스터”(I Know thee well enough, thy name is Gloucester)가 아닌가 싶다. 독자들이 이미 알고 있듯이, 리어왕은 믿었던 두 딸에게 배신당한다. 그것은 리어가 세 딸에 대해서 알지 못했기 때문. 여든을 넘긴 리어왕이 “왕국을 셋으로 나누어, 애비를 가장 생각하는 딸에게 큰 선물로 주겠다.” 하고 나선자, 장녀 고너릴이 “아버지에 대한 나의 사랑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하고 말하고, 둘 째 리건도 비슷한 말을 토해낸다. 그러나 셋째 코디리어는 아버지에 대한 사려가 깊은 나머지 아무 말도 못하자, 화가 치민 아비는 막내를 추방해 버린다. 이를 만류하는 충신 켄트백작마저도... <리어왕>의 비극은 이렇게 시작된다. 왕은 두 딸의 입에 발린 말만 곧이듣고 속내는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막내의 진정어린 말뜻에 대해서는 알아보려하지도 않았다. 아첨과 과장 덕택으로 많은 영토를 차지한 두 자매와 빈손이 된 막내가 이별하는 장면에서, 막내가 언니들에게 말한다. “I Know you what are you”하고. 언니들의 정체, 미사여구로 늙은 아버지를 호리는 두 언니의 본성을 잘 알고 있다는 말일까. 그리고 이 대사가 연극 전체의 프로세스를 예고한다. 막내 코디리어가 사라지자, 둘 째 리건이 아비에 대해서 말한다. “He hath ever but slenderly known himself(자신에게 대해서는 조금도 아시지 못했지)”하고. “안다”고 하는 말은 다른 사람만이 아니라 자신도 포함한다는 뜻일까. 4막7장 리어가 추방한 막내와 재회하는 장면에는 추방당했던 충신 켄트가 함께 한다. 딸이 아비에게 묻는다. “Sir do you know me?” 이미 제정신이 아닌 리어는 “영혼이로군. 알고 있지. 어디서 죽었지?” 했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는 “그대도 이 사나이를 알고 있는 것 같은데”하고 말한다. 이렇게도 서글픈 모습이 되고서야 그나마 충신과 막내딸 그리고 아버지는 서로의 진정성을 이해하게 되다니. 5막에서는 “I Know...”라는 대사는 나오지 않는다. 남편을 잃은 리건과 아직 남편이 있는 고네르리의 사이가 험악해져 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너댓의 인물이 죽어가는 장면이 대신 비극의 동기를 일깨워준다. 작품 중 최고의 악당 에드먼드는 첫째와 둘째 모두와 정을 통한다. 이 삼각관계로 해서 첫째는 둘째를 독살하고 자신도 자살한다. 에드먼드도 죽고. 한편 리어왕과 막내는 브리튼군의 포로가 되는데, 에드먼드의 지령으로 막내가 교살 당하자, 딸의 유해를 안은 리어가 절규한다. “왜 너는 숨을 쉬지 않지? 이젠 돌아오지 않으리. 다시는, 다시는,...다시는...” 그리고 절명한다. 장송곡이 울리고... 올해가 셰익스피어(1564-1616)서거 400주년. 4대 비극 중 가장 이해하기 어렵다는 <리어왕>을 더듬으면서 좀 더 자상하게 다루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주인공 리어왕의 마지막 절규를 제대로 음미할 수 있다면 그나마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해본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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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2-07
  • 서정주의 ‘가을에’를 읽는 가을
    이렇게도 눈부신 가을 햇살이 슬픔일 줄이야! “본시 평탄했을 마음 아니로다 / 구지 톱질하여 산산 찌저노았다”(김영랑 ‘한줌 흙’)데자뷔(Dejavu)라 했던가? 시인 박이도는 그의 시 ‘데자뷔’에서 ‘전도서’를 인용한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 이미 한 일이 후에 다시 한지라.” <전도서 1:9> 그래, 지금 보고 있는 슬프디 슬픈 가을 햇살은 결코 처음 보는 풍경은 아닐 지도 모른다. 시인의 말처럼 “결국 나의 시적 사유나 오감을 넘어 육감에 이르기까지의 감관은 시공을 넘나드는 착시현상의 즐거운 낙원”일지도. 6.25라 부르던 전쟁은 끝났다지만, 실감과는 거리가 먼 허탈 속을 해매든던 청춘은 서정주의 ‘가을에’를 읊었다. 막 생겨난 음악 감상실을 드나들며. “쫓겨나는 마당귀”를 두고 입씨름을 벌이면서, 저마다의 공책에 옮겨 적은 시구가 서로 틀렸어도, 감상실에 죽치고 있는 시인들의 해석이 서로 엇갈려도, 그냥 ‘가을에’를 읽었다. “오게 / 아직도 오히려 사랑할 줄 아는 이, / 쫓겨나는 마당귀마다, 푸르고 여린 문(門)들이 열릴 때는 지금일세 //오게 / 저속(低俗)에 항거(抗拒)하기에 여울지는 자네, / 그 소슬한 시름의 주름살들 그대로 데리고 / 기러기 앞에서 떠나가야 할 / 섧게도 빛나는 외로 운 안행(雁行)- / 이마와 가슴으로 걸어야 하는 / 가을 안행(雁行)이 비롯해야 할 때는 지금일세. // 작년에 피었던 우리 마지막 꽃- / 국화(菊花)꽃이 있던 자리, / 올해 또 새것이 자넬 달래 일어나려고 / 백로(白鷺)는 상강(霜降)으로 우릴 내리 모네. //오게 / 헤매고 뒹굴다가 가다듬어진 구름은 / 이제는 양귀비(楊貴妃)의 피비린내 나는 사연으로는 / 우릴 가로막지 않고, / 휘영청한 개벽(開闢)은 또 한번 뒷문(門)으로부터 / 우릴 다지려 / 아침마다 그 서리 묻은 얼굴들을 추켜들 때 일세. //오게 / 아직도 오히려 사랑할 줄을 아는 이 / 쫓겨나는 마당귀마다 푸르고 여린 문(門)들이 열릴 때는 지금일세. //”데자뷔라 했던가. 그날의 청춘이 오늘 다시 ‘가을에’를 읽는다. 이마저 없다면 무엇으로 안주를 할꼬. 그래 그날 들었던 그 재촉소리도 들려온다. “저기 저기 저, 가을 꽃가지 /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 // 눈이 내리면 어리하리야 / 봄이 또 오면 어이하리야” 미당의 시 ‘푸르른 날’ 말이다. 더듬거리다 보면 모두 되살아나 줄지 아는가.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가지 /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 // 눈이 내리면 어리하리야 / 봄이 또 오면 어이하리야 //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어이하리야”를 읊조리던 그리운 벗, 그는 그냥 그리운 사람이 되고 만 터에, <푸르른 날>을 부르다가 목이 멘다. 그라도 곁에 있어준다면. 아니다, 차라리 가길 잘 했지 푸념하면서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며 다시 목이 멘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을꼬. 지난 해 백내장 수술을 한 탓으로 푸르른 하늘이 더 눈부셔 진 탓일까. 코헤렛의 탄식을 되씹는다.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찌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전도서 1:8-10)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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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1-24
  • 아합과 이세벨 그리고 엘리야
    아합이 페니키아 시돈의 공주 이세벨을 왕비로 맞은 것은 결과적으로 큰 골칫거리를 떠안는 일이 된다. 그것은 아합이 한 여인으로서 이세벨을 좋아할 수 없어하는 따위의 일은 아니었다. 아합은 성실한 편이어서 국력신장을 위해 애썼고 나름대로 성과도 거두었기로 그의 이름은 멀리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통치자들에게도 알려 지고 있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북동쪽의 아람 여러 나라들, 시리아 남부, 그리고 팔레스티나 북부의 세력들과 패권을 다투고 있어, 다윗 솔로몬 시대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상황. 힘 있는 페니키아와의 우호는 여러 측면에서 유리했다. 문제는, 통치자에게도 서슴없이 의견을 드러내기를 주저하지 않는 전통을 가지고 있는 히브리인들을 다스려야할 이스라엘의 왕이, 그런 전통과는 거리가 먼 한 외국 여인의 간섭에서 발생되는 트러블이었다. 2세기 전, 솔로몬 당시에도 그랬었다. <열왕기상>11장 들머리에서 읽을 수 있듯이, 솔로몬은 이집트, 모압, 암몬, 에돔, 시돈, 히타이트 등지에서 많은 여인들을 궁정으로 데려왔고, 그녀들이 가지고 온 이국적 문화와 가치관은 솔로몬 통치 말년의 이스라엘에, 사회적 정치적 혼란을 야기하고 왕국분열의 원인이 되었었다. 이세벨 말고 아합에게 다른 여인들이 더 있었는지, 그 수가 얼마가 되는지에 대한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확실한 것은 그 누구도 아합과 이세벨 사이를 비집고 들어 직접 왕에게 간언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그만큼 아합 궁정에서 이세벨의 영향력은 강했던 것이다. 정치가로서 혹은 군인으로서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던 아합이 페니키아 여인 이세벨만은 제대로 다루지 못 했던 것이다. 궁정 안팎은 온통 화려한 페니키아 색깔로 칠해진다. 한 고대 히브리 역사가가 남겨준 주석을 보자 “자기 아내 이세벨의 충동에 말려든 아합처럼, 주님께서 보시기에 이렇게 악한 일을 하여 자기 목숨을 팔아 버린 사람은, 일찍이 없었다.”(<열왕기> 21: 25)이런 아합을 비난하는 자는 오직 예언자 엘리야. 이세벨이 보낸 자객의 손을 벗어나기도 했던 엘리야가 아합은 귀찮고 성가셨다. 얼굴만 보아도 안정을 잃게 될 지경이었다니. 아합이 엘리야에 말했다. “그대가 바로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요?” 엘리야가 응수한다.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임금님과 임금님 아버지의 가문이 괴롭히는 것입니다. 임금님께서는 주님의 계명을 내버리고, 바알을 섬기십니다.(<열왕기상>18:17-18)사실은 아합도 이세벨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나 물밑에 잠겨 있던 문제들이 구체적인 사건이 되어 수면위로 얼굴을 드러나게 한 것은 바로 나봇의 포도원 사건이었다. “아합은,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그 포도원을 조상의 유산이라는 이유로 양도하기를 거절하였으므로, 마음이 상하였다. 화를 내며 궁으로 돌아와서, 침대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음식도 먹지 않았다.(<열왕기상>21:4) 왕궁을 늘리기 위해 인접해있는 포도원을 양도받기를 원한 아합의 간청을 물리친 소유주 나봇의 응답을 접한 아합의 모습이다. 한낱 백성의 말에 기가 죽어 입맛을 잃은 남편 아합을 본 이세벨이 나선다. “당신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임금님이 아니십니까? 일어나셔서 음식을 드시고, 마음을 좋게 가지십시오. 내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임금님의 것으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녀의 말은 곧 실천으로 옮겨진다. 장로들에게 왕의 이름으로 편지를 써서 보내는데, 내용인즉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는 누명을 씌워 깡패들로 하여금 죽이게 하라는 것. 장로들의 손이 떨린다. 왕의 이름으로 된 편지이지만 그것이 이세벨의 장난임은 불문가지 아니던가. 이세벨로부터 나봇이 죽었다는 말을 들은 아합은 곧 나봇의 포도원으로 달려간다. 그를 막아서는 엘리야를 향하여 아합은 말한다. “내 원수야, 네가 또 나를 찾아왔느냐?” 엘리야가 대답한다. “임금님은 목숨을 팔아 가면서까지, 주님 보시기에 악한 일만 합니다. “ 그러나 한 나라의 혼란을 수습한 것은, 살아서 하늘로 올라갔다는 엘리야가 아니라, 땅에 발을 붙이고 있는 예언자 엘리사였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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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범
    2016-11-11
  • 다윗 그리고 나발과 아비가일
    사무엘이 죽은 후, 떠돌이 다윗이 파란 광야로 활동 무대를 옮겨갔을 때, 숙명적으로 만나지 않으면 안 될 두 사람은 나발과 그의 아내 아비가일이었다. 나발은 갈렙 족속으로 큰 부자. 성서는 나발을 소개하면서 재산목록을 기록하고 있는데, 목장과 기르는 양 3,000마리와 염소 1,000마리의 소유주라고. <사무엘서>는 나발은 고집이 세고 포악한 성격의 소유이지만, 아내 아비가일은 이해심도 많고 용모도 아름답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녀가 있었기에 다윗이 스스로의 혈기를 눌러 피를 흘리지 않고도 왕이 될 수 있었다며 아비가일의 미덕을 추켜세운다. 다윗은 나발이 양털을 깎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종자들을 보냈다. 다윗은 그의 종자들이 나발을 그의 형제라 부르도록 타일러 두었다. 떠돌이 폭력집단의 두목으로서는 나름대로의 예의를 갖춘 셈이지만, 나발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다윗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 보는 것처럼 거드름을 피운다. 어엿한 사업가인 그가 어떻게 불한당들과 상종할 수 있겠느냐는 듯이. 다윗 패거리는 주인에게서 도망쳐온 종들의 집단에 불과하다며, 다윗이란 이름 대신 이새의 아들이 누구냐며 되묻기도 한다. 종자들의 보고를 받은 다윗은 주먹 패의 두목답게 곧 나발을 징계하러 나선다. 칼을 차고 다윗을 따르는 장정이 400이라 했다. 진지에는 200만 남기고. 낌새를 알아차렸을까 아니면 내통해주는 이가 있었을까. 하여튼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은 재빨리 빵 200덩이와 포도주 두 부대, 요리한 양 다섯 마리, 볶은 곡식, 건포도와 무화과 뭉치들을 준비하여 여러 마리의 나귀에 실어 다윗에게 보내고 자신은 그 뒤를 따랐다. 물론 남편 나발에게는 알리지 않은 채. 산등성이를 내려오는 다윗 일행과 마주치자 아비가일은 나귀에서 내려 다윗 앞에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댄다. 다윗을 ‘아도나이’(나의 주)로 부르고 자신은 ‘아마드카’(당신은 나의 주인)라 칭한다. 아비가일이 말한다. “장군께서는 나의 몹쓸 남편 나발에게 조금도 마음을 쓰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은 정말 이름 그대로, 못된 사람입니다. 이름도 나발인데다, 하는 일도 어리석습니다. 그런데다가 장군께서 보내신 젊은이들이 왔을 때에는, 내가 거기에 있지 않아서, 그들을 만나지도 못하였습니다.”그리고 아비가일은 다윗이 사람을 죽이거나 몸소 원수를 갚지 못하도록 막아주신 분이 야훼하나님이라고 천명한다. 뿐만 아니라, 다윗을 해치려는 모든 원수들은 나발처럼 저주받기를 원한다고 말하자, 다윗은 순순히 돌아선다. 아비가일이 집에 돌아왔을 때, 남편 나발은 양털 깎기를 마치고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나발은 자기가 왕이나 된 것처럼 술잔치를 벌이면서도 정작 앞으로 왕이 될 사람의 요청은 거절한 것이다. 나발이 술에서 깨어나자 아비가일은 일어난 모든 일을 말해준다. 그녀가 말한 ‘모든 일’안에 어떤 일이 포함되고 어떤 일이 제외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녀와 다윗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다는 암시라도 한 것일까. 그렇지 않고서야 나발이 그 말을 듣고 갑자기 심장이 멎고 몸이 돌처럼 굳어질 수 있었겠는가? 아비가일의 정숙함과 아름다움이란 범인의 짐작으로는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깊이 있는 내용들을 함축하고 있을 그런 차원의 것일 지도 모른다. 하여튼 자초지종을 들은 나발은 심장이 멎고 몸이 돌처럼 굳어졌다. 열흘이 지나 야훼께서 나발을 치시자 그가 죽었다. 야훼께서 누구의 손을 빌렸는지는 밝히지 않는다. 혹 아비가일이? 하고 추측하는 것은 망령된 일이 될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는 양 3000마리 가운데 다섯을 아끼려다 목숨을 포함하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은 나발. 그러니까 그의 이름은 바보였던 것이다. 다윗은 나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자기가 직접 그를 죽이지 않게 된 일을 하나님께 찬양하면서, 나발은 자기가 저지른 죄 값을 받았다고 말하였다는데, 다윗은 곧 사람을 보내어 아비가일에게 구혼을 했고, 아비가일은 물론 받아들였다는 것이 성서의 기록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 모든 일을 야훼의 직접적인 행위로 돌리는 것이 성서의 기록이다. 그러는 것 말고 하나님의 뜻 혹은 역사의 의미를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는가하고 고개를 끄덕여보기도 하지만, 오늘날 같으면 청문회 꺼리가 되고도 남을 사건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게 한 쪽은 히브리인의 도량이기보다는 지혜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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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범
    2016-11-03
  • 이웃의 자신감을 일그러지게 하는 언동에 대해서
    “선생님, 내 형제에게 명해서, 유산을 나와 나누라고 해주십시오.” 하며 다가오는 이에게 예수는 말한다.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분배인으로 세웠느냐?” 그리고 돌아서서 사람들에게 말한다. “너희는 조심하여, 온갖 탐욕을 멀리하여라. 재산이 차고 넘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거기에 달려 있지 않다(눅 12장 13절 이하).”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2부에서 말했다. “자신의 정의로움을 과시하기 위해 많은 말을 하는 자라면 누구든지 믿지 마라!...그리고 그들이 착하고 의로운 자임을 자칭할 때 잊지 말라. 그들이 바리새인이 되는데 있어서 모자라는 것은 다만 권력뿐이라는 사실을!”예수 어록의 패러디 같다. <누가의 복음서> 12장 첫 머리를 아울러 읽어준다면 말이다. “너희는 바리새파 사람의 누룩 곧 위선을 경계하여라. 가려 놓은 것이라고 해도 벗겨지지 않을 것이 없고, 숨겨 놓은 것이라 해도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것들을 사람들이 밝은 데서 들을 것이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인 그것을 사람들이 지붕 위에서 선포할 것이다.” 니체는 신종 바리새파 사람의 꽁무니에 감추어진 권력욕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는데 이골이 나있는 당사자들은 자신의 꽁무니를 살펴볼 여유가 없다. 힘과 돈을 가지지 못한 약자만이 정의이고 강자는 부정이라는 단순한 주장은 따지고 보면 힘을 가지지 못한 이들에 대한 모욕적 발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애써 고개를 돌려버린다. 어떤 약자에게도 자존심이 있고 삶에 대한 의욕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차라투스트라> 2부 ‘구제에 대해서’ 참조)단 한 사람이라도 불행한 사람이 있는 사회는 복지국가가 될 수 없다며 기염을 토하는 이들, 있을 수 있는 여러 전제들을 깡그리 무시하고, 만인의 평등을 주장하는 이들의 히스테릭한 목소리에 지쳐버린 오늘, 니체의 목소리를 다시 한 번 음미해 보고 싶어진다. 니체는 나름의 독설을 내뱉는다. “여러분 평등의 설교자들이여!...독재자적 광기가 여러분 속에서 ‘평등’을 요구하며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이다...그들이 말하고 있는 불평 하나하나에서 복수의 가락이 들려온다. 그들이 제공하는 찬사 하나 하나에는 사람을 해치고자 하는 의도가 감추어져 있다. 그들은 타자를 재단하는 인간이라는 것이 더 없는 행복으로 여겨지고 있는가 싶다.”진정한 복지는 시혜도 은혜도 아닐 것이다. 곤경에 처한 이들이 살아갈 용기를 얻을 수 있는 동기와 의욕을 가지도록 도와주는 일이야 말로 가장 요긴한 복지가 아니겠는가. 겉으로 드러나는 동정이나 물질적 보호가 필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악조건에 처해진 이라 할지라도, 때로는 자신이 져야 할 일부의 책임과 성격상의 결함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는 내성의 자세로 스스로를 가다듬을 여유를 가질 수 있어야한다는 말이다. 모두를 세상 탓으로 돌리며 “그래서 나는 불행하다” 하는 한 참다운 용기는 생겨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세상을 원망하는 실패자를 무수히 보아왔다. 못지않게 자신의 진정한 능력마저 알아차리지 못하고 우연을 필연으로 바꾸어버린 성공자들 또한 많이 보아왔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통해서 말한다. “주사위를 던져 행운을 잡고서는 ‘왔다!’ 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수치심을 느끼는 인간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이 아니겠는가?” “혹 내가 부정한 내기를 한 것이 아닐까” 하고, 한 발 물러서서 스스로 의문을 품어보는 자야말로 차라투스트라가 이상형으로 여기는 사람이었다. 우리 사회에 제도상의 불비가 많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노력이나 삶의 보람까지도 상실하게 하는 무차별적이고 일률적인 평등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일이다. 그것은 또 하나의 정의를 상실하게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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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범
    2016-10-20
  • 포클랜드 스피릿
    “철의 여인” 마가렛 대처의 영구차가 세인트폴 대성당으로 가던 도중, 관이 포차(砲車)로 옮겨지면서 런던탑에서는 1분 간격으로 예포가 울렸다. 3대의 대포 중 2대는 포클랜드 전쟁에서 쓰던 것. 관을 실은 포차 뒤로는 해군음악대와 포클랜드 전투에 종군했던 부대가 따랐다. 대처의 장례는 포클랜드 전쟁의 회상 그것이었다. 그녀가 취임 4년째였던 1982년에 아르헨티나와 치렀던 그 전쟁 말이다. 남미대륙 남쪽에 위치하는 포클랜드 제도는 영국이 1833년에 식민지화한 이래 아르헨티나와는 영유권을 두고 승강이가 가시지 않았다. 1960년대로 들어서면서 영국은 “통치는 계속하되 주권은 아르헨티나에게 이양해도 좋다”며 한 발 물러선다. 1981년 12월, 정권을 잡은 갈티에리 장군이 주도하는 군사정권이, 실패한 경제정책으로부터 국민의 눈을 돌리기 위해, 1982년 4월 2일, 포클랜드 제도를 침공하자, 영국은 즉각 항공모함들을 파견하여 전투가 시작된다. 대처수상이 개전을 선언하자 각료와 우호국들이 교섭과 양보를 종용하지만 수상은 일체의 타협을 배제한다. 기어이 섬을 탈환해서 군사적 승리를 거두겠다고 나섰다. 대처가 말했다. “흔해빠진 독재자가 여왕의 백성을 지배하고, 부정과 폭력으로 승리를 거두게 버려둘 것인가? 내가 수상인 한 그렇게 할 수는 없다.” 대처가 “철의 여인”의 긍지를 드러낸 것은 동맹국인 미국에 대해서였다. 20세기 초, 세계의 패권이 영국으로부터 미국으로 옮겨지고, 영국은 미국을 지탱하는 주니어 파트너가 되었지만, 대처는 의연한 자세로 미국을 대한 것이다. 당시 포클랜드의 인구는 약 1800만, 목축과 어업 말고는 주목할 만한 산업이 없는 터에, 레이건 미 대통령은 “얼음과 같이 차고 쓸모없는 땅”이라며 화해를 권했다. 그러나 대처는 대통령의 중재를 거부하는 편지를 쓴다. “침략자가 점령하고 있는 데도 전투를 피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큰 착오입니다. 그것이 잠재적 긴장지역이나, 작은 나라에 미치는 의미는 지극히 심각한 것입니다. 자유세계가 의지할 수 있는 근본적 원칙을 깨뜨려 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영국으로 부터 1만 3000킬로 떨어져 있고, 항공모함을 파견하는데도 3주나 소요되는 남대서양에서의 전투에 무려 2만8000의 병력과 100척의 군함을 투입했다. 6월 14일 아르헨티나는 항복했다. 74일간에 걸친 전투에서 아군 255명, 적군 649명의 전사자를 내고. 그만한 손실을 치를 가치가 있었을까? <대처 회고록>은 말한다. “영국의 존재감이 작아짐으로 가장 고통스러웠던 경험은, 1956년 수에즈운하에서의 퇴패였다. 그것은 영국인의 혼에 스며들었다. 세계 속 영국의 지위에 관한 국민의 시선을 왜곡되게 해버렸다.” “전시이건 평시이건 영국은 자국의 이익을 지킬 의지와 능력이 없는 나라로 인정받게 되었다.” “수에즈위기는 영국사회를 갈라놓았고, 국민은 자신감을 잃고 내향적이 되었다. 젊은이들에게는 정치를 멸시하는 풍조가 생겼다. 베트남 전쟁이 미국을 내향적으로 만들어버린 ‘베트남 증후군’을 따라 ‘수에즈 증후군’이라 일컫게 되었다.”포트랜드전의 승리에 환호하는 국민에게 수상은 말했다. “우리는 퇴패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머리를 쳐들고 영국인임을 자랑합시다.” 미국의 뉴스위크지(1982년 4월 19일자)는 “The Empire strikes Back”(제국이 역습했다.) 하고 썼고, 취임 1년 반에 23%이던 대처의 지지율은 하루 밤 사이에 그녀를 영웅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또 하나의 여인 엘리자베스여왕과의 관계는 한 동안 어색하고 서먹서먹했다. 계급이 다를 뿐만 아니라 개성도 달랐기에. 여왕은 대처에 대해서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녀의 업적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에 반해버렸다고 했다. 영국의 수상은 매주 한 번, 여왕과 회견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다. 여왕은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 제도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나마 영향을 끼칠 여지는 남아 있었다. 회견에는 아무도 동석하지 않고 그 내용은 절대로 드러내서는 안되었다. 대처는 11년에 걸쳐 매주 여왕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둘의 관계는 매스컴의 관심의 중심이었다. 만약 우리나라 정객이라면 몰래 녹음해서 SNS로 흘렸을 법도 하지만. 그녀와 영원한 이별을 고하면서 여왕은, 군주는 평민의 장례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전통을 깨는 것으로, 둘 사이의 불화설에 종지부를 찍었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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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범
    2016-10-13
  • 유대전쟁에 대한 요세푸스의 증언
    정의란 그것을 내걸고 나선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허락된다는 망상을 갖게 한다. 게다가 그들에게 힘이 실려지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어진다. 로마의 지배로부터 동포를 구해낸다는 대의를 내걸었던 2천 년 전의 유대인이 그랬고, 성지탈환의 대의를 내걸었던 십자군이 그랬다. 요세푸스를 더듬다 보면, 로마에 대한 유대인의 항전기록은 그대로 현대사에서도 낯선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신정체제의 기치를 내걸고, 동포를 로마로부터 해방하기 위해 일어난 ‘제롯당’이나 ‘시카리’가 오히려 동포를 약탈하고 학살한 기록 말이다.당시의 유대민족이 과격파의 기치에 따라나설 수밖에 없는 안성맞춤의 빌미를 제공한 인물이 로마의 총독 프로로스였다. 요세푸스는 치를 떨며 <파멸의 길>의 첫 머리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총독 아르비노스의 후임으로 네로가 파견한 게시어스 프로로스는 많은 불행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소아시아 출신으로 교활하기로는 그에게 지지 않을 아내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부임해왔다. 그가 총독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녀가 네로의 애첩 포페아와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프로로스는 사복을 채우기 위해서라면 악덕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았다. 요세푸스의 글은 이어진다. “프로로스는 너무나도 악랄하게 권력을 남용했다. 그 결과 곤궁의 밑바닥에 떨어진 유대인은 전임자인 아르비노스를 은(銀)이었다고 칭찬할 지경이었다. 아르비노스는 적어도 악행이 드러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일 줄은 알았다. 그러나 프로로스는 마치 악덕의 쇼를 위해 파견된 양 우리들 유대민족에게 이것 보라는 듯이 약탈과 불법처형을 자행했다...이 이상 무엇을 더 말할 필요가 있으랴. 우리가 로마인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게 한 것은 프로로스였다.”그런 상황에서 ‘로마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명분을 반대하고 나설 유대인은 없었다. 그러나 구호를 내건 자들 역시 서민들의 삶은 안중에 없어한다면 해방 꾼과 위정자들이 다를 바가 없어지지 않겠는가. 투쟁자금을 위해서라면 은행이나 인민을 털어도 그만인 그들이었다. 처음에는 보잘 것 없었던 혹은 불가항력적이던 사건이 무한히 부풀어 올라 마침내는 스스로에게 박해를 불러오게 되는 일은 역사가 너무나 자주 경험한 일이 아니던가. 거기에 사건이 신성과 연결되면 걷잡을 수 없어지게 마련. 때맞추어 가이사리아 사람이 불씨를 던지고 나섰다. 그리스 이민이 많던 항구 가이사리아에서는 그리스인과 유대인의 갈등이 끊어지질 않았다. 유대인이 회당에 인접한 그리스인의 땅을 매입하려하자 턱없는 값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아주 좁은 길을 남겨놓고 공사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분개한 유대인 청년들이 방해하다 체포되자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술책이 프로로스 총독을 매수하는 일. 때맞추어 사건이 겹친다. 안식일에 그리스인들이 회당 입구에서 새를 잡아 희생제물을 바치며 비위를 거스르고 나서는 것은 차마 참을 수가 없는 노릇. 하나님을 향한 모독을 어찌 용서할 수 있으랴. 분별 있고 온건한 인사들이 관헌에게 호소하려했지만 선동꾼들의 부추김은 사건을 기어이 싸움으로 몰고 갔다. 기병대의 만류도 무색해지는 폭력 전으로 발전하고 말았다. 요세푸스의 증언은 계속된다. “프로로스는 마치 싸움의 불씨를 부채질하듯 성전의 보물창고에 사람을 보내 가이사에게 바친다는 구실로 17달란트를 빼앗아갔다.” 격해지는 폭동을 진압한답시고 프로로스가 군사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에 들어온다. 이리하여 국제정세에 밝지 못했던 유대인 사이에 당시의 지중해 세계를 통치하는 로마와의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갔다. 대제사장과 지도층 인사들은 프로로스 총독과 열심당 사이에서와 또 로마군의 폭행에 격분하고 있는 민중 사이에서 나름대로의 수습을 시도했다. 그러나 여러 사건이 겹치면서 그들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이미 과격파의 영향은 지도층의 자녀들에게도 미치고 있었기에. 요세푸스는 적는다. “당시 대제사장 안나스의 아들 에리아자로스가 성전호위를 맡고 있었는데 그는 호방한 젊은이였다. 그가 제사를 맡은 이들을 설득해서 외국인으로 부터는 제물이나 희생제물을 받아들이지 않도록 했다.” 그것은 로마제국에 대한 선전포고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유대인은 조국을 잃게 되는 유대전쟁으로 돌입하게 된 것이다.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6-09-29
  • 조크와 위트
    유머하면 으레 유대인을 떠올리곤 하지만, 그렇다고 유대인이 세상의 모든 유머를 독점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영미 문화권에서는 유머야말로 지도자가 갖추고 있어야할 첫 번째 자질이 되어 있다는 것쯤은 상식이 되어 있다. 유머 중에서도 위트로 분류되는 쪽은 남의 것으로 대신할 수 없는 그 무엇이란 인식이 깔려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본란이 철지난 조크와 위트를 뒤지게 된 것은 요즘의 우리 처지를 생각해서 일 것이라 이해해주실 줄 믿는다. 앵글로색슨은 위기에 처해서 유머를 발휘하는 도량이 여유와 불굴의 정신을 드러내는 것이라 믿고 있다. 당황스러운 목전의 상황에 휘말려서 스스로를 잃어버리는 노릇은 아예 유머감각이 없거나 상실해버렸기 때문이라 여긴다. 앵글로색슨만이 아니다. 모택동도 조크나 위트를 두고는 물러서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영국의 외상이었던 흄이 자신의 전기에 남긴 일화에 따르면... 흄이 중국을 방문해서 모택동주석이 인민대회당에서 거창한 환영 만찬을 차려주었을 때의 일. 흄이 입을 열었다. “만약에 케네디 대통령이 아니라, 흐루시초프가 암살되었다면 그 후의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흐루시초프가 중소대립을 조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던져 본 말. 그러나 모택동의 응수는 전혀 차원이 다른 쪽이었다. “그랬다면 미스터 오나시스가 흐루시초프 부인과는 결혼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케네디가 암살당한 후 “재키“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재크린부인이 그리스의 해운 왕 오나시스와 재혼한 것을 두고 던진 응수. 재크린부인의 바람기가 평균적인 미국인의 경향이 아니냐는 비아냥거림에 더해서, 말죽통처럼 살이 찐 흐루시초프 부인이야말로 전형적인 러시아 여성이이라며 싸잡아 웃어주는 조크가 아니었던가. 유머는 위트와 조크로 나누어진다고들 말하고 있지만, 대체로 위트가 윗목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다. 위트는 조건반사처럼 자리자리 마다에서 창조적으로 튀어나와야하기 때문이리라. 그러니까 위트는 일회적 발상일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위트가 전혀 준비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튀어나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위트는 늘 터뜨리는 사람이 터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위트는 재해석되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조크로 재생산되는 지도 모른다. 진부하긴 하지만, 윈스턴 처칠의 것을 복습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처칠은 성급하기로 이름난 천하무적의 독설가. 그럼에도 그의 독설이 사랑받고 있는 것은 함부로 흉내 낼 수 없는 애교가 깃들여있기 때문이라고들 말한다. 처칠은 타임스사의 사주 애스터 여사와는 아주 사이가 나빴다. 처칠이 나치 독일에 대해서 철두철미한 매파였던 데 대해, 타임스는 히틀러에게 융화정책을 주장하는 비둘기파였기에...언젠가 처칠이 만찬에서 부인옆자리에 앉자, 애스터 부인이 입을 열었다. “만약 내가 당신의 아내였다면 당신의 홍차에 독을 탔을 것”이라고. 처칠이 대답했다. “마담, 내가 만약 부인의 남편이었다면 어김없이 그 홍차를 마셨을 것입니다.” 상대방의 말을 부정으로가 아니라 긍정으로 곤궁에 몰아가는 것이 처칠의 독설이자 애교였다. 그렇지 않아도 술을 좋아했던 처칠이 어느 날 파티에서 부인을 만났을 때 대취하고 있었다. “그렇게 취해 있다니, 그 얼굴이 흉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처칠이 응수한다. “나는 내일 아침이면 깨겠지만, 당신은 그대로일 터인데 어떻게 하지!” 그러나 독설가 처칠이라 할지라도 현장의 일을 자료로 삼지 지난 날의 일이나 없었던 일을 들먹이지는 않았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차대전 중, 처칠과 처음으로 회담했을 때의 일을 잊을 수 없다고 회상했다. 백악관에서 밤늦게 까지 회담하면서도 이 노회한 수상 때문에 미국이 이용되는 것은 아닐까하는 염려는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밤이 늦어 처칠이 침실로 들어간 후, 얼마 되지 않아 못다 한 말이 생각난 루즈벨트가 객실의 문을 노크했다. 문을 열어주는 처칠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인 것을 본 대통령이 당황해서 돌아서려하는데, 처칠이 말했다. “대영제국의 수상은 미합중국의 대통령에 대해서 무엇 하나 감추는 것은 없다오.” 이 한마디로 둘은 친한 친구가 되었단다. 처칠은 기지에 넘쳐나 있었다. 그리고 그의 기지는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6-09-22
  • ‘완벽’(完璧)과 얽히고 설킨 이야기
    <사기(史記)> <인상여열전(藺相如列傳)>에 나오는 이야기. 전국시대 말기 조(趙)의 혜문왕(惠文王)이 천하제일의 구슬로 알려진 화씨벽(和氏璧)을 소유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진(秦)의 소양왕(昭襄王))이 성(城) 열다섯과 맞바꾸자고 청해 왔다. 구슬을 받아 쥐면 성은 내주지 않을 것이란 속셈을 눈치 챈 조에서는 중신 회의를 열었고, 목현(木賢)의 추천으로 인상여(藺相如)가 사신으로 나선다. 구슬을 건네받은 소양왕은 몹시 기뻐하면서도 정작 내어줄 성에 대해서는 내색도 하지 않았다. 사신이 입을 열었다. “그 구슬에는 티가 있습니다. 신이 그것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하고 구슬을 손에 되받아드는 순간 뒤로 물러서면서 왕에게 말했다. “조나라에서는 진나라를 의심하고 구슬을 주지 않으려 했습니다만, 신이 굳이 진과 같은 대국이 신의를 지키지 않을 리 없다고 우겨서 구슬을 가져온 것입니다. 그런데 대왕께선 성을 내주실 생각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 고로 신은 다시 구슬을 가져가겠습니다. 대왕께서 구슬을 강요하신다면 신의 머리는 이 구슬과 함께 기둥에 부딪칠 것입니다.” 그제야 왕은 지도를 펴놓고 땅을 내주라고 말한다. 꾸며낸 짓거리임을 아는 사신은 구실을 만들어 구슬을 들고 숙소로 돌아온다. 날이 새기 전 몰래 수행원에게 들려 돌려 보내버렸다. 진왕은 속은 것이 분하지만, 대국으로서의 체면 때문에, ‘인상여’를 후히 대접해서 돌려보냈다는 이야기. 진나라는 구슬 보다 더 귀한 인재를 가졌기에 “완벽(完璧)”이라 일컬어지는 구슬도 지니게 된 것이다. 그런고로 “완벽”은 흠이 없는 구슬이란 뜻도 되고, 구슬을 온전히 보존한다는 뜻도 된다. 다음 이야기는 한비자(韓非子)의 화씨편(和氏篇)에서... 변화(和)는 초(楚)나라 구슬감정인. 어느 날 산에서 귀한 보석이 될 원석을 얻어 여왕(王)에게 바친다. 옥을 맡고 있는 이에게 감정을 하게 했더니, “그냥 돌에 불과하다”는 것. 화가 난 왕은 거짓말쟁이라면서 화의 왼발을 잘라버렸다. 여왕이 죽자, ‘화’는 원석을 무왕(武王)에게 헌상했다. 왕은 다시 그를 거짓말쟁이로 다스려 오른 발을 잘라버렸다. 무왕이 죽고 문왕(文王)이 즉위하지만, 이제 ‘화’는 진상하지 않는 대신, 품에 원석을 안고 초산 기슭에서 삼일 밤낮을 통곡하는 것이었다. 눈물이 말라버리자 피를 흘렸다. 소식을 들은 문왕이 그 연유를 물었다. “천하에 발을 잘린 사람은 많지 않는가. 그런데 너는 왜 그리 슬피 우는가?” “발이 잘린 것이 슬퍼서가 아닙니다. 보석을 돌이라 하고, 나처럼 정직한자를 거짓말쟁이로 인정하는 것이 슬플 뿐입니다.”왕은 옥을 다듬는 사람을 시켜 원석에서 귀한 보석을 얻었다. “화씨의 벽(壁=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세월이 흐르면서 완벽(完璧)이란 이름이 더해진 그 구슬이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이쯤해서 한비자의 평가에 귀를 기울여 보자. “구슬은 군주가 탐을 내는 것. 그렇다고 구슬감정가 ‘화’가 헌상한 원석이 설사 아름답지 못하다 하더라도 군주에게는 적어도 해는 끼치지 않을 것인데도, 두 왕은 성급하게 ‘화’의 두 발을 잘라버렸다. 그런 다음에야 그 돌이 아주 귀한 보석이란 것을 알게 된다. 보석을 분별하는 것은 이렇게도 어려운 일이다.” 옥석(玉石)을 가리기가 그래서 어렵다는 것일까. ‘화’가 진상한 원석에서 아름다운 구슬을 얻어낸 후, 그 원석이 그냥 돌일 뿐이라 감정했던 전문가는 어떤 처벌을 받았을까. 만약 그가 한비가 말하는 법술(法術)이나 중인(重人)라면 문책은 면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한비는 “법술(法術)의 사(士)”란, 사람들이 숨기고 있는 일과 나쁜 짓을 바로 잡을 역할을 다해야한다고 했다. 한편 “중인(重人)”이란 주군의 명령 없이도 제멋대로 행동하고 사복을 채우면서도, 더하여 군주를 자기편에 끌어드리는 힘을 가진 자로 규정했다. 한비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 군주가 ‘법술’을 대하는 것을 보면, 아직은 ‘화씨의 구슬’을 구할 만큼 절실하지는 않는 것 같고, 신하들과 백성의 악을 금단하는 일도 ‘화’를 벌한 것만큼은 엄격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원석을 잘못 감정한 ‘법술의 사’가 사형에 처해지지 않고 있는 것은 제왕에게 헌상할 원석을 품고 있을 뿐 아직도 왕에게 바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6-09-08
  • 지금 톨스토이의 ‘주인과 하인’을 읽는 것은
    톨스토이의 작품을 ‘다이제스트’하기는 불가능하다고들 말한다. 그럼에도 본란이 그 무모한 짓을 시도하려한다. 그것도 아주 거칠게. 그만큼 절박하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만년이 된 톨스토이가 고리키에게 말했다. “인간은 생각하기를 익히게 되면, 어떤 일을 생각할 경우에도,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네...그러나 만약에 죽음이 오고 있다면 도대체 무슨 진리가 있다는 말일까”소설 <주인과 하인>은 죽음이 삶의 가장 큰 스승임을 보여준다. 쫓기듯 무언가를 추구하는 짓은 삶의 본질을 외면한 허망한 열정일 수도 있다고 일깨워준다. “적잖은 재산을 모은 여관 주인 바실리는 야비한 수단으로 하인들의 노동력을 착취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는 가난한 사람에게 기회와 은혜를 베풀고 있노라 확신했다. 하인 니키타는 그러는 주인에게 따져 볼 배짱도 없이, 주는 대로 받으며 묵묵히 살아가는 위인. 주인 바실리가 숲을 사겠다고 겨울 눈보라를 무릅쓰고 썰매를 몰고 나섰다. 다른 사람이 사버릴까 봐 모험을 강행한 것이다. 심한 눈보라가 이정표는커녕 길을 파묻어버렸는데도. 하인 니키타는 그럴 때 일수록 입을 다물고 있어야한다는 것을 터득하고 있는 터였고. 한 마을에 들어선 바실리와 니키타는 농부의 집에서 휴식을 취하게 된다. 그러나 눈보라가 그칠 때까지 하루를 묵어갈 여유가 바실리에게는 없다. 돈을 위해서만 일생을 받쳐온 바실리에게는 망설임이 있을 수 없었다. 내키지 않는 니키타는 운명이거니 달래며 따라나설 밖에.그러나 눈바람이 지친 말을 연달아 낭떠러지로 몰아가자, 니키타는 눈에 파묻혀 죽는 한이 있어도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판단하고 거기에 멈추기로 작정한다. 오로지 돈을 위해서 살아온 그가 코앞에 돈을 두고 잠을 잘 수는 없는 노릇. 하찮은 니키타가 죽는다고 눈 하나 깜짝할 소냐. 털외투를 껴입은 바실리는 혼자 말을 몰고 나아간다. 뒤에 쳐진 니키타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썰매 안으로 들어가 휴식을 취하다 점차 의식을 잃어간다. 방향을 잃은 채 혼자 말을 몰던 바실리도 마침내 공포에 휩싸인다. 하잘것없던 니키타의 부재가 이런 공포를 가져다 줄 줄이야. 눈보라와 싸우며 간신히 니키타를 버리고 떠났던 그 자리로 되돌아온다. 극심한 공포 속에서 뭉클한 무엇인가를 체험한 바실리, 그는 말에서 내려 죽어가는 니키타를 안아 일으킨다. 얼어붙은 눈을 떼어 내고 가만히 자신의 체온으로 그의 몸을 데워준다. 뭔가 말을 해보려 하지만 눈물이 흐르고 턱이 떨려 미처 말이 되어주지 않는다.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던 기쁨을 느끼면서 속으로만 되뇌었다. 싸늘하게 식어가는 니키타의 몸을 감싸 안은 자신의 몸도 얼어들지만 대수가 아니었다. 이 미련한 하인을 따뜻하게 해주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알 수 없는 기쁨이 “니키타가 살아 있으니 내가 살아 있다”는 환희로 이어진다. 지금 자신이 느끼는 그것, 삶의 본질을, 지난날에는 알지 못했다는 것도 깨닫는다. 마지막으로 바실리는 니키타 없이는 자신만만하기만 했던 자신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한낮이 되어 인근 마을 사람들이 눈에 파묻혀 얼어붙은 바실리와 니키타를 발견했을 때, 바실리는 이미 숨져 있었고, 니키타에게는 가냘픈 숨이 남아 있었다. 자신의 몸으로 니키다를 살려낸 그 모습이 마을 사람들이 기억하는 바실리의 마지막 모습이 된 것이다. 그렇게 살아난 니키타는 하인과 문지기를 이어가며 20년을 더 산다. 죽기 전에 아내에게 용서를 빌고, 결코 용서할 수 없었던 아내의 과거를 용서한다. 자식과 손자들에게도 미안하다는 말을 남긴다. 한 달 넘게 폭염에 시달리노라, 눈보라의 환영을 본 것이 아니다. 언론마다에 넘쳐나는 우리의 답답한 이야기들이 그렇게 한 것이다. <주인과 하인>(1895년)에서 톨스토이는 말한다. “하인 니키타를 데워주면서 죽어가는 주인공 브레후노프(=거짓말쟁이)에게 있어서, 자신은 곧 니키타이고, 니키타는 자신이었다. ”니키타는 살아있다. 그래서 나도 살아있다. “ 하고 생각하는 바실리는 말한다. “이제 나는 자유하다. 나를 거스르는 아무것도 없다.”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6-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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