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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사람을 보라!” - 스캔들의 생리-
    게오르게 그로스(George Grosz, 1893-1559)는 베를린에서 출생한 다다이즘의 거장. 정치와 사회를 풍자하는 그림으로 독일군국주의와 부르주아 문화를 비판하고, 종교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나치는 그를 퇴폐예술가로 분류했다. 1932년, 미국으로 이주한 그는 캐리커처 작가로 주목을 받게 된다. 1923년에 펴낸 화집 <Ecce Homo(이 사람을 보라)>에서는 현대 도시의 스캔들과 악덕을 신랄하게 비꼬고 있다. 제목 <이 사람을 보라>는 물론 <요한복음서> 19장 5절에 나오는 빌라도의 말을 비튼 것이다. 가시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은 죄인 예수를 가리켜 “이 사람을 보라!” 하자, 증오에 불타는 군중이 주먹을 뻗으며 외친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죄와 허물을 뒤집어쓰고 희생양이 되고, 그로써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회복된다.“Ecce Homo”라는 제목을 붙인 성화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중세 이후 가장 많이 그려진 주제이기도 하다. 우리에게는 렘브란트의 것이 가장 친근할 것. 오늘날에도 스캔들에 휩쓸린 사람들은 “이 사람을 보라.”하는 구호에 의해서 군중 앞에 노출되고 희생제물이 되고 있다. 스캔들은 바나나 껍질이라 했던가. 길에 떨어진, 혹은 차려둔 바나나 껍질에 미끄러져 넘어지는 꼴을 빗댄 것이다. 넘어진 사람이 넝마주이이거나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면 동정을 살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명사이거나 잘 차려 입은 숙녀라면 바로 스캔들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넘어지는 모습이 험할수록 멋진 스캔들이 되는 것이고. ‘아차’ 하는 낭패스러움과 이어지는 공포의 표현을 대중들은 손뼉을 치며 즐기는 것이 스캔들의 생리요 법칙인 것이다.우리는 넘어진 사람을 돌팔매질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로써 우리자신을 돌팔매질 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넘어진 사람에게 허물과 죄를 씌워 추방하지만, 실상 추방당하는 그들에 의해서 구제받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아닐까. 스스로 자기의 허물과 죄를 던져 버릴 수가 없기에...오늘날 일부 인사들에게는 남의 스캔들이 밥이 되어주고 있다. 적어도 심심풀이는 되어준다. “돌을 던지는 너희에겐 놀이이지만, 우리에겐 죽음이다.” 이솝 우화의 개구리의 항변은 흔해빠진 현실이 되어 있다. 현대는 자신의 스캔들을 역으로 이용하여 적잖이 재미를 보기도 하는 세상이다. 스캔들을 기화로 유명해지면, 그 유명해진 자신을 드러내어 확고한 명사의 자리를 차지해버리는 수법을 이용한다. 스캔들을 자료로 책이나 영상을 만들어 돈을 벌어들이는 것을 스캔들 산업이라 한단다. 스캔들은 인간이 이렇게도 기묘한 생물임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굴러 넘어진 사람들을 다시 매질하면서 희열을 느끼고 있는 우리가 두렵다. 음행하다 들킨 여인이 예수 앞에 서있다. 예수가 누구든지 죄 없는 이가 돌을 들어 치라고 하자, 사람들은 나이 많은 이로부터 시작해서 하나 둘 물러갔다고 신약성서는 기록한다. 만약 오늘날의 한국적 상황에서라도 이야기가 그렇게 마무리 될 수 있을 것인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너는 무엇이 길래!”라며 부라린 눈으로 예수를 노려보며 돌을 들어 던지는 이가 있을 것이고, 그 돌들은 당장에서 여인의 표피는 물론 심장까지 망가뜨려버릴 것이다. 마침내 돌은 예수에게로 향해질 것이고. 아니다. 시나리오를 이렇게 고쳐 써보면 어떨까. 예수가 “죄 없는 자 돌을 던지라” 하자, 끌려온 여인이 먼저 머리를 쳐들고서는 반라의 몸을 비틀어 교태를 부리면서 유유히 군중들 틈을 벗어나는 그림은 어떨까. 여인의 손가락이 V자를 그리고 있는 그림쯤은 이미 별난 그림이 아니지 않는가. “이 사람을 보시오.”하고 그 누군가가 말해줄 때를 기다릴 필요도 없이 우리는 “우리를 보시오!”하고 나서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신약성서>에서의 스캔들의 뜻은 예나 이제나 “걸림돌”이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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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범
    2016-05-11
  • 등당과 입실
    어느 날 공자가 제자 자로(子路)의 비파 소리를 듣고 말했다. “자로가 타는 비파가 너무 거치니 나의 제자가 타는 것 같지가 않구먼.”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이 더 이상 자로를 존중하지 않게 되었다. 공자가 다시 말했다. “자로는 이미 전당(殿堂)에 올라 있다. 다만 아직 내실(內室)에 들지 못했을 뿐이다. 그런데 너희는 자로를 존중하지 않는 것 같은데, 너희의 비파 소리는 미처 당(堂)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 집 당(堂)자는 음부(音符)인 토(土)와 상(尙)으로 구성된 문자. 상(尙)은 방(房) 북쪽으로 트인 창에서 공기가 들어오는 八자 모양을 나타내는 글자로, “크고 높은 뜻”, 혹은 “존경하다”의 뜻으로 쓰이는 글자이다. 그래서 당(堂)은 건물의 넓고 높은 토대(土臺)를 가리키는 글자이면서 더러는 건조물을 가리키기도 한다. 일반적으로는 손님을 맞이하는 사랑채를 일컫지만, 천자가 거하는 궁정에서는 밝을 명(明)자를 더해서 명당(明堂)이라 일컫는다. 중국에서의 당(堂)은 곧 천자가 신이나 선조를 제사하고 제후를 만나거나 정무를 보는 곳이다. 이에 대해서, 집 실(室)자는 뜻을 나타내는 <갓머리>에 음을 나타내는 지(至)로 구성된 글자이다. 지(至)자의 갑골문자는 화살을 맞은 모양을 나타내고 있어서, 깊숙이 박히거나 들어가 있는 모양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방(房)이나 거실(居室) 혹은 거처(居處)를 가리키는 글자로 풀이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실(室)은 당(堂)의 안쪽에 있는 거실이나 침실을 가리키는 글자로, 부인을 영실(令室) 혹은 내실(內室)이라 일컫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그래서 당에는 오르고(登), 실에는 들어간다(入)했다. 그러니까 공자의 말인 즉, 자로의 비파 솜씨는 노력해서 원리와 격식을 익힌다면 누구나 도달할 수 있는 수준이긴 하지만, 굳이 비파를 타지 않고서도 서로 통할만큼의 깊은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말로도 음미할 수 있다. 스승 공자가 그렇게 자로의 손을 들어 주긴 했지만, 자로는 강직한 성품을 지니고 있어서 지나칠 만큼 기운이 승한 나머지 겸양지덕이 부족한 편이었다. 공자는 그러한 자로를 타일러 겸손을 배우게 해주려고 해본 소리인데, 스승의 의도와는 달리 다른 제자들로 하여금 자로를 얕보게 하는 동기를 제공한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스승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제자들은 자로의 실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민망스러울 정도로 동료의 약점을 꼬집고 나선 것이다. 현대인은 공자가 제자들의 비파 솜씨를 건물의 당(堂)과 실(室)의 관계에 비춘 고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들 있을까. 로봇과 인간의 바둑경기 이후 부쩍 자주 듣게 된 ‘알고리즘’을 들먹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글을 마감하기 위해서, “평론가는 말꼬리에 붙어서 살아가는 파리 떼에 불과하다” 했다는 괴테의 어록 대신, 사도 바울의 ‘사랑찬가’의 결미부분을 받침 그릇으로 내놓고 싶어지는 것은, 스스로를 당(堂)이 아니라 실(室)의 경지에 이르고 있다고 망상하는 교만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지금은 우리가 거울로 영상을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마는,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부분밖에 알지 못하지마는,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 것과 같이, 내가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3장 12절) 문호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도박벽이 있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 아내의 결혼반지까지도 전당포에 잡혀버렸으니. 그래서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나를 용서해주오. 제발 내가 비열한 사내라고 욕하지는 말아주오. 당신이 보내준 돈은 모두 룰렛으로 날려버렸다오.”그러나 아내 안나는 남편을 나무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도스토예프스키가 <백치>를 집필하던 중 벽에 부딪치고 있을 때, 룰렛을 해보면 어떻겠느냐며 도박을 권하기도 했다는데, 그런 일이 있은 후 문호는 도박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고 전한다. 견강부회(牽强附會)라 했던가. 풀이가 지나치게 비틀어진 것 같아 송구스럽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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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범
    2016-04-28
  • 까마귀를 생각해 보아라!
    초등학교 시절(일정치하)에 익힌 동요로 “저녁노을 해가 질 때, 까마귀와 함께 집으로 돌아간다”라는 내용의 것이 있었다. 일본 건국신화에서는 까마귀가 소중한 역을 맡고 있다고 교육받은 또래는 대체로 까마귀를 혐오동물로 여기지 않고 소년기를 보냈을 성 싶다. 해방 후, 중학생이 된 까까머리는 시조를 익히면서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마라”로 세뇌되는데, 그것도 잠시, 곧 까마귀는 “반포조(反哺鳥)로 둔갑하는 것이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까마귀는 영특한 새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구약에서 대홍수 후 까마귀가 정찰꾼으로 선발되어 최초로 방주를 벗어난 생물이 된 것은 밝은 눈과 지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라 짐작했지만, 하나님이 까마귀에게 명하여 숨어 지내는 엘리야에게 먹을 것을 날라주게 했다는 대목에서는 어리둥절해지기도 했다. 그러다 세계 도처에서 전해지는 신화의 세계에서는 까마귀가 태양신의 심부름꾼으로 활약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는... 그리스신화에서는 까마귀가 태양신 아폴론을 시중들었는데, 색깔이 희어 은빛이었고 목소리는 고와서 인간과 대화하는 지혜로운 새였다나. 어느 날, 까마귀가 아폴론의 아내 코로니스가 지상에서 살고 있는 인간 남자 이수키스와 내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폴론에게 밀고하자, 화가 치민 아폴론이 활로 코로니스를 쏘아버렸는데, 죽기 직전 코로니스가 아폴론의 아이를 잉태하고 있다고 하자, 후회한 아폴론이 이번에는 밀고한 까마귀에게 분풀이 한다. 아름다웠던 날개는 검어지고 고왔던 목소리는 듣기가 민망하도록 쉬어버린 것이다. 이솝 우화에서는, 병 속에 있는 먹이를 끌어내기 위해 병 속에 돌을 집어넣어 수위를 높이는 영특한 까마귀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그러나 신화의 세계에서도 까마귀에 대한 평가가 반드시 좋았던 것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것은 그 지능이 지나치게 높아 고대인들에게는 교활하게 보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조류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까마귀가 지능이 발달한 새라고 일컫고 있는 것 같다. 까마귀는 어느 정도 사회성을 지니고 있어, 끼리끼리 협력할 줄도 안다는데, 울음소리로 의사소통을 하고 있단다. 전선에 매달리려 노는 꼴을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미끄럼틀에서 미끄러지거나, 경사진 눈밭에 벌렁 드러누워 미끄럼을 타는 등... 그들이 놀이문화를 즐기고 있다는 관찰결과도 보고되고 있다. 색을 식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을 개체 별로 분별해서 기억해내고, 식물과 가축, 페트를 포함하는 포유류와 조류를 구별해서 인식한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인간에게 사육된 까마귀는 앵무새 못지않게 인간과 가축의 음성을 흉내 낸다나. 한편, 까마귀의 문제해결 능력이 영장류에 버금간다는 평가가 지나치게 과대 포장되면서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 낼 뻔한 경우도 없지 않았다. 1996년, 일본 가나가와 현의 철도레일에 까마귀가 돌을 올려놓는 일이 자주 발생하자, 철도당국이 그들의 집을 철거한 데 대한 복수로 열차를 전복하려 한 짓이었다고 보는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관찰 결과, 먹이를 저장하기 위해 주둥이로 돌을 물어 옮겨놓는다는 것이 우연히도 레일 위에 둔 것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긴 했지만. 그러나 까마귀가 대적자로 여기는 엽사(獵師)나 청소부와 같은 인물은 기억해서 동료들을 모아 집단으로 공격하는가 하면, 그들의 집이나 자동차를 더럽히기도 한다는 것이다. 유리처럼 반짝이는 물건을 수집하는가 하면, 공원 미끄럼틀에서 놀이를 즐기는 등, 직접적으로 번식이나 생명유지와는 무관한 일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 얄밉지 않은가. 까마귀고기는 식용으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져 왔다지만,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 우리나라에서는 정력에 좋다는 입소문으로 씨가 마를 지경이 되었다던데.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는 까치만 흔하고 까마귀는 볼 수 없어서, 그 소문을 은근히 믿고 있는 터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얼마 전 경기도 북부에서 까마귀를 보았기에, 뜬소문에 쉬 혹해버리는 늙음을 탓하면서 웃고 말았다. 암까마귀와 수까마귀를 분별하기 어렵다는 속담은 까마귀의 암수를 가리기 힘들다기보다는, 예나 지금이나 까마귀의 속성과 속내를 알아내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푸념이 아닐까 싶다. 국어사전에서 “선량(選良)”이란 단어를 찾으면, “뛰어난 인물을 뽑음. 또는 그렇게 뽑힌 인물” 또 “국회의원을 달리 이르는 말”이란 풀이를 볼 수 있는 데, 까마귀만큼이나 헷갈리게 하는 풀이가 아니가싶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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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범
    2016-04-16
  • “내 양을 먹이라” 판타지
    “사도 베드로는 주 그리스도에 의해서 사도들의 수장이요, 가시적 지상 교회의 수장으로 정해졌다”는 문서를 남긴 1870년 제1바티칸 회의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요한복음 21장 15-17절”과 “마태복음 16장 16-19절”을 인용했다. 요한복음 21장은 훗날 의도적으로 첨부되었다는 신학적 주장을 모르는 이는 드물 것이다. 어부로 되돌아가려던 베드로가 황금에 보석을 박은 관을 쓰고 황금지팡이를 들고 나서는 별난 목자의 모습으로 변화하는 판타지는 그리스신화를 능가하는 재미를 제공 해준다. 또 신들의 사랑타령을 읽는 것과 같다고 한다면 어폐가 될지 모르겠으나, 고상하기만 한 바울의 사랑노래보다는 훨씬 쉽게 마음에 와 닿는 것을 어쩌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로 시작되는 사랑 이야기. 만약 바울이 개입할 수 있는 기록이었더라면 그런 모양으로 후세에 전해지지는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본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하고 노래하는 바울이라면 말이다. 하긴 사랑에는 2등이 없다 했다. “자기 날 사랑해?”하고 묻는데, “박애정신으로...” 운운한다면, 그것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소리가 되기 십상. 사랑에는 차별화와 특수화 과정이 필수적이다. 남들이 다하는 그렇고 그런 사랑은 사랑이 아니란 것이 사랑이란 괴물의 특성이 아니던가. “We loved with a love that was more than love” 애드가 아란 포의 “Annabel Lee”의 시구가 생각난다. “우리의 사랑은 우리 이전의 어떤 사랑보다, 우리보다 지혜로운 이들의 사랑보다 강한 것이었다.”는 억지. 그게 바로 사랑의 묘미인 것을. 20세기가 끝날 무렵, 이름깨나 날리는 학자들이 연애 중인 대학생을 대상으로, 혈중 호르몬 분석을 했다나. 도파민, 노르아드레날린, 세로토닌, 등의 화학물질이 연애감정을 일으키는 요물이라고 발표했다는데, 이를 이용하면 사랑의 강도도 측정할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여론조사로 등수를 매길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우리의 이야기는...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으로 이어진다. 이를 능가하는 사랑의 언어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침묵>으로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는 일본의 가톨릭 작가 엔도 슈사꾸는 그의 <그리스도의 탄생>에서, 생전의 예수를 알고 있는 제자들과 그렇지 않는 바울을 비교하여 재미있는 글을 썼다. “예수의 제자들은 생전의 예수와 생활을 함께 하고, 그 모습을 보고, 그 말씀을 듣고, 그 행동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스승 예수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제멋대로의 제자노릇을 했지만... 하여튼 그들은 실제 인생에서 사귀었기 때문에, 그 추억은 생생하게 그들의 마음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바울의 경우는 생전의 예수를 알지 못했다... 그의 말씀을 직접 들은 적도 없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가 되기 이전의 예수는 절대로 잊어버릴 수 없는 존재였지만,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는 그 죽음과 부활의 신학적인 의미 이외에는 별로 관심거리가 못되었을지도 모른다.” 현실적으로 베드로의 사랑은 영원불변은 아니었고, 바울의 사랑노래와는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는 말을 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니까 사랑이란 때로 한 눈도 팔고 실수도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앞서 소개한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강한 연애감정이 지속하는 기간은 길어도 12개월에서 18개월 사이라고 한다. 예수에 대한 베드로의 사랑도 그랬을 지도 모른다. 예수가 어찌 그것을 모르랴! 목숨이라도 바치겠다던 그가 세 번이나 스승을 부인했으면서도 진정 다른 제자들보다 더 사랑한다? 세 번 씩이나. 이것은 베드로의 아픔이 아니던가. 그래서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물으시는 예수의 물음에 불안해 진 것. 예수는 더 이상 추궁하지 않는다. 그러는 것이 사랑의 언어이거늘. “내 양 떼를 먹여라. “ 이 한 마디가 모든 것을 껴안는다. 그러나 “내 양떼를 먹이라”는 쉽게 “네 양떼를 먹이라”로 바뀔 가능성이 처음부터 잠재하고 있었던 것일까. 역사는 그게 사실이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번에는 예수께서 사랑하던 제자 요한이 등장한다. 아니 베드로가 예수와 자신의 대화에 슬그머니 끼워 넣은 것이다. 최후의 만찬에서 스승의 가슴에 기대어 속삭이던 요한의 모습이 베드로의 상념에서 지워지지 않았던 것일까. 그러나 예수는 말한다. 그가 어떻게 되던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니, “너는 나를 따르라” 판타지는 무르익어간다.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6-04-06
  • 브레히트의 부활이해
    "저녁 무렵, 그들은 길을 가고 있다.하늘은 어둡고, 바람이 불고 있다. 바람에 등겨가 날린다. 그들은 꾸부러져 걷노라, 빛을 보지 못한다. 낯선 사나이가 그들과 더불어 걷는다. 그들은 그 분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예수가 죽어, 그들은 슬펐다. 그러나, 그들 중 한 사람이 말했다. 이상한 일이다. 그 분은 나를 위해 죽으셨어. 의미도 없이, 얻는 것도 없이 죽으셨어. 나도 살고 싶지 않아, 나는 고독하다. 다른 사람이 말했다. 그 분이 다시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꾸부러져 걷노라, 빛을 보지 못한다. 낯선 사나이가 그들과 더불어 걷는다. 그들은 그 분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한 제자가, 보리밭을 등지고 있는 그 분을 본다. 그 눈이 불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그는 말한다. 사람들을 위해 죽을 수 있는 분이 있다!”브레히트의 시 <성금요일>에서 “에필로그”를 옮겨 보았다. 엠마오 도상. 부활한 예수를 이름도 알 수 없는 한 나그네로 만나는 제자들의 이야기(누가 24장 13절 이하)를 바탕으로, 시인의 감성이 일구어낸 나름의 해석일 터. 제자들이 예수의 죽음에 대해서 서로의 의견들을 주고받으면서 길을 가고 있는데... 예수가 그들과 동행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는데... 제자들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1956)를 크리스천 작가로 분류하는 것은 무리일지 모른다. 그는 한 때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하지만, 실재하는 마르크스체제는 거부하지 않았던가. 그가 종교와 신앙에 대해서 지극히 비판적이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 그러나 그는 일생을 예수를 떠나있지 않았기에, 그의 작품 도처에는 예수에 대한 진한 그의 관심이 배어있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그의 비판은 그 날카로움만큼이나 강한 예수에의 사랑이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표출될 수밖에 없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이다. 그의 시 <겟세마네>(1913)나, <성금요일>(1915)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종종 그의 작품에서 직설적인 수법으로 예수를 다루고 있다. 주제는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로 대표되는 예수의 사랑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타자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는 사랑을 부각하는 것이 예수에 대한 관심의 전부였다. 또 그에게 있어 그리스도는 오늘의 패자가 내일의 승리자가 되는 부활의 모델이기도 했다. 그의 희곡 <억척 어멈과 그 자식들,(Mutter Courage und ihre Kinder ,1939)에서도 자상한 독자라면 작가가 보여주고 싶어 하는 그리스도의 상징을 엿볼 수 있으리라. “1636년 1월, 신구교가 서로 싸우던 30년 전쟁 중, 잠든 할레시가 황제군의 기습을 받은 사건이 배경. 군대를 따라다니며 장사를 해서 세 자녀를 길러가는 어머니 피어링은 그날 밤에도 상품을 구입하기 위해 외출한다. 장애아인 딸 카트린을 혼자 남겨둔 채. 마을에 위험이 닥친 것을 눈치 챈 카트린이 어머니의 손수레 밑에 감추어 둔 북을 꺼내 들고서는 한 농가의 지붕에 올라가 그 북을 치기 시작한다. 잠든 마을이 기습을 받고 있다고 경고한다. 북을 친다. 울면서, 웃으면서 북을 쳤다. 잠든 마을을 살리려 필사적으로 북을 쳤다. 카트린이 황제군의 병사의 총에 스러지고서야, 멀리 할레시의 경종이 울린다. 마을은 구호된다. 주변 사람들에게 있어 카트린은 늘 성가신 이를테면 잉여인간, 아니 ‘불행한 짐승’이었다. 그러나 브레히트에게 있어 그녀는 올바르지 못한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려하는 전형적인 크리스천. 그러니까 카트린은 부활한 그리스도의 상징이었다. 전쟁을 이용해서 이득을 추구하다가 결국에는 전쟁 때문에 자식들을 모조리 잃게 되는 억척어멈은 인간의 처참한 모순을 대표하는 것일까. 그러나 억척어멈 당자는 전쟁이 미치는 파괴적인 영향을 깨닫지 못한다. 연극이 막을 내리려하는데도 여전히 그녀는 손수레를 끌고 군대를 따라간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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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범
    2016-03-25
  • 예수의 초상들과 이미지
    우상을 금하는 유대교의 전통을 이어받은 그리스도교회가 그 초기부터 성상(聖像)을 떠받들어 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그랬다 치기로 하고, 예수 혹은 그리스도의 용모에 대해서조차 엇갈리는 견해를 보여 온 교부나 신학자들의 생각들을 더듬다 보면 어리둥절해지기 십상이지만, 예술가와 문인 철학자들의 상상력까지 더하다보면 현기증을 일으키게 된다. 전후 독일 문학을 대표하는 귄터 그라스(1927-2015)의 <양철북>의 주인공 오스카는 양철북을 치며 소리를 질러 유리를 깨뜨리는 희한한 능력을 가졌다. 태어났을 때 이미 성인의 지성을 지녔으나 멈춰버린 성장으로 해서 ‘영원한 아이’가 된 오스카는 나름의 시선으로 세계를 관찰한다. 그의 눈에 비친 예수의 초상과 이미지는 오늘의 크리스천에게 적잖은 충격을 안겨 안겨주고 있다. <양철북>중 ‘기적은 없다’에서, 오스카는 어머니와 더불어 단치히에 있는 예수 성심교회를 찾는데, 어머니가 고해성사를 하는 동안, 오스카가 교회 안의 예수 초상들을 보면서 뱉어내는 푸념들이 꽤나 짓궂고 날카로워 몇 구절 인용해본다. “‘예수의 마음’이란 것이 교회의 이름이지만...예수는 성사 때를 제외하고는 십자가의 수난을 그린 다채로운 그림에서만 몇 차례 그 모습을 보였을 뿐이었다. 각각 다른 자세를 하고 있는 채색된 조각도 셋 있었다. 그 중에 채색된 석고상이 하나. 긴 머리의 이 예수는 프로이센풍의 푸른 상의를 입고, 발에는 샌들을 신은 채, 금 대좌 위에 서 있었다. 그는 가슴 위의 옷을 풀어헤치고, 모든 자연스러움에 거역하는 토마토처럼 붉고, 영예로우며, 정해진 방식대로 피를 흘리는 심장을 흉곽 한복판에 드러내 보임으로써, 교회의 이름을 그렇게 붙일 수 있게 했던 것이다.” “천진할 정도로 자부심이 강한 열광한 저 푸른 눈! 언제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저 피어나는 장밋빛 입술! 눈썹에 나타나 있는 저 사나이다운 고뇌! 찰싹 때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는 혈기왕성한 두 뺨. 두 사람은 모두 여성으로 하여금 애무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하는 옆얼굴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연약하고 피로해 보이는 두 손은 일을 싫어하는 잘 가꾸어진 손, 궁정 보석상의 걸작과 똑 같은 성흔(聖痕)을 보이고 있었다...” 이어 오스카는 예수의 다른 초상을 만난다. “이 사나이는 정말 남자다운 근육을 갖고 있었다. 10종 경기 선수...나는 그를 친애하는 체조선생, 스포츠맨 중의 스포츠맨, 한 치 손톱만으로 십자가에 매달리는 승리자라 불렀다. 그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영원의 빛이 움직였을 뿐, 그는 고행을 완수했고 생각할 수 있는 최고점을 획득했다... ” 오스카가 다시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소년 예수를 오른편 허벅다리 위에 안고 있는 처녀 마리아에게 다가 갔다... 세 살짜리 예수를 벌거벗겨 장미 빛으로 묘사한 것은 조각가의 장난이었다.” “그리고 한 장의 양탄자로 덮인 세 개의 계단을 올라가면 은 녹색의 옷을 걸친 마리아, 연한 초콜릿 빛 모피, 삶은 햄 빛깔의 소년 예수가 있는 곳이었다...장밋빛 예수의 머리 뒤쪽에는 접시 크기의 후광이 있었는데, 그 금박이 그 접시를 값비싼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 “내가 떨면서 소리도 없이 세 개의 창을 향해 바라보는 것을 보고, 어머니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내가 기도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산산조각을 내고 싶었던 것이다...다만 기적 같은 건 더 이상 바라지 않을 것이다.”... 예수의 초상들, 적어도 교회가 이해하고 있는 예수라며 내걸고 있는 예수의 초상들을 고깝게 바라보는 이단아 오스카의 눈초리를 외면해가며, 시대마다가 남기고 있는 예수의 초상들은 그것이 회화가 되었건 조각이 되었건 혹은 문학작품이 되었건, 어느 것이나 예수의 한 면만을 표현한 것일 뿐 전체 상은 될 수 없다하고 우겨보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어찌 예수의 초상 만이랴. 교회가 내뿜고 있는 모든 입김이 구역질을 유발하고 있지 않느냐며 나무란 인사들이 어디 한 둘이었던가. 그야 언제나 있어온 악마의 푸념이 아니었냐며...귄터 그라스라는 한 작가가 그린 오스카라는 가공인물의 비뚤어진 눈에 비친 예수의 초상에 너무 신경을 쓸 일은 아니라고 말해보지만...가톨릭이 책임질 문제이지 프로테스탄트가 나설 일은 아니라고 얼버무린다 해도...오늘날 우리의 교회가 발신하고 있는 얄궂기만 한 정보들이 하도 엄청난지라...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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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범
    2016-03-17
  • 유다의 배신에 대해서
    단테 알리기에리(1265-1321)의 <신곡>에서, 첫 책인 <지옥편>의 끝장 제34곡은 “아홉째 지옥” “코키투스”를 묘사하는 것으로 막이 내린다. 코키투스는 지옥의 가장 밑바닥, 배신자를 가두고 있는 지역으로, 다시 4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첫째 구역은 카이나(Caina): 육친을 배신한 자를 대표해서, 아벨을 죽인 카인의 이름에서 땄다. 둘째 구역 안테노라(Antenora): 조국을 배신한 자를 가두고 있는데, 트로이의 전쟁에서 트로이를 배신한 안테노르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셋째 구역 트로메아(Ptlomea): 손님을 배신한 죄인을 가두고 있는데, 시몬 마카비와 그 아들들을 초대해서 살해한 여리고의 장관 아브보스의 아들 프트레마이오스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구약외전 마카비서). 마지막 네 번째 구역 주데카(Judecca)는 주인을 배신한 가리옷 유다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이다. 거기에는 시저를 배신한 브루투스와 캐시우스도 갇혀있다. “주데카”의 중심, 지구의 중력이 집중되는 이 지역에는, 하나님을 반역하고 타락한 천사 사탄(루키페로)이 얼음 속에 갇혀있는데, 마왕은 예수를 배신한 유다와 시저를 배신한 브루투스와 케시우스 세 사람을 입으로 깨물고 있다. 소름이 끼치는 지옥의 가장 밑바닥에 유다를 쳐 박은 공로는 결코 단테 혼자의 것으로 돌릴 수는 없으리라. 로마 가톨릭교회를 중심으로 형성된 유럽인의 정서에는 유다는 배신자요 구원받을 수 없는 악마라는 낙인이 깊이 새겨져 있은 지가 오래였기 때문이다. 12세기가 되기 전에, 프랑스에서는 “유다”라는 고유명사가 “배신자”를 뜻하는 보통명사로 사용되고 있었고, “유다 짓”은 곧 “배신하기 위한 키스”를 의미하고 있었다. 독일에서는 아이들에게는 물론 개나 고양이에게 조차도 유다란 이름을 붙일 수 없었다.유다는 “스파이”를 의미하기도 했다. 만찬 후, 겟세마네 동산에서 홀로 기도하는 예수를 몰래 훔쳐보았다는 인식이 민중들 틈에 나돌아 다니면서였다. 충실한(?) 다른 제자들이 잠들고 있는 틈에, 기도하는 스승을 냉정한 눈초리로 살피면서, 성공적으로 스승을 체포할 방책을 궁리하는 유다의 이미지가 생겨났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었으리라. 몰래 들여다보는 행위는 일그러진 “성적 욕구”도 상징할 수 있었다. 이런 저런 소위 “유다근성”이 유럽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유대인 모두에게 덧 씌워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셰익스피어는 <베니스의 상인>에서 “샤일록”을 연출해서 박수갈채를 받았고, 나치는 온 유럽의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냈지만, 종교인 예술가는 물론, 내로라하던 지성인도 입을 다물었다. 세계적으로 종교 문화 사회, 여러 측면 여러 차원에서 “배신자”이기 때문에 증오의 대상이 된 캐릭터는 유다 말고는 달리 유를 찾을 수가 없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하고 선언한 이후의 세계에서도 유다에 대한 증오는 보기 좋게 살아남아 시대마다에 걸맞은 변용을 거듭해온 것이다. 성서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서 기획하고 실행에 옮긴 것은 제사장과 로마 병사. 그 정점에는 빌라도 총독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도 아니라면, 빌라도가 제안한 예수의 석방을 거부했던 민중들에게 책임을 돌릴 만도했다. 유다는 직접적으로 예수를 죽이는 데 가담하지는 않았다. 이리저리 따져보아도 그 동기가 석연찮은 “밀고”가 죄목이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세월이 더 해갈수록 유다가 악의 화신으로 변모하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희생양이 된 것처럼, 유다도 그 대극에서 모든 악을 한 몸에 뒤집어쓰고 인류의 죄악감을 소멸케 하거나 그 색깔이 묽어지게 하는 역할을 감당한 것은 아니었을까. 스승이 죽은 후 유다가 제사장들에게 돈을 돌려주려 하자, 제사장들은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요? 그대의 문제요!” 하고 말한다. 또 예수의 처형을 결심한 총독 빌라도는 민중 앞에서 손을 씻으며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책임이 없으니, 여러분이 알아서 하시오!” 했다. 유대민족을 대표한 제사장들 쪽에서나, 로마를 대표한 총독 편에서나, 다 같이 책임을 이 가리옷 사람 유다에게 뒤집어 씌우려한 몸짓이 아니던가. 유다의 죄가 제사장이나 로마 병사 그리고 빌라도의 그것에 비해 두드러지게 부각된 이면에는 유다가 예수의 제자 중의 하나였으면서도 배신했다는 기록을 강조해보이며 자신들의 죄과를 묽게 해보려는 의도가 감추어져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들”의 범위를 어디까지 잡을 수 있을지는 쉬 판단이 서지 않지만, 오늘의 우리도 그 범위를 벗어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을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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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범
    2016-03-11
  • 다시 “엘리야와 엘리사”
    그 옛날 모세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여주었던 위엄을 기억하는 이스라엘인이라면,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보여주었던 멋진 장면 또한 잊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백성에게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결단하도록 재촉했을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주님이 그들의 하나님이심을 입증해준 통쾌했던 승리의 장면은 오랜 세월 이스라엘 민족의 정신적 승리의 상징이 되어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기에 엘리야가 살아서 승천했음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고, 그 엘리야가 다시 그들의 역사 위로 내려오리라는 바람 또한 간절한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갈멜산에서의 승리는 바알 예언자들의 기세를 아주 꺾어놓지는 못했다. 극적인 감동을 주었던 엘리야의 선언도 오랜 세월 길들여진 백성들의 타성을 흔들어 놓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그런 현실을 눈치 채지 못한 엘리야는 아니었으리라. 그러나 희망이 없다는 것을 훤히 알면서도 끊임없이 투쟁만을 반복하게 한 동력은 엘리야의 “순수”, 무모해 보이기까지 한 그의 “순수”에서 오는 것은 아니었을까. 다시 쫓기는 신세가 된 엘리야가 죽기를 간청하지만 그 소원조차 들어주지 않는 주님에게 실망한 그가 초췌해진 모습으로 호렙 광야에 머물고 있을 때 주님과 주고받은 대화는 <열왕기>를 읽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잊어버릴 수 없으리라. “그 때에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엘리야야, 너는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엘리야가 대답하였다. ‘나는 이제까지 주 만군의 하나님만 열정적으로 섬겼습니다....’”(왕상 19:9)“하나님만 열정적으로 섬겼다.”를 우리말 성서들과는 달리 KJV와 ASV는 보다 실감나게 “I have been very jealous for...”로 번역하고 있음을 주목하지 않는다면 이 장면을 실감나게 읽기는 어려울 지도 모른다. <아가서>의 시인은 “사랑은 죽음처럼 강한 것, 사랑의 시샘은 저승처럼 잔혹한 것,”(아가8:6)이라 읊었지만, 사랑하기 위한 시샘, 하나님에 대한 엘리야의 열정은 바알에게 부귀와 힘을 요구하는 탐욕과 같은 것은 아니었으리라. 엘리야의 시샘은 독점하고자 하는 욕구이고 자신의 모든 감정을 오로지 하나님에게로만 향하게 하려는 열정이 아니었던가. 이 완고하기만 한 엘리야의 “응답”은 그의 일생을 일관하는 모토였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그를 위대하게 하는 근거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은 엘리사보다 엘리야가 더 위대한 예언자라는 인상을 대대로 심어주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 슬로건이야말로 그에게 후계자가 필요했고 그 후계자가 실무적인 엘리사이지 않으면 안 될 요인이기도 했다. 엘리야의 후계자로 예언계에 들어선 엘리사는 스승과는 달리 현실감각을 가지고 사태를 분별할 줄 아는 위인이었다. 타이르고 교육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그렇다고 엘리사가 현실과 타협했다거나 관용일변도의 길을 걸었던 것은 아니었다. 예후가 통치하던 시대의 예언자로서는, 왕국의 정신과 사회구조를 송두리째 갈아엎고 새로운 씨를 뿌리는 방법 말고는 다른 생각을 할 수는 없는 노릇. 그러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엘리야와는 아주 다른 방법을 취했던 것이다. 고집 불통하는 엘리야의 정서는 그의 일생을 일관하는 올곧은 자세로 나타났다. 그 정서야말로 그를 위대하게 하는 근거이기도 했고. 그러한 그의 자세는 엘리사 보다 엘리야가 더 위대한 예언자라는 인상을 심어주는 자료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자세야말로 그로 하여금 후계자가 필요하게 했고 그 후계자가 실무적인 엘리사가 아니면 아니 될 요인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바알의 예언자들에게 승리한 것은 엘리야였고, 긴 역사를 두고 보면 결국에는 이스라엘백성으로 하여금 오직 하나님만을 섬길 것을 결단하게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일이 그렇게 간단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어떤 위기나 사건이라 할지라도 단 한 번의 극적인 대응으로 한 민족의 문화를 영구히 바꾸어 놓을 수는 없는 노릇. 그것을 완성하거나 일상화하기 위해서는 엘리사와 같이 온건한 지도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엘리사는 충고도 하고 비난도 했다. 그러나 의분에 불타 투쟁을 일삼는 예언자는 아니었다. 인간의 약함을 이해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가장 현실적인 해법을 찾아내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누가 엘리야이고 누가 엘리사인지를 분별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사이비 엘리야와 엘리사라는 가려내야할 터이지만.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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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범
    2016-02-25
  • 엘리야와 엘리사
    예언자 엘리야의 고고한 성품을 단숨에 파악하기 위해서라면 “갈멜산에서의 승부수”(왕상18장) 한 장면이면 족할 것이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쪽에 다리를 걸치고 머뭇거리고 있을 것입니까? 주님이 하나님이면 주님을 따르고,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십시오.” 엘리야는 확실하지 않거나 불투명한 현실 앞에서도, 멈추거나 다른 각도로 살펴보려 하지 않는, 오로지 사생결단하는 타입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편인지를 확인하는 몸부림이기도 했기에,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확실한 증거를 얻기 위해서라면 극단적인 방법도 서슴지 않았으리라. 그는 왕 앞에서도 예사로 파괴와 멸절을 예언하는가 하면, 온 백성이 굶어죽으리라는 막말 성 발언조차도 주저하지 않았다. 엘리야의 고독은 타고난 성향이거나 살다보니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운명적인 차원이 아니었다. 그에게 분명하게 책임 지워진 하나님의 뜻으로 그는 받아들였다. “너는 이곳에서 아내를 맞거나, 아들이나 딸을 낳거나, 하지 말아라. “(렘16: 8)“너는 사람들이 함께 앉아서 먹고 마시는 잔칫집에도 들어가지 말아라!”(렘 16:8)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명령을 들은 사람이 엘리야 말고 또 있을까. 그러니까 산속에 숨어있는 자신에게 먹을 것을 공급해주는 것은 까마귀였노라고 엘리야는 천연덕스럽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왕상 17:4) 엘리야가 달리 유를 찾아보기 어렵도록 고독한 인간이었음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언제나 외톨이 이를테면 기인이었다. 그러다가도, 아니 그랬기 때문에, 그가 사람이나 사건을 재단할 때에는 더 없이 엄격한 인간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됨됨이가 그렇게 생겨먹은 엘리야가 예언자 집단의 리더로 행세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했을 것이고. 호렙산, 바람이 지나가고 지진이 있은 후, 하나님이 조용한 목소리로 그에게 일러준 사명은 끝내 이루어 낼 수가 없었다. 왕을 설득하고 정치노선을 바꾸게 하는 엄청난 일은 산속에서 까마귀나 벗 삼는 기인 따위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러기에 하나님도 후계자를 세우도록 암시했고, 엘리야 자신도 수락한다. 그의 결단은 자신의 역량을 헤아린 겸손이기도 했으리라. 이상주의자이긴 했어도, 엘리야는 하나님의 일차적인 요구가 무엇이었나에 집착해서 현실과 자신의 능력을 가늠하지 못 하는 위인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도 받은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보다 실천적인 후계자를 찾지 않으면 안 된다는 현실적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 후계자가 자신을 빼닮은 인재여서는 안 된다는 당연한 결론을 두고 망설일 필요도 없었고. 그러니까 스승 엘리야와 제자 엘리사의 만남이 기질적으로나 삶의 자세에서는 아주 다른 인물끼리의 만남이 될 수밖에 없었음은 필연적 결과였던 것이다. 엘리사는 엘리야를 만나기 전까지는 어떤 예언자 집단에도 속해있지 않은 농부였다. 자신은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자식도 아니라고 말한 아모스와도 같은 처지였다(암 7: 14).엘리야가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준 사건은 엘리야의 기적들 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것이었다 해도 과언이 안될 것이다. 엘리야가 길을 가다가, 사밧의 아들 엘리사와 마주쳤을 때, 엘리사는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갈고 있었다. 엘리야가 엘리사의 곁으로 지나가면서, 자기의 외투를 그에게 던져 준다. 그러나 엘리사는 즉석에서 그를 따르기 보다는 엘리야를 떠나 겨릿소를 잡고, 소가 메던 멍에를 불살라서 그 고기를 삶고, 그것을 백성에게 주어서 먹게 하는 과정을 소화한다. 그런 다음에야 엘리사는 엘리야를 따라 그의 제자가 되는 여유를 보였다. 처음부터 그는 실천적인 인물이었다. 한편 엘리야가 신분이 낮은 농부를 자기와 동등한 권위의 예언자로 탈바꿈해버린 것은, 자신의 예언자적 사명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결단이긴 했어도, 거기에는 엘리사가 농부였고 앞으로도 농부일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엘리사는 시종 실천적인 인간이었고, 민중의 현실적인 문제를 이해하고 정치적 현실을 파악하려는 열성을 가진 인간이었기에. 일생을 세속을 벗어나 산에 있어야했고, 세상을 하직할 시점에서는 불 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스승 엘리야와는 달리, 엘리사는 일생을 농부로 땅에 발을 붙이고 지냈다. 그럼에도 예언자로서의 영광이 늘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의 예언은 엘리야만큼은 아니라 할지라도 위엄이 있고 장려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의 삶을 두고 현실적으로는 엘리야보다 훨씬 효능적이었다는 평가를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6-02-19
  • 말에 대해서
    <야고보서>가 유난히 가부장적 체취를 풍기기 때문일까, 루터가 그랬던 것처럼, 프로테스탄트들은 야고보서를 한 옆으로 밀쳐놓기를 아쉬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야고보의 경고가 바로 “나” 혹은 “우리”를 겨냥하고 있기 때문에, 서둘러 그의 말에 귀를 닫아버렸으면서도, 어쭙잖은 신학을 내걸어 자위를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가 하고 뉘우칠 수라도 있다면 그나마 다행한 일일 것이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선생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많아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아는 대로, 가르치는 사람인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야고보서 3:1) 이 글을 앞에 하고서도 고개를 처들 수 있는 설교꾼이 있을까 싶긴 하지만, 현실은 그 반대인 것은 분명하다. 휴머니즘이란 말은 흔히 인간적이란 뜻으로도 쓰이고 있다. 됨됨이가 넉넉해서 밥이라도 잘 살라치면 “그 사람 인간적이다.” 하고 말해주는 것처럼. 그러나 휴머니즘은 그런 차원의 말은 아니란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또 휴머니즘이란 단어가 인간애를 가리키는 필란트로피스(Philanthropists)와 구별되어 쓰이고 있다는 것도 모르지 않는다. 휴머니즘이 필란트로피스보다 상위개념이라고 한다면 어폐가 될지 모르지만, 적어도 고대 그리스 로마인들은 “휴머니즘”이 있고서야 “필란트로피스”도 성립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자신보다 몸집이 크고 힘이 센 짐승들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 곧 휴머니즘이었기에. 동물들을 이기기 위해서 할 수 있던 일은 기껏 주술행위뿐이었던 원시인이, 스스로의 지혜와 전술과 의사소통을 통해서 짐승을 극복할 수 있게 된 인간으로서의 자부심이 곧 휴머니즘이었던 것이다. 한 때는 동물을 그들의 조상으로, 심지어는 신으로 섬기기도 했던 그들이 아니었던가. 고대 그리스인들이 조령동물신(祖靈動物神)으로부터 탈피하여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 되었고, 그 바탕이 곧 “말(로고스)”이라 믿었던 것이다. 조령동물신으로부터 벗어난 인간은 이제 인간의 모습을 띈 신을 발명해낸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만들어 놓은 신상들은 한결 같이 실제 인간보다 크고 아름답고 힘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그들도 인간의 연장선상에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신들에게 성격을 설정해주고 걸 맞는 스토리를 만들어주는 것도 로고스였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했다고 믿어온 히브리 그리스도교의 전통이 “로고스가 참 사람이 되었다”하고 이해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문화현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말(로고스)”이 너무 경박해지고 있다. 특히 한국 그리스도교회의 강단에서 난무하고 있는 말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는 한탄을 들어온 지가 이미 오래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의 대언은 고사하고 제대로 휴머니즘의 차원이라도 유지해주었으면 하는 느낌을 어찌하랴! 야고보는 말의 힘이 엄청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혀도 몸의 작은 지체이지만,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다고 자랑합니다. 보십시오. 아주 작은 불이 굉장히 큰 숲을 태웁니다.”(3:5) 말의 피해도 엄청날 수 있다는 말을 덧붙여가며. 바벨탑이 무엇이던가. 한 무리가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 여겨, 그들이 생각 대로 사상의 통일을 이루려고 기술력과 경제력을 총동원하며 안간힘을 썼지만,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마땅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바벨탑은 흉한 몰골을 남기고 역사에서 사라지는 가 싶었다. 그러나 악마는 그냥 주저앉으려 하지 않았다. 중세의 가톨릭교회와 소련의 공산주의자와 독일의 나치스가 바벨탑의 흉내를 내었다. 오늘에도 많은 세력들이 그 유혹을 물리치려 하지 않는다.“여러분이 아는 대로, 가르치는 사람인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야고보의 충고는 날카로우면서도 모든 사정을 헤아려 품고 있는 경구이다. “가르치는 사람인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하는 경구를 모르고 있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래서 야고보는 “여러분이 아는 대로”라는 부사절을 덧붙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야고보서 3장 2절: “우리는 다 실수를 많이 저지릅니다. 누구든지,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온 몸을 다스릴 수 있는 온전한 사람입니다.” 충고는 이어진다. “여러분의 마음에 지독한 시기심과 경쟁심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고, 진리를 거슬러 속이지 마십시오...위에서 오는 지혜는 우선 순결하고, 다음으로 평화스럽고, 친절하고, 자비와 선한 열매가 풍성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3:14-17)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6-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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