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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역사교과서는 “테러리스트 사관”
    일본인 사토 마사루(佐藤優,1960-)는 신학을 공부했지만 외교관이 되어 러시아의 일본 대사관에서 근무했고, 지금은 각종 매스컴을 누비는 논객이 되어 있다. 최근 <문예춘추(文藝春秋>의 의뢰로 중국, 한국 러시아의 역사교과서가 일본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한 바 있다. 그는 일본의 역사 교과서는 ‘수험공부 이외에는 아무 짝에도 쓸 모가 없다’는 결론부터 앞세운다. 거대한 연표 만이어서 읽어가기에도 힘이 든다 했다. 그것은 기억과 그 재생만을 중시하는 일본의 엘리트 양성시스템이 후진국 형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며 너스레를 떤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역사교육은 한 해 동안에 통사를 공부하는 것으로 그치는 암기중심 교육으로부터 하루 빨리 탈피해야한다고 충고한다. 스토리를 중시하는 보다 많은 분량의 교과서를 만들 필요가 있다면서, 역사교과서를 러시아와 같이 수년에 걸쳐 배우도록 개편하는 것이 이제부터의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지혜와 사고를 몸에 붙일 수 있는 유효한 방법이 될 것이라 역설한다. 반면에 중국, 한국, 러시아의 교과서에는 독자적인 이야기가 실려 있어서 읽어가노라면 흥미를 느낀다면서 각국의 역사관과 사고방식의 포인트를 간단명료하게 짚어준다. 러시아와 중국은 세계의 그 어떤 나라 사람과도 대화가 가능한 철저한 리얼리즘과 보편성을 지닌 역사를 가르치고 있지만, 한국은 독자성이 강해서 국제적으로 통용할 수 없는 안으로 향한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면서, 각론에서 한국의 역사교과서를 ‘테러리스트 사관’에 따르고 있다고 결론짓는다. 그가 놀란 것은 한국 역사교과서에 쓰이고 있는 역사관이라 했다. ‘이 나라의 역사관은 일본에게도 위협이 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안 될 것’이라면서. 그 이유는 ‘세계 교과서 중에서도 극히 드문 테러리스트 사관으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이란 것. “우리나라의 선조들은 여기까지 밀리고 밀려서 테러를 감행할 수밖에는 다른 길이 없었노라” 하는 역사이해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예상과는 달리 북조선과의 친화성이 강하게 느껴진다면서 북조선의 역사교과서보다도 더 과격한 내용이 되어있다고도 언급한다. 그가 참고한 것은 2012년부터 2014년에 걸쳐 사용된 고교수준의 교과서를 편집부에서 번역한 것과 아카시(明石)서점이 출판한 ‘세계의 교과서 시리즈’였다는데, 구체적으로 우리의 어떤 교과서를 자료로 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다만 한 곳에서 ‘지학사’의 고등하교 한국사에서의 인용이라는 주석을 통해서 짐작만 해볼 뿐이다. 국내에서도 서로 극명하게 대립하는 역사관을 표명하고 있는 터라 섣불리 다룰 수는 없겠으나, 그가 정리한 내용은 대충 이렇다. 한일합병 전후의 기록에서 이런 특징이 두드러지는데, 테러리스트하면 안중근이 떠오르지만 그에 대해서는 오히려 선명하다는 느낌을 준다는 것. 왜냐하면 “장인환과 전명운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의 침략을 미화한 스티븐슨을 저격했고, 안중근은 만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했다 (1909).” “박열은 1923년 일본에서 국왕의 암살을 꽤했고, 조명하는 1928년 대만에서 일본의 황족을 칼로 습격하는 의거를 감행했다.”는 기록. 그리고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가 세상을 놀라게 했고, 특히 중국인에게 강한 인상을 심었다.“등의 글을 들추며 ‘끝도 없이 많은 테러리스트를 열거하고 있다’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이토 히로부미는 초대수상이라 해도 국가의 원수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옥(玉)’ 일본의 국가원수인 천황이나 황족의 목숨을 노린 자가 한국 교과서에서는 가장 위대한 투사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에 성공한 안중근보다 천황암살에 실패한 테러리스트에 대해서 보다 자상하게 다루고 있다는 것은 천황 암살이라는 동기만으로도 주목을 받고, 수단이나 결과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이런 평가도 가한다. 문명국에서 통상적으로 테러에 의해서 현상을 타파하려는 시도를 칭찬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국은 다르다. 이 교과서에서는 ‘우리나라의 테러리즘의 역사는 이만큼 오래된 것이다’하는 넋두리 말고는 별로 배울 것이 없다면서, 이스라엘이나 아일랜드에서도 이러한 교육은 하지 않는다고 침을 놓는다. 한국문화는 한(恨)이라지만 교과서도 분노의 충동으로만 채워지고 있다는 것이 그의 최종적 평가였다. enoin34@n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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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6-18
  • 발자크의 '프랑도르의 예수 그리스도'
    서머셋 모옴이 “천재라 부르기에 합당한 인물”이라 일컬었고,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프랑스의 작가 발자크(Honore de Balzac,1799-1850)의 <프랑도르의 예수 그리스도>는 당시의 교회를 비꼰 작품으로 같은 취향인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읽을 수 있는 <대심문관>과 비슷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발자크를 크리스천이라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여러 갈래의 이견이 있을 것이나, 어디 그를 두고서만 그럴까. 이름 있다는 목사를 두고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지 모르지 않겠는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가 그리스도교와 교회에 관심을 가져 주었다는 것만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프랑도르의 예수>는 중세에 일어났다는 사건을 그린 내용이라 현대인의 입맛에는 진부할 수도 있을 것이나, 작품이 쓰인 1831년 2월은 “7월 혁명(1830)”직후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오늘 우리 교회 현실과의 비교에서 적잖은 것을 건질 수 있으리라. “예수가 다시 이 땅에 왔다는 이야기는 프랑도르에서 멀지 않는 한 섬과 바다가 무대가 된다. 배 한 척이 나그네들을 섬에서 뭍으로 실어 나를 참. 선원은 늦게 오는 사람들을 재촉하는 뿔 나팔을 불어댄다. 그날의 마지막 배였기 때문이다. 승객이 배를 채우고, 선원이 밧줄을 끌러 출항하려 할 즈음에야 낯선 사나이가 나타난다. 배 뒤 쪽에서 서성이던 사람들은 그가 그들 틈에 자리 차지를 못하도록 분주하게 설쳐댔다. 그들은 부자요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었다. 높은 신분의 프랑도르 귀족 넷과 젊은 남자 귀족과 그의 연인,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와 신부님, 그리고 무기를 지닌 호위 병사를 대동한 부자가 꽤 무거워 보이는 돈 자루를 지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그 곁에는 레벤대학의 학자와 조교가 자리했고. 낯선 사나이가 배 뒤쪽에서는 자리를 찾을 수가 없다는 낌새를 알아차리고 앞쪽으로 가는데, 거기 승객들은 그에게 자리를 비워주며 공손하게 맞아들인다. 그러는 것을 보는 뒤쪽 사람들 틈에서는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배 앞 쪽에는 가난한 사람들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이든 병사에 아이 딸린 술집 여인, 아들을 데리고 가는 농부, 나이든 거렁벵이 여인 등. 그들 틈에 뒤늦게 자리를 잡은 사나이는 그들에게 고맙다는 눈길을 돌렸다. 선원들이 밧줄을 풀고 항해사가 키를 잡으면서 노를 젓는 이들에게 큰 소리로 호령했다. “서둘러라. 속도를 높여라!” 폭풍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를 젓는 선원들은 힘껏 속도를 올리려 안감힘을 쓴다. 그러나 뭍 가까이에 다가왔을 무렵에는 무서운 폭풍이 배를 들이치는가 싶더니 항해사의 탁월한 솜씨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배는 전복하고 만다. 바로 그 때 그 낯선 사나이가 배에서 허우적거리는 이들에게 소리쳤다.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따라오시오!” 사나이는 흔들리지 않는 걸음걸이로 파도 위를 걸어가는 것이었다. 배 앞쪽의 가난한 사람들은 그를 따라 그와 같이 바다 위를 걸어갔다. 항해사는 배에 매달려 애쓰고 있었고, 부자는 허겁지겁 돈이 든 자루를 둘러메고 가려다가 그 자루와 함께 물에 빠져 버렸다. 교양 있는 사나이는 “사기꾼을 따라 바다를 걸어갈 수 있다는 사나이의 말을 믿는 바보들”을 비웃다가 그도 덮치는 파도에 휩쓸리고 말았다. 젊은 귀족 여인은 애인에게 매달려 그를 따라 깊은 바다로 빨려 들어갔고, 신부와 늙은 귀부인은 불신앙의 무거운 짐으로 해서 바다 깊숙이 가라앉고 말았다. 가난한 사람들이 뭍에 이르렀을 때는 앞서가던 사나이는 이미 보이지가 않았다. 항해사는 널빤지를 붙들고 간신히 깃에 도착했지만 깊은 상처를 입고 있었다. 낯선 사나이가 그를 구해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낯선 사나이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예수가 마지막으로 이 땅에 찾아온 일었다.” 이야기를 마감하면서 발자크는 썼다. “사람들은 이제 믿지 않는다.” 또 “믿는다는 것은 곧 사는 것이다.” 발자크는 현실을 아름답게 보다는 있는 그대로 그리고자 했기에 자연주의 작가로 평가받는다. 그는 하루가 다르게 세속화되어가는 당시의 낙관주의와 자본주의를 자연주의적인 시각으로 그리려 했다. 또 그가 그리고자 했던 것은 “돈이 모든 것이다.”라는 당시의 풍조였다. <두르의 신부>와 같은 작품에서 보여주듯 발자크는 교회의 권위주의와 권력투쟁을 날카롭게 비판했지만 자신은 신앙인이라 믿고 있었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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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6-11
  • 어린 요셉이 걸친 화려한 옷의 의미
    값으로 쳐서 4 세겔에 불과한 비단 옷 한 벌이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오랜 세월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게 하는 단서가 되었다는 교훈은 아무리 곱씹어도 지나치지 않으리라. 야곱은 오랜 방랑과 투쟁의 삶을 접고 조상들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온다. 이제 야곱은 물질적으로도 충족했고 주변으로부터 존경도 받는 처지가 되어 있다. 한 때 그의 위협이었던 형 에서 조차도 야곱을 적으로 돌리기보다는 이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상책이라 판단하도록 주선할 줄 아는 야곱이었으니 그의 노련한 수완 앞에 거칠 것은 없을 것 같았다. 풍요의 땅 하란에서부터 양을 돌보는 일에 이력이 나 있는 아들들이 양들을 잘 돌보아주어 그 수가 엄청나게 불어나있었다. 근방의 초원에서는 미처 양들을 먹일 수가 없는지라 억척같은 아들들은 꽤나 먼 지역까지 그들의 활동무대를 넓혀가고 있는 터였다. 나이든 야곱은 경제문제에 대해서는 아들들에게 일임하고 있었다. 이제는 바라던 대로 학문을 즐기는 한 편 파란 많았던 젊은 시절을 회상하며 편안한 노후를 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미드라시(Midrash)’는 바로 그럴 즈음에 사탄이 하나님 앞에 나타났다고 읽는다. 사탄이 하는 일이란 바로 잘 된 사람을 걸어 고자질 하는 것이 아니던가. 야곱을 걸어 사탄이 하나님께 시비를 걸고 나선 것이다. “믿음직한 사람에 대한 보상이라면 내세에서 베풀어주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유독 야곱에게만 이 세상에서도 저렇게 즐길 수 있는 특혜를 주는 것입니까?” 하고 힐난하고 나섰다는 것. 그러니까 늘그막해서 야곱에게 닥친 환난, 즉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하는 아들을 잃고 슬퍼하지 않으면 아니 되게 된 야곱의 고통은, 바로 야곱이 현세에서 보상으로 누리는 안락한 삶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다시 말해서 평온해 보이는 야곱의 집 안에서 재난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씨앗은 야곱이 너무나 사랑하고 있었던 아름답고 감각적이고 총명할 뿐만 아니라 남달리 조숙한 아들 요셉이었다는 것이다. 그 요셉이 다툼과 불화의 씨앗이 되어 나이든 아비에게 아픔과 슬픔을 안겨 준 것이다. 그 씨앗의 씨앗은 불과 4 세겔 짜리 비단 옷 한 벌. 이것이 빌미가 되어 한 민족을 노예로 만드는 싹을 키우게 된 것이다. 행복했던 오텔로의 삶에 질투라는 불을 질러 불태워버린 것이 불면 날아갈 한 장의 손수건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토라(Torah)’도 야곱의 교육적 실패를 간단하지만 극명하게 잘 보여주고 있다. “이스라엘은 늘그막에 요셉을 얻었으므로, 다른 아들들보다 요셉을 더 사랑하여서, 그에게 ‘화려한 옷’을 지어서 입혔다.(창세기 37:3, 개역성서는 ‘채색 옷’(=coat of many colours)로 번역) “화려한 옷”의 값어치가 어느 정도였을까. ‘탈무드’는 “화려한 옷”은 “비단 옷”으로 읽는다. 그리고 그 값은 4 세겔 정도로 추정했다. 그러니까 바로 4 세겔의 차별화가 “형들은 아버지가 그를 자기들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보고서 요셉을 미워하며, 그에게 말 한 마디도 다정스럽게 하는 법이 없었다.”의 동기가 된 것이다. 야곱의 아들들을 질투로 불태우기 위해서는 최신형 스포츠카나 호사한 요트가 아니라도 충분했다. 단지 4세겔 정도의 비단 옷 한 벌이면 충분했다. 다만 야곱은 이 보잘 것 없는 옷 한 벌이 저질러 놓을 심리적 작용에 대해서 너무나 등한 했던 것이다. 그것이 이스라엘 자손들로 하여금 이집트에서 오랜 세월을 노예로 살게 하는 원인이 될 줄이야 꿈에도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니까 ‘미드라시’는 사탄의 계략으로 읽는 것이다. 이렇게 ‘탈무드’는 이 4 세겔이 이스라엘 역사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강조한다. 자녀의 앞날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은 자녀들을 위해서 쓰는 금액의 많고 적음에 따르지 않는다 했다. 오히려 그 금액에 묻어있는 마음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요셉의 형들의 질투가 노예로 팔아넘긴 요셉이 이집트의 재상이 되어 오히려 그의 일족을 기근에서 구해내는 기적 같은 사건으로 발전하지만, 그리고 그 일은 먼 앞날을 헤아리는 하나님의 배려였다는 해석이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요셉의 ‘비단 옷’이 긍정적인 평가를 누릴 수는 없다는 것이 ‘탈무드’와 ‘미드라시’의 이해인 것이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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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28
  • ‘보물섬’의 배경, 해적 킷드 이야기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보물섬’과 그에서 번진 여러 버전들로 해서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는 ‘해적 킷드’의 본 이름은 윌리엄 킷드(William Kidd、1645-1701). 스코틀랜드 태생이었으나 어려서 식민지 뉴욕으로 이주했다. 무역에 종사하면서 유력인사들과의 친분을 얻어, 사략선(私掠船, privateer)의 허가를 취득한다. 사략선이란 국가로부터 면허를 받아 무장한 선박을 운영하여 해적을 비롯한 불법행위를 단속하고 전투도 할 수 있게 한 선박이었다. 자금의 5분의 4를 댄 귀족들이 주주였다면 자신의 배 안티크호를 팔아서 나머지를 충당한 킷드는 현대 경영용어를 따르면 CEO이었던 셈이다. 새로 건조한 ‘어드벤처 게리호’에는 해적 퇴치용 대포 36문을 장착하는가 하면, 70명의 승무원을 태웠다. 그러나 정작 수익은 탐탁하지 못했다. 한몫을 노리던 선원의 불만을 달래야 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과 투자자의 이익을 위해서는 적대국 프랑스의 선박과 해적선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영국적 이외의 모든 선박을 약탈 대상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어느덧 킷드는 유사해적 노릇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1697년 10월 30일, 윌리엄 무어라는 선원과 말다툼 끝에 킷드가 던진 철재 물통이 무어를 죽게 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를 계기로 킷드는 완전히 해적으로 변신하게 된다. 1698년 1월 30일 “Quedah Merchant”라는 상선을 발견하자 프랑스선박으로 여기고 프랑스국기로 위장하고 접근해서 약탈을 감행한다. 작전이 마무리 지어질 즈음 그 배가 영국적인 것으로 밝혀진다. 킷드는 선원들에게 배를 다시 돌려주겠으니 없었던 일로 하자고 제안했지만 선원들은 거부하고 킷드 선장을 따라 해적이 된다. 킷드는 두 척의 선단을 거느리는 어엿한 해적선장으로 거듭난 것이다. 1698년 4월 1일, 마다카스칼섬에 도착한 선단이 처음으로 마주친 해적선 ‘Mocha Frigate호’는 공교롭게도 한 때 킷드 밑에서 부선장으로 일하던 로버트 칼리포드 (Robert Culliford)가 선장이 되어 있었다. 킷드의 공격명령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거의 모든 선원이 지난날의 부선장 칼리포드 편에 붙어버리자, 패잔병이 된 킷드는 귀국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뉴욕으로 돌아온 그는 곧 구속 수감되었다가 영국으로 호송된다. 해적행위와 윌리엄 무어 살인죄로 유죄판결을 받은 킷드는 1701년 5월 23일, 런던에서 교수형을 받고 시신은 테임즈 강둑에 매달려 해적지망생들을 경고하는 본보기가 된다. 물론 킷드에게 출자했던 귀족들은 크게 수치를 당했다.일반적으로는 킷드가 귀족들에게 출자를 부추겨서 해적해위를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뮤지엄 어브 런던 도그런즈”에서 있었던 ‘해적 킷드 선장 이야기’에서는 오히려 킷드가 부유층간의 대립에 휘말렸다는 견해를 드러낸 바 있다. 킷드의 사업은 스폰서의 의사를 따랐을 뿐이었는데, 그로해서 수익에 위협을 느낀 동아시아회사의 배후조종이 킷드를 범죄자로 내몰았다는 것. 그의 무죄를 증명할 만한 증거는 분실된 상황에서 진행되었다는 재판과정을 보면 알 수 있다는 것.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할 것은 처형을 앞둔 킷드 선장이 하원의장에게 썼다는 편지의 내용이다. 보물(약탈품)을 감추어둔 곳을 일러줄 터이니 목숨을 살려달라고 썼다는 것. 그의 소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서인도제도에 감추어진 10만 파운드의 보물은 물거품이 된 것이다. 이로부터 소위 ‘보물섬전설’이 꽃을 피우게 된 것이다. 보물섬 전설에 다시 불붙기 시작한 것은1929년, 영국의 변호사 휴벗 파머가 구입한 17세기에 만들어진 오크나무 책상에 ‘선장 윌리엄 킷드, 1699’라는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고 발설하면서였다. 가느다란 놋쇠 파이프에서 찾아낸 양피지와 잇따라 발견된 3장의 비슷한 지도에는 모두 킷드 선장의 것과 흡사한 필적이 있었다나. 파머 변호사의 발견에 대해서는 여러 이견이 있어왔지만, 선장 킷드가 숨겨두었다는 보물은 그리 큰 금액이 나가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 중론인 것 같다. 킷드가 들렀다는 노바스코시아주의 오크 섬이나, 킷드가 활약거점으로 삼았다는 뉴욕만의 가니너즈 섬에서는 오늘도 보물찾기가 이어지고 있단다. 최근 인디아나 대학 조사팀이 ‘Quedah Merchant호’로 보이는 선박을 발견했다는 소식도 있고...새삼 보물섬이야기를 생각하게 되는 것은 3백여 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우리의 상황은 별로 달라진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가 아닐까 싶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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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15
  • 존 단의 ‘자살론’ (비아타나토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따르면 오늘날 “자살”을 의미하는 단어로는 “suicide”가 대표적으로 쓰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suicide”라는 어휘가 영국에 처음 등장한 것은 17세기에 이르러서였다. 이전에는 “self-murder” 나 “self-killing” 과 같은, 직접적으로 “살인행위”를 나타내는 단어를 쓰고 있었다. 기독교사회가 “자살”을 “살인행위”로 보아왔기 때문이다. “Self-killing”이나 “self-murder” 대신 “self-homicide”라는 단어를 등장시킨 것은 우리에게도 그 이름이 낯설지 않는 시인 존 단이 최초의 <자살론>이라 평가받고 있는 <비아타나토스, (biathanatos), 1647>를 출판하면서였다. 영미법사전에서는 “murder”가 유죄한 살인이라면, “homicide”는 정통적(正統的)이거나 우연한 살인에 해당되는 자살을 일컬을 때 쓰인 용어. 그러니까 “homicide”는 “killing“이나 ”murder“와 같이 직접적인 범죄성을 인정하는 표현은 아니게 되는 셈이다. 이를 이어서 “suicide”를 처음 문헌으로 등장하게 한 것은 1651년, <자살옹호론>을 저술한 월터 찰톤(Walter Charleton)이었다. 그는 의사이면서 철학자 그리고 성직자이기도 했다. 그는 존 단이 창안한 “self-homicide”에 이어서 “suicide”를 만들어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라틴어에는 “suicide” 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니 사실임이 입증된 셈이다. 그런데 존 단이 법률가에 시인 그리고 성직자였다는 사실과 월터 찰톤의 이력에서 뭔가 연결 고리가 있을 것 같아 흥미롭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는 교회가 자살한 오필리아의 장례를 거부하는 장면이 있지만, 그리스도교에서 자살은 대체로 두 유형으로 나누어 판단했던 것 같다. 순교와 인간적인 이유의 자살. 전자에 대해서는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겠으나, 인간적인 이유에서의 자살은 사악한 것으로 규정되었다. 고해성사를 통해서 새로운 삶의 기회를 얻었음에도 스스로 삶을 거부하는 행위에는 교회법뿐 아니라 세속법도 지극히 엄격했다. 교회 묘지에 매장될 수 없는 것은 고사하고, 목숨이 끊어진 시체에 가해지는 끔찍한 형벌은 퇴마의식과 동일한 통주저음을 가지고 있었다. 조르주 미누아의 <자살의 역사>는 이렇게 적고 있다. “검으로 자신을 찔러 죽은 자는 머리통에 나무토막을 박았다. 물속에 뛰어들어 자살한 자는 물에서 5피트 떨어진 모래밭에 묻었다. 높은 데서 뛰어내려 죽은 자는 시신의 머리와 배와 발에 돌을 달아 산 밑에 매장했다...독일의 일부 지역에서는 시체를 말에 끌고 다니다가 묶은 채로 목을 매달아 두었다. 대체로 시신은 뒤집힌 자세로 끌려 다니다가 거꾸로 교수대에 매달렸다. 영국에서는 자살자를 내왕이 많은 네거리 밑에 매장했다. 시신을 엎어 놓고 등에 말뚝을 박아 가슴으로 튀어나온 말뚝이 땅속에 단단히 박히도록 했다....유가족에게도 조처가 내려지는데, 가문 전체에 수치가 되는 이 구경거리에 반드시 참석해야 했을 뿐 아니라, 재산몰수라는 이중의 형벌을 받았다. 자살을 억제하기 위한 본보기가 필요했던 것이리라.” 르네상스 시기에는 자살이 일기, 문학, 비망록 등에서 어렵잖게 발견할 수 있는 주제가 된다. 16세기 후반 피에르 드 레스투알의 일기가 당대의 자살 사례를 상세히 소개했고, 고대 영웅들의 자발적 죽음을 칭송하는 문학작품이 불어나면서, 자살론은 점차 대중 속으로 파고들게 된다. 루크레티우스, 카토, 브루투스, 세네카 등, 존경할 만한 인물이 자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왜 자살을 하는가?”를 논의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된다. 그럼에도 자살이 죄라는 의식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자살처벌법은 여전히 확고했고 퇴마의식과 연결된 유가족의 어려움은 가혹하기만 했다. 영국은 “자살대국”으로 알려지고 있었다. “자살은 피하라. 실패하면 범죄자, 성공하면 미치광이(lunatic).”라는 속담이 있을 지경이었다. 그만큼 영국에서는 자살론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17세기의 신학자 존 심(John Sym)은 “면책 받을 수 있는 자살(exempt cases)”이 있을 수 있다고 역설했다. (1) 이해력과 이성이 결여된 자. (2) 자신의 행위를 자각하지 못할 경우. (3) 합법적 행위로 인해 불운한 죽음을 맞는 경우. (4) 삼손처럼 하나님의 명에 의한 경우. (5) 야수적인 정념이나 무분별한 충동에 사로잡혔을 경우를 들고 있다. 이 모든 시도들은 모두 존 단의 <비아타나토스>에서 비롯되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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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범
    2015-05-08
  • 마에스트로에 대해서
    “마에스트로(Maestro)”하면 “마이스터징어(Meistersinger)”가 연상되는 것은 소시 적 바그너의 역사 드라마 ‘누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에서 받은 강렬했던 인상 때문일 것이다. LP 재킷을 더듬어가며 다듬어낸 주인공 한스 작스의 모습이 그대로 “마이스터징어”의 이미지가 되어버린 것이리라. 덩달아 “마에스트로”라는 칭호조차도 함부로 쓰기를 주저하는 버릇이 생겨버린 것도 어쩔 수 없는 일. “마에스트로”를 흔히 거장(巨匠)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거(巨)”란 예술적으로는 물론 정신적, 인격적으로도, 나아가서는 지성과 경험의 크기까지를 아우르고 있는 말 같아 더욱 그렇다. 그러니까 오늘날 교향악단의 지휘자를 흔하게 “마에스트로”로 불러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가 될 지도 모르겠다. 더러 목사님들이 성가대 지휘자를 마에스트로라 불러 주는 것은 자신이 음악을 비롯한 예술 쪽에 관심과 지식이 없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 보이려는 의도가 배어있을 수도 있겠지만, 이런 현상은 그 범위를 넓혀 국가적 차원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예술 방면에서 활발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는 영국의 노만 레브레히트(Norman Lebrecht)는 ‘마에스트로 신화(The Maestro Myth, Great Conduc tors in Pursuit of Power)’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지휘자의 헌신적인 팬이 되어간다. 영국의 수상 마가렛 대처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절대주의를 공공연하게 시기했다. 리처드 닉슨은 워터게이트 사건이 한참이었을 즈음에도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에게 안부편지를 썼고, 그의 필라델피아 관현악단의 연주에 참여하고자 틈을 냈었다. 헬무트 슈미트가 지배력을 유지하고 있는 동안에는 저명한 마에스트로가 서독 땅에 발을 들여 놓을 때 마다 관저의 저녁식탁에 초대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비교적 음악에 관심이 적은 나라라는 평을 받고 있는 프랑스에서 조차도, 피에르 불레즈의 귀국과 다니엘 바렌보임의 바스티유 취임에 장관들이 큰 관심을 보였다.(바렌보임의 바스티유 취임은 우리의 정명훈과도 관계가 있는 사건이었다.)” 레브레히트의 익살은 계속된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선물을 바치려는 욕구에 사로잡히고 있다.’ 하고 말한 것은 번시타인의 친구였다 ”하고 운을 떼면서, 자신의 불만을 쏟아낸다. “영국의 지배층은 작곡가는 무시하면서도 많은 지휘자들에게는 작위를 주는가하면, 카라얀이 이렇다 할 학문에의 공헌을 한 적이 없음에도 옥스퍼드에서 박사로 만들어주었다. 번시타인은 프랑스를 위해서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음에도 누구나 탐을 내는 ’레존 드누르 훈장‘을 수여받았다. 음악가들 중에서는 가장 외교수완이 모자란다는 로린 마젤은 유엔 사무총장으로부터 친선대사의 임명장을 받았다. 리카르토 무티는 바쁜 스케줄 때문에 한 번도 ’난민 캠프프‘라면 울타리를 쳐다본 적도 없는데 ’난민고등판무관‘으로 임명받았다.”사실이지 지휘자가 대중의 영웅이었던 적은 없었다. 소위 마에스트로는 엘리트의 “아이돌”이었을 뿐이다. 축구장이나 야구장 그것도 저가석을 차지할 수밖에 없는 스포츠팬이나, 지방정부의 복지예산을 축내는 계층의 눈높이에서는 마에스트로란 특권계급일 뿐일 것이다. 물론 토스카니니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드물 것이고, 영상으로나마 카라얀의 지휘 폼을 보지 못한 이도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이나 영상이 대중에게 알려지고 있는 것은 그들의 음악적 기교나 영향력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 참으로 묘한 것은 평등의 깃발을 쳐들고 있는 정치지도자라 할지라도, 아니 그들일수록 그러한 사실에 눈을 돌리려하지 않는 법이다. “뮤즈의 여신” 때문일 것이라고 핑계하는 이들이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충 보기에도 여느 때에는 뮤즈 여신의 치맛자락도 쳐다보기 싫어하는 정객들이 그럴듯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날이면 마에스트로 라는 호칭을 입에 달게 되는 것을 보면 필시 뮤즈의 여신 아닌 다른 어떤 신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진다. 마에스트로들이 권력가들의 힘을 의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현상은 도처에 널려있다. 한편 권세 잡은 이들이 마에스트로가 뿜어내는 설명하기 어려운 신화적 마법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노리려 드는 꼼수에 대해서도 알려지지 않은 것은 별로 없을 것이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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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범
    2015-04-23
  • 안겔루스 질레지우스의 명상시
    독일 바로크시대를 대표하는 신비주의 시인 안겔루스 질레지우스(Angelus Silesius,1624-1677)는 하나님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 다가선 신비사상가였다. <명상시집>으로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는 그의 대표작의 원래 이름 <Cherubinischer Wandersmann,(케르빔적 방랑자)>가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시인은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천사를 닮고자 스스로 정신적 방랑자가 된다. 명상으로 얻은 시상들을 두 줄 혹은 넉 줄의 간결한 형태로 적어가며. “하나님은 모든 것을 초월하기에,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다. / 하나님은 침묵으로 섬기는 것이 옳다.” “‘나와 그분의 관계’ 말고는 아무 것도 없다. / 만약에 우리가 이 양자관계를 잃어버린다면 / 하나님은 이미 하나님이 아니고, 하늘은 무너진다.”하고 노래한 시에는 “모든 것은 ‘나와 그대(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다.”라는 제목을 붙여 놓았다. 세계의 모든 존재는 인간의 인격적인 “나”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그대”하고 부르는 관계로서 집약된다고 본 것이다. “나와 그대”의 관계가 무너지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게 되고, 한 기능으로서의 평면적인 물(物)로 변해버린다고 생각했다. 그와 같은 시인의 생각은 <나와 그대(Ich und Du)>의 철학자 마르틴 부버(Martin Buber)와도 맥을 통하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또 시인은 외식적인 기도는 물론, 외면적인 기도도 부정했다. 기도 대신 침묵하고 명상했다. 명상만이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생각했다. “말은 타자의 입보다는 그대 안에서 훨씬 크게 울린다. / 침묵하고 그 말에 귀 기울여라.” 명상을 내세우는 시인은 결코 인간의 육체를 무시하지 않는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나의 육체는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곳인 것을. /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이 육체를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질레지우스는 소리를 내어 떠들썩하게 찬송가를 부르거나 기도하는 꼴을 보아 넘기지 못했다. 신성에 반하는 짓이라 여긴 것이다. 질레지우스를 모르지 않을 막스 피카트(Max Pickard)도 그의 명저 <침묵의 세계, Die Welt des Schweigens)>에서 말했다. “침묵 속에서, 비로소 인간은 하나님의 신비를 만난다. 침묵에서 태어나는 언어는 아직 아무 것도 말한 적이 없는 최초의 말과 같이 근원적이다. 이 언어는 하나님의 신비를 말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 침묵으로 하나님의 신비로 다가설 때, 인간 스스로도 침묵의 층을 넓혀가며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시인은 읊었다. “하나님을 향해 소리쳐서는 안 된다. / 물(水)의 근원은 그대 속에 있는 것을. / 그대가 입구를 틀어막지 않는다면 물은 끝없이 흘러나온다.”“나는 유일한 것을 사랑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 모르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택한 것이다.”“그리스도가 천 번을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 해도, 그대 속에서가 아니면, 영원히 무의미하다.” “골고다 십자가는 그대 속에 세워지지 않으면, 그대를 악으로부터 끌어낼 수 없다.”“내가 자신의 빛을 직시해야 한다면 / 면전에 그 어떠한 벽도 만들어서는 안된다.”그에게 있어, 성서, 기도서, 찬송가 혹은 교회의 예전은 한갓 매개물에 불과했다. 이들을 치워버리고, 눈을 감고,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고, 내면과 마주하는 것이 명상이었다. “자신의 빛”을 본다는 노릇은 자신의 내면의 빛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올바르게 기도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싶다면 그대 내면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마음에 물어보아라.” 했다. “미스틱”이란 본래 그리스어로 “눈을 감는다”는 뜻. 눈은 외부를 보기 위한 것. 외부에 매이지 않고 자신의 내면을 보기 위해서는 눈을 감아야 한다. 보이는 현실 세계를 포기하고, 오로지 내면의 길을 걸어 피안의 존재와 접촉해보려는 의도이다. 시인은 그 과정을 “자신 안에 있으면서 자신을 초월해서 하나님에게 이르는 여행”이라 했다. 언어도 비유도 미칠 수 없는 “영혼의 광야”를 방황하는 케루빔적 방황처럼 미지의 나를 찾아 아직 창조되지 않는 신성한 바다에 잠기는 것이 곧 안겔루스 질레지우스의 명상이었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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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범
    2015-04-09
  • 시몬느 베이유가 만난 예수
    20세기 전반을 남달리 극렬하게 살다간 여성사상가 시몬느 베이유(Simone Weil,1909-1943)는 크리스천이었을 수도 있고 아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녀의 격렬한 삶이 그녀가 예수로부터 얻은 그 무엇과 전혀 무관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거의 자살에 가까운 그녀의 최후가 34세였던 것도 우연은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파리에서 유대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베이유는 유달리 병약했지만 그녀의 뛰어난 재능은 주변의 주목을 끌었다. 고등사범학교 재학시절부터 사회활동에 참여했고, 22세가 되어서는 로망 로랑, 사르트르와 더불어 “징병제반대성명서”에 서명하는 명사가 되어 있었다. 과격한 활동으로 경찰에 체포되기도 하지만, 주변으로부터는 “정체불명의 신비적 존재”로 인식되는가하면, 스스로 성 프란체스코의 고향 아시시로 가서 특별한 종교체험을 하기도 했다. 철학교사로 일하는 동안 극심한 두통에 시달리는 발작 속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의 의미를 깨닫는가하면, “그리스도께서 붙들어 주셨다”는 신비체험을 하기도 했다. 다음에 소개하는 것은 그녀가 남긴 글에서 건져 올린 작은 구슬 중의 하나라고나 할까. “그분이 내 방에 오셔서 말씀하셨다.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 말도 못하는 불쌍한 이여. 나를 따르오. 그대가 생각지 못한 것을 가르쳐 주리다.’ 나는 그분을 따라 나섰다. 그분은 나를 한 교회로 데리고 가셨다. 새로 지은 그러나 누추한 교회였다. 그분이 나를 제단 앞에 무릎을 꿇게 하셨다. ‘세례를 받지 않았습니다.’하고 응답했다. ‘진리 앞이라 여기고 사랑으로 무릎을 꿇으오.’ 하시는 말씀을 듣고 나는 순종했다. 그분이 나를 교회에서 데려나와 한 지붕 밑 방으로 올라가게 하셨다. 열린 창문을 통해서 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목재로 짜인 발판과 하천이 보였다. 사람들이 배에 짐을 싣고 내리고 있었다. 지붕 밑 방에는 테이블과 의자가 둘 있을 뿐, 그분은 나를 앉으라 하셨다. 우리 둘 뿐이었다. 그분이 말씀하시는데, 이따금씩 누군가가 들어와서 대화에 끼어들다가 나가기도 했다. 겨울이랄 수는 없지만 봄이라기 에도 일렀다. 새싹이 돋지 않은 나뭇가지는 햇빛 속 냉기에 젖어있었다. 빛이 솟구쳐 빛나다가 점차 그 색이 바래지더니 마침내는 별과 달이 창문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다시 여명이 찾아왔다. 그분이 말없이 선반에서 빵을 꺼내셨다. 우리는 그것을 나누었다. 진정한 맛을 지닌 빵이었다. 이후로 다시는 그 맛을 볼 수는 없었다. 나와 자신의 잔에 포도주를 따르셨다. 그 포도주에는 태양과 그 ‘나라’가 현존하고 있는 대지의 맛이 배어있었다. 우리는 마루에 눕기도 했다. 그럴 때면 쾌적한 잠이 찾아들었다. 다시 눈을 뜨고 태양 빛을 들이 삼켰다. 가르침을 약속하셨으면서도 그분은 아무 것도 가르쳐주시지 않았다. 우리는 오랜 친구 인 것처럼 내키는 대로 모든 것에 대해서 마음껏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날 그분이 말씀하셨다. ‘이제 가시오.’하고. 나는 무릎을 꿇고 그분 발에 입을 맞추며 나를 내쫓지 말아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그분은 나를 계단으로 밀어내셨다. 나는 형편없이 찢긴 마음을 안고 앞뒤도 가리지 못한 채 계단을 내려왔다. 나는 하염없이 골목길을 헤매고 걸었다. 그러다 그 집이 어디에 있었는지 전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 집을 다시 찾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분이 나를 찾아오신 것은 착오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지붕 밑 방은 내가 머물 곳이 아니다. 어딘들 어떠랴. 독방 감옥이건, 하찮은 장식과 붉은 비로드로 치장한 부르주아의 응접실이건, 역 대합실이건, 어디인들 어떠랴만, 그 지붕 밑 방이 아닌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때로 두려움과 뉘우침에 떨면서 그분 말씀의 이것저것들을 혼자 되씹지 않을 수는 없었다. 내 기억이 정확한지에 대해서는 장담할 수 없다. 말씀해주신 그분이 여기에 계시지 않은 것을. 그분이 나를 사랑하지 않으신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어떻게 그분이 나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내 속 깊이 도사리고 있는 작은 점과 같은 것이 있어, 나로 하여금 두려워 떨면서도 혹 그분이 나를 사랑하실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했다. ““너희의 보물이 있는 것에 너희의 마음이 있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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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범
    2015-04-02
  • 단테는 '연옥'에서 별을 보았다
    <신곡>에서 단테는 35세가 되던 해 성금요일에, <지옥>에 내려갔다가 부활주간 나흘 동안을 <연옥>에서 보내게 된다. 그렇게 <신곡>에서는 <연옥>이 부활과 관계 지어진다.단테는 베르길리우스의 인도를 따라 내려간 지옥을 “한숨과 울음과 고통의 비명들이/별 하나 없는 어두운 하늘에 울려 퍼졌다...”(지옥편,III, 22-44)로 묘사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시구로 <지옥편>을 마감한다. “우리는 둥글게 열린 틈을 통해/하늘에서 아름다운 것들(별)을 보았다./그래서 밖으로 나와 우리는 다시 별들을 우러러 보았다.” 시인 단테가 그린 지옥의 이미지는 별이 없는 세상. 그러면 시인이 “별 하나 없는 어두운 하늘”이라는 이미지로 보여주고자 하는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서양문학에서 별은 “항해의 길잡이”이고 “희망”이었다면 철학자들에게는 “높은 이상”이었다. 또 플라톤은 “사랑하는 이의 눈동자”라 했는데, 니체는 그가 살던 세계를 “별이 사라진” 세계라 했다. 단테가 그리는 <지옥>, “별이 없는 세상”에는 바로 그런 현세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지도 모른다. <연옥>과 <지옥>의 차이는 “별이 있고 없고”에 있다고 한다면, 그래서 연옥의 “하늘”이나 지상의 “하늘”이 같은 하늘이라면, 연옥은 지상과 동떨어진 다른 별에 있는 것이 아닐 터. 그러나 별은커녕 하늘도 볼 수 없다는 <지옥>도 그 입구가 지상에 있다고 했으니, 시인이 <지옥>을 경험했다는 사실은 이승의 단테와 무관한 일은 아닐 성 싶어진다. 인생 중턱에 단테는 피렌체의 대표로 선출된다. 그러나 그 영광은 일전직하 영영 돌아올 수 없는 망명생활의 출발점이 된다. 그야말로 단테에게는 <지옥>이었으리라. 그러나 그는 망명지에서 <신곡>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그를 도와주는 이들은 이승의 존재가 아닌 정신적인 스승 베르길리우스와 구원의 여인 베아트리체였다. 그들은 아직 이승의 존재인 시인의 눈을 뜨게 해준다. 시인은 다시 별을 본다. 단테의 <지옥>은 이승에 그 입구가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출구는 없는 것이 <지옥>이란다. 그래서 지옥은 절망지대이다. 사르트르가 “출구 없는 현대”를 한탄한 것은 단테의 영향이었을까. “별이 없고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은 출구가 없다는 말이 아닌가. 출구는 전망을 허락한다. 전망은 소통을 낳는다. 키엘케골은 “절망”을 죄라 했고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했다. 절망에 가까이 있다는 것은 지옥에 가까이 다가섰다는 말. 절망이란 죄에 대한 징벌이기 보다는 스스로 절망함으로 <지옥>을 만드는 노릇일지도 모른다. 단테는 <연옥>의 입구를 그리면서 이렇게 노래한다. “그대는 이제 연옥에 이르렀으니/보라 저기 둘러친 성벽을/보라 저기 벽이 열린 곳을.” (연옥편 IX 49-51) <연옥>은 닫혀있는 중립지대가 아니다. 방향과 전망을 보여주는 열린 지대. 죄인은 거기서 여정을 거치는 동안 정화되어서 목적하는 정상으로 다가서게 되는 것이다. “오른다. 는 말이 <연옥편> 전체에서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은 여간 위로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영혼들이 다음 단계로 올라가게 되는 메커니즘은 “사랑”이라 했다. 모든 죄의 공통분모는 사랑의 결여이거나 변질. “악을 향해 탈선한 사랑”, “너무나 미지근한 사랑”, “증오로 변한 사랑”, 이런 것들이 죄의 본질이란다. 또한 올라야 할 “산”은 언제나 가파르기만 한 것은 아니란다. “처음 아래에서는 힘이 들지만/오르면 오를수록 힘이 덜 든다.”(연옥편, IX, 88-90) “ 했으니.자크 르 고프(Jacques Le Goff,)의 <연옥의 탄생(La naissance Purgatoire), 1981>에 따르면, 유럽에서 연옥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한 것은 12세기에 들어서였단다. 12세기야 말로 유럽에서 “인류가 지상에 정착한” 시기라 했다. 현세는 더 이상 내세로 가는 관문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긍정되기 시작했다는 것. 더 이상 종말이 임박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들이 번지고 있을 즈음, 기독교인은 현세에 자리 잡기 위해서 종말을 먼 미래로 연기하게 되면서, 최후의 심판에 이르기 까지 영적인 준비를 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 그래서 연옥은 인간의 이야기가 될 수 있는지도 모른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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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범
    2015-03-18
  • '황금전설'에서 퍼 담아 본 유다의 모습
    <황금전설>에서 퍼 담아 본 유다의 모습중세 가톨릭은 “유다의 자살”이라는 주제를 이용해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이전의 전승들을 “자살”로 내몰고자 안간힘을 썼다. <황금전설>속에 나타나는 유다의 이야기에서는 그런 노력의 흔적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단순한 “구전전설”이기보다는 십자군원정을 겪은 그리스도교회가 “전(前)그리스도교적” 생각과 의식들을 <자살>로 몰아넣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편집한 전설들이었기에. <황금전설>에서 읽을 수 있는 유다의 이야기들을 다듬어 본다. 유다는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대인 부부 르우벤(Reuben)과 시보레(Cyboree)에게서 태어난다. 시보레가 자신이 유대민족을 멸망케 할 아이를 임신하게 되는 꿈을 꾸자, 곧 남편에게 사실을 알린다. 르우벤은 그 꿈이 악령의 장난이기 때문에 마음에 둘 필요가 없다면서 아내를 달래지만, 아이가 태어나자 시보레는 겁을 먹고 아기를 바구니에 담아 바다에 흘려보냈다.바구니는 물결을 따라 스카리옷(Scarioth)섬에 닿는데, 마침 아이가 없는 그 섬의 왕비가 아기 유다를 발견하고는 자신이 낳았다고 소문을 퍼뜨렸고, 유다는 왕좌를 이어받을 왕자로 자라게 된다. 얼마 후, 왕비가 왕의 아이를 낳게 되어, 둘은 형제로 성장하게 되는데, 유다에게 태생적인 난폭성이 드러나면서 아우를 때리고 학대하는 일이 잦았다. 참다못한 왕비가 유다 출생의 비밀을 퍼뜨리자, 화가 치민 유다는 아우를 살해하고 배를 저어 도망친다.예루살렘에 도착한 유다는 빌라도 총독궁을 찾아가는데, 왕자로 양육 받은 유다는 흠쾌한 영접을 받는다. 어느 날 이웃 정원 과수에 열린 열매를 탐한 유다가 그 열매를 훔치다가 주인에게 들키는 사건이 일어난다. 바로 그 정원이 유다 자신의 친아버지 르우벤의 정원인 것을 알 리 없는 유다가 다투던 끝에 친아비를 죽이게 된다. 르우벤이 급사했다는 소식을 알게 된 빌라도가 상속자가 없는 그의 토지와 재산을 가로채기 위해 음모를 꾸미는데, 그것은 양아들 유다로 하여금 르우벤의 미망인과 혼인하게 하는 술책으로 들어나게 된다. 언제나 우울한 모습인 시보레로 부터 그런 사유를 듣게 된 유다는 자신이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근친상간의 죄를 범한 자임을 알고 고민에 빠진다. 어미이자 아내인 시보레의 권유를 따라, 자비와 용서를 구하기 위해 예수를 찾아간 유다는 예수의 유능한 제자가 되어 돈주머니를 맡게 된다. 그러나 타고난 사악함이 다시 나타나서 은화 30량을 받고 스승을 유대인에게 팔아버린다. 그 후 뉘우치고 돈을 돌려주고서는 스스로 목을 매었다는 것이 <황금전설>판 유다 스토리의 대강이다. 이 전설의 일부가 유대교의 경전 <구약>의 자료들로 꾸며진 것이란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버려진 유다가 왕자로 자랐다는 대목은 모세의 탄생과 성장이야기에서, 아우를 죽인 사건은 카인이 아벨을 죽인 이야기에서 얻어온 것.게다가 친아비를 죽이고 친모와 혼인한다는 주제는 <오이디푸스 신화>에 있는 이야기. 이렇게 그리스 세계에서 빌려온 이야기와 유대전승에서 가져온 이야기들을 섞어가며 제법 그럴듯한 잡탕을 끓여낸 것이다. 또 과일을 훔치려했던 정원은, 그 결론은 크게 달라지지만, <오이디푸스 신화>에 등장하는 “운명의 세 여신” 모이라의 이야기와 잘 어울리고 있다. 아비를 죽이고 어머니와 혼인한 사실을 알게 된 오이디푸스는 절망한 나머지 자신의 눈을 뽑고 장님이 되어 방랑하다가 아테네 왕의 도움으로 크로노스 숲에서 최후를 맞는다. (소포클레스: <크로노스의 오이디푸스>) 크로노스는 여신들이 사는 거룩한 숲. 그곳에 묻힌 오이디푸스는 그 땅을 지키는 수호신이 된다. 그래서 오이디푸스는 구원받지만, 유다의 자살은 하나님의 징벌이기에, 유다가 자살한 그 땅은 아켈다마(Akeldama,피밭), 저주의 상징으로 기억된다.유다의 어미 시보레가 꾼 꿈과 성모 마리아의 “수태고지”도 비교꺼리가 된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꿈을 믿고 받아들이지만, 시보레의 남편 르우벤은 악마의 짓이라며 믿으려 하지 않는다. 이런 사실들이 유대인 스스로를 멸망케 하는 자료가 되어주도록 다듬어지는 것이었다. < 황금전설>의 의도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복음서>의 틀을 벗어난 ‘전 그리스도교적 전설’들을 유다에게 뒤집어씌우면서도 구원이 아니라 자살로 몰아감으로 그런 정서를 없애버리려 했고, 유일하게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라 뽐내는 유대인의 콧대를 꺾어놓기에 안성맞춤인 작전이기도 했다.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5-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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