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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네로와 세네카
    세네카는 네로가 열두 살 날 때부터 14년 동안 네로 곁에 있었다. 처음 여섯 해는 가정교사, 이어지는 여덟 해는 정치적으로 보좌한다. 그렇다고 황제가 된 이후 줄곧 네로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세네카가 나이 들면서는 네로가 자신에게서 멀어지고 있다는 낌새를 느꼈을 것이다. 정치적 군사적인 면에서는 그 영향력이 줄었다 하드라도 음악과 시 쪽으로 기우러지고 있는 네로에게 있어서 세네카는 요긴한 조언자였을 터.권력을 가진 자는 그렇지 못한 이들의 비난의 대상이 되게 마련. 식민지 브리타니아를 상대로 고리대금을 한 것은 세네카만이 아니었지만, 원로원은 세네카가 그 우두머리인 양 비난했다. 게다가 무사로서 세네카와 함께 어린 네로를 가르치고 지켜왔던 아프라니우스 부르스의 죽음은 네로를 불안하게 했다. 이미 60대 후반에 접어든 세네카는 은퇴해서 저작활동에 전염하기로 한다. 35세 제자와 66세 스승의 이별은 평온한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네로의 지시로 세네카는 자결하게 되는데... 네로는 아내 옥타비아를 버리고 애인 포페아와 결혼한다. 옥타비아는 살해되고. 아무 일 없다는 듯 그냥 지나갈 일이 아니지 않는가. 네로가 황제가 된 것은 앞선 황제 글라디우스의 양자가 되어 그의 딸 옥타비아와 사이에 자식을 가지게 됨으로써만 정당성이 인정될 수 있는 것을. 그런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어머니 아그리피나가 그렇게도 반대한 이혼이 아니던가. 네로가 어머니 아그리피나를 죽였다는 소문이 돈다. 네로가 황제가 될 수 있는 또 하나의 근거인 어머니를 살해했다는 것이다. 새로 왕비가 된 포페아는 이것 보란 듯이 사치에 치우쳐 시민들의 눈 밖에 난다. 스무 다섯 살 네로, 그만한 고비쯤은 해결될 것이라 여겼을지도 모른다. 네로는 소년 시절부터 시를 좋아했다. 손수 수금을 켜며 자작시를 노래하는 황제의 연주회는 관중으로 붐빈다. 노래하는 황제라! 어찌 대중의 흥미를 끌지 않겠는가. 게다가 공짜라는데. 우쭐해하는 네로. 그러나 사건들이 이어진다. 로마에 큰 불이 나자 그리스도 교도를 박해한다. 처형을 구경거리로 만들려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 교도를 처형하는 잔혹한 볼거리는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틀어진다. 타키투스는 기록했다. “그들이 더 무거운 죄를 지었다 하드라도 처형하는 방법이 지나치게 잔인한 것은 시민들의 가슴을 동정으로 몰리게 했다. 시민들은 알고 있었다. 그리스도 교도에 대한 잔혹한 처형은 공공의 이익 보다는 몇 사람의 잔인한 욕구 충족을 위한 것이란 것을...” 그리스도 교도를 방화범으로 몰아 자신에게 솔려 있는 시민들의 의심을 불식해보려 했던 네로의 의도는 실패한다. “방화범은 네로!”라는 소문이 발 빠르게 번져나갔다. 태어난 지 16년 하고 10개월짜리 틴에이저가 로마의 황제가 되었을 때, 국민의 지지율은 꽤 높은 편이었다. 세네카가 작성하고 네로가 낭독한 원로원에서의 시정방침 연설문의 대강은 이렇다. “...짐에게는 통치권을 차질 없이 행사하기 위한 훌륭한 조언자와 모범이 있다. 젊었기에 시민들의 다툼이나 가정불화에 몸을 적시지 않고 있다. 그 누구에게도 증오를 품은 적이 없고, 그 누구로부터도 모욕을 받은 적이 없다. 따라서 복수의 욕망도 없다.”-조언자는 원고를 써준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일 것이고, 모범이란 아우구스투스 황제일 것- 연설은 이어진다. “나는 사법권을 소수의 손에 맡기지 않을 것이고, 짐의 집에서 매수나 정실로 통하는 길은 모두 없앨 것이다. 카이사르의 집안과 국가 사이에는 명확한 선을 그을 작정이다. 원로원은 예부터 내려오는 권한을 확보해도 좋다.” 취임 연설은 결코 공수표가 아니었다. 네로를 규탄하기 위해 서슴없는 글을 썼던 타키투스마저 “이 약속만은 네로가 충실히 지켰다.”하고 기록했으니. 감동한 원로원 의원들은 네로에게서 아우구스투스의 재림을 본다. 연설문을 은판에 새기고, 황금으로 황제의 상을 만들겠다고 제안한다. 더러는 네로가 태어난 12월을 한 해의 시작으로 해야 한다며 흥분한다. 그럼에도 네로는 과장된 영예라며 물리친다. 원로원은 감사의 말씀만이라도 받아 주십사 간청하는데, 네로는 “받을 만한 자격이 되었을 때에 주시오.”한다. 결국 그 때는 영영 오지 않고 말았지만, 그와 같은 겸손이 네로 본래의 자세였는지 세네카의 지시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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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17
  • 셀마 라겔뢰프의 ‘촛불'
    줄거리: 옛날, 이탈리아 피렌체에 라니에로라는 사나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남달리 힘이 센 그는 쉬 화를 내는가하면 곧잘 다른 사람을 두들겨 패는 고약한 버릇이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프란체스카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면서 우쭐해진 그는 다른 사람을 헤아리지 못하는 고약한 버릇이 더 심해갑니다. 그럼에도 남편에의 사랑을 지키고 싶은 프란체스카는 어쩔 수 없이 친정으로 돌아갑니다. 아내의 자상한 심정을 헤아릴 수 없었던 라니에로는 자신이 공을 세워 명성을 떨치게 되면 아내가 돌아 와주리라 여기고 자원하여 용병이 됩니다. 공을 세워 차지한 전리품을 성모 마리아 상 앞에 바치기도 하고, 황제의 기사로 출세도 합니다. 그런데도 아내는 돌아오지 않는지라 더 큰 공을 세워보려고 십자군 원정에 참여합니다. 가장 귀한 전리품을 피레네 대성당의 성모 마리아상 앞에 바치면 아내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입니다. 이슬람을 무찔러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한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라니에로는 예루살렘에 있는 그리스도의 성묘에서 불타고 있는 불씨를 자신의 초에 점화할 수 있도록 허락받습니다. 성화 촛대를 옆에 끼고 한참 축연을 즐기고 있는 터에 한 익살꾼이 나타나서 이야기판을 벌입니다. 내용인즉 하늘에서 이번 전투를 내려다보던 베드로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이편과 저편이 엄청나게 피를 흘리며 약탈을 거듭하면서도 도대체 회개하려는 병사는 찾아볼 수는 없는 것이 안타까워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베드로의 찌푸린 눈살에 예수님의 모습이 들어옵니다. 주님은 눈을 반짝이며 무엇인가를 골똘하게 바라보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무엇일까. 궁금하여 주님의 눈길을 따라 바라보았더니, 그것은 라니에로의 천막 안 풍경이었습니다. 천막 안에는 작은 성화가 빛을 내고 있는데 반짝이는 촛불이 꺼지지 않게 하려고 라니에로는 무척 애를 쓰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지금 라니에로가 저 촛불을 지키듯이, 앞으로는 고통 받는 이와 병든 이, 그리고 슬퍼하는 이들을 돕기 위해서 애쓸 것이라고. 그러나 라니에로의 일상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기사들은 익살꾼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박장대소하며 말합니다. 그건 라니에로를 몰라도 너무 모르고 하는 말이라고. 라니에로가 이미 자신의 전리품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고향 피렌체 대성당 성모상 앞에 바친 바가 있긴 하지만, 이번의 전리품 중에서 가장 귀한 이 성화만은 바칠 수 없을 것이라고. 화가 치민 라니에로는 선언합니다. “나는 이 촛불을 꺼지지 않은 채 피렌체까지 모셔 가고 말거야.”하고. 이튿 날 이른 아침부터 촛불을 모시는 라니에로의 기묘한 여행이 시작됩니다. 촛불을 지키며 여행하기란 생각만큼 쉬운 노릇은 아니었습니다. 뒤를 향해 말 등에 올라 앉아 외투로 바람을 막으며 아주 천천히 나아가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도둑을 만납니다. 도둑 따위를 두려워할 위인은 아니었지만, 등불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힘센 말과 변변한 옷가지는 모두 그들에게 넘겨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낡아빠진 옷가지와 야윈 말 한 마리도 도적들이 베푼 신심 덕이었습니다. 꼴사나운 말 등에 그것도 뒤를 향해 올라앉은 라니에로의 몰골을 보는 사람들은 미치광이라며 마구 조롱해댑니다. 그럼에도 화풀이를 할 수 없었던 것은 오로지 촛불이 꺼질까봐 두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지난 날 아내가 자신에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애써준 일들에 대해서도 차차 그 뜻을 헤아리게 됩니다. 이렇게 가냘픈 촛불을 지키며 나아가는 기이한 여행은 이어지는데…라니에로가 체험하게 되는 모든 것은 이전의 삶에서는 생각조차 해볼 수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약하고 작은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참고 견디어내야만 했습니다. 노여움과 미움을 억제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굴욕을 참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진정 괴롭고 견디기 어려운 여행이었습니다. 그러나 보잘 것없는 가냘픈 촛불 하나가 그를 완전히 바꾸어놓았습니다. 스웨덴 출신의 여성작가 셀마 라겔뢰프(1858-1940)는 1909년 여성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스웨덴 국민은 화폐와 우표 등에 그의 얼굴을 실어서 국민작가로 대접하고 있다. 대표작 <닐스의 모험>은 스웨덴의 자연과 전설을 어린이들에게 알려 많은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소개한 <촛불>은 그가 쓴 3권으로 된 <그리스도 전설>에서 퍼온 것이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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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06
  • 리처드 3세
    2013년 2월, 영국 레스터대학 연구팀이 발표한 소식이 많은 유럽인들의 관심을 ‘리처드 3세’로 쏠리게 했다. 한 해 앞서 연구팀이 그곳 지하주차장에서 발굴한 유골은 리처드 3세의 것이 틀림없다는 소식 말이다. 척추측만 증상이 있는 등뼈에 금속 화살이 박혀 있었고 두개골에는 금이 가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럴 것이라 짐작 했었던 터에, DNA감정 결과 리처드 3세가 틀림없다고 보도했으니. ‘장미전쟁(Wars of the Roses)은 이름과는 달리 너무나 추잡하고 잔인한 전투였다. 뿌리는 한 왕조였으나 왕관을 두고 서로 원수가 된 랭커스터가와 요크가가 각각 ‘붉은 장미’와 ‘흰 장미’ 문장을 내걸고 다투었기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지 않는가. 다투어 힘 있는 귀족들을 제 편으로 끌어들여 왕관을 차지하려는 쟁투. 한 동안은 랭커스터가에게 왕관을 빼앗긴 시절이 있긴 했어도 요크가의 에드워드 4세가 꽤 긴 세월을 군림했고, 병사하자 아우 리처드가 왕이 된 것이다. 그러나 1485년 보즈워스 전투에서 요크가 편이 패하면서 장미전쟁은 막을 내린다. 발가벗긴 리처드 3세의 시신은 레스터로 옮겨져 민중의 눈요깃거리가 된 다음, 프란치스코 교회에 묻혔다고 전해졌지만, 얼마 후 교회가 허물어지면서 그의 시신은 깜깜이가 된 터였다. 21세기가 되어서야 레스터 대학 연구팀이 나서 고지도를 참조하여 주차장을 파보았더니 유별난 유골을 발견하게 된 것이란다. 장미전쟁과 리처드 3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셰익스피어의 붓이 큰 몫을 거들었다. 불과 두 해 동안 왕 노릇한 위인의 유골을 찾았다는 소식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것은 다름 아닌 문호 셰익스피어가 그를 소재로 쓴 희곡 <리처드 3세> 때문이었다는 말이다. 막이 오르면 꼽추로 분장한 주인공 리처드 3세가 자신감이 넘치는 목소리로 객기를 뿜는다. “길은 오직 하나 한껏 악당이 되어 주겠다!”며. 막이 닫힐 때까지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잔혹하고 비도덕적인 장면들. 형 클라렌스를 술통에 담가 죽이는가 하면, 부려먹던 가신들은 죽음으로 내몰고, 어미는 간통녀로 내몬다. 놀라운 것은 이 악한에게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을 믿고 따르게 하는 묘한 힘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의 손에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임을 당한 여인이 침을 뱉다가도 결국에는 그의 청혼에 굴복하고 만다. 훗날 이 연인마저 독살되지만. 아우 리처드의 됨됨이를 알아차리지 못한 형 에드워드 4세는 뒤를 이을 황태자를 위해 리처드를 후견인으로 지목하고 눈을 감은 것이다. 리처드는 장조카 에드워드 5세를 왕위에 앉히겠노라 약속하고는 대관식까지 런던탑에 있으라고 명한다. 에드워드의 아우 리처드도 함께. 왕자들의 저항은 전혀 먹혀들 수 없었다. 리처드 3세는 읊는다. “어려서 총명하면 장수할 수 없는 법” “봄이 이르면 여름이 짧은 법.” 목숨을 잃은 열세 살 배기와 열한 살 배기 두 왕자는 암매장된다. 스스로 왕관을 쓴 리처드 3세, “형의 자식들은 사생아여서 왕위계승권이 없었다.”며 의회의 승인을 받아낸다. 질녀 엘리자베스를 새 왕비로 맞겠다고 형의 미망인을 설득한다. 그러나 결국 보즈워스 전투의 승리자 헨리 7세의 왕비가 된다. 리처드에게 있어 “양심이란 말 따위는 비겁한 자가 쓰는 것”이었다. <리처드 3세>를 즐기는 팬들이 즐겨 암송하고 있는 명대사 “말을 달라! 말을! 나의 왕국을 줄 터이니 말을 달라!”(A horse!, A horse! My Kingdom for ahorse)”는 연기자가 가장 신나하는 대목. 드라마의 막장 ‘전란의 장’에 등장한다. “주사위 한 판에 목숨을 건 내가 아닌가. 패가 나올 때까지 물러서지 않겠노라. 리치먼드(훗날의 헨리 7세)패거리가 여섯이나 된다지만, 벌써 다섯은 죽였다.”하는 대사 다음에 뱉어내는 명대사. 그리고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 한 동안 숨을 죽이던 관중이 열광하고 박수 친다.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3세>는 진실과는 거리가 있다는 설이 있어 온지 오래다. 토머스 무어가 쓴 전기를 자료로 삼았다는 데도 말이다.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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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범
    2019-12-23
  •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
    <중세의 가을>를 쓴 호이징거(Huizinga, Johan)는 <에라스무스-종교개혁의 시대>도 집필했다. 둘은 모두 네덜란드 출생. 1872년생인 호이징거가 1469년생인 에라스무스의 생애를 책으로 쓴 것이다. 네덜란드인들은 에라스무스를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라 부르곤 했다. 호이징거는 쓴다. “베니스의 귀족정치를 제외하면, 네덜란드의 귀족정치만큼 오래 정교하게 비폭력적으로 나라를 통치했던 역사는 없을 것. 외국인의 눈에 17세기의 네덜란드 공화국이 번영과 자선과 사회 훈련에서 모범으로 비쳤다면 (비록 우리들 네덜란드 사람에게는 불완전하게 비친다고 하더라도...) 그 공적은 정부를 운영했던 귀족계급에게 돌리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호이징거는 그의 조국이 그러한 역사를 가질 수 있게 된 데에는 적어도 에라스무스의 영향이 없지 않았으리라는 고백을 덧붙인다. “네덜란드 귀족들에게 그런 동기가 살아있어 행동으로 옮겨졌다면, 에라스무스가 강조한 사회적 책임정신이 작용했기 때문일 것... 네덜란드의 역사는 주변의 다른 국가와 비교했을 때 피 흘림과 잔인함이 훨씬 덜했었기 때문이다.” 에라스무스 개인사에 대해서도 기록한다. “‘내가 공격당해도 다른 사람을 공격하지 않고, 그 누구도 노하게 하고 싶지 않다.’ 이것은 에라스무스의 말이다. 그러나 그의 적은 이를 원하지 않았다.” “늘그막 해서는 격한 논쟁에 이골이 난다... 루터나 그 밖의 다른 이들과 여러 차례 논쟁을 벌이고 만다. 처음 한동안은 무척 괴로워했다... 만약 에라스무스가 여론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았다면! 하고 생각해보게 된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그는 사람을 두려워했다. 아니면 자신의 옳음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지나쳤다 해도 좋을 것이다. 자신의 언행이 미칠 효과에 대해서 사전에 약간은 과장된 색채를 칠해서 내다보곤 했다.” 그는 종교개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떤 요청에도 신구 어느 편을 편들어 싸우려 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공격하지 않고. 그 누구도 화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 그러나 사람들은 그러는 그를 ‘병신’ ‘비겁한 자’로 보는가 하면 ‘해바라기족’이라 손가락질 했다. 그가 바라지 않았던 것은 ‘교황’이라거나 혹은 ‘반항자 루터’ 와 같이 직접 이름을 내건 아무개나 특정인을 공격하는 짓거리였다. 반면에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어리석음’ ‘폭력’ ‘격정’ ‘광신’에 대해서는 죽기까지 싸웠다. 여기저기에서 인용해본다:-그는 오로지 ‘광신’만을 이성의 적이라며 마음 깊이에서 미워했다. -그는 수도원으로부터 도망쳤다. 답답함과 편협함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에라스무스는 정상적인 궤도를 벗어난 것을 미워했다. -그는 다중의 열기가 느껴지는 공기와 악취를 무엇보다 싫어했다. 구린 냄새를 피하기 위해 먼 길을 돌아가곤 했다. -교란을, 거칠고 조화롭지 않은 것을 무엇보다 혐오했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투쟁을 혐오하게 한 것이다. 그는 그 누구와도 다투는 것을 견딜 수 없어했다. 붓에 피를 묻히지 않기를 원했다. 자신이 공격받을지라도 타자를 공격하지 않으려 했고, 그 누구도 노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곧 이 말 자체였다. 그러나 그의 적들은 이를 원하지 않았다. - 논쟁을 싫어하고 독선을 미워하고 격정을 마다했던 에라스무스는 오직 그의 필봉을 인간의 어리석음에 견주면서도, 풍자라는 형식을 빌려 해학의 옷을 입혀가며 인간의 본성을 비웃곤 했다. 그 결실이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는 <우신예찬>이 아니던가. 이 작품을 통해서 ‘바보 신’을 예찬하는 것은 풍자이고, 야유이고, 역설이고, 익살이었다. 에라스무스는 ‘바보 신’ 모리아의 입을 빌려 인간의 어리석음을 철저하게 비웃어준 것이다. 이쯤해서 슈테판 츠바이크의 <에라스무스의 승리와 비극>)에서 몇 곳 인용해본다. -흔히 “에라스무스가 낳은 알을 루터가 부화(孵化) 시켰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성격은 정반대였다. 루터는 싸우기와 논쟁을 좋아했으나, 에라스무스는 그러는 것이 질색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만일 내가 큰 저택을 차지한다 하더라도, 그 저택 때문에 소송을 해야 한다면 나는 그 저택을 남에게 주고 말겠다.” - “그는 죽었다. 홀로 외롭게... 그러나 결정적으로 그에게는 독립과 자유가 있었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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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06
  • ‘악령’에 등장하는 스테판 베르호벤스키 교수
    2017년 2월 3일자 본란에서 이미 다루었던 제목. 미루어 두었던 자료들을 간추려본다. 도스토옙스키의 <악령>은 러시아 혁명 후에 곧 ‘금서’가 된다. ‘숭고한 사명을 위해서 투쟁한 혁명 운동가들을 비방한’ 작품으로 판정된 것이다. 혁명의 주역이었던 고리키는 이렇게 단죄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은 1870년대의 혁명운동을 중상하기 위해서 꾸며진 무수한 시도들 중에서도 ‘가장 지능적이고도 가장 악질적인 작품’ “이라고. 고리키를 흥분케 한 것은 스테판 베르호벤스키를 비하한 작가의 표현들이었다. 스테판 베르호벤스키는 작품의 주역이 아니다. 첫머리에 얼굴을 내밀어 무대의 막을 열어주는 인물일 뿐이지만 작품의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크게 작용하고 있음에는 틀림없다. 도스토옙스키는 베르호벤스키라는 인물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그라노프스키(1813-1855)를 모델로 삼았다. 그는 1840년대 러시아 민중의 주목을 받던 ‘서구파’의 스타 지식인들의 리더였다. 많은 지식인들이 ‘순수한 인품을 지닌 자유주의자’라 평가했고, 도스토옙스키 자신도 <악령>의 ‘창작노트’에서 그를 높이 평가했었다. “그라노프스키는 많은 장점을 구비한 순수하고 이상주의적인 ‘서구파’의 초상”이라고. 그러나 그를 모델로 하고 있는 작품속의 스테판 베르호벤스키 교수는 형편없는 속물이 된다. 두서없이 작가의 생각들을 간추려 본다.“그에게는 소위 서구적 시민이라는 자신의 아름다운 포즈를 연기하면서 쾌감에 젖어드는 버릇이 있었다. 스테판 트로피모비치는 러시아 시민의 자유를 확립하기 위하여 투쟁하겠노라는 깃발을 들고 위험을 무릅쓰는 지식인의 탈을 쓰고는 있지만, 실상은 거들먹거리기만 하는 인간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노라 그냥 서있기에도 지친 나머지 줄곧 드러눕곤 했다. 그렇게 누운 자세로도 남을 꾸짖고 견책하는 시늉만은 유지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한 지방 도시에서도 그랬다.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손가락 하나도 까닥하지 않으면서 다만 아름다운 이상에 취해있는 스스로의 모습에 감동해서 우쭐대고 있었다. 더 놀라운 일은 그렇게 취한 채로 일생을 보낼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말상이긴 해도 아주 현실적인 여지주 스타브로기나의 ‘페트’ 노릇에 이골이 나서 우리의 스테판 트로모비치는 스물 두 해 동안이나 그런 포즈를 유지하고 있었다.” 작가는 서구를 동경하는 가짜 이상주의자들을 야유하고자 했다. <악령>에서 등장하고 있는 새 세대 젊은이들은 어린이였을 때에, ‘흉내만 내고 있는’ 이상주의자의 손에서 육성되었다고 그린다. 1940년대의 이상주의자들이 새로운 세대 즉 1860년에서 1870년대에서 전통을 부정하는 허무주의자들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그들은 스승 스테판 트로피모비치에게서 제대로 된 인간이 어떤 것인지를 배울 수가 없었다. 그는 가르치는 대상이 어린이 라는 사실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자신의 꿈을 보여주기에만 몰두했다. 어떻게 보면 순진했다. 아름다운 이상을 동경한 나머지 무의식중에 어린 아이들의 마음을 독으로 채우고 있었다. 자장가처럼 그의 말을 듣고 자란 그들은 그의 꿈에 갇혀버린 것이다.” 스테판 트로피모비치는 죽기 전에 이렇게 중얼거린다. “이 악귀들은 자진해서 돼지 속에 던져 달라고 애원하고 나선 것을. 아니 어쩌면 벌서 들어가 있는 지도 모른다. 그렇다 그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나는 그들 중의 하나다. 나의 아들 페트류샤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들의 동료들도. 어쩌면 나는 그 첫 번째 두목인지도 모른다.”(참조: 누가복음서 8장 33절)도스토옙스키가 한 친구에게 쓴 편지에서 말했다. <악령>에 대해서 많은 기대를 걸고 있다오. 그것은 사상적 바탕에서의 기대입니다. 머리나 마음에서 쌓이고 쌓인 그 무엇이 나를 끌어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책이 되어도 좋습니다. 하여튼 나는 내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있습니다. “(1870년 3월 24일)도스토옙스키는 당시 서구문화를 이상으로 떠받드는 러시아지식인들의 동경이 어린이들의 심성을 상하게 했고, 러시아의 현실에 뿌리를 둔 사고를 육성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는 자성을 포함한 비판을 시도했던 것 같다. 도스토옙스키는 선한 사람인척하는 이상주의자가 미숙하고 순진한 아이들을 선동해서 ‘악귀’로 만들어가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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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범
    2019-11-25
  • 모세와 이드로의 충고
    “미디안의 제사장이며 모세의 장인인 이드로는, 하나님이 모세와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하신 일, 곧 주께서 어떻게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셨는가 하는 것을 들었다.”(출 18:1) 소식을 들은 이드로는 모세를 만나 혁명의 성공을 축하하고 싶어 곧 길을 나선다. 이스라엘이 대제국 이집트의 압제에서 벗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이드로만은 아니었다. 인접한 여러 민족이나 나라들에서도 두루 화제가 되었었다. ‘토라’는 그러한 사실을 토대로 이야기를 진행해 간다. 하나님이 앞장서고 모세가 이끄는 이스라엘이라 할지라도 그 길에는 우여곡절이 없지 않았음을 소상하게 보여준다. “이 이야기를 듣고, 여러 민족이 두려워서 떱니다. 블레셋 주민이 겁에 질려 있습니다. 에돔의 지도자들이 놀라고, 모압의 권력자들도 무서워서 떨며, 가나안의 모든 주민도 낙담합니다.”(15:14-15) 그런가 하면 “그 때에 아말렉 사람들이 몰려와서, 르비딤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을 공격하였다.”(17: 8) ‘미드라시’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단다. “한 사람은 들어서 뭔가를 얻고, 다른 사람은 듣고 나서 뭔가를 잃는다.” 이드로가 “무엇을 들었느냐” 못지않게 “어떻게 들었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지 않는가. 그런데 이드로는 모세가 백성을 다스리는 일을 모두 보고 말하였다. ‘자네는 백성의 일을 어찌하여 이렇게 처리하는가? 어찌하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백성을 모두 자네 곁에 세워 두고, 자네 혼자만 앉아서 일을 처리하는가?’(18:5-14)이드로는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가 시행하고 있는 사법행정에 대해서 구체적인 비판을 하고 나선 것이다. 이드로의 눈에는 도를 넘은 모세의 열정이 사법행정에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고 본 것이다. 모세를 이용하기 위하여 찾아오는 사람들은 셀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모세는 그들이 부르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가려했다. 노련한 이드로는 그러한 모세의 운영방식이 오래 지속될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한다. 이드로도 자신의 민족을 영도해온 제사장이 아니던가. 용기를 내어 모세에게 충고한다. 모세는 대제국 이집트의 바로를 굴복시킨 영웅, 한 부족의 제사장 따위의 충고를 받아들여야 할 처지는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었으리라. 그래서 이드로에게, “나는 이제 장인어른의 도움을 받을 처지에 있지 않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니까요.” 하고 말할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모세는 소명의식을 내세워 이웃의 도움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그렇고 그런 소영웅 따위는 아니었다. ‘토라’는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다. “모세의 장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자네가 하는 일이 그리 좋지는 않네. 이렇게 하다가는, 자네뿐만 아니라 자네와 함께 있는 이 백성도 아주 지치고 말 걸세. 이 일이 자네에게는 너무 힘겨운 일이어서, 자네 혼자서는 할 수 없네. 이제 내가 충고하는 말을 듣게....자네는 그들에게 규례와 율법을 가르쳐 주어서, 그들이 마땅히 가야 할 길과 그들이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을 알려 주게. 또 백성 가운데서 능력과 덕을 함께 갖춘 사람,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참되어서 거짓이 없으며, 부정직한 소득을 싫어하는 사람을 뽑아서 백성 위에 세우게....그들이 사건이 생길 때마다 백성을 재판하도록 하게. 큰 사건은 모두 자네에게 가져 오게 하고, 작은 사건은 모두 그들이 스스로 재판하도록 하게. 이렇게 그들이 자네와 짐을 나누어지면, 자네의 일이 훨씬 가벼워질 걸세.(18:17-22)장인 이드로가 모세에게 바란 것은 모세의 권한을 단계적으로 나누는 일이었다. ‘토라’는 모세가 장인 이방인인 이드로의 충고를 기쁘게 받아들였다고 기록한다. 모세는 카리스마적인 자신의 능력이라 할지라도 다른 사람의 충고와 교사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음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18세기의 유명한 신비주의자 하임 벤 아탈은 모로코로부터 예루살렘으로 이주해온 랍비이다. 그의 손으로 작성된 토라 주석서 <생명의 빛>에서 랍비는 말했다. “이드로가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찾아온 진정한 목적은 ‘토라’가 모든 지혜를 간직하고 있는 보고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방인이 유대인보다 앞서있는 부분도 없지 않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기 위해서였다. 그 중의 하나가 역할분담의 기술이었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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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범
    2019-11-18
  • 모세와 여호수아
    “모세가 그의 팔을 들면 이스라엘이 더욱 우세하고, 그가 팔을 내리면 아말렉이 더욱 우세하였다. 모세가 피곤하여 팔을 들고 있을 수 없게 되니, 아론과 훌이 돌을 가져 와서 모세를 앉게 하고, 그들이 각각 그 양쪽에 서서 그의 팔을 붙들어 올렸다. 해가 질 때까지 그가 팔을 내리지 않았다”(출 17: 11-12).독자에 따라서는 고개를 갸웃하거나 혀를 찰 수도 있는 장면이 아닐까. 나는 그랬다. 작심하고 신구약을 통독해보려 안간힘을 쓰던 대학생의 눈에는 유치하기만한 드라마였다. 그 바로 앞 장면 9-10절에서 여호수아에게 전투 지휘를 부탁한 것은 모세 자신이 아니었던가. 그래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하는 것은 여호수아와 장정들이 아닌가하고 의분도 느껴보았다. 앞서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장정들을 뽑아서 아말렉과 싸우러 나가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들고, 산꼭대기에 서있겠다.”(출 17:9-10)했다는 대목이 영 마땅하지 않았다. 싸움터에 나가는 지휘관에게 일러주는 작전지시라니. 차라리 수작이라 할 것을. “내일 이런저런 ‘쇼’를 연출하겠으니 알아서 처신하라”는 협박으로도 볼 수 있지 않는가. 그러나 “이렇게 해서, 여호수아는 아말렉과 그 백성을 칼로 무찔렀다.”(출 17:13)를 읽게 되면서 이 전투의 주인공이 여호수아라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나마 다행이라 읽었던 기억이 있다. 모세는 만나를 내리게 하고 불기둥을 세웠다. 자연법칙을 넘어서는 카리스마적 지도자였다. 그러나 눈앞에 펼쳐져있는 ‘이스라엘 땅’은 엄연한 물리적인 장소인 것을. 토라의 정신을 물리적으로 현실화하는 것은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구의 몫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지도자였다. 시각이 달라진 것은 목회를 하면서였다. 모세와 여호수아의 공동작업 공간에서 나름대로 공감의 장을 발견 했다고나 할까. 모세는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 알고 있는 지도자였다. 그래서 그 일을 할 수 있는 여호수아를 선택한 것이었다. 앞서 살핀 대로 아말렉과의 싸움에서 모세는 언덕 위에 서지만, 여호수아는 싸움터에 있었다. 토라가 계시될 때 모세는 하나님이 계시는 안개와 구름 속으로 나아갔지만, 여호수아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렇다고 현실적으로 여호수아의 위치가 그냥 단순하고 분명했던 것은 아니었다. 아론과 홀이 백성과 함께 있을 때에 여호수아는 홀로 산속에 있었다. 여호수아는 백성에 속해 있지 않고 그들보다는 훨씬 높은 곳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백성과의 거리를 모세만큼은 떼어 두려하지는 않았다. 그는 모세와 백성의 사이 그 어딘가에서 제 자리를 지키려 했다. 그는 언약 판을 들고 산꼭대기에서 내려온 모세를 본 사람이었고, 모세 말고는 유일하게 깨어지기 않은 언약 판을 볼 수 있었던 사람이었지만 말이다. <여호수아서>를 <토라>에 포함시켜야한다는 주장이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모세가 이집트로부터 이스라엘의 탈출을 이끌어낸 인물이었다면 이 일을 완성한 것은 여호수아였다고 보기 때문일까. 여호수아의 지도력은 모세와 직결되고 있다. 여호수아는 예언자들의 메시지를 따르는 지도자가 아니었다. 사무엘처럼, 혹은 다윗처럼 자신의 신념에 충실한 지도자도 아니었다. 언제나 모세가 그와 함께 하고 있었다. “한 소년이 모세에게 달려와서, 엘닷과 메닷이 진에서 예언하였다고 알렸다. 그러자 젊었을 때부터 모세를 곁에서 모셔온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나서서, 모세에게 말하였다. “어른께서는 이 일을 말리셔야 합니다.”그러나 모세는 이렇게 말한다. “네가 나를 두고 질투하느냐? 나는 오히려 주께서 주의 백성 모두에게 그의 영을 주셔서, 그들 모두가 예언자가 되었으면 좋겠다.”(민 11: 27-29) “주께서 주의 백성 모두에게 그의 영을 주셔서 그들 모두가 예언자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언질은 얼핏 농담 같이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스승 모세의 수수께끼 같았던 언질은 결국 여호수아가 완성한 국가의 기틀이 되었다는 생각을 지워버릴 수 없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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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범
    2019-10-25
  • 파스칼의 ‘오네트 옴’
    태풍의 계절이면 자주 듣게 되는 ‘헥토파스칼(hPa)’이라는 기압 단위가 블레즈 파스칼의 이름에서 유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그 파스칼이 대중들이 감당할 수 있는 비용으로 마차를 공유할 수 있는 시스템을 착안해서 파리와 런던에서 창업했었다니.... 그는 철학자요 사상가요 수학자요 신학자가 아니던가. 그 파스칼이 그의 <팡세>에서 말한다. “사람들로 부터 ‘수학자’라거나 ‘설교 꾼’이라거나 ‘웅변가’라고 불리는 것보다는 ‘그는 오넷트 옴’이다. ‘라고 불리지 않으면 안 된다.” 하고. 프랑스어 사전에 ‘오네트 옴(honnete homme’을 입력하면 “(17세기 사교계에서 교양이 있는) 신사”라는 풀이를 만난다. ‘17세기 사교계에서 교양 있는’에 쳐진 괄호는 아마도 ‘17세기 이후라고 해서 그런 뜻으로 쓰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하는 자상함일 터. <팡세>를 해설한 책에서 보다 자상한 풀이를 인용해본다. “‘오네트 옴’이란 17세기 프랑스에서 이상적인 신사로 여기던 인간상을 말한다. 교양에 더해 심미안을 갖추고 있으면서, 예의바르고도 기지가 깃들여진 대화로 사람을 즐겁게 할 수 있는 신사. 그러면서도 떠벌리거나 나서지 않고 질서를 지켜 매사에 중용을 벗어나지 않는 교양인을 말한다. 그러니까 르네상스 스타일의 초인적 영웅 상을 벗어나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을 일컫는 특별한 명사이다.”파스칼은 말했다. “모든 것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알아서, 만능이 될 수는 없는 노릇. 그런고로 모든 것에 대해서 조금씩만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어떤 일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기 보다는 모든 것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아는 편이 좋기 때문이다. 이런 쪽의 보편성이 더 아름답다. 두 쪽을 아울러 가질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그러나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면 이 쪽을 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세상은 그렇게 느끼고 그렇게 실행하고 있다. 왜냐하면 세상은 더러 좋은 판단을 내리기 때문이다. “1651년, 부친이 돌아가시자 파스칼의 누이동생이 오라비의 만류를 뿌리치고 폴 로와이얄 수도원에 들어간다. 이후 몇 해 동안 파스칼은 얼른 보기로는 신앙과는 멀어진 듯싶은 세월을 보낸다. 그럴 즈음 파리 사교계 인사들과 사귀는 가운데 한참 인기를 누리고 있는 슈발리에 드 메레와 가까워지게 되었다. 그는 훗날 신사다움(honnete)에 대한 이론가로서 알려진 사람이다. 그에 따르면 ‘오네트’란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솜씨였다. 파스칼은 친구 메레로 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그러나 1654년, 다시 신앙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한 때 멀리 하고 있었던 폴 로와이얄 수도원 쪽으로 다가서게 된다. 파스칼은 말한다. “허영심은 인간의 마음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어 병사도 요리인도 심부름꾼도 자만하며 자신을 칭찬해주는 사람을 바란다. 철학자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허영심을 비판하는 사람조차도 잘 썼다는 칭찬을 원한다. 그 글을 읽은 독자도 잘 읽은 데 대한 칭찬을 요구한다. 이것을 쓰고 있는 나도 영락없이 그런 욕망을 가지고 있고 나의 글을 읽는 이들 또한...”‘오네트 옴’조차 허영심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말일까. 파스칼의 사후, 병상에서 입고 있던 내복 깃에 짧은 문서가 꿰매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가 체험한 신앙적 회심에 대한 진술이었다고 한다. 파스칼은 고백한다. “인간은 동등하게 사랑해야한다.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교뿐이다. ‘오네트’에서는 인간이 동등하게 사랑할 수도 행복해질 수도 없다.”다른 곳을 인용해본다. “미덕을 양쪽 끝까지 추구하려 들면, 악덕이 나타난다. 그것은 아주 작은 무한 쪽으로 부터는 감지할 수 없는 길을 통해서 몰래 스며들고, 아주 큰 무한 쪽으로 부터는 떼를 지어서 나타난다. 그 결과 인간은 덕 속에서 미아가 된다. 더이상 미덕의 모습은 볼 수 없다. 인간은 완전한 악조차도 피하게 된다.”“우리가 미덕 안에서 몸을 지탱하고 있을 수 있는 것은 자신의 힘 때문이 아니라, 두 개의 상반된 악덕의 균형에 의한 것이다. 그것은 반대 방향에서 불어오고 있는 바람 사이에서 서 있을 수 있는 것과 같다. 어느 한 쪽의 악덕을 치워버린다면, 당장에 또 하나의 악덕 속에 빠져버리게 될 것이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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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범
    2019-10-17
  • 나폴레옹과 스탕달 그리고 조세핀
    스탕달의 명작 <파르마의 수도원>은 이렇게 시작한다. “1796년 5월 15일, 보나파르트 장군은 젊고 활기 있는 군대 선두에 서서 밀라노에 입성했다. 그 군대는 방금 로디교(橋)를 건너 들어오면서, 시저와 알렉산더 이래 수 세기가 지나서야 그 후계자가 등장했음을 세상에 알렸다. 수개월동안 이탈리아가 지켜본 용기와 천재성의 기적은 잠자고 있던 민중을 일깨웠다. 프랑스군이 도착하기 일주일전까지만 해도 밀라노 사람들은 프랑스군이 오스트리아 황제의 군대 앞에서 늘 도망만 다니는 강도 집단이라고 밖에 생각하지 않았다....”한편 혁명의 주체임을 자처하는 나폴레옹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오랜 세월 이탈리아에서는 공화정치가 존재하지 못했다. 자유의 성화는 꺼지고, 유럽에서 가장 좋은 이 땅은 외국의 멍에에 메어있었다. …오늘날 이탈리아는 결코 퇴화한 것이 아니라, 자유를 획득하기에 어울리는 존재임을 온 세계에 알리지 않으면 안 된다.”(6월 29일)나폴레옹은 자신이 그 혁명의 중심에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훗날이긴 하지만(1839년) 스탕달은 나폴레옹이야말로 전제지배로 부터의 해방자라 떠받든 것이다. 그러나 자유를 선전하는 나폴레옹의 손이 거머쥔 것은 프랑스 국고를 채우기 위한 배상금과 부과금이었다. 나폴레옹의 말에 따르면 이탈리아가 총재정부에게 보낸 돈은 무려 5천만 프랑이었단다. 그런데도 스탕달은 쓴다. “바로 그날(나폴레옹이 밀라노에 들어온 지 사흘째 되는 1796년 5월 18일), 6백만 프랑이라는 전쟁배상금 게시문이 게시되었다. 프랑스군의 궁색함을 메우기 위해 부과된 것으로서, 여섯 번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스무 곳을 정복한 이 군대에 신발, 바지, 웃옷, 모자 따위가 부족했던 것이다. 프랑스군은 그렇게도 가난했지만 이들과 함께 롬바르디아에 밀려들어온 행복과 환희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래서 6백만 프랑의 배상금이나 그에 뒤이은 갖가지 요구를 짐스럽게 느끼는 사람은 성직자들과 몇몇 귀족들뿐이었다.”그러나 소설가 스탕달과는 생각을 달리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적잖은 역사가들은 프랑스군에 대한 이탈리아 민중의 반발은 만만치 않았다고 증언한다. 끊이지 않는 민중반란은 배상금과 부과금 말고도 프랑스군에 의한 징발 때문이었다고 한다. 나폴레옹은 배상금이나 부과금에 더해서 이탈리아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그림과 조각과 같은 미술품도 수탈해서 파리로 보냈다. 그림만도 227점에 달했고 고대 로마시대의 대리석 조각 80점 이상을 보낸 사실이 밝혀졌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의 수탈행위에 “자유”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천재의 작품은 자유의 공동유산...이 걸작들은 너무나 오랜 세월 예속된 눈초리로 오염되어왔다. 이름 있는 이의 작품이 머물러야 할 곳은 자유로운 여러 국민의 가슴이어야 한다. 노예의 눈물은 그들의 영광에 어울리지 않는다.” 1794년 9월 20일, 벨기에에서 수탈한 루벤스의 그림을 파리로 보낸 한 군인화가가 작성한 보고서의 일부이다. “이탈리아에서는 부와 명성이 모두 미술에서 얻어진다. 그러나 자유의 왕국을 확고하고 아름답게 장식하기 위해서는 미술의 왕국 프랑스로 옮길 때가 왔다. ‘국가미술관’은 모든 예술의 가장 유명한 기념물을 수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 ‘국가미술관’이란 곧 ‘루브르궁전’이었다. 나폴레옹 자신은 미술에 대한 조예가 없어, 그 일은 전적으로 전문가들에게 맡겨졌다. 나폴레옹은 아내로 맞은 지 얼마 되지 않는 조세핀을 진중으로 맞아들인다. 1796년의 일이다. 화려한 파리를 버리고 전쟁터에 오기 싫어하는 조세핀을 간신히 설득한 것이다. 사교계에서 자란 조세핀은 나폴레옹을 정계의 거물로 만들고 싶어진다. 궁리 끝에 나폴레옹을 영웅으로 만들 그림을 계획한다. 그 결과가 유명한 앙투안 장 그로의 작품 <아르콜레 다리의 보나파르트 장군>이다. 오늘날 베르사이유에서 보게 되는 그 그림말이다. 한편 나폴레옹은 3종의 신문과 잡지를 파리와 밀라노에서 발행하게 한다. 패전은 숨기고 <아르콜레 다리의 보나파르트 장군>처럼, 날조라고는 할 수 없을지 모르나 적어도 과장된 전승을 선전하는 방법을 동원해가면서.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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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범
    2019-09-27
  • 성만찬과 한솥밥
    교회가 제단을 말할 때, 약간의 예외가 있긴 하지만, 대체로 성만찬 식탁을 생각한다. 제단은 아브라함이 세웠다던 돌단도 야곱이 광야에서 베고 잤던 돌기둥도 아니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빵과 와인을 나누는 식탁이다.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는 땅에서 생산되는 모든 열매를 마음대로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는 먹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뱀의 꼬임에 속아 열매를 따먹은 두 사람은 낙원에서 추방된다. 이것이 원죄라고 하지 않는가. 먹는다는 행위는 양면성을 띤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물에게 활력을 제공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 포식과 편식 혹은 결식은 질병과 죽음으로 엉켜진다. 먹는다는 행위가 원죄를 통해서 잘못된 유산이 되어 버린 것을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다는 행위로 해서 그 원죄에서 풀려나게 한다고 믿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이다. 식사는 죽은 이를 애도하는 일과도 연계된다. 장례식에서는 회식이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되어 있다.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공통되고 있는 관습일 것이다. 이 땅에 남아 있는 이들이 죽은 자를 앞에 두고 식사를 함으로써 “먹을 수 있는 자”와 “이제는 먹을 수 없는 자”가 분명하게 구별된다. 동시에 죽은 자와의 관계에서는 회식에 참여할 수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구별된다. 더러는 반대로 원수였던 사이가 그 식사 자리에 참여함으로써 용서라는 과정을 생산해 내기도 한다. 식탁을 더불어 한다는 것은 환대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선별 의지를 드러내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포용과 배제라는 메커니즘이 동시에 작용하게 되고, 이 작용으로 인하여 집단의 결속이 도모되는 것이다. “한솥밥을 먹는다”는 말이 그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것 같다. 장례식에서의 회식은 죽은 자에 대한 애도인 동시에 한솥밥을 먹는 일로 해서 선택받은 혹은 용서받은 자가 그 끝을 마무리 짓는 기회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예수는 최후의 만찬에서 당신의 장례식을 몸소 집례 했다고 볼 수 있다. 참석한 사람은 12제자 만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막달라 마리아와 어머니 마리아는 참석하지 못한다. “남녀 7세 부동석”의 룰은 그 당시 이스라엘에서도 그렇게 엄중한 것이었을까. 예수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할 때, “왜 그들과 식탁을 함께 하는 죄를 범하느냐‘는 바리세파의 힐난을 받았을 때, “의사를 필요로 하는 것은 건강한 사람이 아니라 병자”이고 “내가 온 것은 의인을 부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을 위해서이다.”하고 받아쳤던 예수도 뛰어넘을 수 없는 철책이었을까. 아니면 최후의 만찬은 또 다른 차원이었을까. 그런 모양으로 철저하게 제한된 제자들과의 특별한 식탁을 통해서만 예수의 뜻이 확고한 것이 될 수 있었던 것일까. 아니라면 훗날 남성 중심의 교회가 독점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을까. 이어령의 에세이 <예수님의 두 손, 바위와 보자기>에서 일부를 인용해 본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걸작 <최후의 만찬>에는 식탁에 올려놓은 예수님의 두 손이 그려져 있습니다. 한 손은 주먹을 쥐고 있고, 한 손은 손바닥을 펴 보이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장난하는 ‘가위 바위 보’로 치자면 예수는 제자들을 향해 주먹과 보자기를 동시에 내민 셈입니다. 주먹은 바위와 같습니다. 손가락은 성문의 빗장처럼 굳게 안으로 잠겨 있어, 이미 외부의 아무것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주먹은 거부이며 도전이며 징벌의 의지를 나타냅니다. 우리는 거기에 응고해버린 응고를 봅니다. 그러나 유다의 배신에 대해서 예수가 아주 주먹만을 쥐었던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한 손은 부드럽게 열려 있습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키우는 5월처럼 그 손은 펼쳐져 있습니다. 텅빈 하늘이거나 경계선 없는 바다입니다. 눈물을 받아들이고 아픔을 받아들이고... 증오나 악까지도 그 손바닥 위에서는 용해되어 버립니다. 빈 뜨락과도 같은 손바닥에서 우리는 너그러운 사랑을 봅니다.” 골고다에서 예수의 죽음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한 것은 여인들이었다. 또 부활한 예수가 처음으로 만난 것은 거기 최후의 만찬에서 배제 되었던 막달라의 마리아였다. 만찬에 참석했던 유다는 부활한 예수를 만나기는커녕 자살하고 말았다.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9-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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