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칼럼
Home >  칼럼  >  이상범

실시간뉴스

실시간 이상범 기사

  • [이상범 칼럼] 지로라모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
    "도망치듯 집을 뛰쳐나온 일이 얼마나 큰 슬픔을 안겨드렸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코흘리개의 어리광이 아니라 많은 생각 끝에 이루어진 결단이었다는 것만은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 스물두 살 나던 해에 집을 나와 성 마르코 수도원에 들어간 사보나롤라 (1452-1498)가 부모에게 써 보낸 편지. 편지는 이어진다. “저가 이 길을 택한 것은 가난과 폭력, 간통, 절도, 도적질과 교만에 더해 우상숭배와 같은 추한 짓거리에 밀려나서 ”선“이라고는 들어설 틈이 없어진 이 세상을 지옥이라 보았기 때문입니다.” 지로라모는 사보나롤라가의 3남으로 태어났다. 두 형들과는 달리 어릴 적부터 남다른 재능을 보여 온 그는 성서를 줄줄이 암송하고 라틴어로 시와 산문을 썼다. 기울어지고 있는 가문을 다시 일으켜 주리라는 기대를 받으며 자란다. 대학에서는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지만 조부의 뒤를 이을 의학도 공부했다. “이 지옥에서 나를 구해주소서 하고 날마다 기도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검을 찬 기사가 되는 꿈을 꾸자 그 꿈을 “수도사가 되라”는 계시”로 해석한 것이다. 남달리 금욕적인 수도생활 언저리에서 설교할 기회를 얻게 되지만 그의 설교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청중 25명을 끌어들이는 것이 고작. 세련된 도시 피렌체가 기대하는 유머와 에스프리도 없이 오직 그들의 죄를 책하기만 하는 설교였으니. 1484년 가을 환상 가운데 교회를 개혁하라는 계시를 읽는다. 이때부터 예언자답게 열렬한 설교를 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이탈리아를 산산이 깨뜨리실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 중심에 피렌체가 있습니다. 교회 의식이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돈을 위한 것이 되어버렸고, 가난뱅이들은 바보가 되어갑니다.” 대상은 교회만이 아니었다. 개혁의 창 끝은 피렌체에 군림하는 독재자 메디치가를 향해서도 날을 세웠다. 금융업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피렌체의 정치를 사로잡아 독제체제를 펴고 있었다. 이 땅에 실현된 하나님의 나라는 개인의 자유라는 터전 위에 세워진다고 믿는 사보나롤라는 대공 로렌츠를 철저하게 공격했다. 공격을 받고만 있을 대공이 아니었다. 사람을 시켜 사보나롤라가 그 도시를 떠나야한다고 윽박지르는 것이었다. 예언자 사보나롤라는 말한다. “대공에게 말하라. 회개하라고. 하나님은 그와 일족을 처벌하실 준비를 하고 계시다고.”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로렌츠가 왜 일개 수도사 사보나롤라를 추방하지 못했을까. 그것은 사보나롤라의 청렴결백이 가져다 준 대중의 지지, 그 중에서도 그에게서 매력을 느끼는 많은 지식인들 때문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사보나롤라를 이렇게 평했다. “교양과 지성 그리고 영성, 그 어느 하나라도 그만큼 뛰어난 인재에게는 경의로 대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지식인들과의 교제를 중시하던 로렌츠인지라 그런 평가를 받고 있는 사보나롤라를 함부로 내칠 수는 없었던 것이다. 1491년 성 마르코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어도 당시의 관행을 따라 메디치가를 찾아 인사하는 일은 없었다. “나를 택한 것은 하나님이시지 대공이 아니지 않는가.”라면서. 대공이 거액의 기부금을 전달하자 몽땅 자선기관에 기부해버렸다. 교회가 부자들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사보나롤라의 설교는 피렌체의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수도원 앞에서는 시민들만이 아니라 외국인 정부요인 각국 대사들이 줄을 서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공교롭게도 당시의 교황은 사상 최악이라 평가받는 알렉산더 6세(로드리고 보르지아)였다. 타협을 마다하는 사보나롤라의 공격에 대해 교황 측에서는 회유와 보복으로 맞서보지만 소용없었다. 사보나롤라는 이미 순교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말했다. “어머니 왜 나와 같은 아들을 낳으셨습니까. 가나 오나 싸움과 불화만 낳는 이 사내를!” 마침내 교황은 “성무 정지”로 협박했고, 이에 따른 경제봉쇄를 두려워한 민중은 폭도가 되어 수도원에 몰아닥친다. 이렇게 그의 종교개혁은 실패로 막을 내린다. 광장에서 목이 매달린 사보나롤라를 향해 민중이 소리친다. “지금이야말로 기적을 행할 때가 아닌가!”하고. 시신은 불태워지고 긁어모은 재는 아르노강에 버려진다. 그러나 그의 개혁의지는 루터와 그의 동지들이 이어받았다. 그리고...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20-08-31
  • 모나리자와 가나의 혼인잔치
    루브르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보려면 파올로 베로네세의 <가나의 결혼잔치>를 거치지 않을 수 없다. <모나리자>는 너비 77cm에 높이 53cm에 불과한 데 비해, <가나의 결혼잔치>는 994cm의 너비에 높이가 677cm로 면적이 66평방미터나 되는 초대작. 루브르에 소장되어 있는 3만5천이나 되는 미술품 중에서 가장 큰 작품으로 알려지고 있다. <모나리자>를 찾는 관람객은 연간 600만 하루에 2만 명꼴. 몰려드는 인파로 <모나리자>는 몸살을 앓을 지경이다. 그러면 마주하고 있는 <가나의 결혼잔치>는? 베네치아에 있는 성 조르지오 마조레 수도원의 식당 벽을 장식하고 있던 <가나의 결혼잔치>를 프랑스로 가져 온 것은 이탈리아를 침공한 나폴레옹. 그가 실각하자 “빈 회담”이 나서서 약 5천점의 약탈미술품과 함께 반환하게 하지만, 당시의 루브르 관장 드농이 억지를 부려서 유보된다. 그 대가로 <가나의 결혼잔치>가 전시되고 있는 전시실은 드농의 이름이 붙여졌단다. 물로 포도주를 만든 예수의 기적을 주제로 하고 있는 <가나의 혼인잔치>를 살펴보자. 등장인물 130명이 넓은 연회장을 가득 메우고 있다. ㄷ자 모양의 식탁을 차지하고 있는 초대 손님들, 시중드는 무리들과 연주자들에 더해서 유별난 차림을 한 연기자들, 그리고 그 뒤편 다락에서는 요리사들과 시종들의 분주한 모습이 코린트식 돌기둥을 배경으로 그려져 있다. 한 마디로 가나의 잔치가 아니라 베네치아의 잔치이다. 16세기 중반 베네치아의 귀족들이 즐겼던 호화판 잔치 말이다. 이미 지중해를 중심으로 하는 해상지배력을 상실해가던 당시인지라, 베네치아 상인들의 모험심은 점차 사라지 고 있는 데 반해서 부유층이 누리는 사치와 열락은 더해가기만 했다. 화폭을 꾸미고 있는 산해진미는 거의가 수입품이어서 그들의 권력을 과시하기에 더없이 좋은 자료가 되어 주었으리라. 걸치고 있는 의상들과 장식들은 값진 것들뿐이다. 그림 오른 쪽 아래쯤에 앉아 있는 사나이의 의자를 보라, 마치 정밀한 조각품 같지 않는가. 미술품을 방불케 하는 돌로 다듬은 술독은 “예수가 물로 채우라”고 했던 술독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다락 선반에 즐비한 은 식기들 그리고 크리스털 잔들도 그렇다. 왕후귀족들과 성직자들 앞에 놓여 있는 냅킨과 포크들은 당시 다른 나라에서는 아직 일반화하지 않은 것들이고 보면 이 작품에서 화가가 그리려하고 있는 것, 아니 그림의 주인공들이 화가에게 그리도록 요구한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는 짐작하고도 남을 만 하지 않는가. 그림 중앙 아래쪽에는 악단이 자리한다. 위쪽 발코니에도 한 사나이가 류트를 연주하며 노래 부른다. 그 맞은편에는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흰 꽃을 아래로 던지고 있다. 식탁에 앉은 사나이들이 손을 내밀어 꽃을 잡으려 한다. 짐승들도 등장한다. 개가 있고, 고양이가 있다. 어깨에 앵무새를 올려놓은 재주꾼은 머리에 더반을 감고 있다. 많은 돈을 들여 불러왔을 터. 악단 뒤편에 보이는 어릿광대는 출연할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그런데 이 그림은 세속화가 아니다. 명색이 종교화가 아니던가. 베네치아의 성 조르지 마조레 수도원의 식당 벽을 채우기 위한, 그것도 예수의 첫 번째 기적을 주제로 한 교회미술이 아니던가. 예수와 마리아를 빠뜨릴 수는 없었을 터. 앉아 있는 위치와 의상에서 주인공 예수의 모습을 더듬을 수 있다. 가운데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으니. 예수의 의상은 희생을 상징하는 붉은 빛과 하늘나라를 상징하는 푸른색으로 그려져 있고 머리에는 후광이 비치고 있다. 이 기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마리아는 머리에 검은 베일을 쓰고 있고. “예수와 어머니 마리아가 베네치아에 오다니 그것도 호화판 잔치 자리에” 하고 푸념한다면, 화가와 그림을 주문한 수도회는 무어라 말할까. 그 정도의 기적은 일어날 수도 있지 않느냐하고 도리어 나무랄 지도 모른다. 잔칫집에 포도주가 동이 났다고 귀띔하는 어머니 마리아의 소원대로 여섯 개의 돌 항아리에 가득 채운 물이 모두 포도주가 되었다는 사실을 잊었느냐하고 핀잔을 줄 수도 있으리라. 그래서 그림 오른 편에서 허리에 오른 손을 대고 왼손으로 잔을 들고 있는 사나이가 포도주가 진짜인지를 감식하고 있지 않는가. 당시의 성 조르지오 마조레 수도원의 내막을 알게 되면 의문이 풀릴 지도 모른다. 수도사로 변신한 상류층 인사들의 지참금으로 초호화판 노인 홈을 꾸미고 있었다는 데야.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20-08-03
  • “닭이 울었다”
    J. S. 바흐의 전기로 분류될 수 있을 서적들을 읽으면서 예상하지 못했던 감흥을 경험한 적이 있다. 관리를 위해서 12부분으로 나누어진 유산목록의 마지막 부분이 종교서적 묶음으로 분류되어 있다는 것이 유난스러워서였다. 1750년 11월에 유족들에게 분배된 유산내역을 보면, 부인 막달레나가 3분의 1을 차지하고 나머지를 아홉 자녀가 나누어 가진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유족들이 악보와 서적과 그림은 서로 가지겠다고 한바탕 다툼을 벌인 후의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종교서적만은 다툼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는 사실이 흥미롭지 않는가 말이다. 오늘날 나름대로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대상이 당시 유족들에게는 전혀 인기가 없었다니. 왜 그러지 않았겠는가. 더군다나 바흐가 남긴 81권의 종교서적 대부분이 루터주의 정통파 신학자들의 저작이었다고 하지 않는가. 바흐의 <마태수난곡>과 연관해서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81권의 종교서적들 중의 하나인 <칼로프 성서>로 일컬어지고 있는 “성서주석서”이다. 루터의 번역본에 17세기 비텐베르크의 정통파 신학자 아브라함 칼로프 (Abraham Calov)가 주석을 더한 책이란다. 3권으로 된 그 책들에는 “J. S. 바흐, 1733”이라는 서명이 뚜렷하고, 연구가들이 바흐의 자필로 인정한 메모들과 아랫줄이 남아있다고 한다. 우리에게 바흐가 남긴 <칼로프 성서>를 직접 살펴 볼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래서 <마태복음> 26장 74절을 펼친다면, 다음과 같은 메모를 볼 수 있을 것이란다. “닭이 우는 소리… 하찮은 짐승의 소리… 그게 하나님과 연결된다.” 그 메모만으로도 <마태수난곡>의 상당부분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는가. <마태복음서> 26,27장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은 그리스도를 수난으로 몰아세운 이들이 테마가 되어 있지만, “베드로의 부인”으로 대표되는 인간의 약함과 어리석음이 아픔으로 그려진다. 아리아 <불쌍히 여기소서>를 들으면서 우리는 휘몰아치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도 그 소용돌이가 치유를 느끼고 해방을 맛보게 해준다. 소용돌이는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용서가 만나고 어울리는 시공간이다. 바흐가 그리는 자상한 인간의 죄는 그렇게 그려짐으로 해서 이미 치유가 시작 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이쯤해서 바흐가 남긴 <칼로프 성서>에서 <요한복음 19장>을 뒤져보기로 하자. 거기에서는 “그리스도의 수난은 성서의 성취이고 인류 대속의 완성이다.”라는 루터의 어록에 바흐가 친 밑줄을 볼 수 있을 것이란다. 그게 바로 바흐가 남긴 또 하나의 수난곡 <요한수난곡>의 중심 테마가 아니던가. 바흐는 두 복음서의 성격을 잘 파악해서 <요한수난곡>에서는 코랄을 중심으로 공동체적 성격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다소 당당한 분위기를 보여준다. 이에 비해 <마태수난곡>에서는 아리아를 많이 삽입해서 인간적이고 정서적인 면을 드러내 보인다. 그래서일까 일반적으로 <요한수난곡>보다는 <마태수난곡>을 더 많이 연주하고 감상하고 있는 것 같다. 제 47곡의 알토 아리아 <베드로의 뉘우침>은 듣고 또 들어도 새롭다. <마태복음> 26장 75절 “그러자 닭이 울었다.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다.”하신 예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바깥으로 나가서 몹시 울었다. “를 음악적으로 재생한 부분이 그렇다. 노랫말은 이렇게 되어 있다.”아 나의 하나님, 나의 눈물을 보시어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나의 눈물을 보소서. 애통하는 나의 가슴과 눈길은 주님을 향하고 있나이다. “"몹시 울었다. “라는 마태복음의 기사를 바흐는 이렇게 그린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연주를 듣노라면 바흐가 그리는 베드로의 울음은 애처롭다거나 안타까움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용서해주지 않는다면 죽어버리겠소. 하는 식의 막무가내 통사정도 아니다. 칙칙하지도 않다. 맑고 깨끗하다. “47곡” 알토의 아리아가 조용히 끝이 나면 “48곡” 코랄이 응답한다. 그 코랄의 마지막 가사는 이렇게 맺어진다. “사랑은 내 속에 있는 죄보다 더 크기 때문입니다.” 바흐에게 있어 구원이란 하나의 소원과 소망으로 저쪽에서 기다리고 있는 그 어떤 것이 아니라 기도와 더불어 현실화된 용서로 완성된다. 칼 리히터의 1980년도 녹음판을 듣는다. 바이올린 오브리가트와 더불어 단아하면서도 따뜻하게 와 닿는 자넷 베이커의 알토는 약 7분 남짓 심금을 적신다. 노랫말이 노래가 되면서 끈적이는 점액질이 말끔히 가신다. “불쌍히 여기소서.”는 비굴하게 꼬이지 않는 저림이 되어 죄와 치유가 하나 됨을 느끼게 한다.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20-06-12
  • 공룡과 꽃 그리고 인간
    자주 들르는 공원 한 구석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민들레 무리를 살피다가 얼토당토않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어록 “식물은 물구나무 서기를 하고 있는 인간이다.”를 떠올렸다. “인간에게는 영양을 섭취하는 입이 상반신에 있지만 식물은 하반신에 있는 뿌리로 부터 영양을 섭취하고, 식물의 생식기관인 꽃이 상반신에 있는 반면 인간의 것은 하반신에 있다는 진리를 일깨워주기 위한 말”이라는 해설까지 대충 기억해냈다. 서가를 뒤져 식물학에 관한 서적을 찾아내어 더듬다가 엉뚱하게도 지구상에서 공룡이 사라진 데는 꽃이 크게 한 몫을 했다는 정보를 접하게 된 것이다. 공룡이 멸절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지만 공감되는 대목을 정리해본다. 한 때 지구를 주름잡았던 공룡이 사라진 직접적인 요인은 6,500만 년 전 멕시코 유카탄반도에 떨어진 운석 때문. 그때 발생한 먼지가 지구를 덮고 햇빛을 가려서 환경이 크게 바뀌었기 때문이라는 것. 그러나 운석이 떨어지기 이전부터 공룡은 이미 쇠퇴의 길에 들어서고 있었다는 사실도 관찰되고 있다는데, 결론부터 말한다면 속씨식물이라고도 하는 피자식물(被子植物)의 진화 때문이라고 한다. 피자식물의 별명은 꽃식물이 아니던가. 한마디로 꽃이 공룡을 멸절 시켰다는 것이다. 꽃을 피우지 않는 나자식물(裸子植物-겉씨식물)은 중생대 쥐라기, 공룡들이 활보하고 있던 시대에 크게 발달했다. 쥐라기 숲에는 오늘날 우리들이 상상할 수 있는 그 많은 꽃들이 전혀 없었다는 것. 식물이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은 곤충을 불러와서 수분하기 위해서란다. 풍매화(風媒花)란 이름이 밝혀주듯이, 꽃가루를 바람에 실어 나르는 나자식물은 굳이 꽃을 아름다운 꽃잎으로 꾸밀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꽃가루를 바람에 실어 이동하는 방법으로는 꽃가루를 성공적으로 옮길 수 있는 확률이 매우 낮기 때문에 굳이 꽃잎을 만드느라 에너지를 소비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더 많은 꽃가루를 만드는 편이 유익할 터. 그래서 나자식물은 꽃가루를 대량으로 생산하게 된 것이란다. 물론 곤충도 식물에게 친절을 베풀기 위해서 꽃을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곤충은 꽃가루를 먹이로 하기 위해서 꽃을 찾는다. 다시 말해서 곤충은 식물의 꽃에게는 해충인 셈이다. 나자식물과는 달리 피자식물은 꽃가루를 잡기 위해서 수술을 길게 뻗는다. 꽃가루를 먹으러 온 곤충에게 붙은 꽃가루는 그 곤충이 다른 꽃을 찾아가게 되면 그 꽃 수술에 옮아 붙는다. 그렇게 꽃가루는 곤충에 의해서 운반되는 법.꽃에서 꽃으로 이동하는 곤충에 의존해서 꽃가루를 실어 나를 수 있다면 그 대가로 약간의 꽃가루를 곤충에게 제공한들 어떠랴! 약간의 꽃가루를 제공하고서라도 어디로 날아 갈 지 알 수 없는 바람에 맡기는 것보다는 훨씬 확률이 높을 수밖에. 오히려 곤충에게 다소의 꽃가루를 제공하는 편이 꽃가루의 생산량은 줄일 수 있을 터이니, 꽃가루 생산을 절약한 만큼의 에너지를 이용해서 곤충을 불러 모으기 위한 꽃잎을 가꾸기로 한 것이다. 더해서 달콤한 꿀을 마련하여 향내를 피우는 등 갖은 수단을 동원해서 곤충을 불러 모으게 된 것이다. 우리들의 눈에 아름답게 피어나는 꽃은 그런 과정을 통해서 탄생한 것이란다. 극적인 진화를 달성한 피자식물이 공룡을 압박했다고 본다. 지구가 운석과 충돌하기 전부터도 식물을 먹이로 하고 있던 초식공룡은 피자식물의 진화에 따라가지 못해 점차 생식기반을 잃으며 쫓겨나게 되었다는데… 그렇다고 공룡이 전혀 진화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란다. 다만 공룡의 진화는 피자식물의 진화를 따라잡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피자식물은 알칼로이드라고 하는 독성분으로 무장한 적도 있었단다. 이 물질에 대응하지 못한 공룡은 중독사했을 것이라고 한다. 백악기 말기의 공룡 화석을 보면 기관이 이상하게 비대했거나 계란 껍데기가 얇아지는 등, 중독의 결과임을 짐작케 하는 생리장애가 관찰된다는 것. 그러니까 식물이 꽃을 피우게 된 것은 우연도 당연지사도 아니었다.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한 때 그렇게 발달했던 공룡조차도 이 혁명적인 피자식물의 진화에 대응하지 못하고 멸절하고 만 것이다. 한편 피자식물의 꽃과 공생관계를 이룩한 공룡이나 피자식물의 과실과 공생관계를 구축한 포유류와 조류는 이후 크게 번성하게 된 것이다. 한편 인간은 생존과 관계없이 아름다움을 느끼고 사랑하는 동물이기에 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고 보니 민들레로 해서 식물학서적을 더듬은 것은 썩 잘 한 일이었던 것 같다.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20-05-29
  • 페스트와 르네상스
    “검역”이라 번역되고 있는 중세 베네치아어 “quarantine”은 “40일간”을 뜻하는 "Quarantena"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로마인 이야기>의 작가 시오노 나나미가 한 월간지에 연재하고 있는 칼럼에서 썼다. 당시 베네치아공화국은 유럽과 오리엔트를 연결하는 교역으로 유지발전하고 있던 터에 오리엔트에서 역병이 발생한 것. 그러나 당장 국경을 닫아버릴 수는 없는 처지였다. 뿐만 아니라 중근동으로 통하는 성지순례를 뒷받침하는 관광대국이기도 했기에, 오리엔트에서 들어오는 선박에는 많은 물자들 뿐 아니라 유럽인 순례자들도 다수 수용되고 있었다. 1423년 궁리 끝에 역사상 초유의 역병대책에 나선다. 역병 발생지에서 온 선박은 도심에 가까운 부두에는 접안할 수 없도록 하고 승객은 정해진 섬으로 인도되어 강제 하선케 했다. 그 섬의 이름은 ”나사렛“. 이름만으로도 ”격리를 위한 섬”이란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을 터. 선착장 둘레는 높은 돌담으로 둘려 싸여 있기는 하나 그런대로 제법 넓었고 푸름도 있었다지만, 40일을 버텨내어야만 도심부로 상륙할 수 있었다니. 베네치아의 역병 대처 방법은 오늘날 선진국을 자처하는 나라들을 무색케 할 지경이 아닌가. 그 동기에 대한 시오노의 풀이가 아주 그럴듯하다. “그것은 특별히 인도적이어서가 아니라 도시국가 베네치아가 사람 하나하나를 자원으로 여겼기 때문”이라 했으니. 그리고 이웃하는 파도바 대학의 지원을 받는 우수한 의료진의 활약 때문이라고도 했다. 덧붙여 오늘날 베네치아의 곤돌라들이 모두 검게 칠해지고 있는 연유에 대해서도 말해준다. 원래는 요란한 색으로 치장했던 것을 페스트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란다. 생 로코 넓은 회당의 천정과 벽면은 페스트의 두려움을 잊지 않게 하려는 틴토레토의 걸작들로 채워져 있는 것도 그렇고. 그렇게 교역으로 먹고사는 해양 도시 베네치아는 역병대책을 확립함으로써 “지중해의 여왕”이라 불리게 되었고, 이후 거의 5백년에 걸쳐 경제력을 유지하며 건축, 회화, 음악, 연극 등 다방면에 걸친 문화의 리더가 될 수 있었다. 베네치아가 이탈리아에서 유일하게 인재를 내보내기 보다는 유입한 도시였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시오노가 그렇게 쓴 것은 그녀의 저서 <그리스인 이야기>를 의식해서일지도 모른다. 아테네가 걷잡을 수없이 기울어지는 현상을 그리면서다. “그러나 더 질이 나쁜 현상은 사람의 흐름이 달라졌다는 것. 이전에는 타국에서 아테네로 사람들이 흘러 들어왔다. 그러던 것이 펠로폰네소스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로는 아테네로 부터 다른 나라로 유출되는 모양새로 바뀌게 된 것이다...그리스 비극 3대작가의 하나로 손꼽히는 유리피데스는 마케도니아왕의 초청을 받아 아테네를 버렸다. 장래를 촉망받던 젊은 비극작가로 소크라테스의 제자이기도 했던 아가톤도 마케도니아로 떠난 지 이미 오래다. 그렇다고 이 두 사람이 타국으로 가서 걸작을 쓴 것도 아니었다... 펠로폰네소스 전투의 승자이면서 ‘스파르타의 패권 시대’로 일컬어지는 시대가 되었어도, 스파르타에는 파르테논에 필적할 만한 장대한 신전을 세우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테네가 있고서야 그리스’라는 말은 과장도 과대평가도 아니었던 것이다.” 이쯤해서 이탈리아 르네상스 또 하나의 스타 보카치오에게 시선을 돌려보자. 그의 <데카메론>은 페스트가 피렌체를 덮쳤을 때의 참상을 다음과 같이 그렸다. “동방의 여러 나라에서는 코에 피가 나는 일은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징후였습니다만, 그와는 달리 이곳(피렌체)에서는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감염초기에는 사타구니와 겨드랑 아래쪽에 종기가 나서... 어떤 사람은 사과만큼 커지고 어떤 사람은 계란만큼 번졌습니다. 그래서 ‘가보초’(페스트 종기)라고들 불렀습니다. 이 무서운 종기는, 앞에서 말한 대로, 신체의 두 곳에서 시작해서 온 몸으로 번져가지만, 모양이 변하는 데 따라서 검거나 납빛 반점이 팔이나 허벅지나 신체의 다른 부위에도 나타났습니다. 곧 반점은 그 사람에게는 죽음의 징표가 되었습니다...질병의 무서움에 더해 사람들의 단말마적인 신음 소리가 귀에 들려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죽음이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복된 표적이었던 것이 이제는 공포의 대상으로 변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숨져 가는데 냄새 또한 지독했습니다. 구세주 하나님도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데카메론>에서는 “영적이거나 정신적 죽음”이 처절한 “육체의 죽음”으로, “내세 긍정”이 “현세 긍정”으로 바뀌어 진다. 그것은 새로운 가치관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들이 새로운 터전을 얻게 된 것.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20-05-15
  • 헨리 8세와 토머스 모아
    연극이나 영화로 셰익스피어의 <헨리 8세>를 접해본 사람들 중에는 실망했다는 이들이 적지 않는 것 같다. 헨리 8세를 “악한”으로 그리지 않았다는 푸념들이다. 다시 말해본다면 “헨리 8세는 악한”이어야만 한다는 선입견을 만족시켜주지 못했다는 것. 최근 AI를 이용해서 살펴본 결과 “셰익스피어의 <헨리 8세>는 존 플레처와의 공동 집필이었다는 통설이 옳다는 결론을 얻어냈다”면서, 만약 셰익스피어 혼자서 작품을 완성했었다면 그따위 <헨리 8세>를 내놓지는 않았으리라고 기염을 토하는 이들도 있는 것 같다. 헨리 8세에게 악당의 이미지를 씌워 준 것은, 1933년에 개봉된 <헨리 8세의 사생활>을 감독한 알렉산더 골다와 우람한 몸짓에 안하무인격인 연기로 아카데미 주연상을 얻어낸 찰즈 로턴 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실재했던 헨리 8세는 폭군이기는 했어도 의외로 국민들에게 친근감을 느끼게 해주는 왕이었던 것 같다. 사교적이고 화려함을 좋아하는 우람한 몸짓이 사람들의 호감을 산 것일까. 지나치게 인색했던 선왕 헨리 7세는 용모조차 빈상이었다지만, 듬직한 헨리 8세에게서는 후덕하다는 이미지가 풍겼다. 민중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라면 의기양양하게 부왕과 가장 가까웠던 중신 에드먼드 다도리와 리처드 엠프슨의 목을 날려버리는 위인이기도 했고. 스포츠를 좋아했던 헨리 왕은 마상투창 경기나 격투기를 붙여서 민중을 즐기게 했다. 지칠 줄 몰라 하는 젊은 왕 헨리는 늘 비슷한 또래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치세 전반 1509년에서 1530년 사이의 헨리는 그랬다. 만약 야심찬 추기경 우르지가 아니었다면 그래서 신성로마제국황제의 자리를 넘보지 않았더라면 악한이라는 이미지를 남기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시선을 토머스 모아에게로 돌려보자. 모아보다 10세 연상친구 에라스무스는 청년 모아를 만났을 때의 인상을 문필로 남겼다. “작은 키였지만 작게 보이지 않았다...완벽하리만큼 균형이 잡힌 체격에다가 흰 살결은 창백하지 않을 정도로 투명했다...결코 붉다고는 할 수 없을 얼굴이 은근한 색을 띤 빛을 발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마무리했다. ”언제나 눈빛이 자신의 따뜻한 성품을 드러내고 있어서 영국인들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인물이었다...장난기를 엿보이면서 때로는 웃음을 참는 듯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곤 했다... 모아에게서는 엄숙이나 위엄보다는 기쁨이 흘러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 주군 헨리와는 대조적으로 모아는 아예 겉치레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인품이었다는 것이 모아의 평가. “오른 쪽 어깨가 약간 치올라있어도 매무새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고, 먹는 것이라곤 과일, 계란, 유제품뿐으로, 드물게 약간의 쇠고기나 소금에 절인 생선과 빵을 입에 대는 아주 금욕적인 사람이었다.” 호방한 왕이 이끌어가는 시대적 분위기, 그래서 대식을 뽐내며 들떠있는 그 시대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사나이였다. 술도 즐기지 않았다. 물만 마시거나 물로 희석한 맥주나 와인으로 입술을 적시는 정도. 그것은 분위기를 망치거나 남의 미움을 사지 않으려하는 심정이 배어나는 몸짓 같이 보였다. “나에 대한 폐하의 우정을 지나치게 내세우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만약에 내 목이 프랑스의 성채 하나 값이 나간다면, 내 목은 언제까지나 내 어깨 위에 얹혀있지는 않을 것을.” 모어가 헨리 8세와 왕비 사이에 벌어진 문제에 관여하기를 거부하면서 내뱉은 말이다. 왕의 결혼은 자기의 영역이 아니고, 권력의 한계를 이탈하는 것은 자신의 양심을 속이는 일이기에...주종관계로 시작되고 끝을 맺은 두 사람의 우정은 완전히 비대칭적일 수밖에 없었다. 서로가 그렇게도 멀리 떨어져 있는 짝은 달리 상상할 수가 없을 정도로. 그럼에도 숭배라 할 순 없을지언정 상대방을 사랑하고 존경하고는 있었다. 매사에 근신하는 모아는 인간을 숭배하지는 않았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상대방이 왕이라 할지라도 인간은 어디까지나 인간일 뿐. 그러나 모아는 죽을 때까지 헨리 왕에게 충성으로 일관했다. 은혜를 모르는 왕이 최고의 지성과 총명을 갖춘 가장 훌륭한 신하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의 입으로는 말하지 않았고 풍파를 일으키지도 않았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유감스럽다는 눈치를 보이지도 않았다. 왕의 면전에서 대드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모아는 스스로의 신념으로 일관했고, 독재하는 국왕의 권력에 대해서만 통렬하기 그지없는 비판을 가했을 뿐이었다.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20-04-24
  • 피에타(pieta)
    십자가에서 내린 예수의 시신을 안고 슬퍼하는 어머니 마리아를 주제로 하는 그림이나 조각을 <피에타(Pieta)> 라고 한다. 이탈리아어 “피에타”는 “연민” 또는 “슬픔”이라 번역할 수 있지만 “신앙”이라는 뜻도 함축하고 있기에 굳이 번역하지 않고 “피에타”라 부르고 있다고 들었다. 숱하게 많은 피에타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을 들자면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 입구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일 터. 높이 175cm의 흰 대리석 <피에타>는 보는 이의 눈과 가슴을 사로잡는다. 막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의 시신을 안고 슬퍼하는 어머니 마리아. 조용한 기품은 고혹적이기도 하다. 그 아름다움에 취한 어떤 엉뚱한 녀석이 작품 위로 올라가 마리아의 손가락을 잘랐다는 이야기가 그럴듯해 지는 것을. 정말 아름답다. <황금전설>에 따르면 예수는 서른셋, 어머니 마리아는 마흔 여덟이었다는데, 작품의 여인이 너무 젊으니, 막달라 마리아일 것이라는 속설이 제법 그럴듯해보이기조차 한다. 적잖은 <피에타>의 성모들은 차라리 할머니라 불러야 어울릴 것 같으니 말이다. 또 오른 쪽 치맛자락 밑으로 내밀고 있는 발가락이 막달라 마리아의 전용 상징이라며 막달라 마리아 설을 우기는 호사가들도 있다는데... 미켈란젤로 생전에도 이미 그러한 낭설들이 떠돌고 있었을까. 작가는 제자 아스카디오 콘디비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했단다. “순결한 여인이 그렇지 않은 여인보다 더욱 젊음을 잘 유지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단 말인가? 티끌만큼도 추잡한 욕망의 때가 묻지 않은 육체를 지닌 동정녀라면 새삼 말할 필요도 없지 않겠는가.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아무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지. 아들은 인간의 몸을 지녔기에 늙은 것이지...그러니 내가 가장 신성한 동정녀 성모 마리아, 즉 하나님의 어머니를, 실제 나이보다 훨씬 젊게 표현하고, 아들 그리스도는 나이에 어울리게 표현했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지 않는가.”관심을 갖게 하는 또 하나의 <피에타>가 있다. 파리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앙게랑 칼톤의 <아비뇽의 피에타>(218*162cm, 1415-1466년). 목판에 유채로 그려진 이 그림의 작가가 다른 사람이라는 설도 있다. 다만 <아비뇽의 피에타>로 일컬어지고 있는 것은 작품이 당시는 남프랑스 프로방스 지방이었던 아비뇽에 있었기 때문이다. 감상자는 성 베드로 대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와는 예수의 시신이 너무나 다르게 표현되어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되리라. 그래서인지 많은 비평가들이 남다른 구도와 깊은 종교성을 바탕으로 하는 높은 완성도에 주목해서 보아달라고 사정하고 있을 지경이다. 굳어진 시신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려는 의욕 때문일까. 부자연스럽게 뒤틀린, 마치 마른 나뭇가지 같은 예수의 모습은 보는 이의 가슴을 저리게 한다. 이 작품에서만 볼 수 있는 각도로는 예수의 오른 팔과 두 다리가 평행선을 이루고 있다. 처절하고 강력한 인상은 유사한 다른 작품들에서는 볼 수가 없다. 또 중세적인 황금빛이 예수의 머리를 방사선으로 받치고 있다. 날카로운 금속성의 감촉이 굳을 대로 굳어진 시신의 모습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고 있는 듯도 싶다. 어머니 마리아의 표정은 사도 요한과 막달라의 마리아 보다 더 처절하다. 예수의 시신보다도 더 창백한 안색을 띠고 있으니. 모자람이 없는 “피에타”의 중심인물답다고나 할까. 전통적으로 알려지고 있는 마리아의 푸른 옷은 거의 검은 색에 가깝고 속옷의 붉은 천은 흰머리수건으로 거의 가려져 있다. 곧잘 예수의 발아래에서 울고 있는 여인으로 그려지는 막달라의 마리아. 옷깃으로 눈가를 훔치며 왼손에 든 향유 병으로 예수를 받들고 있다. 막달라 마리아의 상징인 그 향유 병 말이다. 블론드 빛 긴 머리채와 못다 타버린 불꽃인양 빛나는 사랑의 옷깃은 음영을 띄면서도 속에 입고 있는 상복과 뚜렷하게 대조를 이룬다. 그림 왼편 예수의 머리맡에서 약간 상체를 숙이고 있는 사랑하는 제자 요한. 왼손으로는 예수의 머리를 받치고 오른 손으로는 예수의 후광을 쓰다듬고 있는 품이 마치 하프를 연주하는 것 같다. 귀로 들을 수는 없지만 슬프디 슬픈 그러나 단정한 엘레지가 화면을 감싼다. 세 사람 모두 금빛 바탕에 라틴어 이름이 새겨진 후광을 받치고 있다. 왼쪽 아래쪽에 이 그림을 바친 이의 모습도 그려져 있다.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20-04-10
  • 장 쿠쟁의 (에바 프리마 판도라)
    인터넷에서 “Eva Prima Pandora” 혹은 “에바 프리마 판도라”를 입력하면 눈을 번쩍 뜨이게 할 아름다운 여체를 만날 수 있을 것이고, 파리 루브르미술관이라면 리슐리외 관 2층에서 세로 97㎝ 가로 150㎝의 원화를 직접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풍만한 여인의 육체와 다소 굳어 보이는 그래서 그리스풍의 얼굴로 받아들일 수 있을 여인의 얼굴에서 위화감을 느낄 수도 있으리라. 그러면 그림 위쪽 한 가운데 위치한 명판을 보시라. “Eva, Prima, Pandora” 우리말이라면 “원래는 판도라였던 에바”가 될 것인즉, 화면 가득히 나신으로 누워있는 이 미녀는 “에바”이기도 하고 “판도라”이기도 하다는 풀이인 것 같다. 음부만 살짝 흰 천으로 가린 채, 오른 팔로 비스듬히 상반신을 일으키고 있는 미녀 주변에는, 적잖은 소도구들(어트리뷰트)이 널려있다. 그들이 지닌 메시지는 우리의 상식선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해골위에 놓인 오른 손이 잡고 있는 나무 가지에는 작은 열매들이 달려있다. 에덴에서 에바가 따먹었다는 금단의 열매임에 틀림없을 터. 항아리 위에 놓인 왼팔에는 팔찌 인양 뱀을 두르고 있으니, 에바를 꼬드긴 뱀이 아니던가. 또 그녀의 왼손이 만지고 있는 아름다운 항아리는 “판도라의 항아리”일 것이고. 그리스신화에서는 일찍 부터 여신이 있었다. 아프로디테가 그렇고 아테나도 그렇다. 그런데 인간세계에서는 남자는 있었으나 여자는 없었다. 어느 날 전능의 신 제우스가 최초의 여성을 만들라고 신들에게 요청한다. 올림포스 산에서 대장장이 우르카누스가 흙으로 여자를 빚어내자 제우스가 생명의 입김을 불어넣는다. 이어서 비너스가 아름다움을, 디아나는 달의 비밀을, 미네르바는 실을 잣는 기술을, 아폴론은 아름다운 목소리를....이렇게 해서 인류 최초의 여성 판도라가 탄생한 것이다. “판도라(pandora)”는 “모든 신들(pantes)”로 부터 “여러 가지 선물(dora)”을 받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모든 것을 받은 자”란 뜻이란다. 얼른 보기에 완벽한 존재 같았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못했다. 마지막으로 선물을 보낸 헤르메스는 여행과 상업의 신이었기에 도둑질과 거짓말도 수호하는 신이었다. 판도라는 그런 것들도 선물로 받은 것이다. 겉모양은 아름답지만 속내는 거짓말과 도둑질로 채워진 것이다. 제우스는 판도라를 프로메테우스의 아우 에피메테우스에게 보낸다. 메테우스(metheus)는 “생각하는 자”이고 프로(pro)는 “앞“을, 에피(epi)는 ”뒤“를 가리키는 말. 앞을 내다본 프로메테우스는 아우에게 선물을 받아들이지 말라고 말리지만, 판도라의 아름다움에 혹한 에피메테우스는 판도라를 아내로 맞는다. 집에는 봉해진 항아리가 있었다. 호기심 많은 판도라, 궁금증을 참지 못한 나머지 몰래 뚜껑을 연다. 속에서 여러 가지 액화(厄禍)들이 뿜어져 나온다. 그렇게 해서 여자가 생겨나기 전에는 볼 수 없었던 불행이 세상에 넘쳐나게 된다. 급하게 뚜껑을 닫아서 항아리에 가둔 것은 희망이라고들 말하고 있지만. 에덴에서 뱀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에바가 선악과를 따먹는다. 그로써 인간은 영원한 생명을 잃고 에덴에서 쫓겨난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노동을 해야 하고...그렇게 세상에 불행을 가져온 여인은 아이를 낳기 위해 진통을 겪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최초의 여인 때문이 아니던가. 에덴에서는 에바가 올림포스에서는 판도라가, 호기심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신의 뜻을 어긴다. 그래서 인류에게 많은 어려움을 가져다준 원흉이 된다. 그러나 판도라는 판도라의 항아리를 열어서 불행을 가져다주긴 했지만, 다른 신들에게서 받은 지혜와 능력으로 인류의 문명을 이끌었다. 마찬가지로 에바는 뱀에게 속아 금단의 열매를 따먹어 에덴에서 쫓겨나지만, 인류의 문명은 에덴동산 밖에서 이루어진 것을. 인류의 문명은 두 여성으로 해서 오늘을 보게 된 것이다. 얼핏 여성을 폄하하는 신화 같지만 뒤집어 놓고 보면 여성의 생산성이 문명의 원천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될 수 있으리라. 그림으로 돌아가자. 원근법으로 그린 배경을 가로 지르는 굵은 나무. 그 오른 편은 거친 자연으로 채워지고 왼편은 문명을 상징하는 도시가 배치되어있다. 이교도의 세계와 그리스도교 문화권을 대조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지 않는가. 불가사의한 것은 그림 한 가운데 덩그러니 서있는 빨간색의 큰 항아리(물병?). 이게 뭘까? 혹 그녀가 뚜껑을 덮고 있는 불행의 항아리에 대처하는 행운의 항아리일 수도.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20-03-27
  • 영화 - 베니스에서 죽다
    느닷없이 영화 <베니스에서 죽다>를 떠올린 것은 아마도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일 것이라고 말한다면 늙은이의 망념으로 웃어넘길 것이다. 아니라면, 지난 해 베니스를 찾았을 때, 토마스 만의 중편 <베니스에서의 죽음>을 1971년에 비스콘티가 감독 제작한 동명의 영화 장면들을 떠올리며, 제멋대로 데자뷰 현상으로 처리해 보려했던 자신을 새삼 부끄럽게 여기고 있기 때문인 지도 모른다. 석양이 비치는 바다. 검은 연기를 내뿜는 기선. 중절모자에 머플러 그리고 색안경을 쓴 노인. 지친 모습의 주인공은 독일의 명작곡가 아센바흐로 설정되어 있다. 원작에서는 주인공 아센바흐가 문필가로 설정되어 있지만. 하긴 토마스만 자신도 친구였던 구스타프 말러를 모델로 삼았다고 했다지만. 호텔에 도착한 주인공의 눈에 아름다운 소년의 모습이 뛰어든다. 성장을 하고 있는 주변의 어떤 여성들보다도 아름답지 않는가. 소년의 이름은 타지오. 열 너덧은 되었을까. 꽤나 까다로울 것 같아 보이는 모친과 천진난만한 누이동생들 그리고 도우미들에게 둘러 싸여 있다. 아센바흐의 눈길은 타지오 소년에게 사로잡힌다. 저녁식탁에서도 흘끔 흘끔 시선을 주다가 자리를 뜰 즈음에야 이편을 의식하는 타지오의 눈길을 느낀다. 아센바흐는 자신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충격 때문에 크게 동요한다. 문득 친구 알프레도 생각이. 그는 말했었다. “아름다움은 노력으로 창조되는 것”이라고 우기는 자신을 비판하면서 “아름다움이란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 이라며 “창조를 넘어선 아름다움의 존재를 인정하라”고 강변하지 않았던가. 해변에서 수영복 차림의 타지오가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있다. 눈부시듯 바라보는 아센바흐. 타지오도 그의 시선을 감지한 것은 아닐까. 소년을 향한 아센바흐의 상념은 짙어지기만 하는데... “균형을 잃고 싶지 않다“며 괴로워하는 아센바흐는 결국 베니스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이튿날 아침 스쳐 지나는 아센바흐에게 타지오가 미소를 짓는데, 고통을 다스리며 마음속으로 작별을 고한다. “타지오, 이별일세. 부디 행복하기를... ” 기차에 올라 자리를 잡고 앉은 아센바흐에게 역무원이 다가온다. 실수로 짐짝을 다른 곳으로 보내버렸다는 것. 화가 치민 아센바흐. “짐이 되돌아올 때까지 베니스를 떠나지 않을 터이니 그리 알라!” 하고 내뱉는 노신사의 표정에는 차라리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엿보이는 것을. 역 구내. 한 야윈 사나이가 스러져 있다. 베니스에 어떤 불길한 일이 일어난 것일까. 호텔로 돌아온 아센바흐, 창문으로부터 타지오의 모습을 발견한다. 해변으로 가고 있었다. 반라의 모습으로 모래투성이가 되어 뛰노는 모습. 소년 타지오야 말로 창조의 원천이 아니던가. 새 작품을 쓰리라는 의욕이 솟아난다. 어느 날 아센바흐는 타지오의 뒤를 따라 베니스 거리들을 누빈다. 저만큼 거리를 두고 뒤따르면서도 말을 건네지는 않는 그를 의식한 타지오도 입을 다문다. 이따금씩 뒤돌아보며 그를 확인하는 타지오. 그 눈길이 유혹하는 것도 같다. 아센바흐는 베니스 거리가 소독액으로 범벅이 되어 있음을 눈치 챈다. 돈을 주고 입수한 정보는 베니스 전역이 역병으로 오염되어 있다는 것. 관광사업으로 먹고 사는 베니스 당국은 비밀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타지오와 그의 가족이 역병을 피해 베니스를 떠나게 해야지 다짐하는데, 아센바흐 자신은 점점 쇠약해진다. 정작 베니스에서 역병에 감염된 것은 아센바흐 자신이었던 것이다. 호텔 이발사가 말한다. “우리는 딱 느끼는 만큼 나이를 먹는다오.” 검게 그의 머리칼을 염색하고, 하얀 분을 바르고, 립스틱을 칠해준다. 타지오의 뒤를 쫓는 아센바흐. 차오르는 숨결과 흐르는 땀을 감당하지 못하고 주저앉고 만다. 우스꽝스러운 몰골, 웃을 수밖에... 아내와 딸과의 행복은 오래 지속하지 못했었다. 딸이 죽고 작곡가로서의 명성은 떨어지고, 연주장에서 청중들의 조롱을 들어야했다. 꿈에서 깨어난 아센바흐. 마지막으로 타지오의 모습을 망막에 담아두고 싶은 아센바흐. 흰 양복에 모자를 쓰고 하얗게 화장을 하고... 흐느적이며 해변에 나타난 주인공. 타지오가 이쪽을 보는 듯도 싶은 데 역광으로 그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다. 손을 내뻗는 아센바흐의 뺨에는 범벅이 된 땀이 흘러 분장한 피에로의 얼굴을 연상케 한다. 일어서다 스러진 아센바흐. 호텔 직원이 부축해간다. enoin34@naver.co
    • 칼럼
    • 이상범
    2020-03-02
  • 바울과 세네카 그리고 단테
    “바울은 아테네를 떠나서, 고린도로 갔다.” 바울이 아테네를 떠난 것은 아레오바고 언덕에서의 그의 설교가 아테네 사람들의 냉소거리가 되었다는 사정과 무관하지 않을 터. 훗날 고린도 교인들에게 쓴 편지에서 바울은 회상한다. “내가 여러분에게로 갔을 때에, 나는 약하였고, 두려워하였고, 무척 떨었습니다.” 철학과 변론술에 능한 아테네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지성에 호소하지 않으면 안 되리라 여겼었던 바울. 주류였던 스토아 철학이라면 자신이 없지 않았던 바울의 “훌륭한 말이나 지혜”는 실패를 맛본다. 그의 다짐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쓴 편지에서 소상하게 드러난다. "나도 여러분에게 가서 하나님의 비밀을 전할 때에, ‘훌륭한 말이나 지혜’로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밖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습니다. 나의 말과 나의 설교는 지혜에서 나온 그럴 듯한 말로 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 보여 준 증거로 한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에 바탕을 둔 것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국제도시 고린도는 선교거점이 되기에 필요한 조건들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안식일 마다 회당에서 유대인과 그리스인을 설득한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바울에게 맞서고 나선 것이다. 마침내 바울은 그의 옷에서 먼지를 떨고서, 말한다. "여러분이 멸망을 받으면, 그것은 오로지 여러분의 책임이지, 나의 잘못은 아닙니다. 이제 나는 이방 사람에게로 가겠습니다." 고린도에서의 역풍도 아테네 못지않았다. 어느 날 밤 환상 가운데 주께서 바울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잠자코 있지 말고, 끊임없이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을 터이니,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서 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나의 백성이 많다.’” 이런 일이 있었다. “갈리오가 아가야 지방의 총독으로 있을 때에, 유대 사람이 한패가 되어 바울에게 달려들어, 그를 재판정으로 끌고 가서 ‘이 사람은 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공경하라고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습니다.’며 처벌을 요구했다. 그러나 총독은 그들을 재판정에서 몰아냈다. 그들은 회당장 소스데네를 붙들어다가 재판정 앞에서 때렸다. 그러나 갈리오는 이 일에 조금도 참견하지 않았다. 당시 고린도를 포함하는 아가야 지방의 총독 갈리오는 세네카의 형이었다고 한다. 본디 이름은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노바투스, 그도 스토아 철학에는 일가견이 있는 인물로, 재판관과 피고의 관계였지만, 바울과 갈리오 사이에서는 적어도 그럴듯한 논쟁이 오갈 수 있었다고 짐작해도 좋을 것이다. 바울 시대 로마 황제들의 이름들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칼리굴라, 글라우디우스, 네로. 그들이 다스리는 로마의 여러 도시들은 악으로 넘쳐났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지고 있는 세네카의 작품 <노여움에 대해서>에서는 그 퇴폐상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광장은 사람들로 붐비고... 민중은 경기장에 몰린다. 들여다 보노라면 사람들의 숫자 만큼의 악덕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평상복을 입은 자들에게도 평화는 없다. 작은 돈을 벌기 위해서 다른 이를 파멸하는 일에 동참한다. 아무도 남이 손해 보지 않는 일에는 내기를 걸지 않는다. 행복한 사람을 미워하고 불행한 사람은 무시한다...모순된 욕망에 흔들리는가하면 작은 쾌락이나 이익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잃기를 원한다.” 이 글은 형 갈리오에게 보낸 편지 글이기도 했다. 우리는 세네카가 형 갈리오에게 쓴 또 한 통의 편지를 읽을 수 있다. 그의 명작 <행복한 인생에 대해서>에서다. “갈리오 형님, 누구인들 행복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인생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내기란 누구에게나 오리무중입니다. 행복한 인생에 도달하기란 쉬운 노릇이 아닙니다. 누구나 한발만 잘못 디디면, 행복한 인생을 찾아 서두를수록, 거꾸로 멀어지기만 합니다.” 형이 아우에게 무어라 회답을 썼는지는 알 수 없다. 형과 아우 모두 자살로 일생을 마감했다. 단테의 <신곡>에서, 베리길리우스의 인도를 따라 지옥에 들어간 단테는 첫 번째 골짜기에서 세네카를 만난다. ‘림보’로 알려지고 있는 그곳은 선량하지만 세례를 받지 못한 영혼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형벌은 가해지지 않으나 하나님을 뵐 수는 없다고 했다.단테는 56세를 살았다. 만약 30년을 더 살아서 <신곡>속편을 썼다면, 천국 어디에서 바울과 세네카 그리고 단테 자신이 함께 하는 장면을 그렸을지도...?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20-01-31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