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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삭과 리브가
    천성적으로 우유부단하기만 했던 이삭은 자신은 물론 가족의 운명까지도 흐름에 맡기고 살았다. 짓궂은 랍비들 중에는 “어린 이삭을 묶어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아비가 칼로 찌르려한 끔찍한 경험을 했으니, 어찌 소극적인 성격이 형성되지 않을 수 있었을까” 하는 이들도 있다. 스스로 결단하거나 닥치는 일과 맞서려하지 않았던 이삭과는 다르게, 리브가는 결단할 줄 아는 성품이었다. 그것도 과감하게 이삭과 리브가가 부부로 맺어지는 과정에서도 두 사람의 성품은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으니. 소녀 리브가는 먼 나라에서 온 나그네(아브라함의 종)를 만나자 주저하지 않고 손님으로 맞는다. 길러온 물을 드리더니, 열 마리나 되는 낙타를 위해서도 물을 길어오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스스럼없이 자신과 가족에 대해서 소개한다. 리브가는 나그네가 누구인지 자신의 미래에 어떤 의미를 가져다 줄 것인지 전혀 알 지 못했지만, 자신이 할 일을 할 수 있는 당찬 소녀였다. 혼담이 무르익어 나그네를 따라 친정을 하직할 때도 그랬다. 리브가의 오라버니와 어머니는 “저 애를 다만 며칠이라도 우리와 함께 더 있다가 떠나게 해주십시오.”하고 아쉬워한다. 그래서 리브가에게 “이 어른과 같이 가겠느냐?”하고 물어보지만, “예. 가겠습니다.”하고 잘라 말한다. 당돌하달 수밖에 없는 그녀의 결단에 그 누가 맞설 수 있었을까.리브가와 이삭이 처음 만나게 되는 장면만 해도 그랬다. 먼 여행 끝에 들판 에서 한 사나이를 보게 되자, 아브라함의 종에게 물었다. “저 들판에서 우리를 맞으러 오는 저 남자가 누굽니까?” 그 종이 대답하였다. “나의 주인입니다.” 그러자 리브가는 너울을 꺼내서 얼굴을 가렸다. 지아비에 대한 복종의 표시였다. 소극적으로 천막에서 아내를 기다리고 있는 이삭과는 정반대의 몸짓이 아닌가. 이후 둘의 삶에서 결단하고 행동을 일으키는 것은 리브가의 몫이었다. 20년이나 아이를 가지지 못하다가, 리브가는 쌍둥이를 잉태한다. 둘이 태 안에서 서로 싸우자, 리브가는 “이렇게 괴로워서야, 내가 어떻게 견디겠는가?”하면서, 이 일을 알아보려고 주께로 나아갔다. 그러나 그녀는 입수한 정보는 비밀로 한 채 나름대로 도출한 결론을 따라 행동한다. 그럼에도 리브가는 남편을 지배하려들거나 그 인격을 무시하려하지는 않는다. 사랑하고 존경했다. 남편 이삭이 올 곧고 신앙이 깊을 뿐 아니라, 그의 축복은 영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믿고 있었기에. ‘해도 그만, 하지 않아도 그만’인 그렇고 그런 축복이 아니란 것을 충분이 알고 있었다. 그녀가 남편의 눈을 속이면서까지, 기어이 장자가 아닌 아우 야곱으로 하여금 “장자의 축복”을 받게 주선한 것도 나름대로는 마땅히 축복 받아야 할 자식이 받아야 한다는 확신이 서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녀에게는 남다른 설득력이 있었다. 그것이 요구되는 상황에서는 주저 없이 어떤 사람이라도 설득할 수 있는 능력 말이다. 그럼에도 교만하다거나 일을 그르치려 드는 파괴적인 자세는 아니었다. 자신이 하지 않으면 안될 일을 처리하고 난 다음에는 즉시 무대 뒤로 물러설 줄도 알았다. 닥치는 순간순간마다 눈앞의 상황만이 아니라 미래에 전개될 일까지 날카롭게 통찰할 수 있었다. 이삭과는 달리, 리브가는 스스로 결단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상황에서 성장했다. 주변에 신뢰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제멋대로 제 꿈에 취해 있는 사내들 틈에서는 혼자 사물의 진행과정을 살펴야만 했었고 필요한 손을 쓸 수밖에 없었다. 신뢰할 만한 사람들 틈에서 자란 이삭은 달랐다. 귀족적인 어머니와 위엄을 갖춘 아버지의 보호 아래, 경험이 많은 성실한 종이 지탱이 되어 주었다. 이삭은 악의나 속임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지만 그러한 사정이 그의 삶에 지장을 주지는 않았다. 리브가가 자란 결함투성이의 세계와는 아주 달랐다. 리브가는 그와 같은 서로의 사정을 충분히 터득하고 있었다. 리브가가 맏아들로 태어난 에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에서의 성격과 됨됨이는 다음 세대를 위해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 친정 오라버니 라반을 통해서 축적된 자료를 활용할 줄 알았던 것이다. 지아비 이삭보다 더 깊이 두 아들의 특성을 판별할 줄 알았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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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8-21
  • 왜 파가니니는 악마가 되었을까
    1841년 가을, 지중해 연안의 한 작은 어촌에 괴기한 소문이 번진다. 고요한 달밤, 파도 소리 너머로 흐느끼듯 신음하듯 바이올린 소리가 들린다는 것. 유럽세계를 들뜨게 했던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가 죽은 지 1년 반쯤의 일이다. 파가니니의 시체는 방부 처리해서 니스의 어떤 집에 안치했다. 아들 아키라와 변호사인 친구는 시신을 매장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고. 당국에 제출한 매장허가 청원을 교회가 심사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사정이 그리 녹록해 보이지는 않았다. 파가니니를 둘러싼 기괴한 소문들이 끝도 없이 흘러나기 때문이었다. 이제나 그제나 소위 구경꾼들의 속성은 별로 다를 것이 없는 듯, 소문은 만들어지고 덧붙여지기만 했다. 마침내 니스 위생 당국이 악취를 이유로 시신을 시외로 옮기라고 명령하기에 이른다. 시신은 이전에 생선을 보관하던 검역소 자리로 옮겨진다. 유령소동이 일어난 것은 그때였다. 한밤중에 무섭고 요사스러운 음악이 들린다거나, 관 주변에 악마가 서성이고 있다는 입방아가 수도 없이 이어지는 것이었다. 조용했던 어촌이 소란에 휩싸인다. 시신은 교외에 있는 올리브오일 공장을 거쳐 폐가의 정원 구석에 치워지더니, 그것도 용납되지 못해, 배에 실려 여러 항구를 거치다가 간신히 고향 제노바에 안장되었다가, 다시 파내어서 파르마로 이송 매장된다. 오직 바이올린 하나를 들고 온 유럽을 돌아다녔던 파가니니. 그는 죽어서도 한곳에 머물지 못했으니. 왜 교회는 파가니니의 매장을 허락하지 않았을까. 가톨릭교회 계통의 잡지 <역사와 문학>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다. “파가니니는 불신앙과 도덕적 퇴패를 대표하는 자로 악명이 높았다. 부활제에서는 그리스도교도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고, 임종 예식조차 거부했다. 니스의 주교가 매장을 거부한 것은 이 때문. 이에 불복한 유족이 제노바 추기경에게 호소했지만, 추기경은 니스 주교의 처리를 지지했다.” 가톨릭교회가 파가니니를 마치 악마의 심부름꾼처럼 여긴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당시만 해도 대개의 교회는 음악을 쾌락의 도구 정도로 여겼다. 특히 악기연주를 껄끄러워했다. 그리스, 러시아정교와 같은 동방교회에서는 인간의 음성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악기라고 우기고 있어, 오늘날에도 악기연주를 금하고 있는 교회가 적지 않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바흐와 같은 악성을 가리키며, 교회가 클래식 음악의 모태인 것처럼 여기고 있는 터나, 바흐로 대표되는 독일 바로크 음악의 기반은 가톨릭교회로 부터 분열해서 음악을 통한 선교에 적극적이었던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만 찾아볼 수 있었다. 파가니니의 눈에는 당시의 교회가 권력투쟁에 눈이 멀어 면죄부나 팔아먹는 타락한 조직 정도로 비쳤을지도 모른다. 자신은 그래도 가난한 사람들과 재해피해자들을 위해 자선 연주회를 여러 차례 열었는데도 말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교회에는 헌금하지 않았던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던 것이리라. 그러나 교회 쪽에서는 갈고리로 긁어드리듯 거만의 돈을 벌어드리고 있는 파가니니가 괘씸하고 미웠을 수도 있었으리라. 파가니니가 악마라고 불린 배경에는 그의 깡마른 체격이 풍기는 유별난 연주 스타일이나 교회와의 알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19세기라는 시대, 즉 악마가 일종의 붐을 일으키고 있었던 사회현상과도 관계가 있었다. 1830년대 파리에서는 마이어베어의 오페라 <악마 로베르>, 빅토르 위고의 <노트르담 드 파리> 등 악마가 개입하는 작품들이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고, 그때는 파가니니가 이탈리아에서 누린 인기를 업고 파리에 데뷔했을 시절과 겹친다. 소설과 연극, 그리고 오페라의 주인공들이 악마이거나 악마와 관계하는 인물로 등장했다. 쉽게 말해본다면, 유럽에서 악마란 종교적인 존재로부터 오락성을 갖추고 통속화된 존재로 그려지게 된 것이다. 들라크루아의 <파가니니의 초상>은 그렇다 치고라도 그에게 열광하는 대중의 눈에는 파가니니야말로 살아 움직이는 악마로 비쳤을 지도 모른다. 한편 일개 바이올리니스트로서 후원자도 전문적 기획인의 도움도 없이, 오로지 혼자 힘으로 연주장을 교섭하고 통상적인 입장료의 수배를 받아내면서도 전무후무한 인기를 누리기 위해서는, 악마의 표상인들 어찌 마다했을까.악마는 어느 시대에나 모양을 달리 해서 민중들 곁에 나타나는지도 모른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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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범
    2019-08-01
  • 학자의 실험을 통해서 본 “종교의 역할”
    오레곤 대학의 샤리프박사는 종교가 사회적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실험을 했다고 한다. 1달러 코인이 10개 들어있는 작은 상자를 피실험자에게 나누어 준다. 10개의 코인 중에서 자신의 몫으로 가질 것은 몇 개이고, 상대방에게 줄 것은 몇 개인지를 결정할 수 있게 설정한 것이다. 샤리프박사는 코인을 나누어주기 전에 먼저 피실험자로 하여금 간단한 문제를 풀게 했다. 무작위로 배열되어 있는 단어를 다시 배열해서 문장을 만들게 하는 실험이었는데, 작성해야 할 문장에 “하나님” 또는 “신”을 의미하는 단어가 반드시 들어 있도록 한 것이다. 피실험험자가 무의식적으로라도 하나님의 존재를 의식할 수 있도록 설정한 것이다. 소위 “프레이밍 효과”를 노린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간접적으로라도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프레이밍 되어 있다는 사실이 게임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또 최초의 피실험자 50명 중, 반수의 피 실험자에게는 미리 암시적으로 ‘하나님’ 혹은 ‘신’개념을 심어주기 위해 ‘종교그룹’이란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 결과 하나님 혹은 신 개념이 심어지지 않은 피실험자들은 평균 1.8달러를 상대방에게 넘겨주는 대신 나머지는 모두 자신이 가진다는 실험 결과를 보여주었다. 피 실험자 중 단 한 사람도 5달러 이상을 상대방에게 준 사람은 없었다는 것이다. 한편 ‘종교그룹’이라 이름을 붙여 준 그룹에서는 평균 4.22달러를 상대방에게 주었는가 하면, 5달러 이상을 준 사람도 64%나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이나 “신”을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보다 이타적이 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는 실험결과를 남겼다는 것이다. 2번째 실험에서는 이미 얻은 결과를 더 깊이 검증하기 위해서 네 가지 부분을 보충해 보았다. 첫째, 피 실험자를 대학생으로부터 밴쿠버에 거주하는 일반 시민으로 확대했고, 둘째, 중립그룹에게도 ‘문장’을 쓰게 했다. 셋째, ‘도덕그룹’을 더했다. 넷째, 피 실험자들이 사전에 종교관이 심어졌다는 사실을 느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를 검증했다. 또 중립그룹에게는 종교도 도덕관도 없는 일반적인 단어를 문장에 나열하도록 했고, 도덕 그룹에게는 시민, 배심원, 법원, 경찰, 계약과 같은 단어가 들어있는 문장을 쓰게 했다. 반면에 종교 그룹은 전과 같이 종교적인 단어를 넣어서 문장을 만들게 했다. 그 결과 종교그룹은 평균 4.56달러를 상대방에게 주는가 하면, 중립그룹은 2.56달러, 도덕그룹은 4.44달러를 상대방에게 주었다는 실험결과를 얻었다. 프레임이 없으면 거의 모든 사람은 사리적인 행동을 취하지만, 그나마 종교적인 프레임이 있는 사람들은 도덕적인 프레임을 지니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평하고 공정한 행동 쪽으로 전략적인 전환을 도모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했다. 종교를 의식하고 있으면 도덕을 의식하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는 말이 된다는 것. 종교는 도덕의 근원이 되어 주고 있다는 결론도 이끌어 낸 셈이다. 그러나, 성급하게 오늘날 우리가 처해있는 현실처럼 종교집단이 난립하고 있는 현상을 종교집단들이 아전인수 격으로 합리화하려드는 근거로 삼아서도 좋을 런지에 대해서는 “글쎄올시다!”라고 할밖에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자신이 믿고 있는 “하나님”이나 “신”이 관대하고 인자한 분이라고만 믿고 있는 사람들은 종교생활을 하면서도 ‘컨닝’처럼 양심에 거리끼는 행동을 거침없이 한다는 연구결과도 나왔다고 하니 어쩌겠는가.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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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범
    2019-07-19
  • 위대한 왕 길가메시
    루드밀라 제만의 <위대한 왕 길가메시>를 읽다. 그림책 <위대한 왕 길가메시>를 읽었다. 수메르 문명이 일구어낸 ‘길가메시’를 소재로 하고 있지만, 현대인에게 진한 감동을 주는 그림책이었다. “길가메시는 우람한 몸집에다 힘이 셀뿐만 아니라, 못 가진 것이라고는 없는 왕. 그러나 행복하지는 못하다. 친구가 없기에. 외톨박이 길가메시는 날로 까다롭고 잔인해지고 있었다.”힘은 세지만 친구가 없는 왕 길가메시는 사람을 혹사해서 훌륭한 성을 만드는 일에 매달린다. 성벽이 높아져도 ‘더 높이, 더 높이’ 하는 욕심은 더해갔다. 신들이 엔키드라는 사람을 만들어 숲속에서 살게 했다. 엔키드는 숲에서 한 사냥꾼을 내쫓아버린다. 숲에서 함께 살고 있는 짐승들을 지켜 주고 싶었으리라. 한편 쫓겨난 사냥꾼은 길가메시 왕에게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사람을 발견했다고 일러바친다. 그런 녀석을 그냥 둘 수는 없지 않느냐며 서두르는 길가메시에게 사냥꾼은 그렇게 힘이 센 사람을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을 것이라며 약을 올린다. 길가메시는 힘으로 대결하기 보다는 수를 쓰기로 작정한다. 아무리 강한 남자라지만 여자는 당해내지 못할 것이라며, 아름다운 여자 가수 샤마드를 시켜 엔키드를 유인해오라 한다. 샤마드의 노래를 들은 엔키드가 그녀를 찾아오는데... “엔키드를 본 샤마드는 부르던 노래를 멈추었다. 그의 모습은 인간이기보다는 짐승 같았다. 그러나 샤마드를 바라보는 엔키드의 눈길은 그 누구보다 자상한 것이었다. 날마다 샤마드가 엔키드에게 말과 노래를 가르쳐 주면서 엔키드가 좋아진다. 사랑이 깊어지면서 엔키드는 언제까지나 그녀와 함께 하겠노라 다짐한다. “말과 노래를 익히면서 짐승 같던 엔키드가 차츰 사람다워진 것일까. 나름대로는 샤마드가 숲으로 오게 된 사연에 대해서도 알게 되자, “그대를 위해서 또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길가메시와 싸우겠다.”하고 나선다. 둘이 우루크로 간다. “처음으로 우루크의 도성을 본 엔키드는 눈이 휘둥그레진다. 도성이 이렇게도 아름다울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숲 말고는 본 것도 아는 것도 없었던 엔키드가 샤마드를 만나 말을 익히고 생각할 줄도 알게 되어, 한 인간으로서 눈을 뜨게 된 것이다. 길가메시와 엔키드의 맞대결은 쉬 판가름이 나지 않았다. 어쩌면 엔키드가 인간이 되지 않았다면 길가메시가 훨씬 강했을 지도 모른다. 또 샤마드에게서 말을 배워 인간이 되면서, 비록 짐승의 힘은 잃었지만, 길가메시 못지않은 힘을 가지게도 된 것이리라. 힘겨루기가 쉬 결판이 나지 않는 가운데, 길가메시의 발을 떠받치고 있던 성벽의 돌이 무너지면서 성벽너머로 떨어지려 하는 순간, 엔키드가 나서 원수인 그를 붙들어 준 것이다. 지난날의 엔키드라였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한 것이다. 샤마드에게서 말과 노래를 배운 엔키드는 위험에 처한 사람을 차마 그냥 버려둘 수는 없었던 것이리라. 싸움은 다시 이어진다.“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두 영웅의 싸움을 바라보는 가운데, 다시 길가메시 는 엔키드를 맞아 싸운다. 그런데 길가메시가 엔키드 쪽으로 한발 다가서더니 두 손을 펼쳐 덥석 엔키드를 끌어안는 것이었다. 길가메시 왕도 마침내 인간다운 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이제 길가메시는 외톨이가 아니었다. 친구가 생긴 것이다.”여태 그러지 못 했던 것은 길가메시에게 남다른 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힘 때문에 친구가 없었던 것. 그런데 자기만큼 힘센 인간이 나타나서는 성벽에서 떨어지게 된 자신을 살려 준 것이다. 그래서 친구가 된다. 인간의 마음을 되찾은 것이다. 길가메시가 더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지를 엔키드와 의논하게 되면서 우루크 사람들은 행복해진다. 작가 루드밀라 제만은 체코의 영화 제작자 칼 제만의 딸, 어려서 부터 스튜디오에서 일을 도아 왔다. 1984년 남편과 두 딸들과 함께 캐나다로 와서 밴쿠버의 에밀리카 예술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그림책들을 출판하고 있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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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범
    2019-07-05
  • 커피 소동
    1511년 6월, 이슬람권 메카에서, 최초의 커피재판이 열렸다. 커피가 든 그릇을 피의자로 세워놓고 진행된 재판은 ‘커피가 사람을 취하게 하는 작용이 있는지’를 가려내기 위해서였다. 판결은 ‘유죄’였고, ‘커피 판매와 소비를 금지하는 포고령’이 내린다. 그러나 몇 달 후 카이로의 상급 당국이 이 판결을 뒤집어버렸다. 로마교황 클레멘스 8세는 가톨릭교회가 커피를 용납할 것인지에 대해서 판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커피가 아직 보편적인 음료가 되어 있지 않은 터여서, 커피에 대해서는 식물학자나 의학자, 중에서도 당시의 중심적인 의학연구기관이던 파도바대학의 의사들 말고는 거의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커피를 반대하는 것은 거의 종교적인 이유에서였다. 커피는 이슬람교도의 음료이기 때문에 악마의 음료이니 금해달라는 소송을 낸 것이다. 이슬람교도는 그리스도교도의 성스러운 음료인 와인을 마시지 못하기 때문에 악마가 그들에게 커피를 주어서 벌하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베네치아의 한 장사꾼이 수입해두었던 소량의 커피를 가지고 교황 앞에 선다. 교황이 먼저 커피의 맛을 보았다는데, 전설이 되어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처음 맛본 커피의 맛에 반해버린 교황 클레멘스8세가 말했다나 ‘악마의 음료가 이렇게 맛이 있을 까닭이 없지 않으냐, 그렇다면 커피에게 세례를 주어 크리스천의 음료가 되게 하면 될 것을..’ 교황이 판결을 내린 것은 그가 서거하기 직전인 1605년. 하마터면 유럽에서 커피가 공인된 음료가 되는 것은 훨씬 더 늦어질 뻔 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반세기 사이, 이국정서가 넘쳐 나는 새 음료는 서유럽각지에 번져 나갔다. 1650년대에는 영국에, 1660년대에는 네덜란드 암스텔담과 하그에도 등장하게 된다. 이렇게 서방에 커피가 보급되면서 커피하우스가 술집을 대신하여 고급스럽고 지적인 사교장으로 자리 잡게 된다. 영국 런던에 최초로 커피하우스가 나타난 것은 찰스1세가 왕위쟁탈전에 밀려 처형되어 내전이 종결하고 나서였다. 청교도 크롬웰이 정권을 잡았을 무렵, 청교도 시대와 더불어, 더러웠던 술집을 대신해서 품위와 절도를 갖춘 사교장으로 나타난 것이다. 1658년 크롬웰 사후, 세론이 군주제 부활로 기울어진다. 1660년 찰스 2세가 왕정복구의 길을 열면서 커피하우스는 정치적 토론과 음모의 중심공간으로 변모한다. 같은 시기, 상업중심 도시로 발전되고 있던 런던에서, 커피하우스는 상인들이 드나들기에 편안하면서도 품위 있는 공간이 된다. 당연히 커피의 등장을 반대하는 축도 나타나게 마련. 밀려난 술집 주인과 와인 상인 말고도 커피의 유독성을 믿는 의사들이 반대파로 나서는가하면, 아라비아커피에 대한 비판여론을 이용해서, 커피하우스는 시민이 시간을 낭비하고 중요한 일을 등한시 하게 한다고 논하는 비평가도 등장한다. 커피 찬성파와 반대파가 내놓는 판 프렛이나 광고지가 꽤나 거리를 어지럽게도 했다. 여성들 중에는 남편들의 커피과용이 성생활을 등한하게 한다는 호소를 내놓기도 했다. 마침내 찰스 2세가 나선다. 1675년 12월 29일, 찰스는 ‘커피하우스 금지선언’을 공포한다. 그러나 많은 시민이 금지선언을 무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정부는 ‘500파운드를 내고 왕에게 충성을 서약하면 6개월간 장사를 해도 좋다’는 공고를 내게 된다. 실은 왕도 커피를 끊을 수 없었다나. 커피소동은 해협을 건너 프랑스로 수출된다. 1671년 말세이유에서 커피하우스가 문을 열자 의사들이 건강을 빌미로 커피를 공격하고 나섰다. 알고 보니 커피의 인기를 두려워하는 와인상인들의 농간이었다는 사실이 들어난다. 독일에서도 커피는 인가를 얻는다. 요한 세바스천 바흐는 <커피 칸타타>를 써서 의학적으로 커피를 비판했던 사람들을 풍자하기도 했다. 1960년대, 우리나라에서 커피 소동이 일어난 것은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혁명정부가 미군 PT를 통해서 밀수입되는 커피를 막기 위해서 다방에서 수입커피를 팔지 못하게 하는 대신 콩으로 만든 ‘콩피’를 팔게 했지만, 실패했다. 최근 이란에서 카페가 탄압을 받고 있다는 외신보도를 접한다. 경찰이 열흘 동안 547개 업소의 문을 닫게 하고 11명을 체포했다는 데, 문을 닫은 카페의 죄목인즉 ‘비습관적인 인터넷 광고 행위’ ‘법적으로 금지된 노래 재생’ ‘방탕행위’들이라고 하니, 17세기 런던에서 있었던 일이 재탕되는 것이 아닌가 싶어진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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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범
    2019-06-21
  • 신학은 세상을 알기 위한 지식
    강연과 저술 활동으로 일본에서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작가 사토 마사루(佐藤 修)는 원래 일본 외무성의 주임분석관이었다. 1960년, 도쿄에서 태어나 교토의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대학원 신학연구과를 수료하고(1985) 외무성에 들어가, 영국주재 일본대사관, 러시아 주재 일본대사관에서 근무한 후, 본성 국제정보국 분석 제1과 주임분석관으로 대 러시아 외교의 최전선에서 활약했다. 2002년, 배임 및 위계에 의한 업무방해 혐의로 도쿄지검 특수부에 체포되어, 2005년에는 유죄로 판결나지만 집행유예로 풀려난다. 2009년에는 최고재판소에서 유죄가 확정되어, 외교관직을 물러났다. 2005년에 발표한 <국가의 덫>은 제 59회 ‘매일출판문화상 특별상’을 안겨주었고, 이듬해에는 <자괴(自塊)하는 제국>으로 제 5회 ‘신쵸(新潮) 다큐멘트상’과 제 38회 ‘오자와 소이치(大澤壯一) 넌픽션상’을 수상한다. <옥중기> <신약성서 1,2> 등의 베스트셀러 말고도 많은 저서를 출판했다. 또 월간지 <분게이 주(文藝春秋)>에서는 ‘베스트셀러로 읽는 일본의 근현대사’를 69회째 연재하고 있다. 최근 그가 추쿠바대학(筑波大學)에서 시도했던 특강 “철학훈련”을 토대로 <세계의 엘리트가 공부하는 철학과 종교의 수업>이란 책을 내었는데, 본란 독자들에게 참고가 될 듯싶어 서문의 일부를 옮겨본다. “나는 1979년에서 1985년에 걸쳐 교토(京都)의 ‘도시샤대학’ 신학부와 대학원 신학연구과에서 프로테스탄트 신학을 공부했다. 전공은 조직신학(그리스도교 이론). 신이 어떻게 인간이 되었는가를 논하는 ‘수육론(受肉論)’이 전문분야이다. ‘수육론’에 관심이 있는 신학생들은 고대나 중세의 신학자를 다루는 일이 예사롭지만, 나는 현대신학을 테마로 했다. 구체적으로는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당 정권과 프로테스탄트교회의 관계에 대해서 연구했다. 연구를 진행하는 중에 꼭 체코에 유학해서 그리스도교를 부정하는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그리스도교도가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 지에 대해서 알고 싶어졌다. 당시 일본과 체코슬로바키아 사이에는 정부차원의 교환유학협정이 있긴 했어도 신학을 전공하는 학생은 받아주지 않았다. 이것저것 조사해보니, 외무성의 전문직원이 되면, 프라하의 ‘카레르대학’에 유학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체코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불순한 동기로 해서 나는 외교관시험 준비를 해서 합격했다. 그러나 정작 외무성에서 명령받은 것은 체코어가 아니라 러시아어 연수였다. 체코어와 러시아어가 같은 계열의 슬라브어일 뿐만 아니라, 모스크바와 프라하는 비행기로 2시간이면 이동할 수 있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외교관이 되었다. 뜻밖의 일이었지만, 신학부에서 수학한 신학은 외교관이 되어서 아주 도움이 되었다.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확실하게 존재해서, 사회와 역사를 움직이는 그 무엇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스크바에 근무하는 외교관 중에서 나는 매우 이른 시기부터 민족문제가 소련의 아킬레스건이란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고, 1990년으로 들어서면서 소련 해체가 필연적이라 예측할 수 있었다. 또 1991년 12월 소련이 붕괴한 후 역사는 종언되고 단조로운 미국표준의 글로벌리제이션 시대가 될 것이라는 견해가 주류였을 때에도, 그와 같은 인식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나는 알아차렸다. 신학이란, 세상을 깊이 알기 위해서 아주 유익한 지식이긴 하지만, 일본사람들에게는 소원하다. 그렇기 때문에 평균적인 일본사람들이 이해 가능한 언어로 바꾸어서 신학적 사고에 대해서 전해줄 필요가 있다. 신학은 그 시대를 따라 주류적인 철학언어를 사용하게 마련이다. 또 신학연구에 있어서는 그리스도교 이외의 종교가 지닌 내재적 논리에 대해서 아는 일이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적인 내용을 철학과 종교의 언어로 바꾸어서 강의할 것을 시도해본 것이다. 이를테면 미국이나 유럽, 러시아, 이스라엘 등의 대학에서는 문과계, 이과계할 것 없이 철학과 종교에 대해서 공부한다. 왜냐하면 철학과 종교는 인간의 삶에서 떼어 놓을 수 없는 기본원리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정치 경제 매스미디어 등에서 활약하는 엘리트는 철학과 종교에 관한 지식과 교양이 결여되어 있다. 그걸 개선하는 것이 일본의 사회와 국가를 강화하는 데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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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범
    2019-06-07
  • “정의, 정의”
    핀하스 페리(Pinchas Hacohen Peri,1930-1989)는 현대를 산 가장 전통적인 랍비 가운데 한 사람. 대대로 예루살렘에서 살아온 랍비가문에서 태어나, 세 살이 되면서는 <성서>를, 여섯 살이 되자 <탈무드>를 공부했다. 19세에는 정통파 랍비가 된다. 20대에 미국으로 유학 랍비 헤셸을 사사했고 뱅그리온 대학 교수가 되었다. 유대의 사상과 문학을 가르치는 한편 시인 문필가로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가 쓴 에세이 <정의의 추구>를 본란에 어울리게 다듬어 본다. 랍비는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서 우선 <신명기> 16장 18-21절을 들어 히브리어가 아닌 외국어로 번역했을 때 그 뜻을 제대로 헤아리기가 어렵다며 푸념한다. “너희는 주 너희의 하나님이 각 지파에게 주시는 모든 성읍에 재판관과 지도자를 두어, 백성에게 공정한 재판을 하도록 하여라. “에서 ”너희는 너희자신을 위해서“를 빠뜨린 번역이 많다고 지적한다. “너희자신을 위해서”라는 어귀에서 “자신을 재판한 다음에야 다른 사람을 재판한다.”는 도의적 근거를 얻을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미드라시>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며 보기를 일러준다. “랍비 하니나 벤 엘라자르의 밭에 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는데, 그 가지가 이웃사람의 밭으로 뻗혀 있었다. 어느 날 한 사나이가 랍비 하니나에게 와서 ‘이웃집 나뭇가지가 나의 밭까지 뻗어있으니 치워주도록 일러 주십시오. ’하고 호소했다. 그러나 랍비 하니나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내일 다시 오라고만 일렀다. 사나이는 ‘랍비님은 언제나 당일에 판결을 내리지 않으시고 다음 날까지 기다리라고 재판하시니 원...’하고 불평했다. 그래도 랍비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사나이가 물러나자 랍비는 사람을 불러 이웃집에 뻗어있는 자신의 나뭇가지를 자르도록 조처했다. 이튿날 호소하던 사나이가 오자, 랍비 하니나는 그의 이웃집이 자기소유의 나무 가지를 자르도록 판결을 내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이웃집 사람이 랍비에게 와서 항의했다. ‘당신의 나뭇가지도 이웃집까지 뻗어있지 않느냐’며. 랍비는 냉정한 어조로 이렇게 응답했다. ‘그렇다마다요, 내 밭에 가서 내 나무를 보고나서 당신의 나무에게도 그렇게 하시오. ’“자신을 재판하지 않고 어떻게 다른 사람을 재판할 수 있을 것인가. 신명기 16장 그러니까 <토라>는 “재판관과 지도자” 중 어느 한 쪽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생각에서 양쪽을 모두 임명하도록 규정하고 있다고 했다. “아무리 훌륭한 법률이 제정되어 있더라도 그것을 실행하는 행정관이 없으면 전혀 의미가 없다. 또 법률은 적정한 재판상의 절차를 밟지 않고서는 시행해서는 안 된다”고도 했다. “또 하나의 보기를 들어보자”하고 이야기를 이어간다. 20절, “너희는 오직 정의만을 따라야 한다.”에서 원문에서는 ‘정의’가 겹쳐져서 “정의, 정의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라고 되어 있다고 힘주어 말한다. 실제로 <NEB>에서는 “정의, 정의”로 번역되어 있다고 한다. 한 랍비는 ‘정의’가 연이어 기록되어 있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풀이했다. ‘정의’를 따르는 일은 유대교의 가장 높은 이상일 뿐 아니라, ‘정의로운 방법과 절차’를 따라서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한다면 ‘정의’를 ‘정의’로 따르라는 뜻이란다. 목표가 정의롭다면 그에 이르는 방법은 아무렇더라도 상관없다고 우기지 말라는 뜻이란다. 또 정의가 되풀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정의를 구할 때에 일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도 포함하고 있다고 했다. 언제나 자신 편이 바르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상대편의 의견을 존중한 나머지 자신 편에도 정의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두 의견이 있어서 양쪽 모두가 정의로울 경우, 두 의견의 합의점을 발견하는 것은 두 의견 중 하나만이 바르다고 우기며 이를 지지하기 보다는 훨씬 어렵다. 그래서 <토라>는 정의를 반복해가며 “너희는 정의, 정의(두 쪽의 정의)를 추구하라”하고 말하고 있다는 것. “그리하면 네가 살겠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을 차지하리라” 하고 약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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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범
    2019-05-29
  • ‘성 유물’ 숭배
    유럽 각지의 교회들은 적잖은 “성 유물”을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그 수량과 가치는 곧 그 교회의 품격이기도 했다. 중세에 시작된 성 유물 숭배의 열기는 아직도 시들지 않고 있는 지도 모른다. 화염에 휩싸인 노트르담 대성당에 서 ‘가시관’을 살려 낸 신부의 이야기가 주목을 받는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노트르담 대성당에는 ‘십자가 조각’ ‘그리스도 수난의 못’과 같은 성 유물들이 보관되어 있다고 알려지고 있다. 유럽을 관광하는 이들은 이름 난 교회들에서 숱한 “성 유물”들을 보게 되지만,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대체로 금 은빛으로 둘러싸인 보물단지. 대개는 고개나 끄덕이고 지나가게 마련이다. 혹 관심을 가지고 그 중의 하나에 주목해 본다 하더라도, 유리 그릇 속의 어렴풋한 물체 말고는 아무 것도 볼 수 없기가 일쑤. 그래도 주의를 기울이노라면, 인체의 일부분을 연상케 하는 덩어리를 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화려한 그릇과는 대조적으로, 아주 초라한 내용물을 보고는 실망하기 쉽다. 저게 뭐지 하고 설명서를 보게 되면 “성 누구의 뼈 조각” 혹은 “성 아무개의 팔” 이라 적혀있다. 끔찍스러워 미간을 찌푸리지만 그것이야말로 “보물”이요, 그 “보물”이야말로 그 우람한 모습을 한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는 해설을 들으면서는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예수와 직접 관계된 유물만으로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어서였을까, 수집되는 성 유물의 범위는 성인들과 인연을 맺은 물건들에게로 넓혀진다. 호이징거의 <중세의 가을> 12장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중세의 뜨거운 신앙은, 특히 성 유물과 관계되고 있다면, 제아무리 흥미위주가 되었건,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 되었건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운부리아 산촌의 민중은 성 로무알도를 박살을 내 죽일 뻔 한다. 성인의 뼈가 탐났기 때문이었다. 서기 1000 년경의 일이었다.” 내친 김에 한 꼭지 더 인용해 본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토마스 아퀴나스와 연관된 이야기이니. “1274년, 토마스 아퀴나스가 포사 노바의 수도원에서 사망하자, 그곳 수도사들은 값나가는 성 유물을 잃어버릴까봐, 고매하신 스승의 시신을 가공 보존했다고 한다. 머리를 잘라내어 삶아서 조리를 한 것이다.” 에라, 한 꼭지만 더 보태자. “생 드니 수도사의 보고에 따르면, 1392년 샤르르 6세는 성대한 축하연을 차려놓고, 조상인 성왕 루이의 늑골을 참석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독일어 “Heiligtum”은 “성역 혹은 신성한 것”이란 뜻이었다지만 15-16세기가 되면서 그 첫 번째 뜻으로 “성 유물”을 가리키는 단어가 되어 있었다. “보석보다 귀중하고 황금보다 가치가 있다”는 해설과 더불어. 성 유물이 기적을 일으키거나 아름다운 향기를 풍겼다는 이야기는 결코 희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누구에게나 늘 초자연적인 현상을 불러 일으켜 주는 것은 아니었단다. 성 유물이란 보기에 따라서는 말 뼈다귀인지 굴러다니던 돌멩이인지 분간할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성 유물”로 보이게 하기 위해서는 그럴듯한 포장이 필요했으리라. 그릇은 성 유물을 잘 간직하기 위한 도구이지만, 동시에 교회가 소유하고 있는 성 유물의 가치를 한껏 뽐내기 위해서도 불가피한 수단이기도 했다. 담고 있는 그릇과 그 그릇을 가꾸고 있는 여러 장식들은 대중들로 하여금 유물의 뜻과 가치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매체 구실도 했다. 그렇게 성 유물은 미술 혹은 조형 예술의 발전과도 깊은 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마치 살아있는 성인보다는 유체나 성 유물이 더 중요한 것처럼 다루고 있는 듯싶은 현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해명이 돌아온다. “생전의 성자도 기적을 기대하는 대중의 입장에서는 살아있는 성 유물에 지나지 않았다. 다만 그 표층에 종교적 경건이라는 덧붙여진 껍데기가 부착되어 있는 성자의 생전의 영력이 유해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사람들이 유해에 갖추어지게 될 영험에 대한 예감을 살아있는 성자에게서 미리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시가르(Sigal, Pierre-Andre)의 말이다. 도축할 가축을 가려내는 노릇과 무엇이 다를까. 그의 <정량적 분석>에 따르면, 11세기에서 12세기의 프랑스에서 일어났다는 기적 4,756건 중, 사후의 기적이 3,594건에 이른다고 했으니.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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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범
    2019-05-10
  • ‘죄와 벌’의 마르멜라도프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과는 인연이 없지 않았다. 20년(41학기)을 S대학에서 “성서개론”과 “기독교개론”을 강의하면서 <죄와 벌>을 “독서보고”의 자료로 택했었다는 인연을 어찌 대수롭지 않다 할 것인가. 은퇴 후, 일본의 성서학자 아라이 사사구(,1930-)의 <세 복음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읽게 되면서 인연이 더해진다. 아라이는 목사의 아들이었지만, 아니 그랬기 때문에, 신앙문제를 두고 아버지와 자주 다투곤 했었다. 저자가 “도스토예프스키를 매개로 한 세례”라는 소제목을 붙인 글에서 자신이 “예수를 만나게 된 것은 마르멜라도프를 통해서였다”고 고백한 부분을 인용해본다. “...결국 내가 세례를 받게 된 것은 직접 성서를 읽은 결과는 아니었다. 오히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통해서였다...첫 번째로 내가 <죄와 벌>을 읽었을 때, 라스코리니코프 안에서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을 발견하고 전율했었다. 그러나 두 번째로 읽었을 때, 나는 소냐의 아버지 마르멜라도프 안에서 그와 내가 하나로 겹쳐질 수도 있으리라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마르멜라도프의 그 유명한 독백을 통해서, 딸을 팔아먹게 되기까지 완전히 파탄한, 모든 의미로 무자격자인 자신마저도, 그리스도는 최후의 심판에서 ”너희 돼지들아!..너희도 오라“하고 불러 주실 것이라며, 취기를 빌어 고백하는 대목을 거듭거듭 읽어가는 가운데, 혹 나처럼 염치없는 사람도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살도록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 일로 해서 나는 성서를 통독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서 회개시키러 왔다.(누가 5:31-32)”는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나는 회개를 결심 한 것이다...아버지와도 화해했다. “ <죄와 벌>에서 마르멜라도프는 결코 주역은 아니다. 라스코리니코프와 나란히 주역을 맡고 있는 소냐의 아비로 작품 들머리에 잠깐 등장했다가 곧 마차에 치어 죽어버린다. 그럼에도 그가 남긴 인상은 너무나 강렬해서 독자들을 풀어주지 않는다. 주인공 라스코리니코프가 마르멜라도프를 만나게 되는 것은 선술집에서였다. 사람만나기를 싫어했던 주인공, 술집이라고는 얼씬도 하지 않던 그가 “무언가 새로운 무엇이 그의 내부에 태어나는가 싶더니, 인간에 대한 심한 허기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아무도 자신을 상대해주지 않는 마르멜라도프도 말벗을 찾고 있는 터. 달리 어떻게 할 수 없는 두 사람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진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쓴다.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로, 한 마디도 말을 건넨 적이 없으며, 전혀 예상하지도 않았는데도, 묘하게 첫눈에 마음이 끌리게 되는 만남이 있는 법이다.”마르멜라도프에게는 전처에서 난 18세 나는 딸 소냐가 있다. 그리고 폐질환을 앓고 있는 아내 카타리나에게는 자식이 셋이나 딸려 있다. 그가 수도 페테르부르크로 와서는 다시 관리로 복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술타령은 계속되었고, 더 이상 직장에 나갈 수가 없게 되었다. 아내 카타리나에게 건네주었던 월급을 훔쳐내서는 술집에서 탕진했다. 이제 초로에 접어든 이 주정뱅이는 딸 소냐가 몸을 팔아 번 돈으로 술타령을 일삼고 있다. 마르멜라도프에게는 묘한 버릇이 있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이를 찾아내는데 거의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럴 만한 낌새가 느껴지는 작자를 만나면, 아내 카타리나가 양가 출신으로 제대로 된 사람이라는 것, 그런 그녀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자신이 다시 직장에 나가게 되었을 때, 얼마나 기뻐했었는지, 그런데도 이 못난 놈은 그 꿈을 무참히 깨어버려서 지금 그들의 생활이 얼마나 비참한지에 대해서 숨 쉴 틈도 없이 뇌까리는 것이었다. “아내의 양말까지 마셔 버렸다”느니, 자신의 딸이 “노란 감찰”을 단 창녀라는 사실 조차 자상하게 몸짓을 섞어가며 지껄이는 것이었다. 듣는 이가 경멸 섞인 흥미를 나타내기라도 하면 그의 이야기는 더 불타오르곤 했다. 그가 숨을 거두는 장면. 딸의 맨발을 가리키면서 “맨발이야 맨발”하더니, “딸 소냐! 용서해다오”하고는 소냐의 팔에 안겨 숨을 거둔다. 소냐는 그에게 있어, 모든 것을 받아주는 심판자였을까. 그렇다면 소냐를 심판자로 만들어 준 것은 너덜하기만한 마르멜라도프의 인생이었단 말인가. ‘마르멜라도프’란 과일로 만든 젤리란 뜻이란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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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범
    2019-04-26
  • 사울이 예언자가 되었는가?
    사울이 예언자 사무엘에게서 “기름부음”을 받고 “이스라엘의 선택받은 자”가 된다. 이제 사울은 전혀 새로운 자세로 세계를 바라보게 되고, 세계는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태도로 사울을 대하게 된다. 훤칠한 키에 건장한 체구의 사울은 더러 수줍음을 타기는 해도, 어느 모로나 정상적이고 건전한 젊은이였다. 그랬던 사울이, 사무엘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은 후 얼마 되지 않아서, 스스로 예언자 집단에 끼어들어 그들과 같은 환상을 보고 예언을 하게 된 것이다. 새로운 인생에 눈을 뜨게 된 것일까. 실제로는 예언자가 된 것은 아니면서도 그런 흉내를 내는 것만으로도 황홀경에 들어갈 수 있었으니. 사람들은 수군댔다. “사울도 예언자 중에 끼었는가?” 마침내 수군댐은 속담으로 번져갔다. 이제 사울은 인간 구스의 아들이 아니었다.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 그에 상응하는 모든 능력이 주어진 지도자가 된 것이다. 건전했던 감수성은 작은 자극에도 쉬 상처받는 체질로 바뀌었다. 그러는 사울을 두고 사람들은 “악령에게 사로잡혔다”고들 쑥덕거렸다사울은 블레셋과의 전투를 앞두고 다급한 나머지 자신이 친히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서, 제사장의 직분을 침범하는 불경죄를 범했다. 이는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일이었다. 아말렉과의 전투에서는 ‘모든 것을 남김없이 진멸하라’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좋은 것들을 전리품으로 취하였다. 사울은 변명한다. “전리품 가운데서 양 떼와 소 떼는 죽이지 않고 길갈로 끌어왔습니다만, 그것은 예언자께서 섬기시는 주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려고, 가장 좋은 것으로 골라온 것입니다.” 한껏 우쭐해진 사울은 사무엘이 일러주는 하나님의 뜻을 제멋대로 해석한 것이다. 사무엘은 말했다. "임금님이 스스로를 하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던 그 무렵에, 주께서 임금님께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임금님이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어른이 되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주께 순종하지 아니하고, 약탈하는 데만 마음을 쏟으면서, 주께서 보시는 앞에서 악한 일을 하셨습니까?”사울은 자신이 결단한 최악의 행위를 실행하면서도, 나름대로는 올바른 길이라 믿고 있었기에, 주저 없이 순수하게 그의 일에 몰입하곤 했다. 사생활은 단정하기만 했다. 수많은 처첩과 그들에게서 난 자녀들을 거느린 다윗과는 감히 비교할 수도 없으리만큼, 사울에게는 두 아내와 두 자녀밖에는 없었으니. 가까이에서 모시게 된 다윗의 눈에 사울은 왕국을 다스릴 만한 인재가 될 수 없는 것으로 비치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왕에 대한 존경은 버리려 하지 않았다. “기름부음 받은 자”가 지닌 존엄 때문이었다. 사울 왕이 정신을 놓은 듯이 막무가내로 다윗을 추적하고 있을 때조차 “기름부음 받은 자”에 대한 존경은 버리려 하지 않았다. 사울은 죄를 범하면서도 자신의 잘못은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올바른 일을 하고 있다는 착각으로 일관했던 것 같다. 다윗을 추적하고 있을 때만해도 그랬다. 그 노릇이 왕국을 위한 일일지언정 개인적인 원한에서는 아니라고 확신했었다. 그럼에도 사울은 여전히 다윗을 사랑하고 있었다. 다윗을 죽이려 하고 있을 때에도 그를 사랑하고 있다고 믿었다. 사울 왕국의 몰락에 대한 유대 현자들의 평가는 대체로 동정적이었던 것 같다. “사울에게는 아무런 결점도 없었다. 그의 죄는 퇴폐의 죄도 여인에 대한 욕망의 죄도 아니었고 개인적인 증오의 죄도 아니었다. 유대 왕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죄악이던 악덕을 그는 가지지 않았다. 오히려 사울의 순수함이 그의 통치를 방해했다.” “단순하고 올곧은 성격인 그는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사실로 해서 자신이 숭고한 세계와 연결되고 있다는 자기만족에 취한 나머지, 결국에는 파멸하고 만 것이다.” “사울의 정신이 소박했다는 사실, 그래서 외교와 현실을 위해서 자신의 감정을 억제할 수 없었다는 사실, 연민과 분노를 완전히 자유롭게 표현했다는 사실, 이 모두는 그가 지닌 특유한 성격의 일부였다. 결국 사울을 멸망케 한 것도, 그래서 그 일에 더 적합한 인물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울 수 있게 한 것도 모두 이러한 그의 특성이었다.”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9-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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