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19(화)

칼럼
Home >  칼럼  >  선교

실시간뉴스

실시간 선교 기사

  • 더 가지려는 자와 모든 것을 주려는 자
    교계가 무척 시끄럽다. 시끄러운 줄기를 잡아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교회의 세습 문제이다. 몇몇 큰교회들은 자식 또는 자신과 관계가 있는 친인척에게 교회를 세습하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교회는 생명의 빛을 점점 잃어 가고 있다. 젊은 세대들에게는 교회의 목사는 멋있는 가운 뒤에 숨겨진 불법과 탈법의 범죄자로 매도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손봉오 교수는 교회의 세습은 일제 시대의 신사참배보다도 더한 악행이라고 평하기도 하였다. 한번쯤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말이 아닌가 생각된다. 두 번째는 성 추문의 문제이다. 몇몇 큰교회 목사들은 자신의 배우자 외에 순수한 여성도들을 침실로 유인하여 하나님의 이름으로 성폭행을 자행했다는 기사도 읽을 수 있다. 그와 같은 사람의 성경 해석에 의하면 에덴동산에는 벌거벗었기 때문에 지금 우리도 벌거벗은 몸으로 성적 교감을 해야 한다는 논리를 들이대고 있다. 세 번째 부류는 교회재산을 자신의 쌈지돈처럼 생각한 부류이다. 최근 뉴스 앤죠이 사이트를 검색해 보면 연봉 1억을 받은 어느 큰 교회 목사님께서 교회 옆 건물을 자신의 이름으로 건축하여 매월 400만원이 넘는 임대비를 챙기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행위는 교회의 정당한 회의 없이 독단적으로 해 왔다는 것이다. 위에 언급한 세 가지 부류의 성직자들을 보면서 개신교가 지닌 현 주소를 보는 기분이 든다. 개신교의 허물이 어찌 이뿐이겠는가? 일일이 열거 하자면 한이 없을 것으로 판단된다. 결국 이러한 행동의 내면을 보게 되면 한없이 가지려는 인간의 욕망의 표출이라고 볼 수 있다. 세상적인 관점으로 보도라도 인간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다. 하물며 성경적인 관점에서 평가해 보면 참으로 비신앙적인 삶을 살고 있는자들이 아닌가 생각된다.필자는 오늘 이와는 대조되는 한 청년의 삶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국내의 한 신문에서 기재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손수레 할머니 돕다 뇌사… ‘장기기증 고 김선웅 군 LG 의인상’이다. 고 김선웅 군에 대한 이야기이다. “손수레를 끌던 할머니를 돕다 교통사고로 뇌사 상태에 빠진 뒤 7명에게 장기를 기증하고 세상을 떠난 고(故) 김선웅(19) 군이 ‘LG 의인상’을 받는다. LG복지재단은 유가족에게 5000만원을 전달한다고 16일 밝혔다.김 군은 지난 3일 새벽 3시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귀가하는 길에 무거운 손수레를 끌고 오르막길을 오르던 할머니를 보곤 주저없이 달려가 도왔다. 앞에서 수레를 끌던 김 군은 할머니와 함께 제주시 도남동 정부종합청사 앞 횡단보도를 건너던 중 과속 차량에 치여 머리를 심하게 다쳤다. 병원 치료 중이던 지난 5일 뇌사 판정을 받았다. 제주 한라대에 재학하는 김 군은 식당을 운영하는 아버지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야간 아르바이트를 해온 것으로 알려져 안타까움이 더했다. 김 군은 2남 1녀 중 막내로 오랜 기간 병상에 누워있던 어머니를 잃었을 당시 가족 모두 장기기증을 약속했다고 한다. 유가족은 이에 따라 장기기증을 결심했고, 김 군은 지난 9일 7명에게 새 생명을 선물하고 세상을 떠났다.LG복지재단 관계자는 “평소 봉사 활동을 많이 해왔고, 선행을 베풀다 불의의 사고를 당했지만 우리 사회에 큰 울림을 전하며 떠난 고 김선웅 군의 숭고한 뜻을 기억하겠다”며 “유가족에게 위로의 뜻을 전하기 위해 의인상을 수여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LG는 “국가와 사회정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의인에게 기업이 사회적 책임으로 보답한다’는 고 구본무 회장의 뜻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 앞으로도 우리 사회의 의인들을 꾸준히 찾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이 얼마나 아름다운 내용인가. 김 군은 성직자가 아니다. 자신의 학비를 대는 부모님의 부담을 덜어 드리기 위해서 알바를 하는 순수한 청년이었다. 그리고 자신 보다 더 힘없는 폐지 수집의 할머니의 수례를 밀어드리다가 안타깝게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는 마지막 죽으면서도 자신의 장기를 7명에게 나누어 주고 떠났다. 이 얼마나 숭고한 삶인가?이제 위장의 가운을 벗어야 하겠다. 그 옷 속에 감추인 더 가지려는 욕망을 버려야 할 시간이 왔다. 그들의 더 가지려는 욕망이 지속될수록 개신교 소멸의 시간은 앞당겨 질 것이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8-10-19
  • 하나님의 가혹한 심판
    사도행전 5장을 보면 매우 흥미로운 내용이 소개되고 있다. 이는 아나니와와 삽리라의 사건이다. 내용은 이렇다.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이 사건을 살펴보면 아나니아가 자신의 소유를 팔아 얼마를 감추고 마치 다 드린 것처럼 행동함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사건이다. 이 이야기를 듣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잔인성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즉 사랑의 하나님께서 어떻게 죽음과 같은 저주를 퍼 부을 수 있느냐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심지어 베드로가 그들을 저주했거나 아니면 과도한 심리적 압박을 통해서 양심의 가책을 만들어 스스가 죽음에 이르렀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 누가는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이었음을 상기 시킨다. 존 스토트는 주장하기를 우리 인간들이 일단 이것을 받아드리면 배울 수 있는 세 가지가 있다고 언급한다. 첫째로는 그 죄의 중대 함이다. 베드로는 아나니아와 삽리라의 거짓말이 근본적으는 자신에 대한 것이 아니라 성령에 대한 것, 즉 하나님에 대한 것임을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다. 온전하시고, 성결하신 하나님은 위선을 싫어 하신다. 누가는 성령을 비방하는 사람을 결코 용서 받지 못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경고(눅 12:10)와 함께 위선에 대한 심판을 행하셨음을 기록하고 있다. 거짓은 관계를 망치게 한다. 만약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공개적으로 처벌하지 않았다면 기독교 공동체 속에 있는 솔직한 교제는 파괴되고 신실한 신앙은 잡탕으로 변하게 되었을 것이다. 두 번째는 인간 양심의 중요성, 심지어 신성함이다. 요한은 성도를 ‘빛 가운데 행하는 존재’라고 언급하였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간계나 속임수 없이 투명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며, 그것의 결과는 성공적인 성도의 교제로 나타나게 된다. 세 번째는 교회의 징계가 필요함을 가르쳐 주고 있다. 하나님의 교회를 멸시하는 적에 대한 심판은 몇몇 상황에서 죽음이 징계의 수단이 되어 왔다. 교회는 이 영역에서 극단적인 가혹함과 극단적인 느슨함 사이에서 갈팡질팡 해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범죄 자체가 심각한 공적인 죄라면 당사자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되 이를 어길 경우 심판을 해야 한다. 성만찬은 회개한 죄인들에게만 개방되어 있는 식탁이 되기 때문이다. 이 글을 기술하기전 주일날 오후에 제자 한분이 제법 큰 교회의 사역을 위해 취임하는 시간이 있었다. 교인 수가 5,000여명이며 출석 성도가 3,000여명이면 꾀 힘이 있는 교회의 규모이다. 그런데 취임식의 순서 가운데 중요한 하나의 메시지가 있었다. 이것은 목사님께 치리권을 인준해 주는 순서였다. 만약 교회를 어지럽히는 무리가 있어서 교회 성장에 방해가 됨은 물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파괴주의자들에게는 치리권을 발동할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지금까지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살펴보았다. 사실 아나니아의 헌신은 오늘날 우리들의 보편적 신앙을 뛰어 넘는 헌신(자기 소유를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놓은 행위)이었을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믿음의 성도라고 할지라도 십일조와 감사 헌금 그리고 선교 헌신에 대해서 전심을 다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이러한 측면에서 살펴 볼때에 아나니아의 신앙이 현대의 날나리 신자들 보다 훨씬 나을 수 있다. 그러함에도 하나님은 그들 부부를 심판 하셨다. 지금 한국교회는 다양한 측면에서 공격을 받아오고, 하나님의 완전성과 거룩성에 도전해 오는 사탄의 무리들을 많이 보게 된다. 또한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도 거짓과 위선으로 성도들을 기망하는 일들을 보게 된다. 이제 우리는 그들에게 경고 해야 하겠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심판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이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8-10-05
  • 베토벤의 헌정(獻呈) 비즈니스
    다들 알고 있는 이야기가 때로는 새로운 뜻을 드러내며 다가오는 일이 없지 않지만, 알고 보면 베토벤도 나름대로는 비즈니스 맨이었다는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여 줄 사람이 얼마나 될까. 베토벤에게는 아무개 귀족에게 헌정되었다는 작품들이 유난히 많다. 동시대의 동업자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에게는 “헌정”딱지가 붙여진 작품은 수곡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헌정”현상이 유독 베토벤에게 두드러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게 하지 않는가. 당시 상황으로는 베토벤도 생활을 위한 수입을 귀족들에게 의존했다고 본다. 그러나 조금만 자세히 상황을 들여다보면 베토벤은 그때까지의 다른 음악가들과는 달리 처음으로 “예술가”라는 의식을 가지고 예술가로 자립하려 안간힘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위 “클래식 음악”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예술”이 된 음악, “예술”이고자 했던 음악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고, 곧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셋 중 “예술”로서의 음악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은 오직 베토벤만이었다고 단언해도 좋으리라. 하이든은 궁정악사로서의 그의 책무를 무난히 감당한 음악가. 다른 말로 표현해 본다면 하이든은 성공한 공무원이었다. 모차르트도 스스로 뛰어난 음악가라는 자부심은 지녔었어도 예술가라는 자각에는 이르지 못했던 것 같다. 너무 일찍 요절해버렸기에. 한 시대를 앞서 산 바흐 역시 솜씨가 빼어난 음악장인이긴 했다. 그러나 지나친 표현일지는 몰라도 당시의 구두장이나 빵가게 주인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감각으로 대를 이어가며 음악가라는 가업을 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다시 정리해본다면, 하이든은 에스테르하지가에게 고용되어 있었고,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 대주교의 악단에 속해 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름대로 정해진 수입을 취할 수 있었다. 이들과는 달리 역사적으로도 “궁정에 속한”적이 없는 작곡가로는 베토벤이 처음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독립된 “예술가 베토벤”으로 행세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 상황과 베토벤에게 “헌정”된 작품이 많다는 사실과를 관계 지어보면 그 내막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베토벤에게는 연주회 입장료와 출판사에서 지급되는 악보 원고료만이 수입의 전부였고, 그것도 먹고 살아가기에는 태부족한 액수였고 보면, 소위 파트론이라 일컬어지는 후원자를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향곡 4번>, <교향곡 5번>, <교향곡 6번>이 각기 다른 귀족에게 헌정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내막인즉 세곡 모두가 오즈펠트 백작에게 헌정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전적으로 경제적인 이유, 다시 말해서 다른 두 귀족이 더 많은 자금을 제공해주었기 때문에 최종에 변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비즈니스 감각이 개입되었었다는 말이다. 먼저 “헌정”부터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사례금을 받고 난 다음에 헌정되는 수도 있었다. <대공>으로 알려지고 있는 <피아노 삼중주곡 7번>은 루돌프 대공에게 헌정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뿐 곡의 내용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내막쯤은 모르는 이가 없을 터. 루돌프 대공에게는 꽤 많은 걸작이 헌정되었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피아노 소나타 26번 (고별)>과 <29번(하머크라비아)>, <32번> 그리고 <미사 솔렘니스>등. 얼마나 지불했는지는 짐작할 수밖에 없지만, 곡과 더불어 헌정한 이의 이름이 인용되는 고로, 적잖이 지불되었을 것이라 짐작하게 한다. 프로이센 대사 하츠펠트공이 오스트리아의 궁중고문관을 통해서 베토벤에게 “훈장과 50 다카의 금전 중 어느 쪽을 받겠느냐”고 물었을 때, 베토벤은 “물론 50타카”라 대답했다니. 무릇 비즈니스의 속성상 베토벤에게도 적잖은 실패가 따랐다. 덜컥 헌정하고 나서 대가를 받지 못한 경우인들 왜 없었겠는가.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에게 3곡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를 헌정했지만 사례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13년이란 세월이 흐른 1815년에, “빈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황제가 빈에 왔을 때, 동행한 황후에게 신곡을 헌정하면서 편지를 동봉한다. “언젠가 황제에게 헌정한 소나타의 사례를 받지 못했습니다”. 독촉장은 밀린 사례금을 회수해왔다. 비즈니스맨 베토벤은 꽤나 끈질겼던 것 같다. 나폴레옹에게 헌정했던 <교향곡 3번(영웅)>을 두고 실패한 비즈니스로 단정지어 버린다고 해도 달리 반박할 자료는 별로 없지만, 적어도 베토벤의 치열한 삶을 아는 모든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할 것 같아서… enoin34@naver.com
    • 칼럼
    • 선교
    2018-09-21
  • 선교리더의 창조성 개발
    모든 상황이 막혀서 답답하고 어려울 때가 있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해 나가는 사람이 창조적 상상력을 지닌 지도자 이다. 예를 들면 모세의 지도력과 같은 것이다. 그는 무더운 광야와 홍해 같은 절대 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창조적인 마음을 갖고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어려운 상황을 벗어날 수 있었다. 리더자의 창조성 개발은 기업의 경영 속에서도 중요한 전략이다. 창조적, 비전 제시적, 개척자 스타일(Creative, Vision-Casting, Entrepreneurial) 유형은 우리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형태의 리더십으로서, 암울한 시기에 답답한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 돌파구가 될 수 있는 미래의 새 비전을 제시하고, 불가능한 장애물들을 넘어뜨리는 길을 보여주는 , 모험적인 리더십 스타일이다. 이 유형의 전형적인 모델이 소니(Sony)의 고 아키오 모리타(Akio Morita)회장이다. 그는 항상 기존의 틀을 깨면서 생각하는 모험심이 아주 강했다. 일본 상품에 대한 세계적인 개념 자체를 바꾸어 버릴 결심으로 상호도 바꾸고, 미국인을 이해하고 미국 시장을 뚫을 계획으로, 아예 전 가족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사했다. 그는 일본인이면서도 비 일본식 기업가라고 알려져 있다. 오히려 미국형 창조, 모험적 스타일의 리더로서, 많은 일본의 경영인들에게 파격적인 패러다임 전환만이 세계 시장을 뚫는 길임을 몸으로 알려 준 사람이다. 소니의 사훈에도 그것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우리는 개척자이며 결코 남을 모방하지 않는다. 진보와 발전을 통해서 전 세계에 봉사할 것이며 언제나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 개인의 능력을 존중하고, 북돋아주며, 각 개인에게서 최선의 것을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한다. 이것이 소니의 원천적인 힘이다. 계획이란 소비자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묻기보다는 신제품으로 시장을 이끌고 개척하는 것이다. 시장조사보다는 제품을 개량하고, 소비자와의 의견 교환 및 교육을 통해 신제품에 대한 시장을 창조하고자 노력하자.”라고 말하면서 기업을 이끌었다. 창조적 리더자는 전략적인 방법을 현실화 해야 한다. 즉 전략가가 되어야 한다. 전략가(Strategist)는 비전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이것을 전략(strategy)이라고 한다. 전략은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주어진 재능과 시간과 인적 물적 자원이 유한하기 때문에 무엇에 먼저 어떻게 그 자원을 쓸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이다. 많은 창조적 비전의 지도자들은 전략가의 은사도 함께 가지고 있다.미국의 자동차 왕 헨리 포드(Henry Ford)가 바로 대표적인 전략가 유형의 리더십이다. 그는 타고난 비전의 사람이었다. 그는 단순히 자동차를 팔아서 돈을 벌겠다는 생각보다, 중산층들도 차를 구입해서 가족과 함께 즐길 수 있는 낮은 가격과 좋은 품질의 차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포드는 차만 판매한 게 아니라 차가 팔릴 수 있는 인프라 시스템 구축에도 발 벗고 나섰다. 그는 맥도날드의 레이 크로크보다 거의 50년 앞서, 딜러 프랜차이즈 시스템을 개발하여 전국 판매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운용했다.이런 전략가형 리더십은 비전을 구체적으로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전략을 제시하고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사람이다.창조적 리더자는 선교사역을 하는데 있어서도 목양 리더십(Shepherding)을 가져야 한다. 많은 경우 리더들은 위대한 일을 이루기는 하지만, 그러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일 중심이 되어 사람들을 다치게 하거나 희생시키는 수가 많다. 상처 입은 어린 양 한 마리의 독특한 필요를 잘 알아서 싸매어 주고 다듬어 주는 그런 따뜻한 사랑의 목양 리더십이 있다.인도의 테레사 수녀는 참으로 역사에 남을 아름다운 목양 리더십의 표본이다. 알바니아 출신의 이 가톨릭 수녀는 힌두교와 불교가 판을 치는 땅, 인도의 캘커타에서 종교를 초월해서 성녀로 추앙을 받았던 사람이다. 목양 리더십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상처 난 마음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어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하는 따뜻함을 가진 리더이다.최근에 필자를 찾아온 네팔 선교사님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네팔 정부는 이제 타종교의 선교를 극구 막겠다는 정책을 시행한다는 불행스러운 소식을 들었다. 이럴 때일수록 선교 리더자는 창조적 리더십을 개발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8-09-14
  • 날마다 111 전도
    하나님의 지상명령은 부지런히 전도하여 주님의 제자를 만드는 것이다. 제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전도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원초적인 구령운동 보다는 현대 한국교회는 프로잭트 중심으로 흘러서 생명력을 잃어버린 듯한 느낌이 든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최근 필자에게 들려진 책이 있다. 제목은 『날마다 111 전도』 라는 책이다. 이 책의 저자는 장경문 장로님이시다. 그분은 신앙적으로는 온누리교회의 장로님이시면서 인천에서 장내과 병원을 운영하시면서 날마다 내원하는 환자들을 대상으로 전도하신 분이다. 전도 간증이 포함된 내용 속의 111전도 운동이란 “하루에, 한명 이상에게, 유일하신 예수님”을 전하는 뜻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전도를 두려워하고 있다. 진리를 적대시 하는 싸늘한 눈초리, 무반응, 반인격적인 적대감 등으로 인해서 우리 마음이 움추려 들 때가 많다. 그러나 장 장로님은 전도는 성령님이 일하시는 것이요, 자신은 순종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111 전도하면 어떤 사람은 ‘어떻게 매일 전도하느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그러나 전도는 어렵지 않습니다. 이는 우리의 삶을 통해 또는 입술로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장 장로님은 111전도를 시작하기 이전에는 아침시간의 말씀 묵상 시간의 대부분을 주님이 세상 죄를 짊어지신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성실하게 감당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였다면, 111 전도운동을 시작한 이후에는 아침에 말씀 묵상을 마무리 하면서 거의 “주님, 오늘도 111 전도를 감당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다. 장 장로님의 전도는 크게 두 단계의 전략을 갖고 있다. 첫째는 전도 대상자의 마음 문이 열리게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열린 마음에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전도 방법을 통해서 전도한 사례를 책에서 소개하고 있다. 남자 고등학생이 코피가 주자 나서 병원에 왔다. 검사를 해 보니 골수 기능 감소로 인한 혈소판 감소증이 코피의 원인 이었다. 며칠이 지나 남학생의 엄마가 자신도 코피를 종종 흘린다고 하면서 우리병원을 방문하였다. 다행이 엄마는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아들이 종합병원에서 혈액질환인 ‘골수기능부전’이라는 진단을 받았기 때문에 그 엄마는 아들 문제로 많은 걱정을 하고 있었다. 특히 아들을 위해서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서 자책을 하였다. 순간 예수님을 증거하고 싶었다. “교회에 나가 십니까?”라고 질문을 했더니 현재는 안 다닌다고 대답을 하였다. 사연을 들으니 처녀 때에는 열심히 다녔는데 결혼 생활의 분주함으로 인해서 현재는 중단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음날 점심시간을 약속 잡아서 30여분 동안을 도표를 그려 가면서 복음의 중요성에 대해서 소개 한 이후에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도록 접목해 주었다. 결국 아들은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고, 엄마는 신앙을 회복하게 되었다. 위에서 소개한 전도 전략을 적용해 보면 다음과 같은 요소로 설명할 수 있다. 먼저는 자녀는 본인이 앓고 있는 희귀병으로 인해서 마음의 문을 열렸고, 어머니는 자녀의 아픔이 닫혀진 마음 문이 열리고 신앙을 다시 찾는 계기가 되었다. 장 장로님은 인천시기독의사회 회장으로 섬기면서 한국외국인선교회에서 실시하는 매 주일 오후 필리핀, 방글라데시, 인도네시아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들을 치료해 주고 있다. 그 뿐 아니라 지역사회의 소외된 주민들을 위해서 후원금을 기부하여 지역 신문에 소개되기도 하였다. 전도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 그러나 학문적으로 세 가지를 이야기 한다. 첫째는 선포적 전도법이다. 이는 크게 외쳐서 복음을 선포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면 사람이 회집한 장소나 전철등에서 큰 소리를 활용하는 방법이다. 둘째는 설득 전도이다. 이는 대화나 소그룹 모임을 통해서 생명의 진리를 설명하여 복음을 수용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예를 들면 CCC에서 활용하는 사영리 전도법 같은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존재 전도법이다. 이는 어떤 위치에서 존재함을 통해서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의 가치를 느끼게 하여 마음의 문을 열게 하는 방법이다. 결국 장 장로님의 전도 방법은 위에 언급된 진리를 통해서 상대방을 설득함과 아울러 빛의 자녀로 존재함을 통해서 복음을 증거하는 111 전도법이라고 볼 수 있다.글을 마치기 이전에 고백해야 할 일이 있다. 필자에게는 평생을 간직해야할 큰 기쁨이 있다. 바로 이렇게 주님을 위해서 살고 있는 장 장로님과 사돈관계를 맺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할렐루야!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8-08-31
  • 월드컵 교훈
    월드컵은 세계축구의 축제의 장이다. 우리나라에게 가장 감동을 선물한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은 지금 생각해도 한민족의 자긍심을 느끼게 한다. 모든 사람들이 스포츠를 좋아하고 특히 축구에 열광하는 것은 그 속에 진실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라고 보여 진다. 승리를 위해서 땀 흘리며 최선을 다하는 모습 속에서 인간 모두의 삶의 여정을 체험하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필자는 월드컵이 열리는 기간에 학생들과 함께 세계의 선교지를 여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여행 일정이 학기가 끝나는 6월 말에서부터 7월 초 까지로 잡혀 있기 때문이다. 금년에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따라서 본선에 오른 한국의 경기도 한두 경기는 국내에서 보지만 다른 하나의 경기는 외국 여행지의 시간에 따라서 놓치는 경우가 많다. 이번에는 한국과 독일의 3차전은 이스라엘을 여행하고 있을 때에 열렸다. 이미 2패를 안고 있었기에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민족의 자긍심을 위해서 세계 최강인 독일과 멋있게 붙어 주기를 내심 기대하기도 하였다. 여행일정에 의하여 팔레스타인 땅인 여리고 에서 숙박을 하게 되었다. 여리고에 도착하기 전 버스 속에서 학생들은 축구 이야기로 들 떠 있었다. TV를 시청할 수 없는 형편이기 때문에 핸드폰에 전달되는 소식에 의하여 전반전은 한국과 독일이 무승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때마침 전반전이 끝날 즈음에 호텔에 도착하여 급히 여장을 풀고 TV를 켰다. 그러나 불행 스럽게도 한국과 독일 전은 중계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팔레스타인 땅이 열악한 경제 사정으로 인하여 손님들에게 국제적인 월드컵 생중계를 할만한 사정이 못되는 것으로 여기고 마음을 접었다. 이후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서 식당에 도착한 우리 모두는 깜짝 놀았다. 왜냐 하면 카페에서는 한국과 독일 전이 중계가 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곳에 모여 있는 외국 손님들이 엄지손을 치겨 세우면서 Korea win 이라는 말로 축하를 해주었다. 결국 한국 팀이 넣은 두 골도 시청할 수 없었고, 승리에 취해서 기뻐하는 선수들의 모습도 볼 수 없었다. 축구 중계의 장소를 알려 주지 않는 호텔 종업원의 서비스 정신에 너무 억울한 생각이 들었고,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느라고 애를 먹었다. 다음날 여리고 성을 돌아서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신 산을 멀리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시험산이 아니라 유혹의 산 이라는 여행 가이드의 말을 들으면서 월드컵 축구에 너무 전력하는 나의 모습이 우습게 느껴졌다. 이번 2018년 월드컵에서 가장 감동을 주었던 팀은 크로아티아 였다. 크로아티아는 7월 16일 러시아 모스크바 루즈니키스타디움의 결승에서 프랑스의 벽에 막혀 2-4로 패해 아쉬움의 눈물을 흘렸다. 비록 원했던 우승트로피를 들어올리지는 못한 채 첫 월드컵 결승 진출에 의미를 두는 데에 만족하게 됐지만, 크로아티아는 매 경기 사력을 다하는 플레이로 찬사를 받았다. 크로아티아는 모든 축구 전문가들의 예상을 빗나가게 만들었다. 승부에 ‘절대’란 없는 법이다. 결승전에서 체력 저하에 대한 우려의 시선이 있었다. 하지만 크로아티아 선수들은 프랑스를 맞아 혼신의 힘을 다했다. 2-4로 패색이 짙은 후반 막판 온힘을 짜내 보는 이들의 감동을 자아냈다. 다리치 감독은 결승전 종료 후 인터뷰에서 “슬프지만 우리가 해낸 일에 대해서는 자랑스러워해야 한다”고 선수들을 칭찬했다.결승전에서는 선수만 주목받은 게 아니다. 크로아티아 콜린다 그라바르 키타로비치 대통령은 8강전부터 자국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현장을 찾아 응원을 펼쳐 화제를 모았다. 결승전을 앞두고 영상을 통해 “크로아티아의 자부심을 함께 나누고 싶다. 우리가 이길 것이라고 믿는다”고 선수들의 사기를 북돋우기도 했다. 프랑스와의 결승전에서도 어김없이 크로아티아의 체크무니 유니폼을 입고 응원한 키타로비치 대통령은 경기가 끝난 뒤 시상식 때는 굵은 빗방울을 다 맞으면서도 자국 선수 한명 한명과 눈을 마주치고 포옹하며 위로했다.인구 417만명의 소국 크로아티아 선수들은 준우승의 트로피를 안고 귀국하여 수도 자그래브 광장에 모인 10만명의 환영 인파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축제의 마지막을 환호하였다. 필자는 몇 년 전에 10만명이 환호하고 있는 그 현장을 방문 하고 크로아티아의 복음화를 위해서 기도한 적이 있다.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8-08-27
  • 제자들이 마련해준 해외 탐방
    이번 여름은 한세대학에서 교수로 있는 필자에게는 특별한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올해로 19회에 이르게 되는 해외선교지연구 탐방이었다. 한세대에서 선교학을 가르치기 시작한 1998년부터 거의 매년 여름 방학을 맞이하여 해외 선교지를 방문 하면서 지역연구를 실시하여 왔다. 이 프로잭트는 학기 초에 학점 부여를 위해서 과목을 만들고, 탑방 팀을 구성하고, 간단한 교육을 하고, 방학과 함께 연구지역의 현장으로 날아가는 과정이 진행 된다. 올해에는 예수님께서 초림 하셔서 인류 구원의 길을 여셨던 이스라엘을 비롯하여 사도 바울의 사역지인 터키 그리고 그리스가 연구 대상이 되었다. 학기 초에는 이 프로잭트를 실시하는데 별로 어렵지 않았다. 학생들도 제법 등록을 하였고, 참여 하겠다는 이야기도 여기저기에서 들려 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출발을 몇 주 앞두고 문제가 발생하였다. 참여하기로 했던 학생들이 하나 둘씩 개인 사정으로 인해서 포기 자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통상적으로 15명 이상이 비행기를 타야 한사람의 여행 경비가 나오도록 여행사와 계약이 되어있었는데, 그 수가 다 채워지지 않은 것이 발목을 잡았다. 결국 필자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출발을 나흘 앞두고 함께 여행을 가기로 했던 학생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 하면서 부득이 불참하게 된 것을 이해해 달라고 말했다. 순간 그곳에 모였던 학생들의 포정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였다. 급기야 “교수님께서 가지 않으면 우리도 가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여행을 포기하던지 아니면 교수를 동참 시키든지 하겠다고 언급하면서 미팅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예상치 못한 학생들의 반응에 필자는 무척 당황 할 수밖에 없었다. 19년 차를 맞이한 선교지 연구팀이 중단 위기를 맞는 순간이었다.그날 저녁 강의 시간에 함께 여행을 떠나기로 했던 학생들 중에 대표성을 지닌 제자가 필자를 찾아 왔다. 그리고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교수님 우리가 교수님을 여행에 모시기로 결의 하고 400여만원의 경비를 모금 하였습니다. 따라서 함께 해 주셔야 합니다.” 신학대학원에 입학하여 주님의 사역을 준비하는 학생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그들의 경제력은 참으로 열악한 학생들이 아닌가? 그동안 학생들에게 부여된 높은 학비와 가족의 생계, 자녀들의 교육비 등으로 고통을 받는 모습을 많이 봐왔다. 또한 대부분의 학생들은 신학을 시작하면서부터 주위와의 관계성이 단절 된다. 그들의 돈은 사회에서 통용되는 보편적인 자원이 아니다. 선생이 되어 그들의 힘든 수학과정속에 도움을 주지는 못할망정 고통을 준다고 생각되어 선 듯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나는 한동안 심장이 정지되고 머리가 텅 비어 버린 상태였다. 그들의 요구를 거절 할 수도, 수용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그들의 건의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서둘러 여행 짐을 꾸리기 시작하였고, 숨겨 두었던 여권을 찾고, 학점들을 정리하고, 마음을 여행지로 향하게 하였다. 6월25일 월요일 인천공항에 12명의 팀원들이 모두 모였다. 그리고 성지 이스라엘을 향해서 출발을 하여 터키와 그리스를 거쳐서 2주 동안의 의미 있는 여행을 마치고 귀국 하였다.여행 중에 그리스의 빌립보를 들르게 되었다. 그곳은사도 바울께서 2차 선교여행 가운데 평생 후원자가 되는 자주장사 루디아를 만나는 곳이었다. 성경은 바울께서 루디아를 만나는 장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안식일에 우리가 가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는지라.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행 16:13-15).” 이러한 만남은 사도 바울의 사역을 후방에서 돕는 놀라운 계기를 가져왔다. 하나님의 선교를 성취하는 바울의 발걸음을 가볍게 했음은 물론 루디아의 헌신도 하나님 나라에 기록되어졌을 것이다.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그동안 19회가 진행되어 지는 여름 방학의 선교지 탐방 속에서 이번 여행은 필자의 사역에 대미를 장식하는 중요한 시간이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좋은 제자들을 동력자로 주심에 대해서 깊이 감사하고 있다.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8-08-09
  • 기독교 영성의 선교적 함양
    사회의 기준은 세속적인 삶의 성공여부 이다. 오늘도 매체를 통해서 삶의 토대인 세상을 들여다보면 성공과 실패의 결과에 따라서 모든 것이 나뉘게 됨을 알 수 있다. 이는 입시와 사업 그리고 스포츠와 같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나타난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신앙의 기준이 무엇인가? 즉 한평생 살면서 이루어야 할 신앙의 목표를 어떻게 설정해야 할 것인가. 이는 영적인 삶의 완성이 우리의 지향점이 되어야 한다. 영성은 “어떤 문화 현상의 중심적인 경향이나 분위기”를 의미하며, 성경적 영성 이해란 “성경의 중심 메시지가 무엇이냐를 해명하고 그것을 삶에 적용하는 것”을 뜻한다. 영성(spirituality)은 실질적으로 성경에서 찾을 수 없는 용어로써 단지 영적(spiritual)의 개념으로서만 등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영성이라는 말보다는 ‘영적 성숙, 영적 훈련’의 개념이 훨씬 더 구체적이고 성경적이다. 참된 기독교 영성을 소유하고 그것을 훈련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차원에 대한 심도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영성에 대한 이론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기독교의 영성은 무엇보다 그리스도 중심적이어야 한다. 로버트 풀러가 출판한 Spiritual, But Not Religious (2002)에 의하면 오늘날 종교는 거부하지만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그 예로 미국의 약 20%가 이러한 그룹 안에 속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우리 안에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일치를 추구함이 없다면 그것은 죽은 영성이 될 뿐이다. 만약 영성개발이나 훈련 프로그램들이 그리스도 없이 진행된다면, 그것들은 또 하나의 “새로운 율법주의 (new legalism)”가 될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둘째, 기독교 영성은 기록된 말씀인 성경에 기초한다. 우리가 영성을 이해할 때 어떠한 초월적인 영적 체험으로만 이해한다면 그것이 현실적인 변화의 힘을 제대로 발휘할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말씀을 중심으로 거룩한 영의 운동이 일어나고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이 바로 참된 영성의 훈련 방법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영성을 논하고, 또한 그것을 추구하지만, 영성의 혼돈 속에서 진정한 영성을 추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셋째, 기독교 영성의 올바른 이해는 그것이 단지 개인적 영성 추구나 사색적, 관념 또는 의식적인 차원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끔 기독교인들도 기독교에서의 영적인 삶의 추구가 세상 속에서의 명상과 같은 것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명상은 범신론적 특성을 지니는 것으로 초월성만 강조될 뿐, 역사성은 고려하지 않고, 사회와 역사에 대한 관심이 결여되어 있다. 하지만, 기독교의 영성은 사회적 영성과 연결되며, 타인과의 관계 회복,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에 대한 문제를 최우선시 하기 때문에 ‘상호적인 영성’으로 이해될 수 있다. 즉, 전 생활의 영역과 연관되어 그것의 문제를 다루고, 신비적이거나 감상적인 것 또는 황홀경(ecstacy)의 체험이 아닌 “총체적인 삶의 모습”을 담는다. 한 발 더 나아가 참된 영성은 ‘사명의 수행’까지도 병행한다. 내면에서는 평강을 실현하고, 자기 부인(self-denial)을 추구하면서, 외부적으로는 ‘십자가를 짐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는 영적인 사람으로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추구하는 그런 영성을 드러내기 위해 훈련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기독교에서 영성을 개발하고 그것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통합적인 차원에서 자신 뿐 아니라 타인 그리고 그들의 삶 전체까지 연관되어야 할 것이다.이제 영성이 지닌 특성을 알았다면 영성을 지닌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추론해 보아야 하겠다. 그것은 예수를 닮는 것이다. 예수님이 세상에 강림하신 초림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성취시키는 작업이었다. 제자들을 부르시고, 훈련시키시고, 함께 하시면서 천국의 비밀을 가르치셨다. 그리고 자신이 짊어지신 십자가를 지고 따르도록 명령 하셨다. 십자가의 고통은 아무나 겪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도 선교 현장에서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묵묵하게 주님을 따르는 선교사님들이 있다. 어쩌면 정말로 예수님의 길을 따라 가면서 그 분을 담기 원하는 자들의 행진이이다. 결국 참된 영성은 선교적인 삶임을 강조하고 싶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8-07-26
  • 크리스챤 요가에 대한 비판
    필자의 제자 가운데 김천대학교에서 교수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이충웅 박사님이 있다. 이 박사님은 한국대학생 간사 소속으로 인도에서 6년을 사역하신 분이시다. 그가 마지막 박사학위 논문을 구상할 때에 한국에서는 “크리스챤 요가”라는 명상 프로그램이 한참 유행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 부분을 비판적 관점으로 연구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였다. 결국 이충웅 박사는 그 부분을 연구하여 박사학위 논문을 완성하게 되었다. 벌써 몇 년 전 일이지만 새삼 스럽게 요즈음 한국에서 인기 있는 명상 프로그램도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되어 글을 쓰게 되었다. 명상이라는 용어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따르면 명상이란 “집중·사색·추상 등 여러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사적인 예배나 정신훈련”이다. 즉 명상(瞑想, meditation)은 “마음을 자연스럽게 안으로 몰입시켜 내면의 자아를 확립하거나 종교 수행을 위한 정신집중을 널리 일컫는 말”로 설명될 수 있다. 이것은 그리스어로 ‘주의를 두다, 공부하다, 연습하다’ 등의 의미를 지닌 ‘melet’에서 그 어원을 찾을 수 있고, ‘med-’는 ‘돌보다, 낫게 하다’를 의미한다. 이것을 종합하면 ‘meditation’은 ‘수련, 훈련, 치유’의 의미로 사용된다. 이를 한자로 풀면 좀 더 그 의미가 명확해 진다. 눈 감을 명(瞑)과 생각 상(想), 즉 “고요히 눈을 감고 깊이 생각함 또는 그 생각”이 바로 명상이다. 이러한 명상은 요즈음은 동양 보다는 오히려 서양에서 더욱 활발하게 진행된 하다. 즉 과거 기독교 국가로서 그 명성을 떨쳤던 많은 서구의 국가들이 동양 종교사상의 매력에 사로잡혀 있는 듯하다. 매해 요가와 명상을 위한 장소들이 생겨나고, 많은 수의 명상 수행자들이 증가하고 있다. 이들은 “깔끔한 사람들의 거품 목욕”으로 명상을 비유하며, 이것을 통해 자신들 안에 내재된 정신적 영적 공허감의 문제와 신체적 돌봄의 문제를 해결하려 시도한다.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키며 유행을 넘어 열풍을 불러일으켰던 명상은 이제 보편적인 행위로 인식되는 수준에까지 이르게 된 듯하다. 이러한 움직임이 단지 비기독교인들 안에서만 이루어지고 있는 현상이 아님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많은 교회들과 기독교인들 역시 이에 대한 비판적 입장이나 숙고함 없이 well-being을 위한 하나의 시도, 또는 문화적 차원으로만 이를 인식하여 무분별하게 실행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참다운 Well being을 위한 길은 동양 종교에서 말하는 명상 프로그램 만이 가능한가? 결론은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실질적인 well-being의 의미는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와 연결되어야 할 것이다. 먼저 well-being이 단순한 차원의 신체적 건강을 의미하지 않고, 좀 더 포괄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해야 한다. 여타의 타종교들이 현세기복적인 사고 안에서 ‘오늘’에 집중하는 반면, 성경은 내일을 향한 ‘소망’에 중점을 두고, 오늘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일에 삶의 목적과 방향을 둔다. 이를 잘 표현해 주고 있는 말씀이 바로 마가복음 9장 43-47절이다. 본문은 불구자나 절뚝발이 그리고 한 눈만 가진 자라고 하더라도 지옥에 가는 것보다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한다. 즉 다른 말로 말해서 세상적 가치를 두고 살다가 그 죄로 인해 지옥에 가는 것보다 비록 온전한 몸이 아니라 할지라도 영생에 들어가는 것, 저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사는 것이 훨씬 더 가치 있는 삶임을 밝히고 있다. 또 다른 예로, 세상이 주는 평안은 우리 주님이 주시는 평안과 너무나 다르다는 사실이다(요14:27). 세상의 어느 것도 진정한 평안을 줄 수 없고, 그것을 소유하고 있지도 못한다. 오직 주님만이 우리에게 참 평안을 허락하시고, 그로 인해 우리는 진정한 well-being을 맛볼 수 있다. 신체적, 정신적, 정서적 차원 뿐 아니라 영적인 차원에 이르기까지 하나님 없이 well-being을 추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참된 건강을 얻는 길도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그 속에 길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즈음은 기독교가 진리의 근본이 되는 성경적 삶보다는 혼합적이고 세속적인 것들로 채우려고 무단히 애쓰고 있는 듯한 기분이다. 이제 명상 이라는 자기 수련의 구도의 길을 버리고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해야 하겠다. 크리스챤 요가가 제자에 의해서 비판 되듯이 명상도 누군가에 의해서 비판 받아야 할 것이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8-07-13
  • 월드컵의 마력
    2018년 러시아 월드컵이 진행 중이다. 이 글을 기술하는 중에 한국은 스웨덴에게 1:0으로 무릎을 꿇었다. 승리는 국가의 자긍심과 국민에게는 자존감을 높이는 계기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고단한 몸과 밀려오는 잠을 연장하면서 TV시청에 몰두하게 된다. 그럼 월드컵의 마력은 무엇일까? 이는 수없이 밀려오는 군중일 것이다. TV를 시청하면서 월드컵과 교회를 대비해 보곤 한다. 즉 밀려오는 군중들과 갈수록 뻐져나가는 교인들을 대비해 보면서 월드컵을 즐기며 소리치는 군중들의 숫자가 부럽기도 하다. 특히 은퇴 이후에 가족교회로 명명이 모이지 않는 교회에 설교를 해야 하는 필자로서는 스탠드를 꽉 채운 그들이 우리교회로 오면 얼마가 힘이 될까 라고 생각해 본다. 따라서 오늘은 월드컵에 대해서 인터넷 자료에 언급된 내용을 토대로 잠간 생각해 보고자 한다. 월드컵은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국제 축구대회. 올림픽과 더불어 전 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스포츠 대회 중 하나이다. 국제 축구기구인 국제 축구 연맹 FIFA에서 주관하고 있으며, 월드컵 혹은 FIFA 월드컵으로 불린다. 1930년 첫 번째 대회를 시작으로 매 4년마다 개최되고 있다. 예선은 본선에 앞서 3년 먼저 개최되고, 본선은 개최국 경기장에서 한 달 정도의 기간을 두고 32개 팀이 경쟁하여 우승팀을 가른다. 올림픽 대회 축구경기와는 달리 월드컵 축구대회에는 프로 선수들도 참가할 수 있기 때문에 세계 최고 수준의 선수들이 경기를 펼치게 된다. 심판은 각국 축구협회가 제출한 심판명부에서 선발된다.월드컵의 역사는 1930년 프랑스의 쥘 리메(Jules Rimet)의 제안에 따라 FIFA 주관으로 우루과이에서 처음 열렸다. 유럽의 4팀, 남미의 7팀, 북미 2팀이 참가했으며, 첫 번째 FIFA 월드컵 개최국이었던 우르과이는 우승도 함께 차지하게 되었다. 초기 월드컵은 대륙 간 장거리 여행의 어려움과 더불어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 등으로 인해 참가하지 못하는 국가들이 많았다. 종전 이후 1950년 제4회 월드컵 대회에 이르러서야 안정적으로 개최될 수 있었다.한편, 1950년 월드컵은 브라질에서 개최되었는데 이 대회에서 영국의 팀들이 처음으로 참가했다. 원년 우승국인 우루과이는 1950년 대회에서 또 한번 우승을 차지했다. 16개 팀이 경기를 치르던 본선 경기는, 1982년 24개 팀으로 늘어났고, 1998년에는 32개 팀으로 확장되었다. 이때부터 조 3위는무조건 탈락할 수 밖에 없었다. 초기 월드컵 대회부터 가장 적극적으로 참가를 했던 유럽과 남미 국가들은 이후로도 축구 강국으로 성장했다.한국에서도 월드컵이 개최되었다. 2002년 사상 처음으로 아시아 대륙인 한국과 일본에서 공동 개최되었으며, 2010년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 2014년에는 브라질에서 개최되었다. 2018년 월드컵 대회는 러시아에서 개최되고 있다. 월드컵에서의 한국이 성적은 1954년 스위스에서 개최된 월드컵을 시작으로, 1986년 멕시코 FIFA 월드컵부터 1990년 이탈리아, 1994년 미국, 1998년 프랑스, 2002년 한·일, 2006년 독일,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2014년 브라질, 그리고 이번 러시아 월드컵까지 연속 9회 출전이다. 결국 한국팀은 아시아 축구 연맹에 속한 국가 중 FIFA 월드컵 최다 출전국이자 최고 성적을 기록한 팀으로 성장하게 되었다.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의 한국팀의 성적은 가이 경이적이었다. 한편, 한국은 2002년 대회에서 역대 대회 참가 사상 최고의 기록 뿐 아니라 전 세계 축구계에도 경이적인 기록을 남기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폴란드,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 등 유럽 강팀을 잇따라 격파하여 4강에 오르는 파란을 일으킨 것이다. 4강전에서 역시 유럽의 강팀인 독일을 만나 0:1로 아쉽게 패한 후 터키와의 3, 4위전에서 터키에 2:3으로 패해 4위를 기록했다. 이 기록은 역대 대회 참가 사상 최고의 기록일 뿐 아니라 전 세계 축구계에도 경이적인 기록이었다. 예단하기에는 2018년 러시아에서의 한국 기록은 그 때의 모습과는 상반되는 모습일 것 같다.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월드컵의 마력처럼 영적 생활에도 역동적인 모습들이 있어져야 하겠다. 물론 숫자에 매어 기독교의 고유한 진리성이 훼손되는 일은 없어져야 하겠지만 그래도 경기장에 밀려드는 관중들의 열정 보다는 교회에서의 찬양과 헌신 그리고 감사의 환호들이 더욱 드높혀진 모습을 보고 싶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8-06-30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