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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충웅 교수의 선교칼럼] 여호수아와 선교14 - 일어나라!(수7:6-13)
    이스라엘이 처음에 아이를 향해 출발할 때, 지나치게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이었다면, 여호수아가 장로들과 함께 민족을 위해 반응할 때는 그렇지 않다. 여호수아는 애도하는 전형적인 태도로 옷을 찢고, 그들은 모두 궤 앞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쓰고 있다. 여기에서 궤는 분명히 자기 백성 사이에 계시는 여호와의 임재를 나타낸다. 궤는 요단강을 건너는 것이나 여리고를 점령하는 것에 관여되어 있는 데 그것은 그것이 능력의 임재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여호수아는 여호와께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물어야 한다는 것을 적어도 알고 있다. 하지만 여호수아의 기도는 그가 제대로 방향을 집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호수아는 아마도 문제가 내부에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의 전형일 것이다. 대신 그의 기도는 불평하는 많은 시편들과 다를 바 없다. 여호와께서 문제의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함 때문에 이 기도는 기도의 신학에 관해 우리들에게 여전히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기도는 근본적으로 우리가 의식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임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우리의 삶과 행함을 하나님의 목적에 조화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중보기도와 하나님께 요청하는 기도를 포함하는 것이다. 기도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 하나님의 목적을 고쳐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고쳐 만드사 하나님이 실제로 무엇을 하시며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 깨달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할 때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내용 자체가 바뀌게 되는 것이다. 오늘 본문인 여호수아 7장은 아이성 전투에서 승리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아이성 전투는 단번에 승리하지 못하고, 두 번째 전투까지 치르면서 승리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여리고성에서 아간이라는 자가 시날산 외투 한 벌, 은 200세겔, 50세겔 중의 금덩이 한 개를 자기 장막 속에서 숨겼기 때문이다. 아이성의 1차 전투에서 이스라엘군의 36명이 죽고 아이성 군인들에게 패했고, 백성들의 마음은 물처럼 녹고 말았다. 이 말은 극도의 두려움과 불안감에 사로잡혔다는 말이다. 그리고 여호수아 7장 6절에 보면 이 일로 인해서 여호수아는 옷을 찢고 법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티끌을 머리에 쓰며 슬퍼했다. 그런데 이 상황을 보면 아이성 패배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간이라는 자에게 있었지만, 본문을 면밀히 보면 또 하나의 보이지 않는 실책이 있었다. 그것은 여호수아가 아이성 전투에 대해서 사전에 하나님께 묻지 않았다는 것이다. 좌절과 고통의 자리에 엎드려 있을 때 하나님이 가장 먼저 나에게 원하는 것은 첫째로 그 나락의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실망하고 낙망하여 좌절에 빠진 여호수아에게 단호하게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Stand up! What are you doing down on your face?)(10절)”라고 하셨다. 내가 실수해서 고통이 왔든지, 다른 원인으로 고통의 나락에 떨어졌든지 간에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이 좌절의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있는 것을 원치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기를 원하신다. 좌절과 고통의 자리에 일어섰다면, 그 다음에 할 일은 스스로를 성결케 하는 것이다. 13절 말씀에서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여 내일을 기다리라(Consecrate yourselves in preparation for tomorrow)”라고 하셨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장애물을 제거해야 한다. 스스로 성결케 하지 않고는 내일을 기대할 수 없다. 지금 스스로를 성결케 하는 것이 곧 나의 내일을 준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깨끗한 그릇을 사용하신다. 그러므로 지금 내 생활의 장막 속 깊이 숨겨둔 시날산 외투 한 벌, 은 200세겔, 50세겔 중의 금덩이 한 개 같은 것들을 찾아서, 십자가 앞에서 자복하고 제거해야 한다. 이런 것들이 우리들의 내일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며, 영적인 쓰레기들이다. 이사야 59:1-2 말씀에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고 했다. 우리의 일들이 잘 풀리든지 아니면 좌절의 순간이든 간에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 묻는 거룩한 습관을 갖자. 그리고 좌절과 고난의 현장 속에서 마음이 물같이 풀어지지 말고, 그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서자. 내 마음과 삶의 장막 속에 숨겨놓은 아간의 요소들을 스스로 성결케 하자. 그렇게 한 후에 주님께서 내게 승리를 주실 내일을 기다리자.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내려 오는 권능을 힘입어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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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25
  • [이충웅 교수의 선교칼럼] 여호수아와 선교13 - 이 삼천 명만 올라가서(수7:1-5)
    1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친 물건을 인하여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바친 물건을 취하였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 2 여호수아가 여리고에서 사람을 벧엘 동편 벧아웬 곁에 있는 아이로 보내며 그들에게 일러 가로되 올라가서 그 땅을 정탐하라 하매 그 사람들이 올라가서 아이를 정탐하고 3 여호수아에게로 돌아와서 그에게 이르되 백성을 다 올라가게 말고 이 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마소서 하므로 4 백성 중 삼천 명쯤 그리로 올라갔다가 아이 사람 앞에서 도망하니 5 아이 사람이 그들의 삼십육 인쯤 죽이고 성문 앞에서부터 스바림까지 쫓아와서 내려가는 비탈에서 쳤으므로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같이 된지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강을 육지처럼 건넜고, 난공불락의 여리고성을 칼 한 번 쓰지 않고 와르르 무너뜨렸고, 사기가 충천해서 마음속에 무엇을 해도 다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생겨나고 승리에 대한 성취감에 충만했다. 그러나 여리고 성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아주 조그마한 아이 성을 쳐들어갔다가 완전히 참패를 당하게 된다. 이 아이 성은 여리고에서 약 16km 정도 북서쪽으로 떨어져 있는 조그마한 성인데, 인구가 약 1만 2천 명밖에 안 되고 해발 518m 정도 산지에 있는 성이다. 여리고 처럼 거대한 성이 아니어서, ‘이 작은 성 쯤이야’ 하고 우습게 보고 쳐들어갔다가 완전히 참패를 당하게 된 것이다. 여호수아 7장 4절과 5절은 설명한다. “백성 중 삼천 명쯤 그리로 올라갔다가 아이 사람 앞에서 도망하니 아이 사람이 그들을 삼십육 명쯤 쳐 죽이고 성문 앞에서부터 스바림까지 쫓아가 내려가는 비탈에서 쳤으므로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 같이 된지라” 충격적인 실패이다. 조그마한 성을 우습게보고 갔다가 참패를 당한 것이다. 그래서 백성들의 마음이 물처럼 녹아졌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아이 성 전투가 실패한 근본적인 원인은 아간이라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범죄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여리고에 있는 모든 것을 멸한 후에 탈취물들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했는데, 탐욕이 생겨서 그것을 훔쳤다. 이 아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이 임해서 온 이스라엘 백성이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된 것이다. 여호수아 6장 17절은 말씀한다. “이 성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여호와께 온전히 바치되” 그러나 7장 1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졌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 이 한 사람이 범죄를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진노하셨다. 그래서 이스라엘 전체에게 하나님께서 징계를 내리셔서 그 전투에서 참패하게 만드셨다. 아간이 하나님 말씀을 어기고 탐욕이 생겨서 물건을 훔쳤다. 그가 붙잡혀 나왔을 때 이렇게 고백한다. 21절에,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그 무게가 오십 세겔 되는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가졌나이다 보소서 이제 그 물건들을 내 장막 가운데 땅 속에 감추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 하더라” 시날은 그 당시 최대 문명국인 바벨론을 의미한다. 바벨론의 고급 외투를 보고 훔쳤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 드리라고 한 것을 훔쳤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아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온 이스라엘 백성이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 그래서 여호수아 7장 25절에, “네가 어찌하여 우리를 괴롭게 하였느냐” 라고 말씀한다. 즉 아간 혼자만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모두가 고통을 겪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아간이 범죄해서 잘못을 했지만 그 백성들의 교만과 여호수아라고 하는 지도자의 실수도 한 몫을 했다. ‘이겼다! 우리가 뭐든지 다 할 수가 있다’고 하는 그 자만심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 여리고 성을 치기 전에는 어떻게 했는가? 기도도 하고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 말씀대로 하루에 한 번씩은 나와서 또 돌고, 또 돌고, 일주일 간 돌아서 마지막 일곱 바퀴를 돌았는데, 아이 성을 쳐들어갈 때는 아예 그런 과정이 다 생략되었다. 정탐꾼을 보내가지고 다녀와서 하는 말이 7장 3절에 그들이 이렇게 보고한다. “여호수아에게로 돌아와 그에게 이르되 백성을 다 올라가게 하지 말고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이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하지 마소서 하므로” 여호수아도 그 말을 듣자마자 “그래, 뭐 조그만 성인데 몇 사람만 가서 성을 무너뜨리고 와라.”고 말했다. 지도자가 순간적으로 방심을 한 것이다. 방심하면 안된다. 늘 긴장하고 늘 깨어있어야 한다. 지도자가 자꾸만 실수를 벌이는 것이 큰 잘못을 가져올 수 있고 재앙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늘 지도자는 영적으로 깨어있어야 되는 것이다. 그 무슨 일을 하더라도, 작은 일을 하더라도 기도 많이 하고 주님의 음성을 듣고 움직여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여리고를 무너뜨렸는데, “이 성은 우리가 무너뜨리자! 2, 3천명만 가라!” 이것이 마귀의 전략이다. 잘될 때, 성공할 때, ‘잘한다. 잘한다.’ 부추겨서 교만하게 만든다. 그래서 실수하게 만들고 무너지게 만든다. 우리는 정신 차려야 된다. 잘될 때, 칭찬 듣고 박수갈채 받을 때, 그때 겸손해져야 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죄와 특히 지도자의 자만심이 실패를 경험하게 했다. 선교지에서 사역적으로 성공한 모습이 있을 때 그때가 가장 조심해야 할 때이다. 더 기도해야 하고 더욱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할 때이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큰 실패를 경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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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14
  • [이충웅 교수의 선교칼럼] 여호수아와 선교12 -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수6:20-25)
    20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들을 때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그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점령하고 21 그 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치되 남녀노소와 소와 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 22 여호수아가 그 땅을 정탐한 두 사람에게 이르되 그 기생의 집에 들어가서 너희가 그 여인에게 맹세한 대로 그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 내라 하매 23 정탐한 젊은이들이 들어가서 라합과 그의 부모와 그의 형제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 내고 또 그의 친족도 다 이끌어 내어 그들을 이스라엘의 진영 밖에 두고 24 무리가 그 성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을 불로 사르고 은금과 동철 기구는 여호와의 집 곳간에 두었더라 25 여호수아가 기생 라합과 그의 아버지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으므로 그가 오늘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주하였으니 이는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정탐하려고 보낸 사자들을 숨겼음이었더라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하루 한 바퀴씩 여리고성을 6일 동안 돌았다. 그리고 7일째 되는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고, 제사장들의 양각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질 때 온 백성이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일이 일어났다. 어떠한 전투 없이 외치는 소리에 여리고성이 무너진 것은 이 일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 것임을 보여준다. 여리고성이 무너질 때 하나님께서는 세 가지 일을 하셨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정결케 하셨다. 하나님께서 가나안을 멸망시킨 이유는 그 주민들이 패역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 땅에 거하는 사람들의 범죄로 말미암아 가나안 땅이 더러워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전체를 심판하셨고, 그 첫 번째 관문이 바로 여리고였던 것이다. “너희는 이 모든 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들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더러워졌고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그 악으로 말미암아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그 주민을 토하여 내느니라.”(레 18:24-25). 땅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에레쯔’인데, 이 단어는 땅을 가리키기도 하고 그 땅에 사는 사람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는 땅과 인간이 운명공동체로 묶여 있음을 보여준다. 인간의 육체가 땅의 흙으로 지어진 것도 그러한 사상을 알려준다. 그래서 인간이 범죄 하였을 때 땅도 함께 저주를 받았고, 인간의 죄가 더할수록 자연계도 더욱 망가지게 된다. 이처럼 땅과 인간은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은 인간의 몸의 구속의 날을 기다린다. 가나안 족속의 범죄가 심해지자 땅은 거민들이 더이상 자신을 더럽히지 않게 해달라고 부르짖었고, 하나님께서는 그곳을 심판하심으로써 땅은 그 주민들을 토해내게 되었다고 성경은 말한다. 그렇게 땅을 정결케 하신 후 하나님께서는 그곳에 이스라엘을 심으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의롭고 정결하여서 그 땅이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가나안 주민이 워낙 패역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셨고,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은총으로 주신 것이다(신 9:5).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셨다. 여호수아는 기생 라합과 그의 가족들에게 자비를 명하였다. 라합의 믿음으로 그녀뿐 아니라 가족과 친척, 그 집 안에 있던 모든 것이 구원을 받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히브리서는 라합에 대하여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히11:31)라고 말한다. 라합은 하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분이 살아 계신다는 사실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분임을 믿었다(히 11:6). 그래서 이 땅에서의 사소한 기업을 포기하고 더 큰 기업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다윗과 예수님의 계보에 들어가는 영예로운 자리에 앉게 되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차별 없이 하늘의 복을 주심을 보여준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비천한 자들을 부르신다. 그리고 그 자비하심을 아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비를 전하게 하신다. 왜냐하면, 전하는 자들이 없다면 그들이 하나님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보이셨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함으로써 승리를 얻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셨고 그들은 영적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려 이 전투에 임하였을 때 성장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은 철저한 섬김과 생사를 오가는 전투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성장하였다. 전투적인 삶 없이는 영적 성장도 없다. 신앙은 끊임없는 분투이며, 투쟁이다. 그리고 불가능한 도전이며, 우리를 억압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항거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사람,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지 않는 삶의 가장 큰 피해자는 바로 자신인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함으로써 여리고를 무너뜨렸다. 우리들의 여리고는 무엇인가? 무엇으로도 무너뜨릴 수 없을 것 같이 여겨지는, 그래서 오랜 세월 나를 얽매어 오던 것은 무엇인가? 선교지에서 무너뜨려야 할 여리고성보다 내 안에 있는 여리고성을 먼저 무너뜨려야 한다. 그 성을 무너뜨릴 방법은 단 하나이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라. 그리고 그분의 말씀에 ‘아멘’으로 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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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18
  • [이충웅 교수의 선교칼럼] 여호수아와 선교11 - 여호와께 온전히 바치되(수6:17-19)
    17 이 성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여호와께 온전히 바치되 기생 라합과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모두 살려 주라 이는 우리가 보낸 사자들을 그가 숨겨 주었음이니라 18 너희는 온전히 바치고 그 바친 것 중에서 어떤 것이든지 취하여 너희가 이스라엘 진영으로 바치는 것이 되게 하여 고통을 당하게 되지 아니하도록 오직 너희는 그 바친 물건에 손대지 말라 19 은금과 동철 기구들은 다 여호와께 구별될 것이니 그것을 여호와의 곳간에 들일지니라 하니라 여리고 성을 탈취하는 데 있어서 지켜야 할 규율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 성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다. 이 성은 하나님께 바쳐지기 위해서 이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 도시는 불태워져야 했고 그 안에 사는 모든 생물은 가차 없이 하나님의 정의의 제물로 바쳐졌다. 백성들이 알아야 할 전부는 17절의 내용에 포함되어 있다. 이 도시는 도시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여호와에게 “헤렘”, 즉 아주 “바쳐진” 것이 될 것이다. 이 안에 살고 있던 생명은 어떤 조건으로든지 간에 속량 될 수 없었다. 이것들은 철저하게 모두 “죽여야” 한다(레 27:29). 이것을 시키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피조물들에게 생명을 주신 그 하나님이 다시 생명을 박탈하는데 누가 감히 하나님의 선고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는가? 이와같이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신가?”(롬 3:5)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런 생각을 마음에 품게 되는 것을 금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의 여러 다른 도시들 중에서도 유독 여리고를 취하셨으며 다른 도시들보다도 더 많이 자기에게 바쳐지도록 하셨다. 이 도시를 이토록 혹독하게 사용하신 것은 다른 여타 도시들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고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더욱더 마음이 녹아내리도록 하심일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명령에도 불구하고 라합과 그의 가족만은 제외되었다. “라합과 무릇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살리라.” 그녀는 이스라엘에게 보여 준 친절로 자신을 그녀의 이웃에게서 구분시켰다. 그 친절의 신속한 보답으로 그녀는 또한 이웃들과 구분된 것이다. 그리고, 성 안에 있는 모든 보물, 즉 돈과 그릇과 가치 있는 물건들은 회막용으로 성별되어 헌납된 품목으로 드려져야 했다. 이렇게 된 이유를, 유대인들은 이 성이 안식일에 탈취되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자기의 장막을 아름답고 풍요하게 하심으로 존귀를 받기를 원하시며, 자기를 섬기는 일에 소비되는 엄청난 경비를 이렇게 마련하셨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와 같은 일을 통해서 세상 재물에 마음을 쏟지 말 것과 자신들을 위해서 많은 재물을 쌓아 두는 일에 집념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배웠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약속하신 것이지 은과 금이 풍부한 땅을 약속하신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들이 이 땅에서 편안하게 살며 자기를 기쁘게 섬길 수 있게 되기를 원하신 것이지 먼 나라들과 장사를 하고 훗날을 위한 재물을 쌓는 따위의 탐욕을 원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장막을 풍부하게 함으로써 자신들이 풍부하게 되며 하나님의 집에 쌓아 두는 것이 마치 자기 자신들의 집에 쌓아 두는 것과 같은 명예와 부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금지된 노략물을 다루는 일에 각별히 조심하도록 주의를 받았다. 하나님께 바쳐진 것을 자신의 개인적 용도로 소유하게 된다면 그것은 저주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바칠 물건을 스스로 삼가라. 그 물건들을 향해 너희들의 마음이 기울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억제하며 이 일에 관계된 어떤 것이라도 소유하고 싶은 욕망에서 자신을 멀리하라.”(18절)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실 때는 우리가 다음 장에서 읽게 될 아간의 죄를 미리 내다보신 것 같다. “이스라엘 진으로 바침이 되어(저주를 당해) 화를 당케 할까 두려워하노라”는 각별한 주의가 있었는데도 아간은 지키지 않았다. 선교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선교사들 중에 경제적으로 어려운 분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반대로 선교지에 사용해야 할 돈을 다른 곳에 유용하는 것도 많이 있다.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이다. 한국교회의 개혁은 경제적 개혁이 우선되어야 한다. 성도들의 헌금을 성도들을 위해 선교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기 위한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그리고 사용 되어지는 물질과 우리의 삶이 되어지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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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31
  • [이충웅 교수의 선교칼럼] 여호수아와 선교10 - 진짜 무너져야할 여리고성(수6:8-11)
    8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기를 마치매 제사장 일곱은 양각 나팔 일곱을 잡고 여호와 앞에서 나아가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언약궤는 그 뒤를 따르며 9 그 무장한 자들은 나팔 부는 제사장들 앞에서 행진하며 후군은 궤 뒤를 따르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진하더라 10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하고 11 여호와의 궤가 그 성을 한 번 돌게 하고 그들이 진영으로 들어와서 진영에서 자니라 여리고성은 고대 중동에서 가장 강력한 난공불락의 성들 중의 하나였다. 여호수아 6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여리고성 함락을 위해 명령하신 방법은 간단했다. 6일 동안 매일 한 바퀴씩 성을 돌고, 7일째는 7바퀴를 돈 후에, 여호수아가 “외치라”라고 말하면, 다 같이 외치는 것이다. 성을 돌때는 일곱 나팔을 가진 제사장들과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앞장서고, 나머지 군사와 백성들은 그 뒤를 따른다. 물론 맨 앞에 무장한 군인들이 서기는 하지만 이는 보호차원일 뿐이다. 이처럼 나팔과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뒤따르도록 지시하신 것은 곧 하나님께서 이 전쟁의 주인이시며, 하나님이 앞서 행하신다는 의미가 있다. 백성들은 단지 아무 말도하지 않고 조용히 제사장들의 뒤를 따라가면 된다.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하고”(10절) 그런데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여리고성을 돌 때, 아무 소리도 안 난 것이 아니고, 제사장들이 부는 나팔 소리는 들렸다. 다시 말하면 제사장들 부는 나팔 소리를 들으면서 돈 것이다. “그 무장한 자들은 나팔 부는 제사장들 앞에서 행진하며 후군은 궤 뒤를 따르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진하더라.”(9절) “제사장 일곱은 양각 나팔 일곱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계속 행진하며 나팔을 불고 무장한 자들은 그 앞에 행진하며 후군은 여호와의 궤 뒤를 따르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진하니라.”(13절)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성을 돌 때, 나팔 소리만 나게 하고, 사람들의 소리는 일체 나지 못하게 하셨을까?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도 나팔소리를 들으면서 ‘왜 하나님이 자기들에게는 아무 소리도 내지 말라고 하셨을까’에 대해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여리고성을 돌면서 그동안 하나님께서 출애굽에서부터 요단을 건너게 하시기까지 그들에게 베푸셨던 하나님에 대해 깊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자신들을 인도하신 하나님은 나에게 어떤 분이신지, 그분의 성품은 무엇이며,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 등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부모들이 지금까지 수없이 사람의 음성을 앞세우면서 지긋지긋할 정도로 불평, 불만, 불신하며 하나님을 멸시하다가 광야에서 38년 동안이나 방황했던 일들도 회상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문득 “아하! 진짜 무너져야 할 것은 지금 눈에 보이는 여리고성 이전에 내 마음 속에 있는 여리고성들이구나”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예외 없이 우리 앞에 있는 어려운 환경이나 상황의 여리고성들이 무너지기를 바랄 것이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상황의 여리고성이나 다른 사람 안에 있는 견고한 여리고성은 무너지기를 바라면서도, 정작 내 안에 있는 더 견고한 여리고성에 대해서는 간과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 하나님 앞에서 내 속에서 무너져야할 견고한 여리고성은 무엇이 있는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내 생각을 지배하고 있는 세상의 가치관의 여리고성이 있다. 습관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의심하고 예배의 자리에 나아오기를 방해하는 불신과 태만의 여리고성도 있고, 불의를 기뻐하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는 비겁함의 여리고성도 우리 안에는 숨어 있다. 그런가하면 탐욕과 욕심의 여리고성도 있다. 선교지의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기 전에 먼저 내 안에 있는 여리고성을 무너뜨려야 한다. 선교지의 잘못된 문화를 바꾸기 전에 나 자신의 잘못된 편견부터 고쳐야 한다. 그렇기에 자세히 보면 나팔 소리를 들으면서 여리고성을 도는 시간은 적군과의 전투이기 이전에 사실은 나를 부인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나 자신과의 내적인 전투시간이기도 하다. 이처럼 우리의 내적인 준비가 되면, 하나님께서 “외치라!” 하는 때가 반드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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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13
  • [이충웅 교수의 선교칼럼] 여호수아와 선교9 -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수6:1-7)
    1 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 2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주었으니 3 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4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나아갈 것이요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5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어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 6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제사장들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언약궤를 메고 제사장 일곱은 양각 나팔 일곱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나아가라 하고 7 또 백성에게 이르되 나아가서 그 성을 돌되 무장한 자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나아갈지니라 하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질게 길었던 광야의 40년 생활을 마감하고, 드디어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행군을 시작하였다. 모세가 죽고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한다. 눈앞에 있는 요단강도 기적 가운데 건넜다. 그런데 소문으로 들었던 난공불락의 여리고성을 만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복해야 할 여리고성을 여호수아 6장 1절에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고 말한다. 굳게 닫힌 성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희망이 막힌 것을 상징적으로 설명해준다. 이스라엘의 힘으로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절망의 순간을 만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여정에서 만난 ‘여리고성’은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존재한다. 일상에서 만나는 문제들이 마치 여리고성과 같이 희망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평범한 순종이 승리를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행동지침을 말씀해주신다. 여호수아 6장 2절 이하를 보면 매일 한 번씩 성 주위를 돌되 마지막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요구한 순종은 평범한 것이다. 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광야에서 40년 동안이나 걸어 다녔던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특이하고 비범한 것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여리고성보다 더 크고 높은 성을 쌓거나, 군사훈련을 하라는 생소한 방법을 명하지 않았다. 날마다 걷던 그 걸음을 주님 앞에 드리라고 말씀하신다. 평범한 것에 순종하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하나님의 큰 능력을 체험하려면 영웅적이거나, 특별한 순종을 해야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믿음은 늘 일상적인 삶에서의 순종이다. 여리고성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40년 동안이나 돌아다녔던 순례자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게 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돈다. 13 바퀴를 돌면 분명히 하나님께서 새로운 일을 행하실 것을 믿고 돈다. 하나님의 명령은 평범했다. 평범한 말씀에 순종할 때 불가능의 여리고는 무너진다. 우리의 순종이 크고 대단해서 주님이 위대한 일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전능하시기 때문에 큰일을 행하시는 것이다. 너무나 작고 초라한 모습이지만 우리의 진실한 삶을 드릴 때 주님의 능력이 나타날 것이다. 침묵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를 7일에 걸쳐 13번 도는 동안 지켜야 할 독특한 명령이 있다. 침묵하라는 것이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이 명령은 하나님이 아니라 여호수아가 추가해서 한 것이다. 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침묵하라 했을까?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아는 특징이 하나 있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40년은 감사와 찬송이 아니라 불평과 원망의 역사였다.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먹고 메추라기는 감격과 감사로 먹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불평으로 바뀌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원망과 불평의 본성이 있다. 그런 그들에게 여리고는 정말 난감하고 두려운 존재였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광야 40년을 기적으로 이끌어 오시고 요단강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건넜다 할지라도 여리고는 불가능해 보였다. 이제 또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 입장에서 불평할 수 있다.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던 불평과 원망과 의심이 나타난다. 왜냐하면, 이것이 이스라엘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불평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진노로 광야에서 다 죽게 된 것을 여호수아는 똑똑히 보았다. 불평하는 백성의 특징을 잘 알기에 여호수아는 침묵하도록 하였다. 불평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 침묵은 위대한 힘이 있다. 하나님 말씀에 집중할 수 있게 해 준다. 우리에게 분별력을 갖게 해 준다. 나의 기대와 욕망의 소리를 잠재우고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게 해준다. 그들의 침묵은 바로 이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기 위함이었다. 우리 대부분의 문제들은 조용히 있지 못하기 때문에 오는 것이 많다. 광야의 40년을 돌아보니 정말 하나님의 기적이었다. 농사짓지 않고 길쌈을 하지 않았는데 그 많은 백성들이 굶지 않고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능력이고 기적인 것을 알았을 것이다. 침묵하는 동안 그들은 하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 나의 삶 속에 큰 절망으로 다가와 있는 그 문제를 향해, 주님은 여리고가 무너진 것처럼 분명히 해결될 것을 약속하고 계신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믿음이란 세상에 대하여 눈을 감고 하나님에게 귀 기울이는 것”이라 했다. 이제 현실을 보던 나의 눈을 들어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자. 그리고 그의 말씀을 듣자. 내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끝까지 그리고 온전히 순종하자. 침묵하며 불신앙의 소리가 아닌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통해서 나를 향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우리 앞에 놓인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는 우리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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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05
  • [이충웅 교수의 선교칼럼] 여호수아와 선교8 - 여호와의 군대 장관(수5:13-15)
    여러 가지 면에서 할례와 유월절을 지키는 것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기 위한 준비 역할을 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돌아가지 않고 확실하게 그 땅 안에 있어야 하는 시점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들 스스로는 넘쳐흐르는 강을 건널 수가 없다. 그리고 만나도 그쳤다. 이제 그들은 그 땅에 사는 방법 외에는 없다. 이제 그들은 그 땅을 정복해야만 한다. 그리고 첫 번째 난관은 여리고성 이었다. 여리고성을 정복하기 전에 여호수아는 신비한 한 인물을 만나게 된다. 이 인물은 “한 사람”이라고 나온다. 그 사람은 분명 전사다. 그리고 그 사람이 칼을 빼어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임무 수행 중이었다. 우리는 이때까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종종 말씀하셨다는 사실은 보아왔지만, 하나님 영광의 현현이 그에게 나타났다는 것은 읽은 적이 없다. 그러나 이제 그에게 부닥치는 역경이 커지자, 거기에 비례해서 그에게 주어지는 격려도 커진다. 여호수아가 군대 장관을 만나는 은혜를 받는 시점은 여호수아가 할례와 유월절을 아주 엄숙하게 지킨 바로 직후였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자신을 알게 하셨다. 여호수아는 위협을 느꼈지만, 그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그가 이스라엘 편인지 아니면 적군인지 물어본다. 여호수아가 그에게 다가가서 대단한 질문을 하였다. 여호수아는 하인을 보낸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다가가서 물었다. 바로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만일 그가 자기들 편이라면 환영하고 적들의 편이라면 그와 싸울 각오가 되어 있음을 보여 준 것이다. 이것은 다음의 사실을 의미한다. 첫째, 이것은 여호수아의 큰 용기와 결심을 보여준다. 그는 이 급작스럽게 나타난 모습에도 주춤하지 않았고, 그가 본 자의 용모에 틀림없이 나타났을 그 위엄과 용맹에도 겁먹지 않았다. 그는 위대한 장군처럼 침착하게 그에게 물어야 할 질문을 던졌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용기를 내라고 명령하셨으며 이 사건에서 그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 둘째, 그 백성과 그들의 처지에 대한 여호수아의 지극한 관심이다. 그러나 대답은 전혀 예상치 못한 답이었다. 그는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의 편도 아니고 그들의 대적의 편도 아니었다. 대신 그는 여호와의 뜻을 전하기 위해 왔을 뿐이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곧바로 그 앞에 엎드린다. 여호수아는 그에게 존경을 표했다. 여호수아 자신도 이스라엘 군대의 장군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자기 위에 여호와의 군대의 대장으로서의 임무를 받은 이 낯선 사람에 대해서 전적으로 질투의 빛을 보이지 않았다. 여호수아는 그에게 명령과 지시를 요청했다. “나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여호수아의 이전 질문이 용감하고 군인다웠던 것만큼이나 지금 그의 질문은 경건한 것이었다. 이제 군대 장관은 여호와의 메시지를 전한다. 그것은 그곳은 거룩한 곳이니 신을 벗으라는 것이다. 군대 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요구한 경외의 표시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15절)는 것은 경외와 존경의 표시였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인식으로서, 하나님의 임재가 계속되는 한 그곳을 거룩하게, 그리고 존귀하게 여기는 태도를 지닌다는 표시였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시기 위해서 모세를 보내실 때 가시덤불에서 모세에게 주셨던 명령도 바로 이런 명령이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출3:5). 하나님은 이 명령을 통해서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같이 여호수아와도 친히 함께해 주겠다고 한(수1:5) 최근의 약속에 대한 신앙을 확증시켜 주신다. 모세도 이와 같은 하나님의 임재를 깨달았을 때 그 땅을 거룩하게 했고, 여호수아도 그렇게 했다. 그리고 그는 여리고성의 함락에 관해 여호수아에게 전하려고 하셨던 지시를 받으라고 준비시킨다. 이 여호와의 군대 장관은 이스라엘이 이 성을 소유하도록 돕기 위해서 지금 오신 것이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그렇게 하였다. 우리는 뭔가 더 이상의 것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단지 그뿐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메시지가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모세를 부를 때와 유사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모세가 역시 그 땅이 거룩하므로 신을 벗었다. 그리고 이것은 모세와 함께하신 여호와가 여호수아와도 함께 하신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것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였다. 그것은 여호수아가 참여하고 있는 전쟁을 인정해 주며, 그 전쟁이 하나님에게 속한 것임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힘 있게 전쟁을 수행해나가도록 격려하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의 임재는 단순히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가운데 체험되고 경험되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지속적으로 당신의 종을 격려하신다. 선교지도 하나님의 것이다. 그리고 선교지에 있는 우리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다. 왜냐하면,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발에서 신을 벗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을 경험해야 한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 그것만이 우리가 선교에서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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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23
  • [이충웅 교수의 선교칼럼] 여호수아와 선교7 - 유월절을 지키다(수5:10-12)
    10 또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 쳤고 그 달 십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으며 11 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의 소산물을 먹되 그 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라. 12 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 출애굽 한 후 이제야 남자들이 할례를 받고 그래서 언약 관계를 기념할 수 있게 되면서 이스라엘은 유월절을 기념한다. 그들은 길갈에 진을 치고 정해진 날인 첫째 달 14일에 유월절을 지켰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한 이스라엘의 준비 전체, 즉 요단강을 건너는 것, 남자들에게 할례를 주는 것 등이 다 쌓여서 이 절정의 순간에 이르렀다. 유월절은 여호와가 그분의 약속을 성취하여 그들을 그 땅에 실제로 데려오셨다는 것,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또한 길갈이라는 발판을 넘어 이동할 것을 예상할 수 있다고 인지하면서 지킨다. 할례의 신앙적 의미와 마찬가지로 유월절도 하나님의 언약의 표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이라는 표이다. 유월절은 하나님이 구원해 주신 날을 기억하도록 지키게 한 절기이다. 애굽 왕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날 때 순순하게 내보내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내리셨고 열 번째 재앙인 애굽의 모든 장자를 죽이는 재앙을 당하고서야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주었다. 그 죽음의 재앙이 있었던 밤에 이스라엘 백성은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그들의 집 문설주와 인방에 발랐고 재앙은 그 집을 넘어가게 된 것이다. 이렇게 유월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백성과 구별하여 구원해 주신 표이다. 하나님은 이 유월절을 길갈에서 할례를 행한 후 그달 14일 저녁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키게 하셨다. 유월절을 지키는 것은 또한 이스라엘의 삶에서 있었던 중대한 변화를 표시한다. 유월절을 기념한 이튿날 그들은 “그 땅의 소산”(11절)을 먹는다. 유월절 이튿날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부터 만나가 그치고 그 해부터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도록 하셨다. 이것은 그들이 그 땅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최초의 시점은 경작된 농산물을 먹을 때부터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입히고 먹이고 인도하셔서 구원해 주셨다. 이렇게 지금까지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기 때문에 이제는 직접 땀을 흘리며 노력해서 살아가라는 것이다. 만나로 하나님의 은혜를 직접 체험했지만, 이제는 가나안이라는 정착된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도 만나를 주신 그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살아가라는 것이다. 사실 쉽지는 않다. 초자연적인 능력을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를 직접 체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불신하며 자신의 생각을 먼저 앞세웠는데 매일 먹고 직접 보는 만나의 은혜를 이제 볼 수 없으니 하나님을 얼마나 의지하며 살 수 있을까? 그래서 하나님은 그 은혜의 표시로 할례와 유월절을 지키며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도록 하신 것이다. 오늘 본문은 바로 우리 모두에게 주신 말씀이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매일 만나의 은혜로 살아 온 것처럼 우리의 삶도 하나님이 주신 만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한다. 결국은 세상에 눈을 돌리며 하나님의 은혜를 멀리하게 된다. 하나님은 바로 우리에게 이 은혜를 기억하도록 할례와 유월절을 지키게 하셨다. 아니 이미 예수님을 통해서 신앙의 할례와 유월절의 깊은 신앙의 의미를 십자가로 보여 주시고 친히 그렇게 사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음을 고백하며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십자가로 돌아가야 한다. 십자가 안에 만나의 은혜가 있고 십자가 안에 할례와 유월절의 신앙의 메시지가 있다. 우리가 성찬식을 거행하는 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기념하는 것인 동시에, 예수님이 오시는 날을 예상하는 것이다. 우리가 확신과 소망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이미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알기 때문이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경험했기 때문에 확신하는 것이다. 그들이 아직 여리고 평야에 있다는 것은 이미 그들 여정의 다음 단계를 가리키고 있다. 그들은 이제 여리고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그리고 약속의 땅을 정복해 나갈 것이다. 그 전에 그들은 할례를 받았고, 유월절 절기를 먼저 지켰다. 하나님을 잊지 않고자 하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노력이다. 선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아무리 사람들이 보기에 훌륭해 보여도 하나님의 선교라고 할 수 없다. 자신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임을 인정하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사람은 너무도 쉽게 자신의 왕국을 세우고자 하기 때문이다. 멈춰 서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하나님을 먼저 기념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 먼저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먼저이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찬양하는 것이 먼저이다. 이것이 선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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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14
  • [이충웅 교수의 선교칼럼] 여호수아와 선교6 - 길갈(수5:1-9)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나와 40년 간 광야 생활을 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 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단강의 기적을 보여주셨다.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궤를 메고 요단강에 발을 딛자 강물이 그쳤고 백성들은 요단강을 마른 땅같이 건너게 되었다. 이 기적을 체험한 이스라엘 백성은 후손들을 위해 열두 개의 돌을 취하여 요단강에 세웠고 또 요단강에서 가지고 온 열두 개의 돌을 그들이 유숙한 길갈에도 세웠다. 본문 1절을 보면 요단강 서편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들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게 하시고 그들이 건넜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런 체험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고서 정신을 잃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오늘 본문은 우리들의 삶을 뒤돌아보게 한다. 과연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우리들의 삶을 보며 오히려 걱정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는지 아니면 저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은 과연 대단하신 분이라고 하며 마음이 녹고 정신을 잃을 것인지 우리의 신앙을 다시 한 번 점검하는 말씀으로 보아야 한다. 오늘날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일들을 보면 오히려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걱정하는 쪽이 많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한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보다 윤리와 도덕은 물론 법까지 더 지키지 않고 독단적이며 이기적이며 욕심이 많은 사람들로 인식되어 있다. 그러나 여전히 교회 안에서는 이런 조소의 시각을 보고 정신을 차리기는커녕 교회법과 세상의 법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교회의 문제에 관여하지 말라고까지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살아가는 것은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삶 속에서 그 구원의 은혜를 드러내는 것은 더 중요하다. 세상의 방식이나 내 방식을 버리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어야 한다. 즉 내 방법과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것으로 채워가야 한다. 내 삶에 하나님이 들어오셔서 하나님이 이끌어 가시도록 내 자리를 내어 드린다면 우리는 날마다 기적을 체험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모든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분명히 달라질 것이다. 마치 가나안 사람들이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하나님이 주시는 기적을 체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고서 마음이 녹고 정신을 잃은 것처럼 세상 사람들이 신자들을 보고서 이런 반응이 나오도록 살아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40년 동안 기적 같은 일을 경험하는 것은 그들의 능력도 아니요 그들의 잘남도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 할례를 하게 하신다. 물론 요단강을 건너게 해 주신 분도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할례를 하게 한 것이다. 본문 2절에 보면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할 것을 명령하셨다. 4절 이하는 여호수아가 할례를 시행한 까닭을 기록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길에서 난 자들이 할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애굽에서 나온 모든 백성들은 할례를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거역함으로 하나님이 약속해 주신 가나안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을 보지 못하고 모두 광야에서 죽게 되었다. 광야에서 태어난 세대들은 할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할례를 받아야 했던 것이다. 가장 먼저 행한 할례는 창세기 17장에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언약의 표로 주신 것이 할례이다. 본문 9절에서 길갈이라는 특정 지역에서 할례를 행하게 한 것도 이유가 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셨으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9절) 이제 길갈이라는 곳에서 할례를 행하므로 전에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기억들, 즉 죄로 얼룩져 있는 수치스러운 일들은 모두 버리고 하나님의 자녀인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것을 알려 주신 것이다. 그래서 ‘길갈’의 뜻을 ‘굴러가다’ 즉 ‘애굽의 수치를 굴러가게 하였다’라고 부르게 한 것이다. 이제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 40년 동안 보호하고 인도해 주시고 이제 막 요단강을 마른 땅같이 건너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기 위해서 12돌을 취하여 자자손손 하나님을 기념하도록 길갈에서 할례를 하게 한 것이다.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도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지 이스라엘 백성들의 힘이나 능력, 어떤 조건 때문에 들어가는 것이 아님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할례를 행하게 한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가나안 땅에 있는 원주민들과 싸워서 이겨도 하나님이 싸워 주셨고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졌음을 알고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결국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 하나님 앞에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를 알려 주신 사건이 길갈에서의 할례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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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02
  • [이충웅 교수의 선교칼럼] 여호수아와 선교5 - 돌 열둘을 취하고(여호수아 4장)
    여호수아 4장은 새로운 연설 형태를 소개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위대한 역사를 선포하면서 여호수아를 통하여 말씀해 오셨다. 예고된 기적은 일어났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과 여호수아의 위대성을 지시해 주는 인간의 시행이라는 순환으로 되돌아간다. 전 국가나 혹은 그 지도자 그룹에게 전달되었던 내용은 이제 지도자 여호수아에게만 전달된다. 전승은 이스라엘을 12지파 동맹을 전제 조건으로 하고 있으며, 돌무더기를 이러한 빛 가운데서 해석한다. 돌들은 요단강 한 가운데서 취해졌다. 이것은 제사장들이 서 있던 위치로 해석된다. 8절과 15절은 물가를 제사장들이 서 있던 곳으로 강조한다. 17절만 그곳이 요단강 한가운데라고 기록한다. 9절에서 돌들은 요단강의 한 가운데 세워진다. 또다시 전승의 발전과 그 전승에 의한 반영이 나타나 있다. 원 전승은 일어난 기적을 강조하면서 제사장들을 물가에 서 있었던 것으로 말한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전승은 물 한 가운데를 그 돌들을 취하기도 하고 쌓기도 한 곳으로 지적했다. 그 전승들을 결합한 내용은 제사장들의 역할을 강화시켰다. 기념 돌무더기는 여호와께서 행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할 뿐만 아니라 거룩한 제사장들이 서 있었던 장소를 정확하게 지적해 주기도 한다. 요단강을 건너는 기적의 중요성은 단지 이스라엘이 광야에 들어갔던 것과 대체로 똑같은 방식으로 광야를 떠났다는 것, 혹은 여호와가 여호수아를 크게 하시기 시작하신다는 것만이 아니다. 그보다 그 기적을 미래 세대를 형성하는 기념비로 이해해야 한다. 그 기념비는 단지 그 땅에 살게 될 사람들만이 아니라 모든 백성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기념비 자체는 단순할 것이다. 각 사람이 제사장이 서 있던 곳에서 돌을 하나씩 취해서 그것을 이스라엘이 그 땅에서 첫 번째 밤을 지낼 곳에 두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그것은 기념비의 존재로 인해 후대 사람들이 돌의 의미에 대해 대화를 나누게 될 것을 기대한다. 여호수아는 각 지파대로 한 사람씩 준비한 12사람을 불러(4절), 다시 제사장이 서 있는 요단강 가운데로 들어가게 한다. 그리고 그 언약궤 앞에서 각기 돌 한 개씩 어깨 메어 오게 함으로써(5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수아가 명령한 대로 행했다”(8절)는 것이다. 이 12개의 돌이 길갈에 세워짐으로 이 기적에 대한 영원한 표징이 되게 했다. 지도자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준비된 사람들을 불렀다. 이것이 14절에 있는 말씀처럼 “그 날에 여호와께서 모든 이스라엘 목전에서 여호수아를 크게” 하셨던 행동이다. 왜 12개의 돌을 가져다가 기념물로 세우게 하셨는가? 6절에, “후일에 너희의 자손들이.. 이 돌들이 무슨 뜻이냐?”라는 질문을 하게 될 때 그 질문에 대하여 가르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이 돌들은 무언의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믿음을 열심히 가르치고, 자녀들은 그들이 직접 목격하지는 않았지만 부모에게서 들어서 배우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명령과 역사는 가르침과 배움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 시대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렇게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요단강 가운데 제사장이 굳게 서 있던 곳의 돌 12개를 어깨에 메어 오게 하여 길갈 성소에 세워둠으로써 영원한 표징이 되게 했다. “이것이 너희 중에 표징이 되리라”(6절). 그러나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명령보다 더 충성했다. 왜냐하면 9절에, “또 요단 가운데 곧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선 곳에 돌 열둘을 세웠기”때문이다. 길갈 성소에 세워진 돌들은 누구나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요단강 바닥에 세워진 또 다른 돌들은 사람들의 눈에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조상들로부터 이 이야기를 듣게 될 때에 그 자손들에게 믿음의 큰 확신을 주었음이 분명하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일종의 마음의 자극제가 되었다. 언약궤는 평소에 지성소 안에 휘장에 의해서 감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거기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배울 때마다 지성소 안에 법궤와 하나님의 임재의 효력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배우고 가르치기 위해서 보이지 않는 강바닥의 표징이 있을 뿐만 아니라 보이는 길갈 성소의 표징이 있음을 믿기 바란다.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 자손까지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기적 같은 역사가 동일하게 이어나게 될 줄을 믿는다. 하나님께서 크게 쓰시는 선교사는 누구인가? 철저하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이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 앞에서 크게 되었다. 선별 된 12명의 사람들은 요단강 가운데 있는 돌을 어깨에 메어오기 위해서 다시 요단강으로 들어갔고, 그 무거운 돌을 어깨에 메어 왔기 때문에 그것으로 길갈 성소에 기념물을 세울 수가 있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철저히 순종하게 될 때에, 요단강을 가르는 기적과 같은 역사가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도 동일하게 일어날 줄을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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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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