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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충웅 교수의 선교칼럼] 여호수아와 선교4 - 요단을 건너기 위한 준비들(수3:1-6)
    1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서 이스라엘 사람들로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서는 건너지 아니하고 거기서 유숙하니라 2 삼일 후에 유사들이 진중으로 두루 다니며 3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 곳을 떠나 그 뒤를 좇으라 4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상거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 하면 너희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5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사를 행하시리라 6 여호수아가 또 제사장들에게 일러 가로되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서 건너라 하매 곧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서 나아가니라 여호와께서 하실 일에 대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준비하는 것은 중요하다. 첫 단계로, 이것은 백성들이 싯딤에 있는 그들의 진을 떠나 요단강을 건널 생각을 하고 강에 오는 것을 포함한다. 여기에서 1:10-11에서 언급된 이스라엘의 더 광범위한 지도부가 준비 작업에 착수한다. 이 관리들은 여호수아의 역할을 보조하면서 그들의 역할을 성취한다. 동시에 2-4절에 나오는 관리들의 일과 5-6절에 나오는 여호수아 자신의 일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지도력을 분담할 때에도 여전히 기능과 책임은 적절히 구분되기 때문이다. 관리들의 명령은 “레위 사람 제사장들”의 중심적 역할과 요단강을 건널 때 언약궤가 담당할 역할에 초점을 맞춘다. 언약궤에 대한 여러 다양한 본문들은 언약궤의 역할의 여러 측면들을 강조한다. 그것은 금으로 덮인 상자로, 채를 끼워서 운반하는 것이었으며, 주로 십계명 돌판을 저장하는 역할과 여호와의 뜻이 성소에서 계시 될 수 있는 장소 역할을 하였다. 그것은 여호와의 임재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또한 전쟁에서도 사용되었다. 그리고 레위 사람 제사장들과 언약궤는 둘 다 여리고를 점령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하지만 이 단계에서는 어떤 기적적인 것에 대한 암시도 없다. 언약궤가 가는 길이 백성들을 안내해 주리라는 것만 있을 뿐이다. 백성들은 전에 이 길을 지나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따라가야 한다는 것은 여호와가 길을 알고 계신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러한 인도에서 한 가지 중요한 요소는 백성들과 언약궤를 메고 있는 제사장들 간에 이천 규빗(약 900미터)의 간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 언약궤는 우리에게 두 가지의 강조점을 보여 준다. 하나는 약속의 땅으로 가는 하나님의 길을 백성들에게 보여 주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백성들이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를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이라는 개념이 5절로 이어지고 있다. 이스라엘은 스스로 정결해야 하는데, 이를 문자적으로 표현하면 “너희 자신들을 거룩하게 하라”이다. 이것은 한 사람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가기 위하여 준비하는 정결 의식을 포함한다. 이 정결 의례는 단순한 것이 아니라 신명기23:15(개역 14절)에 따른 전쟁을 위한 정결이다. 모든 준비를 하고 나서 여호수아는 오랫동안 기다려 온 명령을 내렸다. “앞으로 나아가라.” 제사장들은 즉시 순종했다. 여호수아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은 이행되었다. 준비된 이스라엘에게 드디어 요단강을 건너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도 준비가 되어야 한다. 선교사로서 선교지에 나가기 전에 준비되어야 할 것들이 있다. 가장 먼저 준비되어야 할 것은, 여호수아서를 통해 본다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이다. 종교혼합주의나 종교다원주의는 선교지에서 나왔다. 복음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말씀의 왜곡이다. 상황화는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복음주의적 상황화는 ‘복음이 변질되지 않고 말씀이 선교지의 상황에 맞게 전달되는 것’이다. 여호수아는 철저하게 모세의 율법을 따라 살고자 하였다. 선교지에 나가기 전에 복음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더 철저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다음으로 준비되어야 할 것은 ‘강하고 담대한 마음’이다. 여기서 말하는 강하고 담대함은 토라의 말씀을 특히 신명기의 말씀을 전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삶에 적용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선교지의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때 자신의 필요에 따라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너기 전 그리고 건너고 난 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게 하는 것이었다. 이후에 살펴보겠지만, 이것이 결국 이스라엘의 정복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선교지는 영적 전쟁이 강한 곳이다. 영적 전쟁 가운데 두려워하면 선교지에서 성공적인 사역을 감당하기가 어렵다. 강하고 담대한 마음과 더불어 적들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전진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준비가 되었을 때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에게 앞으로 나아가라고 명령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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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11
  • [이충웅 교수의 선교칼럼] 여호수아와 선교3- 두 정탐꾼과 라합(수2장)
    여호수아는 여호와가 주시는 땅을 차지하러 가기 전에 정탐꾼 두 명을 보내 그 땅, 특히 여리고를 정탐하도록 한다. 이 당시 이스라엘은 싯딤에 진을 치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이 단계에서 요단 서쪽에 가본 적이 없으며,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전에 모세가 보냈던 정탐꾼 가운데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들이지만, 그들도 요단강을 건너 처음으로 만나게 될 장애물인 여리고 주위 땅에 대한 상세한 사항을 전혀 기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정탐꾼을 보내는 것은 어떤 지역을 공격할 때 일반적으로 해 오던 일이었다. 이 시점에서 여호수아는 여호와가 기적적인 방법으로 여리고를 넘겨주시리라는 암시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저 여리고를 점령하는 것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이 그 땅에서 마주하게 될 상세한 사항들 뿐 아니라 여리고 지역에 대해 정보를 얻기 위해 두 정탐꾼을 보낸 일은 너무도 정상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여호수아서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의 하나인 라합을 만나게 된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 기적적인 수단보다는 일반적인 수단들을 통해 역사하신다고 믿는 것이 믿음이 적다는 표시는 아니다. 하나님은 기적적인 일을 하실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런 방식으로 역사하실 것이라고 우리 편에서 추정하는 것은 주제넘은 것이다. 여호수아가 정탐꾼을 뽑을 때 그들이 가진 어떤 특정한 기술을 근거로 뽑은 것 같지 않다. 그들이 정탐꾼의 자질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가장 분명한 증거는 정탐꾼이라면 해야 할 일을 아무것도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분명 그들은 여리고의 방어 시설에 대한 정보를 알아낼 생각이 없다. 대신 처음으로 나오는 것은 그들이 라합이라는 기생의 집으로 가서 거기서 유숙했다는 것이다. 정탐꾼들이 라합의 집에서 유숙했다고 나오지만 사용된 동사는 종종 ‘함께 눕다’라고 번역된다. 정탐꾼들이 도착했다는 말이 그 성읍 왕의 귀에 들어가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왕은 라합에게 관리들을 보내어 그 집에 들어온 사람들을 끌어내라고 명한다. 그런데 라합은 그 정탐꾼들의 존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백하게 알았다. 라합은 그들이 숨어 있었지만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성문이 닫히기 전에 떠났다고 주장한다. 라합이 정탐꾼들을 위해 한 행동의 이유를 말하고 있다. 라합은 여호와가 하나님이라고 고백한다. 라합의 고백에는 두 개의 핵심 주제로 가득하다. 첫째, 라합은 여호와가 행하셨다고 들은 것을 말한다. 라합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이야기부터 모압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반대했던 두 아모리 왕인 시혼과 옥을 물리친 것에 이르기까지 지난 역사를 이야기한다. 라합이 이 사건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은 그 지역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둘째, 이것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라합이 여호와의 능력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여호와께 저항하면 멸망 당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라합은 여리고 뿐 아니라 그 땅에 사는 주민들까지도 두려움이 임했다고 강조하며 그래서 그들이 저항할 의지를 상실했다고 말한다. 라합은 이제 여호와의 편이다. 그래서 라합은 정탐꾼들이 라합에게 은총을 베풀기를 원한다. 라합은 정탐꾼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그들도 라합에게 친절을 베풀어 달라고 요청한다. 자기와 자기 가족이 살아남을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라합은 정탐꾼들에게 그렇게 할 것을 맹세해 달라고 청한다. 그 당시 문화에서는 맹세는 매우 진지하게 여겼다. 여호와께 맹세하라는 것은 하나님이 맹세 당사자임을 의미하며, 그럼으로써 그 맹세가 엄숙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따라서 라합에게 맹세는 정탐꾼들이 하는 약속의 신빙성을 보장하는 중대한 장치였다. 라합은 여호와에 대한 믿음을 나타내 보여서 사실상 여호와가 이스라엘에게 땅을 주실 때 심판을 받게 될 백성들에게서 빠져나와 이스라엘에 합류했다. 정탐꾼들이 여리고를 떠나면서, 나머지 이야기 부분이 빠르게 서술된다. 라합이 지시한 대로 정탐꾼들은 산지로 가서 관리들이 여리고로 돌아가기를 3일을 기다린다. 이 산지에는 동굴이 많아 숨기에 적합했다. 관리들은 요단강까지 갔으나 정탐꾼들을 찾지 못한다. 정탐꾼들은 요단 골짜기로 다시 내려와 강을 건너 여호수아에게로 돌아와서 그들이 겪은 모든 일을 말한다. 땅을 주시겠다는 여호와의 약속의 말씀이 확실히 이뤄진다고 그들이 보고할 때, 그것은 그들이 성공적인 정찰을 했기 때문이거나 혹은 심지어 그들이 주의 깊게 정보를 수집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의 보고는 라합의 고백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은 이 이야기에서 라합을 통해 그런 증거를 제공하시기를 기뻐하신다. 우리 역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람들과 장소들에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을 성취하시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의 신실함에 대해 격려를 받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라면 배제 시켰을 사람들을 하나님의 목적 안에 포함하시기 때문이다. 선교지에서의 삶은 새로운 사람들과의 연속적인 만남이다. 그러나 우리는 경험적으로 우리가 믿을 만한 사람들보다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들을 통해 도움을 받는 것을 보게 된다. 라합을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 라합의 입술을 통해 고백하게 하신 하나님, 무능한 정탐꾼이지만 그들을 사용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가 우리의 삶 가운데서도 일어나길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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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29
  • [이충웅 교수의 선교칼럼] 여호수아와 선교2- 양식을 준비하라 그리고 함께하라(수1:10-11)
    10 이에 여호수아가 그 백성의 관리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11 진중에 두루 다니며 그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양식을 준비하라 사흘 안에 너희가 이 요단을 건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사 차지하게 하시는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들어갈 것임이니라 하라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나서 여호수아는 즉시 이것을 백성 중에 있는 다른 지도자들과 나눈다. 여호수아에게는 하나님의 토라로 인해 권능을 받는 것도 필요했고, 하나님의 백성 가운 데 제공하신 지도자들도 필요했다. 여기에 관리들이 있는 것은 민수기 11장에 나오는 유형을 따르는 것 같다. 거기에 보면 모세의 사역을 나누기 위해 장로들이 임명되었다. 이 관리들에게 내린 지시는 간단하고 직접적이다. 그들을 진중을 다니며 백성들에게 양식을 준비하라고 명령했다. 사흘 안에 백성들은 요단강을 건너 여호와가 그들에게 주시는 땅으로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땅은 여호와께서 주시는 선물이자 또한 백성들이 차지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출애굽과의 주요 대조점이 나온다. 출애굽 때 백성들은 서둘러 떠나야 했으며 스스로 양식을 마련할 수 없었다. 반면에 요단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준비를 해야 했다. 출애굽이나 요단강을 건너는 것이나 둘 다 믿음의 여정이었다. 중요한 것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지시에 따르는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이다. 복음의 명령에 신실하고자 할 때, 특히 메시지를 잘 받아들이지 않는 세상에서 그렇게 하고자 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성령에 의지한다고 해서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선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보냄을 받는 선교사들의 준비이다. 많은 선교사들이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선교지로 나가기 때문에 실패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선교사 파송을 위한 훈련도 너무 형식적이다. 아무런 준비 없이 주님이 가라고 하실 때 가는 것도 믿음이라고 주장할 수 있으나, 선교에 필요한 여러 가지 사항들을 점검하고 준비하여 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더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직면한 문제가 있었다. 두 지파 반(르우벤, 갓, 므낫세)은 이미 요단강 건너편에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이곳은 약속의 땅이 아니었다. 그러나 여호와는 그들이 동족들과 함께 약속의 땅을 차지하는 일에 함께 한다는 조건으로 그들이 그곳에 자리하는 일을 승인하셨다. 이제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할 일은 그들이 이전에 했던 헌신을 상기시키고, 모든 지파가 확실하게 정착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들이 이전에 모세와 맺은 합의를 상기시켜야 했다. 그들은 가족을 그 땅에 두고 가나안 정복전쟁에 참여해야 했다. 그들은 그들의 가족과 그들의 가축을 떠나 약속의 땅을 차지할 사람들과 함께 요단강을 건너야만 했다. 그들이 정복전쟁에 참여하는 동안 여호와께서 자신들의 가족과 가축을 지켜 주실 것이라는 굳게 믿어야만 했다. 여호수아에게는 모든 이스라엘이 여호와가 주시는 땅을 차지하는 일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 특히 중요했다. 한 지파가 그들은 이미 필요한 것을 다 가지고 있으니 다른 지파를 떠나 자립하겠다고 할 수는 없다. 여호수아가 이 지파들에게 그런 식으로 말해야 했던 것은 그가 이미 이런 위험에 직면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들은 자기 땅을 두고 자기의 동포들과 함께 그 땅에 들어가야 한다. 여호와가 요단강 건너편에 정착한 지파들이 그 땅에서 안식을 취할 수 있게 하실 때에만, 그들은 여호와가 그들에게 이미 주신 안식처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백성이 하나 되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을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 중요했다. 이스라엘은 변화의 시점에 서 있다. 한 지도자에서 다른 지도자로 변하고, 하나의 생활방식에서 다른 생활방식으로 변했다. 하지만 일관된 것이 있다. 그들이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여전히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으며, 여전히 하나님께 순종하여 살아야 했다. 여호수아가 아무리 유능한 지도자라고 해도, 그들의 소망은 그들의 지도자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과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께만 달려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 됨이다. 토라의 말씀으로만 하나 될 수 있다.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하나 됨을 깨트린다면 결코 주님의 지상명령 성취를 달성할 수가 없다. 선교지에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주님의 이름에 의해 파송되어진 선교사들이 하나 되지 못하는 것이다. 필자는 인도 켈커타에서 선교를 하였었다. 5년 동안 선교하면서 가장 안타까웠던 것이 바로 선교사들끼리 하나 되지 못하는 것이었다. 아니 오히려 선교사의 가장 큰 적이 선교사들이 될 경우가 많았다. 우리는 왜 이렇게 많은 선교사들이 있는 데, 한국에 정말 많은 교회들이 있는 데 완전한 복음화가 이루어지지 않는지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한다. 잘 준비되는 선교사 그리고 하나 됨으로 우리에게 주신 주님의 지상명령 성취를 이루어나가는 우리가 되길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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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12
  • [이충웅 교수의 선교칼럼] 여호수아와 선교1- 강하고 담대하라!(수1:1-9)
    이번 주부터 여호수아서를 살펴볼 것이다. 퍼스(David G. Firth, 트리니티 구약학교수)는 여호수아서는 선교적인 책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선교 관점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12권의 역사서 (여호수아-에스더) 중 첫 번째 책인 여호수아는 모세 오경과 그 이후의 이스라엘 역사를 연결시키는 역할을 한다. 적군과 30여 차례 싸운 이스라엘 백성은 세 차례의 주요 전쟁을 통하여 여호수아의 탁월한 지도력 아래 한 가지 본질적인 교훈을 얻는다. 그것은 승리는 군사적인 힘이나 수적 우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그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통하여 얻어진다는 것이다. 이 책의 표제는 이 책의 중심인물인 여호수아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그의 원이름은 호세아(구원, 민13:8)인데, 모세가 그 이름을 여호수아(여호와는 구원이시라, 민13:16)로 고쳤다. 그는 또한 여호수아의 단축형인 ‘예수아’로 불린다. 여호수아는 히브리식 이름으로서 헬라식 이름은 예수스(예수)다. 그의 이름은 자신이 가나안 정복기 동안에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이기도 하지만, 주가 정복자이시라는 사실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반응이 중요한 것은 2-9절 전체가 여호와가 여호수아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진술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처음부터 끝까지 여호와는 여호수아에게 지시하시고 또 그를 격려하신다. 땅과 토라를 주시는 것은 여호와가 주도적으로 하시는 일이다. 여호와의 말씀은 두 개의 기본적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부분인 2-5절에서는 백성들이 여호와의 약속들을 확신하고 그 땅에 들어가도록 준비시키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 확신은 여호와의 명령과 함께 시작된다. 그 말씀은 “일어나라”와 “건너가라”이다. 여호와가 말씀하시는 복들은 모두 그분께 대한 순종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백성의 지도자가 되도록 부름을 받지만, 하나님은 모든 지도력이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다는 것을 즉시 상기시킨다. 두 번째 부분으로, 여호와의 말씀이 계속되는 데, 이제 여호수아에게만 말씀하신다(수1:6-9). 이 말씀은 신명이 31장에 나오는 여호수아의 위임 사건에서 나온 표현에 의지해서 말씀하신다. 여호와는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라고 세 번 말씀하신다. 그런 격려의 말이 필요한 이유는 이스라엘이 땅을 차지하는 일에는 큰 도전을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조상에게 약속하신 땅을 백성들이 소유할 것이라고 여호와가 여호수아에게 확신시켜 주시면서 강하고 담대하라고 격려하실 때, 이런 위험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담대함은 여호수아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전투에서 대담무쌍하게 행동하라는 것이 아니다. 여호수아에게 담대한 행동이란 여호와가 토라에서 계시하신 모든 것을 따라 온전히 사는 것이다. 신명기에서 말씀하신 내용들은 단순한 율법이 아니라 그것은 여호와를 위해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삶 전체를 위한 방식이다. 여호수아가 담대함을 발휘해야 할 곳은 바로 토라를 정확히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이해해야 하는 주로 도전적인 과업에서였다. 이것은 여호와가 민족에게 주실 땅을 차지하도록 민족을 이끌어야 하는 지도자로서 여호수아가 담당한 역할을 성취하는 데 대단히 중요했다. 여호수아가 토라 전체를 이해하고 그것을 적용하는 수단은 토라를 계속 묵상하는 것이었다. “묵상하다”(8절) 라고 번역되는 단어가 다른 곳에서는 “나직하게 말하다”라는 의미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함축하는 의미는 묵상이 근본적으로 경건의 시간을 갖는 것 같은 개인적 행동이기보다는 공동의 행동이었다는 것이다. 지도자로서 여호수아는 반드시 토라가 자신의 삶뿐 아니라 더 나아가 백성들의 삶의 중심에 있도록 해야 했다. 그렇게 해야 형통할 것이다. 시편 1편에 이와 완전히 똑같은 이미지가 나오는 반면, 말라기 4장에서 백성들에게 모세의 토라를 기억하라고 명령한다는 것을 주목할 때 이 묵상하는 습관의 중요성은 더 커진다. 히브리 성경에서 여호수아는 선지서(정경의 두 번째 구분)의 첫 번째 책인 반면, 말라기는 마지막 책이다. 그래서 선지서 전체의 경계선이 토라에 대한 신실함에 의해 표시되는 것이다. 그다음 시편은 이 동일한 주제로 정경의 세 번째 부분(시가서)을 시작한다. 이처럼 히브리 성경은 이 핵심 주제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그 주제가 여호수아에게 특별히 중요한 것이긴 했지만 여호수아만을 위한 것은 절대 아니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는 강하고 담대해야 한다. 이 강하고 담대함이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토라의 말씀을 지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특히 선교지에서 더욱 중요하다. 오늘날 선교지에서 모든 선교사들이 그리고 목회자들이 토라의 말씀을 삶 가운데 적용하려고 노력하고 있는지 질문해야 한다. 선교사들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혼자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토라의 말씀을 부지런히 모든 성도들과 나눠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삶 가운데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할 때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을 차지했던 것처럼 주님이 보내신 사명지에서 우리는 우리의 소명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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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04
  • [선교칼럼] 이충웅 교수의 ‘안디옥교회가 끼친 영향’
    누가는 사도행전 13장 초반까지 바울을 ‘사울’이라는 히브리 이름으로 부른다. 이유는 바울이 완벽한 히브리인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둔 것 같다. 태어날 때부터 로마시민이고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던 바울이 안디옥교회 내에서 사울이라는 히브리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까지만 해도 히브리적 사고를 가진 전형적인 유대인이었음을 강조하려는 사도행전 저자인 누가의 의도로 보인다. 다소에서 태어난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이지만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대부분 영위하고 있는 헬라식 문화를 많이 접하지는 않았다. 바울은 자신을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다고 소개하는 것으로 보아 히브리인이라는 사실을 소중하게 여겼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상황에서나 다메섹 환상 이후에도 바울은 변함없이 자신이 히브리인이라는 것을 소중히 여긴 것으로 보인다. 사도행전 11장에 바울은 바나바의 권유로 안디옥교회에서 함께 가르치는 사역을 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는 아주 성공적이었다. 사도행전 13장에서는 바나바와 바울을 포함한 5명의 다른 지도자들이 소개될 때 놀라운 것은 바울의 이름이 제일 뒤에 등장한다는 점이다. 바울이 가장 뒤에 기록된 것은 아마도 안디옥교회의 주요 지도자들 중에 서열이 가장 낮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부터 사도들과 사람들에게 인정받던 바나바를 통해 안디옥교회에 오게 되었지만, 기존의 다른 지도자들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입지가 높지 않았음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바울이 안디옥에서 사역한 이후 새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도행전 11장 22-23절에 따르면 바나바는 예루살렘교회의 보냄을 받아 안디옥으로 왔다. 그는 도착하여 공동체의 모습에서 어떠한 문제점을 지적하기보다 이방인과 유대인의 연합함에 만족함을 가지고 바울에게 함께 사역할 것을 제안하기까지 했다. 특히 바울은 여성까지도 사역자로 세우고 동역하였다는 것을 그가 기록한 서신들에 나타난다. 바울은 자신의 동역자들 가운데 상당수의 여성들을 세워 동료로서 존중하며 함께 사역하는 모습을 보인다. 바울은 여성의 지위가 인정되지 않던 시대적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성별을 차별하지 않는 모습에서 점진적으로 확대된 다문화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울의 선교사역에 여성들이 여러 모양으로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는 것이다. 우선 바울은 분명히 여성을 존중하고 신뢰하였다. 뵈뵈에게 로마로 보내는 편지를 맡겼다는 것은 그녀를 무척 신뢰하였음을 보여준다. 또한 브리스가의 믿음을 칭찬하며 자신의 동역자라고 말하였고, 그녀를 자신의 생명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한 것도 마찬가지로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유니아를 향해서는 자신보다 먼저 그리스도를 따르게 된 사도라고 칭하였다. 바울은 그 당시 우월감이 대단한 남성들도 쉽게 받지 못한 칭찬과 존경을 여성 사역자들에게 표하였고 심지어 그들에게 권위도 부여하였다. 집사, 목회자, 심지어 사도로까지 부르며 인정했던 이 여성 사역자들은 바울의 선교사역이 확장되고 안정되는 일에 도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교회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아마도 인종과 성별을 차별하지 않고 함께 동역 할 수 있었던 것은 안디옥교회에서 다문화적인 사역을 경험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즉, 당시 시대적인 상황에서 보기 힘든 안디옥교회의 다문화적인 여러 경험은 여성사역자를 비롯하여 이방인 사역자들에 대한 바울의 시각에도 변화를 주었다. 안디옥교회가 이방인과 유대인이 공존하는 다문화교회의 기반이 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시리아 안디옥이 많은 민족적 배경을 가진 자들이 공존하는 다문화적 도시인 것에서 주된 이유가 되었다. 당시 예루살렘교회가 유대교 또는 유대인 혈통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비춰볼 때, 시리아 안디옥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그리스도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는 것은 안디옥교회가 새로운 형태의 교회였음을 증명한다. 안디옥교회가 인종과 민족을 넘어 신분과 사회적 계층 또한 구분 없이 함께 공동체를 이룬 것은 그 당시 사회적으로도 새로운 이슈였고, 신약 어디에도 찾아보기 힘든 다문화적 교회의 모습이며 모델이 된다. 안디옥교회에서 보여진 다문화적 요소들이 초기 이방지역에 형성된 교회들 가운데 충분히 내포되어 있을 가능성을 짐작 할 수 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여러 지역의 초대교회들을 다문화적 해석이라는 새로운 관점으로 조명한다면 다양함이 공존하는 현시대적 상황들에 성경적인 대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한국 사회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듯이 모든 사회가 다문화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고 그 사회 속에 존재하는 교회 역시 이 문화적인 현상을 피할 수 없다면 안디옥 교회가 가지는 함의는 크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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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27
  • [선교칼럼] 이충웅 교수의 ‘안디옥교회의 다양한 지도자’
    시리아 안디옥교회의 다문화적 특색은 그 주요 구성원뿐만 아니라 주요 지도자들에게까지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인종, 계층 그리고 신분 등이 각기 다른 배경을 가진 지도자들이다. 이것으로 보아 성경적 관점에서의 다문화교회는 다양한 지도자들과 깊은 상호 관련성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사도행전 13장 1절에 기록되어 있는 안디옥교회의 주요지도자들은 바나바, 시므온, 루기오, 마나엔 그리고 바울이다. 이어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헬라파 유대인이며 구브로 출신의 바나바, 다소 출신 정통 바리새파 히브리인 바울, 흑인으로 추정되는 시므온, 구브로 출신의 하층민 루기오, 그리고 헤롯과 같은 이두매 출신의 귀족 마나엔까지 안디옥교회 지도자들의 배경은 다양하다. 따라서 각자의 생활방식과 사고하는 기본 틀까지 다양했을 것으로 보인다. 출신 지역부터 인종까지 다양한 지도자들로 구성된 안디옥교회는 서로 포용하기 쉽지 않은 아주 특별한 구조다. 주요 지도자들의 다문화적 배경만으로도 시리아 안디옥은 이주민들이 모여 만들어진 도시임을 알 수 있다. 안디옥교회의 주요지도자들에서 찾을 수 있는 몇 가지 특이점이 발견되는데 그 중 하나가 이름을 헬라식 표기와 히브리식 표기로 병행하여 각기 다르게 사용하고 있는 점이다. 히브리 이름인 ‘시몬’을 헬라식 발음인 ‘시므온’으로, ‘바울’은 히브리식 이름 그대로 ‘사울’이라고 사도행전 13장 중반까지 표기하고 있다. 아마도 활동하는 지역에 따라서 특정한 이름을 표기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름 앞에 붙는 별명 또한 지도자들의 사회적 특징을 묘사해 주는 것으로 짐작된다. 하층민으로 추정되는 루기오와 시므온, 그리고 헤롯왕의 측근이었던 마나엔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계층과 지위에 따라 수식어가 다양하다. 따라서 각자 자라난 환경의 차이로 인한 사고방식과 생활방식 등이 아주 다양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바로 이방인과의 철저한 분리에 익숙한 유대인들의 정체성 중 하나인 배타적 민족주의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과 계층 간의 갈등 또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야거스마(Hendrik Jagersma)에 따르면 당시 팔레스타인은 직업적 계층 또는 사회적 신분에 따라 받는 차별이 존재했다고 지적한다. 노예들과 자유민들 사이의 간격, 사회적인 지위에 따른 대우 그리고 민족과 출신에 따른 차별이다. 하지만 초창기 시리아 안디옥교회 구성원들 간에는 팔레스타인에서 보이던 이방인이나 사회문화적 배경에 따른 차별들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으며, 다문화적인 구성원들 간에 있을 법한 갈등과 대립 관계도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안디옥교회 지도자들의 다양한 인종과 신분적인 배경이 다문화적 구조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주요 지도자들이 여러 민족과 여러 계층의 사람들로 이루어진 안디옥교회의 다양성은 성경 어디에도 유사한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브루스(Frederick. F. Bruce)는 초창기 안디옥교회를 할례와 음식법에 어떠한 율법적인 규제가 없었고 유대인과 이방인에 대한 인종적인 차별 또한 없는 순수한 믿음의 공동체로 보았다. 즉, 이방인의 전도자가 되기로 이미 결정한 사역자 바울에게 안디옥교회의 모습은 차별이라는 벽을 넘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이상적인 교회의 모델이었다. 브루스의 주장에 따르면 다문화적인 시리아에 세워진 안디옥교회 공동체는 유대교 전통의 중심에 세워진 예루살렘 교회와 사회문화적으로 볼 때 출발부터 다른 정서를 가지고 있었다. 정통바리새파였던 바울이 안디옥교회에서 다양한 출신의 지도자들과 함께 사역한 이후 다문화적 성향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바울이 안디옥교회에서 파송 받은 이후 함께 동역한 사역자들의 출신 및 인종이 다양한 배경을 가진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바울은 이방인들을 비롯하여 다문화가정 출신으로 설명되는 디모데까지도 포용하여 함께 사역하는 자리의 범위를 협소하게 만들지 않았으며 누구든지 손을 내밀어 함께 사역했다. 그로 인해 바울은 이방인 또는 다문화가정 출신이 교회의 지도자로 세워지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그리스도인들이 속한 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 짓지 않고 동등한 관계라는 것이 바울이 동역자들을 통해 보여준 것이다. 당시 바울이 활동한 지역들을 중심으로 살펴 볼 때 사회 전체적으로 각 집단들 대부분이 다문화적인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다. 유대인 집단은 여전히 다른 문화를 배제하고 유대교적인 문화를 중심으로 형성하려고 하였지만 바울은 유대교적인 문화를 우선시하는 것을 탈피하여 인종과 계층, 민족을 넘어 회심한 그리스도인 중심공동체와 지도자들로 재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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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14
  • [선교칼럼] 이충웅 교수의‘다문화 안디옥교회의 형성’
    사도행전 6장 1절에 나타나는 예루살렘교회의 중요한 사역인 과부들을 향한 구제 활동 중 히브리파 과부에 대한 헬라파 과부들이 불만을 제기하며 생겨난 갈등의 해결책으로 사도들은 구제 활동을 감당할 헬라파 그리스도인 출신 가운데 일곱 집사를 세운다. 그때 세워진 집사 중 한 명인 스데반은 이후 회당에서 자신과 같은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모함을 받게 되고 산헤드린 공의회의 독단적 판결로 인해 순교한다. 사도행전 8장 3절에서 사울이 스데반의 순교 이후 예루살렘에서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러 다녔다는 기록으로 보아 심대한 박해를 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예루살렘교회의 헬라파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피해 흩어지게 되며 가능한 지역으로 최대한 멀리 이동하거나 대도시에 숨어 지낼 수밖에 없었다. 이때 예루살렘을 떠나 이방지역으로 흩어지게 되는 과정에서 일부 헬라파 그리스도인들은 인근에 모여 사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있는 곳으로 이주한다. 흩어진 헬라파 그리스도인들에게 시리아 안디옥의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공존하는 사회적 상황은 가장 적합한 거주지였다. 이처럼 안디옥교회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예루살렘교회를 향한 박해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 그리고 박해가 시작되며 대부분 헬라파 유대인들이 빠르게 흩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초창기 예루살렘교회에 자신들의 소유물 대부분을 헌금하였고, 그로 인해 박해의 상황에서 다른 지역으로 신속하게 이동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박해를 피해 빨리 이동하게 된 상황이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이방 지역으로 복음을 전파할 수 있게 만든 변곡점이 된 것이다. 사도행전 11장 19절의 유대인을 지칭하는 헬라어 ‘이우다이오스’(Ἰούδαὶὸς)는 ‘이우다스’(Ἰούδας, 유다)에서 유래되었으며, ‘유대의, 유대인의’이란 뜻을 가진다. 오로지 유대 민족에게만 해당하는 것으로 이방 민족 가운데 유대교 입교자는 해당되지 않는다. 즉, 사도행전 11장 19절 시리아 안디옥에 거주하는 유대인 그룹의 정체는 유대 인종들만 지칭하는 것이다. 여기서 누가가 오직 “유대인에게만”이라고 한정지어 말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 당연했을 것이다. 따라서 키틀(Gerhard Kittel)은 사도행전 11장 19절에서 언급된 유대인들이 당연히 디아스포라 출신이며 혈통적으로 유대 인종이었다고 본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11장 19절에 나타나는 “유대인에게만”이라는 언급은 복음이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먼저 전해졌다는 순서적 부분을 강조하기 위한 누가의 역사적 표현으로 간주할 수 있다. 순서적으로 이들에게 먼저 전해졌다는 것은 예루살렘으로부터 핍박을 피해 이동한 헬라파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시리아 안디옥의 유대인 집단에 안정적으로 접근하기에 용이했다. 그래서 큰 어려움 없이 정착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헬라파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시리아 안디옥에 살고 있었던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은 시간상으로 아주 자연스러운 상황이다. 문제는 사도행전 11장 19절에서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고 난 뒤 20절에 이방인에게도 “주 예수를” 전파했다는 기록이다. 20절에 언급한 헬라인의 정체가 헬라 민족을 지칭하는 것인지 아니면 헬라화 된 이방인들을 가리키는 것인지 논란이 있다. 우선 여기서 헬라인을 지칭하는 헬라어 ‘헬레나스’(Έλληνάς)는 기원전 700년 전부터 헬라 민족을 지칭하며 사용된 명칭이다. 이는 오직 헬라인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고 헬라화 된 이방인들을 가리켜 ‘헬레나스’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구분이 가능하며 이 지칭은 인종적인 헬라인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20절에 이방인을 지칭하며 사용된 헬라어 ‘헬레니스타스’(Έλληνιστάς)는 평소 헬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인 ‘헬레니스테스’의 복수형이다. 헬레니스테스는 헬라의 풍습과 관습 그리고 일상에서 헬라어를 사용하는 자들로, 위더링톤(Ben Witherington III)에 따르면 ‘헬라주의자’를 일컫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헬레니스타스는 신약 성경에서 3회 나오는 데 모두 사도행전에서 사용되었다. ① 행 6:1 “그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헬레니스타스: Έλληνιστάς)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② 행 9:29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헬레니스타스: Έλληνιστάς)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③ 행 11:20 “그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헬레니스타스: Έλληνιστάς)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사도행전 6장 1절은 헬라파 유대 그리스도인들이며, 사도행전 9장 29절은 비그리스도인 헬라파 유대인들을 지칭한다. 각각 정체성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모두다 ‘헬레니스타스’를 사용 한 것이다. 그럴 때 전통적인 해석의 문맥상 모두를 헬라주의자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사도행전 11장 20절의 ‘헬라인’이라는 표현은 워필드(Benjamin B. Warfield)의 주장처럼 헬라화 된 다양한 민족들로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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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05
  • [선교칼럼] 이충웅 교수의 ‘21세기 다문화 선교의 모델’
    요즘 우리 주변에 많은 외국인들이 있다. 현재 공식적인 숫자만 200만 명이 넘는다. 불법체류자까지 포함하면 훨씬 더 될 것이다. 30년 전만 해도 외국인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거리에 나가면 너무도 쉽게 볼 수 있다. 이미 우리나라는 다문화 사회가 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을 선교의 대상으로 여기고 적극적으로 사역하는 교회는 많지 않은 것 같다. 무엇보다 그들을 위한 선교가 돕는 선교나 봉사하는 선교에 국한되어 있다. 예를 들면 한국어를 가르치는 사역이라든지 고부간의 갈등을 위해 다문화상담을 하고, 의료적인 도움이나 생활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다. 필자는 선교라고 할 때 가장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 지도자를 세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코로나19로 인해 현지 선교는 어려워졌다. 대부분의 선교사들도 한국에 들어와 있는 실정이다. 선교 현지에 있다 할지라도 코로나19로 인하여 적극적인 활동은 어려운 실정이다. 물론 현지 선교도 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한국에 들어와 있는 다문화 사람들을 선교하여 그들을 다시 그들의 나라에 선교사로 파송하는 것에 힘을 모으는 것도 중요하다. 필자는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사도행전에 나와 있는 안디옥교회를 통해 다문화선교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무엇보다 다문화 지도자들을 통한 선교에 집중하여 제시하고자 한다. 다문화교회인 안디옥 교회 사도행전을 기록할 당시 사회적인 부분과 함께 선교적으로 화제가 된 것은 교회 확장이었다. 그 과정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박해로 죽은 스데반 순교이후 헬라문화와 로마문화가 공존하는 이방지역으로 흩어지게 된 것이 시작이다. 이방지역에 세워진 여러 교회 가운데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초창기 시리아 안디옥교회를 대표적으로 소개하며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공동체를 이룬 최초의 다민족교회로 주목한다. 다민족교회는 다양한 문화, 다양한 민족, 다양한 계층들이 유입되어 유대인과 이방인이 공존하는 특징을 가진 다문화적인 교회공동체다. 그러므로 안디옥교회의 형성과정과 구성원의 비율 그리고 구조적 형태에 따라 다문화적인 교회공동체로 볼 수 있는지 또는 소수의 이방인이 포함된 유대인교회공동체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평가가 달라진다. 평가하는 방법은 당시 유대인중심의 초대교회가 이방지역으로 확대되며 교회의 중심으로 이방인들이 유입될 수 있었던 지역적 배경 및 사회적 상황에 대한 분석이다. 그렇다면 시리아 안디옥의 사회문화적인 영향이 다문화교회가 되는 부분과 관련이 있는가? 안디옥교회의 형성된 과정과 구성원은 다문화적인가? 구조적으로 다문화교회 공동체를 이룬 안디옥교회의 대표적 지도자들의 특징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해 먼저 안디옥교회공동체의 형성과정과 인종적 측면에서 어느 정도의 유대인과 이방인 비율로 그 공동체가 구성되었는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안디옥교회가 다민족교회라는 사실을 다소 간과한 채 안디옥교회의 다문화적 구조에 대한 연구보다 주로 바울의 선교적인 사건에 더 관심을 가져 왔다. 그러므로 성경적 다문화교회 모델로 초창기 안디옥교회를 연구하여 다양한 민족, 다양한 인종, 다양한 계층의 구성원과 지도자들이 갈등 없이 공존한 것을 밝힌다면 충분히 보편적 모형이 될 것이다. 시리아 안디옥은 당시 로마 제국 3대 도시 중 하나로 로마, 알렉산드리아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거대 도시로 로마의 지방관이 거주하는 행정도시며 중심거점 역할을 하는 곳이다. 안디옥은 약 50만 명의 인구를 가졌으며 예루살렘으로부터 대략 480km 떨어진 곳이다. 특히 이곳은 로마제국의 다른 주요 도시들과 같이 유대인과 이방인간의 접촉점 역할을 하는 곳이며, 서로 다른 민족과 종교들이 공존하여 상호 영향을 끼친 도시이다. 초기 건설부터 많은 이방인들이 몰려든 시리아 안디옥은 현지인부터 헬라인, 이집트인 등 여러 인종과 민족이 공존했지만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도시 형성 초기부터 자리를 잡고 있었기에 그들의 신분은 타민족에 비해 안정된 생활을 하였다. 키너(Craig S, Keener)는 당시 시리아 안디옥에 거주하는 유대인 인구를 대략 6만 5천 명 정도로 추정한다. 도시에서 인구 비율이 10% 이상이나 차지했다면 안디옥에서의 유대인들은 정치적 위치와 사회적 신분이 상당히 안정적이었을 것이다. 시리아 안디옥을 사회학적으로 평가하자면 인구수와 인구밀도가 높아 특정 민족공동체간의 공간적 분리나 독립성이 어려웠다. 즉, 다소 협소한 주거 환경으로 인해 여러 인종과 민족이 섞여 생활하는 다문화도시였다. 권주은 박사는 이 같은 다문화형태를 갖춘 시리아 안디옥에 세워진 안디옥교회는 초대교회 가운데 최초로 형성된 다민족교회 공동체로 유대인이 다수를 차지하지 않는 다문화공동체라고 주장한다. 이곳으로부터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고, 위대한 바울의 선교도 시작되게 되었다. <그간 선교칼럼을 연재해 오던 조귀삼 교수의 뒤를 이어 금번호부터 이충웅 교수가 칼럼을 맡게 됐음을 알려 드립니다. 본보는 지난 20여년 넘게 선교칼럼을 연재하며, 한국교회 선교 발전에 큰 공을 세우신 조귀삼 교수님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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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26
  • [선교칼럼] 예수님의 분노에서 배워야 할 교훈
    인류와 우리 각자 개인의 구원자이신 예수님도 때로는 분노 하신 일이 있으셨다. 예수님의 분노는 하나님께 속한 것들과 또한 실로 하나님의 임재 그 자체가 업신여김을 당하고 있거나 마땅히 그분께 드려야 할 경외심이 부인되고 있는 현상을 보심으로써 생겨난 것이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분노는 범죄 하여 죄인이 되어버린 인간에 대한 항구한 사랑을 드러내는 구원의 도구로 작용하였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분노 역시 가난한 자들이 외면 받고, 불의가 만연한 사회로부터 사람들이 벗어나길 바라는 마음에서 나왔으며 불합리한 상황들을 극복하고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시키고자 하였다. 이처럼 예수님의 분노는 인간의 구원을 바라는 것이었기에 어떤 희생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가 바랐던 것은 자비를 드러내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노력은 그가 사람들로부터 겪게 되는 분노에 어떠한 반응을 보였는지를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 예수님은 외식하며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면서 백성들의 지도자들이라고 자청하는 그들을 향하여 선지자적인 분노로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분노는 자연에 존재하는 생물과 위선으로 가득찬 종교 지도자들을 향한 것이었다. 마가복음 11장에 보면 먼저는 자연에 대한 본노를 발하신다. ‘이튿날 저희가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예수께서 나무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이는 열매 맺지 못한 무화가 나무에게 향하신 주님의 분노였다. 다음은 종교 지도자들에게 대한 분노였다. ‘저희가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아무나 기구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치 아니하시고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 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라고 책망하신다. 이와 같은 책망은 당신 실권을 쥐고 있던 종교지도자들의 분노를 폭발시켰고. 그래서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의 죽임처럼 예수님도 십자가 형틀로 가시게 되었다. 마가복음 3장 1-6절까지의 내용을 보면 예수님이 ‘분노’하셨다는 단어가 명시되어 있다. 예수님은 안식일 날 회당에서 손 마른 사람을 만나 그를 불쌍히 여기사 고쳐주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안식일 날 병자를 치유하신 예수님을 향하여 율법을 어겼다는 것을 기회로 삼아 바리새인들은 시기, 질투에서 나오는 악의적인 분노의 칼을 품고 있었다. 이 본문에는 두 가지 분노가 나오는데 하나는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바리새인들의 파괴적인 분노이고, 또 다른 하나는 시기와 질투에서 나오는 바리새인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의분이다. 베드로의 첫째 서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벧전 2:23)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이 당신에게 표출한 분노의 자리에 사랑이 흘러들어 갈 수 있도록 사랑의 율법을 실현시켰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분노는 표출과 수용이라는 두 가지 관점으로 설명된다. 첫째는 예수님께서는 정의를 위해 분노하시는 모습이다. 둘째는 그렇지만 나약하고 힘없는 병자들을 향해서는 그의 분노는 사랑으로 바뀌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마가복음 1장에 보면 문둥병자를 고치시면서 하시는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다. ‘한 문둥병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곧 문둥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오늘도 우리 성도들은 사회적 상황 속에서 분노와 사랑이라는 두 가지 구조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 우리는 정치를 보면서, 사회를 보면서, 지도자들을 보면서 그리고 심지어 종교 지도자들을 보면서 분노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분노의 마음은 또 다른 분노를 낳아서 결국 우리 자신을 패인으로 만들게 된다. 따라서 예수님이 주셨던 교훈인 사랑의 마음을 갖고 삶을 이어가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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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30
  • [선교칼럼] 조귀삼 교수의 ‘분노의 사회문화적 요인 극복의 선교’
    최근에 우리사회는 서울과 부산시장을 새롭게 뽑는 보궐선거를 치르면서 시민들의 분노라는 표현을 통한 표심이 드러났다고 말한다. 분노는 언어적 차이, 문화적 차이, 감각의 차이 등 문화에 따라 다르게 경험된다는 것은 많은 문화적 연구들에 의해 밝혀진 바 있다. 특히 서구 문화와 한국 문화는 매우 다른 문화권에 속한다. 집합주의 문화와 개인주의 문화에서 분노를 경험하고 표현하는 것이 많은 차이를 보여준다. 문화는 한 개인의 사회적 학습의 과정에서 가장 기본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서구인과 한국인의 기본적 가치관, 신념 및 태도의 차이를 결과하는 근원적인 변인이 된다. 다양한 사회문화 간에 보편적으로 공통적인 것들도 있지만, 그 사회만의 독특한 기준이나 규범, 관습들이 있기 마련이다. 이러한 부분들이 서로 다른 사회문화마다 서로 다른 내용의 인지적 평가체계들을 구성하고, 이는 분노의 원인과 표현 방식 등에 중요한 변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회가 분노를 언어적 수단으로 표현하는 것을 지지해주는 사회라면, 이 사회의 사회적 규범은 사회 구성원들의 분노표현이 건전한 방법으로 처리되는 데에 도움을 주게 된다. 그러나 폭력적 행위를 강화시켜주는 규범을 가진 문화라면 분노를 물리적이고 파괴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조장하게 되는 것이다. 개인마다 다양한 분노의 경험과 표현을 설명해주는 가장 핵심적인 변인이다. 어린 시절 양육 환경은 한 개인의 성격 특성과 인지구조의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핵심적인 변인이다. 부모나 중요한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분노에 관한 학습이 이루어지고, 심리적 외상이 발생하면, 이것은 그 개인의 가장 중요한 분노의 원인이 된다. 또한 아동은 부모로부터 분노의 내용과 표현 방법에 대한 기본적 각본을 학습한다. 또한 부모의 양육태도가 강압적이고 제한적일 경우 아동은 보다 더 강도 높고 빈번한 분노를 경험한다. 어린 시절의 양육환경은 복합적으로 한 개인이 인지구조의 형성에 영향을 미쳐서 분노에 취약한 비합리적 신념 및 태도를 결과한다. 대상관계이론은 이것을 “이마고” 이론으로 설명한다. 어린 시절의 분노 관련 기억과 이미지는 분노 유발의 인지 내용을 구성하고 있는 핵심적 원인이 된다. 이것이 환경으로부터 오는 외적 자극에 의해 촉발될 때, 분노는 과거의 해결하지 못한 정서와 관련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릴 때 언어적 학대를 받은 성인이 상사의 충고에 몹시 화를 내는 경우가 있고, 또 자녀에게 습관적으로 분노를 표현하는 엄마는 어려서부터 자신의 부모가 자기에게 습관적으로 퍼붓던 분노를 학습한 결과, 자신의 자녀에게 자기도 모르게 분노를 쏟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사회학습이론은 폭력행위가 왜 세대에 걸쳐서 나타나는지에 대해서도 적절히 설명해준다. 폭력적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자신의 욕구 충족의 수단 가운데 하나로서 폭력이 있을 수 있음을 보고 배운다. 가정 안에서 아버지의 폭력에 노출되어서 성장한 아들이 의식적으로는 폭력 행위에 대해 미워하면서도 막상 결혼해서 자신의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사례 역시 이들의 이론에 의해서 아주 잘 설명된다. 분노의 문화적 요인으로는 서로 다른 문화의 사람들은 서로 다른 사건을 보고 분노하며 다른 방식으로 분노를 표출한다. 이것은 민족과 사회 경제적 집단들과 지역에 따라 각자 다르다. 예를 들어, 분노를 표현함에 있어 여자아이들은 보다 적게 표출하도록 학습되는 반면, 남자아이들은 공격성이 남성다움이라고 배운다. 특히 한국 문화는 유교적 관습에 의해서 여자는 참는 것이 미덕이라고 여겨왔기 때문에 많은 여성들이 한을 쌓아 두면서 살아왔다. 모든 문화는 감정이 어떻게 통제되고 표현되는 가에 대한 가치와 규칙을 유지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분노가 소극적으로 누적되어 분(忿), 또는 한(恨)의 개념으로 발달 하였는데, 이것은 죽어서도 풀어야 한다는 독특한 전설을 갖고 있다. 이것은 한편으로 권선징악, 인과응보의 강렬한 윤리 의식이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반면에 다른 한편으로는 억울한 것이 죽어서 귀신이란 힘 있는 존재로 나타나 그 원한을 푸는 것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다분히 권위주의적이며 타계적, 도피적, 소극적인 성격을 띤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우리 성도들은 사회적 문화적 분노를 사랑으로 바꾸는 작업이 선교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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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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