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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칼럼] 잘못된 분노를 다스리는 키는 성경
- 세속주의 학자들은 인간의 분노가 동물의 격노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한다.동물학적 관점에서는 인간의 분노가 동물의 격노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한다. 즉 인간의분노는 종의 생존에 도움을 주기 위해 진화된 본능이라는 것이다. 동물생태학자인 로렌즈(Lorenz)는 그의 저서 「공격에 관하여」에서 분노에 대하여 인성론적 접근을 위한 논조를 펼치며 분노를 타고 나는 것으로 보았다. 로렌즈와 같은 동물학자들은 공격성을 종의 생존에 도움을 주기 위해 진화된 본능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공격성을 동물과 인간에 내재하는 투쟁본능이라고 정의하고 자신의 생계와 영토를 위한 싸움, 번식에서 최우수자가 되기 위한 경쟁, 공동체 내에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힘의 지배에 의해 공격성이 나타난다고 하였다.로렌즈의 공격적 본능에 대한 대부분의 주장은 군집개념에 기초하며, 동종의 많은 동물들과 함께 작은 공간에 놓인 동물들은 필연적으로 공격적으로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분노에 대한 이 동물적 견해를 강력하게 지지한 사람이 바로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이다. 그는 인간의 모든 정서의 뿌리가 하등 동물에서 발견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이러한 주장은 인간의 기원을 하나님의 창조물이 아닌 진화론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방식을 택했음으로 당연한 귀결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가설 속에서 만들어진 비뚤어진 이론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 하면 진리인 성경은 분명히 인간의 기원에 대해서 창조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으며 동물들을 비롯한 다른 피조물들을 다스려야 할 존재라고 말씀한다. 인간은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으며(창1:26-28), 하나님께서 지으신 하등동물을 포함한 피조물을 하나님을 대신하여 다스리며,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복종하고 예배하며 살아야 할 존재이다. 이러한 존재가 어떻게 포악하고 살인마가 되었는가? 최근에는 세 모녀를 살해한 악랄한 인간의 모습이 TV 화면에 보도되었다. SNS를 통해서 알게된 소녀를 잘 만나주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택배 배달원으로 가장하여 집안에 들어가서 세사람의 가족을 차례대로 죽였다. 이 사건은 결혼 적령기에 접어든 자녀를 둔 부모로서는 크나큰 충격으로 받아드릴 수 밖에 없다. 결국 이러한 동물적 행동을 지닌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또한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 이는 곧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즉 인간이 지닌 한계성을 먼저 알아야 한다. 최초의 인간은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음으로 하나님께 반역하였다(창2:17,3:1-7).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범죄하게 되었다. 이 범죄의 결과 인간본성에 전적인 타락을 가져왔다(창6:5; 시14:3; 롬7:18). 그 죄가 인간의 전인(全人)에 전염됨으로써 본성 가운데 영향을 받지 않고 남아있는 부분이 없게 되었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욥14:4; 렘17:9; 마7:15-20; 롬8:5-8; 엡4:17-19). 인류의 조상인 최초의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그의 후손인 인류에게 부패한 본성을 물려주게 된 것이다. 인간의 창조와 타락의 관점에서 살펴볼 때, 분노는 그 본질상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은 인간의 부패와 오염의 영향아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동물적인 본능이 아니라 창조된 인간의 타락한 본성 안에서 분노문제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타락한 인류를 구속하여 죄에서 자유케 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제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분노감정을 올바르게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분노는 동물적인 충동으로서 다스릴 수 없는 정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다스릴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잘못된 분노는 정상적인 삶의 패턴을 무참히 파괴해 버린다. 삶의 기초가 되는 가족간의 경우도 마찬가지 이다. 부모와 자녀 간에, 부부간에, 이웃과 이웃 간에, 국가와 국가 간에도 분노로 말미암아 갈등을 일으켜서 궁극적으로 전쟁에 이르게 한다. 이제 분노를 분오를 성경으로 다스리는 믿음의 시대를 유지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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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칼럼] 잘못된 분노를 다스리는 키는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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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칼럼] 거룩한 분노를 활용하는 지혜
- 요즈음 대부분의 사람들은 왠지 모르게 분노로 가득찬 모습을 보게 된다. 이 분노는 어떠한 특정한 사람들을 통해서 올수도 있지만 사회적 분위기가 국민들을 분노하게 만들 수 있다. 사회적 분위기란 코로나로 인한 비대면과 자유롭지 못한 활동에도 있지만, 공직자들의 땅 투기로 말미암아 생긴 병일 수도 있다. 필자는 오늘 분노가 가진 사전적 의미를 먼저 설명함과 아울러 우리가 이러한 분노를 예수님은 어떻게 처리하셨는가에 대해서 기술하고자 한다. 분노의 사전적 의미는 “분개하여 몹시 성을 냄” 또는 “자기 요구의 실현을 부정 및 저지하는 것에 대한 저항 결과 생기는 정서”이다. 여기에서 특징적인 것은 ‘성내다’, ‘저항하다’처럼 동사적 표현을 통해서 분노의 주된 성질인 ‘겉으로 드러내는 것’이 드러난다는 점인데, 사실 일상에서 분노는 단어의 사용으로 의미가 전달되기 보다는 표출된 인간의 행동양식에 의해서 드러난다. 그렇기 때문에 분노의 개념을 명사적 표현으로만 한정시켜 정의하는 것은 다소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분노의 영어식 표현인 ‘Anger’는 노르웨이의 ‘angre’에서 유래되었다. ‘angre’는 고어로서 ‘affliction’,즉 ‘고통’이나 ‘고뇌’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분노의 독일 단어인 ‘anger′’는 ‘사악한, 위험한(wicked)’의 의미를 지닌 ‘arg’에서 유래되었는데, 불의한 자극에 대한 감정적인 반응을 말한다. 분노는 그 어원적으로 볼 때, 불쾌하거나 불만족스러운 원한이나 격노, 분개를 의미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추가적으로 분노에 관한 관용적인 표현을 살펴보는 것은 도움이 될 것이다. 먼저, 분노는 ‘두 눈을 부릅뜨다’ 또는 ‘눈이 뒤집히다’와 같은 신체변화와 관련되어 나타나는데, 분노가 주로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대상으로부터 자신을 방어 하거나 그 대상에게 공포감을 전달하기 위한 목적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음으로 분노는 ‘주먹을 불끈 쥐다’ 또는 ‘이를 갈다’와 같이 공격적인 행동과 연결되어 나타나는데, ‘주먹’은 인간의 신체부위 중에서 가장 공격적인 도구로 사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 또한 씹는 것을 속성으로 주먹과 함께 공격적인 성향을 드러낸다. 분노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인간의 영혼은 ‘이성적인 부분’과 ‘비이성적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비이성적인 부분은 욕구적인 부분으로서 ‘욕망’, ‘기개’, ‘소망’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의 특징으로써 욕망은 이성적인 부분과 융화되지 못하는 반면 소망은 이성적인 욕구이자 이성적인 부분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 마지막으로 기개는 분노와 관련된다. 그렇다면 인간을 ‘이성적 동물’로 규정한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노를 어떻게 보았을까? 그는 분노를 얕잡아 보임을 당해서 그에 대해 보복하려는 욕구라고 규정한다. 그런데 이 분노의 특징은 보복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따라서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보복을 그저 개인의 욕심에 의해서만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와 함께 상대방을 비롯한 제3자 모두가 당사자가 느끼는 모욕에 대해서 인정했을 경우에만 허용되어진다고 본다. 즉, 정당화 될 수 있는 분노는 어디까지나 모욕이 기본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침해했다는 이성적인 판단을 거친 뒤 그것이 명백한 사실로서 공동체에 받아들여지는 경우에 해당한다. 그렇게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욕구 차원을 넘어 일어난 분노는 “정의로운 행위”로 받아들여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결국아리스토텔레스는 분노를 좀 더 객관적인 입장에서 바라보고자 노력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주관적인 판단이나 감정의 움직임에 한해서 분노를 이해하지 않고 보복이라는 측면에 대한 연구를 통해 분노가 합당한 가치를 지닐 수 있음을 이끌어내어 한 개인 뿐만 아니라 공동체에 있어서도 타당한 행위로 받아들여 질 수 있는 길을 제공해 주었다. 예수님도 때로는 분노의 감정을 갖고 사람들을 대한 적이 있었다.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에게 “회칠한 무덤” 이라 던지,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라고도 말씀을 하셨다. 이와 같은 말씀은 바리새인들의 신앙에 대한 평가를 가감 없이 판결하는 모습이라고 필자는 본다. 결국 우리들도 잘못된 사회적 풍조 앞에 주님처럼 가감없이 평가하고 교정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다. www.worldc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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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칼럼] 거룩한 분노를 활용하는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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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칼럼] 분노를 다스리는 목회 상담의 선교
- 목회와 선교 현장에서 분노에 대한 상담을 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상담학자인 제이 E. 아담스의 분노 이해는 고전과 같은 이론이다. 필자는 오늘 기독교상담학자들 가운데 특히 신학자이며 성경적 권면 상담을 주장하는 그의 “분노는 다른 사람의 행동에 대해서 반응하는 감정의 전달로서 적절한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그의 이론을 중심으로 글을 엮고자 한다. 제이 E. 아담스는 다른 사람을 향해서 분노를 발산하는 것과 내면화 하는 것은 괴롭고 원망을 하게 된다고 말한다. 제이 E. 아담스는 그의 저서 「상담학 개론」에서 “본노는 본질적으로 죄가 아닌 것과 죄가 될 수 있다”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다. 첫째로, 분노는 본질적으로 죄가 아니다. 분노는 자체가 죄가 아니다. 우리는 이것을 사고 바울이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엡 4:26)라는 말씀에서 ‘분을 내는 것’과 ‘죄를 짓는 것’을 조심스럽게 구별하는 것으로부터 배운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분노하심과 진노하심에 관해서 많이 말하고 있다. 사무엘상 11장 6절에서, 우리는 사울에게 성령이 임하시므로 분노가 크게 일어나서 하나님의 사역을 수행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 이외에도 하나님의 말씀은 주 예수께서 분노하셨다는 사실을 계시하신다. 하나님의 집에서 돈 바꾸는 자들을 내어 쫓도록 만든 이 분노는 “그를 삼켰을”(요2:17)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분노하심으로”(막 3:5) 둘러보셨다고 마가는 우리에게 전해준다. 분노에는 손해를 끼치거나 파괴적인 정서 혹은 감정인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의 정서적인 성질(emotional makeup)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모든 정서는 성경의 원리들을 따라서 적절하게 사용 될 때에 건설적인 것이 된다. 주 예수님의 분노는 분명히 예수님의 지체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정서는 우리가 성경적인 제한들과 구조들과 조화를 이루도록 표현하지 못할 경우에는 파괴적인 것이 될 수 있다. 둘째는, 분노는 죄가 될 수 있다. 사고 바울은 죄악 된 분노(sinful anger)와 거룩한 분노(holy anger)를 구별하는 반면에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고 경고한다. 의로운 분노(righteous anger)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법 즉 먼저는 분노의 발산에 의해서와 다음은 분노의 내면화에 의해서 불의한 분노가 될 수 있다. 이러한 두 가지 상반된 극단은 보다 자주 ‘폭발’과 ‘침묵’으로 나타난다. 분노가 폭발 할 경우에 그의 정서적 에너지가 다른 사람을 목표로 하여 폭발되며, 침묵을 지키는 경우에는 그 육체적 긴장들이 자기 자신 안에서 이완된다. 두 경우 모두 분노의 정서적 에너지에 소모되며, 두 경우 모두 ‘파괴적으로’ 사용된다. 그들이 문제해결을 위해서 건설적으로 사용된 실례가 없다. 분노의 폭발은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하는 것이며 원칙적으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만, 그것은 또한 분노를 발산하는 자기 자신에게도 상처를 준다. 분노의 폭발은 우정의 손실을 가져 올 수 있고, 오직 크리스챤의 커뮤니케이션의 기초 위에서만 성립 될 수 있는 중요한 관계들을 자주 파괴할 수 있으며, 자기 자신의 몸을 해칠 수 있다. 분노로 인한 침묵은 정서적인 에너지를 자기 자신에게 파괴적으로 향하게 하고 자기 자신의 몸을 해치며, 스스로 화를 내도록 만들고 비참하게 만들며 긴장하게 만드는 반면에,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도 상처를 준다. 이상에서 제이 E. 아담스는 두 가지 측면에서 분노가 죄가 되고 아니 되는 것은, 에베소서 4장 2절의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라는 말에서 분을 내는 것과 죄를 짓는 것을 구별하여 분을 내는 것들 중에는 죄를 짓는 분노와 죄를 짓지 않는 분노가 있음을 밝힌다. 즉 죄를 짓는 분노는 자신과 타인에게 손해를 끼치거나 파괴적인 정서 혹은 감정의 분노로서 지속적이다. 이러한 분노가 발산되는 혹은 폭발되는 것이든 마음속에 품는 내면화된 분노이든 모두가 죄가 되는 불의한 분노다. 이 글을 쓰는 순간이 때 마침 사순절 기간이다. 우리는 목회와 선교현장에서 분노가 심장을 삼킬 것 같은 상황에서도 주님의 심자가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돌아보고 다스리는 사역의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 www.worldcan.co.kr(세계로원격평생교육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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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칼럼] 분노를 다스리는 목회 상담의 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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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칼럼] 투기꾼과 하나님의 땅
- 날마다 LH 직원의 땅 투기로 인해서 매우 시끄럽다. 한 언론에 의하면 “LH 직원들의 땅 투기 행위가 ‘투기 백과사전’으로 불릴 만큼 폭 넓고 다양하게 이뤄진 사실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또 이런 투기 행위들에 대한 사전 예고가 여러 가지 형태로 제기됐지만 정부와 LH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사실도 확인됐다. 이에 따라 LH가 제대로 된 직원들에 대한 관리감독 시스템을 운영하지 못해 이번 사태를 야기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또 정부가 후속 대책의 일환으로 추진 중인 대대적인 투기 수사에 나서기로 함에 따라 전국이 당분간 땅 투기 수사 광풍에 휩싸이게 될 가능성이 커졌다. 국토의 균형 발전 등을 이유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들이 앞 다퉈 크고 작은 개발사업을 추진해왔기 때문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동안 땅을 갖고 돈 벌어서 떵떵 거리고 사는 경우가 오직 LH 직원 뿐 이겠는가?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서민들은 철거를 당하고 자본가들은 땅을 차지하여 돈을 벌어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땅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이시다. 천지를 창조하실 때부터 소유권이 하나님에게 있음을 알아야 하겠다. 인간이야 말로 잠시 자기 이름을 등기부에 올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이러한 근거는 성경의 희년제도에 의해서도 찾아볼 수 있다. 희년이 도래하기 전까지 50년 동안은 토지에 대한 사유재산권이 명확히 인정되었다. 국내의 한 포털에 소개된 희년에 관한 내용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형편에 따라 자유롭게 사고 팔 수도 있었고, 그것도 시장의 원리에 따라 가격이 책정되었다. 희년이 가까워질수록 땅값이 떨어지고, 희년에서 멀어질수록 땅값이 비싸지는 원리에 따라, 즉 시장의 원리를 존중하는 가격으로 책정이 되었던 것이다.(레25:15-16) 팔았던 토지를 다시 원 소유자가 되찾아 올 때도 시장 가격에 따른 값을 치러야 했다.(레25:24-27) 오직 희년이 도래했을 때에만 그 토지를 공짜로 되찾을 수 있었는데,(레25:28) 이는 당시 농민들의 생활 기반을 보장하기 위함이었다. 당시는 농경사회로서 농토의 상실은 곧 생활 기반을 통째로 잃어버리는 것을 뜻했기 때문이다. 희년제도가 적용되었던 사사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왕을 요구하자, 사무엘이 "왕의 제도"의 문제점을 열거하는데, 그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는 이러하니라. ... 그가 또 너희의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과 제일 좋은 것을 가져다가 자기의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삼상8:11-14) 즉 사무엘은 왕의 제도가 시행되면 토지가 국유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고, 이를 비판적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실제로 훗날 이스라엘의 아합왕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았는 사건이 나오는데, 하나님은 이를 분명히 "죄악"으로 규정하셨다.(왕상21:1-19) 이때에도 분명히 희년제도가 적용되는 시기였다. 다시 말해 희년 제도에 "토지는 공공재이다."라고 말할 여지는 전혀 없다. 더군다나 희년 제도에서 "성 내의 가옥"은 매매가 완벽하게 자유로워서, 희년이 도래해도 원 소유자에게 돌아가지 않았다.(레위인의 가옥은 예외) 희년이 선포되었을 때 원 소유자에게 공짜로 돌려주어야 할 부동산은 오직 "농토"와 "성 밖의 가옥", 그리고 "성 내의 레위인의 가옥"이었다.(레25:29-34)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성 내의 가옥"은 농민이 아닌 도시의 상공업자가 소유한 주택이었다. 상공업자의 주택은 농민의 농토와 같이 "생활의 기반"이라고 볼 수 없었고, 오히려 가옥의 매매를 자유롭게 허용하는 것이 서로에게 더 유익이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농경시대였던 당시의 이스라엘에서 상공업자 비율은 매우 낮았을 것이고, 따라서 희년 제도의 예외 대상도 매우 소수였을 것이다. 이처럼 희년 제도를 통해서 땅은 농민들의 생계의 수단이기 때문에 소유를 제한하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다. 성경속에 있는 희년 사상을 통해서 우리가 얻을 교훈이 있다. 하나님은 레위기서를 통해서 분명히 땅의 소유권을 확고히 밝히셨다.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 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25:23)) “라고 말씀하고 있다. 또한 희년을 통해서 본래의 소유자에게 땅을 되돌려 주어야 하듯이 우리는 본래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돌려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 열매를 위해서 경작은 하되 항상 주인에게 귀속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땅을 투기를 통해서 이익을 얻고자 불법적으로 땅을 산 사람들은 잠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불쌍한 사람들이다. canmissio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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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칼럼] 투기꾼과 하나님의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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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칼럼] 김성혜 총장님 편히 쉬십시오
- 필자가 김성혜 총장님을 가까이에서 모실 수 있었던 것은 한세대학교의 교수로 임용이 된 후 였다. 당시에는 학내 사태로 인해서 교원들과 학생들 사이에 팽팽한 긴장이 날마다 지속되었다. 학교에 등교한 어느날은 학생들이 “김성혜 관”이라고 쓰여진 관을 들고 운동장을 순회 하면서 김성혜 총장을 장사 지내는 퍼포먼스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그때만 해도 김성혜 총장님이야 말로 참 오래 사실 것으로 여겼다. 왜냐 하면 욕을 많이 먹는 사람이 오래 산다는 속설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난 2월 11일 향년 79세로 김성혜 한세대학교 총장이 소천을 하셨다. 필자는 은퇴한지 5년이 넘었기 때문에 총장님을 자주 뵈지는 못했지만 먼 발치에서라도 건강하시기를 원했지만 병마를 이기지 못하신 것 같았다. 김성혜 총장님은 1942년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의 부인이자 조 목사와 함께 이 교회를 설립한 고(故) 최자실 목사의 딸이다. 그는 1965년 이화여대 피아노과를 졸업한 후 1995년 미국 맨해튼음악대학에서 석사를, 2008년 미국 오럴로버츠대학에서 목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 목사와는 1965년 결혼했다. 2001년부터 한세대 총장을 지내며 직접 강좌도 맡아 학생들에게 매주 '피아노 연주법'을 가르쳤다. 김성혜 총장에 대해서는 사람들 마다 평가가 달랐다. 어떤 사람은 매우 부정적인 말을 하는 경우도 보았다. 그러나 가까이에서 모셔본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어느 누구 이던지 리더십을 발휘하여 조직을 움직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모든 사람들의 욕심을 다 충족시킬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정이 많으신 분이셨다. 한번은 결제를 받기 위해 총장실에 들렸더니 고구마를 내어 놓으면서 먹으라고 하였다. 총장님께서 어떻게 고구마를 드시냐고 하였더니 시골의 성도가 해년마다 고구마를 가져 옴으로 새벽에 삶아 왔다고 하였다. 자그마한 담소와 함께 방을 나오면서 총장님의 소박한 생활을 였볼 수 있었다. 필자가 한세대에서 근무 하는 동안에 총장님으로부터 혼났던 적이 있었다. 어느날 아침 직원 채플 시간이었다. 그날 내가 설교한 제목은 “쓰나미와 지도자” 였다. 설교를 진행 하는 가운데 총장님의 신상을 건드렸다. 즉 총장님은 세계 최대 교회인 여의도순복음교회 사모로서 많은 비난을 받을 때에 그들을 죽이고 싶도록 미워지겠지만 용서 하는 일이 얼마나 어렵겠느냐 라는 취지의 설교 였다. 그러나 총장님은 자신이 성도들을 죽이고 싶도록 미워 한다는 취지로 이해하였다. 결국 몇 주일을 몹시 괴롭게 지내게 되었다. 결국 오해를 풀어 드리게 되었지만 참으로 힘든 시간이었다. 총장님의 조문을 위해서 서울대 장례식장을 갔다. 언제나 웃고 계시는 사진을 보면서 한세대에서 근무하면서 총장님과 얽힌 사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인파가 넘칠 것으로 알았지만 왠지 조용하였다. 아마도 코로나 19로 인한 요인으로 생각했지만 그래도 조금은 씁쓸한 마음은 어찌 할 수 없었다. 평소에는 문턱이 달토록 총장실을 드나들었던 사람들은 어디 갔을까를 생각해 보면서 인간의 간사한 마음을 측정하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오늘은 미국의 미네소타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홍완표 박사님으로부터 페이스북을 통해서 소식을 전해 왔다. 동봉한 사진에 의하면 몇 사람의 교수들과 함께 찍은 김성혜 총장님의 사진이었다. 환하게 웃고 계신 모습을 보면서 이 세상에서 다시는 만날 수 없음이 안타가운 마음이다. 총장이라는 직임이 어느덧 3D가 되어버렸다고들 한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대접을 받는 자리라고 여겼던 것들이 지금은 학교 경영을 위해서 노심초사 해야 하는 자리가 된듯하다. 김성혜 총장도 예외는 아닐 것으로 짐작이 되었다. 학교 경영에 따른 자금 문제, 노사의 갈등 문제, 인간관계에서 오는 다양한 문제들 그리고 대형 교회의 사모로서 감당해야할 비난을 감수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마지막 장례식이 있는 날 아침에 한세대 교정을 지났다. 혹시라도 다시 한 번이라도 운구 행열을 보고 싶어서 였다. 그러나 서울대 병원에서 교회로 그리고 장지인 파주시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으로 가셨다 들었다. 필자의 생각에는 그래도 30여년을 봉직한 자신의 대학 캠퍼스를 한번쯤 돌아서 가신 것이 순리라고 판단되었다. 아무튼 김성혜 총장님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천국에서 편히 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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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칼럼] 김성혜 총장님 편히 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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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칼럼] 선교라는 이름을 거부하는 추세
- 최근 신문에 기고된 글에는 "개신교 정말 민폐다" 교회발 코로나 확산..시민들 '분통'이라는 주제가 올라왔다. 그도 그럴 것이 코로나 19 사태는 기독교계에 많은 것을 던져주고 있다. 정통 기독교 교단에서는 이단으로 지목된 신천지 이만희의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신천지)을 시작으로 전광훈 목사가 이끌고 있는 서울 사랑제일교회, 선교단체 인터콥(BTJ열방센터), IM선교회가 운영하는 미인가 교육시설들, 일부 교회 등에서 코로나19 집단 감염이 계속 이어지면서 개신교계는 사회적 비판을 받고 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등장하는 언어가 “선교”라는 언어 이다. 선교란 무엇인가? 필자는 선교학자 이다. 따라서 30여년 동안을 선교학을 가르치면서 언어에 대한 정의를 내려서 강의 하였다. “선교는 지리적, 정치적, 문화적 경계를 넘어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여 제자화 하는 갓이다”라고 강의 하였다. 그러나 최근에 나타난 선교라는 이름 속에 나타난 현상들은 필자의 논리와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의 접근된 일들이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이제는 기독교는 물론 선교라는 이름들도 사회의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언론에 따르면 최근 개신교발(發) 코로나19 확산이 거세지면서 비판 여론이 높아지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등 관련 단체는 한국 교회에 자성을 촉구하며 사과했다. 즉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와 한국YMCA전국연맹, 한국YWCA연합회 등 연합기관·시민단체는 29일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공동기자회견을 열고 "'교회라고만 해도 지긋지긋하다'는 대중 정서 앞에 통렬한 책임감을 느낀다"며 "의료진·방역당국의 헌신을 무시하고, 공익을 외면하며, 지역 공동체의 안전을 위협하는 행위들을 `종교의 자유`란 이름으로 행하는 이들의 죄로부터 한국교회 모두가 자유롭지 못함을 고백하면서 국민들께 사죄드린다"고 밝혔다. 이들은 "한국 교회가 오늘날 국민 건강에 위해를 끼치는 주된 세력으로 인식되는 참담한 현실"이라며 "하루빨리 팬데믹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해온 소상공인들과 시민들, 공무원과 의료진들 앞에 고개조차 들 수 없다"고 고개를 숙였다. 방역당국은 물론 시민들과 자영업자 등 국민께 사죄의 뜻을 밝히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여론은 싸늘하다. 특히 한 선교회가 운영하는 다수의 미인가 대안교육시설과 관련해 수백명의 확진자가 나오면서 시민들의 분노가 커지고 있다. 일부에서는 지금의 코로나19 확산 사태는 사실상 개신교에서 비롯한 위기가 아니냐며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2021년 1월 29일 개신교 여론조사기관 목회데이터연구소가 낸 '코로나19 정부 방역 조치에 대한 일반 국민평가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 교회를 '별로·전혀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76%로 조사됐다. '매우·약간 신뢰한다'는 응답은 21%에 불과했다. 이번 조사는 일반 국민 1천 명을 대상으로 지난 12∼15일 온라인으로 진행됐다. 코로나19 확산이 본격화하기 전 지난해 1월 교계 단체인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실시한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조사' 당시 같은 질의에서 한국 교회에 대한 '매우·약간 신뢰' 응답 비율은 32%였던 것과 비교해 1년만에 11%가 하락했다. '신뢰한다'는 응답을 개신교인과 비개신교인으로 나눠 보면 개신교인 중 신뢰한다는 비율은 70%였으나 비개신교인은 9%에 불과해 극명한 차이를 보였다. 해당 조사에서 응답자들은 국가가 공익을 위해 종교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지를 묻는 질문에 86%가 '제한할 수 있다'고 밝혔다. 지난해 8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교단이 실시한 '코로나19 이후 교회 생태계 지형 변화 조사'에서는 제한 가능하다는 비율이 59%였던것과 비교할 때 크게 높아진 수치다. 예수님은 갈릴리 호수 근처에서 사역을 시작하실 때부터 가난하고 병들고 의지할대 없는 사람들을 치유하고 소망을 주는 사역을 통해서 좋은 소문으로 가득 차게 만들었다. 이러한 긍정적인 소문은 갈릴리를 넘어서 유대땅과 행정의 중심부인 예루살렘에 전달되었다. 그 결과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에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메시아의 임재를 외치는 무리들 송으로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선교”라는 이름이 얼마나 배척 당하고 있는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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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칼럼] 선교라는 이름을 거부하는 추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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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칼럼] 한국인 선교사
- 오늘은 “한국인 선교사”라는 잡지에 대해서 글을 엮고자 한다. 이 잡지는 아프리카 선교사의 대부 이신 조성수 선교사님이 발간을 시작하였고, 지금은 전 성결대 총장님이신 성기호 박사님께서 발행인으로 헌신하고 있다. 처음 이 잡지가 발간되기 시작할 즈음에 조선수 선교사님과 필자는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이 잡지의 목적은 한국 선교사님들의 선교역사를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는 의견이었다. 그 비젼의 열매가 수십년을 지나면서도 흔들림 없이 오늘도 지속된 모습을 보게 된다. 필자의 메일로 e-book으로서 배달된 내용들을 읽으면서 무척 감회기 새롭고 감사의 마음이 든다. 필자는 새해를 여는 2021년 1월호에 개제된 사이판 김기조 선교사의 사역이야기를 간추려서 엮고자 한다. 김기조 선교사의 글을 소개하면서 선교지망자들 누구든지 겪게 되는 신앙 입문의 어려움을 공감으로 체험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김기조 선교사님의 고백은 “ 저는선교사가 될 수 없는 환경과 가정에서 자랐고, 8대 종손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제가 사는 면 소재지는 거대한 김 씨의 집성촌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동네는 교회가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저는 어릴 때 교회라는 곳이 있는지도 몰랐고 교회를 가 본 적이 없었습니다. 8대 종손인 저는 어릴 때부터 천자문을 외우고 아버님께 서예를 배웠습니다.고등학교 시절에는 전국 초중고대학생 서예전에서 금,은, 동상을 수상 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철저히 유교적인 교육을 받고 자랐습니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 교회 가자는 말을 많이 해도 “나는 절대 예수를 안 믿는다. 너 잘 믿어라” 하고 빈정거렸고 그 말이내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교회라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제가 군대에 입대하게 되었습니다. 상병이 되면서 시간적인 여유도 많아서 군대 동기의 권유로 군인교회에 따라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라는 문화가 저에게는 어색하여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았습니다.군대에서 교회 생활은 한가한 시간을 메우기 위한 여가 활동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속담처럼 고등학교 때만 해도 교회에 대하여 부정적이었던 저에게 군대 생활에서 교회를 다녔던 것이 훈련되었는지 제대 후에 교회를 다니는 것이 별로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알기 시작하면서 한편으로 고민도 생겼습니다. 8대 종손의 장남인 저는 매달 제사와 절과 묘사를 지내야 하는데 제사를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이 생긴 것입니다. 일 년 동안 기도하며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습니다. 충분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추석에 시골에 내려갔습니다. 차마 말을 꺼낼 용기가 나지 않았지만, 용기 내서 부모님께 드릴 말씀이 있다고 말씀을 드린 뒤에 정중하게 저는 교회를 다니기로 했고 이제부터 제사를 드릴 수 없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저는 일 년 동안 충분히 기도하고 말씀을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부모님의 마음을 바꿔 주시므로 신앙적으로 변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생각과는 완전히 반대의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어머님은 그 자리에서 기절하셨고 아버님은 조상에게 죄를 지었다고 우시면서 집 안에 있던 신주를 가지고 나가서 불사르셨습니다. 누님과 형제들은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멱살을 잡고 윽박질렀습니다. 동생들은 형이 배신자가 되었다고 길길이 날뛰며 흥분을 했습니다. 우상 숭배를 하지 말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어서 우상 숭배를 하지 않기 위해서 제사를 드리지 않겠다고 선언을 했는데 돌아오는 것은 비방과 욕설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밤새도록 울며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집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종손인 네가 정말 예수쟁이가 되어서 제사를 안 지낼 것이냐? 그럼 재산은 동생에게 준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순간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했지만 재산 때문에 예수님을 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렇게 하십시오.”라고 담담하게 말했습니다. 이런저런 회유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안 부모님도 포기했지만 그래도 공격은 늦추지 않았습니다. 결국 신학교를 가게 되었고 선교사로서 길을 가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죄로 8대 종손의 재산은 잃었지만 제 인생에서 구원을 얻게 되는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한국인 선교사는 이러한 배경을 가진 다양한 선교사님들의 간증을 발굴하여 개제하고 있다. 어쩌면 선교지에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선교사의 삶이 “한국인 선교사”를 통해서 선교행전의 빛으로 우리에게 밝혀지기를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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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칼럼] 한국인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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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칼럼] 조귀삼 교수의 ‘벤츠와 공짜 밥’
- 코로나 19는 인간의 존재와 생명의 유한성 그리고 불안한 삶의 연속을 가져 왔다.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상황들이 인간관계마저도 단절과 불신을 가져오게 만들고 있다. 필자가 몇 년 전 학생들과 유럽을 방문 하면서 들은 이야기인 중세 때에 페스트로 주민의 1/3이 죽어 나갔다는 설명이 현실화 된 듯한 느낌이 든다. 필자를 포함한 소시민들은 코로나로 인해서 경제적으로 심리적으로 그리고 건강마저도 지켜내기가 어려운 시간 속에 살고 있다. 이러한 때에 국내 신문의 한 기사를 읽으면서 마음을 추수릴 수가 없다. 제목은 “무료급식소 찾은 ‘벤츠모녀’ “우린 왜 도시락 안 주냐?” 항의 였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경기 성남시에서 노숙인을 위한 무료급식소 ‘안나의 집'을 운영하는 김하종(Vincenzo Bordo) 신부는 지난 12일 오후 페이스북에 “오늘은 아주 괴로운 날이다. 화가 나고 어이없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라는 내용으로 글을 올렸다. 김 신부의 글에 따르면 성당에 찾아온 흰색 벤츠 승용차에서 내린 할머니와 아주머니가 무료급식을 기다리는 노숙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러자 김 신부는 그들에게 “따님도 계시고 좋은 차도 있으시기 때문에 여기 오시면 안 됩니다. 도시락이 모자랍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여성은 짜증을 내며 “이분은 저희 어머니이시고, 여긴 공짜 밥 주는 곳이잖아요? 왜 막으세요?”라고 항의했다. 김 신부는 “도시락은 노숙인분들을 위한 것이고, 아주머니와 할머니 때문에 다른 분들이 먹지 못 합니다.”라고 타일렀으나 여성은 계속해서 도시락을 받아가야겠다고 했다. 김 신부는 “이분들의 행동은 자기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행동이고, 말은 우리 친구들을 무시하고 배려하지 않는 말이기 때문”이라며 “스스로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분들이 가져가는 도시락 하나가 그분들에게는 한 끼일지 모르지만, 노숙인 한 명에게는 마지막 식사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라고 한탄했습니다. 결국 이들 모녀는 결국 무료 도시락 하나를 받아 돌아갔다고 합니다. 필자가 추측하기로는 밥 하기 싫어서 한 끼 떼우기 위해서 나온 것으로 추측이 된다. 그날 김하종 신부님이 봉사를 통해서 식사를 해결하신 분들이 800명이 넘었다고 기사는 전달하고 있다. 아마도 맨 후순위로 식판을 들고 식사를 기다렸던 노숙자들은 벤츠를 타고 무료급식을 받아 먹겠다고 온 두사람 때문에 밥을 못 먹고 돌아갈 수도 있다고 본다. 이번 기사를 통해서 김하종 신부님이 주시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다. 그분은 자신이 프랑스에서 처음 한국에 왔을 때에는 “한국의 이타적인 문화가 너무 자랑 스럽게 생각했었지만 요즈음은 그러한 윤리나 행동은 사라지고 이기적인 욕심들만 가득한 모습을 보게 된다”라는 멘트를 하였다. 우리사회의 모습이 왜 이렇게 괴물들이 득실거리는 현상으로 바꾸어져 가는지 한탄하지 않을 수 없다. 복음이 한국에 들어온 이후로 교회와 그리스도의 성도들은 사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면서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작금의 현실은 어떠한가? 최근의 TV 뉴스를 시청하다 보면 가슴이 뜨금해질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왜냐하면 코로나의 확진이 교회의 소모임과 관리 부실에서 오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동안 우리는 신천지를 몹쓸 집단이고, 해악의 집단이고, 소멸해 버려야할 집단이라고 공격하기도 했다. 코로나 확진의 측면에서만 본다면, 이제 손가락을 우리 스스로에게 돌려야할 때가 되었다. 종교의 기능은 촛불의 원리이다. 이는 스스로 자신을 태우면서 어둠을 밝히는 것이다. 오늘날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이 자신들이 가진 명성과 권력과 성도들의 헌금과 신분을 특권화 하면서 섬기는 마음을 갖지 못할 때에 교회의 존재 이유는 없는 것이다.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자신의 치부를 모든 백성들에게 들어내게 될 것이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대속의 십자가 뒤에서 온갖 못된 짓을 일삼는 교회 지도자가 있다고 하면 벤츠를 타고 나타나서 노숙자들의 밥그릇을 빼앗아 가는 철면피 보다도 더 큰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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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칼럼] 조귀삼 교수의 ‘벤츠와 공짜 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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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칼럼] 세례의 선교적 함의
- 예수님의 지상명령은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는 것이다. 그리고 세례를 베푸는 사역을 통해서 선교의 증진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의 제자들(교회)은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세례를 베풀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해야한다.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에 나타난 선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모든 민족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세례를 받고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이다. 선교지에서 선교사들이 행하는 세례를 통한 기독교의 입교는 복음증거의 중요한 증표로 남게 된다. 비록 WCC 진영에서 세상의 샬롬(복음의 사회적 차원)을 선교의 목표로 부각시켰을지라도 개인의 영혼을 구원하는 복음화가 선교의 본질이고 궁극적 목적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원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막 16:16)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교는 성령의 권능을 받아 땅 끝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여 그 복음을 믿게 하고, 그 믿음의 결과로 세례를 받게 함으로 마침내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한다. 그래서 로잔언약을 작성했던 존 스토트(John Stott)는 지상명령의 핵심주제는 복음전도(evangelism)이고 지상명령의 궁극적인 목표가 복음화(evangelization)라고 선언했던 것이다. 특히 대부분의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세례를 복음화와 하나님의 나라 선교로 연결 짓고 있다. 왜냐하면 세례를 베풀어 “내 제자”를 삼으라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사상과 사역의 핵심 주제가 하나님의 나라(βασιλεία), 곧 그리스도에 의해 이 세상에 세워진 하나님의 나라를 말(word)과 행위(deed)로 증거 함으로 그 나라를 확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그래서 비슬리 머리의 경우 그리스도의 “불과 성령 세례”는 메시아 왕국을 위한 세례였다고 이해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께로 회심한 자들에게 세례를 베풀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요 교회의 일원으로 삼고, 또한 그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할 것을 명령하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선교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에 순종하여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로 가서 개별적 또는 집단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여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주권적 통치를 받아들이게 하고 또한 전 창조세계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활동인데, 이 모든 선교의 과정은 제자를 삼아 세례를 베풂으로 시작된다. 신학적 의미에서 “세례를 베푼다”는 것은 죄 사함을 받은 후 그리스도와 유기체적으로 연합되어 한 몸이 되게 하는 것으로서(엡 4:1-16; 골 2:12), 세례는 교회의 지체(구성원)가 되었다는 외적인 증표가 된다. 특히 예수님은 다메섹 도상에서 교회를 자신을 박해했던 사울(바울)을 부르실 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행 9:4)고 하심으로 자신을 교회와 동일시하셨다. 또한 교회 안에 여러 직분자와 은사자들을 세우신 목적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함이라고 했는데(엡 4:11-12) 곧 교회를 의미한다. 그래서 거쓰리도 세례 베풂은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인 교회의 멤버가 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자연스럽게 해석했고,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도 세례의 여러 기능과 의미에 대해 설명하면서 “세례는 세례 받은 당사자를 유형 교회에 엄숙하게 가입시키는 것을 뜻하는 것(고전 12:13; 갈 3:27-28)”이라고 정의했다. 그래서 토머스 래이너(Thomas Rainer)는 주님의 지상명령의 목표는 모든 민족에게 세례를 베풀어 교회를 세우고, 그 교회를 잘 가르쳐 주님의 제자로 삼아 천국복음을 땅 끝까지 증언하라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따라서 교회의 선교적 역할에 대한 관점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은 제자들(교회)이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세례를 베풀어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인 새로운 교회를 세우라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한 많은 사람들에 대한 선교의 인식과 책임을 가지고 온 교회가 지상명령에 순종하여 세계 복음화에 협력해야한다. 오늘도 선교현장에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여 제자화를 이루기 위해서 세례를 베푸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효과적으로 이루는 중요한 사역임을 인지해야 하겠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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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칼럼] 세례의 선교적 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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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칼럼] 미친 사회를 구해낼 방법은 예수님 뿐
- 세상이 미처서 돌아가는 것 같다. 정상적인 사람이 오히려 비정상 취급을 받을 만큼 사회가 변해 버렸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예(禮)를 중시하는 국가였다. 이씨 조선 때에는 국가의 도덕적 기준을 예기(禮記)에 맞출 만큼 윤리적인 시민의식이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의 전래 이후로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가 사회의 중심을 잡아 주는 듯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중심 진리는 점점 소멸되어 가고, 교회 속에서도 사회의 기강을 세울 만큼 도덕적 지도자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때에 나의 말을 증명해 주기라도 하듯이 미친 사람이 나타났다. 최근 언론에 의하면 “내가 불행하니 남도 똑같이”라는 제목에 나타난 내용은 기가 막히다. 20대가 PC방에서 묻지마 흉기난동을 벌렸다는 것이다. PC 방의 손님 2명은 전치 1~4주, 여성 종업원 1명은 전치 12주의 중상을 입었다. 사연은 이렇다. 난동을 부린 것은 20대 여성이었는데, 그녀는 피해 여성들과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 조사 결과 사건을 일으킨 여성은 사건 당일 술에 취한 상태에서 “내가 불행하니 남도 불행해져야 한다”는 생각에 빠져 집에서 흉기를 챙겨, PC방으로 향한 것으로 드러났다. 부산지법 형사 4단독(부동식 부장판사)은 특수상해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여성(20)에게 징역 4년을 선고했다고 15일 밝혔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우울증, 강박증을 호소하며 치료를 받았고, 범행 직전 술을 마신 사실은 인정되지만 사물을 변별할 능력이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미약한 상태에 있었다고 볼 수 없다”며 “피고인과 변호인의 심신미약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이어 “피해자의 폐까지 손상될 정도로 피고인 범행 수법이 잔혹하고 피해자들이 입은 상해 및 후유장해 정도가 심하다”며 “아무런 피해 회복도 이뤄지지 않아 피고인에게 엄한 처벌이 불가피하다”고 양형 이유를 설명했다. 또 하나의 사건이 우리를 전율하게 만든다. 한국에서 신학박사 과정의 공부를 하던 대만에서 온 쩡이린(曾以琳) 이라는 유학생이 음주운전 차량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다. 쩡이린은 지난 6일 서울에서 교수를 만난 후 귀갓길 횡단보도에서 음주 운전자의 차량에 치인 뒤 병원으로 후송됐지만 숨졌다. 딸의 사고 소식을 접한 쩡씨는 한국에 도착해서야 음주운전자의 신호위반으로 자신의 외동딸이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밝혔다. 쩡이린의 아버지인 쩡씨는 대만 위생복리부 산하 자이(嘉義) 병원의 마취과 의사다. 딸의 시신을 화장해 대만에 돌아온 쩡씨 부부는 “이렇게 이기적인 범인은 딸의 생명과 우리의 희망을 앗아갔다”며 “더는 딸의 예쁜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고 했다. 쩡이린의 한국 친구는 “음주운전은 예비 살인 행위이며 다른 범죄보다 더욱 강력한 처벌이 필요하다”며 “하늘나라로 가버린 제 친구는 다시 돌아올 수 없지만 앞으로도 일어날 수 있는 끔찍한 음주운전 사고에 단 한 명이라도 소중한 생명이 희생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음주운전 관련 범죄에 대해 더욱 강력한 처벌이 내려지기를 촉구한다”고도 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사회가 되었는가? 사실 이 같은 사회적 비극은 크리스마스를 몇 주 앞둔 필자의 마음을 매우 무겁게 만든다. 나는 교수 시설에 대만에 가서 강의를 몇 년 동안 했던 기억이 난다. 한국의 신학생들처럼 대만의 청년들도 조심성이 많으면서도 면밀하게 학문 성취에 열성을 다하는 모습을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신학 공부를 통해서 대만은 물론 중화권의 디아스포라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힘 있게 증거할 젊은 청년이 음주운전 차량에 삶을 마감하는 세상을 누가 만들었는가? 무엇인가에 홀린 듯한 세상을 참으로 구해 내실 분은 누구이신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 자신을 희생하여 인류와 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분이다. 이러한 희생이 미쳐버린 세상을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언제 부터인가 자기희생이 없는 종교를 만들어 버렸다. 그 뿐만이 아니라 세속주의에 힘 한번 쓰지 못하고 주저 않아버린 느낌이다. 이 일을 어찌하랴!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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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칼럼] 미친 사회를 구해낼 방법은 예수님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