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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콥틱교회의 선교
    필자는 지난 8월에 해외의 선교사님들을 위한 학위 과정을 강의 하 적이 있다. 이 때에 수강한 학생들에게 주어진 과제가 자신이 사역하고 있는 지역의 선교역사를 연구하여 기술하는 일이었다. 시간이 지나서 널리 이집트에서 사역하고 있는 선교사로부터 과제를 제출 받았다. 그분이 제출한 과제명은 “콥틱교회의 역사와 선교 역사 개관”이었다. 이 페이퍼를 살펴 보면서 콥틱교회의 생성과정과 초대 기독교교회사에 나타난 교리논쟁 그리고 무슬림의 공격 속에서도 버티고 오늘에 이른 콥틱교회를 살펴 볼 수 있었다. 여기에서 필자의 가슴을 뭉쿨하게 만든 것은 콥틱교회의 선교였다. 어쩌면 사석화 될법 한 콥틱교회가 4세기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선교를 해 오고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오늘 페이퍼의 내용을 중심으로 콥틱교회의 선교를 간단히 기술하고자 한다. 여기에서 페이퍼를 쓰신 분의 이름을 밝힐 수 없는 것은 선교지와 선교사의 보호를 위해서 이다. 이 점을 독자들은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아울러 이집트 선교와 콥틱교회 그리고 선교사님을 알기 원하는 독자는 개인적으로 연락해 주기 바란다. ‘자기 방어적인 기독교 역사에도 불구하고 콥틱교회에 선교의 역사가 존재하고 이를 이해하는 것은 참 흥미로운 일이다. 먼저 콥틱교회의 선교역사는 아프리카 선교를 중심으로 살펴 볼 수 있다. 콥틱교회와 아프리카와의 관계는 4세기부터 시작된다. 루피누스타 이란 니우스(340-410)에 의하면, 시리아의 상인인 메로피우스와 그 두 아들이 인도와의 무역을 트기 위해 홍해를 항해하던 중에 에디오피아 땅에 도착하게 되고, 메로피우스와 선원들은 에디오피아 원주민들에 의해 살해되지만 두 아들은 포로로 잡혀 왕의 시중을 드는 자리에 오르고, 이후에 큰 아들인 프루멘티우스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와서 당시 교황이던 아타나시우스에게서 에디오피아 주교로 임명되고, 에디오피아에 돌아온 프루멘티우스가 에디오피아 왕을 개종시키게 된다. 이후 에디오피아 주교는 콥틱 교황에 의해 임명되는 전통이 되었다. 20세기 들어서 알렉산드리아 교구와 에디오피아 교회의 관계가 정치적인 영향을 받아서 다소 긴장 관계를 형성하고 있지만, 여전히 알렉산드리아 교구의 영향력을 배제할 수는 없다. 이후에 콥틱교회의 아프리카 선교역사는 1976년 아부나(목사) 안토니우스 알-바라무시를 아프리카 선교담당 주교로 임명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본다.1977년에 케냐에 콥틱교회가 설립된다. 1984년에 잠비아에 콥틱 예배가 시작되고, 1988년에 짐바브웨에 성안토니우스 수도원이 들어선다. 1990년에 나미비아에 성 안토니우스 수도원이 개설된다. 수단에는 카르툼과 옴드르만에 두 개의 콥틱교회가 존재한다.콥틱교회에 의한 아프리카 선교의 특징을 살펴 보면, 먼저 콥틱교회의 선교 모델은 개신교 교회의 선교모델과 달리, 선교지에서 콥틱전통이 적용되는 교회를 세우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하고 있다. 따라서 콥틱교회가 파송하는 선교사는 반드시 아부나 (목사) 이어야 한다. 파송된 목사를 중심으로 콥틱교회의 예배 전통과 교리들이 현지인들에게 전수되고 지켜진다. 아프리카 선교의 또 다른 특징은 의료 사업을 통한 지역사회 개발 프로그램을 도입한 것이다. 콥틱교회내의 많은 이집트의 우수한 의료인력(의사, 간호사 및 약사)들이 선교지에서 단기 및 중기적으로 현지인들을 만나고 섬기는 플랫폼을 구축하게 된다. 아프리카의 대다수 국가들에게 이집트의 의료 수준은 상당한 수준에 이르는 것으로 간주되고 존중 받고 있다. 이들을 통해 현지인들이 콥틱교회를 소개받고 콥틱 아부나(목사)가 시무하는 교회에 출석하여 콥틱 교인으로 성장하게 된다. 실제로 2000년대 초반 아프리카 잠비아로 선교사로 파송되었다가 지금은 교황 산하에서 선교를 담당하고 있는 아부나 요한나가 다른 개신교 선교사들과 다른 특징을 지닌 콥틱교회의 선교경험을 필자와 나누기도 하였다. 아부나 요한나가 수년전부터 교황청 내에서 기독교의 기본 신앙과 무슬림 전도를 망라하는 1년 프로그램을 수년간 진행해 오고 있고, 그리고 해마다 국내 무슬림 전도를 실제적으로 진행하는 일은 콥틱선교에 있어 크게 고무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이 글을 기술한 선교사는 한국으로 들어오고 있는 무슬림들을 선교하기 위해서는 이집트 출신의 콥틱교회 목사들이 최선일 것이라고 재언하고 있다. 왜냐 하면 무슬림도 기독교도 잘 아는 토양에서 성장한 그들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의미 있는 말이라고 평가한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9-12-06
  • 평신도 브라질 선교사
    오늘은 박상철 선교사님이 필자의 사무실을 찾아왔다. 박 선교사는 한국의 시니어선교사 훈련원을 마치고 평신도 선교사로서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사역을 하고 있는 분이시다. 평신도로 남미의 페루와 브라질에서 사역한지가 30여년이 넘는다고 했다. 박 선교사가 필자의 사무실을 찾는 이유는 선교지에서 한국어를 가르침을 통해서 선교의 접촉점을 만들어 지속적인 인재를 육성해 보고자 한 선교전략 이었다. 마침 필자는 세계로원격평생교육원을 통해서 한국어교원 3급 교육을 감당하고 있다. 금년에도 몇십명이 이미 이 과정을 마치고 이수증과 함께 선교지에서 활발하게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선교사역을 하고 있다. 박 선교사에 의하면 브라질에서의 한류는 놀라운 속도로 청소년들을 움직이고 있다고 하였다. 특히 BTS를 비롯한 아이돌의 인기는 절정기라고 하였다. 이에 편승해서 한인들과 한국어에 대해서 관심이 증대 되고 있다고 말했다. 사실 브라질은 어떤 나라인가? 필자는 브라질 하면 축구 스타 펠레 정도만 알고 몇 년 전에 올림픽을 개최한 나라로만 인식된다. 사실 브라질은 가톨릭의 나라이다. 자료 검색에 의하면 브라질은 1492년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유럽인 최초로 아메리카에 도달한 후, 이미 발견된 아메리카의 다른 부분과 마찬가지로 브라질도 식민지화의 위협에 노출됐다. 1500년에 포르투갈의 페드루 알바르스 카브랄이 브라질을 발견한 이후 브라질은 포르투갈의 식민지로 다른 남북 아메리카 대륙과 다른 역사를 걷게 되었다. 초기 브라질에서는 기독교도로 개종한 이들에 의해 파우 브라질의 수출이 주요 산업이 되었으며, 이 때문에 처음에 베라크루즈 섬으로 불렸던 브라질은 16세기에 들어서 브라질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1549년에 프랑스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초대 브라질 총독으로 토메 데 수자가 사우바도르에 부임했다. 이후 18세기에는 미나스제라이스에서 금광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골드 러시가 일어나, 브라질의 중심이 북동부에서 남서부로 이동하여 1763년 리우데자네이루가 식민지의 수도가 되었다. 금광은 18세기 동안에 무려 30만명의 포르투갈인들이 브라질로 이주하였고, 금광을 개발하기 위해 더 많은 흑인 노예가 유입되었다. 한편 미나스의 중심지가 되었던 오루프레투(Ouro Preto)에서는 독창적인 바로크 문화가 번창했다. 커피, 농장에서 노동력 확보를 위해 이탈리아, 포르투갈, 스페인, 독일을 비롯한 유럽에서 이민을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노예제 폐지 후 이민자의 유입 속도가 더욱 빨라져, 1908년에는 유럽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도 일본인 이민자들이 유입되었다. 1919년에 열린 파리강화 회의에서 일본이 제출한 인종차별 철폐 방안에 찬성하는 등 인종차별 철폐에 적극적이었다. 이제 시대를 건너서 현대사에 나타난 브라질을 보자. 2003년 노동자당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대통령이 취임 이후 세계 경제의 호조를 바탕으로 경제를 회복하였다. 룰라는 두 번의 연임을 했고, 2010년 10월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여당인 노동자당의 지우마 호세프 국무부 장관이 당선됐다. 지우마 호세프는 2011년 1월 1일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2014년 대선 때 재선의 성공하였으나, 2016년 5월 12일에 대통령의 직무 활동이 정지되었으며, 동년 8월 31일에 탄핵되었다. 이후 미셰우 테메르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좌파 정권에서 우파 정권으로 교체되었으나, 2018년 선거에서 결선 투표 끝에 노동자당의 페르난두 아다지가 사회자유당의 자이르 보우소나루에게 패배하여 낙선을 하였고 이로써 브라질의 도널드 트럼프라고 불리는 극우 후보인 자이르 보우소나루가 당선이 되어 대통령에 취임하였다.우리 한인들이 브라질에 이민을 하게 된 계기는 박정희 대통령의 남미 개척 정책과 관련이 있다. 1963년 2월12일 103명이 산투스항에 도착하면서 이민이 시작되었다. 처음은 농업 이민 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의류상으로 업종을 바꾸었다. 그리고 상파울루 의류 시장의 양대 산맥인 봉 레티로와 오리엔트에서 3,000여개의 의류 도매업을 경영하는 한인 디아스포라 그룹이 되었다. 박 선교사님의 자녀도 그곳에서 자리를 잡고 의류사업을 통해서 아버님의 사역을 돕는다고 하였다. 특히 며느리는 카자흐스탄에서 브라질로 유학을 와서 자신의 아들과 만나서 결혼을 하게 된 디아스포라의 국제화를 이룬 가정이었다. 박선교사의 사역을 축복하면서 즐거운 미팅을 가졌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9-11-25
  • 결혼의 신성함
    필자에게 최근 들려진 책은 “결혼 신학”이다. 이 책은 존 파이퍼 께서 쓰신 책이다. 존 파이퍼 목사님은 뮤니히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미네소타 주 미니애플리스의 베들레헴 침례교회에서 목사로 사역을 하신 분이시다. 목사님은 “결혼은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요즈음 한국은 “동성 연애”를 넘어서 “동성 결혼”의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전통적인 복음 교회에서는 도저히 받아 드릴 수 없지만, 인권 이라는 주제로 사회가 점점 용인해 가는 것을 보면서 종말이 점점 가까운 감정을 숨길 수 없다. 존 파이퍼 목사님처럼 “결혼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왜냐 하면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첫째는 성경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결혼을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아는 창세기 2:18에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라고 하셨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은 한계를 지니고 있다. 요즈음 비결혼이 성행 하면서 평생을 혼자 살겠다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듯한 느낌이 있다. 물론 젊은 시절에 돈을 벌어서 혼자 쓰고, 혼자 여행하고, 혼자 생활 하는데 자유함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인생이란 항상 젊은 시절만 있는 것이 아니다. 푸르름의 여름이 가고 낙엽이 떨어지는 것이 자연법칙 이듯이 우리의 젊음 도 시간이 흐르다 보면 가을과 겨울의 혹독한 시기를 겪게 된다. 따라서 인간이 결혼을 통해서 상호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아야 하겠다. 두 번째는 연합의 비밀이 간직되어 있기 때문 이다. 창세기 2:24에는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한 쌍의 남녀가 결혼을 서약할 때에 중심인물은 하나님 이십니다. 연합의 비밀은 각자 다름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결혼 생활을 오래 지속하신 분들의 이야기 속에서 상대방이 나와 다르다는 것에 대해서 불평하고 정쟁하고 그리고 갈라서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연합의 비밀은 다름에서부터 시작하여 점점 하나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인생 최대의 비밀이다. 세 번째는 결혼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다. 즉 결혼은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남녀가 결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속 받은 그분의 백성인 교회와의 언약 관계를 본 받아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결혼 명령을 어기고 자신의 마음대로 간음과 혼음 그리고 비윤리적인 다양한 형태의 남여 관계를 유지한다면, 이는 참으로 죄와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네 번째는 결혼은 가정 속에서 정당한 질서를 유지하게 한다. 에베소서 5:22-25은 이를 잘 나타내 주소 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라고 말씀 하셨다. 이는 가정 속에서 삶을 살아가는데 질서의 중요성을 표현한 말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다양한 의견들이 존재 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가정생활에 있어서 우리가 가져야 할 질서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 이시다. 천지 창조를 통해서는 우주의 질서를 우리에게 가르치셨다. 질서가 무너진 사회 시스템은 혼돈과 파괴를 가져오게 된다. 필자는 오늘 존 피이퍼 목사님이 쓰신 “결혼 신학”이라는 책을 읽는 도중에 크리스챤들의 결혼관을 생각해 보았다. 요즈음은 결혼 상대자를 구하는 것부터, 결혼 이후에 행복한 삶을 유지하는 것도 무척 힘든 세상이 되었다. 이는 사회가 가진 다양성과 소도 속에서 허둥지둥 달리는 가운데 하나님의 결혼 명령을 잃어버린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아무리 분주 하더라도 인생에 가장 기본적이고 행복의 기초 단위인 결혼을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그리고 결혼 이야 말로 하나님에ㅅ게서 비롯되어 하나님을 통해 이루어지는 일일 뿐 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일임을 알아야 하겠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9-11-18
  • 지역복지와 교회의 선교
    필자는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에서 25여년 동안을 거주해 왔다. 수원시는 정조대왕의 화성으로 더욱 유명하다. 지역의 특징적 요소는 물이 많다. 특히 율전동은 밤나무 숲으로 되어 있어 가을이면 더욱 풍성함을 느끼고 있다. 학교에서 은퇴를 하고 지역을 거닐다 보면 많은 생각들이 삶의 자리에서 스쳐가게 된다.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 남다른 애착을 느끼게 된다. 사실 수원이 가진 지리적 특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수원은 친환경적인 도시이다. 이는 물이 많고 사방으로 산이 두러 있어서 공기도 맑고 물이 많은 곳이다. 둘째는 역사적인 유물이 많은 도시이다. 우선 정조가 세운 화성이 있다. 정조는 1792년(정조 16년) 초여름, 정약용에게 성을 축조하는데 유용한 도구를 개발하라고 지시하여 거중기를 고안하게 하였다. 성의 축조 가운데 동원된 인부에게는 급여를 지급하였고, 공사에 사용된 자재, 인건비 등을 모두 기록하여 남긴 것이 특징이다. 셋째는 교육적인 도시이다. 성균관대학교, 아주대학교, 수원대학교 등을 비롯한 많은 대학들이 인재를 양성하고 있다. 넷째는 첨단 기술 집약적 도시화 사업을 실천하고 있다. 최근 수원시와 성균관 대학이 공동으로 수원 테크노 파크 사업을 추진 중이다. 이를 통해서 양질의 직업군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이다.수원시 율전동 에는 밤밭노인복지관이 있다. 이 기관은 주위의 수없이 많은 노인들에게 다양한 복지를 제공하는 기관이다. 비록 이용해 본적은 없지만 소문에 의하면 참으로 중요한 일들을 하고 있다고 들었다. 한국의 산업화와 경제발전의 영향은 의료기술을 가져왔다. 국민이 평균 수명은 증가시키고 인구의 고령화를 급증하게 만들었다. 또한 사회 구성원의 구조적 변화는 그동안 전통적으로 부양해 왔던 노인에 대한 의무가 사라지게 만들었다. 결국 노인인구의 증가는 경제적, 소외적 감정과 같은 사회 문제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1981년 6월 5일 노인복지법이 제정되었다. 이제 우리는 노인과 지역사회복지를 연관 시키지 않을 수 없다. 홍현미라는 지역사회복지란 ‘지역사회 수준에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구성원들의 안녕과 복지가 바람직하게 이루어진 상태, 혹은 이러한 상태를 지향하는 개념’이라고 말했다. 서상식도 노인문제를 지역사회복지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중요한 포션으로 언급하였다. 그는 “우리나라처럼 빠는 고령화가 진행되면 사실상 별다른 준비 없이 고령사회를 맞이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사회문제가 발생할 것으로 우려 된다”라고 언급하였다. 밤밭노인복지관은은 2014년 사회복지법인 한국장로교복지재단(수원성 교회)이 수원시로부터 위탁받아 운영을 시작한 노인복지전문기관이다. 참고로 수원성교회는 경기 수원시 장안구 덕영대로439번길 18-10에 위치해 있으며 3,000여명의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이 교회를 통해서 설립된 밤밭노인복지관은 어르신들을 위한 상담.여가. 사회참여를 비롯하여 지역사회 협력과 경로당혁신에 이르기까지 활발하게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 기관은 사회복지사, 요양보호사, 영양사, 물리치료사, 조리사, 회계 사무원, 시설관리, 미화원,간호조무사, 운전기사, 헬스트레이너, 전문상담사에 이르기까지 각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아울러 자원봉사자, 후원자, 사회복무요원 그리고 수원시청 관계 공무원분들의 도움을 받아 아름다운 밤밭노인복지관을 만들어 가고 있다.밤밭노인복지관에서 실시하고 있는 사업을 개괄 몇 가지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정서생활지원사업이다. 이는 어르신들의 심리·정서적인 어려움을 파악하여 문제 해결과 예방을 돕는 프로그램이다. 상담 전문가 및 도우미를 통해서 법률, 세무, 영양, 구직, 집단, 심리상담을 하는 사업이다. 둘째는 평생교육지원사업 프로그램이다. 노인의 지적·신체적 특성과 욕구에 맞는 프로그램을 제공하여 여가활동 및 교육습득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서 건강하고 보람된 노후생활을 지원한다. 셋째는 사회참여지원사업이다. 이 사업은 “나도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라는 슬로건을 갖고 있다. 이는 어르신에게 축적된 지식과 기술을 활용하여, 취미와 능력에 맞는 지원활동 연계를 통해서 자신과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하고 어르신의 삶의 만족도를 높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급속화된 노령인구의 증가 속에서 교회는 이들을 대상으로 선교의 접촉점을 복지를 통해서 마련해야 할 것이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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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교
    2019-10-25
  • 동일화와 선교의 고난
    하나가 된다는 의미는 모든 고통과 즐거움 그리고 환경의 짐도 함께 짊어지고 간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면서 우리의 성정을 지닌 사람이 되시었다는 것은 동일화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에밀 부른너는 말하기를 “십자가를 바로 이해하는 사람은 성경을 이해하며 그리스도를 이해한다. 십자가를 단지 상징물, 혹은 과장하고 편협한 것, 천한 지식, 비역사적 사건 등으로 간주하는 사람은 아직 복음의 메시지를 바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고 말했다. 성경을 살펴 볼 때에 동일화에 대한 말씀이 많이 나온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양이 이리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고 하셨다. 복음의 좁은 길에는 형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리의 위험과 생명의 위험, 그리고 고난이 늘 함께 동반 된다는 것이다. 1세기 때 쯤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으로 시작하여 기독교의 탄생은 유대교와 충돌 이였다. 그 가운데 열심히 기독교를 핍박하던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그가 이단의 괴수로 알던 나사렛 예수를,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으로 오시는 분임을 만났다. 바울은 주님을 만나는 그 순간 자신이 지금까지 핍박했던 기독교의 메시지와 그들의 신앙이 옳았으며 반면에 자신이 지금까지 신뢰해왔던 유대교 바리새파 신앙이 근본적으로 잘못 되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최고의 핍박자를 주님의 사역으로 만드셔서 유대인과 이방인까지의 복음의 교량으로 사용 하셨다. 특히 바울은 고난의 의미를 선교와 연관시키고 있다. 바울이 이해한 동일화에 대한 구절도 수없이 나타나 있다. 사도행전 9장 16절에서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바울에게는 육체의 약함 뿐 아니라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에 대해 미리 예언 해주셨다. 고전10:13 “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 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 하게 하시느니라.” 우리 하나님은 바울을 택하여 고난 가운데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감당 할 수 있도록 함께 해 주신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20장 22-23절에서도 “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라는 말씀에서 보듯이 바울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전하는 일로 인해 심한 고난과 핍박이 초래될 것을 깨달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바울의 이것이 사명임을 알았기에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바울은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며 복음을 위해 누구보다 수고한 그리스도의 일꾼이었다. 바울은 납치를 당하였고, 매를 맞았으며 위협을 당했다. 또한 여러 번 체포되었고 법적 소송과 심문을 받았으며, 조롱과 무시, 난파를 당하기도 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한 열정으로 자지 못했고, 굶주렸고, 헐벗었고, 쉬지도 못했다. 바울의 삶에는 어려움과 고난이 넘쳤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 위축되거나 절망하여 포기하지 아니하였다. 아시아에서의 경험은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사형선고를 받은 것처럼 “이제 죽었구나 ” 라고 생각을 했는데 하나님 은혜로 다시 구출 받고 복음 전하게 되었다.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서 돌에 맞아 유대인들이 죽은 줄 알고 바울을 성 밖으로 내던졌다. 바울은 그 자리에서 툭툭 틀고 다시 일어나 복음 전하러 나간다. 다시는 그 지역으로 들어가지 싶지 않겠지만 바울은 다시 돌로 쳤던 곳으로 돌아가 제자들을 굳게 하고 교회를 든든히 세웠다. 이런 절망적인 일들을 경험 할 때 바울의 위대함은 현실의 상황을 뛰 여 넘어 십자가의 죽음을 짊어지고 묵묵히 달려간다. 고난의 상징인 십자가는 요즈음 한국 사회의 모임 현장에서 많이 나타난다. 이는 보수진영과 진보진영 모두들에게서 십자가의 의미를 나름대로 해석한 가운데 주장하면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사형 틀인 십자가는 기독교의 영원한 생명과 사랑의 상징이다. 또한 십자가는 하나님 마음의 표현이며 구원의 능력이다. 십자가가 없이는 기독교의 진리도, 생명도, 복음도 설명할 수 없다. 우리가 곧 고난의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을 때에 세계선교는 극대화될 것이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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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교
    2019-10-17
  • 선교학의 위기
    선교학은 신학의 꽃이라고 말한다. 이는 선교하지 않는 신학은 학문으로서의 존재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학의 꽃이 한국의 신학대학교에서 점점 설자리를 잃어가는 경향이 있다. 이는 통계적인 수치로 나타나고 있다. 그동안 선교학을 가르쳤던 신학대학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필자가 소속되어 있는 한국복음주의선교신학회 회원교들을 들여다 보면 선교학과의 이름을 바꾼다던지 아니면 폐과를 통해서 선교학의 존치를 점점 힘들게 하고 있다. 이는 참으로 위험한 신학계의 현실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선교학의 학문적 위치는 참으로 중요하다. 이는 선교신학뿐만이 아니라 선교역사, 인류학, 교차문화연구, 선교전략, 세계의 종교들, 교회서장, 종교 현상 조사학, 기타 연관된 선교 문학 학문들을 다 포함하는 학문적 영역이다. 모든 시대의 선교학 과업은 교회들이 자신들이 명령을 수행하는 정체사항, 동기, 구조, 방법, 협력과 지도력 패턴들을 학문적이고 비평적으로 조사를 한 것이다.선교가 지구촌 곳곳에서 활발하게 전개된 시기는 19세기와 20세기 초라고 보아야 한다. 믿음의 선교를 표방한 선교사들은 지구촌 어디든지 활동하면서 선교기지를 만들고 힘차게 전진하였다. 또한 선교전략가들은 선교실행을 위해서 자신의 역량을 총동원 하였다. 핸리벤과 루퍼스 앤더슨 같은 분들은 유명한 선교전략인 삼자원리를 우리들에게 주었고, A.B 심슨 같은 분은 파라처치와 로칼처치를 합성화 하여 선교의 동기를 확산 시켰다. 20세기 중반을 지나면서 선교의 황금기를 만들어 내었다. 이 기간 동안 수 많은 선교학자들은 창조적인 신학작품들을 만들어 내었다. 이러한 발전은 식민지주의 붕괴, 제2차 세계대전의 비극, 공산주의의 등장, 세속화의 세력 속에서도 선교의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복음주의 선교학은 풀러신학교와 트리니티복음주위신학교, 에즈베리 신학교 들에서 선교교수진을 확립함으로서 중요하게 전진하였다. 한국에서는 아시아연합신학대학교가 선교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 학교는 내국인 뿐만이 아니라, 외국인 학생들도 국내로 불러 들여서 아시아 선교의 초석을 놓기도 하였다. 필자도 아시아연합신학대학교에서 선교학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이러한 바탕에 힘입어 오늘날까지 선교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다. 21세기에 들어서는 길목에서 세계사적인 측면에서 많은 도전들이 있었다. 즉 1989년 베르린 장벽이 무너지고, 1990년대 초에 냉전이 종식을 고하였을때에 선교학적 사상에 극적인 충격이 있었다. 포스트모던적 시각과 폴 니더 같은 다원주의 사상가들이 교회연합적, 가톨릭적, 일부 복음주의적 선교학에 깊은 영향력을 주었다. 2001년 9월11일 이슬람 테러주의자들의 미국 무역센터의 공격과 같은 사건들은 문명의 충돌을 만들어 내었다. 이는 이슬람과 기독교의 보수주의자들에 의한 극단적 충돌이다. 이를 통해서 종교간의 긴장, 전쟁, 민족간의 폭력과 같은 사건들로 말미암아 지구촌은 하루에도 몇 번씩 터지는 폭탄이 일상화되었다. 이제 교회는 점점 힘을 잃어버린 듯한 느낌이 있다. 그동안 성장 일변도의 교회 사역의 패턴은 한계에 이르른 듯한 상황에 이르렀다. 특히 연일 터지는 교회 지도자의 부도덕인 윤리성 문제들과 교회 재산을 중심으로 터지는 분열주의는 눈을 해외로 돌리는 선교의 중심성을 모호하게 만들어 버렸다. 따라서 우리는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이러한 상황을 이겨 낼 수 있는 길은 결국 선교학의 발전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필자는 주장하고 싶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무서운 것은 신학생의 급속한 감소로 인한 헌신자들의 감소와 함께 선교학의 축소는 선교적 동력을 소멸시키고 있다. 이미 밝혔듯이 선교학은 점점 설자리를 잃어 버리고 있다. 주요 신학대학교에서의 선교학 강의 축소, 현장을 모르는 선교학자들의 강의 담당, 세속주의 사상 속에서 이미 헌신을 잃어버린 예비 사역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우리는 선교학을 살려야 하겠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설립한 학교들 속에서 정작 하나님의 사역을 활발히 펼쳐야 할 선교학을 소멸시켜 버린다면 바른 교육이라고 볼 수 있는가? 어느 선교학자의 말처럼, “선교하기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라는 말을 지금 우리마음 속에 깊이 새겨야 하겠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교)
    • 칼럼
    • 선교
    2019-09-27
  • 몽골의 한계
    어느 민족이든지 황금의 세대가 있다. 아마도 몽골은 칭키스칸 이후 몇 세기동안 세계를 호령할 만큼 강력한 집단이었다. 13세기 초에 건설된 몽골제국은 70년에 가까운 끊임없는 정복전쟁의 결과, 유럽과 인도 일부를 제외하고 유라시아 대륙 거의 대부분을 석권하였다. 농경지대의 경제와 문화에 대한 몽골 지배층의 이해도 그만큼 넓어졌다. 그들은 점차 정주 문명의 후원자로 변신하기 시작 했고 역사상 전례 없는 광역적인 교통의 네트워크를 만들어 세계 각지의 사람들과 문물이 교류하고 융합하는 장을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팍스 몽골리카’를 배경으로 ‘대여행의 시대’가 가능하게 되었고, 사신, 종교인, 상인들은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남북을 종횡으로 누볐던 것이다. 그것은 이제까지 무지와 설화의 영역으로 남아 있던 대륙의 가장 먼 지역에 관해서도 소상한 정보를 갖게 해주었다. 이런 것을 기본으로 아프리카 대륙을 포함한 상세하고 정확한 ‘세계지도’가 처음으로 제작되었고, 각 지역에 거주하는 민족들의 역사를 포괄적으로 서술한 ‘세계 역사’가 처음으로 편찬되었다. 인류의 역사는 이제까지 소통의 부족으로 인한 공간의 한계와 시간의 장벽을 비로소 뛰어 넘게 되었고, 이것은 세계가 비로소 하나의 실체로 온전하게 인식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세계사의 탄생’이라 불러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13~14세기에 성취된 세계사의 탄생은 몽골 제국의 영역 내부뿐만 아니라 그 외부에 있던 유럽까지도 같이 공유할 수 있었던 역사적 경험이었다. 유럽은 아시아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계기로 ‘대항해의 시대’로의 진입에 성공했고 해외 식민지의 개척과 산업혁명으로 가는 길을 밟아 갔지만,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은 그러지 못했다. 유럽과 비유럽의 차이를 몽골제국의 지배가 남긴 약탈과 파괴의 결과라고 해석한다면 그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논리일 것이다. 몽골제국시대에 내륙과 해양을 통한 교역은 어느 때보다 활발했고, 문물의 교류역시 그 폭과 깊이에서 전 시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과 비유럽이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은 몽골제국 붕괴 이후 유럽을 제외한 유라시아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그 정치적 전통을 계승하고 모방하려는 계승 국가들이 들어서게 되었고, 그들은 모두 내륙 지향적 제국이라는 면에서 공통점을 보였다. 따라서 그들이 ‘대항해의 시대’의 주인공이 되지 않은 것은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지 능력이 없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따라서 유럽의 성공은, 몽골제국이 남긴 정치적 군사적 부담인 ‘내륙 콤플렉스'를 느끼지 않으면서도, 몽골의 시대가 남긴 ’세계사의 탄생‘ 이라는 축복은 누릴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영광의 순간들이 얼마나 지속하였는가? 또 오늘날 현실의 문제는 어떤가? 지난주에 몽골을 여행하면서 느낀 소감은 이렇다. 대외적으로 뻣어 나가기에는 한계를 지닌 국가라는 것을 깨달았다. 즉 북쪽으로는 러시아가 버티고 있고, 남쪽으로는 중국이 가로막고 있어서 양국 사이에 갇혀 보린 형국임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무엇을 불러 오는가? 자신들이 가진 지하자원과 생산품들을 자유롭게 외국에 팔 수 없는 현실을 보게 되었다. 그들의 나라가 비록 우리나라의 27배나 된다고 하더라도 통행로가 없는 관계로 외국과의 무역이 자유롭지 못한 경우를 보게 되었다. 이로 보건데 삼면이 바다로 있는 우리나라가 얼마나 감사한지 알 수 없었다. 몽골의 드넓은 추원에 서서 칭기스칸이 자신의 후손을 위해서 무었을 했는가? 라는 질문이 뇌리를 스쳤다. 물론 칭키스칸의 후손인 쿠빌라이 칸과 같은 인문은 중국에서 원나라를 세워서 통치를 하기도 했고, 러시아 땅을 포함한 유리시아 땅을 복속시키기도 했지만, 오늘날에는 사방 가운데 둘러 쌓인 땅을 보면서 나갈 길이 없는 그들을 보게 되었다. 어쩌면 과거의 영광을 내세워서 새롭게 국가를 일으켜 보고자 하는 정치인들의 수고를 폄하하고자 한 마음은 없다. 다만 우리는 그들이 지닌 현재의 모습을 보면서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교훈이 있다. 한국의 교계도 마찬 가지이다. 지금은 순수한 성도님들의 교회에에 대한 헌신이 높아서 기독교의 위상이 하늘을 찌르지만 언젠가는 사그러들게 될 것이다. 그 때를 위해서 준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9-08-22
  • 팍스 몽골리카의 선교적 교훈
    기독교의 핵심 선교는 “모든 길은 로마로...”라는 용어 속에서 선교사의 발걸음을 인도한 길의 중요성을 나타내 주고 있다. 초대교회 선교사로서 우리에게 영원한 교훈을 주고 있는 바울도 로마가 닦아 놓은 길을 따라서 복음을 증거 였다. 필자는 몽골로 출발하기에 앞서서 몽골 제국이 갖고 있는 통치 전략적 요소 가운데 역참 네트워크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참고로 이글을 김호동 교수의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에서 많은 부분을 가져왔다. 칭기스칸이 오논 강가에서 깃발을 세운 것이 1206년이고 쿠빌하리가 항주를 함락함으로써 남송을 무너뜨린 것이 1276년이라면 적어도 70년의 세월이 흐른 셈이다. 그들은 정주지대에 대한 정복이 끝난 후에도 몽골 지배층 내부의 헤게모니 전쟁이 끊임없이 지속되었고 그와 함께 농경지대에 대한 약탈도 끊이지 않았다. 그들은 유목민 출신의 몽골 지배층도 농경민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생산활동을 방해하지 말아야 자기들이 필요로 하는 물자와 식량을 제대로 공급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몽공제국이 초기의 정복전을 끝난 후에도 울루스들간의 무력충돌, 농경민에 대한 억압적 행위가 있었지만 그 당시에는 더욱 심했다. 하지만 중국은 오히려 오랫동안 분열기를 끝내고 정치적 통일과 안정을 바탕으로 놀라운 경제적 번영을 구가하게 되었다. 몽골제국은 동쪽의 태평양에서 서쪽의 지중해에 이르기까지 유라시아 대륙 거의 대부분이 단일한 정치질서 속에 편입되고 안정을 구가하게 되었다. 이들에 의해 실현된 이러한 질서,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동서 대 교류가 바로 ‘팍스 몽골리아’였던 것이다. 인류역사상 초유의 대제국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여러 지역을 신속하고 원활하게 연결해 주는 교통과 통신의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몽골인들은 당시 다른 어떤 민족보다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동성’을 생명처럼 여기는 유목민이었기 때문이다. 자동차가 발명되기 전까지 가장 빠른 교통수단이 말이었는데 아무리 기마의 방법을 사용한다고 해도 수백 킬로미터가 넘는 장거리를 한 번에 주파하기는 어려운 일이었기에 중간 중간에 휴식을 취하거나 말을 갈아탈 수 있는 일종의 릴레이 시스템으로서 역참이라는 것을 두었는데 그것을 몽골어로 ‘잠’이라고 불렀다. 몽골인들의 역참이 언제 처음으로 건립되었는가를 밝히기는 용이하지 않으나 이미 칭기스칸 시대에도 역참이 활용되었다는 기록들이 보인다. 몽골 역참제가 보여주는 첫째 특징은 그 규모의 방대함이다. 둘째 특징은 역참이 공적 인원과 물자의 운송을 담당하는 포괄적 운송 체제였다는 점이다. 셋째 특징은 역참의 운영을 전담하는 특별한 호구, 즉 ‘참호’를 두었다는 점이다. 참호에서 차출되어 역참을 관리하는 전담 인력을 ‘참치’라고 불렀다. 넷째 특징은 몽골제국의 역참제는 인원, 정보, 물자의 원활한 수송을 위해 역참과 참호를 설치한 것 이외에도, 특별히 문서의 전달을 위해 ‘급체포’라는 전령 시스템을 운영하였다. 역참을 담당하는 참호들은 말이나 나귀 혹은 수레나 배 같은 운송 수단은 물론이거니와 정돈된 숙소와 침구를 준비해야 하고 나아가 행인이 필요로 하는 음식을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역참을 이용하려면 특별한 증빙물을 소지하고 제시해야 하는데 이러한 증빙물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는데 먼저 역참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패부와 문서가 있었다. 패부와 문서와 함께 ‘벨게’라는 또 다른 문서 포마차찰을 갖고 있어야 하는데 그것에는 여행의 사유, 인원, 노선 등을 기재하였다. 몽골 제국은 이처럼 합당한 증명서만 보여 주면 아무리 먼 곳이라도 역참 루트를 따라가면서 운송수단과 식량과 숙소를 제공받을 수 있는 포괄적 교통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몽골 제국의 역참 제도는 이제까지의 어떤 교통, 통신 네트워크보다 더 발달되고 포괄적인 것이었지만 오히려 바로 그런 이유로 인하여 제국의 인적, 물적 유통을 지나치게 역참 시스템에 의존하는 결과를 낳았고 그것은 결국 역참 운영을 책임지고 있던 참호들의 부담을 가중시켰다. 결국 몽골 제국 말기에 이르러 역참제는 초기의 활력을 상실하고 사실상 그 기능이 중단되었다. 13, 14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몽골제국의 전역에 설치되어 유라시아의 기간교통망의 기능을 하던 역참제가 후대에 깊은 영향을 남긴 것은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런가 하면 유럽에서 역참제의 출현도 몽골제국의 영향과 무관하지는 않는 듯하다. 팍스 몽골리아 리서치를 위해서 몽골을 방문한다. 이번 여행이 몽골 선교를 위해서 멋있는 전략을 도출해 내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9-08-01
  • 인간이 무섭다
    인간이 참으로 무섭다. 최근 1개월동안 우리 사회에 회자되고 있는 사건이 제주도 팬션에서 전남편을 살해하여 시신을 토막내어 바다와 쓰레기통에 버렸던 고희정 사건이었다. 이름조차 올리기에도 공포스럽고 협오감 마져 들게 된다. 언론에 비쳐진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유복하게 자란 고유정은 제주도에서 명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제주대학에 진학 한 후에 살해의 대상이 된 전 남편을 만나서 교제한 후에 결혼을 하였다. 이 때 까지만 해도 얼마나 행복하고 단란한 가정이었겠는가. 그러나 그녀는 결혼 이후부터 남편을 통제하며 폭행을 일삼았다. 결국 견디다 못한 남편이 이혼을 요청하게 되었다. 이혼이은 성사되었지만 그 당시 4살 아들의 양육권은 고유정 한테 갔다. 여러 기사를 취합해 보면 죽음을 맞이한 남편은 대학원에서 박사 공부와 고단한 생활 속에서도 아르바이트로 연명하며 고유정에게 양육비 매달 40만원을 지급했다. 고유정은 재혼을 하여 청주에서 살고 아들은 제주도 친정에 맡겨놓았다. 고유정은 아들이 있는 곳을 철저히 숨겼다. 남편은 아들을 그리워하며 만나고 싶어하는데 고유정이 아들을 2년간 만나지 못하게 했다.살해당한 전 남편은 아들의 면접교섭권 요청 중에 고유정이 재혼하였고, 아들은 제주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양육권 소송을 걸었다. 이때 고유정과 갈등이 증폭되었다. 결국 남편은 2년 법정공방 끝에 승소, 아들 면접교섭권을 얻게 되어 드디어 그리워하는 아들을 만나러 갔다. 그 전에 5월 22일 고유정은 제주도 마트에서 쓰레기 봉투 30장, 칼, 톱, 표백제 등 각종 살인도구를 구입했다.자신의 처참한 죽음도 예견하지 못 하고 아들을 만나러 가는 길에 차 안에서 행복하게 “걱정 말아요 그대” 노래를 부르며 아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블랙박스에 포착되었다. 남편과 고유정은 테마파크에서 만나 고유정이 예약한 한적한 펜션으로 갔고, 고유정은 남편에게 수면제를 먹여 반수면상태인 피해자를 흉기로 휘둘러 죽였다. 언론 기사에 의하면 공격을 당하면서도 피해자는 완전히 의식을 잃은 상태가 아니여서 공격을 받았을 때 필사적으로 도망가려 했는듯 방어혈흔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고유정은 잘게 분쇄된 시신을 쓰레기 봉투 30여개에 담아 제주에서 완도 가는 바다에 버리고 완도에서 아버지 명의의 아파트가 있는 김포로 가는 도중 전라도 영암 등 버리고 김포에서 다시 시신 2차 작업을 하여 새벽에 쓰레기장에 버리고 청주로 내려가 있다가 6월 1일에 체포되었다.사건 수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거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로 법망을 빠져 나가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이를 본 시민들은 청화대에 국민청원코너를 통해서 고희정의 살인을 철저히 단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성경에서 인류 최초의 살인은 친족 살해에서 시작된다. 창세기 4장에 소개되고 있다. 참고해 보면 “아담이 그의 아내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른 양을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를 지었더라.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재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았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낮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창 4:1-8).”우리는 타락한 인간이 갖는 무서운 죄가 살인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말씀임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고희정 사건은 타락한 인간이 범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죄를 우리 앞에 드러낸 것이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라고 말하고 있다. 죄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자신의 특정한 목적을 위해서 함께 행복을 노래하고, 자녀를 생산하고, 미래를 나누었던 남편을 잔혹하게 살해하는 것은 인간 죄성을 가장 잔악한 모습을 보여줌을 알 수 있다. 참 무서운 세상이고 인간이 무섭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 속에서 잔혹한 생각으로 가득찬 인간들을 참된 복음을 증거 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9-07-19
  • 몽골속의 네스토리안 선교
    필자는 오는 7월 14일부터 20일까지 몽골에 다녀올 예정이다. 이는 이번 여름의 계절학기로 “북방선교론” 이라는 과목을 오픈 하였는데 몽골이 연구 대상지역이기 때문이다. 이 강의를 준비하면서 참으로 많은 것들을 얻게 되었다. 특히 칭기스칸을 통해서 몽골제국이 형성되기 이전부터 네스토리안들이 선교했던 땅이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몽골의 기독교 역사를 시기별로 나누어 볼 때, 뉴질랜드 사람인 몽골 기독교역사 연구가 켐프에 따르면, 5시기로 나누는데, 제1시기는 635년부터 1206년으로, 네스토리안 기독교 전래부터 몽골 제국이 일어나기 전 칭기스칸의 등장까지의 시대이며, 제2시기는 1206년부터 1368년까지로 몽골제국 시대며, 제3시기는 몽골 제국이 무너진 이후 어두운 시대로 1368년에서 1765년까지이며, 제4시기는 1765년부터 1991년의 선교의 새로운 시대이며 현대 이전 시대이다, 제5시기로 1991년 이후 개방이후 교회가 세워진 시대로 나누어 볼 수 있다.지면 관계로 인해서 몽골에서 네스토리안 선교를 전체적으로 다룰 수 없지만 오늘은 투르크 제국(552-734)과 네스토리안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동양사에서는 투르크족(Turk, 형용사로 Turkic)을 돌궐족이라 한다. 돌궐이라는 용어는 우리가 역사드라마를 볼 때에 나오는 종족의 이름이기도 하다. 특히 돌궐과 고구려는 상호협력의 관계를 유지하여 형제국으로서의 위치를 갖기도 하였다. 6세기 중엽에서 8세기 중엽까지 투르크 제국시대는 투르계 유목 민족의 특유의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열린 시대였다. 투르크 제국은 유목민 투르크계 부민(Burmin)이 고거(高車)와 몽골계 유연을 격파하고 헤프탈(Hephthalite, 백훈족)을 병합하였다. 중앙아시아에서 몽골과 만주까지 서쪽으로 비잔틴 제국까지 북방 전 대륙을 지배하면서 북방 실크로드도 장악 하였다 이런 때 중앙아시아 소그디아나(Sogdiana) 지역의 국제 상인이었던 소그드인을 경제, 정치, 외교, 첩보의 협력자로 삼아 중앙아시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네스토리안 기독교는 5세기 헤프탈에게 선교한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볼 때 투르크제국에는 이미 네스토리안 기독교가 전래되었고, 소그드 상인 중에도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그들을 통해 기독교 복음은 옛 실크로드를 따라 몽골 초원의 유목민족들에게 전파되었다. 그들은 옛 실크로드를 따라 오아시스와 대상 무역지, 실크로드 교차로 등의 도시에 기독교 공동체를 이루며 수도원을 통해 교육과 신앙을 함양시켰다.헤프탈과 유연이 멸망하면서 그 잔존 세력이 서쪽으로 이동하여 기독교계 아바르족 국가를 세웠다. 훗날 마자르족(혹은 Khazar)에 병합되어 헝가리 국가의 모태가 되었다. 중국에서는 수·당이 합세하여 동·서투르크를 침략하였고, 페르시아 사산왕조를 멸망시킨 이슬람의 칼리프가 서투르크를 속국으로 만들었다. 이런 국제 정세 가운데, 네스토리안 기독교는 투르크 중앙아시아를 통하여 중국에 까지 전하여졌다는 것이다. 페커의 연구에 의하면, 당 제국의 왕조는 ‘이족’ 선비 탁발부에서 왔다. 그래서 서방은 5-9세기에 중화 방면을 ‘타비카츄’혹은 ‘타브카츄’라고 하였다. 국가를 건국한 이연의 어머니가 투르크 몽골인의 선비 탁발부(Tu-Ku) 가계 출신으로, 그녀는 이미 경교인 이였다고 한다.이상에서 볼 때 투르크 제국 시대 네스토리안이 존재했다는 사실뿐 아니라 꾸준한 복음의 확장을 볼 수 있었다. 중앙아시아를 지나 중국으로, 심지어 인도까지 복음이 전파되었다. 그 확장의 부흥의 원인으로 투르크 제국이 이미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던 헤프탈(백훈)과 유연을 병합하였고, 소그인들을 통치에 활용하였기 때문이다. 또 유목민족의 특유의 열린 마음으로 종교 관용정책을 펼쳤고 어느 특정 종교를 지지하거나 국교로 지정하지 않았다. 기독교 공동체와 수도원을 통해 신학과 신앙의 교육이 부흥을 이루었고 주변 국가들과 소수 유목민족에게 복음의 영향력을 미칠수 있었다.결국 칭기스칸 이전부터 기독교 역사에 이단논쟁을 일으켰던 네스토리안들이 실크로드의 길을 따라서 몽골 속에 자리를 잡았던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땅이 왜 오늘날 복음의 볼모지가 되었는가를 앞으로의 글을 통해서 밝혀 보고자 한다.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9-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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