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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진과 극복을 위한 제언
    탈진의 어원은 “몸의 기운이 다 빠져 없어짐”을 나타낸 용어이다. 그만큼 힘들다는 것이다. 탈진 현상은 삶의 과정 가운데 다양하게 나타난다. 세상을 어렵게 사는 사람들은 문제의식 속에서 해결해 보고자 하는 데에서 충족이 되지 못하고 좌절할 때, 사업을 하는 경우에는 경제적인 부분을 부도의 위기 속에서 채무자들로부터 심한 압박을 받을 때, 목회자들은 내부적으로는 성도들 간의 관계 속에서와 외부적으로는 교회성장이 생각만큼 되지 않을 때, 그리고 선교사님들은 타문화권 속에서 환경적인 적응을 잘 하지 못할 때에 탈진의 경험을 갖게 된다. 필자는 오늘의 글을 완성성하기 위해서 포털(sonheeseon.tistory.com)에서 인간들이 탈진을 경험 할 때에 나타난 현상들에 대해서 조사해 보았다. 탈진 직전 나타나는 현상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고립(isolation)의 형상을 겪게 된다. 어느 날부터 갑자기 신체적, 정서적으로 자신을 사람들과 격리한다. 사람을 만나기가 싫어진다. 누구와도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둘째는 의욕상실(lack of motivation)을 경험하게 된다. 전에는 선교에 대한 이야기만 나와도 신이 났다. 누군가와 만나 열정적으로 선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아무런 의욕이 없어지게 된다. 셋째는 공감 피로(compassion fatigue)이다. 공감 피로는 타인의 고통을 목격하며 정신/육체적으로 쇠진해지는 ‘이차적 외상 스트레스’로 정의된다. 공감 피로가 급격히 느껴지면 탈진 직전의 심각한 상황임을 자각해야 한다. 넷째는 감사와 기쁨의 상실(losing sense of joy and appreciation)이다. 평상시에는 살면서 기쁨과 만족을 느꼈었다. 기도하면서 감사할 조건을 끝없이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마음에 기쁨이 사라진다. 다섯 번째는 예민함(irritability)이다. 평상시 같았으면 쉽게 넘어갈 일도 탈진 직전에는 심히 예민해진다. 누군가 던지는 건설적인 비판 한 마디로 인해서 사역을 모두 정리하고 싶은 마음까지 든다. 여섯 번째는 집중력 결여(hard time focusing)이다. 예전에는 주어진 책무가 있을 때 쉽게 집중할 수 있었다. 주어진 시간 안에 일을 끝내놓고 여유를 갖기도 했다. 그러나 탈진의 위기에 있을 때는 무언가에 집중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없다.일곱 번째는 수면장애(insomnia)요소가 나타난다. 목회자들은 교회 내 지도자들과의 갈등이 있게 된다. 특히 교회의 지도자가 인신공격을 해올 경우에는 도저히 잠을 이룰수 없는 환경에 놓이게 된다. 여덟째는 식사장애(eating disorder)이다. 식사장애의 현상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식욕감퇴 현상이다. 아무것도 먹고 싶은 욕구가 없다. 또 다른 현상은 식욕증가 현상이다. 먹어도 채워지지 않으니 끊임없이 먹어댄다. 배가 불러서 더 먹을 수가 없어도 먹고 또 먹는다. 배탈이 날 때까지 먹는다. 이것은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공허감을 채우려고 하는 욕구의 연장선이라고 할 수 있다.아홉 번째는 눈물이 많아진다(crying). 어딘가에 홀로 숨어서 하염없이 울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면 탈진직전이라고 인식할 수 있다.열 번째는 부정적사고(being negative)를 갖게 된다. “내가 왜 이런 걸 하고 있지? 이러다 죽는 건 아닌가? 내가 해고되는 건 아닐까? 가정이 파탄다면 어떻게 하지?” 등 예상하는 모든 일들이 부정적이다. 사실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도 때론 깊은 고통 속에서 탈진을 경험하기도 한다. 따라서 자신의 고백일 수도 있다. 그러나 탈진 속에서 주저 앉아버린 삶이 아닌 극복의 힘이 필요하다. 탈진 현상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켈리 오도넬과 미쉘 루이스 오도넬은 “사역과 휴식”이라는 주제의 글에서 13개의 생존 약속에 대해서 열거해 놓았다. 이들 가운데 몇 개를 추론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당신이 어느 곳에 있든지 또 무었을 하든지 삶은 어렵다.” 둘째는 실패와 뜻밖의 재난은 선교사역에 불가피한 것이다. 셋째는 잎의 앞면이 더 푸르게 보일 수 있지만, 같은 퇴비를 준 것이다. 넷째는 충분한 시간과 노력으로도,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여전히 성취할 수 있다. 결국 우리가 어떠한 마음 자세를 갖고 현실을 극복해 나가느냐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만약 우리가 성령 충만한 생활을 추구하기만 한다면 충분히 탈진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9-06-21
  • 긍정의 힘을 추구하는 MK의 당찬 고백
    필자는 최근 “한국인 선교사”라는 잡지를 보았다. 이 잡지는 남아공에서 선교사역을 하시는 조 선교사님이 수십년 전에 한국 선교를 사진으로 남기고자 하는 취지에서 시작한 선교 잡지다. 지금은 전 성결대 총장님이신 성기호 박사님께서 발행인으로서 수고를 하시고 있다.이번 5월 호에는 필자의 자녀와 오랜 친구인 필리핀 MK 심예지라는 학생이 글을 기고하였다. 이 글의 제목은 “긍정의 힘으로 멋진 어른이 되고 싶다” 였다. 심 양이 기고한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 이국땅에서 살기란 참 쉽지 않은 일입니다. 외국인으로서 그 나라의 문화를 익혀야 하고 항상 배려해야 하고 어떠한 불이익에도 쉽게 나설 수 없습니다. 다양한 문화가 녹아있는 필리핀이지만, 여전히 외국인에 대한 차별은 존재합니다. 사소한 것부터 심할 때는 심하게. 하지만 나는 어떠한 불만도 꺼낼 수 없습니다. 학창시절의 절반은 한국에서, 나머지 절반은 이 곳 필리핀에서 보내며 더 넓은 세상에서 더 많은 사람들과 더 큰 꿈을 꾸며 성장하는 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큰 비전을 걸고 계시다고 항상굳게 믿고 그 비전을 위하여 매일매일 하루가 아깝지않게 나에게 주어진 일들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려움과 힘든 상황이 와도 긍정을 잃지 않으며 이겨내고, 언제나 그 속에서 답을 찾을 수 있는 멋진 어른이 되기를 항상 기도하는 내가 되고 습니다.‘MK (Missionary Kid)로 사는 것이 힘들지는 않은가’란 질문을 어디서나, 구에게서나 종종 듣곤 합니다. 전 그 질문을 들을 때면 대부분은 웃음으로 넘기곤 합니다. 아마 대부분의 선교사 자녀들은 공감하지 않을까요. 먼 이국땅을 떠나 가족과 친구들, 소중한 것들을 남겨 둔채로 남의 나라에서 다른 음식을 먹고 다른 세상을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더군다나 선교사 자녀이기 때문에 더 조심성 있고 바르게 행동해야 한다고 그리고 어쩌면 그런 것을 기대하는 분들이 어깨를 더 무겁게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그런 기대들과 진심 어린 충고들이 저를 바르고 좋은 길로 인도한 것 같습니다.현재 저는 영어를 공통어로 쓰고 있는 필리핀에 살고있습니다. 덕분에 굳이 학원을 다니지 않아도 영어를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6년 반 동안 이 나라에서 적응하고 살아온 결과 이 나라의 모국어인 따갈로그어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조금은 대화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인종과 만나며 다양한 문화를 접하였고 세상을 보는 눈을 키웠습니다.기쁨과 슬픔을 함께 했던 고등학교 친구들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닌 이제는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되었고, 크게 될 준비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미 앞으로의 진로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틀을 잡아가고 있는 과정에 서 있습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처럼 대학교를 시작으로 제 꿈인 승무원에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학교에서 새롭게 배우는 것들에 눈을 뜨며 어느 샌가 비행기에있는 저를 상상하곤 합니다. 성적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는 편입니다. 많은 경험을 가진 교수님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거기서 한번 더 배우고 다양한 경험들과 시뮬레이션 등을 통해 나의 미래를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도 배우고 익혀나가고 있습니다. 세상에 경험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의 노력으로 최대한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경험해보려고 노력 중 입니다.교복을 입고 머리를 단정하게 하고 나갔을 때 보기만 해도 이미 승무원 같다는 말을 들으면 가슴이 설레고 들뜨게 되는 게 아마도 내가 이 직업을 그리고 미래를 정말 원하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더 성숙하게, 성실하게 배우고 배운 만큼 실천하고 즐기는 중입니다. 요즘은 미래의 행복한 나를 상상하며 하루를 보내곤 합니다. 그 행복한 미래를 위해 더 노력하겠다고 다짐하는 제가 되기도 합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와는 달리 지금은 많은 친구들과 재미있고 행복하게 하루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저의 후배 MK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언제나 어디에서나 힘든 일은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힘든 일을 이겨내고 나면 더 성숙해진 자신을 보고 더 행복해져 있는 자신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힘들다고 불평불만 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지혜롭게 이 상황을 이겨내 나갈수 있는지, 주어진 상황의 감사 할 수 있는지 기도로 자신의 하루를 살아갔으면 합니다. “라고 글을 엮고 있다. 필자도 MK자녀들을 두었다. 그리고 심예지 처럼 모든 아픔 속에서도 누구보다도 당차게들 살고 있다. 이 글을 통해서 외치고 싶다. MK들 화이팅!.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9-06-07
  • 복음의 열정을 키우기 위한 마음
    몇일 전 실시한 안디옥 선교포럼에서 박수웅 목사님을 만났다. 박수웅 목사님은 젊은 시절 한국대학생선교회 간사로서 부산지부를 책임지면서 젊은 학생들에게 비젼과 선교를 가르쳤던 분이었다. 그 분에 의해 주어진 책은 “민족복음화운동사”였다. 이 책 가운데 특히 나의 눈을 사로잡는 것은 “이성봉 목사의 부흥사경회”였다. 왜냐 하면 최근 기독교 영성이 점점 소멸되는 듯한 분위기를 학생들을 가르치는 신학교 현장에서 느끼기 때문이다. 이성봉 목사는 한국교회가 자랑하는 디엘 무디 같은 부흥사 였다. 집회의 현장 마다 은혜가 넘치는 것은 물론 성결교가 갖는 성결과 성화적 삶을 많이 강조하신 분이였다. 그 분의 어린 시절은 무척 가난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특히 젊은 시절에는 타락의 극치를 이루어 술과 담배 그리고 놀음과 기생에 빠져서 호랑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에 골수염 병을 얻어 다리를 절단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막상 죽음을 앞두고 인생의 허무함과 자신의 폐역한 생활로 말미암아 철저한 회개를 통해서 중생의 체험을 하게 되었다. 1925년 동양선교회 성서학원에 입학을 하면서부터 그동안에 지은 죄를 토설하고 회개의 표시로 주위로부터 도적질 했던 것들을 생각날 때마다 되갚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그의 생활 태도와 신앙은 많은 도전을 주어서 목회 현장에서 급속한 교회 성장을 이루게 되었다. 1937년 총회 기간에 환상 가운데 김익두 목사의 안수로 말미암아 전신이 땀에 흠뻑 젖는 체험을 하면서부터 부흥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전국을 다니면서 집회를 하게 되었다. 그의 집회는 성령의 강한 역사와 함께 귀신들린 자들이 놓임을 받고, 여러 해 동안 연주창을 앓던 이가 나았으며, 심지어 부자집 소실로 호강을 누리던 부인이 복음을 받고 회개하여 집을 나와서 어렵게 살면서도 교회에 충성을 바치는 역사가 나타나게 되었다. 그의 신앙을 지키고 영향을 주었던 책은 “천로역정”이었다. 이를 언제나 품고 다니면서 설교에 인용하기도 하였다. 사실 그는 30여년 동안 부흥사로서 전국과 미국을 누비면서도 천로역정을 설교했을 만큼 죤 번연이 기록한 책을 좋아했다고 한다.부흥회를 인도하던 중에 수없이 많은 고난이 있었다. 일제 시대에 한번은 북한 땅의 황주 던모루 라는 곳에서 부흥회를 인도 하면서 “주를 사랑하지 않는 개인이나, 가정이나, 국가는 다 망한다”라는 설교를 하였다. 결국 이것이 문제가 되어 사리원 경찰서로 끌려들어 가게 되었다. 그곳에는 악명 높은 형사인 호시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에 의해서 이 목사님은 13일간 모진 고문을 받게 되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 온듯하다. 호시라는 형사는 장티부스에 걸려서 죽었고, 후임으로 온 형사도 죽었고, 다시 5일 후에는 경찰서장이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 뿐만이 아니라 이 목사님을 기소했던 검사도 늑막염에 걸렸으며, 그의 부인과 장모도 별안간 앓기 시작하였다. 결국 6개월 만에 감옥에서 풀려 나와 정상적으로 부흥회를 인도하게 되었다. 해방을 맞이한 이 목사님은 1946년 범을 이용하여 남하 하였다. 이후 전라남도 목포를 중심으로 사역을 펼치던 중에 기독교 교회사에서 위대한 인물들인 문준경, 김준곤, 이만신 같은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1950년 6.25가 발발하자 목포에서 공산당들에게 잡히게 되었다. 기독교 지도자인 그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 이었다. 그런데 그곳에 있었던 인민대장의 도움으로 18명의 총살 속에서도 간신히 석방을 하게 되었다. 이후 전국 방방곡곡을 돌면서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며 살다가 1965년 8월 2일 66세의 일기로 주님의 부름을 받았다. 한 사람의 부흥사를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느낄 수 있는가? 이는 복음의 열정이 되살아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다. 지금 우리는 거대하게 밀려오는 세속주의와 자유주의적 신학의 성경 해석으로 말미암아 영적 능력을 잃고 패배주의에서 오는 좌절 속에서 신앙의 목슴을 연명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는 이성봉 목사님 같은 신앙의 선배를 기려야 하겠다. 그 분이 우리에게 주신 신앙와 영성의 유산을 가치 있게 담아야 하겠다. 그렇게 될 때에 한국교회는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9-05-29
  • 사랑하는 제자 장한업 선교사
    장한업(張漢業)박사는 필자와 다년간 학문을 함께 연구하였다. 그분이 한세대학교 영산신학대학원에 편입해 오면서 목회학 석사과정(M.Div), 선교신학 석사과정(Th.M Missiology) 그리고 선교신학 박사과정(Ph.D Missiology)을 함께 하였다. 따라서 스승과 제자 동료 그리고 어쩌면 형제와 같이 지내고 있다. 장한업 박사님은 대만에서 대만순복음교회를 비롯하여 스물 한 곳의 교회를 동시에 섬기고 있으며 제자양성을 위해서 순복음신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특히 한국과 동남아 중화권의 기독교 신앙적 가교 역할을 위하여 아시아중화권 방한 성회를 매년 주관하여 적게는 3,000명 그리고 많게는 5,000여명을 방한 성회에 초청하고 있다. 참으로 놀라운 사역을 감당하는 분이다. 몇 주 전에 장 박사님이 주관하는 대만순복음신학교의 강의 차 타이페이를 가게 되었다. 그리고 두권의 책을 선물 받았다. 한권은 “대만을 딛고 중화를 넘어 세계로”라는 책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 기독교 성령 백년 인물사 IV”였다. 선물된 두 권의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 알지 못했던 장 박사님의 모습을 보면서 감동과 애뜻한 정을 느끼게 되었다. 장 박사님은 중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불행 하게도 장 박사님이 다섯 살 때에 중국인 아버님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러한 결과로 어머님은 중국인과 한번 한국인과 두 번을 결혼 하면서 국적은 중국인에서 한국인으로, 성씨는 장씨 에서 강씨 그리고 이씨로 바뀌었다. 설상가상으로 배타성이 심한 한국의 문화 속에서 국적은 중국인에서 한국인으로 바뀌다가 결국에는 장씨 성을 가진 중국인으로 되돌아 가게 되었다. 힘든 가운데에서도 어머니의 사랑과 배려로 초등학교를 비롯하여 중학교를 거쳐서 고등학교 까지 화교 학교를 보내 주셨다. 열여덟 살이 되었을 때에 대만으로 유학을 가기 위해 출국 서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외국인 등록증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일은 열여덟 해를 불법체류를 하는 꼴이 되었다. 결국 한국의 법무부가 그동안의 한국 체류에 대한 상황을 인정 하면서 민사 재판을 통해서 외국인 거류증과 함께 대만 유학길에 오르게 되었다. 드디어 1979년 9월에 대만 유학길에 올라서 1983년 대만대학교를 졸업한 후에 1986년 4월에 사모님이신 우야칭 씨를 만나서 결혼하고 지금은 세 자녀의 아빠가 되었다. 장 박사님의 회심은 부산 초량화교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진학 전 여름방학 때에 초량침례교 화교교회의 여름 수련회에 참석할 때였다. 이 집회에서 중생의 체험을 하였다. 결혼 후에 대만선교의 소명과 함께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한국교회와 중국교회의 교량 역할을 하라. 전 세계의 중국인 교회를 부흥시켜라”라는 특별한 음성을 듣게 되었다. 이후 신학의 길은 순탄치 않았다. 1988년 2월 갓 태어나 석달 된 아들 장웨이를 데리고 서울에 왔다. 낮에는 순복음신학교에서, 저녁에는 순복음영산신학대학원에서 공부 했지만 두 학교 모두가 교육부 허가를 취득한 학교가 아니기 때문에 한국 거주에 필요한 Visa문제로 석달에 한번씩 대만을 왕복해야 하는 경험을 하여야 했다. 1989년 순복음신학원, 1990년 순복음영산신학대학원을 마치고 여의도순복음교회 전도사가 되어 청년국에서 사역을 하게 되었다. 1991년 4월20일에에 조용기 목사님과 여의도 순복음교회의 파송을 받아 타이페이 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던 중에 1992년 11월 타이페이순복음교회의 담임목사로 위임되어 지금까지 사역을 하고 있다.이후에 한세대학교 대학원을 통해 필자와 만남을 통해서 “중화 디아스포라 선교를 위한 구조적 선교모델과 역-환 상황화 통합 모델 연구”라는 제목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따라서 지금은 학문성과 영성을 모두 갖춘 훌륭한 리더십을 소유하여 동남아 중화권 사역의 지도자가 되어 있다. 한 사람의 생애를 이토록 깊이 있게 다루 워 본 것은 매우 흥미 있는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글을 쓰고 있는 필자는 매우 행복하고, 자랑스럽다. 왜냐하면 나의 언어가 필요 없을 만큼 멋진 사역과 삶을 살고 있는 장 박사님이 무척 귀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를 향해서 사랑의 격려를 하고 있다. 필자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준 말을 인용하여 장 박사님에게 사랑의 언어를 드리고 싶다.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1-5)”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9-05-10
  • 아버지의 헌신이 주는 삶의 교훈
    거리를 거닐다 보면 현수막에 “아버지가 살아야 가정이 삽니다”라는 문구가 있다. 교회의 아버지 학교에서 주관하는 강의의 포스터 임을 알 수 있다. 맞는 말이다. 아버지는 가정의 기둥이다. 그러나 가정의 기둥인 아버지의 삶은 항상 녹녹치 않다. 최근에 포털에 이런 기사를 보았다. “남자로 태어나 너무 힘들었다” 짓눌린 아버지들 [심층기획-고독사 내몰리는 중년男] 이라는 기사이다.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작년 50대 무연고사 男 513명·女 63명.. 왜 차이 큰가 / “도와달라” 말 못하고 속앓이만 술·담배 의존하다 벼랑 끝 몰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12년 무연고 사망자로 처리된 50대 남성은 231명이었다. 여성은 24명에 불과했다. 2013년에는 299명 대 40명, 그 이듬해는 306명 대 31명으로 차이가 전혀 좁혀지지 않았다. 지난해 역시 남성 513명, 여성 63명으로 8.1배나 차이 났다. 40대와 60〜64세에서도 무연고 사망 남성은 매년 세 자릿수, 여성은 두 자릿수를 유지했다. 중장년 무연고사에서 성별 차이가 확연한 이유로 가부장적 문화와 이에서 비롯한 남성들의 ‘사회적 짐’이 꼽힌다. 남성의 가족 부양이 당연한 문화에서는 경쟁에서 탈락하는 순간 자존감의 상처가 클 수밖에 없다. 타인과 소통에 서툴다 보니 이를 풀 곳도 없다. 한번 사회에서 거부당한 남성들은 또 거부당할까 두려워 ‘도와 달라’고 하지도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지병이 악화하거나 외로움을 술·담배로 풀다 보면 벼랑 끝에 몰리게 된다. 박민성 부산시의원은 “이는 결국 가부장적인 우리 사회가 남성에게 지워준 짐”이라며 “게다가 남성은 주로 술로 속을 푸는 사회문화적 특성이 있다 보니 소통 부족이 이들을 더 고립되게 한다”고 설명했다. 2년간 방에 갇혀 지냈던 조용성(51·가명)씨는 “50대에 남들은 잘나가는데 나는 이러고 있다는 좌절감이 굉장히 크다”며 “밖에 나갔다가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보면 자기가 더 작아진다”고 토로했다. 그는 “여성들은 더 실질적·실용적인데 남자들은 체면치레와 껍데기 포장이 많다”며 “이게 다 벗겨지고 나면 멘탈이 약한 사람들은 혼이 나가기도 한다”고 전했다. 상처받은 자존감과 ‘도와 달라’ 나서지 못하는 심리는 서로 맞물리며 남성의 고립을 심화시킨다. 조씨는 “여성들이 어떻게든 복지 서비스를 받기 위해 빌어도 본다면 남성들은 대다수가 ‘관둬, 나 더러워서 안해’하고 돌아서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그는 “거꾸로 말하면 거부당하는 데 상처가 커서 더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것”이라며 “이미 사회에서 거부당한 경험을 다시 하고 싶지 않은 심리”라고 전했다. 일선 복지 현장에서는 남녀 차이가 확연하다. 서울시 한 자치구 공무원은 “기초생활수급 대상인지 알아보러 적극적으로 오는 분들은 다 여자 분”이라며 “노인 부부여도 99% 할머니가 힘든 신세를 하소연한다”고 전했다. 시민 참여율을 높여야 하는 공공기관으로서는 자연스레 각종 일자리·여가 프로그램을 여성 위주로 운영할 수밖에 없다. 남성들이 짊어져 온 가장으로서 삶의 무게는 독거 중년인 정상진(52·가명)씨 말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는 “다시 태어나면 여자이고 싶다”며 “남자로 태어나서 너무 힘들었다. 가정을 책임지고 희생을 감내해야 하니까”라고 말끝을 흐렸다. 아버지에게 ‘내가 힘들어도 자식을 키우고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고 교육받은 그는 가족을 부양하러 15년간 해외를 떠돌다 건강을 잃었다.’이런 기사처럼 아버지의 삶이란 참 힘든 것 같다. 필자는 비록 직장의 현장에서 은퇴를 하였지만 가족의 부양을 위해서 오늘도 보통 사람의 아버지들처럼 분주하게 뛰고 있다. 새벽부터 일어나 병원에 입원한 아내의 병실을 방문하여야 하고, 대만에서 강의를 하기 위해서 여행을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시간을 지키기 위해서 칼럼을 완성해야 한다.성경에는 가장인 남편이 자신의 아내에 대한 의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5:25-27)’라고 말씀하고 있다. 가장의 책임이 어찌 아내뿐이랴!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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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4-26
  • 지갑 찾아준 중국인과 한국교회의 성결성
    최근 중국에서 놀라운 미담이 있었다고 신문에 소개되고 있다. 주제는 “병원비 쓰세요. 300만원 지갑 찾아줬더니 8천만원 보상“이라는 주제이다. 사연은 이렇다. 중국의 산둥성 지난시에 사는 탕샤오롱씨는 두 살짜리 아이의 골수이식 수술을 위해 병원생활을 하고 있다. 골수 이식 수술에 들어가는 비용은 40만위안(6762만원)이다.그는 최근 병원 주변에서 지갑을 하나 주었다. 지갑에는 2만 위안(338만원)의 현금과 신용카드, 운전면허 등이 들어 있었다. 탕씨는 아이의 병원비에 보태 쓰려는 생각은 하던 순간, 이 사람도 나와 똑같이 병원비 때문에 고민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탕씨는 수소문 끝에 지갑의 주인을 찾아 지갑을 돌려주었다. 지갑 주인은 딩이롱씨로 보상을 제안했으나 탕씨는 사양했다.둘은 서로 연락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그런데 얼마 후 딩이롱씨는 탕씨가 아이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알고 보니 딩이롱씨는 거물 야채상이었다. 그는 자신의 창고에 순무 200톤이 있으며, 어차피 5월 이전까지 처리하지 못하면 값이 떨어지기 때문에 순무 200톤을 탕씨에게 기증하겠다고 제안했다.이 같은 사연이 지방신문에 실리자 다음날 순무 200톤이 모두 팔렸다. 순무 판매대금은 50만 위안(8453만원)이었다. 이는 아이의 수술비를 충분히 댈 수 있는 돈이었다. 이같은 사연이 알려지자 중국의 누리꾼들은 “정직함은 언젠가는 보상을 받는다” 등의 댓글을 달며 환호하고 있다고 베이징청년보는 전했다. 비록 국내의 사건이 아니지만 참으로 응원을 보낼만한 미담이다. 미국에서 선교적 교회론을 주창하신 찰스 E. 벤 엥겐 교수가 있다. 그는 하나님의 선교적 교회론을 말하면서 교회의 성결성을 강조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성결하다. 하지만 우리가 교회의 성결성을 언급하는 것은 상당히 불편한 일이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에베소서에서는 ‘성도들’이라는 용어가 핵심 단어로 쓰인다. 더욱이 바울은 우리가 받은 성결한 생활, 어두움에서 빛으로의 소명을 강조하고 전신 갑주를 입은 군사로 정사와 권세와 공중권세 잡은 자들과 싸우라고 권고 한다”라고 언급한다. 요즈음 우리들의 교회 속에 바울이 말한 것처럼 성결한 삶을 위해 노력하는 성도가 있는가? 세속주의의 흐름 속에서 바울 당시에 책망 받았던 이방인들의 모습이 아닌가?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방인들을 향하여 세상에서의 삶을 책망하고 있다. 즉 방탕과 방임, 음행, 욕심, 도적질, 더러운 말, 악독과 분냄, 거짓, 탐심과 같은 것들을 멀리하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이제 한국교회는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의 의식 구조를 돌아보아야 한다. 최근 매체를 들여다보면 유명 가수가 연루된 술집이야기에서부터 몇몇 연애인이 개입되었다는 동영상 파문으로 머리가 시끄럽다. 그 뿐만 아니라 별장 성접대 같은 기사들을 대할 때마다 소돔과 고모라를 연상시키는 사회상을 보게 된다. 최근에 국가를 책임질 관리자를 뽑는 청문회가 있었다. 어느 후보자는 자식의 유학생활을 위해서 고급 승용차를 사주어서 지탄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회를 향하여 교회는 돌을 던질 수 있는가? 혹시 하나님의 큰 종이라고 자처한 교회 목사의 자녀들이 호랑방탕하며 호화롭게 유학생활은 하고 있지 않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 교회는 내향성과 외향성 모두에게서 성결성을 회복해야 하겠다. 기대와는 달리 매체의 기사를 살펴보면 교회의 성결성은 찾기가 어려울 때가 많다. 지도자들의 자리싸움과 비도덕적인 삶의 문제들 불쌍한 성도들의 헌금을 도박과 술집에서 탕진하는 목사들을 보면서 깊은 한숨을 쉴 때가 많다. 오늘은 중국에서 있었던 어느 순박한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살펴보았다.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은 정직성에서 나온다. 우리 교회는 성직의 가운 속에 감추어진 탐욕과 욕정과 명예욕으로 말미암아 교회의 성결성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 주님은 반드시 재림하실 것이다. 아니면 우리가 먼저 부름을 받아서 주님 앞에 설 것이다. 그 때에 심판이 있음을 더 늦기 전에 깨달아야 하겠다.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9-04-18
  • 조선 정치와 헐버트 선교사의 헌신
    선교에 있어서 정치는 매우 중요한 요소로 평가해 볼 수 있다. 즉 지도자의 정치적 편향성에 의해서 복음의 문이 열리기도 하고 닫히기도 한다. 이러한 경우를 초대교회 이후 로마에 복음이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한 콘스탄틴 대제의 집권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해외의 선교지에서 선교사님들은 현지 정치 지도자들과 많은 교분을 갖게 된다. 이는 현대 선교이후에 서구의 선교사들이 제 3 지역에서 선교를 하는 동안에 정치적 지도력을 현지인들에게 가르치는 경향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말기에 한국에 선교사로 왔던 헐버트도 궁궐 속에서 국가의 기울어진 운명을 부여잡고 노심초사하던 고종에게 정치적인 힘을 드렸음을 다양한 문헌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구한말 나라가 흔들리고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나라를 되찾기 위해 피를 흘리고 몸을 던졌다. 헐버트는 먼저 필봉으로 일제와 맞섰으며, 이어서 밀사외교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한일강제병합 이후 일제의 박해로 미국에 돌아가서도 그는 집회, 강연, 언론을 통하여 줄기차게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대한민국 초대 공보처장을 지낸 김동성은 1948년에 쓴 “미국인 상기”에 다음과 같이 헐버트에 대한 글을 남겼다. “만약 외국인으로서 한국에 대한 애국자가 있다면 호머 헐버트보다 나은 이는 다시없다. 한국에서 추방되어 미국으로 쫓겨난 그는 많은 기회를 만들어 한국을 대변하고 소개했다. 한 사람의 힘으로는 미약하지만 열정과 성의를 다해 청중을 감동시켰다. 강연 때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한국과 한국인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일생을 두고 그는 한국을 위해 헌신했다.”김동성은 헐버트가 흘린 한국 사랑의 눈물에 넋이 나갈 정도로 감격하였다.고종의 불침번을 섰던 헐버트는 헤이그 밀사로도 파송된다. 일본은 급기야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을 보호한다는 핑계로 대한제국의 모든 외교권을 일본이 감리, 지휘하고 서울에 일본통감이 주재한다는 보호조약을 총칼의 위협 아래 억지로 맺었다. 이렇게 위협으로 맺은 불법 조약이 바로 ‘을사늑약’이다. 러일전쟁이 끝났으나 일본이 오히려 나라까지 집어삼키려 하자 고종황제와 충신들은 일제로부터 나라를 구하기 위해 노심초사 하였다.사실 역사적으로 을사늑약의 날짜가 1905년 11월 18일로 나오는 역사 기록도 있다. 이는 을사늑약을 체결하기 위해 일본이 회유와 강압으로 소집한 의정부 회의가 1905년 11월 17일 자정을 넘겨 끝났기 때문이다. 이 회의에서 일제는 총칼로 위협하여 대신들에게 서명할 것을 강요하였으나 한규설, 민영기, 이하영 등은 끝까지 반대하였고 소위 을사오적인 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은 찬성하였다. 특히 1905년 8월 일본의 한국지배를 영국이 양해한다는 제 2차 영·일 동맹이 체결되자 황제와 측근들은 주권 상실의 위기를 감지하고 대책 마련에 부심하였다. 그러한 와중에 헐버트와 민영환은 조미수호통상조약에 담겨 있는 선위조처(善爲措處) 구절을 떠올렸다. 조미수호통상조약의 문구를 자세히 검토한 두 사람은 미국 대통령에게 황제의 친서를 보내 일제의 한국 침략 야욕을 저지시켜 달라고 호소하자는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 이어서 민영환이 고종황제에게 친서전달과 특사 파견을 건의하였다. 고종황제는 이 건의를 즉시 수락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오히려 이 조약을 무시하고 일본과 태프트-가쓰라 밀약을 맺으며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친선 의무 조항을 무시하였다. 태프트-가스라 밀약은 국제적으로 The Taft-Katsura Agreement로 기록되고 있어 이 책에서는 태프트-가쓰라 밀약 이라고 표현하였다. 이 조약 때문에 미국은 헐버트가 가지고 간 고종황제의 친서마저도 전달받기를 거절당했다.요즈음 한국의 매체는 3.1 운동의 주는 교훈과 역사적 인물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이렇게 떠드는 수많은 목소리들 가운데 선교사들의 업적은 점전 소멸되어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럴 때 일수록 더욱더 선교사님들이 노력하셨던 조선 사랑의 사건들을 더 높이 드러내어야 할 시간이다. 이와 같은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서 선교사님들이 사역하셨던 모든 일들을 역사적인 조명과 함께 체계적으로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 또한 각종 매체를 통해서 모든 국민들이 알 수 있도록 영상화 하는 작업도 중요하다. 이제 조선의 선교역사에 담겨진 진실한 것들을 추분하게 드러내는 작업이 지속적으로 진행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연구원)
    • 칼럼
    • 선교
    2019-04-05
  • 헐버트 선교사의 교육선교
    지난 2월에 필자의 제자인 유성실 박사는 헐버트의 한국선교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필자는 이 논문을 지도하면서 많은 도전과 함께 중요한 헐버트의 선교사상을 읽을 수 있었다. 유성실 박사가 기술한 논문의 결론 부분을 소개하면서 오늘의 칼럼을 엮고자 한다. 구한말 위기의 시대에 구원투수가 되어준 초기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Homer B. Hulbert)는 통전적 선교사였다. 통전적 선교란 복음전도와 사회참여 활동을 함께 진행하여 영혼을 살리고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선교를 지칭한다. 헐버트가 내한하던 당시의 조선은 선교사로서의 입국은 불가능하였고 복음전파 활동 또한 금지되어 있었다. 이 당시 미국은 남북전쟁 이후 국가가 안정되면서 감리교 창시자의 “나는 전 세계를 나의 교구로 생각한다”는 말처럼 세계복음화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1886년에는 무디(Dwight L. Moody)를 중심으로 해외선교자원학생운동(SVM, 1886년)이 시작되어‘가서 온 민족을 복음화하자, 이 세대에 세계를 복음화하자’는 표어 아래 수많은 학생들이 아시아와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으로 선교사로 나갔던 때이다. 헐버트는 1886년 7월 4일 조선 최초의 근대식 공교육기관인 육영공원(育英公院) 교사자격으로 열악하고 풍전등화와 같았던 조선에 들어왔다. 영어를 주로 가르쳤지만 역사, 지리, 사회, 자연과학, 대산법 등도 가르쳤다. 당시에 한국에는 교과서가 없었으므로 그가 미국에서 미리 준비해온 교육용 자료를 사용하였다. 그는 한국에 온지 3년 만에 최초의 순 한글 교과서 <사민필지>를 저술하였다. 그는 한글이 과학적이고 독창적인 음성언어로서 쓰기에도 편하므로 장차 영어에서 라틴어와 같은 위치가 될 것이라고 예견하였다. 실제로 그는 한국어와 한글의 우수성을 과학적으로 연구하여 국내외 언론을 통해 수십 편의 논문을 발표하여 한글의 우수성을 최초로 국제사회에 알렸다. 조선의 근대교육 담당자로서 그는 육영공원에서 근무하면서 제중원 학당에서도 학생을 가르쳤다. 관립영어학교 교사, 한성사범학교 교장, 관립중학교의 교사로도 근무하였다. 헐버트는 육영공원에서 5년 재직 후 사임하고 잠시 미국으로 들어갔으나 1893년에 미국 버나드 대학 총장직 제의도 뿌리치고, 감리교의 선교사 자격으로 다시 조선에 입국하여 선교활동을 하였다. 그해에 볼드윈교회(현재 동대문교회) 2대 담임 목사가 되었다. 1897년 대한제국 교육고문과 한성사범학교의 교장이 되었지만 목회자 역할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선교사들을 다방면으로 도왔으며, 후일 독립운동의 산실이 된 상동교회에서 설교도 하고 상동청년회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유능한 청년들을 지도자로 길러내기 위해 기독청년회(YMCA)를 창립하였다. 또한 1906년 노량진교회 설립 예배를 인도하였다. 당시 일본이 노량진에 수원지를 만든다면서 인근 지역을 보상도 없이 몰수하려 했다. 헐버트는 땅을 빼앗기는 한국인들을 돕고, 기독교를 전파하고자 노량진교회의 공식 예배를 최초로 인도하여, 지역 주민들의 재산권을 보호하였고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노량진교회 교인이 되었다. 1893년부터 헐버트는 배재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배재학당 내의 감리교 출판부인 삼문출판사의 책임을 맡았으며 교과서와 ‘천로역정’등 많은 기독교 서적을 출판하였다. 1895년 8월에 한글 로마자 표기법을 고안하였다. 이 당시 주시경은 헐버트의 제자로서 삼문출판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헐버트와 주시경이 함께 연구했던 한글의 ‘띄어쓰기’와 ‘점찍기’는 1896년《독립신문》에서 최초로 사용되었다. 헐버트는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아리랑을 최초로 오선악보에 채보하였다. 또한 헐버트는 많은 외국서적과 잡지, 기사를 번역, 기고, 저술, 출판했다. 한국의 역사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 조선왕조 역사서 <대동기년(大東紀年)>, 종합 역사서 <한국사(The History of Korea)>, 역사, 풍물, 사회제도를 망라한 <대한제국멸망사(The Passing of Korea)>를 저술하였으며, 관립중학교 제자 오승근과 함께 <대한역사>라는 한글 역사 교과서를 출판하였다. 헐버트의 조선 선교는 교육 선교로부터 시작하였음을 알게 된다. 이와 같은 파란 눈을 가진 선교사의 헌신이 없었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이 어떻게 세계에 우뚝 솟은 나라가 될 수 있었겠는가? 참으로 위해한 작업을 해 놓으신 헐버트를 우리는 오래토록 기억해야 하겠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9-03-22
  • 미얀마 선교 단상
    필자는 지난 2월말 미얀마를 선교 연구차 다녀왔다. 평소에 TV화면으로만 쳐다보다가 직접 방문하면서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었다. 미얀마에 대한 포털의 정보는 다음과 같다. 미얀마에 사람이 처음으로 정착해 산 곳은 약 1만 1,000년 전 이라와디 강 중류유역으로 추측되고 있다. 대략 BC 100〜AD 800년경 피우족으로 알려진 일단의 티베트미얀마어계 민족이 이라와디 강 상류유역에 나타났다. 남쪽에는 몬족으로 알려진 오스트로아시아어족에 속하는 민족이 시탕 강 유역에 정착해 타톤에 항구 수도를 세웠다.수도를 프롬(피에)에 정하고 번영을 누렸던 피우국과 마찬가지로 몬족이 세운 나라도 번영을 누렸다. 9세기 피우의 수도는 중국 남조의 타이산에게로 넘어갔다. 피우에게 지배를 받던 미얀마인들은 티베트미얀마어계 여러 민족들을 장악하고 파간을 그들의 수도로 정했다. 1044년 파간에서 아나우라타가 왕좌에 올라 몇 년 동안에 미얀마 전체를 하나의 왕국으로 통일하고 최초의 미얀마 제국을 수립했으나 1287년 몽골족의 침략을 받아 무너지고 말았다.16세기 퉁구 왕조 치하에서 최초로 재통일이 이루어져 1752년까지 단속적으로 계속되었으나 곧이어 다시 몬족의 미얀마 지배가 시작되었다. 미얀마의 저항세력은 민중지도자 알라웅파야를 중심으로 다시 모였으며, 1759년에는 마침내 미얀마 전역을 확보하고 미얀마 최후의 왕조를 건설했다. 알라웅파야 왕국은 인접 국가들을 놀라게 할 만한 팽창정책들을 펼쳐 나갔다. 특히 아삼 지방에 대한 미얀마의 야심은 영국과 충돌한 계기가 되었다.미얀마는 아삼 지방을 점령했으나 2번에 걸친 영국-미얀마 전쟁(1824〜26, 1852)으로 아삼 지방뿐만 아니라 마니푸르·아라칸·테나세림과 페구까지 잃고 말았다. 이어 미얀마의 나머지 지역은 제3차 영국-미얀마 전쟁이 끝나면서 1885년 영국으로 넘어갔다. 영국의 지배 아래에서 미얀마는 인도의 일개 주(州)로 전락했다. 영국은 불교를 국교로 계속 인정할 것을 거부하여 미얀마인을 분개시켰으며 더욱이 영국의 자유방임 경제정책들은 미얀마 국민 대부분을 소외시켜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이러한 일들로 1931년 농민 봉기가 일어났으며 그로 인해 1937년 영국은 미얀마를 인도에서 분리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일본에 점령당했으며 1948년초까지 다시 영국의 통치를 받았다.1962년에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면서 사회주의 미얀마를 건설할 목적으로 혁명위원회가 조직되었다. 군 지도자들은 미얀마의 주요기업들을 국영화했으며 미얀마를 외부세계와의 접촉으로부터 고립시키면서 급속한 공업화 정책에 착수했으나 실패했다. 1980년대말까지 정부의 부패와 잘못된 관리정책으로 자원이 풍부한 미얀마는 세계에서 매우 가난한 나라 중의 하나가 되었다. 오랫동안 쌓여온 대중의 불만이 1987〜88년 광범위한 반정부 폭동으로 터져나왔으나 군의 폭력 진압으로 실패했다. 그후 미얀마사회주의계획당(MSPP)의 1당독재는 폐지되었고, 여러 정당이 속속 등장했다.1990년 5월 헌법 개정을 위한 총선에 약 90개의 정당이 참여해 야당인 민주국민동맹(National League for Democracy/ NLD)이 압도적으로 승리를 거두어 새 의회의 의석을 대부분 차지했지만, 1988년부터 권력을 장악한 군사정부의 국가법질서회복위원회(SLORC)는 선거무효를 선언하고 당선자의 상당수를 투옥시켰다. SLORC가 장악한 국회는 신헌법을 제정했고, NLD의 지도자이며 1991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아웅산 수지와 야당의 활동을 지속적으로 탄압했다. 이후 수지가 정권을 잡게 되면서 로힝야족과 정부군의 충돌로 최소 96명이 사망했으며 진압 과정에서 민간인을 향한 정부군의 발포가 이뤄져 논란이 일고 있다. 이러한 미얀마에서 2년 동안의 선교에서 엄청난 선교의 열매를 맺는 것을 목도하였다. 필자의 제자인 정상진 선교사님은 짧은 기간에 두 개의 교회를 헌당하였고, 하나의 복지관을 설립하여 공사를 하고 있었다. 교회의 장소는 한국의 난지도를 연상하게 만드는 열악한 지역이었다. 하수구와 오물이 섞인 웅덩이 위에 나무를 세워 원두막 같은 집을 짓고 있었다. 필자와 일행들은 그곳을 지나면서 악취로 인해서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정말 힘든 장소에서 젊음을 불태우고 있는 선교사의 거칠어진 얼굴을 보면서 선교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다. 부디 건강을 잃지 말라는 당부 밖에 할 수 없는 나로서는 공항에서 포응을 하면서 해어질 때에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 시간이었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9-03-08
  • 중국 지하교회를 위한 기도
    2018년 12월 12일 조선일보 인터넷신문의 최상현 기자 의하면 ‘중국 경찰, 지하교회 급습해 목사·신도 100여명 체포’되었다는 기사는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 최 기자는 기사에서 중국 기독교인들이 잡혀 간 사항을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중국 경찰이 당국의 승인을 받지 않은 지하 교회를 급습해 기독교 신도 100여명을 잡아들였다. 시진핑 주석이 장기집권을 위해 사상통제와 검열을 강화하는 가운데 종교 탄압 수위도 높아졌다.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중국 쓰촨(四川)성 청두(成都)시 경찰이 지난 9일(현지 시각) 유명한 지하 교회인 추위(秋雨)성약교회를 급습해 목사인 왕이를 포함해 신도 100여명을 체포했다고 전했다. 신도들은 대부분 집집마다 찾아온 경찰에게 끌려갔고, 일부는 길거리에서 체포됐다. 중국 쓰촨(四川)성 청두(成都)시 경찰이 2018년 12월 9일(현지 시각)에 유명한 지하 교회인 추위(秋雨)성약교회를 급습해 목사인 왕이를 포함해 신도 100여명을 체포했다. 경찰에 붙잡혔다 풀려난 신도 장궈칭은 “경찰이 우리 교회를 불법 조직이라고 말하며 앞으로 어떤 예배에도 참석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SCMP에 전했다. 그는 “풀려난 뒤에도 경찰에게서 24시간 감시를 받고 있다”고 덧붙였다. SCMP는 경찰에 붙잡힌 신도들이 다시는 예배에 참석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고 있다고 전했다.추위성약교회는 중국 당국의 승인을 받지 않은 대표적인 지하 교회로 경찰의 표적이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은밀히 활동하는 다른 지하 교회와 달리 공개적으로 신앙 활동을 하고 인터넷에 설교문을 올리는 등 적극적으로 포교했기 때문이다. SCMP에 따르면 신도들의 소셜미디어 계정은 정지됐고 교회 전화선도 차단됐다.미국 크리스천포스트는 추위성약교회의 발표문을 인용해 신도 3명이 경찰에게 고문을 당했다고 11일 전했다. 신도들은 손과 발이 묶인채 하루종일 감금되거나, 다리를 여러 방법으로 고문당하기도 했다.비영리 기독교단체 차이나에이드(China AID)의 밥 푸(Bop Fu) 대표는 올해 들어 중국에서 종교 박해가 심해졌다고 밝혔다. 푸 대표는 올해에만 1만건 이상의 기독교인 구금 사례가 보고됐다고 했는데, 이는 작년의 3000여건에 비해 3배 이상으로 늘어난 수치다. 중국은 표면적으로는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수십년 동안 종교를 탄압해왔다. 특히 시진핑 정부가 출범한 이후 장기집권을 위해 사상통제와 검열이 강화되면서 빠르게 교세를 넓혀나가던 기독교에 대한 탄압이 한층 심해졌다. 지난 2월에는 중국 내 종교단체와 종교활동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종교사무조례’가 시행됐다.개정된 종교규제가 발효된 이후 중국에서는 지하 교회뿐만 아니라 일부 등록된 가톨릭 교회들도 대대적인 단속의 대상이 되고 있다. 지난 9월 베이징 경찰은 중국 당국의 승인을 받고 활동하던 시온 교회를 폐쇄했다. 시온 교회는 1500명 이상의 신도를 갖고 있는 중국 최대 개신교 교회 중 하나였다.최근 미국은 세계적으로 종교인들을 핍박하는 나라들을 열거 하였다. 이들 중에는 중국과 북한 그리고 이란 같은 나라들이 포함되었다. 특히 중국은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면서 수없이 많은 나라들에게 경제적 원조를 아끼자 않는 나라이다. 이러한 나라가 아직도 19세기적인 정치 형태를 통해서 주민들의 종교를 억압하고 국가의 통제아래 두겠다는 발상은 21세기의 세계 정치와 종교 질서에 뒤떨어지는 국가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성경에 보면 초대교회의 기독교는 수 없이 많은 박해 가운데 있었다. 대표적으로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제자들의 순교 그리고 바울 같은 위대한 선교사님도 결국 네로의 박해와 함께 로마에서 최후를 맞이하였다. 아마도 세속적인 정권과 영적 세계에서의 사탄은 자신들이 승리하는 것처럼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간과 한 것이 있었다. 기독교는 박해를 받으면 받을수록 들풀처럼 퍼져가는 것이고, 하늘 높이 성장해 가는 것이다. 이와 같은 증거는 오늘날 유럽과 미국 그리고 한국의 기독교인들의 증가와 삶을 통해서 증거되고 있다. 중국 정부는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핍박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사실 그들은 자신들의 조국을 위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마치 바울이 자신의 동족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을 관제로 드릴지라도 원하는 것처럼 말이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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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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