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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교적 교회
    선교의 이론 가운데 선교적 교회론이란 용어가 회자 되고 있다. 하나님의 교회는 초대교회 오순절 사건 이후로 지금까지 역사성을 갖고 존재해 왔다. 중세 시대의 교회는 지역사회와 연합된 크리스텐돔으로서 선교가 필요 없는 환경을 만들게 되었다. 이후 종교개혁과 함께 개교회주의가 발전하면서 선교가 확장 되는 계기를 가져 왔다. 이후 윌리암 케리 이후에 진행된 위대한 세기를 통해서 서구 선교가 만개한 듯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었다. 그러나 이러한 선교분위기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도래와 함께 복음에 대한 순수한 믿음이 실종되는 현상을 가져 왔다. 변혁의 분위기 속에서 교회를 통한 선교의 장을 열고자 문단으로 애쓴 시대가 있었다. 즉 교회의 목적을 선교에 두고 활동을 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다음과 같은 운동들이 전개 되었다. 즉 교회갱신운동(1960-70년대), 교회성장운동(1970-80년대), 교회효율성운동(1980-90년대), 교회건강운동(1990-2000년대) 그리고 이머징교회운동(1990-2000년대)였다. 이러한 운동들을 토대로 하여 선교적 교회 운동이 태동하게 되었다. 선교적 교회 운동의 창시자가 누가냐 하는 문제는 논쟁을 가져 올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이 네슬리 뉴비긴이 큰 역할을 하였다고 말한다. 네슬리 뉴비긴은 1909년 영국에서 출생하여 1998년 소천 하였다. 그는 청년시기에 남부 웨일스 지방의 실업 광부들을 위한 휴일 캠프를 운영하는 일에 참여했을 때 회심했다. 당시 절망에 차있던 실업 광부들이 싸움을 벌이는 모습에 충격받은 그는 십자가가 길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몇 해 후에 복음주의 선교단체인 학생 기독교 운동(Student Christian Movement)에서 활동하면서 선교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1974년 은퇴할 때까지 선교사이자 1947년 성공회, 감리교회, 남인도 연합교회에 의해 시작된 성공회 교회인 남인도 교회의 주교로 목회하였다. 레슬리 주교는 진보적, 보수적, 카리스마틱 개신교, 가톨릭 교인들과 이야기가 통하는 에큐메니컬 운동가였으며, 남인도 교회 주교로 목회할 때에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중요하게 여겨 외딴 문맹 지역의 마을들을 돌아다니면서 그 지역의 가정에서 밤을 보내기도 하고 야외에서 감사성찬례를 인도하기도 했다. 1952년에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칼 바르트, 에밀 브루너, 라인홀드 니버 같은 유명한 개신교 신학자들과 교류하기도 하였다.네슬리 뉴비긴은 인도선교사로 35년 동안 활동하고 귀국 했다. 이후 영국의 영적 상태를 보면서 많은 충격을 받게 되었다. 결국 영국을 포함한 서구 사회가 선교지가 되었다는 사실은 인식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교회와 선교와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선교, 변해버린 영국사회의 문화, 이에 대한 복음의 이해가 축이되어 교회의 선교 본질과 과제를 제시하기에 이르게 된다. 이후 1980년대 북미 상황에 대한 선교학자들의 반성적 성찰로부터 비롯된 학문적 작업이 선교적 교회론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한국일의 이론에 의하면 선교적 교회론 이란 “교회의 존재 이유와 목적은 선교이며 선교는 어떤 활동이나 프로그램 이전에 교회의 본질적 이해로부터 출발한다”라고 정의 하였다. 결국 선교적 교회론을 한국교회에 적용하는 대책이 무엇인가? 한국일은 “교회가 성장 자체에 사로 잡혀서 세워진 실용주의적 교회관이 아닌 성경에 기록된 교회의 본질을 왜곡하지 않고 건강하게 성장한다면, 교회가 목회자 개인의 목회적 야망이 아니라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이끌려 간다면, 교회가 자신을 목적으로 삼는 내향적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부르심의 풍성함을 깨닫고 그것에 충실 한다면, 교회가 목호자 중심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다양한 은사를 발견하여 세상 안에서 하나님을 위한 증거가 된다면, 하나님과 갈라진 세상과의 화해와 구언의 완성을 위해 오늘도 교회를 사용하시고, 개인구원을 평생의 목표로 삼고 가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우는 훈련을 성도들이 할 수 있다면, 이 땅에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하고 필요한 것인가를 세상이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을 위해 교회 자체가 갱신되고 교회다움을 회복하는 사랑의 공동체로서 지역사회에서 존재하는 것 자체가 증인의 삶이 된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의견은 선교적 교회가 되기 위해서 귀담아 들어야 할 조언이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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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2-15
  • 젊은 선교지 베트남
    필자는 1월 13일부터 18일까지 베트남을 여행하였다. 여행의 목적은 제자들이 감당하고 있는 선교지를 돌아봄과 아울러 효과적인 선교전략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 위함이었다. 자료에 의하면 현대 이후의 베트남의 정치적 상황은 프랑스에 의해 통치 되었다.1882년 프랑스의 보호국이 되면서 민족의 독립을 표방하는 반(反)프랑스운동이 맹렬히 추진되었고 프랑스 세력에 대항하기 위한 베트남인의 독립운동은 20세기에 들어와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중화민국·일본 등지에 그들의 독립운동 단체가 만들어졌다. 이 과정에서 호찌민이 주도하는 베트남 공산당이 결성되었다. 공산당은 그 후 각파의 정치세력을 규합하여 비엣민을 설립하고 2차대전의 종결을 맞이했다.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아 1927년에는 베트남 국민당이, 1930년에는 인도차이나 공산당이 조직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일본이 베트남에 침입하자, 많은 민족주의 세력 중 가장 조직력이 뛰어났던 공산주의 계열은 베트남 독립연맹(비엣민)을 결성하였다. 1945년 8월 전쟁이 끝나자 비엣민을 중심으로 베트남민주공화국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전쟁 전의 지배권을 되찾고자 다시 군대를 파견하였고 이는 호찌민이 지도하는 민족 세력인 비엣민(월맹)과 남북으로 대립하게 된다. 이로 인해 1946년 말부터 양국 사이에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일어났다. 1954년 3월 13일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베트남군이 대승을 거두고 프랑스군이 철수를 하면서 베트남은 독립을 맞게 되었다.[5] 그러나, 서구 열강은 제네바 협정을 통해 베트남을 다시 북위 17도를 기준으로 남북으로 분단시켰고, 약속하였던 전국 선거를 거부한 채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 바오 다이를 왕으로 내세워 베트남국을 수립하였다.[6] 베트남국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응오딘지엠의 쿠데타로 붕괴하고 베트남 공화국이 세워져 남북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전쟁 후 베트남은 전후 복구와 계획 경제체제를 통한 발전을 도모하였으나, 1979년 크메르 루주와 전쟁을 치렀고,[8] 중화인민공화국과도 국경분쟁으로 중국-베트남 전쟁을 치르는 등 순탄하지 않았다.[26] 1986년 베트남 공산당은 도이 머이를 시작하여 시장 경제를 도입하였고, 2000년에는 거의 대부분의 국가와 수교를 맺었다.베트남의 종교로는 불교, 기독교(로마 가톨릭교회, 개신교) 등이다. 베트남은 대승불교권 국가이다. 그 외에 까오다이교와 호아하오교 같은 신흥 종교도 있다. 까오다이교는 1926년 베트남 남부의 터이닌에서 응오반쩨우에 의해 창시된 불교, 기독교와 토속신앙이 혼합된 유일신 사상이며, 호아하오교는 베트남 남부에서 기원한 불교에 바탕을 둔 신흥 종교이다. 1939년 후인 푸 소가 창시하였다. 발원지인 메콩 강 삼각주 지역을 중심으로 대략 200만명의 신자가 있다고 추산된다. 베트남은 과거에는 종교의 자유가 없었지만 예로부터 베트남에서 가장 많이 믿는 종교가 중국, 인도의 영향을 받은 불교였기 때문에 불교나 유교만은 탄압하지 못했다. 현재는 제한적인 종교 활동은 허용되고 있는데, 정부의 허가 없이 찬송가를 부르는 것은 불법이며, 집회는 사전 신고를 하여야 하고 선교는 불법이다. 이것은 공산주의 국가의 종교 정책이 탄압 정책에서 종교를 실용적으로 활용하는 실용 정책으로 변경되었기 때문이다. 특이하게 대승 불교권인데도 부처님 오신 날은 음력 4월 15일이다. 베트남 주민들의 생활은 공산주의의 영향으로 인 별 소득 차가 크지 않다. 남녀 평등 사상이 확산되고, 보통 자녀 수가 많다. 전 국민의 절반 이상이 농촌에 거주한다(급속한 이농 현상). 여성의 사회 활동이 활발하고 여성 노동자의 고용을 장려하고 있다(소득 감면 혜택이 주어진다). 가사 노동을 부부가 분담하며 유교 전통이 드러난다(장손을 중시하고 아들에게 유산 등을 상속하는 행위). 연애 결혼이 증가 추세에 있다. 이러한 다양한 상황을 지닌 베트남 속에서 선교사역을 한다는 것은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최근 한류와 박항서 축구 감독으로 인하여 한국인에 대한 호감도가 높아져 있었다. 따라서 이들에게 한류와 한국어 교육을 통해서 접촉점을 갖는 것이 좋은 전략이라고 생각된다. 실제적으로 필자를 인도한 분도 대도시에서 한국어 어학당을 설립하여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복음을 증거하였고, 또 다른 제자는 중소 도시의 어느 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두 개의 교회를 목회하고 있었다. 젊은 베트남 속에서 한국인들에 의한 선교가 더욱 활발히 진행되어질 것을 믿는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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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2-01
  • 아름다운 은퇴
    요즈음 기독교는 다양한 측면에서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다. 따라서 오늘은 또 무슨 욕먹을 일이 생기나 하는 조바심마저 들면서 뉴스를 접하게 된다. 그런데 오늘은 무척 의미 있는 기사를 보게 되었다. 이는 동아일보 김갑식이 쓴 ‘고소영 교회’ 목사의 조용한 은퇴이다. 이미 신문에 기사화되었기 때문에 독자들은 대부분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필자의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하고 싶은 마음에 기사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서울 강남의 소망교회는 한때 특별한 곳으로 불렸다. 이곳은 압구정로에 위치한 부자교회이자 이명박 정부에서 ‘고소영(고려대·소망교회·영남) 인사’ 논란의 한 진원지였다. MB(이명박 전 대통령)가 장로로 있는 소망교회 인맥이 공적인 자리에 여럿 들어가자 교회를 인맥을 쌓는 장으로 생각한 총선 예비 후보, 관료들이 ‘줄’을 대고 있다는 소문도 돌았다.지난해 12월 30일 주일(일요) 예배를 끝으로 이 교회에서 은퇴한 김지철 목사(70)가 최근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소회를 담은 글을 올렸다. 말도 탈도 많았던 곳이라 새삼 눈길이 갔다. 그는 “16년간의 소망교회의 목회 여정이 끝났다”며 “지금 이 순간 무엇보다 ‘하나님,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제 입가에 계속 맴돌고 있음을 느낀다”고 했다.그 말이 예사롭지 않게 들리는 것은 그가 헤쳐온 우여곡절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독일 튀빙겐대 신학 박사 출신인 그는 50대 초반까지 장신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55세인 2003년 소망교회 담임목사로 초빙됐다. 교회 개척자이자 카리스마가 강한 것으로 알려진 곽선희 목사의 후임이었다. 김지철 목사의 설교는 차분하고 지성적인 것으로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교회의 바로 서기는 쉽지 않았다. 소망교회는 고소영 시비뿐 아니라 2011년 교회 내부의 갈등으로 김 목사가 폭행을 당해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김 목사의 마지막 글에는 이런 과정에서 신자들을 마주해야 했던 뼈아픈 심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부족한 사람이 어렵고 낙심될 때에 힘내라고, 우리가 기도하고 있노라고 위로해 주셨던 분들… 애통해하는 이웃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찾아 나서신 분들… 세상에서는 소위 내로라하시던 분들이지만 교회에서는 마치 순한 어린 양처럼 순종하며 섬기셨던 분들이 하나하나 떠오릅니다.” 특히 마음에 와닿는 대목은 신자들에 대한 마음의 표시였다. 그는 “제 약한 성대 탓에 예배와 설교 때마다 하는 기침에도 늘 안타까운 마음으로 염려해주시고 기도해주시며 감싸주셨던 분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해진다”고 했다.이른바 ‘힘 있는 교회’ 또는 그의 조용한 성품 때문인지 몰라도 김 목사와의 만남은 쉽지 않았다. 2014년 12월 기회가 왔다. 그가 침묵을 깨고 언론과 접촉한 것은 한국기독교언론포럼 이사장으로 취임하면서 교계와 언론의 적극적인 소통에 나섰기 때문이다. 당시 그의 말이다. “고소영 논란이 일었을 때 억울하기도 했지만 가만히 있었지요. 마치 미국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흑인이니까 흑인들이 더 역차별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였던 거죠. 지난해 8월 그는 같은 예장 통합 교단의 원로 김삼환 목사(명성교회)에게 공개편지를 띄워 ‘교단을 떠나 달라’고 요청했다. 평소 그의 성품이나 교계 관행을 감안하면 보기 드문 ‘직격탄’이었다. 그는 이 편지에서 “세습은 아들이나 성도를 위한 것이 아니다”라며 “이제라도 목사님이 결단을 내려주시길 촉구한다. 이제 조용히 통합총회를 떠나 달라. 그래야 한국교회와 총회가 회복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김 목사가 16년간 걸어온 길은 개인의 목회 인생뿐 아니라 한국 교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세습의 길을 택하지 않은 대형 교회의 경우 교회를 개척한 목사와 후임 목사의 갈등이 종종 불거졌다. 고소영 사례처럼 권력자와 인연이 있는 교회와 사찰 등을 둘러싼 논란도 어김없이 일어났다. 그의 조용한 은퇴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와 같은 평가를 얻고 강단을 떠나는 김지철 목사님께 축하를 드리고 싶다. 그리고 이러한 목사님을 모시고 신앙생활을 해 왔던 소망교회 성도님들께도 축복하고 싶은 마음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라고 수 없이 말해 왔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언제 부터인가 “교회의 머리는 목사이다. 따라서 목사의 의지에 따라서 후임을 결정할 수 있다”라는 논리로 교회를 사유화 하는 경향이 있다. 아름다운 은퇴를 보면서 선교할 마음이 더욱 생기고 있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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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교
    2019-01-18
  • 얼굴 없는 천사의 기부와 얼굴 있는 자랑거리
    모두가 힘들다고 한탄하는 세밑에 훈훈한 미담이 있다. 12월27일자 인터넷 신문 기사에 의하면 ‘전주 노송동 얼굴없는 천사 올해도 어김없이 왔다’라는 기사에서 19년째 전주시의 노송동에서 일어난 선행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다. 기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지속적인 경기불황으로 기부 분위기가 크게 위축된 상황에서 전북 전주시 노송동의 ‘얼굴없는 천사’가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와 세밑 감동을 전했다. ‘얼굴 없는 천사’는 지난 2000년부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성탄절 전후로 노송동 주민센터에 전화를 걸어 수천만원이 담긴 종이박스를 몰래 놓고 사라져 붙여진 이름이다. 그는 첫 성금을 기부한 이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무려 19년째 나타나 온정을 베풀고 있다. 27일 오전 9시 7분께 전주 노송동 주민센터에 40~50대로 추정되는 한 남성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이날 전화를 받은 손명희 주무관은 “전화를 건 남성은 ‘주민센터 지하주차장 입구에 (돼지저금통) 있고, 어려운 이웃에게 힘이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말만 남긴 채 별다른 이야기 없이 전화를 끊었다”고 말했다. 이에 직원들은 곧바로 천사가 언급한 장소인 지하주차장 입구로 달려갔고, 이 곳에는 돼지저금통과 현금 뭉치가 들어 있는 종이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상자 안에는 5만원권 지폐다발과 동전이 들어있는 돼지저금통이 있었다. 이날 그가 놓고 간 돈은 총 5020만1950원에 달했다. 또 상자 속 A4 용지에는 큼지막하게 “소년소녀가장 여러분 힘내십시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적혀져 있었다. 그의 소리 없는 기부는 해마다 연말을 기점으로 이뤄져 19년간 모두 6억834만660원에 달한다. 전주시는 이 성금을 지난해와 같이 전북도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통해 지역의 독거노인과 소년소녀가장 등 어려운 이웃을 돕는데 사용하기로 했다. 시민 한보영(28)씨는 “올해는 유난히 지역 경제가 어려워 천사도 많은 부담을 느껴 오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었다”면서 “아무일 없이 올해도 아름다운 소식이 전해져 매우 기쁘다”고 전했다. 한편 노송동 일대 주민들은 매년 지속되는 천사의 뜻을 널리 기리고 그의 선행을 본받자는 의미에서 숫자 천사(1004)를 본딴 10월 4일을 ‘천사의 날’로 지정하고 지역의 홀로사는 노인과 소년소녀가장 등 불우이웃을 돕는 다채로운 나눔과 봉사를 펼쳐오고 있다. 전주시는 그의 선행을 기리기 위해 ‘얼굴 없는 천사여, 당신은 어둠 속의 촛불처럼 세상을 밝고 아름답게 만드는 참사람입니다. 사랑합니다’고 쓴 표지석을 세우고, 천사가 오가는 길을 보행자가 안전하게 다닐 수 있는 길로 만들었다.’ 필자는 이러한 선행을 하고 있는 얼굴 없는 천사가 기독교인이기를 바라면서 작금의 교계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공명심을 꼬집고자 한다. SNS가 일상에 자리 잡고 있는 상황이라 많은 정보를 접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정보들 속에는 자기 자랑으로 가득차 있는 얼굴들을 대할 때에는 찜찜한 마음이 든다. 예를 들면 세계의 어느 거물 대통령으로부터 자랑스러운 상을 받았다든지, 국내 거물 정치인들과 식사를 함께 했다든지 등등의 소식을 접할 때에는 평소에 존경했던 마음이 싹 가셔버린다. 위에서 언급했던 경우들은 대부분 교회의 헌금을 통해서 사용하여 얻은 감사장의 경우가 많다. 즉 교인들이 하나님의 영광과 선교를 위해서 드린 헌금을 마치 자신의 의사에 따라서 선심 쓰듯이 집행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자기 자랑과 돈 자랑에서 벗어나야 하겠다. 오히려 겸손하게 주님의 뜻을 실천해야 하겠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돈을 어떻게 처리했는가? 고린도 교회를 통해서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을 위해서 헌금 전달할 때에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고 있다. “내가 이를 때에 너희의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저희가 나와 함께 가리라(고전 16:3-4)”라고 했다. 이는 성도들의 헌금을 참으로 귀하고, 어렵게 다루고 있는 바울의 모습이다. 즉 성도들의 헌금은 목적이 분명하게 집행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필자는 오늘 얼굴 없는 천사의 기부와 얼굴 있는 자랑거리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어느 날 천국에 갔을 때에 지금은 볼 수 없는 얼굴 없는 천사의 모습을 보고 싶다. 그러나...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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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1-04
  • 전쟁 포화 속에서 피어난 꽃
    필자는 몇 년 전에 크로아티아를 방문하였다. 로마의 유적이 잘 보존된 그곳은 기독교의 역사를 다소간 간직한 곳이다. 그렇게 아름다운 장소가 전쟁의 포화 속에 잠겨서 고통을 겪었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전쟁의 고통 속에서 자신을 추스려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된 모드리치가 있다. 그는 2018년도에 축구 선수에게 주는 가장 영광스러운 상인 발롱도르를 수상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루카 모드리치는 1985년 9월 9일 출생해 당시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일부였던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자다르에서 멀지 않은 마을인 자톤 오브로바츠키 인근의 소규모 촌락 모드리츠이의 오두막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는 항공정비사 스티페 모드리치와 직물 노동자 라도이카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유년 시절은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시기와 겹쳤다. 1991년, 전쟁이 고조되자 그의 가족은 고향을 떠났다. 그의 부친은 크로아티아 육군으로 입대했다. 모드리치의 조부 루카와 6명의 어르신 민간인들이 1991년 12월, 크로아티아의 세르비아 반군에게 예세니스 마을에서 처형당했다.모드리치의 가족은 피난길에 올라 콜로바레 호텔에서 7년을 머물다가 자다르의 이즈 호텔로 이동했다. 수천 개의 수류탄이 도시를 강타하는 당시 축구는 현실 도피의 유일한 수단 이었다. 루카 모드리치 본인의 말에 따르면, 그는 당시 다른 많은 아이들을 친구로 사귀고 그의 부모님이 유년 시절에 악영향을 끼치지 못하도록 신경써서 전쟁을 느끼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모드리치는 축구를 시작해, 주로 호텔 주차장에서 공을 찼다.1992년, 그는 초등학교와 체육 아카데미에 동시에 입학했고, 후자의 경우 가족이 가진 것이 조금밖에 되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입학금을 지원했고, 간혹 삼촌이 지원해주기도 했다. 그의 가족의 지지로, 그는 대표단 훈련에 참가해 자다르에 입단했다. 그는 도마고이 바시치 감독과 토미슬라프 바시치 유소년 아카데미 수장의 지도를 받았다. 토미슬라프 바시치는 모드리치가 “운동계에서 아버지처럼 지내는 인물”로, 모드리치 부친의 형편이 어려웠기에 그에게 목재 정강이 보호대를 만들어 주었다고 말했지만, 모드리치 본인은 이 과거담을 부인하고 있다. 너무 어리고 “체중 미달”이라 판단되었기에, 그는 달마티아 지역의 최고 명문인 스플리트의 하이두크 스플리트와 계약하지 못했다. 이탈리아의 유소년 대회를 비롯해[12] 재능을 몇 차례 선보인 후, 토미슬라프 바시치는 16세가 된 2001년 말에 모드리치가 디나모 자그레브에 입단하도록 도왔다.디나모 자그레브의 유소년 아카데미에서 한 시즌 지낸 후, 모드리치는 2003년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프리미어리그의 즈린스키 모스타르로 임대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의 다재다능한 경기 방식을 이용해 불과 18세의 나이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프리미어리그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었다. 모드리치는 이후 “보스니아 리그에서 축구를 할 수 있으면 어디서든지 뛸 수 있다.” 라고 자신의 신체 조건을 짚어 말했다. 이듬해, 그는 크로아티아의 인테르 자프레시치로 임대되었다. 그는 그 곳에서 한 시즌을 보냈고, 소속 구단이 크로아티아 1부 리그 준우승을 차지하였다. 모드리치는 스페인 축구 리그인 레알 마드리드의 중원을 책임지며 지난 시즌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에 힘을 실었다. 그리고 2018 FIFA 러시아 월드컵에서 조국 크로아티아를 준우승으로 이끌며 많은 박수를 받았다. 모드리치는 이미 UEFA 올해의 선수상 등 각종 트로피를 휩쓸며 발롱도르 ‘메날두 시대’의 종식을 예견했다. 모드리치는 4일(한국시간) 프랑스 파리 그랑 팔레에서 열린 2018년 발롱도르 시상식에서 발롱도르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리오넬 메시(FC바르셀로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유벤투스) 이외의 선수가 이 상을 받은 건 2007년 카카(브라질) 이후 11년 만이다. 모드리치는 수상자로 호명된 뒤 “발롱도르를 수상한 위대한 선수들 사이에 포함됐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는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이어 “‘최고의 순간은 절대 쉽게 오지 않는다’라는 명언을 이야기하고 싶다”라며 “이 상을 받기까지 쉽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필자는 오늘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자신의 꿈을 이루어 빛이 되는 축구선수인 모드리치에 대해서 기술하였다. 이는 고난 속에서도 활짝 피워서 사막을 진동하는 백합화 같은 소식일 수 있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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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교
    2018-12-24
  • 일사 각오의 비장함
    우리는 가끔 특이한 용어를 통해서 마음의 표현을 나타낼 때가 있다. 오늘 필자가 들고 나온 글귀도 범상치 않는 용어 이다. 사도 바울의 3차 전도 여행 가운데 고린도를 방문하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가운데 밀레도에서 제자들인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불러 놓고 설교하는 가운데 바울의 마음이 바로 일사각오의 비장함이 담긴 것을 알 수 있다. 바울의 예루살렘 길은 체포와 구금 그리고 심문과 형벌 같은 고난이 있을 것임을 알았다. 그리고 측근들로부터 수없이 가는 길을 중단하라는 말을 들었다. 그럼에도 바울은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예루살렘으로 가기를 결심하였다. 바울은 어쩜 마지막 얼굴들이 될지도 모르는 제자들을 불러 놓고 일사 각오의 비장함을 보이고 있다.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2-24)”여기에서 필자는 바울의 비장한 마음을 보고 있다. 예루살렘에 가면 결박과 환란이 나를 기다리지만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수행하고 완수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목숨을 초계와 같이 버리겠다는 각오를 밝히고 있다. 이 얼마나 장엄한 선언인가?바울의 이러한 각오는 제자들인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당부의 말도 잊지 않고 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행 20:28-32).”바울은 이곳에서 제자들에게 경고하고 있다. 먼저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조심하고, 그 다음은 성령님께서 그들에게 책임지도록 맡기신 양떼를 위해 조심해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만일 그들이 자신의 영혼을 돌보고 교화시키는 일을 소홀이 한다면 다른 사람을 제대로 돌볼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돌본다는 의미는 “먹여야 한다”와 “양떼를 목초지로 인도하여, 그것들을 먹여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두 번째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이리들, 즉 거짓 교사들을 경계 해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잘못된 생각을 가진 거짓교사들은 끊임없이 성도들을 노략질 할 것이며, 배교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므로 에베소교회의 제자들에게 바울이 그들과 함께 있는 동안에 끊임없이 경고한 것처럼 깨어 있기를 부탁하였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에 안주하지 않고 로마를 거쳐서 서바나까지 복음의 확산을 노렸음이 분명하다. 그는 꿈꾸고 달려가고 행동하고 열매를 맺었다. 결국 어떠한 어려움에도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선교를 결코 멈추지 않았다. 필자는 오늘 바울의 신앙 결단과 제자들에게 부탁한 메시지를 통해서 한국교회의 현실을 들여다 보고자 한다. 요즈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너무 값싼 것으로 여긴 다거나, 혹은 풍성한 은혜를 자신의 치부와 환락에 이용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매일 저녁 시간의 TV 시청을 할 때에 교계 속에서 터져 나오는 부정적인 뉴스들로 인해서 자녀들 보기가 부끄럽다. 물론 모든 교회가 그러한 뉴스를 생산해낸 것은 아니지만 일부 교회들로 인해서 기독교의 본질이 심각하게 침해 당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럼 우리는 여기에서 주저 않자 있어야만 하는가? 아니다. 바울처럼 일사 각오의 심정으로 교회 속에 선교적 영성을 부어 넣어야 하겠다. 어쩌면 초대교회가 가진 선교적 마음으로 회귀해야 한단 말이다. 기독교의 복음은 이생의 자랑이나, 명예나, 금이나, 욕정의 발산이 아니다. 인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흘린 피 값이다. 주님의 피를 생각할 때마다 일사 각오의 심장을 가지고 사역해야 하겠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8-12-14
  • 바울의 도시선교가 준 교훈
    사도 바울은 도시선교를 통해서 많은 결실을 맺었다. 도시에 대한 신학적 사고들은 좋지 않는 감정을 갖고 있다. 왜냐 하면 도시화를 통해서 얻어진 것은 범죄와 환락 그리고 인간성의 소멸을 들 수 있다. 따라서 도시화를 비성경적 요소로 간주하기도 한다. 특히 구약 속에서 나타난 바벨적 요소와 니느웨가 가진 상황들은 하나님께 대항하는 집단들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세 번의 선교 여행을 통해서 전략적 가치가 있는 도시들 속에서 활발하게 사역하였다. 오늘은 도시 중에서 고린도 사역을 집중 조명해 보고자 한다. 고린도에서의 사역은 바울 일행이 두 번째 선교 여행 중 방문한 곳이다. 고린도는 주도이면서 많은 인구가 살고 있는 곳이었다. 한창 절정기에는 75만 명의 인구를 가졌다. 당시에 아덴이 1만 여명이었던 것에 비하면 얼마나 큰 도시인지를 상상해 볼 수 있다. 고린도는 거대한 상업의 중심지였다. 헬라 본토와 펠로폰네소스의 반도를 연결시켜 주는 지협 근해에 자리 잡고 있어서 육로뿐만이 아니라 해로를 통해서도 남북 간의 교역로를 연결시켜 주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고린도 위에 있는 높은 산에는 아프로디테 신전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신전은 1,000여명의 여사제들이 있었는데 대부분 매춘녀 라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 사역에서 말하기를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라고 말했다. 왜 바울이 이런 말을 했을까? 그는 고린도 사람들의 부도덕과 교만을 보았을 것이다. 그 도시는 카이샤르가 주전 46년에 아름답게 재건하였고, 부와 문화와 세계적인 경기장을 통해 얻어지는 자랑거리가 우월한 지위에 속한 사람들임을 자랑하였다. 이러한 모습을 쳐다본 바울은 십자가가 지닌 겸손과 사랑, 구원의 중요성만을 무기로 삼았음이 틀림없다. 또한 고린도의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인간성이 지닌 부도덕성이다. 고린도의 성적인 난잡성으로 말미암아 ‘코린티아조마이’는 ‘음란행위를 하다’라는 동의어로 쓰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들에게 거룩한 삶을 살도록 권유하였다. 왜냐 하면 성적으로 음란한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바울의 고린도 사역을 몇 가지로 평가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와의 만남이다. 사실 선교지에서의 좋은 동역자를 만난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하다. 아굴라 부부는 로마에서 추방된 사람들이었다. 수에토니우스의 저서인 『글라우디오의 생애』에서 보면 “유대인들이 크레스투스에게 선동을 당하여”라는 표현이 있다. 이 경우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이며 유대공동체에서 일어난 소동은 복음으로 인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아마도 아굴라 부부는 고린도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그리스도인으로서 활동했음이 분명하다. 바울과 아굴라 부부와는 업이 같았다. 소위 천막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생계를 위해서 활동했다는 의미이다. 둘째는 안식일 마다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에게 복음을 증거하였다. 특히 개인 전도를 통해서 제자화의 사역을 감당하였다. 성경은 “거기서 옮겨 공경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은 회당 옆이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복음 전도의 장이 공식적인 모임체인 회당에서 개인의 집으로 옮겨간 듯한 감이 든다. 그 뿐만이 아니라 복음 전도의 장이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도 옮겨간 듯 하다. 이후 많은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주님의 제자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셋째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확실히 체험한 바울의 모습을 보게 된다. 하나님의 약속은 “무서워하지 말라”와 “내가 너와 함께 있다”는 것이었다. 선교를 위한 성령님의 약속은 우리에게도 보증 수표와 같은 은혜이다. 결국 1년 6개월을 고린도 사역을 위해서 보냈다. 유대인들의 고소로 말미암아 그곳을 떠나기로 결정하고 겐그리아에서 머리를 깎고 서원함과 아울러 고린도를 떠나게 되었다. 오늘은 바울의 고린도 사역을 살펴보았다. 죄가 많기로 소문난 고린도 땅이었지만 바울의 눈에는 그곳이야 말로 복음으로 정복해야할 곳으로 처다 보았다. 그리고 평생을 함께 할 동역자를 얻고 열심히 복음을 증거하였다. 결국 우리가 무엇을 처다 보고 일하느냐가 중요하다. 어쩜 죄가 넘치는 곳에 은혜가 넘칠 수도 있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8-12-03
  • 실패와 성공
    우리는 이원화의 기준에서 모든 것을 평가하는 습관이 있다. 즉 성공과 실패를 판단하면서 자의적 기준에서 생각하게 된다. 사도 바울의 아덴 선교를 보면서도 두 부류이 생각들이 존재함을 느낀다. 예를 들면 바울의 아덴 사역은 실패 했다고 단언하는 사람들의 의견이다. 왜냐 하면 바울 사도께서 고린도서에 말씀 하신 내용인“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노라(고전 2:2)”를 근거로 들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바울의 아덴 선교가 실패했는가에 대한 진지한 평가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필자는 오늘 다른 한 부류인 바울의 아덴 선교는 실패 한 것이 아니라 상황적 대처에서 발생한 사역을 누가가 적절하게 기록한 부분임을 논증하여 기술하고자 한다. 바울은 아덴에서 네 부분을 경험하면서 현상을 목도하고 상황을 대처해 나갔다. 첫째는 바울이 본 것이 무엇이었는가? 먼저 우상이 가득한 부분을 보았다. 필자도 아테네를 방문 하면서 느낀 것 하나는 수없이 많은 신상들을 예술으로 나타낸 것을 보게 된다. 그 유명한 판테온 신전을 포함한 성채인 아크로 폴리스를 보면서 아테네가 신의 도시임을 알 수 있다. 아크로 폴리스는 국가의 영광과 신들에 대한 숭배에 바쳐진 광대한 건축과 조각의 혼합물임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사실 신상에 나타난 인간의 예술이 아무리 아름다울지라도 하나님의 창조물들로 대처할 수 었다. 즉 아름다움이 성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면 그 아름다움은 그를 감동시킬 수 없다. 하나님이 아덴 사람들에게 주신 예술적 창조성이 우상숭배에 사용되는 것으로 인해 가슴이 답답해 진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본 것 이었다. 즉 그는 그 우상들에게 잠긴 한 도시를 보게 되었다. 두 번째는 바울이 느낀 것이 있었다. 즉 바울은 몹시 격노했다. 왜냐하면 창조주 하나님의 신앙을 위협하는 수 많은 신상들과 종교성 때문이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격노케 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시내산의 금송아지 사건과 엘리야와의 영적 대결을 불러온 바알신 사건을 들 수 있다. 우상 숭배는 하나님의 질투를 불러 오게 만든다. 따라서 하나님의 질투와 격노를 느끼고 있는 성령의 사람인 바울의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참되신 하나님께 창조와 구속의 영광을 돌려야 할 아덴 시민들이 우상숭배로 점철 ㄷ괸 모습을 보면서 바울은 혐오감을 품었을 것이다. 여기에 우리가 선교해야할 동기가 분명해 진다. 바울을 움직여 아덴의 우상숭배자들과 복음을 나누도록 만들었던 이 내적 고통과 혐오가 우리의 마음 또한 움직여야 한다. 오늘날과 같은 종교다원주의와 혼합주의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잘못된 신학의 신상들에게 대하여 거룩한 분노를 가져야 하겠다. 셋째는 바울이 행한 것이 있다. 우상이 가득한 모습을 보면서 절망하거나 눈물만 흘리고 있지 않았다. 바울은 좋은 소식을 기회 있을 때 마다 전했다. 먼저는 그가 늘 하던 대로 안식일날 회당을 찾아서 예수님이 구세주이심을 증거 했다. 다음으로는 광장에 나가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대화와 질문을 통해서 전도 하였다. 마지막으로는 에피쿠루스 학파와 스토아학파 철학자들과 논쟁 하면서 변증사역을 하였다. 네 번째는 바울이 말한 것이 있다. 바울은 아레오바고에서 복음을 선포했다. 아레오바고는 그리스 전쟁 신화에 나오는 전쟁신의 언덕 이라는 의미를 지닌 장소이다. 그곳에서 바울은 참되신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 분명히 말했다.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주이시며, 생명을 유지시키시는 분이시며, 모든 민족을 다스리시는 분이시며, 인간의 아버지이심을 증거했다. 아울러 예수님의 초림과 사역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말했다. 이와 같은 복음 증거로 말미암아 아레오바고 관리인 디오누시오와 다마리아라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이 믿게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디오누시오는 아덴의 최초의 순교자라는 말이 있다. 결론적으로 바울의 아덴 사역은 실패가 아닌 성공으로 보아야 한다. 바울이 아덴에서 우리에게 주신 메시지는 포괄적인 요소와 심원한 선교의 동기를 배워야 한다. 사실 요즈음 교회들은 다양한 도전들에 의해서 복음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진정 바울의 아덴 선교를 잘 해석하고 적용할 수만 있다면 바로 보고, 바로 느끼고, 바로 행동하고, 바로 말해야 하겠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8-11-16
  • 동역자와의 갈등 극복 제언
    우리가 사역 하는 동안에 동역자 와의 갈등은 여러모로 마음을 아프게 한다. 사실 삶 속에 내재된 갈등이 비단 사역자 뿐 이겠는가? 평생을 함께 하자고 손을 잡고 증인들 앞에서 명세한 부부 조차도 어느날 헤어지는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는 경우도 비일비재 하다. 성경에 보면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을 보게 된다. 따지고 보면 두 사람의 결별은 바나바의 조카인 마가 요한 때문이다. 바나바와 바울의 1차 선교여행 가운데 바나바의 조카인 마가 요한은 밤빌리아에서 바울 일행과 헤어지게 된다. Stanley D.Toussaint는 마가 요한의 이탈을 다음과 같은 이유였을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첫째, 마가는 지도자직의 변화를 깨달았을 것이다. 즉, 바나바는 요한 마가의 삼촌 이었다. 1차 선교여행을 출발 할때에는 바나바가 팀장으로서 주도권을 가졌다. 그러나 바울에게로 넘어갔다. 둘째, 이방인에 대한 새로운 강조가 마가와 같은 팔레스타인 유대인에게는 너무 심한 변화였다. 셋째, 그는 아마도 바울이 계획한 다소 산맥을 넘어서 안디옥에 가려는 위험한 여정에 겁이 났을 것이다. 넷째, 바울이 버가에서 말라리아 같은 질병으로 심하게 앓았기 때문에 비교적 내륙지방을 피하고 높은 고지로 올라가고자 했던 것이 누가의 마음에 걸렸기 때문 이다. 다섯째, 마가의 향수병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의 어머니는 홀로된 과부였으므로 어머니에 대한 정이 그를 되돌아가게 하였다고 한다. 아무튼 마가의 이탈은 다양한 이유들을 떠나서 사도 바울에게 깊고도 고통스러운 상처를 남겼음을 볼 수 있다(행 15:38).마가 요한의 1차 선교여행 중에서의 이탈은 전혀 싸울 것 같지 않은 바나바와 바울의 결별을 불러 왔고, 이를 존 스타트는 우울한 불화라고 표현을 하였다. 한편 뱅겔은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은 ‘한 쌍에서 두쌍으로 만들어진 사건’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에도 불구하고 동역자와의 갈등은 정당화 될 수 없다. 필자는 사도행전을 읽을 때 마다 바나바의 성품을 생각 하곤 한다. 예루살렘 교회가 모두다 칭찬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1차 선교여행 가운데 구브로에서의 바 예수와의 영적 대결로 말미암아 선교 리더십이 바나바에서 바울로 넘어간 이후에도 차분히 선교 여향을 조력했을 만큼 성품이 좋은 분이었다. 바나바의 성품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내 마음속에 그린 기도문이 있다. 이는 필자의 슬하에 세 딸의 장래와 관련된 것이다. 대학의 강의실에서 강의 할 때에 가끔 나의 속내를 드러내어 표현 하는 말이 있다. “만약 사위감을 얻을 때에 한가지 조건은 바나바와 같은 성품을 지닌 청년 이면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토록 귀한 품성을 지닌 바나바도 싸울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 한 사건이 된다. 결국 바나바와 바울의 다툼은 선교팀이 두 팀으로 나뉘어서 바나바는 요한을 데리고 구브로 섬으로 갔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갈라디아 땅으로 향하게 되었다. 이는 두 영적 거인들도 싸움을 할 수 있는 성품을 지닌 연약한 인간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다. 동역자와의 갈등이 불러온 가장 무서운 결과는 무엇인가? 불행 스럽게도 결별 이후에 선교팀의 한쪽인 바나바의 사역에 대해서는 사도행전에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보다 다 슬픈 일은 없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기독교는 엄청난 교회성장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각 교단의 세계최대 교회들이 한국 땅에 있다. 필자가 알기로는 명성교회의 장로교, 금란교회의 감리교, 연세교회의 침례교,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오순절 등등이 현존하는 각 교단에서의 세계최대의 교회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엄청난 성장 뒷면에는 누가 더 큰가에 대한 경쟁으로 말미암아 갈등의 여지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가 나뉠 수 없음”을 인지해야 하겠다. 더 큼의 자랑 보다도, 더 가진것에 대한 자랑 보다도, 누가 더 섬김의 표본이 되는가를 생각해야 할 시간이다. 그렇게 될 때에 교회는 갈등을 넘어서 세계선교의 길로 매진 할 수 있어지게 될 것이다. 비단 교회 뿐만이 아니라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인 장로와의 갈등, 성도와 성도와의 갈등, 교단과 교단과의 갈등을 극복할 때에 세상은 교회를 다시 보게 될 것이다. 특히 최근에 교회 안에 팽배한 이념과 사상의 갈등을 더욱 힘차게 극복해 나갈 때에 한국교회는 소망이 충만한 집단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8-11-09
  •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사도 베드로와 백부장 고넬료의 만남이 나온다. 두 사람이 만나기 이전에 공히 환상을 체험하게 된다.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먼저 환상을 체험한 사람은 고넬료 였다. 그는 로마군이 유대 땅을 지배하기 위해서 조성된 도시인 가이샤라에서 군인으로 근무 하고 있었다. 고넬료는 이방인인 로마 사람으로서 매우 경건한 사람이었다. 온 집안으로 하나님을 경외한 신앙을 소유하고 있었다. 어쩜 종교성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한 고넬료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 진다. “고넬료야,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바가 되었으니 네가 지금 사람을 욥바로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였다. 결국 고넬료는 집안 하인 둘과 부하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욥바로 시몬 베드로를 청하려 보내게 되었다. 고넬료가 환상을 본 이튿날 제 육시쯤 되어 베드로 사도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의 편편한 지붕에 올라가 있었다. 사실 그는 시장하여 무엇인가 먹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식사 준비를 하는 동안에 베드로 사도는 황홀경에 들어갔다. 하늘이 열리며 보자기 하나가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일부 자유주의 주석가 들이 베드로의 이 환상을 보자기가 아니라 지나가는 배의 돛이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추측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물론 필자도 욥바 항구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 때에 욥바 항구 가까이에 있는 바닷물과 힌 색깔의 파도 그리고 멀리 지나는 배를 본적이 있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그렇다고 이러한 풍광을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교훈을 주시기 위해서 보여주신 환상과 결부 시키는 것은 적절하지 못한 성경 해석법 이라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베드로가 본 환상은 “네 발 가진 짐승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었다. 이는 유대인들이 갖는 부정한 음식과 깨끗한 음식이 함께 섞여 있음을 나타낸 것이었다. 하나님은 베드로 에게 이것을 잡아먹으라고 말씀 하셨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와 같은 명령을 거절하면서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였다. 그러한 베드로에게 하나님은 “내가 깨끗하게 한 것을 네가 속되다 하느냐”라고 질책하셨다. 그리고 보자기 같은 것이 하늘로 올려져 갔다. 베드로가 환상을 보고 난 다음에 고넬료에게서 보낸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결국 고넬료의 청을 받아드려서 베드로 사도는 가이샤라를 방문하게 되고 벡부장 잡안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게 되었다. 베드로의 이와 같은 경험은 복음이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의 울타리를 넘어서 이방인들에게도 전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귀한 교훈을 주고 있다. 이제 필자는 베드로와 고넬료 백부장의 만남이 주는 선교적 교훈을 열거하고자 한다. 첫째는 인류 구원의 복음이 선민 이스라엘의 벽을 넘어서 전 인류에게로 향하는 깃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즉 범죄한 인간 그리고 죄의 전이를 통해서 구원을 잃고 방황하고 있는 인간들에게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서 회복시키겠다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행동이 실행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선교신학에서는 구약의 선교를 구심력적 선교로, 신약의 선교를 원심력적 선교로 말하는 학자들이 많다. 따라서 고넬료와 베드로의 환상 사건은 원심력 선교의 실현이라고 보아야 한다. 둘째는 유대인들이 가진 전통적 신앙의 무지를 깨뜨렸다는데 있다. 후일 베드로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말하기를 “네가 무할레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라는 핀잔을 듣게 된다. 이들을 우리는 흔히 할례당이라고 부른다. 즉 우익 유대 그리스도인들, 극단주의자들, 유대 태생의 사람들‘이라고 표현해야 할 것 같다. 결국 베드로 사도는 자신의 경험이 왜 중요한지를 설명했고, 예루살렘의 성도들도 수긍하는 결과를 가졌음을 본다. 세 번째는 복음은 인종과 편견의 벽을 넘어 간다는 것이다. 사실 이스라엘 족속들은 선민 사상 속에서 이방인들을 개처럼 취급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성경 속에서 예수님과 우물가에서 대화한 사마리아 여인과의 관계를 통해서 알 수 있다. 베드로 사도는 보자기 속에 담겨진 믹서된 음식들 속에서 주님의 메시지를 바르게 이해했다. 오늘도 우리는 종교와 인종적 편견들로 인해서 복음 선교의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필자는 오늘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을 통해서 선교의 교훈들을 생각해 보았다. 판단은 독자들에게 맡기고 싶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8-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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