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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바논 선교의 반딧불
    필자는 지난주에 이어서 레바논에서의 선교 단체 상황을 기술하고자 한다. 제목이 말해 주듯이 여러 선교 단체들은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예수님을 증거 하는 선교의 반딧불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글도 정병훈 선교사가 보내준 자료를 활용했다. 첫째는 YFC Lebanon 이다. YFC(그리스도를 위한 청소년)는 1963년부터 레바논에서 활동 해 왔으며 4 개의 주요 사역 부서로 구성되어 있다. 학교 사역 및 제자 훈련이 주요 사역이며 학교에서 학생들이 쉬는 시간과 방과 후 시간을 활용해서 학생들과 정기적으로 대화하며 봉사 클럽, 제자 및 성경 공부 및 기타 여가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비공식 교육 및 방과 후 교습, 레크리에이션, 화해 및 심리 사회적 지원 그룹, 주간 영적 사역을 위한 클럽 활동을 하고 있다. 레바논 동부 지역인 베카에서Manara Youth Center를 통해서 시리아 난민 청소년을 위한 사역, 스포츠, 바느질, 난민 아동을 위한 비공식 교육이 실행되고 있다. 지역 교회와 더불어 청소년 지도력 훈련을 진행하고 있다. 두번째는 Life Center Beirut이다. Life Center Beirut는 2009년부터 지역사회를 섬기는 크리스챤 사역 센터이며 레바논 정부에 등록된 엔지오이다. 또한 복음주의 개신교 하나님의 교회 교단 산하에 교회 프로젝트로 운영되고 있다. 센터에서 중점을 두는 사역 중에 아동 사역(Kids at risk)은Kids School Spring of Life 이름으로 진행하고 3개의 아동 교육 프로그램으로 년간 700여명의 아동들이 참여하고 있다. 매일 100여명의 난민 아동들을(6-14세) 교육하고 급식을 제공하고 있다. 아동들을 크게 두 그룹으로 나눠서 오전반은 비공식 교육 프로그램으로 섬기고 오후반 아동들은 방과후 교실로 섬기고 있다.그 외에 복음전도, 제자훈련, 말씀선포와성경교육, 주일학교, 하베스트키즈 클럽(Harvest Kids Club), 청소년 사역이다. 특히 매년 Kingdom Fiesta 사역으로 영적 부흥과 각성을 촉진하는 사역을 활발히 진행중이다. 시리아 난민들을 돕는 구제 사역 또한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미디어 사역도 참여하고 있고 타 사역자들을 위한 미디어 제작을 돕는 사역도 병행하고 있다. 세 번째는 Triumph Mercy Lebanon이다. 2006년에 레바논의 헤즈볼라와 이스라엘과 전쟁으로 인해서 레바논 남부 지역은 피폐해 졌고 많은 이재민들이 발생했고 그들에게 도움을 주면서 TM이 시작되었다. 2007년에 일주일에 3번 음식을 배급하는 사역을 85명에 했다. 2011년 시리아 내전이 발발 후 수많은 난민들이 레바논으로 오게 되었고 그들의 상처난 마음에 희망을 갖게 하고 사랑으로 나님 지원을 시작하게 되었다. 수 천명의 난민들에게 식량패키지를 제공하였다. 2013년부터는 약 100명의 난민 아동들을 교육하는 첫번째 교육센터를 열었고 3개월 후에 두 번째 교육 센터를 개설했다. 현재는 세번째, 네번째 교육 센터가 세워져서 500여명의 난민 아동들을 교육적으로 섬기고 있다. 2014년에는 국제 엔지오와 제휴하여 베이루트에 사무소과 창고를 열어서 난민들에게 식량지원, 매트리스, 담요, 주거 임대료 지원 등을 제공하고 있다. 2016년에는 베이루트에 첫번째 커뮤니티 센터를 열어서 여름캠프, 교육 프로그램, 컴퓨터 교실, 심리적 사회적 지원 프로그램, 외국어 교육 등으로 사역하고 있다. 2016년 말에는 시리아에 들어가서 박해 받는 그리스도인들을 섬기는 사역도 병행하기 시작했다. TM은 계속해서 더 많은 사역의 기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실행하는사역 단체이다. 네 번째는 Life Agape Lebanon이다. 레바논 모든 기독교 교회와 교파를 초월해서 협력하는 기독교 사역 단체이다. 이름 하여 CCC 라고도 부른다. 이 단체 사역의 목적은 다양한 부문에서 수행되는 프로그램과 활동을 통해 모든 사람들이 더 나은 삶 살고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다양한 전도 책자들과 자료들을 개발 보급을 하는 중요한 사역을 하고 있다. 2030년까지 레바논 모든 도시에 모든 마을에 영적인 부흥이 강력하게 일어나는 것을 위해서 크게 7가지 사역 활동들을 하고 있다. 지금 세계는 코로나 19 바이러스로 말미암아 탈진 상태에 놓여 있다. 이런 어려운 때에도 복음 선교는 끊임없이 작은 전사들에 의해서 확장되고 있다. 이들 가운데 전쟁과 기근의 공포 속의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레바논의 베이루트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겠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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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15
  • 레바논 선교의 작은 불꽃들
    필자는 오늘 지난 호에 이어서 지속적으로 레바논 선교를 기술하고자 한다. 오늘 또한 정병훈 선교사가 보내준 자료를 활용했다. Horizons International의 사역은 다음과 같다. HI의 창설자인 조르주 후스니(Georges Houssney)는 주로 레바논의 무슬림 도시인 Tripoli에서 자랐다. 그는 십대 시절에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믿게 되었고 얼마 후 하나님께서는 그의 마음에 무슬림들에 대한 깊은 사랑을 키우셨고, 그들을 위해서전임 사역자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느끼고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의 책 ‘이슬람 끌어안기(Engaging Islam)’에서 서양 선교사들이 무슬림들에게 전도하는 것을 보고 큰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 했다. 그 후에 조지와 그의 가족은 1982년에 현대 아랍어와 쿠르드어 성경을 번역 작업에 참여 했으며, 데이빗 C. 쿡 재단의 후원으로 현지인을 위한 아랍어 성경공부 교재를 펴냈고, ‘Reach Out to the Muslim World (무슬림 세계로 다가가라)’를13년 간 간행해 왔다. 출판하는 일을 감독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중동에서 미국으로 이주하여 유학생들을 위해 사역을 했던 것이 Horizons international 근간이 된 것이다.HI는 중동과 북아프리카를 넘어서 미국, 남아공, 잠비아, 홍콩, 중국, 말레이시아 등지에서 활발한 선교 활동을 펼치고 있다. HI의 주요 사역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유학생 사역이다. 18개의 대학 캠퍼스에서 수천명의 국제 유학생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고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이들을 대상으로 성경공부 모임, ESL(English As a Second Language), 제자훈련과 멘토링 사역을 주로 하며 특히 저녁식사공급 사역으로 접촉점을 확대하고 있다.두 번째는 무슬림 사역이다. 호라이 즌스의 보고에 의하면은 2013년부터 2017년 사이에 1,400명의 이상의 무슬림들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성과를 거두었다고 한다. 무슬림 선교방식으로 용감한 전도법을 활용하고 성경배급, 구제 긍휼 사역을 병행하고 있다. 또한 무슬림 배경 신자들 대상으로 교회개척운동을 이라크 쿠르디스탄 지역에서 90년부터 주요 역할을 해 왔다. 2012년은 복합적인 사역을 위한 센터들을 베이루트 부르주 함무드(Burj Hammoud) 지역에 세워서 3년 간 사역의 결과로 850명 이상의 무슬림들(주로 쿠르드인, 시리아 난민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 후에 3개의 사역 센터들을 레바논 주요 지역에 세워서 왕성한 사역을 실시하고 있으며 미디어 사역을 스튜디오를 만들어서 실시하고 있다. 아랍 배경 신자들을 훈련 양성해서 주변 지역에 단기 선교 아웃리치를 활성화해서 선교의 폭을 넓히고 있다.세 번째는 훈련 사역이다. 1990년 이래로 호라이 즌스는2,000명이 넘는 선교사들과 수천의 그리스도인들을 훈련해서 무슬림 사역을 하도록 훈련을 했다. 특히 Clubs to Lions, Engaging Islam Institutes, The Legacy Conference 그리고 The Engage Course 등의 과정을 개설해서 훈련 사역을 촉진하고 있다.그 외에서 성경적 선교신학 사이트를 운영해서 성경적 선교와 교회론, 성경번역, 용어 사용에 대해서 사역자들과 교회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또한 터키쉬 월드 사역(Turkish World Ministries)을 통해서 터키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하고 있다. 즉 Heart for Lebanon이다. HFL은 레바논 내에 빈곤 가정들과 아동들에게 하나님을 만나고 영적으로 성장할 수있는 기회를 주는 환경을 만드는 것에 헌신된 기독교 단체이다. 이 단체가 사역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부와 고아이다. 단체에서 진행하는 소망 프로젝트(The HOPE)는 5개의 레벨로 형성되어 있다. 이는 접촉점 사역, 관계형 참여 사역, 영적 형성 사역), 예배 공동체, 지역사회 리더십 개발이다. 이것들을 기초로 해서 크게 두 가지 형태로 실제적 사역을 하는데 먼저는 난민들 중심으로 구제 긍휼 사역을, 다음으로는 난민 아동들 중에 지역 학교에 다닐 수없는 아동들을 위한 비정규 교육 형태(Non-formal Education)의 프로그램. 수학, 아랍어, 영어, 성경교육, 미술, 음악, 지도력 개발 및 과학은 아동들이 학업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본 수업으로 참여 아동 뿐만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영향을 주는 사역을 하고 있다. 필자는 작은 불꽃이 온 레바논을 다시 태울 수 있기를 기도해 본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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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24
  • 레바논 내 선교 단체들의 사역
    필자는 오늘 레바논에서의 선교단체들의 사역을 기술하고자 한다. 이 자료도 정병훈 선교사가 보내준 자료를 활용했다. 첫 번째 단체는 Resurrection Church Beirut이다.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베이루트 부활 교회 이다. 레바논의 대표적인 복음주의 현지 교회인RCB는 원래 1964년에 하다스 침례 교회(Baptist Evangelical Church in Hadath)로 이름으로 개척되었는데, 4명의 평신도 사역자(Daoud Tleel, FayesSakhnini, Ayoub Abu Na’eem, Raja Allaaty)가 가정 집에서 부터 시작 예배와 사역을 시작했다. 신자들이 급속히 늘어나게 되어 전임사역자로 당시 아랍 침례교 신학교 학생이던 이집트인 칼릴이브라힘(Khalil Ibrahim) 세웠고 1964년부터 1976년까지 칼릴이 교회를 담임했다. 1975년에 레바논 내전이 발발하자, 교회가 있던 하다스 지역은 전쟁터와 종파갈등의 중심지가 되었고 칼릴 목사는 외국으로 가족들과 피난을 가게 되었다. 1976년 가싼칼라프가 교회 사역자로 오고 1978년 4월 16일에 목사 안수 받고 교회 담임 목사가 되었다. 1981년에 건물을 매입해서 교회를 확장했다. 2000년 6월부터 건축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1년 반 만에 아래층이 완공되었고 예배가 그곳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사역들이 왕성하게 진행되던 중 2008년 10월에 히크마트쿠슈와 목사에게 가싼칼라프 목사는 담임 목사직을 승계했다. 2009년 주일학교 건물을 윗층에 완공했고, 2010년에는 청소년 사역 공간을 완공했다.계속적인 교회 성장으로 2011년 부터는 아래층 홀에서 주일 예배를 2부로 드리기 시작했다. 2015년에 교회 메인 홀 건축을 재개하였고 170개 가정 성경공부 모임이 동시적으로 진행되었다. 2015년 8월 8일부터는 3부 예배까지 확대 되었다. 2015년 10월에 베이루트 나바아 지역에 건물을 임대해서 새로운 교회를 개척을 해서 지역 주민들과 시리아 난민들을 섬기고 있다.2018년 교회 사역 보고에 의하면은 주일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여하는 신자는 1,250명 이상이고 323개의 라이프 그룹(Life group, 가정성경공부모임)이 활동 중이고, 한해 동안 35명이 침례를 받았고 12명의 교회 전임 사역자와250명의 자원봉사 사역자들이 함께 사역을 하고 있다. 시리아 난민 아동 85명이 초등교육지원을 비공식 교육 프로그램으로 섬기고 있다. 2,700명 이상의 난민들이 한 해 동안 구제와 긍휼 사역의 혜택을 받게 되었다. 또한 교회 유튜브 방송을통해서교회사역을미디를통해서레바논뿐만아니라아랍권전역에영향력을끼치고있는데1,000만명 가량이 RCB 예배 실황에 한 해 동안 참여했다.두 번째는 True Vine Church이다. 이는 레바논 동부 베카 지역에 대표적인 난민 선교하는 교회이다. 2003년에 7명의 멤버들과 함께 레바논 동부 자흘레 시에 작은 아파트에서 지하드 핫데드 목사와 함께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 지역은 레바논-시리아 국경까지 차로 15분 거리에 위치한 지역이라 지리적 요건으로 현재 시리아 난민 사역이 매우 활발한 교회이다.교회에서는 구제 긍휼 사역의 일환으로 식량 패키지를 만드는 일군이 8명, 식량 공급사역을 하는 일군이 9명 그리고 3개의 트루바인 학교가 3군데 지역에서시리아난민아동들을교육적으로돕고있는데교사숫자가17명과 행정일군들이 소수로 함께 하고 있다. 교회 안에 자원봉사 사역자는10-15명이다. 건강 의료사역으로 지난 2018년 10월 11월에 4,000여명의 환자들이 의료적 혜택을 받았는데 50여명의 의료인들이 미국, 브라질, 독일 등지에서 와서 섬겼다. 또한 파이다(Fayda) 센터에 클리닉을 개설해서 다양한 진료과목들로 주로 시리아 난민 환자들을 돌보고 있는데 3개월 동안 910명을 진료하였다. 1,400여 난민 가정에게 정기적으로 식량을 지원하고 600여 난민 학교 학생들에게 급식을 매일 지원하는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교회 안에 기도 모임이 화요일과 금요일 저녁에 있으며 여성, 청소년 모임들이 주말에 주일에는 1,2부 예배로 사역을 하고 있다.또한 이집트 카사르 알 두바라 교회에서파견된아랍선교사들과봉사자들이사역을지원하며협력하고있다. 전 세계 여러 교회와 단체들에서 보낸 아웃 리치팀을 교회와 긴밀한 협력을 하고 있다. 필자가 이렇게 레바논의 선교 현항을 소개 한 것은 선교사를 통해서 보내온 귀중한 정보를 선교전략에 잘 활용해 주었으면 한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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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교
    2020-04-10
  • 레바논의 신학교육 역사
    오늘은 레바논의 신학교의 상황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사실 신학교 교육은 선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기관이다. 지난 호에서 이미 밝혔듯이 이 글도 정병훈 선교사가 제출한 자료를 통해서 엮고자 한다.첫째는 근동 신학교 (Near East Theological Seminary)이다. 이 신학교는 1932년 NEST는 베이루트 종교지도자들과 그리스 아테네에 종교가 합병되면서 세워지게 되었다. NEST가 세워진 배경은 1835년에 복음주의 신학교육의 역사인 윌리엄 톰슨 목사가 베이루트에 최초로 세운 개신교 신학교가 있디. 1843년에 신학교는 베이류트 남부 산악지대인 Abey로 옮겨 졌고 코넬리 우스반 다이크 박사의 지도력 아래 신학과 일반 교육 수업이 시작되었다. 이름 하여 ‘어베이 신학교(Abey Seminary)’는 1866년에 시리아 개신교 대학, 현재는 베이루트 미국 대학 (AUB)을 세우는 역할을 했는데 어베이 신학교는 신학을 베이루트 미국 대학은 일반교과목을 담당하게 되었다.신학교는 여러 차례 이동을 거친 끝에 1905년에 베이루트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1912년 F.E. Hoskins의 의해서 콜튼 홀(Colton hall)이 베이루트 도시 중심부 근처에 NEST의 모판이 되었고 그 건물은 1971년까지 유지하였다. 1930 년에 근동 지역의 선교사들은 이 지역에서 신학 교육을 강화하기 위해 아테네와 베이루트의 신학 기관들을 연합 할 것을 제안했다. 그해 봄, 시리아 선교부 (장로교)와 근동 선교부 (회중) 사이의 협상 기간이 지난 후, 두 학교는 베이루트에있는 새로운 근동 신학 대학을 합병하여 설립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이 합병은 1932년 11월 11일에 Gaius Greenslade를 총장으로, Loutfi Levonian을 학장으로 해서 설립했다. 제 2 차 세계 대전 후 두 개의 미국 이사회는 시리아와 레바논의 전국 복음주의 총회, 근동에 있는 아르메니아 복음주의 교회 연합 (1945), 주교회의 예루살렘 교구 (1950), 루터교가 합류했습니다. 요르단 교회 (1967). 현재이 4개의 지역 교회는 공동으로 NEST를 후원하게 되었다. 1971년에 학교는 Ras Beirut, 베이루트 미국 대학 근처, 새로운 현대적인 시설이 갖추어진 건물로 이사를 갔다. 레바논 내전(1975-1990)으로 NEST는 상당수의 교수진을 상실했고 학생들도 크게 줄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는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꾸준히 문을 열어 놓고 학생들을 모집 교육을하고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노력을 했다. 그 결과로 1991년 10월에 시작된 새로운 커리큘럼은 다양한 학위 프로그램의 과정 제공 및 지역교회의 필요들을 충족하는 시스템으로 전환을 했다. NEST는 에큐메니칼 신학 교육을 현재 공급하고 있다.두 번째는 아랍 침례교 신학교 (Arab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이다. 미국 선교사들 사역으로 1960년에 ABTS가 설립되었다. 1960 년에 설립 된 이래 신학교는 알제리, 이집트, 인도, 이라크, 요르단, 레바논, 모로코, 팔레스타인, 수단, 시리아 및 튀니지에서 수백 명의 학생들을 졸업시켰다. 300 명 이상이 학생들이 단기로 와서 공부했고 비학위 프로그램 과정을 이수하는 혜택을 받았다. 침례교 배경을 가진 학생들과 더불어다른 교파에서도 신학교에서 공부를 했는데 성공회, 하나님의 성회, 복음주의 자유교단, C&MA, 하나님의 교회, 루터교, 감리교, 나사렛교, 오순절교, 장로교 등이 다양한 교단 배경 학생들이 공부를 했다.이 졸업생의 대다수는 현재 아랍어 권에서 사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ABTS는 공식 학위 또는 수료증 기반 교육뿐만 아니라 덜 공식적인 교육 기회를 제공한다. 수업은 아랍어로 이루어지며 아랍 세계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상당부분 상황화 되었다. ABTS 교육은 또한 개인 영성의 개발과 대다수 아랍 종교 공동체에 대한 효과적인 사역, 아랍 세계의 기독교 소수 민족의 역사 및 특수성에 대한 지식, 동방 영성의 특수 영역에 대한 민감성을 강조한다.2001년부터 신학교 건물은 광범위하게 리모델링되었으며 현재 학생, 교직원 및 교직원에게 넓고 편안하며 시설이 완비된 시설을 가지고 있고 신학교는 자체 건물에 보유하고 있지만 Life Source 출판 (침례교 출판물이라고도 함) 및 ABTS를 소유하고 운영하는 기관인 LSESD도 같은 부지에서 사역을 공유하는 사역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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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교
    2020-03-27
  • 레바논 복음주의 개신교 역사
    필자는 오늘 정병훈 선교사가 제출한 자료에 의하여 레바논 선교의 역사를 기술하고자 한다. 레바논은 19세기에 들어서 무슬림의 오스만 제국은 레바논의 직접적인 지배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마론파 기독교도와 이슬람교의 분파인 드루즈교도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살해되었다. 이 분쟁에 프랑스가 개입한 것을 계기로 1861년 마론파 기독교인들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자치권을 획득했다. 또한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함에 따라 1920년 4월 산 레몬 회의에서 베카고원 등의 내륙부도 레바논에 합병되었으며, 1923년에는 시리아 등과 함께 프랑스의 위임통치령이 되었다. 1926년 시리아에서 분리되어 위임통치 아래 자치국이 되었고, 1944년 1월에 완전독립을 달성했다. 이와 같은 근대 역사를 지닌 지역 속에 기독교의 선교역사가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를 아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레바논의 종교는 총 18 개의 종교 단체가 있으며, 그 중 약 1/3은 기독교인이고 2/3는 무슬림이다. 가장 큰 그룹은 시아파와 수니파 무슬림, 마론파, 그리스-정교회, 그리스-가톨릭 기독교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그룹 외에도 정통파와 가톨릭 아르메니아인, 드루즈, 개신교 및 기타 소규모 종교 공동체가 있다. 고유 한 집중력과 다양성을 지닌 다양한 기독교 교파가 레바논의 국가 정체성의 일부가 되었다. 따라서 레바논은 아랍 세계에서 기독교의 중심지이다. 전통적으로 레바논은 종교적 신념으로 박해를 받는 운동과 지역 사회의 중요한 안식처였다.레바논의 개신교 기독교는 레바논 인구 중 1% 정도 이다. 레바논의 대부분의 개신교 인들은 19세기와 20세기에 주로 영어와 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개종했다.1848년에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에 설립되어 1848 년 회중 및 장로교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 된 National Evangelical Church (NEC, 이름하여 장로교)는 베이루트 외곽 지역에 여러 교회들을 세운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회중이 모인다. 그 지역들은 아베이, 아라문, 칼데, 카파르쉬마,하다스, 디바예, 주디이데, 드와르쉐이르 등지이다. The National Evangelical Church of Beirut (NECB) 베이루트 장로교회는 9개의 장로교회와 교단 본부 및 행정 중심 역할을 레바논 내셔날 복음주의 연합 (the National Evangelical Union of Lebanon, NEUL)산하에서 활동하였다. 1870년에 제일 장로 교회는 아랍어와 영어를 사용하는 회중을 수용하기 위해 세워졌다. 주일 학교와 사회 문화 사역 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다음 백년 동안 교회는 두 공동체의 모든 활동과 축하의 중심지였다. 그리고 레바논 내전 (1975-1990) 동안 종탑을 제외하고는 완전히 파괴되었고 그로 인해 회중이 흩어졌다.전쟁이 끝난 후 교단은 구조를 재건했다.9개의 회중과 2,000명의 회원이 있다. 이 회중들은 베이루트 (Beirut), 아베이 (Abeih), 아라문 (Aramoun), 칼데 (Khaldeh), 카파르쉬마 (Kafarshima),하다스(Hadath), 드바이에이트 (Dbayyeth), 브함둔 (Bhamdoun), 드후르쉐웨르 (Dhour El-Showeir)에 있다.전체적으로 레바논에는 약 40,000 명의 복음주의 개신교인이 있다. 이들은 장로교, 회중 교회, 침례교, 하나님의 교회, 나사렛 교회, 형제회 및 오순절 파로 구성된다. 장로교와 회중 교회는 비슷하며 개신교 공동체의 75 %를 형성하고 있다. 장로교 총회는 레바논과 시리아를 포함 한다 (시리아에는 수천 명의 장로교도가 있다). 회중 교회와 장로 교회를 설립 한 복음주의 선교는 19 세기 초에 일을 시작했다. 그들은 시리아 개신교 대학 (현재 미국 베이루트 대학)과 베이루트 여성 대학 (현재 레바논 아메리카 대학)을 설립했습니다. 둘 다 오늘날 세속적인 대학으로 변했지만 말이다. 안타깝게도이 교회들 대부분은 더 이상 복음전도를 통한 구원의 소식을 전파하지 않는다. 그들은 신학적 자유주의에 크게 영향을 받았으며, 이는 교회 지도자들의 훈련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들은 개혁주의 교리를 계속해서 신봉하고 있으며 그들 중에는 참된 신자들이 있다. 레바논에는 교리적으로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몇몇 침례 교회도 있다. 레바논은 여전히 기독교 정신과 민주주의 정치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헌법에서 예배와 전도의 자유가 보장된다. 그러나 무슬림 공동체의 전도는 어렵고 때로는 폭력적으로 반대하고 있다.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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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12
  • 요르단의 하나님의 성회 사역
    필자는 요르단에서 활동하였던 초창기부터 현재까지 사역하고 있는 미국 성회 사역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오늘도 서정섭 선교사가 필자에게 보내온 글을 근거로 하여 기술하고자 한다. 1919/20년 브와트포드라는 여성 선교사가 요르단 살트에 입국하여 사역을 하고 있었다. 그때 로이 휘트먼은 예루살렘에서 아랍어를 공부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성회와 휘트먼이 함께 사역하는 가운데 휘트먼은 살트에서도 아랍어를 공부하였다. 1923년경 이집트에서 전도자가 한 명이 중동지역을 여행 중 요르단에 들렀는데 그의 이름은 바르나바이었다. 당시 살트가 이 나라의 도읍지이어서 그 당시 사역은 살트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바르나바와 휘트먼이 함께 동역함으로 영적 부흥이 일어났다. 1933년 카와르 가문의 옴무쌀림이라는 여성이 방언과 치유의 기적을 행함으로 교회는 새로운 체험을 갖게 되었다. 영어, 프랑스어, 터키어, 쿠르드어 등의 방언과 대부분 무의식 중에 영으로 노래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이 여성이 정치적인 사건들도 예언하는 것을 휘트먼이 보게 되었다.하나님의 성회 교회는 1931년 살트에서 처음으로 건축되고 당시 미국 국적의 이라크인 이었던 와트포드(벤자민) 선교사가 동역하였다. 1944년에 한 두 개의 기독교 학교가 있었던 것으로 전하고 1956-7년 미국 하나님의 성회가 요르단에서 철수함으로 당시 선교사들이 소유한 건물과 재산을 현지 교회에 남기고 갔는데 그것이 현재 살트에 있는 교회와 자르까의 건물이었다. 당시만 해도 교회는 교세가 약하였고 교인들 일부는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그 뒤 10년간 요르단 하나님의 성회 교단은 침묵의 시기로 지내게 되었다. 거의 영적 부흥이 일어나지 못한 시기이었다.1966년 미국 선교사 원플레터리가 요르단에 파송되면서 교회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요르단 현지교회와 미국 선교부간의 요르단 하나님의 성회 교단을 감독 관리하는 문제로 첨예한 대립을 가져왔다. 이런 와중에 이집트에서 하비브스캔다르 박사가 왔다. 그는 의사로 자발 웹다에 클리닉을 시작하였다. 이 때를 사무엘 목사는 새로운 하나님의 성회의 성장기로 보았다. 하비브 박사는 클리닉을 통해 교회를 시작하였는데, 1972년경에는 무즈다르에서가정모임 교회도 시작하였다. 물론 그당시 교회와 클리닉은 모두 건물을 임대하여 사용하였다. 이때 두 개의 그룹이 생겨났다. 하나는 기존의 살트와자르까의 건물을 관리하던 그룹 그리고 다른 하나는 무즈다르와웹다의 클리닉을 중심으로 한 교인들의 그룹이었다. 1970년 요르단과 팔레스타인 간의 내전으로 전쟁 중에 오순절 교회는 놀랍게 부흥을 맞이하였다. 다른 복음주의 교단과 다르게 하나님의 성회 교회는 치유와 성령 세례를 체험하였다.현재의 자발 웹다의 교회는 1984년에 건축되었고 그 다음해 3월에 교회 헌당식과 사무엘 목사 안수식을 가졌다. 하비브 목사가 처음 1년간 시무하고 미국으로 돌아갔고 이어서 짐 베네트 미국 선교사가 2년간 담임하다가 컨티넨탈 바이불 스쿨의 교장으로 가고, 그 뒤 사무엘 목사가 위임목사가 된 후 1년 있다가 디크란 목사와 공동목회를 현재까지 하고 있다.1990년 걸프전으로 중동 정세는 어두워 있을 때 하나님의 성회는 이르비드를 시작으로 하여 마르카와자르까에 교회를 개척하였다. 1996년에는 7번째 교회를 마다바에 개척하였다. 특히 여름 성경학교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였는데 그것이 임마누엘 캠프이다. 이런 캠프 사역에는 가족 캠프와 청소년 캠프가 아줄룬과살트에서 있었고 1970년부터는 성경학교 프로그램을 강화하였다. 하나님의 성회 교단에 속한 교회로 가장 큰 교회는 웹다의 교회이고 지교회로는 현재 살트, 자르까, 이르비드, 마다바, 마르카, 무즈다 등에 교회가 있다. 1997년 훈련센터 건립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하여 현재 8서클 주변의 땅(대지 구입비 100만 달러)을 매입하였고 2002년 말에는 건축을 시작하려고 기도 중에 있다. 그리고 이미 가정 모임을 시작한 곳은 푸훼이스와 주웨이다 지역이다.하나님의 성회 교단에 속한 중동 지역의 교회로는 요르단을 비롯하여 레바논, 이집트, 수단 등에 있고, 셀그룹 형태로 가정교회를 하고 있는 곳은 모로코, 알제리(적어도 2만명 예수 영접), 예멘과 걸프 지역 등이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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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14
  • 요르단의 열린 목회
    필자는 요르단에서 사역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있는 미국의 얼라이언스 선교사님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Alliance 교단은 19세기 후반에 A.B Simpson에 의해서 창설된 선교단체와 교단이다. 계속해서 서정섭 목사님이 저에게 보내온 자료를 중심으로 글을 기술하고자 한다. 요르단의 얼라이언스 교단은 한국의 성결교단(Holiness church)과 거의 비슷한 교리를 갖고 있다. 즉 Sipmson은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 그리스도는 우리의 성화자, 그리스도는 우리의 치우자, 그리스도는 재림하실 주님 라고 주장하면서 4중 복음을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한국의 성결교회는 중생, 성결, 신유, 재림 이라는 사중 복음을 형성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따라서 두 교단이 거의 동일한 교리를 갖고 있다. 1890년 미국의 얼라이언스 교단은 미국 선교사에 의해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요르단에는 카니싸 파디(성공회) 교회가 있었는데 개신교로서는 이 교회가 처음이지만 순수한 복음주의 교회로서는 얼라이언스가 처음으로 요르단에서 시작되었다고 유쑤프 목사는 강조한다. 얼라이언스 교단은 다른 사람이 세운 지역에는 교회를 세우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라 교회가 없는 것에 교회를 세우기로 하였다. 그래서 제일 처음 카락에서 시작하여 마안, 마다바, 마프라끄, 암만의 순서로 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그래서 2000년 1월 현재 얼라이언스 교회는 자발 암만, 7서클, 마르지 함맘, 야두다, 나오르,마다바, 마프라끄 등 7개의 교회와 예루살렘 교회 등을 포함하여 요르단의 유쑤프하쉬와 목사가 교단 총회장을 역임하고 있다. 8개 교회의 교인은 대략 1500명 정도라고 한다. 2000년 1월 현재 중동의 얼라이언스 교회는 시리아에 17개 교회와 레바논에 5개 교회가 있다. 요르단의 얼러이언스 교회는 카나다 장로교 목사 앨버트 샴슨이 개척하여 현재의 암만 교회는 팔레스타인 출신 유쑤프 목사가 아버지를 이어 2대째 목회하는 것이다. 이 교회의 특징은 이라크인 집회, 수단인 집회, 필리핀인 집회, 쿠르드인 모임 등 여러 congregation이 한 교회 건물을 사용하고 있어 목회자의 열린 목회가 주목받고 있다. 외국 선교사가 요르단 현지 목회자에게 교회를 넘겨줘 완전히 독립하게 된 것은 1962년이다. 그 이전에는 목회와 재정에 외국 선교사의 도움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얼라이언스 교단이 Christian &Missionary Alliance로 요르단 정부에 등록된 것은 1927년이며 그당시 등록은 법무부이었고 교회가 아닌 자므이야(society)이었다. 처음에는 마다바에 학교도 있었으나, 현재 재정난으로 학교가 문을 닫았다. 요르단 얼라이언스 현지 교단 이름으로 정부에 교회가 등록된 것은 1978년이다. 현재 요르단 정부에 교회로 등록된 것은 정교회, 카톨릭, 몰몬교, 어드벤티스트 등이라고 한다. 하쉬와 가문은 1968년 이스라엘의 전쟁으로 요르단으로 피하여 나왔는데 당시 요르단에는 한누쉬와아왑다 등의 사역자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유쑤프 목사는 자신의 아버지가 60년간 조직교회로서 얼라이언스 교회를 튼튼히 하였다고 말한다. 현재의 2서클 교회는 1989년에 건축되었다고 한다. 사역으로는 여성선교사는 여성을, 남성 사역자는 남성을, 청년 사역자는 청년을 그리고 목회자는 설교를 통해 사역할 수 있다고 말한다. 특히 유쑤프 목사는 한국인이 현지 교회에 십일조를 함으로 현지교인에게 모범이 되기도 하고 교회를 성장시키는 역할을 하므로 한인 사역자들이 현지 교회에 와서 목회와 후원으로 교회를 섬길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전체 사역의 20%를 기존의 기독교인들에게 그리고 80%는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사역하는 것이 선교 정책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경공부와 가정모임을 활성화할거라고 말한다. 필자는 오늘 소개된 Alliance 교단과 C&MA 를 창설한 A.B.Simpson의 선교신학에 대한 논문을 통해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특히 Simpson께서 기술하신 선교사 메시지(Missionary Message)를 읽을 때에 가슴이 너무 벅차서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감동을 받은 적이 있다. 오늘 심슨이 만들어 놀은 선교단체에 의해서 파송된 선교사님들의 성공적인 요르단 선교를 보면서 선교의 역동성이 한국교회에 충만되기를 기도한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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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03
  • 요르단 나사렛 교단의 선교역사
    필자는 오늘 계속해서 요르단에서의 선교역사를 기술하고자 한다. 자료의 출처는 지난 호에서 이미 밝혔듯이 서정섭 선교사가 필자에게 보내온 글을 중심으로 하였다.1949년에 암만 나사렛학교가 시작되었고 현재는 나사렛 교단이 내무부에 등록되어 있다. 나사렛 교단은 6주간(42과목 이수) 집중강의를 사이프러스에서 받고 나머지 6과목을 중동 해당 각 지역에서 받는 자에게 디플로마 학위를 수여한다. 목사는 목사 안수를 위한 위원회에서 각 사람의 신앙, 신체, 정신, 신학적 건전성을 확인한 후 안수를 허락한다.2000년이 예루살렘에서 나사렛 교단이 시작된 지 꼭 79주년이 되는데, 나사렛 교단은 중동에서는 처음으로 아르메니아인 크리코리얀에 의해 1921년 성지 이스라엘에서 시작되어, 1947년에는 요르단으로 확장되었다. 당시 요르단강 동안과 서안은 두 개의 나라가 아닌 하나로 이어져 있었으나 1947년 전쟁으로 요르단쪽으로 점차 교세가 확장되었고, 지금은 중동에서 가장 교세가 크고 영향력이 있는 나사렛 교단은 역시 요르단에 있다. 시리아에는 1921년 다하비야 목사가, 레바논에는 1920년 하꾸비얀 목사에 의해 그리고 이집트에서는 1970년에 시작되었다.나사렛 교단 소속의 교회와 학교로, 요르단에는 당시 크리코리얀이아르메니아인이었으므로 아르메니아인 난민을 위한 학교와 교회를 아쉬라피야에서 시작하였고 현재는 자르까에도 교회와 학교가 있다. 시리아에는 미국에서 공부하던 유학생이 나사렛 교회에서 신앙을 배우고 난 뒤 불루단에서 학교를 시작하고, 이어 교회와 고아원을 설립하였다. 그가 레바논에도 교회가 있어야 함을 깨닫고 그 뒤 레바논에 나사렛 교회가 조직교회로 출발하였다. 그렇다면 왜 나사렛 교회가 오직 요르단에서만 강한 교세를 갖게 되었는가? 그것은 선교사가 아닌 자국민에 의해 교회가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오직 선교사에 의해 교회가 시작되었고 레바논에는 전쟁으로 많은 교인들이 미국으로 건너가 버렸고 시리아에는 사회주의 정권의 경찰조직으로 선교사가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상황이 되었다.우리는 문화에 익숙한 충성된(Faithful) 사역자를 만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본다. 우리는 아랍문화를 안다고 우쭐대서도 안 된다. 오래 사역을 하였다고 모든 것을 안다는 태도는 더욱 조심하여야 할 일이다. 우리는 기존의 아랍교회와 연합하여 팀사역을 하는 것이 그들과 영적 가족을 이루어 서로 돕는 장점이 있다. 오로지 현지인들과 영향을 주고 받는 파트너쉽 사역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우리는 요르단 문화를 이해하여야 한다. 흔히 아랍인이 손님을 집으로 초대하면 그들이 우리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아랍 문화에서 수치(shame)와 명예(honour)는 양면성을 갖는다. 가령 외국인이나 나그네를 대접하지 않으면 그것은 수치가 되므로 명예를 지키려면 그가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그를 초대하여야 한다. 아랍인 중에서 요르단인은 자신의 손을 더럽히기를 싫어한다. 그래서 이집트인과 수단인, 필리핀인들을 하인으로 고용하는 것을 볼 수 있고, 그래서 현지 외국인 회사가 요르단인을 고용하려고 해도 요르단 사람이 없다고 한다.현재 요르단에는 나사렛 교회가 8개, 학교가 2개, 있다. 독립적으로 우리가 요르단에 교회를 세워가는 것은 왕실의 허락(Royal decree)이 있든지 혹은 기존 교회가 우산이 되어 보호하여 줄 때 가능하다고 말한다. 현재는 외국인 선교사 6가족이 나사렛 교단과 협력 사역을 하고 있고 그들에게 비자를 도와주고 있다.아피프 목사가 주장하는 선교사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그것은 영적집시라고 불리울 수 밖에 없는 이 교회 저 교회를 떠돌아 다니는 선교사들을 지적하였다. 어느 한 교회에 진득하게 붙어 있지 못하고 교회를 찾아 방랑하는 선교사를 가리켰다. 차 한잔 마신다고 친구는 아니라는 것이다. 적어도 우리 각자의 삶을 나누는 관계로 발전하였을 때 우리는 친구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10번만 아랍교회를 다니면 곧 그 교회의 특성을 알게 된다고 하였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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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17
  • 요르단 침례교회의 선교역사
    필자는 지난 호에 이어서 요르단선교역사를 이야기 하고자 한다. 요르단 선교역사의 자료는 이미 밝혔듯이 오늘은 요르단에서 사역하고 있는 서정섭 선교사가 필자에게 보내온 글을 중심으로 하였다. 요르단의 침례교회는 1952/3년 암만의 북쪽 아즐룬에서 미국 남침례교southern baptist선교사들이 의료사역을 시작으로 하여 출발 하였다.그 후 아즐룬에 침례교회가 처음 생기고 이어서 의료진들이 유치원과 정규학교의 문을 열었다. 침례교회는 아즐룬에서 안자라,이르비드,제라쉬로 확장되어 갔다.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서 침례교회의 시작은 1967년으로 이전에는 예루살렘에서 1960년에 시작된 침례교회와 유대를 갖고 교회가 활동하였다. 암만에서 조직교회의 시작은 1975년이고 암만 침례교회의 건물 준공은 1983년이다. 현재는 13개 침례교회가 요르단 내 있고 4개는 현재 개척교회 상태이므로 이를 합하면 17개의 교회가 되는 셈이다. 미국 남침례회 선교사들이 떠나면서 남기고 간 교회 자산을 모두 침례교단에 남겨 주었는데 침례학교(유치원부터 고등학교 과정으로 현재 1200명의 재학생), 침례교단 서점, 컨퍼런스를 위한 수련장(아즐룬convention)이 있다.요르단에서 침례교단의 가장 큰교회는 암만 침례교회와 자르까 침례교회 둘을 든다. 현재 쑤웨일레흐와 슈미사니 두 곳에 생긴 개척교회가 있고 목사안수를 기다리는 3명이 있어 전반적으로 볼 때 급성장하지는 못하지만 꾸준히 성장하는 교세라고 볼수 있다. 하나님은 암만 침례교회를 자립하게 하시고, 1999년 이후 암만 침례교회를 후원하던 해외 선교단체의 후원금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나머지 교회는 재정이 부족하여 충분하게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다. 현재 암만 침례교회의 세례 입교인은 170명이고 그동안 암만 침례교회 교인이었다가 지교회를 세우고 나간 교회는 침례교단학교의 이마드 학장(요르단복음주의 신학교 학장)의 교회, 푸훼이스, 아븐세르, 슈미사니, 쑤웨일레흐, 라쉬드 등 6개교회이다. 모교회가 선교하는 교회, 복음을 전하는 교회로서 그 본래의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하고 있다고 보겠다. 암만 침례교회 파와즈 목사는 이밖에 교회라 불릴수 없는 마르카즈(preach centre)는 많이 있는데 앞으로 선교사들이 요르단 교회에 등록하여 교인이 먼저 되고 나서 교회 사역에 참여하는 것이 정부의 간섭을 피하고 장기적으로 사역할 수 있는 방편이라고 말한다. 제라쉬, 자르카, 아즐룬, 쑤웨일레흐 등 5개 교회에는 요르단 사람이 아닌 이집트 목회자(3명)와 시리아 목회자(2명)가 사역하고 있다. 그것은 정부가 인가한 기존의 침례교회를 등에 엎고 교회를 시작하는 것인데 만일 한국인이 사역을 한다면 이들 교회에서 동역하는 것이 certificate를 얻는 등 여러 면에서 안전하게 사역할 수 있다는 것이다.1957년 요르단의 침례교단은 교파 이름으로 정부에 등록되기 보다는 연합하는 의미에서 교파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기를 바랐으나 요르단 법무부는 (요르단인 침례교단- 따이파마아마다니인우르두니인)으로 등록하여 주었다고 파와즈 목사는 말한다. 요르단 아랍교회에서 목회자 비자를 받을 때에는 교단의 이름으로 “우리가 이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내용의 공문을 보내 비자를 얻어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와 오래 시간 동역하여 교회로부터 추천을 받아 비자를 발급받는 예도 있다. 결국 좋은 관계를 맺어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한다.요르단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개신교회는 성공회, 그 다음 순서로 복음주의 자유교회, 하나님의 성회, 나사렛 교단 그리고 가장 나중에 침례교단의 순이다. 요르단사람들이 세운 장로교단은 요르단에 없다. 장로교는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이집트에 있고, 영적으로 가장 힘있게 사역하는 곳은 이집트 장로교회이다. 침례교회는 요르단, 레바논(30여 교회), 시리아, 이집트(15개 교회), 팔레스타인(가자지구, 나사렛, 가나, 뚤루안, 베들레헴, 라말라, 예루살렘) 등으로 가장 힘있게 사역하고 가장 큰 침례교회는 레바논에 있고, 요르단에서 가장 큰 교단은 침례교단이다. 성공회는 침례교단이 인정하고 연합하여 사역하기를 원하나 그들 성공회 측과는 아직 연합하지 못하고 있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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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06
  • 요르단의 선교 역사
    필자는 오늘 요르단의 선교역사를 말하고자 한다. 요르단 하면 생각나는 곳이 두 군데가 있다. 첫째는 유명한 페트라 이다. 이곳은 사도 바울께서 회심 이후에 방문하여 사역한 곳으로 많은 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다. 다른 한 곳은 카락성 이다. 이곳은 십자군 전쟁 당시에 건립된 곳으로 천해의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땅인 요르단은 지금은 무슬림의 땅이 되어서 기독교가 숨쉬기 어려운 형국이 되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 땅에 이미 하나님의 복음이 증거 되었다. 오늘은 선교사가 전해준 이야기들을 통해서 요르단의 개신교 선교역사를 펼치기로 하겠다. 이 자료는 참으로 귀중한 요르단의 선교역사 이다. 지난여름에 중동지방에서 사역하고 있는 선교사님들에게 세계선교역사를 강의 하였다. 그 때에 수강하신 선교사님들에게 본인이 사역하고 있는 선교지의 선교역사를 정리하여 레포트로 제출할 것을 요구 하였다. 오늘은 요르단에서 사역하고 있는 서정섭 선교사가 제출한 글을 중심으로 하여 요르단 선교역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참고로 요르단의 선교역사를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서 기술하고자 한다. 요르단에는 1830년 미국의 회중교회(congregation church), 개혁교회(Christian reformed church),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가 레바논, 이집트, 시리아, 걸프 지역에 왔다. 1850년에는 성공회도 중동에 들어오게 되고 이라크의 바그다드와 바스라에는 장로교회가,이집트에는 개혁교회와 장로교회가 그리고 레바논에는 회중교회와 개혁교회가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장로교 신학교는 이집트에서 시작하였고(그래서 오늘날 걸프지역에 교회가 부진한 이유는 신학교가 이집트에만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이라크인은 이집트에서 신학공부를 하여야 했다. 레바논에서는 이 세 교단이 연합하여 National Evangelicalchurch)를 이루어 초교파의 색깔을 지니게 되었다.장로교회는 현재 시리아와 레바논이 하나의 Synod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래서 시리아에는 장로교회, 나사렛, 침례교회, 얼라이언스 교회가 있다. 얼라이언스는 미국의 CMA(Christian & missio nary alliance)로 부터 시작하여 중동과 아시아에 퍼져 있다. 요르단의 5개 교단의 신앙노선을 보면 침례교단과 복음주의 자유교단은 칼빈주의를, 나사렛 교단과 하나님의 성회는 알미니안 주의를 택하고, 얼라이언스 교단은 칼빈주의와 알미니안 주의가 섞여 있는 것을 보게 된다.1850년에서1900년 사이에 Free Methodist, Holiness movement 그리고 웨슬리안들이 이집트와 레바논에 들어왔고 이어서 하나님의 성회도 들어왔다. 앞의 세 교단은 부흥사를 보내어 함께 사역을 감당하였다.그러나 택함을 받은 자만 구원을 받는다는 장로교단과 거룩한 행실 즉 성화를 강조하는 감리교단 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선교에서는 그 차이를 드러내지 않았다.1930년대 이집트에서 일단의 복음주의자들 20-30명 정도가 팔레스타인 지역에 들어왔다. 웨슬리안,장로교 그리고 이 둘을 수용하는 무리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이들은 다양한 정교회(시리안 정교회, 아르메니안 정교회, 콥트 정교회,그리스 정교회 등)와 카톨릭 사람들에게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을 때에만 있음을 전하였다. 여기서 팔레스타인이라고 말한 것은 요르단 동편과 서편을 다 말하며 요르단강 동편은 현재의 요르단 왕국을 가리킨다.1930년에 요르단 카락에는 얼라이언스 교회가 있었다. 카락에 사는 사람들은 같은 종족간에 끈끈한 유대가 있었다. 아직도 이런 종족간의 결속 의식은 카락, 살트, 아즐룬, 마프락, 마안 등에서도 볼 수 있다. 이들 지역은 흔히들 말하는 “북 팔레스타인(예루살렘 북쪽 지역)부흥”운동이 일어났던 지역이다. 그리스 정교회 배경을 가진 7-8명이 모여서 성경공부를 시작하였는데 이 중 아부 샤하다파쿠리는 그 가족이 다 열심으로 성경을 공부하는 가문이었다.요르단이 수도를 살트에서 암만으로 1939년에 옮기자 당시 행정건물도 암만으로 옮겨갔다. 기독교인들은 당시 자녀 교육에 대한 열심히 있어 레바논들으로 유학을 보냈고 이런 학식을 갖춘 기독교인들이 정부 요직에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그 당시 기독교인들이 정부 공직자의 35% 수준에 이르게 된 적도 있었다. 요르단의 많은 여성들은 그리스도의 참된 신앙과 성경공부를 좋아했다. 그래서 오늘날 요르단 교회의 70%는 여성이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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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교
    2019-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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