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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대의 왕 헤롯 아그립바 1·2 세의 이야기
    유대 왕 헤롯 아그립바 1세와 2세의 이야기이다. 헤롯 아그립바 1세는 할아버지 헤롯 대왕이 통치했던 곳을 지배하며 정권 유지를 위해 친유대교 정책을 폈다. 그 결과 성도들을 박해하고 야고보를 목 베는가 하면 베드로를 투옥했다. 사실 그는 세상적으로 보면 성공한 유대 왕에 속한다. 그래서인지 그는 교만해졌다. 결국 그는 가이사랴에서 두로와의 외교에 성공하고 축제를 개최하는 날, 하나님의 진노를 사 충에게 먹히는 심판을 받아 죽었다. 즉 스스로를 속이고 자신이 신인 양 행세했기 때문에 심판을 받았다.(행12장) 다음으로 헤롯 아그립바 2세는 자기 누이 베니게와의 관계에서 염문을 뿌렸다. 그는 그의 추함을 가리기 위함인지 사람들 앞에 나설때는 위의를 베풀었다. 즉 거창한 행렬로써 사람들의 비아냥과 수근거림을 제압하려 했다.(행25:23) 하지만 그는 유대전쟁(66~70년) 당시 유대인들로부터 암살당하는 최후를 맞았다. 이렇게 스스로 속이는 교만은 사치스러운 겉치장으로는 가릴 수 없다. 스스로 교만한 인생은 환난의 때를 생각지 못하므로 결국 환난에 처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자고로 악인들은 자기의 날들을 주의치도 않고 헤아리지도 않는다. 이 땅에서 장구한 세월동안 쾌락과 사치를 즐기며 불의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 한다. 이처럼 악인들은 영적으로 매우 둔감한 상태에 놓여 있다. 그러기에 자신들의 최후가 아주 가까워진 날에도 자신들의 삶을 돌이켜 참회의 자리에 서기 보다는 오히려 더 큰 악과 부패에 심취하려 든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 정해 두신 시간표에 따라 악인들의 죄악을 심판하시며 그들의 악행을 징벌 하신다. 이 세상과 온 우주 만물을 홀로 통치해 가시는 하나님의 생각과 이 세상의 한정된 삶에 묶여 있는 죄인들의 시간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실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이해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오늘날은 악인들이 기승을 부리고 부패한 권력과 타락한 세력들이 세상을 어지럽히는 혼탁한 세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표를 바라보아야한다. 오히려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 현재의 삶에만 시선이 머물러 그리스도 없는 세상의 영화를 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은 내적으로 죄악을 가리기 위해 그리스도 없는 세상의 사치로 치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시 종교적 형식으로만 자신을 치장하여 스스로 거룩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지만 이렇게 행하는 것은 스스로 속이는 것이다. 스스로 죽음을 향해 치닫는 행위와 같다. 고로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를 속이는 그 길에서 돌이키어야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날마다 시인하며 살아야한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주’에 해당하는 헬라어 ‘퀴리오스’는 헬라 세계에 있어서 종이 주인을 가리켜 부르는 호칭이다. 당시 헬라 세계에서 주인은 종에 대하여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하였다. 종의 행사가 주인의 손에 달려 있었다. 즉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는 것은 예수님을 자신의 생명과 죽음을 결정하시는 분으로 인정한다는 말이다. 다음으로 예수님을 주로 시인한다는 것은 그분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퀴리오스’는 종이 주인을 부를 때 사용하는 호칭일 뿐 아니라 신을 부를 때 사용하는 호칭이기도 하다. 헬라 사람들은 자기들이 믿는 신 이름 앞에 항상 ‘주’라는 호칭을 붙였다. 가령 ‘퀴리오스 세리피스’라는 말은, ’세라피스‘는 신이라는 뜻이다. 예수를 통해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은 그분이 본래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한다. 그분을 하나님이 아닌 한 뛰어난 인간이나 종교의 창시자로 본다면 그분의 사역과 영생의 언약들도 다 예수라는 인간이 하는 것으로 믿게 된다. 예수를 절대적인 하님의 아들로 믿어야 그분의 대속과 부활 사역을 믿을 수 있으며 그분이 약속하신 영생구원의 약속을 절대적인 하나님의 언약으로 확신 할 수 있다. 끝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한다는 것은 그분을 왕으로 인정한다는 말이다. ‘퀴리오스’는 당시 로마 황제를 부를 때 쓰는 호칭이기도 하였다. 우리가 구원을 얻으려면 반드시 예수님을 자신의 왕으로 영접해야 한다. 그분만이 자신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절대적인 권세를 지닌 분이요.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유일하신 왕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고로 우리는 이러한 의미가 담긴 예수님을 ‘주’로 시인해야 한다. 특히 우리는 입으로 성도들과 교회 앞에서 ‘나는 이제부터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해야 한다. 그래야 주님이 그 믿음을 인정하시고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여겨 주시기 때문이다(마10:32, 33).
    • 칼럼
    • 목회자
    2018-02-03
  • 참 재미있는 인생의 행복 이야기
    로드 베르트레이트의 “딸에게 들려주는 작은 지혜”라는 글 속에 나오는 짤막한 이야기이다. 어느 날 한 사람이 지혜롭고 이름 높은 현자를 찾았다. 그 사람은 현자에게 지혜와 행복을 가져다 줄 가훈 한마디를 써 달라고 부탁했다. 그 사람은 현자에게 지혜와 행복을 가져다 줄 가훈 한마디를 써 달라고 부탁을 했다. 현자는 지체 없이 붓을 들고 이렇게 썼다. “아버지가 죽고 아들이 죽고 손자가 죽다” 전혀 기대 밖의 문구를 보고 그 사람은 화를 냈다. “절 놀리시는 겁니까?” 그러자 현자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자네를 화나게 할 의도는 없었네. 그렇지만 한번 생각해 보게나. 자네의 아들이 자네보다 먼저 죽고 또 손자가 아들보다 먼저 죽는다면 과연 행복하겠는가? 내가 써준 문구대로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죽는다면 끔직히 고통스러움도 없을 것이 아닌가? 난 이것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생각 한다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조금은 우습기도 하지만 사실 일리가 있는 이야기가 아닐까!다음은 일본의 호시나 마사유끼라 사또와 그가 총애하는 한신하와의 진지한 대화이다. 어느 날 사또가 총애하는 신하에게 이렇게 물었다. “네게는 어떤 행복이 있느냐?” 그러자 신하는 “예! 두 가지가 있습니다.”라고 대답을 했다. 그래서 사또는 “무엇 이냐? 어서 말해보아라”고 명했다. 그러자 신하는 이렇게 말했다. “한 가지는 가난한 것입니다. 원래 사치를 모르기 때문에 사치하고 싶은 생각이 없으니 편하고 그로 인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니 또한 편합니다.” 이에 사또가 신하에게 다시 물었다. “그럼 한 가지는?” 하지만 신하는 대답 대신 “저 그건”하고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자 사또는 큰소리로 “어서 말해보아라”고 재촉했다. 이에 신하는 깜짝 놀라면서 “그렇다면 말씀드리지요 한 가지는 사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라고 대답을 하는 것이 아닌가! 사또가 이 말을 듣고 신경질적으로 “뭐라고” 하자 신하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사또 앞에서는 모두 가면을 쓰고 진정한 말을 안합니다. 그래서 사또께서 보시는 현실은 실제와는 차이가 납니다. 이렇게 차이가 나는 현실만을 보고 있으므로 사또는 바보가 됩니다. 저는 바보가 되지 않았음을 다시없는 행복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이것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다. 그렇다고 복이 많거나 운이 좋고 생활에 만족하고 삶의 보람을 느끼는 것도 아니다. 그럼 행복이란 무엇일까? 행복이란 히브리어 ‘에쉬리’는 동사 ‘아쉬르’에게 나온 말인데 이 동사의 기본의미는 ‘곧다’이다. 또한 이것은 ‘평탄하다’. 또는 ‘행복하다’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에쉬리’는 모든 일이 평탄하게 진행될때 갖는 심령의 낙 곧 영혼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행복은 세상의 재물, 학식, 지위, 명예, 권력, 건강, 장수, 후손 등과 또한 세상적인 쾌락으로는 얻을 수가 없고 다만 생명의 떡을 먹어야 한다. 생명의 떡이란 예수님은 스스로 생명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란 말이다‘ 그리고 떡을 먹는다는 것은 예수님께로 오는 것 곧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말이다(요 6:35). 그러므로 참 행복의 비결은 예수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삶이 진정한 행복한 삶이다. 주님을 믿는 성도들에게는 설령 눈에 보이는 소유가 없을 지라도(합 3:17) 주께서 참된 안식과 평화와 위로와 기쁨을 주시기 때문이다(요 14:27).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루를 살아도 주님과 함께 살면서 주를 위해 겸손히 충성과 봉사를 해야 한다. 다음의 이야기는 인도에서 있었던 실화이다. 어떤 여인이 매우 허스름한 옷을 입고 예배에 참석하였다. 선교사는 예배를 마치고 그 여인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이런 옷차림으로 예배에 참석을 했습니까?” 그러자 여인은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옷 중에 제일 좋은 옷입니다.” 그래서 선교사는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물었다. “당신은 항상 그렇게 가난했습니까?” 그러자 그 여인이 이렇게 말했다. “선교사님 그렇지 않습니다. 전에는 저에게도 보석도 있었고 돈도 충분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마을의 깡패 권력자가 재산을 다 가로채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믿는 예수만 버리면 빼앗아간 돈과 보석들을 전부 돌려준다는 것입니다”라고 말이다. 선교사는 그 여성의 말을 듣고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왜 그전처럼 돌아가서 재산을 다시 찾아 잘 살지 않습니까?”라고 하자 여인이 대답을 했다. “비록 가난하게 살아도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것이 많은 재물을 가지고 불신자로 사는 것보다 훨신 좋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세상에서 누리는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소유나 쾌락들은 우리영혼에 진정한 행복과 기쁨을 주지 못하고 결국 우리의 인생을 비참하게 만들 뿐이다. 하지만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신 주님을 모시고 살면 주께서 참 행복과 평안함을 주신다. 그러므로 주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 참 행복한 사람이다.(요14:27)
    • 칼럼
    • 목회자
    2018-01-22
  • 위기의식을 갖자
    한 마리의 여우가 배불리 먹고 초원에 누워 평온하게 햇볕을 쬐고 있었다. 이때 늑대 한 마리가 가뿐 숨을 몰아쉰채 여우 옆을 지나며 말했다. ‘너 아직도 누워 있어? 무서운 사자가 우리 동네로 이사 온다는 소식을? 그러니 빨리 가서 적당한 곳을 찾아’ 하지만 여우는 천하태평 이었다. 그리고 ‘사자는 우리 친구야 뭐가 무섭다고 그래? 여기 사슴이 이렇게 많은데 사자가 우릴 잡아먹겠어? 그러니 그냥 여기 있어도 돼’ 늑대는 자신의 충고가 아무런효과가 없자 머리를 내저으며 떠났다. 며칠 후 사자가 정말로 이사를 왔다. 비록 한 마리뿐이었지만 사슴들은 모두 도망쳤다. 말할 것도 없이 여우는 결국 사자의 밥이 되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위기는 어디든 존재할 수 있으므로 착실하게 준비해 두라고 교훈하는 것이다. 그리고 미래의 위기에 대처하는 것이 진정한 생존의 도리라는 것을 알려 준다. 그렇지 않으면 위기를 깨달았을 때 위기는 이미 우리 머리위에 있다는 것이다. ‘옛말에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이 있다. 이 속담은 오래된 것이지만 오늘 날에도 사람들은 이러한 행동을 되풀이 하고 있다. 소를 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행동은 즉 위기가 이미 닥친 뒤에야 대처하는 피동적인 행위이다. 따라서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대처법은 비록 손실이 확장되는 것을 피하게는 해주지만 재난 자체가 발생하는 것을 막아주지는 못 한다. 그러기에 편안할 때 방심하지 말고 근심하는 의식이 있어야한다. 그렇게 해야만 환난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사람뿐만 아니라 교회, 기업, 조직, 국가와 민족도 마찬가지다. 미래의 재난을 미리 걱정하고 준비하는 것은 사람의 이상적인 반응이자 지혜로운 자의 표상이다. 그러기에 어느 민족이든 위기의식은 항상 있어왔다. 중국에서 위기의식의 탄생은 은나라와 주나라의 사회 변역 시대로 거슬려 올라간다. 수 백 년의 역사를 가진 은나라는 어떻게 멸망했을까? 작은 주나라가 어떻게 대국 은나라를 대체해 천하를 통치했을까? 이런 질문은 국가 지도자들과 지식인들의 관심을 자아냈다. 그것이 바로 위기의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나라 사람들은 은나라를 물리치고 새로운 승자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그들은 일반적인 승리처럼 의기양양하거나 통상의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고 ‘주역’에 나오는 위기의식을 철저히 간직했다. 이는 그들이 성공과 실패에 대해 심사숙고하는 예견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사물의 탄생에 책임감을 갖는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미 정신적으로 자아반성의 의식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즘 우리나라가 어지럽다. 지도층은 서로의 이익을 위한 끊임없는 정쟁에 빠져있고 국론은 분열되어 있으며 북한의 김정은은 핵미사일로 매일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자연 지진은 경북 경주지방을 비롯해 포항을 강타했고 전국에 경한 지진이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일본처럼 지진에 대비 하지 않고 정치 지도자들은 태평한 모습이다. 왜 우리민족은 위기의식을 가져야 하는가? 위기 상황은 우리를 성공으로 이끌 수도 있고 파멸로 이끌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기에 적절히 대응한다면 평소 잘 드러나지 않던 강인함, 힘, 지혜 등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상황에 어설프게 대처하면 위기는 잘 발휘하던 기술, 통제력, 능력 등을 빼앗아 버린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순탄한 환경에서 과도한 긴장을 유지하는 것은 일종의 부질없는 근심을 만드는 것이며 이것이야 말로 불필요한 기우라고 생각 한다. 그러나 위기감이 없다는 그 자체가 위기의 징조다. 그러기에 편안한 환경에 처해 있을 때 위기의식이 있어야한다. 실로 미래에 대해 맹목적으로 낙관할 근거가 없고 안빈낙도를 부르짖으며 허황한 즐거움을 누릴 겨를도 없다. 오직 위기의식을 높여 맡은바 일을 하나하나 성실하게 실천해야한다. 구체적인 생활과 일 속에서 많이 배우고 많이 사고하고 실천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런데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은 작은 재산이나 명예나 권력에 우쭐거리는 심리를 어느 정도 갖고 있다. 이것은 위기의식이 없는 전형적인 태도이다. 우리는 이러한 심리를 반드시 극복하고 위기를 직시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 위기가 닥쳐왔을 때 당황하지 않고 모든 문제를 순조롭게 처리할 수 있다. 아주 오래전 이야기이다. 지구에 공룡과 도마뱀이 살았다. 도마뱀은 하늘의 별이 점점 커지는 것을 보고 그별이 언젠가는 우리와 충돌할 수 있다고 공룡에게 말했다. 공룡은 한 귀로 흘리면서 비웃었다. ‘별이 점점 커지면 우리와 부딪치겠지. 그런데 그것이 어쨌단 말이지? 어차피 우리의 힘으로 막을 수도 없잖아. 그러니 가만히 있으면 돼’ 도마뱀은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열심히 굴을 팠지만 공룡은 천하태평으로 매일 놀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별이 점점 커지더니 빠른 속도로 날아와 지구와 충돌했다. 강력한 지진이 일어나고 화산이 폭발하고 강물이 범람하고 바다에는 해일이 일었다. 공룡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도망 치려 했지만 그 어느 곳으로 갈 수 없었다. 결국 공룡은 전부 멸망했지만 도마뱀은 미리 파놓은 굴 덕분에 생명을 지킬 수 있었다. 그날 이후로 지구에서는 공룡이 사라졌다. 이제 우리민족은 도마뱀의 지혜를 배워 실천해야한다.
    • 칼럼
    • 목회자
    2017-12-23
  • 가장 후회되는 일이 무엇인가?
    프랑스에서 65세 이상의 노인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다. 가장 후회한 것은? 설문 이었다. 72%의 노인들은 ‘젊었을 때 열심히 노력하지 않아 꿈을 이루지 못 한 것’을 가장 후회한다고 답했다. 이는 경험에서 나온 이야기이다. 만약 남들이 일할 때 일하고 놀 때 논다면 남들이 얻는 만큼만 얻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이 얻지 못하는 것을 얻으려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한다. 67%는 ‘잘못된 선택’이라고 답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급여에 이끌려 직업을 선택했지만 후에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고백한 것이다. 63%는 ‘자녀교육의 실패’를, 58%는 ‘건강에 소홀했던 것’을 꼽았다. 11%만이 ‘더 많은 돈을 벌지 못한 것’을 선택했다. 돈이 인생의 전부가 아님을 알 수 있는 통계이다. 돈이 많으면 일을 많이 할 수 있지만 돈 자체가 인생의 목표일 수는 없다. 삶의 꿈에는 원대한 것도 있고 실질적인 것도 있다. 간단한 것도 있고 복잡한 것도 있다. 어느 것이던 정확한 목표를 세워 끝까지 추구해야한다. 백발이 됐을 때 ‘나는 매일 매일 활기찬 삶 이었다‘라고 말할지, 아니면 ‘매일 매일이 지겨웠어‘라고 말할지는 오로지 우리의 몫이다. 우리는 후회되는 일이 무엇일까? ‘후회 없이 살기 위해 더 늦기 전에 꼭해야 할 일’의 저자 ‘오그만디노’는 후회 없이 살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할 일로 먼저 인간관계를 꼽았다. 인간관계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좌우명은 ‘당신이 만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 날을 보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대하라’는 것이라고 했다. 어떤 책에 보니 인간관계를 잘하려면 인맥관리를 잘하라고 했다. 즉 머리품, 발품, 손품, 인품, 베품 등 5가지를 잘하라고 했다. 짤막히 생각해 보자. 발품, 좋은 인맥을 만들려면 열심히 돌아다녀야한다. 손품, 내가 먼저 전화나 문자 메일을 보내며 꾸준하게 연락을 이어가야 한다. 인품, 사람들이 좋아하고 다를 수 있는 향기 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베품, 받으려 하기 보다는 먼저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서 어떻게 하면 좋은 인맥을 바랄 수 있고 친밀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지 끊임없이 연구하는 머리품을 잘하는 것이다. 그러나 직장과 사업, 가정을 챙기기도 바쁜 현대인에게 인맥 관리는 만만하지 않다. 인맥관리의 소중함을 알지만 시간에 쫓겨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다. 구체적인 방법을 몰라 고민에 그치는 사람 또한 매우 많은 것이 현실이다. 인맥관리와 대인관계에 뛰어났던 사람들의 삶을 살펴보며 그들의 비결을 그대로 실천해 보자. 카네기 멜론 대학, 보스톤 대학, 하바드 대학 등 수많은 대학과 연구기관의 조사 결과가 말하듯이 성공과 행복의 가장 중요한 비결은 인간관계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사람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좋은 인맥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한다. 좋은 인맥을 만들려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라. 최선을 다했는가? 한 심리학자는 인간관계를 다섯 종류로 나눴다. 친밀도가 낮은 순서부터 말하면 먼저, 만난 적도 없고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 여기에 해당된다. 하지만 같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어떤 인연이 닿아 만날 수 있으므로 완전히 무시할 수 없는 존재이다. 둘째는 ’팬‘이다. 자신은 상대방을 모르지만 상대방은 나에 대해 호감을 갖거나 매우 동경하는 경우이다. 실력자나 매력 있는 사람의 주위에는 이런 사람이 있다. 세째는 ‘아는 사람’이다. 서로 이름과 얼굴은 물론 사적인 일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네째는 ‘친구’ 이다. 친구와 아는 사람은 그 경계가 모호한데 ‘전화로 무리한 부탁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친구라고 할 수 있다. 다섯째는 ’믿는 사람‘이다. 매우 가까운 사람이다. 부모, 배우자, 자녀, 마음의 친구 등이다. 흥미롭게도 이 심리학자는 다섯 가지 인간관계의 중요도를 돈으로 환산해 나타내고 있다. 즉 ’기타‘는 0원, ‘팬’ 100원, ‘아는 사람’ 100만원, ‘친구’는 1000만원, ‘믿는 사람’은 1억 원의 가치가 있다고 했다. 격차가 심하지만 이해할 수 있는 수치이다. 가끔 자신의 발이 넓은 것을 자랑스럽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대체로 ‘ 아는 사람’이 많을 뿐이다. 후회 없이 살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처한 환경이나 생각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하기 위해서는 성공적인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된다. 성공적인 인생을 보내는 것이 곧 후회 없이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면 성공적인 삶이 무엇인가? 사람마다 얼굴 생김새가 제 각기 다릇 듯이 성공의 모습은 사람마다 다르다. 계단을 전 속력으로 뛰어 오르는 빠른 성공을 해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계단을 한 칸 한 칸 오르거나 때로는 잠간씩 쉬어가며 천천히 올라가는 느긋한 성공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기 간 내에 비약적인 성공을 내심 바란다. 하지만 세간의 주목을 받을 정도로 성공한 사람이나 단번에 빠르게 성공하는 사람들은 그 성공만큼의 시련을 초특급으로 이겨낸 사람들이다.
    • 칼럼
    • 목회자
    2017-12-14
  • 한 갑부의 유산을 받은 한 가정부 이야기
    미국의 한 갑부에게 외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이 갓난아이일 때 그의 아내가 죽었다. 그래서 아들을 양육할 가정부가 들어왔지만 그 아들마저 결혼도 못하고 병사했다. 아들이 죽은 후 마음 아파하던 갑부도 곧 뒤따라 죽었다. 갑부에게는 친척도 없어 막대한 재산을 상속 받을 사람이 없었다. 게다가 유서조차 발견 못해 주정부는 그의 전 재산을 국고로 넘기도록 하고 그의 저택과 소지품들을 경매에 붙이기로 했다. 한편, 갓난아이 때부터 갑부의 아들을 키워온 가정부도 이제는 나이가 들었다. 하지만 그 집에 들어가 일할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가난하게 살았다. 경매 소식을 들은 그녀는 돈은 없었지만 경매장에 갔다. 갖고 싶은 것이 꼭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가구라든가 비싼 양탄자 같은 것은 돈이 없어 살 수 없고 다만 벽에 걸려 있던 아들이 그린 그림만큼은 꼭 갖고 싶었다. 그녀는 자기가 양육한 그 아들을 사랑했다. 비록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그 소년이 아들 못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년의 그림에 대한 경매가 시작되었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그 그림을 아주 싼 값에 살 수 있었다. 그림은 오랫동안 걸려 있었던 것이라 몹시 더러웠다. 그녀가 그림을 닦아내려고 액자의 뒤를 뜯어내자 무슨 서류가 방바닥에 후두둑 떨어졌다. 그녀는 그것을 변호사에게 전했다. 변호사가 서류를 다 읽고 나서 말했다. ‘그동안 어렵게 사시더니 이제 일이 잘 풀리는가 봅니다. 죽은 갑부가 이 그림을 살만큼 자기 아들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기 재산을 다 주라는 유서를 남겼군요’ 소설 같은 이 이야기는 각박한 이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는 것 같다. 그녀는 신기하게도 왜 죽은 부자의 유산을 받아 일시에 거부가 되어 큰 화제가 되었을까? 이는 그녀가 어머니를 잃은 어린아이에게 긍휼을 베풀었기 때문이다. 즉 타인의 처지를 자기 처지처럼 여기고 사랑을 베풀었다. 그렇다면 오늘 날 우리는 이처럼 어려운 이웃들에게 긍휼을 베풀고 살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자.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처소에서 당신의 긍휼을 행하도록 세우심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한편으로는 감사하고 또 한편으로는 어깨가 무겁다. 어떻게 긍휼을 베풀어야 할까? 우리를 만나는 사람에게서 ‘당신을 통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란 고백을 들어야 한다. 어디에서 얼마의 시간을 만나든지 우리를 만나는 어려운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즉 이는 말투가 느릿느릿 해지고 걸음걸이가 조심스럽게 변하거나 가장하거나 거룩한 척, 아는 척 하라는 말이 아니다. 주님을 따르려는 진실된 마음으로 주님처럼 가난한자, 병든 자, 실패자들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고 그들을 위해 마음을 쏟을 줄 알아야 된다는 말이다. 곧 그들을 위해 작은 것이라도 기꺼이 나누고 그들을 위로하는 뜨거운 마음이 있어야한다. 그런데 요즘 주님을 따른다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평판이 곱지 않다. ‘자기네들 밖에 모른다’라는 말이다. 목사, 전도사, 장로, 권사, 집사도 다를 바 없다. 이처럼 사회가 우리 그리스도인들 바라보는 시선이 따갑다. 조세프 황제가 비엔나 공원을 일반 백성들에게 개방하겠다고 했을 때 모든 귀족들이 나서서 반대했다. 이유는 자기들끼리만 사이좋게 지내겠다는 것 이었다. 그때 조세프 황제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밤낮 황제의 묘에서 조상들과 함께 지내야 하겠구만... 그런데도 우리는 끼리끼리만 친하게 살아야 할까? 혹시 우리들도 이 귀족들 같이 친한 성도들끼리만 가깝게 지내려고 하지는 않았을까? 이에 교회 성경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한국 교회가 성장하지 않는 요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성도의 귀족화라고 했다. 성도들 간에 뜨거운 사랑을 나누는 것으로 성도된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온지 100년이 지난 지금 한국 교회와 성도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점점 잃고 있다. 이제 우리는 말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타내야한다. 물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요구하는 그 필요를 직접 채워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이웃의 궁핍함에 대해 연민을 느끼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자기의 것을 베풀어 궁핍한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는 자, 곧 베풀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기독교인들과 세상 사람들을 구분 지을 수 있는 중요한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왜 그리스도인들은 어려운 이웃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할까? 주님이 우리에게 그 긍휼을 뻗치셨기 때문이다. 우리를 이해하시고 우리 처지가 되사 우리를 구원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들에게 그렇게 이웃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자기도 긍휼이 여김을 받는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 5:7).
    • 칼럼
    • 목회자
    2017-12-08
  • 네 마음을 그네에 던져라
    한 유명한 배우가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스타가 되기를 원했다. 그들은 여러 가지를 배우고 있었다. 그네뛰기 실습 시간이 돌아왔다. 한 학생을 빼고 모두 실습을 마쳤다. 마지막으로 남은 학생은 그네를 본 즉시 소극적인 자기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다. 최악의 경우를 상상했던 것. 그는 그네에서 떨어지는 생각을 했다. 그 순간 얼어붙어 발을 움직일 수 없었다. ‘무서워 탈 수 없습니다’ 라고 학생은 말했고 배우는 ‘만일 네가 무능력자라면 시키지도 않았다. 방법을 가르쳐 주겠다. 우선 네 마음을 그네에 던져라. 그러면 몸도 따라 갈 것이다’ 라고 했다. 배우가 던지라는 말은 신념과 자신감, 그리고 성취한다는 이미지를 갖고 어려움을 접하면 물질적인 부분은 자연히 따르게 된다는 뜻이다. 현명한 충고였다. 그 학생은 생각을 바꿨고 정신적인 이미지가 변했다. 결국 그 학생은 사고 없이 테스트를 마쳤다. 위기는 누구에게나 온다. 최악의 순간을 예상하면 마음을 정상적으로 작동시킬 수 없다. 하지만 장애물이 있어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해결할 수 있다. 결과는 마음이 결정한다. 사람들은 매사에 겁을 내며 살아간다. 실패의 경험이 있어 행동하기를 주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행동하지 않으면 신념이 약화 된다. 내가 왜 그랬을까? 아! 내가 왜 하지 않았던가? 식의 자세는 자신감을 감소시킨다. 일시적 잘못이나 실패를 겁내지 말아야한다. 실패의 공포는 누구나 있다. 문제는 행동이다. 행동의 중요성을 깨달아야한다. 캐나다의 대학 농구선수인 트레이시는 건강한 두 다리를 가진 185센터미터나 되는 센터로서 1993년 1월, 평균 11.2 득점에 6.2 리바운드를 기록했다. 그런 그녀가 농구 골대 밑에서 레이업슛을 시도하다가 오른쪽 발을 헛딛었는데 그때 정강이뼈와 종아리뼈가 부러졌다. 병원에 실려가 수술을 했지만 실패였다. 이후 5개월 동안 무려 아홉 번 수술을 받았으나 평생 다리를 절거나 아니면 절단해야 할 선택에 직면했다. 그녀는 무릎 아래 20센터미터 되는 곳에서 절단을 했다. 그리고 2주 반 만에 의족을 단 체 퇴원했다. 의사는 그녀가 예전처럼 운동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그녀가 말했다. ‘나는 의사가 하는 말을 웃음으로 받아넘겼지요. 나는 누구라도 내게 제한을 하는 것을 허락할 수 없었어요. 단지 정상생활로 돌아가기를 원했고 농구는 그런 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지요. 내가 다시 경기를 시작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노력은 계속할 것입니다’ 그녀의 스텝은 느려졌고 점프력도 예전 같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페인트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여주며 팀에서 가장 슛을 잘하는 선수로 복귀했다. ‘그녀는 놀라워요’ 동료선수들의 말이다. 이처럼 환경을 탓하지 않고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만이 멋진 인생을 살 수 있다. 앨리슨 래퍼는 불구의 몸으로 태어났다. 선천적으로 두 팔이 없고 허벅지 아래 바로 발바닥이 붙은 해표지중(팔다리가 물개처럼 짧아지는 증세)이란 장애를 가졌다. 더욱이 생후 6주 만에 부모에게 버림받아 보육원에서 자랐다. 한참 부모의 사랑을 받아야 할 나이에 그녀는 친구들로부터 괴물이라는 놀림을 받고 멸시를 당해야 했다. 눈물을 흘리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였다. 자신보다 더 불행한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참 불공평한 인생에 대해 분노를 느끼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인가 그녀는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운다고 인생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누가 도움을 주는 것도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울면 울수록 자신만 약해지고 사람들의 놀림감이 될 게 뻔했다. 인생이란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불구의 몸도 비참한 운명도 사랑했다. 그리고 모든 일을 적극적으로 했다. 먼저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했다. 먼저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바로 미술 이었다. 그녀는 입과 발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그림으로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표현했고 사람들은 그녀의 작품에 열광하고 감동했다. 이에 그녀는 더 이상 놀림감이 되지 않았고 미술대학에 입학까지 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적극성은 더 강렬해졌다. 불편한 의수와 의족을 과감하게 벗어던졌고 심지어 자신의 장애를 작품의 소재로 삼기도 했다. 그때 그녀의 나이 50대였다. 그래서 유명한 아인슈타인은 세상을 보는 두 가지를 이렇게 말했다. ‘하나는 기적이 없다고 믿는 것이고 또 하나는 기적이 존재한다고 믿고 사는 것이다’ 이 말의 뜻은 게으르고 방탕한 생활을 하며 아무런 노력도 없이 기적만 바라고 살라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동원하여 세상에 가치 있는 일을 하면서도 자신이 이루고 싶은 목표는 모두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 칼럼
    • 목회자
    2017-11-25
  • 정직하고 성실한 공직자들이 되어라
    고전에 나온 이야기이다. 남조 양나라에 어홍 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소영의 정벌을 수 차례 수행해 공적이 적지 않았다. 훗날 소연은 양 무제로 즉위해 어홍 에게 땅과 상을 내리고 팔만 그루의 나무도 주었다. 하지만 어홍은 몹시 실망하여 웃는 표정 한 번을 짓지 않았다. 불안해진 부인이 물었다. ‘서방님 혹시 폐하께서 하사하신 상이 적어 기쁘지 않으신 겝니까?’ 어홍이 한참을 망설이더니 말했다. ‘군주라면 논공은 공평하고 징벌은 타당해야 함이 당연한 이치요. 군주를 따라 전장을 돌며 생사를 넘나들었는데 녹봉이 고작 이 정도로 그쳐서는 안 되지요’ 부인이 말했다. ‘저도 서방님의 공로가 적지 않음을 압니다. 그렇지만 부와 관직을 탐하는 관리가 돼서는 안 됩니다. 사람의 도리가 아니지요?’ 아내가 아무리 도를 논한들 어홍에게는 소귀에 경 읽기 였다. 어홍은 군수를 하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지위가 낮고 재산이 부족하다며 불평불만을 늘어놓으면서 양 무제의 위세를 등에 업고 공공연하게 재물을 긁어모았다. 부끄러운 줄 모르고 이런 말도 퍼뜨렸다. ‘내가 군수를 맡아 네 가지가 없어졌다. 물속에는 고기가 없어지고 산중에 노루가 자취를 감추었으며 밭에는 곡식이 다하고 마을에는 사람들이 줄었다. 세상살이라는 즐겁고 유쾌해야 하는 것인데 나는 군수가 돼서도 즐겁지 않으니 언제쯤 낙이 올 것인가?’ 그는 아랫사람을 시켜 백성들을 협박하고 재물을 갈취했으며 산에서 귀한 나무를 베어오고 고급 화강석을 날라 오도록 시켜 풍수 좋은 땅에 호화로운 관청을 지었다. 자신이 타는 말을 휘황찬란한 비단과 보석으로 장식하고 주색에 빠져 첩을 백 여 명이나 두는 등 사치스럽고 방탕한 생활을 즐겼다. 결국 난잡한 생활과 과도한 욕심 때문에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일찍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고 한다. 사람들은 자고로 물질적인 것 즉 돈으로 얻을 수 있는 것들을 좋아 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들은 인생의 중요한 부분이 되고 있다. ‘나는 새 차를 갖고 싶다‘ ’나는 모피를 갖고 싶다’ ‘나는 큰 아파트에서 살고 싶다’ 그들은 이와 같이 ‘- 하고 싶다’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그 말은 그것들을 ’사랑한다는‘ 의미이며 또 그 사랑은 곧 애착을 의미 한다. 물질적인 욕구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자기들의 욕구를 자주 나타내고 그 원하는 것들을 얻는 방법을 알고자 노력 한다. 그런 와중에 그들의 욕구는 점점 강해지기만 하고 더욱 집착 한다. 인간은 그 집착에서 벗어나 시간과 생각과 에너지를 낭비 한다. 그 결과 힘써 얻은 성공을 허사로 만들어 버린다. 어느 해 겨울 시카고에 있는 에지워터 비치 호텔에서 중요한 회의가 열렸다. 그 회의에 참석한 이들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8명의 거물들 이었다. 최대의 강철 회사 사장, 최대의 공익사업 회사 사장, 최대의 가스 회사 회장, 뉴욕 증권 거래소 회장, 전 미국 각료, 월스트리트 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증권업자, 세계의 큰 조합장, 국제 결산 은행장, 이들은 명실 공히 성공자들이다. 그들은 부와 권력을 얻는 비결을 잘 아는 자들이다. 그로부터 25년 후에 찰스는 파산해 죽었고 사무엘 인설은 빈털터리 거지가 되었으며 하워드 홉슨은 미쳤고 리차드 휘트니는 교도소에 복역 중이었으며 알버트 풀은 사면되자마자 병으로 죽었고 엣세 리버모는 자살했다. 이처럼 목표를 향해 나가는 길에는 으레 예기치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가치관도 바뀌게 된다. 그만 황금에 눈이 멀 수도 있다. 위로 계속 오르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사랑하는 아내와 가족을 멀리하게 된다. 그렇다면 큰 성공을 거둔들 무엇이 남겠는가? 심신의 힘을 모두 기울여 얻고자 했던 성공은 결국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어떤 공직자들을 보면 예화의 주인공 어홍처럼 공직자의 윤리를 망각하고 명예와 지위를 이용하여 물질을 탐하는 자들이 많다. 실례로 대형사고가 날 때 마다 부패한 관련 공무원들이 떼 지어 등장하고 나라에서 소위 사정을 한다고 하면 가장 먼저 떠는 사람들이 고위 공직자와 국회의원 등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일수록 청문회라도 나오면 언제나 ‘처음 듣는다‘ 라든가 아니면 ’절대 그런 적이 없다‘ 라는 말로 국민들을 속이는 일을 태연하게 하고 있다. 즉 우리 사회 안에서는 언제부터인가 속이고 거짓말하는 일들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볼 때 이처럼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사람들로부터 뇌물과, 탈세, 부정과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나라가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다. 고로 공직자들은 깨끗하고 공정해야한다. 공직자가 많은 사람을 대표해서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특히 물질 만능주의 사회인 오늘 날에는 공직자의 윤리가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다. 그만큼 공직자들의 기강이 해이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공직자들은 성경에 나오는 고무라(창18;32) 그리고 로마 제국이 왜 멸망 했는지?를 기억 하고 경성하기를 기도 한다.
    • 칼럼
    • 목회자
    2017-11-06
  • 왜 남 ‘탓‘을 하는가?
    심리학자인 스콧 페이는 그의 저서 [아직도 가야 할 길]에서 ‘인생은 힘든 것’이라고 했다. 인생은 연약해 모든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고 또한 세상은 불공평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시련을 극복하려 노력하지 않고 환경이나 남을 원망하고 탓한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이다. 그때는 낙심이나 남을 원망하거나 ‘탓’ 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부정적인 말을 할 때 부정적인 영향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는 과학적으로도 이미 증명된 사실이다. 갓 지은 밥을 동일한 두 그릇에 담고 한쪽에는 ‘고마워, 사랑해’와 같은 긍정적인 말을, 한쪽에는 ‘짜증나, 미워 죽겠어’ 같은 부정적인 말을 일정 시간 동안 들려주었더니 긍정적인 말을 들은 밥은 하얀 누른 꽃이 피었고 부정적인 말을 들은 밥은 아주 지독한 냄새를 풍기며 시커멓게 썩어 있었다. 하물며 밥도 이렇게 큰 결과를 나타내는데 사람은 오죽할까? 서양 속담에 자신이 한 말을 가장 먼저 듣는 것은 자기 ‘귀’라는 말이 있다. 아무 생각 없이 뱉은 말들이 자신도 모르게 의식을 좀먹을 수 있다. 자기가 한말에 가장 큰 영향을 받는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는 시시 때때로 원망과 불평과 남이나 환경을 탓하는 부정적인 생각이 떠오르더라도 쉽게 말하지 말아야 한다. 이미 그런 습관이 들었다면 의식적으로 바꿔야 한다. 김종래의 칭기즈칸의 리더십 혁명의 글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고향에서 쫓겨났다. 이복형제와 싸우면서 자랐고 커서는 사촌과 육촌의 배신 속에서 두려워했다. 가난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다. 내가 살던 땅에서는 시든 나무마다 비린내 마른 나무마다 누린내만 났다. 배운 것이 없다고 힘이 약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글자라고는 내 이름을 쓸 줄 몰랐고 지혜로 안다. 자모카르를 당할 수 없으며 힘으로는 내 동생 카자르한테도 졌다. 대신 남의 말에 항상 귀를 기울였고 내 귀는 나를 현명하게 가르쳤다. 나는 힘이 없기 때문에 평생 친구와 동지들을 사귀었다. 그들은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나를 위해 비가 오는 들판에서도 밤새도록 비를 막아주며 나를 위해 끼니를 굶었다. 너무 막막하다고 그래서 포기해야겠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목에 칼을 쓰고 탈출했다. 땡볕이 내려쬐는 더운 여름날 양털 속에서 하루 종일 숨어 땀을 비 오듯 흘렸다. 빰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가 살아나기도 했다. 가슴에 화살을 맞고 꼬리가 빠져라 도망 친 적도 있었다. 나는 숨을 쉴 수 있는 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알고 보니 적은 밖이 아니라 내 안에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깡그리 쓸어버렸다. 나 자신을 극복하자. 나는 칭기즈칸이 되었다’ 생각건데 만일 그가 젊은 날에 환경이나 남을 탓했다면 그는 평범한 양치기에 불과 했을 것이다. 문제를 대하는 자세를 볼 때 크게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하나는 ‘내 탓’ 이라는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는 사람이고 또 하나는 ‘남의 탓‘ 으로 돌리는 사람이다. 문제를 보고 ‘내 탓’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본임의 책임을 정확이 보고 잘못을 인정하며 개선 방안을 찾는다. 그렇게 문제를 하나씩 해결에 갈수록 나날이 그만큼씩 발전 한다. 반면에 문제를 ’남의 탓‘ 으로 책임을 전가하는 사람은 어떻게든 핑계거리와 변명거리를 찾는다. 그런데 남의 탓을 하면 내가 편해질 것 같은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스스로 자괴감에 빠진 나머지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인생을 불행하게 만드는 지름길이 된다. ‘내 탓‘을 하는 사람은 ’조금만 더 열심히 일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그래 배려가 부족 했어 좀 더 깊이 생각했어야 했어‘ 라며 반성을 한다. 그 결과 다시는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으려고 노력 한다. 이런 자세로 몇 년을 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엄청나게 발전할 것이다. 옛말에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고 했다. 현명한 명필이라면 정말 형편없는 붓을 들고도 불평하지 않으며 설령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붓을 탓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돌아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붓으로도 글씨를 잘 쓸 수 있어야 하건만 아직도 수행이 부족하다’ 며 자신을 더욱 채찍질을 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남을 탓하기 전에 필히 자신의 책임을 먼저 돌아봐야한다. 자신을 돌아보는 일은 어려울 게 없다. 다른 사람에게 비난을 받으면 반발심이 생기지만 스스로 반성하면 기분 상할 일도 없고 인격도 그만큼 깊어지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가정에서는 물론 외식적인 정치인들이나 경제인들이나 교직자들이나 종교인들처럼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남을 ‘탓’ 하지 말자. 그리고 남을 배려하는 사람이 되자. 사회 생활을 하면서 타인을 배려할 줄 모르는 사람은 존경을 받을 수 없다. 그러기에 사람이라면 주변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을 갖고 있어야한다. 특히 지도자가 되어 부하를 거느리게 되면 더더욱 그렇다. 덕망은 리더에게 빠트릴 수 없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또 자신의 태도에 대해 언제든 스스로 책임을 져야 업무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완성된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칼럼
    • 목회자
    2017-10-27
  • 시금석의 비밀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이 불에 탔을 때 한 권의 책만이 화마를 피할 수 있었다. 그다지 가치 있는 책은 아니었다. 아무튼 어느 날 조금 글을 읽을 줄 아는 가난한 사람이 그 책을 샀다. 재밌지는 않았지만 관심을 끄는 것이 하나 있었다. 책 표지는 고급 피지로 싸여 있었고 거기에는 ‘시금석의 비밀’ 이라고 쓰여 있었다. 시금석은 어떤 금속이라도 순수한 금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조그마한 수정이다. 기록에는 그 조그마한 수정이 흑해에 있는데 아주 비슷하게 보이는 수많은 자갈 중에 섞여 있다고 적혀 있었다. 수정은 따스하게 느껴지지만 보통의 자갈은 차갑다. 그는 자신의 전 재산을 팔아 흑해로 갔다. 그리고 자갈들을 하나하나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갈을 집어 들었다가 차가운 물 속에 던져 넣었다. 온 종일 자갈을 집었다가 다시 던지곤 했다. 3년이 흘렀다. 어느 날 아침 여느 때처럼 조약돌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 돌은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 돌을 습관적으로 바다에 다시 던져 버렸다. 돌을 던지는 습관이 몸에 배었던 것이다. 그는 그 습성 때문에 3년 동안 고생하며 원했던 것이 주어졌지만 그 돌을 던져 버렸다(레이문도 데오비스, Raimundo Devies). 이처럼 사람의 행동가운데 99%는 습관에 영향을 받고 그 습관 속에서 자질이 조금씩 길러진다. 나쁜 습관은 사람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기도 하고 심지어는 한 사람을 도덕적으로 파산시키기도 한다. 나쁜 습관은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 고로 우리들은 나쁜 습관을 버리고 좋은 습관을 가져야 한다. 인생의 부와 행복, 성공, 마음의 평화는 모두 좋은 습관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날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비참함이나 외로움 속에 살면서도 옛 생활방식이나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전에 이미 의사가 된 사람이 성형외과 의사가 되고 싶었다. 어느 날 유명한 성형외과 박사를 찾아갔다. ‘제가 박사님 수술하는 것을 보아도 괜찮은지요?’ ‘좋습니다. 내일 아침 8시에 수술을 시작 합시다’ 그는 오전 8시에 오겠다고 말했다. 그는 약속을 지켰다. 오전 8시 수술을 지켜본 그는 매우 매력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성형외과 의사는 그를 지도해 주기로 결심했다. 그는 성형외과에 대한 만족감을 표시하면서 갔다. 그가 바라는 일을 성취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그는 오지 않았다.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며칠이 지난 후 그가 성형외과 의사의 방문을 두드렸다. ‘당신은 그 동안 어디에 있었죠?’ 그에게 물었다. ‘그만 늦잠을 잤습니다’ 그는 졸린 목소리로 말했다. ‘깨어나 시계를 보니 너무 늦은 것 같아서 오지 않았습니다’ ‘그런 식으로는 배울 수 없습니다’ 그는 성형외과에 대해 매력을 느꼈지만 결코 필요한 일을 하지 않았다. 스스로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의 문을 닫았다. 성공할 수 있는 자질이 있었으나 스스로 성공을 포기했다. 사람들은 좋은 방법을 알면서도 대수롭게 생각해 실행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인생에 승부를 걸기 위해 즉시 태도를 시정해야 한다. 아는 것을 그대로 실행하기만 해도 웬만한 일은 대부분 순조롭게 성공할 수 있다. 그런데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몸이 쉽게 움직이지 않을 때가 있다. 하지만 아무리 쉬운 일도 계속하려면 의지가 필요하다.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좀처럼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게으른 육체의 귀찮다는 ‘감정’이 이 일을 해야 한다. ‘이성’을 방해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천을 방해하는 감정을 이겨내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먼저 고정관념을 깨고 게으른 습관을 고쳐야한다. 제주도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분재 예술원’이 있다. 중국의 장쩌민이 30분을 이곳에 머물려고 왔다가 1시간 30분 동안 성범영 원장의 분재 철학에 빠진 것으로 유명하다. 분재한 나무는 보통 나무보다 3-4배 더 오래 산다. 비결은 분갈이에 있는데 2년에 한 번씩 분갈이를 하면서 뿌리를 잘라주는 것이다. 뿌리를 잘라주는 나무는 자기 몸의 진액을 짜내어 또 뿌리를 내린다. 그 뿌리가 분 안에 가득 채워지는데 2년이 걸린다. 그러면 또 인정사정 보지 않고 뿌리를 잘라 준다. 이 뿌리는 우리들의 ‘고정관념’ 이나 습관으로 설명할 수 있다. 사람은 2년 정도 반복된 생활을 하다보면 고정관념의 틀 속에 갇히고 나쁜 습관이 된다고 한다. 고정관념의 틀을 깨고 습관을 고치는 사람만이 성공의 열매를 맛볼 수 있다. 둘째로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져야 한다. ‘그러니까 못해, 안 해’ 라고 하면서 불가능한 이유를 찾지 말고 그러면 ‘어쩌면 될지도 몰라, 한번 해보자’ 하며 가능한 이유를 찾아 내 굳은 결심으로 밀어 붙여야 한다. 나쁜 습관을 바꾸는 일은 개인에게 거의 ‘혁명’에 가까운 일이고 또 나쁜 습관을 좋은 습관으로 바꾸는 일은 튼튼한 성 하나를 함락시키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 칼럼
    • 목회자
    2017-10-13
  • 생의 의미와 목적과 사명감
    20세의 한 젊은 여성이 자살을 하려고 강에 뛰어들었다. 이 때 한 청년이 그녀의 모습을 보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런데 그 청년은 수영을 못한다. 그는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사람을 구하겠다는 생각으로 물속으로 뛰어내렸던 것이다. 당연히 물속에서 허우적거렸고 익사 직전에 이렀다. 바로 그 순간 젊은 여인은 자신이 자살하겠다는 생각을 잊어버리고 청년을 향해서 헤엄쳐 나아갔다. 그리고는 물을 먹고 헐떡거리는 청년을 물가로 끌어내었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마감하려는 원 의도와는 달리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게 됐다. 그녀는 청년이 살려고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보는 순간 지금 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그 무엇 즉 삶의 의미와 목적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물속에 뛰어들어서 자살하려고 했던 것은 그녀의 절망감이었지 그녀의 정신은 아니었던 것이다. 가장 극적인 순간에 삶의 이유와 목적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청년을 강가로 안전하게 끌어낸 후 새로운 삶의 기회를 찾았다. 인생은 삶이 극한 상황에 이르렀을 때 삶에 대하여 본질적인 물음을 하게 된다. 또 사랑하는 사람이나 가까운 친지의 예기치 못한 죽음 앞에서 삶의 허무함을 느끼고 ‘인생이 진정한 의미가 있는가, 있다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인생은 의미가 있고 보람과 무한한 가치가 있는 존재이다. 인생의 의미나 목적, 사명감은 우연히 깨닫게 된다. 그것은 인생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해서 온다. 희망, 겸손, 기쁨, 감사함, 봉사하는 삶에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깨달음이다. 인생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자신의 삶이 가치 있고 보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한번뿐인 인생 현재 당신의 위치가 어떻든 삶의 수준이 어떻든 그 무엇보다도 귀한 존재이며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을 이루라고 사명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삶에 의미를 부여할 때 살아갈 의욕과 무엇을 해보겠다는 도전 정신이 생기는 것이다.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로 결심한 그 순간부터 삶은 더욱 가치 있고 지금보다도 더 멋진 삶을 살 수 있다. 그리고 보다 더 아름다운 미래를 위해 도전하게 된다.(후회 없이 살기위해 저자 오그만디노) 그렇다. 인생을 정말 보람 있게 살려면 삶의 의미를 깨닫고 사명적인 인간이 되어야한다. 사명이란 한자로 사(使)는 심부름할 사자이고 명(命)자는 목숨 명자이다. 심부름을 받고 태어났다고 느끼는 것을 사명감이라고 한다. 심부름을 맞고 태어난 존재를 사명적 존재라고 한다. 그러한 인생관을 사명적 또는 사명주의적 인생관이라고 한다. 고로 인간은 사명적 존재이다. 우리는 사명주의적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야한다. 사명을 영어로 Mission 이라고 한다. 이 말은 라틴어 mission에서 유래하며 보낸다는 뜻이다. 인간은 어떤 직분과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보내진 존재이다. 사명감이 우리를 위대하게 만든 것이다. 사명감이 우리를 성실하고 용감하고 부지런하고 진지하게 만든 것이다. 인간은 마음속에 사명감을 느낄 때 생각하는 것이 달라지고 말하는 것이 달라지고 움직이는 것이 달라진다. 사명은 어떤 구조를 갖는가? 심부름을 받은 목숨이라는 뜻이 있다. 심부름에는 심부름을 보낸 주체가 있고 목적과 내용이 있다. 누가 나를 21세기의 한국의 심부름꾼으로 보냈는가? 그 사람의 신앙에 따라서 대답이 다를 것이지만 우리 기독교인은 하나님이 나를 지금 여기에 보냈다고 생각 한다. 우리는 그 존재에게서 심부름을 받은 생명이다. 심부름의 내용과 목적은 각자의 처지와 형편에 따라서 다르다. 한국 사회를 개조하고 자기가 살고 있는 고장을 아름답게 하고 학문을 깊이 연구하고 위대한 예술을 창조하라고, 청소년들의 교육자나 훌륭한 사업가나 농부나, 상인이나 성실한 목회자나 공직자나 한국의 호국의 용사가 되라고 우리를 보낸 것이다. 이러한 사명감을 가질 때 사명적인 자아가 탄생 된다. 사명을 갖는 자는 인생의 백리 길을 가려는 자와 사명을 못 갖는 자는 인생의 십리 길을 가려는 자다. 백리의 길을 가려는 자는 걸음걸이에 강한 의지가 있고 기본자세가 다르다.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의 저자 스위스의 사상가 킬힐띠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 생애의 최고의 날은 자기 인생의 사명을 자각하는 날이다’ 그리고 ‘사명을 갖는 자는 그것을 실행할 때까지는 결코 죽지 않는다’고도 했다. 또 아프리카의 선교사요. 탐험가인 리빙스턴은 ‘사명을 갖는 자는 집념이 있고 열의가 있다. 그것을 꼭 이루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와 사명이 있다’고 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큰 업적과 대업을 성취하게 했을까? 그들은 생애의 어느 시기에 어떤 결정적 기회에 인생의 확고한 사명을 자각했다.
    • 칼럼
    • 목회자
    2017-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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