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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노선의 이야기
- 1차 세계대전은 참호전 이었다. 병기로 등장한 기관총 때문이다. 병사들이 참호를 파거나 요새에 숨어서 총을 겨눈 채로 적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는 기이한 전쟁이 되었다. 당시 프랑스가 독일군의 대포를 막아낼 수 있었던 것도 근대적인 요새 덕분 이었다. 전쟁이 끝나자 프랑스의 육군 장관 앙드레 마지노는 프랑스-독일 국경 사이에 설치한 기존의 요새를 획기적으로 보강하는 거대한 시멘트 장벽을 쌓자고 제안했다. 독일의 침략을 온전히 분쇄할 수 있을 거라는 주장 이었다. 그래서 쌓은 것이 길이 750km에 달하는 콘크리트 방벽의 마지노선 이었다. 서울-부산 길이의 2배가 넘는 엄청난 규모다. 공사 기간도 거의 10년이 걸린 당시로서는 세계적인 공사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마지노선을 따라 개인용 참호를 파고 중·장형 대포를 촘촘히 설치했다. 이후 독일군의 어떤 공격에도 안심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프랑스 전역에 팽배했다. 그러던 중 독일에 히틀러가 등장하여 서서히 전쟁의 기운이 감돌았지만 프랑스는 병력을 예비군으로 돌릴 정도로 여유 만만했다. 마지노선을 철석같이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군은 벨기에를 가로질러 마지노선을 우회하여 프랑스를 침공하였다. 프랑스는 힘 한번 쓰지 못하고 무너졌다. 모든 방어 전략이 마지노선을 중심으로 짜여 있었기 때문에 허둥대다가 무너진 것이다. 독일군은 프랑스가 그토록 자신만만해 하던 마지노선의 근처에도 오지 않았다. 여기서 ‘마지노선의 법칙’ 이 생겨났다. 마지노선은 허물진 않았지만 지금은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있다. 견고한 방어선은 심리적 무장을 부른다는 것이다(이 영직. 마지노선의 법칙 41쪽). 다른 하나는 중국 진나라의 이야기이다. 전국시대의 혼란을 평정한 진나라 시황은 영원한 제국을 꿈꿨다. 중국은 통일했으나 북방 유민족인 흉노족이 마음에 걸렸다. 유목민들은 초원에 먹을 것이 부족해지면 어김없이 농경사회를 침략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안의 씨앗을 없애기 위해 진시황은 만리장성을 쌓았다. 이어 주나라의 군현제를 폐지하고 강력한 중앙집권 제도를 확립했다. 이에 유생들의 불만이 터지기 시작했다. 유생들은 공자, 맹자 등 유가 사상에 근간을 두는 덕치를 펼칠 것을 주장했다. 이들의 목소리가 점점 더 높아지자 진시황은 유생 460명을 잡아들여 생으로 매장하고 고서들을 불태웠다. 그것으로 내외의 불안요소를 모두 제거한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만리장성을 쌓느라 국력은 소진되었고 국고는 비어갔다. 결국 진나라는 건국 143년 중국 통일 후 15년 진시황 사후 3년을 넘기지 못하고 내부로부터 무너져 내렸다. 외적을 막으려던 만리장성이 오히려 내부의 적을 만들어낸 격이 되고 말았다(이 영직 수도가 견고하면 나라가 위태롭다 42쪽). 이 같이 인간의 지혜와 능력으로 만들어 낸 안전 보장책이라는 것은 언제나 인간에게 완전한 안정을 보장해 주지 못하고 결국 그 한계를 들어 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가나안의 여리고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성경을 보면 철옹성 같은 요새를 지어 놓고 안전하다고 믿었던 여리고 성의 주민들은 그야말로 그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는 난공불락의 견고한 성을 지어 놓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대적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성을 치셨을 때 견고한 줄로 믿었던 성은 너무도 허망하게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수 6:20, 21). 또 하나는 핵의 이야기이다. 가장 확실한 세계 평화와 인류 안전의 수단이랍시고 고안한 핵무기는 어떠할까? 사람들은 핵무기를 만들면 이 핵무기가 있는 한 인류는 더 이상 섣불리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되었을까? 아니다. 핵무기와 상관없이 전쟁은 끊임없이 일어났으며 오히려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가장 위험스러운 요인들 중에 하나가 되고 말았다. 고로 오늘 날 국내외의 지도자들은 핵문제에 대하여 깊이 고민을 해야 한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미·소간에 냉전이 시작될 무렵 소련의 후르시초프 서기장은 쿠바에 핵 미사일 기지를 설치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말하자면 미국의 턱 밑에 핵 군사 기지를 설치함으로써 미국을 위협함과 동시에 자신의 위상을 강화하려 한 것이다. 물론 이는 세계 공산화를 위한 일환이기도 한 것으로 미국은 물론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심각한 위기 속에서 케네디 대통령은 세계 지도를 앞에 놓고 이렇게 중얼거렸다 한다. ‘이 위기로 인하여 최대의 희생을 지불하게 되는 것은 전 세계의 어린이들이다. 그들은 이 시대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없으면서 모든 것을 잃는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때 만일 그 계획이 성사 되었더라면 인류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데 북한의 철없는 김정은은 핵을 가지고 날마다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사람의 지혜나 능력이나 과학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돈을 마지노선으로 삼지 말고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결코 요동함이 없는 진정한 안전을 보장받게 될 것이다(잠 2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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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어라
- 오 헨리의 소설에 나오는 웃음의 이야기이다. 미국 뉴욕에 살고 있는 한 부부가 어느 날 아침에 장을 보러갔다. 부인은 만나는 사람마다 유쾌하고 친절하게 대했고 밝게 웃으면서 덕담을 했다. 사람들에게 기쁨과 웃음의 자취를 남겼고 그 덕분에 그녀를 만난 사람들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인생을 더 긍정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반면 남편은 이와 정반대로 행동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불평과 험담을 해댔다. 다음 날 이 부부가 장을 보러 갈 때 두 사람은 서로 역할을 바꾸어 보았다. 그 결과 남편은 기분 좋은 인상을 남긴 반면 아내는 사람들에게 상처와 절망만 안겨 주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이는 우리가 행복할 때 주변 사람들 역시 행복해 보이고 우리 기분이 축 처질 때 다른 사람들도 축 처져 보인다는 것이다. 우리 얼굴 표정은 스스로 주변 사람들의 기분에도 영향을 미칠 수가 있다. 즉 기분에는 전염성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 상태가 얼굴 표정으로 드러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표정을 짓느냐에 따라 마음 상태가 달라진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는 것 같다.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웃을 때는 행복과 관련된 화학물질이 분비되고 얼굴을 찌푸릴 때는 불행과 관련된 화학물질이 분비된다고 한다. 도저히 그럴 기분이 아니더라도 한번 웃음을 지어보라. 훨씬 기분이 나아질 것이다. 부드럽게 미소 지을 때마다 늘 좋은 결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했다. 실례로 어떤 여인이 백화점에서 주문한 결혼 선물로 혼란을 빚어 이를 바로 잡으로 갔다. 그녀는 백화점에서 결혼 선물을 산 후 상점에서 직접 당사자들에게 선물을 배송해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그녀는 주문한 물건들이 모두 각각 다른 커플들에게 배달된 것을 알았다. 그녀는 도저히 전화로는 그 상황을 바로잡을 수 없어 직접 상점으로 찾아가야 했다. 그녀는 기분이 매우 상하고 화가 치밀어 오를 대로 올라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바로 이때가 웃음 이론을 시험해 볼 최적의 기회로 생각했다. 그녀는 기분 좋은 표정을 띄우고 점원에게 다가가 그녀의 상황을 이야기 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평온하고 부드러웠다. 문제가 해결 되지 않았지만 여전히 상냥한 표정으로 지점장을 불러 달라고 말했다. 지점장은 그녀를 최고의 고객처럼 깍듯이 대접하며 모든 문제를 바로 잡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정중한 사과와 함께 주문한 물건의 가격을 깍아 주었다. 가장 놀랍고 중요한 것은 이 과정을 거치면서 그녀는 그녀 자신을 포함한 누구에게도 과도한 스트레스를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녀가 느꼈던 분노는 유쾌한 표정을 지어 보인 순간 말끔히 날아가 버린 것 같았다. 그녀에게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을 때마다 좋은 결과가 뒤따랐고 그녀의 인생은 크게 변화 되었다 한다. 이처럼 웃음을 짓거나 즐거운 표정을 지을 때 우리 스스로도 기분이 좋아지며 다른 사람들 역시 기분이 좋아지고 우리를 다 좋아하게 된다. 그러니 습관적으로 즐거운 표정을 짓는 것이야 말로 모두에게 좋은 일이 아닐까? 설사 자신이 많이 웃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웃는 법은 배우면 된다. 하나님께 먼저 기도한 후 긴장을 풀고 웃어보자. 웃다보면 습관이 된다. 또한 웃음에는 전염성이 있다. 즉 웃음은 내적, 외적으로 놀라운 변화를 가져 온다. 또한 웃는 표정을 짓기 위해 날마다 거울을 보고 웃는 좋은 표정을 가져 보자. 우리가 거울 속의 자기 자신을 볼 때는 좀 더 매력적이고 즐거운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거울에서 얼굴을 돌리는 순간 원래의 무뚝뚝한 표정으로 돌아온다. 이 사실을 통해 뭔가 느껴지는 바가 있을 것이다. 세상에서 멋진 고가의 옷을 입고 있다 해도 다른 사람들은 당신의 옷이 아니라 표정에서 가장 큰 인상을 받는다. 즐거운 표정은 다른 사람들을 끌어당기지만 찌뿌린 표정은 사람들을 등을 돌리게 만든다. 우리는 때로 생각에 깊이 잠겨 있거나 무엇인가를 주의 깊게 들을 때 무심코 인상을 찌뿌리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이러한 태도를 오해하고 부정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얼굴 표정은 주변 사람들의 피부 반응이나 심장 박동 등과 같은 신체에 변화를 일으킬 수도 있다고 한다. 즉 사람들은 얼굴 표정에 감정뿐만 아니라 신체적으로도 반응한다는 것이다. 웃음 짓거나 즐거운 표정을 지을 때 우리 스스로도 기분이 좋아지며 다른 사람들 기분이 좋아지고 우리를 더 좋아하게 된다. 아울러 우리는 지금까지 세상을 살아오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과 웃음을 주고 살고 있을까? 시간의 모래 위에 우리의 발자국을 남길 정도로 위대한 사람이 될 필요는 없지만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가치 있고 특별한 느낌이 들도록 만들어 주고 다른 사람들 을 복돋아 줌으로써 그들에게 잊지 못할 인상을 심어 줄 수 있다. 이러한 행동은 쉽게 잊히거나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 행동들은 한 사람의 영혼과 인격의 일부가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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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과 환경 문제
- 오늘 이야기는 1962년 초 우리나라가 사상 초유의 경제개발계획으로 나라가 온통 떠들썩했을 때 이미 그때부터 환경 문제를 염려했던 소수의 사람들의 짤막한 이야기이다. 그들은 환경을 무시한 경제 개발은 반드시 심각한 공해 문제를 야기하게 될 것이라며 엄중하게 경고를 했다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정신 나간 소리로 취급하여 대답조차 하려 하지 않았고 심지어 정부 최고의 권력자를 비롯한 고위 인사들은 얼마 후에 강에서 오염 물질이 검출되자 오히려 기뻐하기까지 하였다. 곧 이는 산업화가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증거이며 우리나라도 이제 선진국처럼 공해 물질이 있는 나라가 되었으니 도리어 기뻐해야 한다는 것 이었다. 그리하여 이후에도 오로지 선진국처럼 잘 먹고 잘 사는 것만 바라보며 환경은 도외시하고 개발에만 매달렸다. 그러나 그 결과는 불과 30년이 못되어 한강을 비롯한 우리나라의 강물은 심하게 부패되어 물에서는 썩은 악취가 나고 그곳에 살던 물고기들은 공해 물질로 거형이 되거나 심한 질병으로 흉한 모습이 되어 물위로 떠올랐다. 그리고 점차 수돗물마저 안심하고 마시지 못하는 나라가 되었고 지구상에서 강수량이 많은 나라에 속하는 우리나라가 유엔이 정한 물 부족 국가에 분류되는 수치를 안게 되었다. 한마디로 오천년 동안이나 금수강산의 명성을 자랑하는 나라가 불과 한 세대도 안 되는 기간에 공해로 찌든 나라가 되었으니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환경오염의 문제는 비단 우리나라만이 아니고 세계적인 이야기이다. 환경 운동가들의 말을 빌리면 사람들의 탐욕과 욕망으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환경을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무분별하게 파헤친 결과 지구상의 100만여 생물종을 포함한 자연시스템이 와해되는 위기에 직면해 있고 대기 오염과 온실가스의 증가로 인한 지구온난화의 속도가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데 북극과 남극의 빙하와 히말라야를 포함한 고산지대의 만년설이 녹아내리면서 해수면이 상승해 저지대 해안지역이 수몰되고 많은 섬들이 바다 속으로 사라질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것이다. 또 해류의 변화로 바다 생태계의 파괴는 물론 집중호우나 한랭기후 변화로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는데 그로인해 전 지구의 식량 생산량의 10%가 감소될 위기에 처해 있고 또 물 부족과 물 흐름의 변화로 인해 10억 이상의 인구가 마실 물이 부족해 생존의 위험에 직면해 있으며 26억 이상의 인구가 위생용 물 부족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원자력발전과 핵무기시스템은 인류를 자멸로 몰아갈 수 있는 위험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핵분열의 개발이 인류에게 큰 유익을 줄 것으로 기대했으나 그 결과는 방사능의 위험과 체르노빌, 후쿠시마 등의 재앙으로 돌아왔다는 주장이다. 특히 핵무기를 만들면서 이 핵무기가 있는 한 인류는 더 이상 섣불리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핵무기와 상관없이 전쟁은 끊임없이 일어났으며 핵무기는 오히려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가장 위험스러운 요인들 중에 하나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정치 지도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은 핵문제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미, 소 간에 냉전이 시작될 무렵 소련의 후르시초프 서기장은 쿠바에 핵 미사일 기지를 설치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한다. 즉 핵 군사 기지를 설치함으로써 미국을 위협함과 동시에 자신의 위상을 강화를 위한 일환이기도 한 것으로 미국은 물론 자유민주의에 대한 중대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심각한 위기 속에서 케네디 대통령은 세계 지도를 앞에 놓고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한다. ‘이 위기로 인하여 최대의 희생을 지불하게 되는 것은 전 세계의 어린이들이다. 그들은 이 시대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없으면서 모든 것을 잃는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때 그들이 이성을 잃고 핵전쟁이라도 일으켰다면 진정 어린이와 노약자 소외된 계층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데 요즘 북한의 독재자 김정은은 새해 신년사에서 경제문제를 주요 정책으로 내세운다고 발표 한 후 연초 곧 바로 수소탄 실험을 감행하여 우리 동포들을 불안하게 하고 있다. 대외에 핵보유국을 선언하는 이중적 행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핵폭탄 수소폭탄으로는 결코 경제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무지를 깨달아야한다. 그리고 북한은 수소탄 실험으로 인해 국제 사회에서 더욱 고립만 깊어질 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아울러 정치 지도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와도 역행하는 핵에너지를 경계해야한다. 핵은 절대 그리스도인들의 양심과 함께 할 수 없는 것이다. 특히 핵은 우리의 후손들에게 그 책임을 전가하는 무모한 선조가 되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따라 환경문제에 관심을 갖고 환경 보전에 힘써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연 만물을 다스리라고 명령을 하셨기 때문이다. 아울러 마음과 영혼을 보존하고 지키는 일에도 소홀히 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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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과 환경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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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일을 소홀히 하지 말라
- 나폴레옹이 이탈리아와의 전쟁에서 패전한 이야기이다. 어느 날 그는 중요한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각 부대에 집결 명령을 내렸다. 모든 부대들이 모여 공격 준비 태세를 갖추었다. 그런데 한 부대가 오지 않아 공격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한 기병대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승기를 잃은 나폴레옹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이에 그 원인을 규명하라고 명령했다. 자초지종을 조사한 결과 기병대가 늦게 도착한 것은 1개 중대가 늦게 온 때문이요. 그 중대가 늦게 온 것은 1개 소대가 늦게 온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소대가 늦어진 것은 한 병사가 탄 말의 발굽에서 편자 못 하나가 빠져 나갔기 때문이었다. 무패를 자랑하던 나폴레옹의 패전은 바로 자그마한 못 하나를 소홀히 한 실수가 국가의 운명을 그르친 큰 회한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생각해 보자. 우리 개인의 삶에서도 무심코 지나친 ‘작은 일’ 하나 때문에 큰 낭패를 보거나 뼈아픈 패배를 당하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았던가? 실로 성공과 실패의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 내는 일들도 막상 그 과정을 들여다보면 하잘 것 없는 사소한 것 한두 가지 때문인 경우가 많다. ‘저수지의 방죽도 개미구멍으로 무너지고, 마라톤 선수를 더 이상 달려가지 못하도록 주저 않게 하는 것도 운동화 속에 들어간 작은 모래알 하나 때문이다’ 라고 한다. 결국 작은 것 하나가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높은 자리를 원하고 큰일을 하고 싶어한다. 대통령이 되는 것, 대권, 대자 붙이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작은 일에 충실하면 큰일은 자연히 이루어진다. 작은 일을 중시하고 작은 일을 세심하게 처리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성공은 바로 매일 매일의 노력이 쌓여 계속 발전해 가는 과정이며 그 어떤 요행은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로 한 뼘 차이는 사소해 보이지만 그것이 바로 인생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다. 이러한 사실은 큰 교훈을 준다. 우리는 큰 일 만을 위대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큰일에 감동하고 큰일만이 칭찬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큰일을 하겠다는 마음이 나쁜 것은 아니다. 문제는 큰 일만 생각하고 작은 일을 하찮게 여기는 태도이다. 하지만 작고 지극히 하찮은 일을 경홀히 여기는 사람이 큰일을 잘할 수가 있을까? 그렇지 않다. 그런 사람은 자기 앞가림도 못 한다. 고로 큰일을 하려면 작은 일부터 귀하게 여기고 그 일이 맡겨졌을 때 충성스럽게 감당해야 한다. 즉 남이 보지 않는 일 남이 알아주지 않는 일 남이 우습게 여기는 일도 귀하게 보고 최선을 다해 완수하는 그 사람이 하나님께 크게 쓰임을 받을 수 있다.실례로 성경의 인물 다윗 왕을 보자. 그는 군사학교나 정치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내 하나님께 소명을 받지 않았다. 성경은 양 우리에서 젖양을 지키는 중에서 취하여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다고 한다(시78:70, 71). 그러면 그가 양 우리에서 어떻게 충성 했을까? 그는 형들이 다 사무엘의 잔치에 초청을 받아 갈 때에도 끝까지 남아 양들을 지켰다(삼상 16:11). 이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마치 신데렐라 이야기를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충성했다. 원망이나 불평 없이 자기의 일을 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그에 대해 당신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셨다(행 13:22). 또 그가 나중에 사울 왕 앞에서 고백 할 때 ‘사자와 곰이 와서 양 새끼를 움키면 겁을 내지 않고 끝까지 가서 찾아왔다’고 했다(삼상 17:34, 35). 이 얼마나 책임감이 강한 모습인가?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이스라엘이라는 거대한 양떼를 맡기셨다. 또한 베드로와 요한도 작은 일에 충성한 결과 후일 그들에게 교회라는 양 떼를 맡기셨다(요 21:15~17). 그렇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지극히 작고 하찮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에게 큰 것으로 맡기신다. 또 그런 사람만이 크고 위대한 일도 능히 감당해 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도 지금 당장 크고 위대한 일을 찾기보다 우리에게 맡겨진 사소한 일에 최선을 다해 충성해야 한다(눅 16:10). 사람들의 눈에 띄는 큰일에만 충성하려하지 말고 평범한 일상생활에서 작은 일을 주님의 뜻대로 행하는 일부터 습관화해야 한다. 즉 작은 칭찬, 작은 양보, 작은 감사, 작은 사랑, 작은 의를 실천하는 반면 아주 미미한 죄는 무섭게 여기고 피해야 하며 아주 작은 죄를 범했어도 신속하게 회개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 작은 죄를 경시하는 사람은 후에 큰 죄도 두려워하지 않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신 충성의 기회를 낭비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도 거두시고 또 우리의 간구와 기도도 들어주시지 않는 불행의 때가 오기 때문이다. 실제 우리 주변에는 한 때 하나님의 은혜와 은사가 충만하였다가 그 은혜와 은사를 낭비하고 상실한 사람들이 많다. 우리는 건강을 잃거나 노년이 접어들어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는 때가 이르기 전 아직 젊을 때, 건강할 때, 은사와 은혜가 충만 할 때가 곧 하나님께 충성할 수 있는 기회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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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일을 소홀히 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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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과 우상 숭배
- 오늘 날 우리나라 각처에는 단군상, 제사, 불상, 마을 어귀에 우뚝 솟은 장승 등이 많이 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 보이는 형상에 음식을 차려놓고 절하는 모습이 우상 숭배의 모습으로 매우 민첩하게 각인되어 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우상 숭배란 사람이나 그 밖의 것들을 형상화한 대상에 예배하는 것을 우상 숭배(idolatry)라고 말 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상 숭배에 대한 관한 좁은 의미의 정의에 불과하다. 성경이 말하는 우상 숭배는 어떤 특정한 형태를 가진 물체를 섬기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고 더 근원적인 마음의 태도를 우상 숭배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우상 숭배란 하나님보다 높아지는 것이 마음에 있는 상태를 우상 숭배라고 말하고 있다. 즉 자녀나, 배우자나, 명예나, 돈이나, 권력이나, 사상이나, 자연물이나, 그 어떤 것이라도 우리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그것이 우상 이라는 말이다. 왜 사람들은 우상을 숭배할까? 인간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만을 채우려는 ‘탐심’ 때문이다(엡 5:5, 골 3:5). 탐심은 어거스틴(Augustine)의 말대로 ‘충족하는 것보다 더 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못하고 주어진 것 이외의 것을 가지려고 온 마음을 쏟는 것이 바로 탐심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추구하려고 불법적인 방법까지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탐심‘을 우상 숭배로 규정하고 있다. 실례로 오늘날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근래의 사건들 속에 성도들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성도를 자처하는 정치인들 가운데 표를 의식해서 이방 종교의 종교의식에 참여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것은 우상을 승배하는 것과 같다. 우상 그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우상의 배후에는 수없이 많은 우상들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에 관한 관심이나 영광을 헛된 우상에게로 돌리게 하려는 사단과 귀신들이 있기 때문이다. 고로 우상 숭배는 사실상 사단과 귀신을 섬기는 것과 같다. 또한 우상 숭배의 현장에서 우상 제물을 나누는 것은 비록 제물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라 할지라도 실제적으로 귀신과 연합하는 의미가 있다(고전 12:20). 과거 유교적 전통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된다고 믿었고 인간의 화복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였다. 때문에 조상을 숭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한번 죽은 사람은(히9:27) 더 이상 이 세상을 왕래를 하지 못하고 이 세상 사람들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사실 사람들이 조상신이라고 생각하는 영은 조상이 아니라 타락한 천사들이다. 이들이 곧 귀신이다. 고로 조상을 숭배하는 것은 사실상 조상신으로 가장한 악령 곧 타락한 천사들을 섬기는 행위이다. 그런데 천주교에서는 조상 숭배를 한국인의 독특한 효 문화로 인정하고 허용 한다. 그것은 사단의 속임수이다. 성도들은 우리 조상이 살아계실 때 효를 다하고 돌아가신 후에라도 효라는 미명하에 귀신을 숭배하는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한다. 그런데 이보다 더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많은 성도들이 자기도 모르게 보이는 우상보다 보이지 않는 숭배에 빠져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스스로 많이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우상을 숭배하고 미신에 빠지는 자들이 많다. 박사 학위를 가졌다고 하는 사람들이 우상에게 가서 빌고 부적을 몸에 지니고 다닌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기 때문이다(잠 1:7, 9:10).왜 우상숭배를 금해야 하는가? 첫째로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닌 피조물로써 부패한 인간들이 만들어낸 썩어질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사 44:18~22). 그런데 사람들은 우상이 자신들을 보호할 힘이 있다고 생각해 절하고 예물을 바친다. 한국만 보더라도 유교적 영향을 받아 조상신을 섬기는 제사나 희귀하게 생긴 돌, 오래된 나무, 맑은 샘물 큰 동상들이 화와 복을 주는 통로가 된다고 한다. 이러한 샤머니즘적인 우상뿐만 아니라 현대는 고도로 발달된 문명의 이기 아래 최첨단의 과학이 하나님을 제외시킨 또 다른 우상을 만들어 내고 있다. 현대 매스컴 또한 우상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부추기는데 일조 하고 있다. 물론 문화를 소개한 목적일 수도 있지만 헛된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질투하시며 진노하시기 때문이다(사 42:8). 주님을 섬기면서 세상도 귀신도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당신께 돌려야 할 영광과 찬송을 다른 존재에게 나누어 지는 것을 매우 싫어하신다.(출34:14, 신4:24) 실례로 구약 이스라엘백성들을 보자. 왜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을까?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폐한 일이 없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기려 하였기 때문이다. 고로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과 겸하여 유무형의 우상을 숭배한다면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상을 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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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과 우상 숭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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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
- 어느 날 한 가난한 농부가 농사 자금을 얻기 위해 마을에 있는 은행을 찾아와 지점장실의 문을 노크했다. 지점장은 농부의 경제적 상태에 대해 꼼꼼히 조사한 후 이렇게 말했다. ‘나쁜 소식과 좋은 소식이 있는데 어느 것부터 말씀 드릴까요?’ 이에 농부는 긴장하며 나쁜 소식부터 들어보겠다고 대답했다. 지점장이 유감스럽지만 담보로 할 만한 재산이 전혀 없기 때문에 대출을 해드리기가 어렵다고 말하자 농부는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안됐군요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지점장은 계속해서 더구나 선생님은 이미 부채가 너무 많아 어느 은행에 가도 대출을 받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농부는 그야말로 절망감으로 고개를 푹 숙이며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러면 좋은 소식이란 대체 무엇인가요? 지점장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예. 그것은 아무리 그렇더라도 저는 선생님을 우리 은행의 VIP 고객으로 삼아 거래를 계속할 생각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무슨 뜻일까.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던지 이렇게 천국백성으로 대접하신다는 의미이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무조건 없이 ‘거저’ 은혜를 주신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이 지닌 의미는 무엇일까? 쉽게 말해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호의다. 즉 전혀 그것을 받을 말한 가치가 없는 자에게 일방적으로 베푸시는 호의 곧 구원의 은혜를 말한다. 다음으로 구원 후에 베푸시는 보살핌, 즉 축복, 사랑, 관심, 연단 등 모든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값없이 성도들에게 날마다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그런데 인간들은 실제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 할 때가 많다. 한 현명한 사람에게 풀기 어려운 질문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는 오래 전 폐허가 된 고대 건축물을 한참 동안 주시 한 후 담쟁이 넝쿨로 뒤덮인 무너진 벽 옆에 서 있었다. 그 때 의문이 생겼다. 이 세상에서 가장 빨리 노쇠해버리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들이 가장 빨리 잊어버리고 가장 빨리 뒤안길로 사라져 버리는 것은? 그것은 바로 감사하는 마음일 것이다. 가장 잘 잊혀지는 것은 감사하는 마음이다 라고 했다. 그런데 이 대답에는 아주 심오한 진리가 숨어 있다. 우리는 선물을 받자마자 그 즉시 선물 준이를 잊어버리는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매일 주어지는 자비에 대해서 감사하지 아니하는 정신은 오늘 내일 일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늘 그래 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닫는 자가 되어야 한다. 깨닫지 못하면 아무리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베풀어도 은혜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멸망의 길로 가게 된다. 고로 하나님의 영적인 깨달음을 얻도록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 중에는 배은망덕한 사람이 너무도 많은 것 같다. 실례로 역경이 눈앞에 닥치면 하나님께 간절히 은혜를 간구하다가도 막상 고난이 지나면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하기보다 자신의 노력이나, 지혜, 능력에 의한 것이라고 떠벌린다. 자녀의 입시를 눈앞에 두었을 땐 철야 기도도 마다 않고 하면서 입학만 하고 나면 자신의 자녀가 공부를 잘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거나 뒷바라지 덕분이라고 생각 한다. 또 가정에 불화가 생기거나 사랑하는 가족이 병들었을 때 주님께 간구하여 위험한 순간이 지나고 나면 자신의 노력이나 유능한 의사 덕분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는가 말이다. 고로 우리는 받은 은혜에 대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한다. 독일의 훌륭한 정치가인 마티라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가난했던 젊은 시절 여행길에 올랐던 그는 시골 어느 여관에서 하루 밤을 묵었다. 그런데 이튼 날 일어나 보니 벗어 놓은 구두가 없어졌다. 마티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중얼거렸다. ‘세상에 훔쳐갈게 따로 있지 당장 신고 다니는 신발을 훔쳐가다니 하나님은 무심하시지 나 같은 가난뱅이의 신발을 가져가게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그 때 한 청년이 낡은 구두를 한 켤레 빌려주면서 교회에 함께 나가자고 권유했다. 마티는 그의 성의를 거절하지 못하고 교회에 나가 맨 뒷줄 의자에 않았다. 그리고 무심코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는데 두 다리가 절단된 사람이 다소곳이 앉아 예배 드리는 모습이 보였다. 찬송을 부를 때도 뜨겁게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찬양을 불렀고 기도를 드릴 때도 눈물을 흘리며 감사의 기도를 쉬지 않고 드리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청년 마티의 가슴에 찡하게 와 닿는 감동과 함께 부끄러움이 일기 시작했다. ‘저 사람은 나처럼 신발을 잃어버린 정도가 아니라 두 다리를 전부 잃어버렸으니 신발이 있어도 신을 수 없겠구나, 신발이야 다시 사면 되지만... 그런데 어리석게도 나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었으니...’ 이렇게 뉘우친 마티의 인생은 그 순간부터 변화되기 시작했다 이제 그의 생활은 감사할 것을 찾는 감사의 생활이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마침내 그를 독일 재무장관으로 세워 국가에 이바지 하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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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한 사람들
- 언젠가 미국 신문에 한 아버지가 전화박스에서 권총 자살을 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내용은 제임스(James)라는 사람이 시카고 신문사에 전화 한 후 자살할 것이며 자살에 대한 내막을 담은 편지를 신문사로 보냈으니 자신으로 인해 무고한 사람들이 피해 받지 않도록 해 달라라는 것이다. 신문사에서는 허겁지겁 발신인을 추적하여 장소를 알아냈으나 자살을 막을 수는 없었다. 경찰이 도착했을 때 그 아버지는 머리에 관통상을 입고 전화박스 안에 쓰러져 있었다. 그의 주머니에는 색이 바래고 너덜너덜해진 크레파스로 그린 그림 한 장이 나왔으며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 그림을 내 관속에 넣어 주십시오. 나는 이 그림과 함께 묻히고 싶습니다’ 그림에는 어린아이의 필적으로 ’셔리‘(Shiley) 라고 서명되어 있었다. 그것은 꼭 다섯 달 전 불에 타 죽은 금발머리 어린 딸 셔리가 그린 그림이었다. 그는 죽은 딸로 인해 몹시 깊은 슬픔에 빠졌었고 만나는 사람마다 딸의 장례식에 참석해 달라고 부탁했다. 자기 딸이 최고의 환송을 받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리고 장례식 후 얼빠진 사람처럼 거리를 헤메고 다녔다. 셔리의 어머니는 셔리가 두 살때 죽었기 때문에 자기한테는 돌아갈 가족이 없다고 말했다. 결국 비탄에 잠긴 그는 고독과 상실감을 견딜 수 없어 자기 인생을 내던졌다. 실로 아비에게 있어 딸은 끊임없는 기쁨의 샘물이다. 그 샘물이 막히거나 타인에 의해 혼탁하게 되었을 때 그 슬픔을 어찌 말로 다하겠는가. 오늘 날 과학은 발달하고 경제는 발전해 풍요로운 삶을 사는 것 같은데 자살의 강도가 심해지고 왜 한국은 세계에서 자살 제 1국이 되었을까? 사실 사람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남부끄러운 치명적인 죄도 짓게 되며 전 생애를 다 살아 내기 어렵도록 극한 난관에 부딪칠 때도 있고 삶이 저주스럽고 회의스러울 때도 있다. 누구나 한두 번 이상 경험할 수 있는 극히 보편적인 일이다. 하지만 그 때마다 삶을 포기 한다면 이 세상에 살아남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도 자살 옹호론자들은 사람이 자기 생명을 유지해 나갈 고유한 권리를 가지고 있듯이 자기 생명을 포기할 권리도 있다고 주장 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러한 자살 옹호론을 반대 한다. 물론 성경 그 어디에서도 자살이 옳다 그르다에 관해 직접언급 하는 부분이 없다. 하지만 성경의 교훈들을 종합에 보면 자살을 반대하고 죄악시 하는 것은 틀림이 없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주권을 모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얼마나 억울함이나, 죄책감이나, 병고나, 외로움 등의 고통에 시달렸으면 자살을 택했는가 하는 동정심을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죄책감이나 그 어떤 고통에서 탈출하려고 자살 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자신을 파괴하는 죄악이다. 특히 죄악감에서 탈출 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 섭리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버리는 불신앙의 몸짓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죄에 깊이 빠지면 그 죄가 사람으로 하여금 회개에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만든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한다. 그런데도 자살을 한다면 주님의 속죄를 헛되게 하고 모욕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 사람에게는 고유한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각기 적합한 사명과 은사를 주시고 그것으로써 당신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 줄 것을 요구 하신다. 고로 사람이 자살을 하는 것은 사람에게 할당한 고유한 사명을 포기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사명을 포기한 사람은 주님의 엄중한 책망과 심판을 면할 수 없다.(마25:26~30)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아는 일의 중요성을 자각하게 된다. 그렇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아야 인생에 실패하지 않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뜻을 바로 알지 못하기에 그릇된 죽음의 길을 택하여 귀한 생명을 버리게 된다. 물론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도록 계시하여 성경으로 기록하여 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죽음을 택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려는 교만한 생각 때문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기록된 성경을 늘 읽고 묵상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에 힘쓰고 그 뜻에 따름으로써 실패하는 인생이 아닌 성공적인 인생 하나님께 칭찬 듣는 삶을 살아야 한다. 아무리 삶의 여건들이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자신의 삶을 지켜야한다. 삶은 하나님께서 내려 주신 지상 명령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삶속에서 반드시 성취해야 할 사명을 주셨고 삶을 살아 갈수 있도록 갖가지 은혜와 은총도 약속해 주셨다. 고로 인간들은 삶을 중도에서 포기해서는 안 된다. 마지못해 살아서도 안 된다. 인간은 나서 죽을 때까지 귀중한 인생을 살아가면서 매순간마다 올바른 판단과 결정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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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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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시간표
- 유대 왕 헤롯 아그립바 1세와 2세의 이야기이다. 헤롯 아그립바 1세는 할아버지 헤롯 대왕이 통치했던 곳을 모두 지배하였다. 그는 정권 유지를 위해 친유대교 정책을 폈다. 이에 성도들을 박해하고 야고보를 목 베는가 하면 베드로를 투옥했다. 사실 그는 세상적으로 보면 성공한 유대 왕에 속 한다. 그래서인지 교만해졌다. 결국 헤롯은 가이사랴에서 두로와의 외교에 성공하고 축제를 개최한 날에 하나님의 진노를 사 충에게 먹히는 심판을 받아 죽었다. 즉 스스로를 속이고 자신이 신인 양 행세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행12:). 헤롯 아그립바 2세는 자기 누이 베니게와의 관계에서 염문을 뿌렸다. 그는 그의 추함을 가리기 위함인지 사람들 앞에 나설 때는 위의를 베풀었다. 거창한 행렬로써 사람들의 비양과 수근거림을 제압하려 했다(행25:23). 하지만 그는 유대전쟁(66~70년) 당시 유대인들로부터 암살당하는 최후를 맞았다. 스스로 속이는 교만은 사치스러운 겉치장으로는 가릴 수 없다. 이처럼 스스로 교만한 인생은 불행의 때를 생각지 못하므로 결국 인생의 최후를 맞게 된다. 자고로 악한 자들은 자기의 날들을 주의치도 않고 헤아리지도 않는다. 이 땅에서 장구한 세월동안 쾌락과 사치를 즐기며 불의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으로 생각 한다. 왜냐하면 악인들은 영적으로 매우 둔감한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악한 자들은 자신들의 최후가 아주 가까워진 날에도 자신들의 삶을 들이켜 참회의 자리에 서기보다는 오히려 더 큰 악과 부패에 심취하려 든다. 그러나 이 세상과 온 우주 만물을 홀로 통치해 가시는 하나님은 분명히 정해 두신 시간표에 따라 악인들의 죄악을 간과 하지 않고 그들의 악행을 징벌 하신다. 고로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생각과 이 세상의 한정된 삶에 묶여 있는 죄인들의 시간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그러나 악인들이 이러한 사실을 이해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악인들이 기승을 부리고 부패한 권력과 타락한 세력들이 이 세상을 어지럽히는 혼탁한 세대에서 날마다 하나님의 시간표를 바라보며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아니면 현재의 삶에만 시선이 머물러 예수님이 없는 세상의 영화를 추구하고 내적으로 죄악을 가리기 위해 그리스도 없는 세상의 사치로 치장하며 혹시 종교적 형식으로 스스로 거룩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가? 하지만 이렇게 행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속여 스스로 죽음을 향해 치닫는 행위와 같다. 고로 우리와 악한 자들은 스스로를 속이는 그 길에서 돌이켜야한다. 그리고 날마다 예수님을 ‘주’ 로 시인하며 주님의 제자로 살아야한다. 예수님을 ‘주’ 로 시인한다는 의미는 예수님을 자기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을 말 한다. ‘주’에 해당하는 헬라어 ‘퀴리오스’ 는 헬라 세계에 있어서 종이 주인을 가리켜 부르는 호칭이다. 당시 헬라 세계에서 주인은 종에 대하여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하였다. 종의 행사가 주인의 손에 달려 있었다. 즉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는 것은 예수님을 자신의 생명과 죽음을 결정하시는 분으로 인정한다는 말이다. 또한 예수님을 ‘주’로 시인한다는 것은 그분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을 말 한다. ‘퀴리오스’ 는 종이 주인을 부를 때 사용하는 호칭일 뿐 아니라 신을 부를 때 사용하는 호칭이기도 하였다. 헬라 사람들은 신 이름 앞에 항상 ‘주’ 라는 호칭을 붙였다. 가령 ‘퀴리오스 세리피스’ 라는 말은 ’세라피스‘신이라는 뜻이다. 고로 예수를 통해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은 그분이 본래 하나님이심을 믿어야한다. 그분을 하나님이 아닌 한 뛰어난 인간이나 종교의 창시자로 본다면 그분의 사역과 영생의 언약들도 다 예수라는 인간이 하는 것으로 믿게 되기 때문이다. 예수를 절대적인 하나님의 아들로 믿어야 그분의 대속과 부활 사역을 믿을 수 있으며 그분이 약속하신 영생구원의 약속을 절대적인 하나님의 언약으로 확신 할 수 있다.끝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한다는 것은 그분을 왕으로 인정한다는 말이다. ‘퀴리오스’는 당시 로마 황제를 부를 때 쓰는 호칭이기도 하였다. 우리가 구원을 얻으려면 반드시 예수님을 자신의 왕으로 영접해야 한다. 그 분만이 자신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절대적인 권세를 지닌 분이요.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유일하신 왕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고로 우리는 이러한 의미가 담긴 예수님을 ‘주’로 시인해야 한다. 특히 우리는 입으로 성도들과 교회 앞에서 ‘나는 이제부터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하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한다. 그래야 주님이 그 믿음을 인정하시고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인정해 주시기 때문이다(마10: 32, 33).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입술로만 주님을 고백하고 주의 복음을 전하면서도 주의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마음으로 주님을 시인하고 인격적으로 주님과 교제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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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세상 살기
- 3세기 라틴 교부의 한 사람인 카르타고의 주교 키프리아누스(T.C. Cyprianus)는 도나투스 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친애하는 도나투스, 이 세상은 포도나무 그늘 아래의 나의 정원에서 본 것과 같은 이름다운 세상이지요. 그러나 만약 당신이 나와 같이 높은 산에 올라 거친 대지를 바라본다면 당신은 내가 무엇을 보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요. 노상강도, 바다의 해적, 군대의 싸움, 도시의 현란하고 방탕함, 원형 경기장에서 환호하는 관중을 기쁘게 하기 위해 벌어지고 있는 죽음의 결투, 자기 본위의 이기심, 잔인성, 화려한 지붕 아래 있는 고통과 절망들... 도나투스, 이 세상은 악이요,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악한 곳이요. 그렇다. 키프리아누스의 말처럼 인간의 소욕대로 이 세상은 얻을 것 많고 갖고 싶은 것 많은 아름다운 세상이다. 하지만 복음 안에서 말씀의 높은 산에 올라 세상을 바라본다면 세상은 사단의 지배아래 있는 악한 세상임을 쉽게 알 수 있다. 헌데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세상이라는 곳에 살고 있으며 세상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며 울고 웃으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세상이란? 세상의 본질은 두 가지 방향에서 볼 수 있다. 먼저 세상은 하나님의 은혜로 창조된 선한 창조물이며 하나님이 우리들로 하여금 누리도록 선물로 주셨다. 다음으로 세상은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들의 다스림 가운데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반역하고 대항할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은 늘 이 두 관점을 적절히 적용하며 살아야 한다. 만약 먼저 것에 관점을 둔다면 장미빛 에덴동산의 환상에 싸여 교회와 성도들을 향하여 달려드는 마귀와 세상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는 준비를 할 수 없을 것이며, 또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고난과 핍박의 일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반대로 두 번째 관점만 가지고 살아간다면 늘 극단적인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악하다고 늘 불평하며 적대적인 태도로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즉 교회 밖의 모든 것 예컨대 하나님께서 인류 복지를 위해 일반 은총으로 주신 권력, 돈, 지식 등은 다 부정하고 더러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들은 합리적으로 처리하자고 말하면 곧 세상 지식을 앞세운다고 비난하며 세상의 통치자들은 모두 사단의 하수인이라고 말 한다. 또한 상품이나 증권이 거래되는 시장은 모두 도둑의 소굴이므로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곳에 가까이 해서도 안 되고 또 그러한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말 한다. 그리고 세상과 평안히 지낼 수 있는 문제들에서도 괜한 충돌을 일으키며 세상에서 스스로 소외된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구체적으로 생각하자. 먼저 그리스도인들은 죄와 악에 대한 기준이 달라야한다. 곧 세상 사람들은 사람의 눈을 기준으로 살아가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눈을 기준으로 살아가야한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악한 일을 해도 사람의 눈에만 드러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여 마음대로 행동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불꽃같은 눈으로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매사에 조심하고 거룩하게 살아야한다. 즉 세상 사람들이 악을 저지르고도 이를 속이고 감출 수 있다 하여 기뻐할 때 그리스도인은 적은 잘못과 실수에도 마음 아파하며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한다. 민족의 지도자 이상재 선생이 1911년 봄 일본 YMCA의 초청을 받고 일본에 간 일이 있었다. 일본의 속셈은 선생으로 하여금 독립 운동의 꿈을 버리게 하는데 있었다. 하지만 선생은 식사 후 총리대신 등 일본의 정치인들을 앞에 놓고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들은 일본이 강대국이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판단할지 모르나 진짜 위대한 왕국과 왕은 따로 있습니다. 이 분은 한순간에 일본을 멸망시킬 수도 있습니다. 이분을 두려워해야합니다. 그분은 바로 역사의 주관자 하나님 이십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은 매사에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다음으로 그리스도인은 선행에 대해서도 그 기준이 달라야한다. 곧 세상 사람들은 사람의 눈을 기준으로 하기에 사람들이 알아주는 한도에서만 선행을 하려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알기에 어디서든 은밀하게 선행을 해야 한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작은 선행이라도 사람들이 인정해 주면 기뻐하고 아무리 큰 선행이라도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슬퍼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의 눈과 관계없이 일정한 모습으로 사명을 감당하며 하나님이 기뻐하는 선행을 계속해야 한다. 그러기에 기독교인들은 세상 사람들처럼 사람의 옅은 눈을 기준으로 일희일비하는 얄팍한 삶을 살아갈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죄악 된 세상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세상을 품고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복음을 전파하시며 적극적으로 선행을 행했던 것처럼 세상을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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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세상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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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의 사람보다 신앙의 사람이 되라
-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실상은 자기들 신념으로 살면서 믿음으로 사는 것처럼 신념과 신앙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가진 단순한 종교적 신념을 신앙이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신념과 신앙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을 알아야한다. 신념과 신앙이 무엇인가? 신념은 자신이 가진 지식과 경험에 근거하여 스스로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얻어진다. 신념은 그릇된 사실에 근거 할 수 있다. 하지만 신앙은 절대 진리에 근거 한다. 그리고 신념은 결코 구원으로 인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신앙은 구원에 이르게 한다. 그리고 신념은 사람으로 하여금 실패 없는 인생을 살게 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진정으로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게 할 수 없다. 그러기에 진정으로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게 하는 것은 신념이 아니고 오직 신앙뿐이다. 실례를 보자. 고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한 김재규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야’ 이는 그가 얼마나 강한 신념을 가졌는지를 보여 주는 말이다. 헌데 그는 이 신념 때문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또 불굴의 의지로 세계를 정복함으로써 헬라 제국을 건설한 알렉산더 대왕도 전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다. 불굴의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 그의 사전에는 실패는 없었다. 그러나 신앙이 없던 그는 결국 구원받고 영생을 누릴 수 있는 ‘진정으로 성공적인 인생’ 은 살 수 없었다. 이렇듯 자기 신념에 대한 지나친 확신은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자기 신념을 버리고 신앙을 택한 사도 바울을 보자. 그는 주님의 소명을 받기 전에는 주님의 제자들을 잔해하는 자였다. 주를 대적하며 ‘핍박’ 하는 자였다. 즉 자신의 행위의 동기를 하나님께 대한 바른 신앙으로 생각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행위는 결코 하나님께 대한 바른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단지 그의 성장 배경과 그가 받은 교육에서 비롯된 신념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는 주님을 다메섹에서 만남으로서 비로써 그의 신념을 과감하게 버리고 주님을 믿게 되었고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었다. 고로 그리스도인들도 잘못된 신념을 버리고 참 신앙의 사람이 되어야한다. 자신의 작은 체험과 지식에 근거하여 자의적으로 어떠한 사실을 확신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성령님의 조명하심을 받아 진리를 깨닫고 믿는 자가 되어야한다. 그래야 최후의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고로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신념을 버리고 믿음으로 살아야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유일한 길과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오직 믿음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간적인 면모나 지식 혹은 사회적인 지위를 보지 않고 우리가 당신을 의지하고 당신의 약속을 확신하는 믿음을 보시고 그 믿음에 합당한 복을 주시기 때문이다. 특히 이 믿음이 요구하는 세 가지 덕목이 있다. 곧 그것은 아벨과 같이 하나님께 올바르게 예배를 드리는 것이요. 에녹과 같이 하나님과 동행을 하는 삶을 사는 것이요. 노아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 땅에서 실천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즉 예배, 동행, 실천 이라는 세 가지 삶의 양태를 요구하는 것이다. 고로 믿음이 있다는 것은 이 세 가지 삶의 모습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믿음 있는 자의 기본적인 생활 태도며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견고히 세워야 할 자세이다. 이를 위해 끊임없이 우리의 자아를 죽이고 교만을 꺾고 게으름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한다. 오래전 미국의 노스캐놀라이나 주에서 달려오던 한 유람 열차가 도개교 아래로 떨어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다리가 열리고 있을 때 열차가 그대로 돌진해 들어왔던 것. 이 사고로 열여덟 명의 승객이 목숨을 잃었다. 사고 장소에 있었던 기수는 분명히 붉은 기를 흔들었다고 주장했다. 다른 역무원들도 그의 주장을 뒷받침해 주었다, 그렇다면 기관사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기관사의 주장은 기수의 그것과 정반대였다. ‘나는 그가 흰 기를 흔들고 있는 것을 봤습니다. 분명 흰 기였어요. 그래서 난 다리가 닫혀 있을 것을 확신하고 그대로 달렸던 것입니다’ 경찰은 기수에게 그 문제의 붉은 기를 보여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사건은 그 즉시 해결되었다. 기수가 흔들었다는 깃발은 분명 붉은 기였다. 하지만 색이 바랜, 그래서 흰색이라는 착각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것 이었다. 이처럼 빛바랜 신호기가 참사를 가져왔듯이 우리의 믿음도 퇴색되어 가고 있지 않은지 늘 점검하고 누구보다도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며 주님께 무릎을 꿇는 겸손과 주님을 의지하는 성숙한 신앙을 가져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떠한 사단의 올무에 걸려들지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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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의 사람보다 신앙의 사람이 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