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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모로 차별하지 말자
    사람의 얼굴은 참 묘하다. 자신의 의지 없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자연스레 얻었지만 이 얼굴로 인해 좋다, 나쁘다, 싫다 등 평가를 받게 된다. 이 평가는 사람의 성품을 결정하게 되고, 심지어는 한 사람의 미래를 결정하기도 한다. 그래서 타인의 외모를 평가할때는 지극히 신중해야 하며, 심사숙고 해야 한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는 말을 생각해 보자. 외모란 사람의 얼굴, 신분, 직업, 빈부, 성별, 종족 등 여러 외적인 조건을 의미한다. 그리고 외모로 취한다는 것은 사람의 외적 조건에 따라 차별 대우하는 것을 가리킨다.사람을 외모로 취해선 안될 이유는 바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즉 사람은 전인이 하나님의 성품의 영향을 받아 지음을 받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걸작품인 사람의 외모를 보고 판단한다면 이는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 또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시고 판단하시기 때문이다. 실례를 보자.하나님께서는 이새의 여덟 아들 중 가장 약하고 작게 보여진 다윗을 장차 왕으로 예정하셨다. 아울러 예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성별, 종족, 신분, 지위, 빈부, 과거를 보고 판단하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귀신들린 자, 소경된 자, 문둥병자, 가나안 여인, 혈루증 앓은 여인, 로마의 백부장, 니고데모, 삭개오 등을 외모로 취하지 않고 그들에게 한없는 자비와 사랑을 베풀어 주셨다. 사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말처럼 세상적으로 볼 때에 지혜나 문벌 재산이 없는 비천한 자들이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약하고 천하고 미련한 자들을 택하여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얻게 하시고 세상의 지혜자 문벌 좋은 자 학식있는 자 부자 권력자들을 부끄럽게 하셨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다. 따라서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잃어버리고 외모가 초라한 가난한자 실직자 노인 장애인 병든자 소년 소녀가장 노숙자 외국인 노동자 이주여성 등을 본 척 만 척 하며 넘어가서는 안된다. 우리는 왜 사람을 외모를 보고 취했을까? 나와 무관한 사람들로 보고 멸시했을까? 고통 받는 그들을 돕지 않았을까? 그들은 모두 주안에서 한 아버지를 모시는 하늘의 형제 자매들인데 말이다(마 12:50).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하신 주님의 세계명(요 13:34)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예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도 예수님의 새 계명을 지키지도 않고, 경건한 채 하면서 주안에서 한 형제된 성도들을 차별했던 것이다. 이제 우리들은 주님의 새 계명을 지켜야 한다(요 13:34). 새 계명을 지키라는 사랑하는 삶을 살라고 명령하신 말씀이다. 예화로 사람을 외모로 차별해선 안되는 이유를 생각해 보자. 미국의 한 도시에 노인 부부가 있었다. 노부부는 자신들이 평생 동안 모은 전 재산을 교육 사업에 헌납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는 지금의 미국명문 대학교인 하버드 대학을 방문을 하여 정문을 지키는 수위에게 총장님을 만나러 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수위는 노부부의 허술한 옷차림을 보고 퉁명스럽게 대했다. “총장님은 지금 바쁘셔서 당신과 같은 사람들을 만날 시간이 없소”라며 거절 했다. 하지만 노부부는 “이런 대학하나 설립하는데 얼마나 돈이 들어갑니까?”라고 수위에게 물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수위가 노부부의 말을 들은 척도 안하면서 멸시하는 태도로 인정사정없이 쫓아냈다. 노부부는 마음의 깊은 상처를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한 두 노부부는 자신들의 전 재산을 아낌없이 투자하여 지금의 명문대학 스탠포드 대학을 설립하였다. 그 후 하버드 대학에서는 이런 사연을 듣고 크게 아쉬워 했다고 한다. 현재 하버드 대학 정문에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는 성경말씀을 기록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고 있다고 한다.
    • 칼럼
    • 목회자
    2015-07-31
  • 공정한 판결
    법관들이 공정한 재판을 해야 하는 것은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사 30:18) 그들을 법관으로 세우시고(롬13:1), 마땅히 공의만 좇으라(신16:20, 사56:1)고 명령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뇌물을 받고 판결을 불의하게 내려 힘없고 약한 자들을 울리는 불의한 법관들도 참으로 많다(욥 22:9, 렘 5:28) 우리의 법관들은 공의로운 재판을 하고 있을까? 일본 에도시대에 공정한 판결을 내리기로 유명한 ’이다구라 시게무네‘가 있었다. 어느 날 한 기자가 그에게 공정한 판결의 비결이 무엇인지를 묻자 그는 ’나는 얼굴을 보지 않습니다. 사람의 얼굴이란 보면 볼수록 미워지는 얼굴과 볼수록 선량해 지는 얼굴이 있습니다. 그런데 내 눈에는 믿게 보인다고 해서 그 사람이 다 악인일리 없고 내 눈에 선하게 보인다고 해서 꼭 선량한 사람일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피고와 원고의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문을 닫고 혼자 방에 앉아서 재판 합니다. 유명한 재판관들은 얼굴을 보고도 악인과 선인을 구별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 그런 재주가 없으니 그저 사심 없이 사실 그대로 재판하는 것뿐입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오늘 날 우리 사회를 보자. 어떤 분이 우리 사회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한국 사회는 부패가 극에 달하여 외국인들로부터 ‘ROTC 공화국’ 이라는 조롱을 받고 있다고 한다. 즉 총체적 부패 공화국(Republic of Total Corruption) 이라는 것이다. 왜 우리나라가 이러한 오명을 뒤집어 쓰게 되었을까? 오늘 날 우리 사회가 이토록 혼탁해진 이유 가운데 하나는 정의를 신조로 하는 사법부가 빵 한 조각 훔친 사람에 대해서는 ‘법대로 외치면서도 힘 있고 돈 많은 권력층과 부유층에 대해서는 소위 ‘성역‘을 만들어 이들의 불법을 보호 묵인 은폐까지 함으로써 사법적 권위를 떨어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라고 했다. 이같이 법관이 공정한 판단을 내리지 않고 다른 이유로 불의한 판단을 내린다면 그 나라의 정의는 바로 서지 못하고 나라의 기초가 흔들리게 된다. 공정한 판결을 내려야 할 의무는 재판관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일상생활에서 남을 판단하고 시비를 가리는 자들에게도 요구된다. 공정한 재판의 비결이 무엇일까? 먼저 선입견을 버려야한다. 법관은 재판받는 당사자들을 볼 때 은연중에 사회적으로 비천하거나 학식이 높지 못한 사람을 무시하게 되고 그를 마치 죄인 것처럼 대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태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시기 때문이다(삼상 16:7). 그리고 궁핍하고 비천한 자의 탄식을 들으시는 하나님은 선입견을 가지고 불의한 판단을 내리는 자들에게는 심판을 내리시기 때문이다(겔 18:12, 13). 고로 법관들과 사람을 판단하는 자리에 있는 자들은 사람의 신분이나 지위나 재물 등 외적인 모습을 보고 판단을 내리지 말고 모든 일에 하나님의 말씀과 공정한 양심으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또한 물질의 탐욕을 멀리해야 한다. 법관이 법정에서 불의한 판결을 내리는 대표적인 이유는 바로 재물 때문이다. 법관이 어느 한쪽으로부터 뇌물을 받거나 자신의 금전적인 이익이 개입 될 때는 공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불의한 판단을 내리게 된다.(미가7:3) 그래서 성경은 뇌물은 재판자의 명철을 흐리게 하고(전7:7) 판결을 굽게 한다고 경고하며 재판을 할 때 결코 뇌물을 받지 말라(신16:19)고 교훈했다. 아울러 이러한 일은 비단 법정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 속에서나 심지어는 교회 안에서도 자신의 금전적인 이익을 위하여 시비를 올바르게 가리지 않고 불의하게 판단하는 경우를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스스로를 망하게 한다. 왜냐하면 뇌물이나 불의한 재물은 지금 당장은 그 개인에게 유익이 되는 듯하나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그의 장막을 불태우고(욥15:34) 결국엔 멸망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권세자의 부당한 압력이나 청탁을 멀리해야한다. 왜냐하면 재판을 받는 한 쪽 편이 높은 권세를 가지고 있을 때 그는 법관에게 부당한 압력을 넣게 되고 법관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부당한 판결을 내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재판장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 속에서나 교회 안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시비를 가릴 때 공정하지 못하고 권세 있는 자의 편을 들고 약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경우를 볼 수가 있다. 허나 이것 또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망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시35:2) 고로 법관이나 사람을 판단하는 자리에 있는 자들은 선입견이나 재물이나 권세 때문에 불의한 판단을 내리지 말아야 한다.
    • 칼럼
    • 목회자
    2015-07-24
  • 화평의 복음을 심자
    교회에 잘 나오던 한 장로 부인이 얼마 전부터 계속 예배에 참석하지 않아 걱정이 된 목사가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장로는 ‘몸이 불편해서요’ 라고만 대답했다. 다음날 목사는 그 집에 심방을 갔다. 그런데 병상에 누워 있으려니 생각했던 장로 부인은 뜻밖에도 건강한 모습으로 일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목사는 ‘병환 중이라는 얘기를 듣고 심방왔는데요’ 하고 의아해 했다. 그러자 장로 부인은 ‘병은 무슨 병이요. 우리 장로가 또 거짓말 했군’하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나는 교회에도 안가고 예수도 안 믿을 랍니다. 저 영감하고 이 세상에서 같이 사는 것만도 지긋지긋한데 저 세상에까지 갈 마음은 없다 구요. 영감은 부지런히 교회에 다니니까 천당에 가겠지요. 그러나 난 지옥으로 가야겠어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오늘 날 많은 목회자들과 장로들과 성도들이 가정, 교회, 직장, 사회에서 주님의 화평의 복음을 심지 않고 불신자들처럼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면 안될 것 같아 이해타산을 앞세워 서로 대립하고 다툼을 일으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왜 우리는 이 세상에서 화평케 하는 자들로 살아야 할까? 그 이유는 화평케 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때문이다(마 5:9). 화평케 하는 자가 이렇게 복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화평케 하는 일이 주님의 사역의 중심이 되기 때문이다(골 1:20). 그런데 이것은 역으로 그분이 오시기 전에는 이 세상에 화평이 없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까지는 이 땅에 화평이 없었다. 물론 하나님께서 지은 이 세상은 평화로웠다. 하나님과 인간들은 친밀한 교제를 나누었고 사람들은 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의 범죄는 그 모든 화평한 상태를 일시에 깨뜨리고 말았다. 친밀했던 하나님과 단절되었고 범죄한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저주가 임했다. 또한 인간의 범죄는 인간 간에도 갈등을 일으켜 서로 싸우게 하였다. 그 결과 하나님과의 화목의 길이 막혀버렸다(사 59:2). 그리고 이는 인간에 있어서 모든 불행과 두려움의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인간에게 실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곧 화평의 하나님이(고전 14:33) 당신과 화목할 수 있는 그 길을 여신 것이다. 곧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당신과 화목할 수 있는 길을 만드시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 시대에는 백성이 범죄 하였을 때 제사장을 통해 소나 양을 제물로 삼아 화목 제사를 드렸다. 그와 같은 화목 제사는 곧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침내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성육신시켜 세상에 보내심으로(마 1:23) 죄인 된 인간들을 대신하여 십자가 제단에서 죽게 하심으로 당신과 인간을 위한 화목제물로 삼으셨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으로 당신과 다시 화목하게 하셨다(롬 3:24).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이 우리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것이다. 고로 인간이 화목하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다(요 14:6, 행 4:12). 따라서 우리는 주님이 명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이 땅에 화평케 하는 사역을 감당해야한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기 때문이다(고후 5:18). 그렇다면 우리가 이 직책을 어떻게 수행해야 할까? 먼저 하나님과 세상을 화목 시켜야한다(고후 16:20, 21).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과 세상 사람이 화목할 수 있을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다 하심을 믿을 때 화목할 수 있다(롬 5:1). 그러기에 하나님과 화목 시키려면 우리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의 복음을 을 세상에 전해 주어야한다. 곧 평안의 복음을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좋은 기회만을 고대하지 말고 때를 얻든지 못 얻었든지 항상 주님의 화평의 복음을 전파해 한다. 다음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를 화목해야한다. 주님의 사신된 우리의 사명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화목하게 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 것이다. 주님의 지상 사역 중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 곧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목이었기 때문이다(엡 2:16). 또한 주님께서는 직접적으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마 5:9)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웃과 화목의 직책이 있음을 알려 주셨다. 따라서 우리들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화목하게 하여야한다. 이제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와 다툼이 있는 곳에 평화 그리고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어 주어야 한다. 그러기에 할 수 있는 한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하고 또 모든 인간관계 속에서 분쟁의 조정자가 되며 차가운 이 세상을 사랑과 선행으로 훈훈하게 해야 한다.
    • 칼럼
    • 목회자
    2015-07-09
  • 어느 목사님의 변화의 설교
    어느 교회에 새로운 목사님이 부임하였다. 목사님의 첫 설교는 너무도 은혜롭고 감동적이었다. 성도들은 기쁨에 들떠 목사님의 손을 잡고 많은 은혜를 받았다며 앞으로도 이러한 설교를 자주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런데 목사님은 그 후에도 계속 같은 본문에 같은 설교만 반복하였다. 이를 궁금히 여긴 성도들이 목사님께 물었다. ‘아니 목사님, 설교 밑천이 그것밖에 없습니까?, 아니면 우리를 놀리시는 겁니까? 어째서 매번 똑같은 설교만 반복하시는 것입니까?’ 그러자 목사님은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아닙니다. 설교 주제야 성경 속에 무궁무진하게 있지요. 하지만 성도님들이 그토록 은혜로운 설교를 듣고도 아무 변화가 없으니 같은 설교를 계속 할 수 밖에요. 그러니 은혜로운 설교를 듣고 싶다면 삶에 변화를 보이세요. 그러면 저도 그 진도에 맞추어 설교를 바꾸어 볼게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구주로 믿고 진정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가 되었을까? 입으로는 주님을 시인하면서도 주님의 말씀과 계명대로 실행하지 않는 자들이 참 많은 것 같다. 그들에게 종교가 무엇이냐고 질문하면 서슴없이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며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한다. 과연 그들 중에는 기도를 많이 하고 성경지식이나 신학적 지식이 탁월한 사람도 많다. 성경을 줄줄 외우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지식이 곧 믿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성경 말씀은 단지 지식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삶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단지 지식으로만 알뿐 실천이 없다면 그 지식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아니 오히려 그 지식을 악용하면 더 큰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다. 이에 대하여 신학자 존 베일(John Baillie)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자는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는 자보다 더 크게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위험이 있다’라고 말했다. 많은 이단들을 볼 때 매우 타당성 있는 말이다. 고로 우리는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사실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이론적으로 따질 수 있다. 물론 그러한 이론이 매우 합리적인 것도 있고 전혀 합리적이지 못한 경우가 있다. 하지만 결과는 항상 같다. 인간의 모든 이론은 복음 앞에서 깨어지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자. 견고한 성 여리고가 이론적으로 무너지게 되어 있었을까? 무너져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이론적으로 따진다면 오히려 그것은 견고해야 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합성에 무너졌다. 파괴되어도 철저하게 파괴 되었다. 마찬가지로 복음 앞에 인간이 세운 이론도 이와 같다. 비단 인간 이론만 아니라 종교이든지 교만함이든지 무엇인지 좋다. 복음을 대적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무너지게 되어 있다. 복음이란 그렇게 강력한 것이다. 헌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오늘 날 교회의 지도자인 목사들이나, 장로들이나 일반 성도를 보자. 그들은 그토록 많은 설교를 하거나 듣고 많은 성경공부를 했는데도 거의 변화가 없다. 기독교인의 수가 일천만 명이 넘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는데 그렇다면 다섯 명 가운데 한명은 기독교인 셈이다. 외국에서는 기독교인이 전체 인구의 이십 퍼센트가 넘으면 그 국가를 기독교 국가로 간주 한다. 그 기준에 보자면 우리나라도 기독교 국가인 셈이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악과 범죄가 증가하고 부정부패와 불법이 늘고 있다. 이유가 무엇일까? 목회자와 장로들과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세상과 타협하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즉 적당히 하나님도 섬기고 동시에 세상과 짝하려는 어리석은 생각을 가지고 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이중생활은 위험하다. 이러한 사실은 역설적으로 역사상 가장 지혜로웠다는 솔로몬 왕이 가장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그는 부친 다윗을 이어 왕위에 오르자 성전을 지어 봉헌함으로써 하나님께 충성을 하였다. 한편으로는 왕국의 안정과 번영을 위해 세상적인 방법도 동원하였다. 즉 그는 이방 여러 왕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세상적인 방법도 함께 동원하였다. 즉 그는 이방 여러 왕들과 환심을 사기 위해 정략결혼을 하며 우상을 끌어들이는 등 세상과도 짝하는 방법을 서슴치 않았다(왕상 11:1~7). 하지만 결과는 그가 의도했던 바와 정반대였다. 곧 그는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오히려 생존 시에 여러 이방의 공격을 받았고 그가 죽자 결국 나라마저도 두 조각이 나고 말았다. 이는 두 마음을 품고 하나님을 좇는 자의 결국을 보여 준다. 우리는 알아야한다. 믿음도 중요하고 기도도 중요하고 지식도 중요하지만 목회자들과 장로들과 성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신앙의 덕목은 믿음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에게 형통함과(수 1:8) 풍성한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다(눅 5:6, 7).
    • 칼럼
    • 목회자
    2015-06-30
  • 인간의 차별
    인간은 남자나 여자나 다 하나님 앞에 평등하다. 부자나 가난한 사람, 저명한 사람, 무명의 평민, 권력자, 재벌가나 모두 동일하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모르고 윤리도 모르는 자들은 지위나 권력, 돈, 조직을 이용하여 낮고 가난한 자들을 차별 하고 있다. 초대교회 시절 유대인 사회에서는 이방인, 노예, 여자 등의 차별이 철저 했다. 하나님의 선민인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이방인들은 개들(마 15:26, 27), 우상 숭배자, 부정한 사람들, 죄인들 이었다(갈 2:15). 또 노예의 신분은 주인의 재산과 같았다. 노예의 권한은 전혀 없었고 그에 대한 전권은 주인에게 있었다(몬 1:13~16).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상종하지 않았다. 여자들은 대게 가정과 사회에서 천대를 받았고 공적생활에 참여하지 못했으며 남자의 소유물이나 부모의 노동력이나 소득의 원천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러한 신분상의 차별이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완전히 철폐 되었다(엡 2:14).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차별이 있을 수 없다. 이러한 신분은 결코 혈통이나 능력이 아닌 오직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거저 주어졌다. 그리스도인은 이방인들에 비해 우월할 수 없으며 노예의 신분이란 당치도 않다. 주님을 믿는 성도는 주안에서 하나이며 한 형제이자 서로 존중하고 사랑할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 사이에는 어떠한 인종적 신분적 성적 차별도 있을 수 없다. 한국의 초대 교회시절 서울의 예장 합동측 승동교회에서 신분적 차별을 철폐하고 당시 한국 사회에서 천대받던 백정인 박성춘 씨를 장로 장립하여 화제가 되었다. 실로 한국 교회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일이었다. 이처럼 복음은 신분의 차별을 과감하게 철폐하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에는 아직도 신분 차별이 존재하는 듯 하다. 어떤 분이 이런 주장을 했다. ‘어느 교회를 보면 경건하게 예배를 드리고는 정작 광고 시 거의 모든 시간을 부자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소개하느라 가난한 사람들의 동정은 단 한마디로 넘어가기가 일쑤이다. 또 어느 교회는 설교시간마다 축복을 받으려면 헌금을 잘 드려야 한다고 강조하면서도 예산을 편성할 때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예산 할당에는 인색하기 그지없다. 심지어 감옥이나 빈민촌을 돌아보는 일은 일 년이 가도록 단 한 번도 안하면서 어쩌다 정치적 목적으로 유력한 자들이 찾아오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한다’ 평등해야 할 교회에서조차 왜 사람들을 차별하는가? 차별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재물이다. 경제적인 득실에 따라 그 사람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는 것이다. 부자에게는 아부를 하며 가난한 자는 괄시해도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인생을 사는 지혜처럼 받아들이기도 한다. 그렇다. ‘나에게 상대가 유익한가?’ 라는 물음이 차별 대우를 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된다. 곧 계산적인 사고가 차별 대우라는 결정과 선택을 이끌어 낸다. 하지만 이것은 ‘악한 생각’이다. 차별 대우란 인간의 죄악 된 본성에서 기인된 것이기 때문이다. 즉 계산적인 사고 하에서 나온 모든 행동과 결정은 죄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바로 알아야한다.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한 모습을 취하며 살아야 자신의 몫을 챙길 수 있다는 현대인의 사고방식은 결코 그리스도인이 가져야할 현명한 할 삶의 자세가 아니다. 또 이러한 생각은 수많은 죄를 열매 맺는 강력한 죄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고로 이러한 계산적인 사고를 용납할 수 없으며 그로인한 결정을 회개의 제목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만일 인간적인 기준으로 차별하면 단지 윤리적인 비난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되어 그해 해당하는 벌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곧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범법자가 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약 2:9). 이에 대해 혹자는 불만을 품으며 내심 이런 항의를 할 지도 모른다. ‘아니 살인이나 강도짓을 한 것도 아니고 단지사람을 좀 차별했을 뿐인데 그렇게 까지 하다니 좀 심하지 않는가?’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무지이다. 주님을 보자. 주님은 사람을 성별이나 종족 신분과 지위 과거의 행적이 어떠하건 그 누구를 막론하고 외모를 보시고 차별하지 않았다. 즉 각종 병자, 나약한 여인들, 문둥병자, 로마의 백부장, 혈루증 앓은 여인, 공회원 니고데모, 세리 삭개오, 부정한 사마리아 여인 등에게 한없는 자비와 사랑을 베풀어 주셨다. 고로 오늘 우리가 진정 주님을 믿는 그리스도인 이라면 이제부터라도 주님의 뜻을 따라 성별, 장애, 빈자, 병자, 학력, 지역, 비정규직, 외국인 노동자, 다문화 가정 등을 차별하지 말자. 곧 그들은 주안에서 우리가 돕고 섬겨야 할 선한 영적 가족이기 때문이다.
    • 칼럼
    • 목회자
    2015-06-19
  • 인생은 잠깐입니다
    숲속의 왕 사자가 독감으로 굴속에 앓아 누웠다. 많은 동물들이 문병을 왔는데 여우만은 집이 멀어 그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러자 전부터 여우를 미워하던 늑대가 지금이야 말로 여우를 없애고 사자의 사랑을 독차지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며 사자에게 말했다. ‘사자 임금님! 오늘 이렇게 모든 동물들이 임금님의 문병을 왔으나 오직 여우란 놈만이 오지 않았습니다. 놈은 전부터 임금님을 업신여기며 비방하고 다녔으니 그 건방진 여우를 당장 처치하소서’ 그러나 뒤늦게 문병 온 여우가 굴 밖에서 이 이야기를 듣고는 늑대가 자기를 모함한다는 것을 알았다. 여우는 한 가지 꾀를 내어 잔뜩 화가 나 있는 사자 앞에 나아갔다. ‘저는 임금님께서 독감에 걸리셨다는 소문을 듣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훌륭한 의사들의 처방을 듣고 오느라 이렇게 늦었사오니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사자가 용서한다며 처방을 묻자 여우는 ‘네 그것은 아주 간단한 일입니다. 임금님의 몸을 갓 죽인 늑대의 따뜻한 가죽으로 감싸시면 곧 독감이 낫는다고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늑대는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해 가죽이 벗겨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오늘날 이 사회에는 늑대 같은 잔꾀가 많은 사람이 허다하다. 그리고 얼핏 보기에 그들의 일이 형통하고 번창하는 것 같다. 하지만 늑대 같은 인생은 결국 그보다 더 잔꾀가 많고 교활한 여우같은 인간을 만나서 불행을 당하게 된다. 고로 우리는 매사에 잔꾀를 부리지 말고 인생을 진실하게 살아야한다. 그리고 인생이 잠깐인 것을 자각해야한다. 인생의 잠깐을 생각해 보자. 첫째 남에게 악을 행함으로 얻는 인생의 즐거움이 잠깐이다. 생각해 보자. 우리도 상대방이 나를 모욕했다는 생각으로 나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함부로 말을 꺼내는 경우가 많지 않았는가? 그리고 지금 우리가 즐거워하고 또 남에게 자랑하고 있는 일은 무엇인가? 혹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과 일반으로 남들을 모함하지는 않는가? 깨달아야한다. 악인이 베푼 꾀야 말로 스스로에게 올무가 되어 자신을 망치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때때로 의식, 무의식적으로 남에게 상처를 주고 얻는 즐거움은 잠깐이고 진정 시원한 기쁨을 주지 못하며 허무감을 남기고 사라지고 만다. 다음으로 명예와 권세와 재물의 즐거움이 잠깐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흔히 악한 사람들이 형통하여 큰 권세를 잡고 의인을 핍박하며 억압 하는 상황을 종종 목도한다. 그래서 분개하고 억울해 하며 그러한 불의를 보고만 계시는 하나님께 불평과 불만을 토로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그러한 악인의 권세 앞에 허리를 굽히고 굴종하는 비참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현재 아무리 악인의 권세가 강하고 위함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 역시 영원한 것이 아니다. 결국 안개와 같이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들의 권세가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서 하나님의 공의가 완성되는 날에 모두 초개와 같이 불타 없어져 버릴 것이다. 현재는 비록 악한 권세로 인해 핍박받고 고통당하는 비참한 지경에 있다 할지라도 끝까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믿고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도 복을 주시고 또한 훗날 이 땅의 권세와 비교할 수 없는 크고 영원한 하늘의 권세를 주실 것이다(벧전 5:4, 10). 마지막으로 사람이 사는 날이 잠깐이다. 모든 인생은 그 사는 날이 제한적이고 한 순간에 불과하다. 세상적으로 힘이 있고 육신적으로 강건하다 할지라도 이 땅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할 것 같이 보이는 악인들의 형통한 삶 역시 제한적이고 이내 끝나 버리는 순간에 불과하다. 그들은 길어야 인생 한평생 이 땅에서 사는 날 동안만 형통 한듯 한 삶을 누리는 것이며 그 사는 날이 지나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서는 날 그들은 이내 가장 비참하고 무서운 형벌에 처해지며 그것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눅 16:19~31). 그렇다. 인간은 한치 앞의 일도 알지 못하는 연약한 존재임으로 마치 장래 일을 훤히 아는 듯 내일 일을 장담하며 교만하지 말아야한다. 실례로 당장 내일 자기가 세운 나무에 자기가 달려 죽을 줄도 모르고 자기의 부귀영화를 자랑하던 하만(에5:), 하나님을 피하기 위해 배에 올랐으나 오히려 폭풍을 만나 바다에 던져지는 선지자 요나(욘 1:), 갈릴리 호수 한가운데서 예측하지 못한 큰 폭풍을 만났던 12제자(마 8:23~27), 그리고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 파선 직전까지 몰랐던 로마행 배(행 27:1~26)의 사건들이 바로 대표적인 예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주 만물과 인생 만사를 오직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하에 움직이시며 모든 미래의 일을 우리 인생에게는 알 수 없도록 하셨다(전 7:14, 8:7). 하지만 인생이 알 수 있는 확실한 두 가지가 있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것과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는 것이다(히 9:27). 그러기에 우리는 이 땅에서 잠깐 사는 날 동안 과도한 욕심을 부리지 말자. 그리고 악인의 형통함이나 영화를 부러워하지 말고 이후의 하늘나라 영원한 삶을 소망하며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자.
    • 칼럼
    • 목회자
    2015-06-11
  • 진실을 지키자
    중국 송나라 때 원숭이를 기르던 저공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어느 해 겨울 양식이 부족해지자 그는 원숭이들을 불러 놓고 말했다. ‘내일부터는 아침먹이로 도토리 3알씩을 주고 저녁에는 4알씩 줄터이니 그리 알아라’ 그러자 원숭이들이 크게 소동했다. ‘뭐? 지금도 배가 고파 죽겠는데, 도토리 3알을 먹고 하루 종일 참으란 말이야? 안돼! 안된다구! 그래서 저공은 슬쩍 말을 바꾸어 말했다. 그렇다면 아침에 4알을 주고 저녁에 3알을 주면 되겠느냐? 그 말에 원숭이들은 좋아라고 헤헤 웃었다. 이로부터 간사한 꾀로 남을 속이고 농락하는 것을 비유해 조삼모사란 말이 생겼다. 결국 아침에 4알을 주고 저녁에 3알을 주나 마찬가지이지만 여기에 속다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그런데 원숭이가 아닌 우리도 간사하고 부정직한 위정자들과 사회 지도자들과 교계 지도자들의 이런저런 달콤한 거짓말에 속고 있으니 참 안타깝다. 우리는 생활 가운데서 진실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들으며, 또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 모두들 공감하며 살고 있다. 진실이란 문자 그대로 거짓 없이 바르고 참된 것을 말한다. 진실을 지키려면 소극적으로 거짓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 거짓말은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과장에서 말하는 것이다. 작은 것을 크다 하며 큰 것을 작다고 말하는 경우들이 많다. 이런 표현 방법은 거짓된 인간성의 폭로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거짓되기 때문에 그 속에 있는 거짓이 넘쳐 나오는 것이다. 양심의 성격이 진실이니 만큼 그것이 진실하고서야 평안을 얻게 되는 것이다. 왜 진실해야 할까? 하나님은 우리 중심에 진실을 소유하시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양심과 신앙은 서로 나눌 수 없는 진실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사람이 진실하지 못함으로 양심이 더러워지면 믿음이 약해 진다. 우리는 진실을 지키는데 있어서 부득이 하게 하지 말고 기쁨으로 해야 한다. 진실하다는 것은 참된 말을 하는 것이다. 즉 이웃들에게 속이는 말이 아니라 정직한 말을 하는 것이다. 실로 생활 가운데 말은 참으로 중요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음을 자주 깨닫게 된다. 참된 말을 하며 살아 갈 때 우리의 입술은 불의함에서 떠날 수 있으며 우리의 이웃을 죄악에서 돌아설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함부로 말하거나 거짓을 말해서는 안된다. 이솝 동화에 나오는 ‘암 돼지와 농부’의 이야기이다. 어떤 마을에 빛을 많이 진 농사꾼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빚쟁이가 찾아와 돈을 갚으라고 마구 독촉했다. 견디다 못한 농부는 자신이 가진 단 한 마리의 암퇘지를 팔기로 했다. 그가 빚쟁이와 함께 시장에 나가자 한 손님이 다가와 ‘이 돼지는 새끼를 잘 낳아요’ 하고 물었다. 어떻게든 돼지를 팔 욕심에 농부는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 ‘손님! 이 돼지는 신기하게도 암놈만 낳는 답니다’ 손님이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자 옆에 있던 빚쟁이가 더 큰소리로 말했다. ‘손님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 놈은 동네에 먹을 것이 없으면 염소 새끼까지도 낳는답니다’ 농부와 빚쟁이는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터무니없는 황당한 거짓말을 했다. 이 사회에도 정치권에도 교계에도 자기의 유익을 위해 이치에도 맞지 않는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는 상대방이 어떤 불이익을 당하든지 상관하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한다. 정직하게 살아야 할 그리스도인도 남을 해치지 않는 거짓말 정도는 괜찮다는 생각들이 잠재해 있는듯 하다. 우리는 흔히 자기 합리화를 위해 ‘하얀 거짓말’(White lie) 즉 선의의 거짓말을 한다. 예로 새 옷을 산 친구가 옷에 대한 견해를 물을 때 사실은 그 옷이 마음에 안 들어도 친구의 기분을 생각해 좋다고 대답한다. 상대방의 제안을 거절하면서 그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선약이 있다는 등 핑계를 댄다. 그렇다고 해서 거짓말이 진실이 되지는 않는다. 뿐만 아니라 거짓말이나 거짓된 행동은 그 자체로 끝나지 않고 반드시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거짓의 홍수 속에 파묻혀 정직을 잃어가고 있다. 학생들이 커닝을 행하는 모습 속에서, 일 년 내내 옷을 할인해서 판다는 상인들의 상술에서, 정치하는 위정자들에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에서, 기업인들에게서, 민초에게서 정직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 당장의 귀찮은 상황을 피하기 위해 지킬 생각도 없이 쉽게 내뱉는 약속의 말 속에서 우리는 거짓에 길들어져 간다. 개개인에게서 작게 시작된 거짓의 모습들이 점점 확산돼 더 큰 거짓을 만들어 내고 있다. 진리를 왜곡시킨 수많은 종류의 서적들을 통해서도 경험하고 있다. 고로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에게나 친구에게나 경솔히 약속 하거나 한 말을 어기지 말고 지켜야 한다. 이제 새로운 시작 새로운 결단이 필요하다. 당장은 괴롭고 불편할지라도 거짓을 버리고 정직을 찾아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삶의 참모습이기 때문이다.
    • 칼럼
    • 목회자
    2015-05-28
  • 마틴 루터와 악마(사단)의 이야기
    위대한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중병에 걸렸을때 악마가 그의 침실로 들어왔다. 악마는 승리의 미소를 짓고 그를 내려다 보며 커다란 두루마리를 펼쳐 보였다. 악마가 두루마리의 한쪽 끝을 마룻바닥에 내던지자 감긴 것이 저절로 풀렸다. 거기에는 루터의 죄가 낱낱이 적혀있었다. 루터는 그 길고 무시무시한 기록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그의 단단하던 마음은 소름 끼치는 두루마리 앞에서 잔뜩 움츠러들기 시작했다. 그때 루터의 마음에는 두루마리에 적혀 있지 않는 한 가지 사실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그는 소리쳤다. ‘당신은 한 가지를 빠뜨렸소! 거기에 적힌 것들은 다 사실이지만 당신은 가장 중요한 것을 잊었어!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주신다는 사실 말이요’ 루터가 외치자 그 교활한 악마와 두루마리는 곧 자취를 감추었다. 루터의 마음에는 다시금 평화가 찾아왔다. 또 그는 어느 날 자기의 죄가 생각나서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부끄럽고 창피하고 추하고 더럽고 냄새나고 가증스럽고 온 종일 그 일로 씨름하다가 문득 이렇게 외쳤다. ‘예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 예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 이에 악마는 물러가고 평화를 얻었다. 사실 신앙생활 도중 알게 모르게 악마가 공격해 오는 경우가 있다. 죄를 생각나게 하고 약점을 떠올리게 하며 연약함을 알게 함으로써 우리를 그로기(groggy)상태로 몰아간다. 때문에 영적으로 넘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악마를 대적하기는커녕 자기의 상처를 끌어안고 괴로워하기에 급급한 때가 있다. 과학이 최고로 발달하고 학문이 더 이상의 진보가 없을 정도로 발달했지만 이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악마는 한마디로 영물로써 대단한 능력자이다. 성경 욥기서를 보자. 악마는 잠시 하나님의 허용 안에서 자연을 제 뜻대로 움직일 수도 있고 사람을 질병에 매어둘 수도 있으며 또 사람의 생명을 해할 수도 있다. 그런데 악마가 주로 사용하는 방법은 눈에 드러나게 자신의 권세와 능력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속이는 일을 한다는 것이다. 일례로 에덴에서 자신의 실체를 감추고 하와를 속였고 말년의 경건한 다윗을 속여 음행 죄를 짓게 하였으며 주님의 수제자 베드로를 넘어지게 하였고 우리들 역시 할 수만 있으면 광명한 천사로 가장하고 속이려 하고 있다. 때로는 다른 사람의 입술을 통해 이 같은 일을 한다. 이러한 정죄와 비난과 죄의식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한명도 없다. 만일 있다고 자부한다면 오히려 그가 문제 있는 사람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을 교묘한 방법으로 실수하고 넘어지게 하기도 한다. 우리는 어떠할까? 만일 어떤 일에 실수 한다거나 잘못 하면 우리는 그 실패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는다. 또 어떤 실수를 하거나 문제를 일으키면 문제의 원인을 그 사람에게서 찾는다. 오늘날 이것은 아주 보편적인 문제이다. 허나 사람에게서 어떤 문제를 발견하고 그 문제를 지적하고 잘못을 인정하고 개선한다고 해서 그것과는 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것은 아니다. 심한 경우 같은 문제를 일으킨다. 또 환경을 개선하고 미리 교육 시킨다고 해서 더 이상 문제가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 지식과 교육 수준이 높은 사회일수록 혹은 그런 사람일수록 문제는 더 많고 범죄성도 더 많다는 것이 사실이다. 훨씬 더 교묘하고 악질적인 경우가 많다. 이러한 사실이 교훈해 주는 것은 결국 문제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배후에서 범죄를 저지르게 하는 영적 세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악마이다. 악마는 이처럼 우리들을 교묘한 방법으로 속인다. 고로 우리는 속지 말아야한다. 만일 신앙생활을 잘하다 실수를 했다면 물론 그것은 자신의 문제이다. 하지만 동시에 마귀의 문제이다. 그러기에 자신을 정죄하는 방식으로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실수를 범했다면 그 사람의 문제이지만 동시에 마귀의 문제이다. 만일 우리가 마귀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고 그 사람에게 복수하고 그 사람을 미워한다면 그것 역시 악마에게 속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인간사의 배후에는 악마가 작용한다. 어떻게 악마를 대적하고 물리칠 수 있을까? 우리의 힘으로나 능력으로 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승리할 수 있다. 물론 마귀에 대한 대적을 생각할 때 그 방법으로 기도를 많이 생각 한다. 하지만 성경이 제시하는바 그 보다 더 유용하며 직접적이며 실제적인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아무리 기도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시키지 않으면 마귀를 무력화 시킬 수 없다. 주님을 보자. 주님께서는 당신의 신적인 권능과 기도로써 악마를 제압하기도 하셨지만 더욱 효과적인 방법은 열두 영 더 되는 천군을 동원하지 않으시고 오로지 말씀으로 악마를 물리치시고 무력화 시켰다(마 4:). 초대 교회 사도들과 성도들 역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악마와 대적 자들을 물리치고 무력화시켰다. 오늘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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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자
    2015-05-15
  • 한국 교회가 왜 시들할까?
    기독교가 전파된 지 100년이 지난 한국 교회는 ‘한강의 기적’ 못지않은 기적적인 성장으로 세계 교회의 주목을 받고 있다. 허나 문제는 외적인 성장에 비해 내적인 성장은 미약 하다는데 있다. 한국 교회가 성장을 멈추고 쇠퇴해 간다고 사람들은 우려하고 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의 생활이 물질적으로 안정되고 과학이 크게 발전하여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드문 탓이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일면 타당한 점도 있다. 이에 교회들이 교회 갱신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변화하는 시대에 발맞추어 교회도 변화하지 않으면 도태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회자들이 이곳저곳에서 열리는 세미나에 참석하고 여러 정보들을 수집하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 한다. 물론 이런 노력들은 교회를 살찌우고 교회를 풍성하게 만드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한국 교회가 점점 쇠퇴해 가고 있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자. 먼저 목회자들이 건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의학적으로나 성경적으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리이다. 사람의 몸이 전체적으로 건강하려면 먼저 머리가 건강해야한다.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환경 속에 있어도 머리에 질병이 있고 근심과 스트레스로 고통 받으면 이내 그 몸은 병들고 만다. 반면 마음이 기쁘고 생각이 건전하면 질병도 쉽게 치유되고 건강도 증진 된다. 마치 기관차가 올바로 가려면 먼저 기관차가 힘차게 끌며 올바른 길을 가야 하는 것과 같다. 그러기에 목회자들은 교회 성장의 위기를 곧 자신들의 책임을 일깨우는 말로 받아들여 먼저 스스로 회개해야한다. 즉 지금까지의 윤리, 도덕적인 죄와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모르고 그리스도와 함께하지 못한 세속적인 삶을 회개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필자를 비롯한 많은 목회자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회개 하지 않는다.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징계를 하실 것이다. 다음으로 목회자들이 회개의 복음을 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강단마다 설교는 선포되고 전도는 행해지나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는 일은 아주 희귀한 일이 되었다. 마치 성령의 능력 복음의 능력이 수명을 다한듯한 느낌마져 든다. 성령의 능력은 사라지고 복음은 구시대의 유물과 같이 느껴지고 있다. 원인이 무엇일까? 바로 목회자가 성령의 권능을 의지하지 않고 바른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며 인간의 말을 전하기 때문이다. 사실 많은 목회자들이 자신의 능력과 힘을 의지해서 말씀을 선포하고 또 복음 아닌 인간의 말, 축복의 말, 윤리 도덕 같은 것만을 전하는지 모른다. 이래서는 어떤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 성령의 권능에 의지한 바른 복음이 선포되지 않는 한 교회의 쇠퇴는 불 보듯 명확한 일이다. 오늘도 초대 교회 때와 같은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하려면 목회자들이 인간의 말이 아닌 복음만을 전해야한다. 언행일치의 삶을 살아야한다. 즉 거짓말 하지 말고 진실해야한다. 마지막으로 목회자들이 성도들과 동고동락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에는 정치적, 사회적인 강도, 사단이라는 가장 무서운 강도를 만나 헐벗고 상처받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고통 당하고 있으나 그 누구도 위로해 줄 사람이 없다. 지도자로 자처하는 목회자들은 많아도 이들을 돌보려는 목회자들이 적고 입으로는 사랑을 말하나 자기를 희생하며 이웃을 돌보려는 목회자들이 적은 것 같다. 주님은 목회자들을 향해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10:37)고 명하신다. 목회자들은 지금 가까이 있는 가난한자와 고통 받은 자들을 돕고 함께 동고동락 해야 한다. 톨스토이가 그의 인생론에서 말했듯이 우리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순간은 바로 이 순간이며 또 가장 중요한 사람도 바로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사람이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내 손안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아가고자 한다면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고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고 교훈하였다. 하지만 목회자들은 이와 반대로 살아가기 일쑤다. 곧 악한 일은 지금 당장 하려 하면서도 선한 일은 뒤로 미룬다. 결국 때를 놓치고 두고두고 후회 한다. 목회자들은 지혜를 가져야한다. 그리고 짧은 인생을 후회 없이 살아가는 길은 오직 지금 이 순간에 받은 사명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한다. 미국 남감리회 소속 선교사 V.W.Peters가 조선에 와 선교 할 때 ‘조선 사람들을 잘 지도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부터 조선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농민 속에 뛰어들어 함께 기거하며 양복을 벗어버리고 한복에 버선과 고무신을 신고 살았다. 또한 우리말을 잘했고 무엇보다 조선 사람이 되려면 조선인과 가정을 이루고 살아야 한다며 조선 여자 한용복과 결혼하여 세간에 화제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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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자
    2015-05-08
  •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한 사람
    흠정역 성경의 유래이다. 영국의 왕 제임스(James)는 타고난 술꾼에 말하기도 부끄러운 온갖 악한 습성에 빠진 사람이었다. 게다가 외교적 목적으로 자녀들을 마치 저당물처럼 아무데나 시집, 장가보내는 폭군이었다. 포도주와 여자를 위해서라면 국고를 아까워하지 않는 무절제한 군주이기도 했다. 모든 면에서 왕답지 않은 그를 두고 그린(J. R. G. Green)은 이렇게 묘사한 바 있다. ‘커다란 머리에 침을 질질 흘리는 혀, 천박하게 누빈 옷들, 흔들흔들하는 다리, 희번덕거리는 눈동자, 수다스러운 말투에 있어서 그는 헨리 왕이나 엘리자베스 여왕과는 완전히 대조적인 괴상한 몰골의 소유자였다. 게다가 조잡한 익살과 취태 학자인 척하는 태도며 그 경멸스러운 소심함이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1611년 이 쓸모없는 인간으로 하여금 학자들을 모이게 하고 권위 있는 성경을 완성케 하셨으니 그분의 섭리가 참으로 놀랍다. 당시 완성된 성경은 현재까지 권위 있는 성경으로 널리 읽혀지고 있는 바로 흠정역 성경(King James Version)이다. 그렇다. 누구도 스스로 잘났기 때문에 하나님께 붙들려 쓰임 받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 역시 하나님의 크신 은혜이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 영원히 죽어 마땅한 우리를 사랑하시고 큰 은혜를 주셨다. 헌데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서도 기쁨과 행복보다는 오히려 무거운 생활을 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곧 영적 불감증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자.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아무리 큰 은혜를 베풀어도 은혜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위험과 멸망의 길로 가게 된다. 실례로 성경의 발람을 보자. 그는 이방의 주술사였지만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뜻과 다르게 행하고자 했다. 깨달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나귀조차도 보는 죽음의 길로 갔다. 나귀는 한사코 비켜 가려고 했다. 아니 가기를 거부했다. 하지만 그는 죽음의 길로 자신과 나귀를 몰아갔다(민 22:21~23).영적 감각 깨달음이 없을 때 우리는 잡혀 죽기 위해 난 이성 없는 짐승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존재가 된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해야 된다. 하지만 연약하고 어리석어 믿음이 약해지거나 의지가 꺾이거나 생각이 거룩하지 못할 때가 많다. 늘 입으로는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바란다 하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교만한 마음을 품기 일쑤다. 먼저 하나님께 순복하는 대신 거꾸로 하나님이 축복하시면 순복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은 실로 낮은 곳으로만 흐르는 물과 같아서 이러한 교만한 마음을 지닌 자에게는 절대 임하지 않는다.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과 섭리가 우리의 머리로는 이해되지 않더라도 이미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 하자. 헌데 대부분은 감사에 인색하다. 어떤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특별히 노력하지 않고도 편안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 걸 보면 세상에는 도무지 감사할 일이 없는 것 하기도하다. 그래서 불평만 늘어놓는다. 좀 더 좋은 자가용을 갖고 싶어 하고 더 큰집을 갖고 싶어 하며 더 빨리 더 높이 승진 했으면 한다. 나와 내 가족이 모두 건강하고 살고 있는 집이 있으며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일터가 있고 하나님을 섬기고 있음이 감사하지 않는가? 감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행위로서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고 긍정적인 삶을 살도록 작용하기도 한다. 일터에서 또한 삶속에서 감사의 언어보다는 불평을 더 자주 내뱉지 않는지 자신을 살펴봐야 한다.조용히 마음을 가다듬고 오늘 우리에게 있었던 크고 작은 일들을 정리해 보자. 하나님께 감사할 일을 하나하나 적어보자. 얼마나 많은 감사의 조건이 있는가? 삶속에서 느끼고 경험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감사하지 못한다면 내 자신의 마음이 완악해졌음을 깨닫자. 주님처럼 감사하자. 주님은 공생애 중 머리 둘 곳도 없으셨고 대부분의 밤을 차가운 광야에서 기도로 보내셨으며 때로는 식사거리가 없어 무화과 나무을 뒤지셔야 했다. 이렇듯 사람이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상황 속에서 주님은 언제나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신뢰를 잃지 않으셨다. 보잘 것 없는 보리떡과 생선을 놓고도 감사하셨고(마 15:36), 십자가를 앞에 두신 마지막 식사 때에도 감사하셨으며(눅 22:17,19),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실 때조차 하나님께 영혼을 의탁하는 기도를 드리셨다(눅 23:46). 한마디로 감사 할 수 없는 조건에서도 감사하고 믿는 절대 감사 절대 신앙 이었다. 바로 이러한 모습을 염두에 두며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힘입어 감사하라고 하셨다.
    • 칼럼
    • 목회자
    2015-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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