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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룩함이 상실된 시대
    오늘날 이 세상은 한마디로 ‘거룩함이 상실된 시대’ 라고 한다. 매스컴을 통해서 보도되는 가장 큰 사회적 이슈는 대부분 정직을 잃어버린 자들에 대한 고발이다. 도시의 네온사인은 쾌락을 최고의 가치로 가장시켜 건실해야 할 가정의 남편과 아내를 유혹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가정들이 파산되었거나 파산 되어 가는 악에 대한 반감의 결여가 곳곳에서 한심스럽게 드러나고 있다.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사람들의 감정 속에 이러한 악에 대한 반감을 찾아보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도덕 불감증에 빠져 있기까지 한다. 그래서 자신의 이익과 안위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불법과 부정, 사기, 폭력, 강도, 절도, 살인 등도 묵인하는 경향이 있는데 악에 대한 반감은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지녀야 할 감각이다. 고로 성도들이 지고선이신 하나님과 지속적인 관계를 갖기 위해서는 그 생각이나 행동이 죄와 연결되어서는 안된다. 만일 죄로 물든 생활 속에 거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설 수 없기 때문이다. 고로 성도들은 조금이라도 죄의 성질에 대해 호의를 베풀어서는 안된다. 어떤 것은 전혀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죄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때로는 그것이 죄의 씨앗으로서 조금씩 죄와 친숙하게 되어 멸망하게 한다. 아울러 악을 경계하는 마음과 거룩함을 지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거룩함이 상실된 시대에 살고 있는 성도의 자세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먼저 세상에서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살아야한다. 구약 시대에는 제사장 직분이 따로 있었다. 당시 제사는 오직 레위 지파 아론 계열의 제사장만 집전 할 수 있었다. 만일 제사장 외의 다른 자가 제사를 드린다면 사울 왕이나 웃시야 왕처럼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 하지만 신약 시대에 이르러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제단에서 자기 몸으로 단번에 온전한 제사를 드리신 후, 누구나 스스로 하나님께 제사할 수가 있었다. 말하자면 성도는 누구나 제사장인 것이다. 이에 베드로는 성도를 가리켜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하였고(벧전 2:9)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영적 산제사를 드리라 하였으며(롬 12:1) 종교개혁자 루터는 만인 제사장이라는 교리를 확립하였다(롬 1:17, 히 7:27). 그런데 성도들은 제사장이라고 하면 목사나 사제를 생각하지만 그것은 바른 생각이 아니다. 고로 성도들은 마땅히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 제사장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성도들은 우선 하나님께 헌신된 삶을 살아야 한다. 즉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이 하나님에 의해 철저히 구별된 자들로서 하나님의 전에 머물면서 하나님께 제사하고 분향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던 것처럼 오늘날 성도들도 하나님의 제사장들로서 오직 하나님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 즉 성도들이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서 해야 한다. 학업을 하든, 직장 생활을 하든, 사업을 하든, 정치를 하든 그 궁극의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에 두어야 한다. 다음으로 세상에 대하여 중보자적 삶을 살아야 한다.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의 주요 임무 중 하나는 백성들을 위해 중보 하는 것 이었다. 즉 자신과 백성들의 죄를 위하여 속죄 제사를 드리며 백성들의 간구를 하나님께 전해드리는 역할을 감당하였다. 이러한 제사장의 직무는 이제 새로운 제사장이 된 성도들도 마땅히 행해야 할 일이다. 또한 자신과 가족과 일가친척과 이웃과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끊임없는 중보 기도의 제사를 드려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자신과 가족만을 위하여 기도한다. 기도한다해도 자신이 속한 교회를 위해서만 한다. 이것은 잘못된 태도이다. 이제 신약시대의 제사장들인 성도들은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처럼 소외된 이웃과 나라와 민족과 세계만민을 위해서 중보 기도해야 한다. 끝으로 성도들은 정직한 삶을 살아야한다. 구약 시대에 제사장들이 지도자의 책임을 잘 감당할 수 이었던 것은 그들이 훌륭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이 하나님의 율법에 따른 모범적인 삶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사장이라 할지라도 만일 그들의 삶이 바르지 못했을 때에는 어김없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다(삼상 3:12, 4:18). 이것은 오늘날 제사장인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성도가 아무리 성경을 많이 알고 매일 감사와 찬송과 기도를 많이 할지라도 성경의 말씀에 어긋난 불의한 삶을 산다면 그는 이미 제사장으로 자격을 상실한 것이다.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착한 행실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마5:16). 즉 우리의 행실을 보고 불신 세상의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배하고 영광을 돌리게끔 만들라고 하셨다. 하지만 성도들의 생활은 예컨대 마치 극중의 배우와 같이 살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 이제 우리는 삶을 어느 한 순간이라도 극처럼 만들어서는 안된다. 곧 정직을 버리고 외식된 생활을 하지 말아야한다.
    • 칼럼
    • 목회자
    2016-07-01
  • 기독교인의 성공과 출세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상인에 얽힌 열 개의 두루마리에 관한 전설이다. 예수님 탄생 당시 ‘하피드라’는 어린 낙타지기 소년이 부유한 상인의 딸을 사랑하게 되었다. 하피드는 부유한 상인의 딸 리자에게 청혼하기 위하여 낙타지기라는 비천한 신분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는 위대한 상인인 그의 주인 파트로스에게 상인이 되고 싶다며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보일 기회를 달라고 간청하였다. 파트로스는 하피드에게 새 겉옷 한 벌을 주면서 가난한 동네 베들레헴에서 팔라고 하였다. 하피드는 베들레헴에서 사흘 동안이나 옷을 팔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하였다. 그러나 실패하였다. 결국 고급 새 외투는 베들레헴 근처의 동굴 속에서 갓 태어난 아이에게 주어졌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아기는 바로 예수님이었다. 하피드는 가난해 보이는 갓난아기에게 동정심을 느껴 옷을 주고는 힘없이 주인에게 돌아갔다. 그런데 별 한 개가 그의 머리를 환히 비추고 있었다. 하피드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파트로스는 하피드를 비추면서 따라오는 별을 보고 그것이 그 동안 기다리고 있었던 신호임을 깨달았다. 자신 역시 가난한 청년이었을 때 누군가로부터 받은 ‘성공’을 위한 열 개의 위대한 두루마리’를 물려줄 적임자를 찾았다는 것. 파트로스는 죽기 전 그 두루마리를 하피드에게 넘겨주었다. 하피드는 두루마리의 원칙들을 습득하여 자신의 주인과 같이 위대한 상인으로 성공하였고 큰 부자가 되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목마르게 성공을 원하고 출세를 원한다. 하지만 도대체 무엇이 성공이고 출세인지에 대해 명확한 개념을 갖지 못 한다. 통상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지위, 명예, 권세, 재력을 얻으면 성공이나 출세를 했다고 말 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이렇게 되기 위해서 개인의 능력 외에도 주변의 여건이 많이 갖추어 있다고 생각 한다. 명문 가문이어야 하고 명문 학교를 나와야 하며 특히 지역의 연고를 최대로 이용해야 한다. 한마디로 ‘줄’을 잘 잡아야 성공이나 출세가 수월하다는 것이 사람들의 보편적인 관념이 되어 있다. 이에 사람들은 성공과 출세를 하기 위해서는 모든 수단과 불법적인 행위도 사양하지 않는다. 결국 교회와 사회의 악과 부조리는 이런 잘못된 성공과 출세주의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지역갈등이나 교육문제나 사회 파벌이나 사회 지도층의 부조리는 다 이런 연유에서다. 이런 성공과 출세지상주의가 우리 교회와 사회 발전의 걸림돌이 되어 선진 미래로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다. 성공과 출세는 무엇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성공이자 출세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은 영어로는 ‘Will’ 이고 헬라어는 ‘테레사’ 인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헬라어 ‘테레마’의 동사 ‘테로’는 개역 성경에 원하다(마 8:2), 하고자 하다(마(마 19:21), 소원하다(마 15:28), 기뻐하다(마 27:43) 등으로 번역되어 있다. 정리하면 하나님의 뜻이란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여 하고자 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럼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있으며 그 뜻을 행하고 있을까? 예컨대 지식을 다루는 책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베스트셀러는 어떻게 하면 성공하고 출세하며 부자가 되는가 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들이다. 그래서 이러한 책들 가운데는 ‘줄을 서도 부자 뒤에 서라’느니 심지어 거지 노릇을 해도 부자 동네에 가서하라는 말까지 하며 부자 중심으로 살 것을 권하고 말 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하나님을 거역하면서 권력을 등에 업고 소위 성공하고 출세했던 사람들의 호가호위가 일장춘몽처럼 되어 버리는 것을 보면 인생의 참 성공이나 출세가 아닌 것을 볼 수가 있다. 실례로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을 주님의 재판 장면을 통해서 생각해 보자(요 19장). 이곳을 보면 한 쪽에는 오직 성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고자 무죄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대역 죄인이 되어 재판을 받기 위해 서 있다. 그리고 한 쪽에는 상대가 무죄인 것을 알면서도 백성의 소리와 자기 이익을 위해 무고하신 예수님에게 십자가형을 언도하는 빌라도 총독이 서있다. 그리고 재판이 종결 후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채찍을 맞으며 끌려갔고 빌라도는 총독의 보좌에 앉아 재판에 만족하는 무리들의 박수갈채를 받고 있다. 여기까지만 보면 자기의 뜻과 백성의 소리를 따르는 자는 가장 위대하고 성공한 사람으로 보이며 하나님의 뜻을 추종하는 예수님은 가장 어리석고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후 결말은 어떻게 되었던가? 역사의 기록에 의하면 빌라도는 몇 년 후에 여러 가지 실책에 의해 소환됨으로 총독의 자리에서 퇴진하고 말았고 천추의 역사적 죄인으로 남게 되었다. 반면 끝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던 주님은 이후 부활 승천하셔서 천지 만물의 경배를 받는 귀한 자리에 오르셨다(빌2:9~11). 이처럼 자기 뜻대로 사는 자는 잠시 성공하고 형통하는 것 같으나 실패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는 영원한 생명과 영광을 얻는다.
    • 칼럼
    • 목회자
    2016-06-17
  • 예수님의 희생적 정신을 본받은 사람들
    처치 스트리트 교회를 담임하는 존 벤튼(Jon Benton) 목사의 이야기이다. 존 벤튼의 부친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과 함께 극동으로 파견됐는데 1941년 싱가포르가 일본에 점령되자 포로로 잡혔다고 한다. 그 때 일본군 포로 수용소의 상태는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해 380명 가운데 불과 27명만이 생존해 귀환했다고 한다. 그런데 콰이 강의 다리로 더 유명했던 이 극한의 포로수용소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고 한다. 지옥과 같은 감옥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은 물론 살인마저 서슴치 않던 포로들이 어느 순간에 훔치는 일을 중단하고 오히려 서로의 것을 나누어주기 시작했다는 것.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이 기적은 바로 앵거스 맥길 브레이라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한 기독교인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는 중병으로 죽어가는 동료가 모포를 강탈 당하자 자기 모포를 내주었고 누군가 그 동료의 음식을 훔쳐가자 자기 음식을 주었다고 한다. 그 결과 동료는 살아났으나 결국 앵거스 맥길브레이는 죽고 말았다. 이후 그의 이야기가 수용소 내에 퍼지자 그토록 동물처럼 행동하던 사람들이 감동을 받아 오히려 남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아름다운 천사들로 변했다는 것이다. 이에 도스토예프스키는 ‘자기를 희생하는 것 이상으로 행복한 일은 없다’ 라고 갈파했다. 톨스토이도 ‘죽음의 고통보다 강한 것은 사랑의 감정이다. 헤엄을 못 치는 아버지가 자식을 구하기 위해 물 속에 뛰어드는 것은 사랑 때문이다. 사랑은 나 이외의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라고 했다. 이는 모두 결국 희생적 사랑만이 행복의 근원이라는 성경의 진리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오늘날 주님을 따르는 모든 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바로 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에게 주시는 교훈으로 알면서 진지하게 새겨 볼 필요가 있다. 더구나 이 이야기 속에는 교회 전체의 성장과 발전에 대해서도 중요한 진리가 내포되어 있다. 사실 오늘날의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가장 심각한 도전 가운데 하나는 교회 성장이 정체되거나 심지어 쇠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유럽의 교회는 무너진 지 오래고 세계적으로 기독교의 성장률보다 이슬람교의 성장률이 앞서고 있다. 따라서 폭발적인 성장으로 세계를 놀라게 했던 한국 교회에서 조차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한 현안 문제로 떠 오른지 오래다. 그렇다면 복음의 생명력을 본질로 하여 지금까지 놀랍게 성장해 왔던 교회가 왜 이토록 정체와 쇠퇴의 문제로 고민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바로 필자를 비롯한 많은 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이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과 반대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즉 교회의 지도자들과 성도들이 주님의 희생적 사랑을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장을 멈춘 한국 교회가 새롭게 성장할 수 있는 비결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결코 멀리 있지 않다. 바로 본 이야기의 주인공처럼 주님의 희생적 사랑을 있는 자리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고로 그리스도인들은 지금까지 그리스도인들이 능력을 잃고 교회가 성장을 멈추었던 이유를 그 어떤 먼 곳에서 찾지 말고 바로 우리 자신들 속에서 찾아야한다. 하지만 많은 교회의 지도자들과 성도들이 여전히 이 곳 저곳에서 열리는 세미나에 참석하고 여러 정보를 수집하기 위하여 인터넷을 검색 한다. 물론 이런 노력들이 교회를 살찌우고 교회를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 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모든 노력 이전에 우리는 주님의 본 때문에(눅23:34) 그리고 그분의 명령 때문에(마 18:21~35 골 3:13) 있는 자리에서 주님의 희생적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요일 3:16). 이제 필자는 주님의 희생적인 사랑을 실천한 세분을 소개 한다. 먼저 바나바이다. 그는 주를 영접하고 이미 자기 전 재산을 교회에 희사한 인물이다(행 4:36, 37). 안디옥이라는 요즘 말로 말하면 편하고 물 좋은 대교회 목회를 마다하고 전인미답의 이방 선교에 발을 들여놓은 신앙의 인물이다. 다음 바울이다. 그는 지금까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았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하고 자기가 가고 싶은 대로 다니던 사람이다. 그러한 그가 주님을 만났다. 그는 히브리인이라는 선민의식, 많은 재산, 로마 시민권자로서의 권리, 세상의 모든 지식 등을 배설물과 같이 포기했다. 그것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위해서이다(빌 3:8). 끝으로 50만 명이 넘는 군인, 공무원, 청년, 학생, 각계 각 층의 중견 인사들에게 개척자의 혼과 신앙의 씨를 심었던 고 가나안 농구학교의 김용기 장로라는 인물이다. 그의 위대한 점은 바로 한 가족 11명이 모두 기독교의 희생정신으로 평생 동안 꾸준히 한 길을 걸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그들의 희생정신으로 인해 밥 한 톨 남기지 말라거나 열심히 일하라는 그의 가르침이 전달될 수 있었던 것이다. 고로 이시대의 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은 지금 있는 자리에서 주님의 희생정신을 실천해보자.
    • 칼럼
    • 목회자
    2016-06-10
  • 하나님의 기적
    언젠가 동아일보에 실린 크리스마스의 기적의 이야기이다. 식물인간으로 투병해 온 사람이 돌연 회복했다는 ‘크리스마스의 기적’ 이 미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적이 있다. 그날은 정확하게 크리스마스인 25일 아침 이었다. 16년 반 동안 식물인간으로 지내 온 미국 뉴멕시코 주의 패티 화이트불(42세)의 병실에 간호사가 들어왔다. 간호사가 침대 시트를 갈려고 다가가자 화이트불이 ‘괜찮아요’라고 말을 건넸던 것이다. 뇌사 상태에 빠졌던 환자가 의식을 되찾는 경우는 가끔 있지만 대게는 정신적, 육체적 후유증이 남는다. 화이트불처럼 ‘전기가 나갔다가 들어오듯’ 갑작스레 완벽하게 회복하는 일은 드물다고 미 ABC 방송은 전했다. 기나긴 잠에서 깨어난 화이트불은 어리둥절해 했다. 그녀는 병원 침실에 누워 있는 동안 어느새 40대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26세인 1983년 넷째 아이를 낳기 위해 병원에 들어왔으나 제왕 절개 수술 후 혼수상태에 빠져 식물인간으로서 존재해 왔던 것이다. 부축을 받으며 병상에서 일어난 그녀는 그간의 일을 전해 듣곤, 이내 환자복을 벗었다. 그리고 친정어머니께 안부 편지를 썼다. 나흘 뒤인 29일, 연말연시를 맞은 여느 사람들과 똑같이 쇼핑을 나갔고 저녁에는 처음 얼굴을 보게 되는 넷째 아이를 포함해 자녀들과 남편을 만났다. 가족들은 그녀의 이러한 기적 같은 회복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성탄절 선물이라고 믿고 있다. 그 누가 오랜 세월 동안 누워 있었던 식물인간이 완전히 회복될 수 있다고 믿었겠는가? 이처럼 하나님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사람의 능력과 자연 법칙을 뛰어넘는 기적을 오늘날도 행 하신다. 즉 이천 년 전에 쇠약한 병든 자를 고치신 예수님은 지금도 병든 자들을 치유하신다.(히13:8) 예컨대 한국에 복음이 처음 들어와 오늘날처럼 교회가 성장한 경우만 보더라도 주께서 허락하신 표적과 기사를 통해 역사하신 것을 볼 수가 있다. 대표적인 실례로 김 익두 목사님을 보자. 그는 무려 5천 건 이상의 질병 치유의 이적을 행했다. 또 이기풍 목사도 제주도 선교 초기에 동네 신으로 숭배 받던 큰 뱀을 죽이는 기적을 행했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탁월한 사역을 하는 이들이 많다. 그들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들이 병마에서 해방되고 하나님을 믿고 교회가 갑작스럽게 성장하는 교회들이 더러 있다. 하지만 오늘날 안타깝게도 기적이 그 원래의 목적을 잃은 채 비복음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주께서 주신 기적을 통해 복음을 전하기보다는 자신의 배만 불리려 하는 사람들이 있다. 복음 증거를 위해 주어진 능력을 자신의 것으로 가로챈 것이다. 밝히 드러나야 할 복음은 사라지고 오직 인간만 남아 높아지려 하는 것이다. 모두가 그렇지 않겠지만 매스컴 보도에 의하면 실제로 ‘성령 치료’나 ‘신유 집회’ 라는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일부 음성적인 기적의 행위들이 돈이나 명예와 같은 불손한 목적들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도들 조차 누군가에 신비한 지혜와 병 고치는 은사가 있다면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마음이 혹하여 넋 놓고 맹목적으로 따라 다닌다. 여기 있어서는 많이 배웠다고 하여 예외가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많은 지혜가 그 사람을 속여 더 쉽게 헛된 지혜에 빠져들 수도 있게 한다. 고로 성도들은 병 고치는 능력이 있고 신비한 예언의 은사가 있다고 소문만 듣고 무조건 좇아가면 안 된다. 능력을 행하는 이들 중에는 사단의 영을 받고 능력을 행하는 이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사단은 성도들을 미혹하기 위해 그의 하수인에게 역사하여 기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런즉 우리는 기적의 현상보다 그 기원이 중요함을 깨달아 기적을 행하는 사람들의 실체를 파악하고 그가 사단에 속한 자라면 절대 경계하고 멀리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기적의 기원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기적을 행하는 사역자들에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삶이 있는지를 보면 된다.(마7:23) 그들의 삶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순종의 삶이 아닌데도 능력을 행한다면 그들은 분명 거짓 선지자이며 노략질 하는 이리에 불과 하기 때문이다.(마7:15~18) 즉 열매로 나무를 아는 법이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에게는 분별 곧 열매를 통해 악한 것에서 온 것과 선한 것에서 온 것을 구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즉 원숙한 농부가 그 열매를 따라 악한 나무와 선한 나무를 가려내듯 성도들은 늘 영적인 눈으로 그 열매를 따라 냉철하게 검증해 보는 성숙함과 지혜를 가져야한다. 따라서 세상의 사람들처럼 누군가 엄청난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다고 하면 무조건 몰려가 추종하는 무지와 어리석음을 버리고 참된 복음을 전하는지의 여부에 더 깊은 주의를 기울여야한다. 나아가서 개인적인 신앙생활에서도 이적과 기사가 신앙의 기초가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이런 측면에서 어느 특정 기도원 또는 특수한 집회를 선호하는 것보다 내가 섬기고 있는 지역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고 봉사하는 것이 훨씬 더 바른 신앙 자세라는 것을 유념하자.
    • 칼럼
    • 목회자
    2016-06-01
  • 한국 여성의 거룩한 가정 사역
    ‘가장 아름다운 손’ 이라는 이야기이다. 명절을 맞아 자녀들이 부모의 집에 모였다. 식사를 마치고 이런 저런 얘기를 하던 중 누구의 손이 가장 예쁜가에 관심이 모아지게 되었다. 너나 할 것 없이 자기의 손이 제일 예쁘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각자 손을 보인 후 투표를 해 가장 아름다운 손을 선정하기로 했다. 큰딸부터 막내까지 메니큐어를 바른 길고 고운 자기의 손을 자랑스럽다는 듯이 내놓았다. ‘자 어머니도 손을 보여 주세요’ 모든 자녀들이 어리광을 부리듯이 말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웃으시면서 말했다. ‘얘들아 내 손은 늙어서 쭈글쭈글하고 흉해서 너희들의 손과 비길 수가 있겠니? 그만 두자꾸나’ 그래도 자녀들이 자꾸만 졸라 어머니는 할 수 없이 손을 내밀었다. 쭈글쭈글 한 손등, 거칠어진 손마디, 닳아 없어진 손톱, 그것은 몹시 흉한 손 이었다. 자녀들의 매끄럽고 고운 손과는 아예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딸들은 일순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께서 조용히 말씀하셨다. ‘그렇다. 이게 너희 어머니의 손이다. 너희들을 기르기 위해 온갖 고생을 다 한 손, 너희들을 먹이고 입히기 위해 봉사한 사랑의 손, 그러나 저 마디마디에 맺힌 어머니의 사랑을 너희들은 외면하는 구나’ 아버지의 말씀을 들은 자녀들은 숙연해졌다.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투표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 종이를 펴자 거기에는 한 결 같이 이렇게 써 있었다. ‘어머니의 손’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 이었다. 그렇다.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집안 일을 해온 어머니의 손만큼 아름다운 손은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실은 여성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 보자. 요즘 서구에서는 자녀는 낳되 결혼을 통해 가정을 갖는 일을 기피하는 젊은이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또 최근 미국에서는 여성 해방론자들의 모성 아니다(Maternity no) 라는 현수막이 심심찮게 걸리고 결혼과 가정을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오지 못하는 알콜 중독으로 표현하는 여성들이 점차 늘어가고 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남편에 대한 여성의 순종을 마치 노예 도덕으로 생각하여 한국에서 이민을 간 여성들 까지 이를 거부하는 경향이 늘어 미국에서 목회하는 어느 목사님은 한국 젊은이들의 결혼을 주례하며 신부가 아내의 순종을 서약하는 부분을 빼달라고 해 몹시 당황했다는 이야기 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같은 현상은 비단 서구나 미국만의 일이 아닐 것이다. 우리사회에도 이미 오래 전부터 있어 왔기 때문이다. 남자들 사회에서도 ‘집에 가서 애나 보라’ 는 말은 그 사람의 무능과 무가치함을 상징하는 말이 되었고 당사자인 여성들도 집안일을 하라고 말하면 내가 집 안 일이나 할 정도의 여자로밖에 안 보이느냐고 화를 내기 일쑤라고 한다. 하지만 여성들이 집안일을 천시하는 것 심각한 오해이자 가정을 만드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고로 이제 우리 여성들은 말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와 섭리가 담겨져 있는 출산과 육아에 대한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예컨대 출산만 하더라도 의사들의 말을 빌리면 태아의 뼈의 개수가 성인의 그것에 비해 약 1/5 정도가 많다고 한다. 좁은 어머니의 산도를 빠져나오기 위해 많은 뼈가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산도를 빠져나오면 다시 서로 붙어 그 숫자가 줄어든다는 것이다. 또 이렇게 태어난 아기는 불과 한 시간도 못되어 얼굴을 엄마한테 돌리는데 이 때 산모의 유방에서는 초유라는 것이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명 황금의 액체로 불리는 이 초유에는 갓 태어난 아기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성분을 담고 있어 이를 먹이면 태변이 쉽게 배출되어 유아 황달도 예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후의 면역력도 놀랍게 증가된다고 하는데 이것은 결코 우연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고로 오늘날 젊은 여성들은 출산과 육아를 비롯한 모든 가정 일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되는 것이다. 또한 남자들의 대부분이 결혼 후에 심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게 되는 것을 볼 때, 그리고 자녀들에 대한 어머니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어쩌면 가정의 실질적인 중심은 여성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따라서 가정을 경제적으로 꾸려가고 지혜와 정성이 담긴 식단으로 가족의 건강을 도모하여 홈스쿨링(Home schooling)개념을 도모하여 자녀들을 효율적으로 교육하는 것과 여기에 더하여 올바른 믿음까지 전해주는 일 등 가정을 돌본다는 것은 전문가적 관점에서 보면 ‘그깟 집안 일’이 아니라 오히려 거룩한 가정 사역(home ministry) 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그러기에 이 세상의 여성들은 결혼하여 가정을 돌보는 일이야 말로 여성에게 주신 거룩한 직분이요, 하나님의 소명임을 기억하며 가정 사역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할 것이다. 진리와 사랑으로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가정은 복음에 대한 또 하나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 칼럼
    • 목회자
    2016-05-20
  • 한 젊은이의 효성
    옛날 비엔나에서는 죄수들에게 감옥에서의 복역대신 시에서 청소부 일을 하게 하였다. 어느 날 수상이 우연히 창밖을 보다가 훌륭한 옷을 입은 젊은 남자가 눈을 쓸고 있는 청소부에게 다가가 그의 손에 입을 맞추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수상은 그 청소부가 위험한 살인범인지라 젊은이는 분명 그 부하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당장 젊은이를 불러 들여 죄수인 청소부에게 한 행동을 설명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러자 젊은이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각하! 그 분은 저의 아버지 이십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수상은 살인범으로 청소부가 된 아버지에게 대해 조금의 부끄럼도 갖지 않고 공경하는 젊은이의 효성에 감동하여 이 일을 황제에게 아뢰었다. 황제 또한 이토록 자식을 훌륭히 교육시킨 사람이라면 근본적으로 나쁜 사람은 아닐 것이라고 여겨 그 죄수를 즉시 석방시켜 주었다. 젊은이의 아버지를 공경하는 마음이 아버지에게 자유를 찾아 드린 것이다. 실로 부모님에 대한 공경심이 사라져 간다고 말한 요즈음 그리스도인들도 본 예화의 젊은이와 같이 비록 못 배우고 나쁜 부모라 할지라도 공경해야 함은 물론이다. 요즈음 신문지상이나 방송을 통하여 황당한 이유로 부모를 구타하고 살해하는 기사를 종종 접하게 된다. 예컨대 남자 친구와 결혼을 반대하였다는 이유로 부모를 살해하고 심한 경우 평소 포악한 아버지를 오누이가 합세하여 살해했다는 이야기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갖가지 불효의 모습을 우리는 쉽게 접할 수 있다. 부모의 말을 거역하고 애먹이는 것도 불효막심한 녀석이라고 손가락질을 받건만 하물며 아비 어미를 때리거나 경이 여기거나 살해한 자식은 마땅히 패륜아로 정죄되어야 할 것이다. 고로 부모님을 홀대하고 불손하게 대하는 것은 배은망덕한 일일뿐만 아니라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계명에 불순종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 부모 공경은 인간적인 윤리의 차원을 넘어서 그분이 주신 명령인데(출 20:12) 이는 하나님이 자녀들에게 주신 천륜으로서 인간의 힘으로는 끊을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결정해 준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에 조건을 붙일 수 없다. 특히, 여기에 더하여 자녀들이 부모를 닮은 모습으로 출생한다는 사실에는 매우 깊은 뜻이 담겨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 하나님에게 절대 순종해야 하듯 자녀들은 부모에게 조건 없이 순종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의 제5계명을 통해 부모를 공경할 것을 말씀하시며 어떠한 조건도 붙이지 않으셨다. 즉 부모가 어떠한 모습이라 할지라도 자녀들은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녀들이 부모에게 조건 없는 순종을 해야 하는 이유는 자녀를 향한 부모의 사랑에 조건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부모치고 자녀에 대한 사랑에 조건을 붙이는 부모는 없다.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도 자식 생각이 나면 목이 메이고 당신들은 굶어도 자녀의 입에 음식이 넘어가면 배불러하며 자녀가 아프면 당신의 아픔보다 더 괴로워 한다(삼하 12:15, 16). 또한 자녀의 실패는 곧 당신의 실패요. 자녀의 성공은 곧 당신의 성공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심지어 세상이 모두 범죄자라고 부르며 배척하는 자식일지라도 부모만큼은 그를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처벌받은 자의 싸늘한 시신을 두고 가장 처절하게 우는 이는 부모님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부부 일심동체라고 하지만 부모와 자식은 이보다 더하다고 할 것이다. 고로 자녀 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부모님을 모실 때 최선을 다해 섬기며 어떤 조건을 달지 말고 공경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일이 아니라면 설혹 당장은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순종하는 것처럼 그 뜻을 따라야한다.(창22:1~10) 더불어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과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 곧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이요.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부모님을 당신의 대리자로 자녀들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부모님을 당신의 대리자로 자녀들에게 주시고 그 부모님을 공경하게 하심으로써 당신의 백성 된 자녀들로 하여금 당신을 공경하는 법을 배우게 하셨으며 또한 그들이 그들의 부모님을 얼마나 공경하는 지를 통하여 그들이 당신을 얼마나 공경하는 지를 판단하려 하셨던 것이다. 고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공경한다면 반드시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공경하면서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는 일은 결코 있을 수가 있을 수가 없다. 생각해 보자. 어떻게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신 계명을 지키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또 어떻게 눈에 보이는 부모님조차 공경하지 못하는 자가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공경한다면 또한 부모님을 공경할 줄도 알아야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심정으로 최선을 다해 부모님을 섬겨야한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공경하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을 잘 섬기는 방법이기도 하다.
    • 칼럼
    • 목회자
    2016-05-11
  • 현대인들의 게으름과 나태
    너무 게을러 옴짝달싹도 하기 싫어하는 장인어른을 모시고 사는 사위가 있었다. 사위는 얼마 동안은 그런대로 잘 참고 견디었으나 살림은 더욱 어려워만지고 갈수록 게으름이 심해지는 장인을 보자 몹시 울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장인을 땅 속에 묻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나무를 베어 관을 만든 다음 장인을 덥석 들어다가 관 속에 넣었다. 그리고는 아내의 만류에도 아랑곳없이 묘지로 향하고 있을 때였다. 이 소문을 들은 동네 어른 한 분이 그의 뒤를 쫓아와서는 ‘젊은 양반! 그래서야 쓰나? 자 그만 집으로 돌아가세. 여기 옥수수 두 자루가 있으니 우선 집으로 가 자네 장인어른 시장기나 면해 드리게’ 라고 말했다. 이때 관 속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장인이 고개를 빼꼼 내밀면서 물었다. ‘이보게! 그런데 그 옥수수는 껍질을 벗긴 건가?’ ‘안 벗긴 걸세’ 그러자 장인은 관을 꽝 덮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얘야, 그냥 가자’ 오늘날 일하기 싫어하며 노는 것과 잠자는 것을 즐겨하는 게으른 사람들의 결과를 풍자하는 이야기이다. 게으른 자의 공통적 특징은 매사에 의욕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일할 의욕도 없고 심지어 음식을 앞에 놓고도 입에 떠 넣기조차 싫어한다. 한 마디로 ‘게으르다는 것’은 자기만족에 빠져 더 이상의 수고를 하기 싫어하는 상태를 말한다. 실례로 헬리 훼월리(Henry)는 현대인들의 게으름과 나태를 이렇게 지적했다. ‘오늘날 부모와 아이들은 명령하고 순종하는 데에 너무나 게으르고, 교사와 학생들은 가르치고 배우는 일에 너무나도 나태하며, 제사장과 선지자들은 영감을 주는 일에 너무나 맥이 빠져있고... 의사, 작가, 청소원 등의 직원들은 자기 일을 지겨워하여 매사가 대충 대충이며, 성도들은 너무나도 무기력하고 늘어져서 담대히 증거 하지 못한다’ 또 어떤 분은 이러한 현상을 말하기를 ‘이는 비단 서구뿐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더욱 심각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에 기강이 풀리고 윤리 관념이 무너지며 사회 각 분야에서의 질서가 문란해지는 ‘도덕적 해이’(Morar hazard)가 우리 사회에 깊숙이 퍼져 있다. 때문에 지식인들은 바로 몇 해 전 에 일어났던 IMF 위기의 주원인이 바로 이러한 질병 때문이었다고 이구동성으로 진단하고 있다. 또한 이 고질병은 해외에 나간 이민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즉 이민을 간 한국인들은 처음에는 유대인이 무색할 정도로 악착같이 일함으로써 때로는 유대인(Jew)에 빗대어 큐(Kew)란 소리까지 들었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 경제적인 여유가 생기면 이내 풀어져서 술과 도박 등의 사치와 낭비를 일삼다가 결국 신용 불량자가 되거나 부도를 내고는 이리저리 피해 다니는 신세가 되고 만다. 물론 모든 이민자들이 이렇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심심치 않게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반면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이러한 질병의 징후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심각한 것은 세상의 많은 사람은 물론 많은 그리스도인들까지도 이 게으름과 나태가 얼마나 치명적인 질병이며 죄인가를 거의 의식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주님의 달란트 비유에서 보듯 게으름과 나태는 죄악이다. 일리가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적 게으름과 나태에 대해서 아주 심각하게 경고하셨다(렘48:10, 잠21:25). 고로 영적으로 게으름을 피우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생활에서 게으름을 피우는 것은 당장 현실적으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초래하기에 아주 민감하게 여기면서도 영적 게으름과 나태는 당장 큰 손해가 나타나지 않는 것 같아 둔감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즉 기도하는 것은 몇 날을 쉬어도 숨이 끊어지지 않기에 괜찮다고 생각하고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영혼에 힘을 얻는 것을 쉬어도 육적인 식사로 배고픔을 느끼지 못하기에 그것에 그리 비중을 두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영적 게으름과 나태의 습관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영적 성장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고로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강력한 ‘신앙의 스태미나’(stamina)를 가져야 한다. ‘스태미나’란 원래 라틴어로 운명의 세 여신이 뽑는 실 곧 인간의 수명을 의미하는 스타맨(stamen)의 복수형 이었다. 오늘날에 들어서는 정력, 지구력, 체력, 끈기 등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이를 종합하면 ‘스태미나’란 어떤 에너지를 끝까지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요즘 사람들은 이 ‘스태미나’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즉 ‘건강 스태미나’를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고 있는 모습을 생활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신앙 스태미나’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즉 ‘신앙 스태미나’를 위하여 어떤 노력을 하고 있으며 신앙에 영양을 공급하는 말씀을 먹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또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려고 신앙 훈련을 계획하고 그 훈련에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고 있는가 말이다. 우리가 육체의 쾌락을 따라 술 마시고 담배 피고 기름진 것을 맘껏 먹으면 건강 스태미나가 무너져 이길 힘이 없듯이 육체의 즐거움만을 좇아 산다면 우리는 좋은 ‘신앙 스태미나’를 갖추지 못한 채 늘 영적인 문제로 고민하다가 결국 하나님과 소원하게 되어 신앙을 저버리게 될 것이다.
    • 칼럼
    • 목회자
    2016-04-28
  • 결혼과 이혼
    몇 년 동안이나 수다스러운 아내의 심한 잔소리를 참아 낸 유순한 유대 랍비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자제력에 대해 감탄하였다. 어느 날 친구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네 인내심은 참으로 대단 하군. 내가 만약 자네의 입장에 있었다면 나는 당장 아내와 이혼하고 말았을 걸세. 그녀가 지금 마을 사람 모두에게 얼마나 욕을 먹고 있는지 아는가?’ 이 말을 들은 랍비는 친구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임에 틀림이 없어. 만약 내 아내가 어느 인내심 없는 남자와 결혼했다면 어떻게 되었겠나? 그녀는 이혼을 당하고 말았을 걸세. 그러기에 그녀를 참아 낼 수 있는 나에게 그녀를 주신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일세’ 이 이야기는 결혼에 관계된 하나님의 섭리를 약간의 재치를 섞어 설명한 유대 전승 기록이다. 요즈음 우리 사회에는 서구에서 유행되고 있는 문란한 성(sex)개방화와 성의 상품화로 인하여 음란한 풍조가 넘쳐나고 있다. 일부 TV에서 방송되는 저급한 프로그램, 포르노, 잡지와 같은 저급한 신문들 그리고 인터넷에서까지 음란한 내용들이 홍수를 이르고 있다. 이러한 세상의 음란한 풍조에 동조하여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총의 하나인 가정을 자신들의 자유를 구속하는 것으로 여기고 이혼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한례로 어떤 통계에 의하면 현재 한국의 이혼율이 약 33%에 육박 한다. 성도들의 이혼율도 약 24%나 된다고 한다. 성도 중에서 결혼한 네 쌍의 부부 중 한 쌍은 통계적으로 이혼의 아픔을 겪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죄악도 높이 쌓여가고 있다. 성도들은 이런 세상 풍조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서로 이혼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일을 해야 한다. 물론 성도들이라고 전혀 이혼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불신 배우자가 종교적인 이유로 이혼을 요구할 경우에는 불가불 이혼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성도는 이런 경우에도 할 수 있으면 이혼을 피해야한다. 고로 성도들은 이혼 풍조가 만연한 이 세대에서 영육 간에 성결을 유지하기 위해 이혼을 예방하는 일에 힘써야한다.부부간의 이혼 예방의 방법은 무엇일까? 먼저 상호 존중해줘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아니하므로 돕는 배필을 지으셨다.(창2:18) 고로 지금의 배우자가 나에게는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최선 최적의 배우자 임을 믿고 서로 존중해주고 섬겨야한다. 다음으로 어려움을 함께 극복하는 법을 배워야한다. 결혼이란 각자 자라온 환경이 다르고 받아온 교육이 다르며 성격이 다른 사람끼리의 결합이다. 고로 각자의 취향이나 생각만 주장한다면 가정이 성립될 수 없다. 서로 인내함으로 한 공통점을 찾아서 양보하며 살아야 한다. 끝으로 주님의 아가폐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해야한다. 부부간의 열정도 점점 식어져 서로 권태를 느낄 때가 있다. 이에 시간이 지날수록 사랑하는 사이가 아닌 형식적으로 부부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경우에도 주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서로 사랑해 줄 수가 있다. 어떤 조건이 있는 사랑이 아니라 바로 주께서 우리를 사랑한 그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야 다툼이 없고 불만이 없고 불화가 없다. 하지만 이혼을 하면 인생이 두 동강나게 된다. 성도들은 장난이라도 이혼을 내뱉어서는 안 된다. 도리어 주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배우자를 존중하고 서로 양보하며 인내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행복이 넘치는 작은 천국으로 만들어야 한다.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을 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결혼 생활에서 아무런 즐거움을 얻지 못했다. 남편은 그녀로 하여금 매일 5시에 일어나 아침 식사를 준비하도록 했고, 정확히 6시에 아침을 먹을수 있도록 다그쳤다. 남편은 빈틈없는 복종을 원했다. 그녀는 언제나 남편의 시중을 들어야 했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시간은 남편을 위한 시간으로 꽉 짜여져 있었다. 남편이 즐거워하고 만족해 할수록 그녀의 인생은 점점 더 비참해져 갔다. 그러다가 남편이 갑작스럽게 죽고 말았다. 그녀는 슬픔보다는 자유로움을 느꼈다. 몇 년 후 그녀는 재혼을 했다. 이번에는 그녀가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새 남편을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 식사를 준비하고 빈틈없는 시중을 들었다. 그녀는 하루 종일 남편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하고 생각했다. 남편이 만족해 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녀 또한 더욱더 행복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낡은 종이 뭉치를 정리하다가 그녀는 우연히 전 남편이 메모해 놓은 종이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전 남편이 그녀를 복종시키기 위해 정해 놓은 엄격한 규칙들이 있었다. ‘5시에 일어날 것, 정확히 6시에 식사 시중을 들것... ’ 그녀는 여러 번 되풀이하여 읽고 또 읽었다.
    • 칼럼
    • 목회자
    2016-04-16
  • 군중 심리를 따라서 사는 사람들
    오늘날을 가리켜 민주주의 시대라고 말 한다. 그리고 이 시대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은 소위 ‘다수결’의 원칙이라고 불리 우는 다수 여론이다. 이에 이 시대에는 절대적인 원칙이나 진리보다는 다수의 여론이 모든 것을 좌우하고 결정하는 것이 보통이다. 때문에 어제까지 검다고 말해지던 것이 오늘 어느 강한 지도자나 어느 단체가 희다고 말하고 이에 따라 다수의 사람들이 동조하면 그것이 곧 법이요 진리가 되고 만다. 이 같은 구조적인 악, 다수의 횡포 등은 우리가 매일 같이 눈으로 보고 몸으로 부딪혀 가며 절감하고 있다. 하지만 다수의 결정 사항에 소수의 무리가 이의를 제기하거나 불복종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소수자들은 불안하고 두려워 분명한 삶의 목표도 없이 군중 심리를 따라간다. 그것이 때로는 편하고 안전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쉽고 편안한 길 그래서 많은 사람이 가는 길은 언제나 하나님의 진리나 정의나 자유 일 수는 없다. 이에 라인홀두 니버(R. Nibur)는 경고 하기를 ‘개인적으로는 도덕적이면서도 사회 전체적으로는 부도덕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실례로 히틀러 시대의 광기는 바로 절대 다수의 과격한 군중의 목소리가 소수의 양심의 목소리를 압박하고 소멸시킨 결과에 따른 것 이었다. 그리고 다수를 무기로 하여 압박하는 형국은 오늘날에도 결코 드물지 않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타락한 본성을 지닌 존재이기에 집단적 목소리를 통하여 ‘자기 편’에 속하지 않는 소수를 압박하며 괴롭힐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특히 진리, 정의, 자유에 관해서 더욱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오늘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옳고 그른 것인가를 따져 보기도 전에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니까 괜찮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그릇된 길로 가고 있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 묻지 않고 그저 사람들이 많이 몰려가는 곳으로 가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언제든지 하나님의 진리, 정의, 자유의 길은 좁고 험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피하려고 한다. 그들은 이왕이면 좀 더 편안하고 수월한 길로 가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세대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자세는 무엇일까?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말씀과 예리한 영적 통찰력을 통해 참과 거짓을 분별해 내며 자신이 속한 교회, 총회, 정당, 단체가 어떤 결정을 내렸다 하여 그것이 불의함을 알면서도 비굴하게 침묵한 채 좇아서는 안 된다. 그리고 악한 권세 자들이나 어떤 단체가 감언이설이나 협박 공갈 등으로 소위 희생을 강요할 때 아무리 다수의 의견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정의롭지 못할 때에는 사람들의 눈치나 살피면서 행동하지 말고 용기 있게 ‘아니오’(No) 라고 외칠 수 있어야한다. 개개인의 비겁한 침묵은 다수에게는 만족스러운 동의로 간주되고 각 개인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무시하지 않는 것은 곧 다수에게 있어서는 화합의 증거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 사회는 그 어느 나라 보다 많은 교회와 성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패는 극에 달하여 이 사회는 날마다 들려오는 소식은 악한 것들이다. 이에 외국인들로부터 ‘ROTC(Repubilc of Total Corruption)공화국’이라는 조롱을 받고 있다고 한다. 즉 총체적 부패 공화국 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오명을 뒤집어 쓴 것은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불의를 간과하고 묵인하기 때문이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창조적인 소수로 살아야한다. 세상은 겉으로 보기에는 언제나 다수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고 움직이며 유지되는 것 같아도 실상은 하나님의 뜻과 의를 좇는 창조적인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유지되고 발전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창조적인 소수의 사람을 보자. 교회사를 보면 바운티의 하극상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 사건은 1787년 타이티를 떠나 영국으로 향하던 배안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즉 남태평양의 낙원 같은 섬 타이티를 잊지 못해 영국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고 배안에서 반란을 일으켜 다시 타이티로 향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근처의 파치린이라는 작은 섬에 도착했다. 이후 타고 온 배를 불태워 버리고 그야말로 10년이라는 세월을 술을 먹고 서로 싸우고 죽이며 자살하는 등 그 섬은 불신앙과 범죄만이 판을 치는 생지옥이 되었다. 그 후 다른 승무원들은 모두 죽고 에드어드 영과 알렉산더 스미스라는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는데 그들은 어느 날 배 안에서 성경을 발견하고 읽기 시작했다고 한다. 얼마 후 신약 성경을 다 읽었을 때 그들은 죄를 깨닫고 회개하였다. 이 후 섬은 완전히 변했다. 즉 그들은 섬의 아이들에게 성경을 읽어주며 폭력으로 대하던 여자들을 섬기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꼭 18년 후에 그 섬을 지나던 배의 선장은 보스턴으로 돌아와 이렇게 보고 했다고 한다. ‘나는 그 섬에서 참으로 경건한 공동체를 보았다.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그들처럼 선하며 평화에 가득 찬 사람을 본적이 없다’
    • 칼럼
    • 목회자
    2016-04-06
  • 지도자들의 권력의 오남용과 책무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은 20세 때에 왕위에 올랐다. 그는 재위 기간(B.C. 336~323) 중에 그리스와 페르시아 등 근동 제국을 정복해 대제국을 수립했다. 그리고 복종하지 않고 끝까지 반항하던 그리스의 테베시를 철저하게 파괴해 버렸다. 그는 전쟁이 끝난 후 시민들의 동향을 탐색하기 위해 테베시 출신의 저명한 철학자인 크라테스(B.C. 365~285) 라는 사람을 불렀다. 그리고 제안 했다. ‘만일 그대가 원한다면 파괴된 테베시를 재건해 주겠다.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크라테스는 그의 말을 듣자 말자 그 제안을 무시해 버렸다. ‘전혀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열심히 재건해 보았자 또 다른 알렉산더 같은 사람이 와서 파괴해 버릴테니까요?’ 알렉산더는 독재자였고 전쟁에서는 영웅이었으나 그러한 알렉산더도 시민들의 마음은 사로잡을 수가 없었다. 권세자의 칼은 일시적으로 사람의 무릎은 무력으로 꿇게 할 수 있어도 사람의 마음은 사로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사람의 마음은 권력의 힘으로 사로잡을 수가 없다. 이에 아브람 링컨은 ‘일단 시민들의 신임을 상실하면 두 번 다시 그들의 존경을 얻지 못하게 된다’라고 말했다. 고로 지도자들은 이 말을 주의해서 들어야 한다. 한두 번은 소수의 지도자가 다수의 회중을 소외시킬 수 있다. 지도자의 우월한 위치에서 사람들에게 횡포를 부리고 제압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것은 잘못이다. 일단 다수의 신망을 잃고 나면 역전의 상황이 벌어진다. 다수에 의해 소수의 지도자의 소외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도 얼마나 많은 권세자들이 독재의 칼을 쓴 결과 뒤끝이 좋지 않는 상황에서 권좌에서 물러나고 있을까? 오죽하면 ‘권불십년’ 이라는 말을 했을까? 그러기에 공직에 있거나 또한 교회의 행정과 정치를 담당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모든 권세를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해야한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서든지 다수의 대중을 소외시키는 일을 하지 말아야한다. 흔히 ‘군중은 어리석다’ 라는 말을 많이 한다. 바로 이것 때문에 많은 지도자들이 독선과 아집의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군중은 어리석은 것 같으면서도 어리석지 않는다. 어리석다가도 깨어나는 것이 군중이다. 지도자가 권력을 남용할 때 결집된 힘으로 지도자를 순식간에 소외 시킨다. 예컨대 폭력으로 정권을 잡는 독재자들의 최후를 보자 온전히 제 명대로 산 사람들이 별로 없다. 또 무력으로 다른 나라를 점령한 나라도 마찬가지다. 그들도 새로운 세력에게 정복되어 멸망하고 말았다. 고로 지도자들은 무력으로 무엇을 이루고자 폭력의 칼을 들어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바른 지도자는 어떠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자. 먼저, 공의를 말하고 실천해야한다. 옛말에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말이 있다. 이는 누구보다도 이 사회의 지도자요 권세자들이 먼저 정직하게 공의를 실천해야 그 사회가 공의롭게 될 수 있음을 잘 나타내 주는 말이다. 고로 성도로써 국가나 공동체를 운영하는 이들은 정말 정직하고 바른 사람이 되어야한다. 먼저 자신의 이익보다도 사회의 기강과 정의를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해야한다. 또 소수자들의 소리를 경청해야한다. 세상 역사에는 소수의 소리를 경청하지 않아서 실패한 위정자들이 많다. 고로 지도자는 다소 소수의 소리가 싫더라도 껄끄러운 소리 비판과 반대하는 소리를 경청해야한다. 왜냐하면 위정자가 귀를 닫으면 자신의 악한 뜻만을 고집해 귀머거리 독사처럼 위험해 지기 때문이다. 고로 지도자들은 밑에서 정리되어온 좋은 소리만 듣지 말고 소수의 소리에 귀를 열어야한다. 아울러 편벽이 없어야한다. 문자적으로 한 쪽만을 의도적으로 높이기 위해 다른 한 쪽을 편파적으로 낮춘다는 의미이다. 요즘처럼 학연, 지연, 혈연에 따라서 요직에 발탁하고 실수도 눈감아 주며 부정도 모르는 척하는 이 세대 속에서도 우리 성도된 자들은 편벽이 없어야한다. 즉 차별이 없어야 한다. 이와함께 섬기는 철학을 가져야한다. 이 세상에는 권리만 있고 책임은 없는 그렇게 편한 직분은 없다. 권리가 있는 곳에는 항상 책임이 존재 한다. 그런데 불의한 지도자들은 권력을 권리로만 알고 책임보다는 축재의 도구로 이용하려든다. 하지만 바른 위정자나 또는 지도자가 되려면 섬김의 철학을 가져야한다. 남 섬기는 종의 도야말로 이 세계를 새롭게 만들 수 있는 위대한 힘이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섬김 받기를 좋아하는 것이 사실인데 지도자들이 가져야 할 정신은 섬기는 것이다. 그리고 권력의 자리를 섬김의 자리로 인식해야한다.
    • 칼럼
    • 목회자
    2016-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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