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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럽의 교회와 한국 교회
    한 세기 교회 부흥을 이끌었던 오늘날 유럽의 교회 쇠퇴는 우리에게 경각심을 일깨워 주고 있다. 유럽에는 어느 도시 마을에든 위엄 있고 고풍스런 건물이 우뚝 솟아 있다. 바로 이 건물이 교회라고 하는데 그 장엄함과 화려한 장식 때문에 세계의 많은 관광객들이 그 건물에 감탄하여 사진을 찍고 내부를 둘러 건축 양식이나 조각품이나 미술품의 정교함을 음미 한다고 한다. 그로 인해 유럽의 교회들은 관광 자원으로서 독특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한 지역을 알리는 엽서나 작은 그림에서 또는 관광 가이드 책자에서 교회의 모습을 볼 수가 있는 것은 그 때문 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것이 교회의 사명의 전부일까? 관광코스에서 빠질 수 없는 곳이 되어 수익을 올리는 것이 진정 사명일까를 생각하게 되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저 유럽의 교회들은 왜 이렇게 급속도로 문을 닫았을까? 그들이 만일 믿음을 자녀들에게 전수하고 믿지 않는 이들에게 전했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기만 했어도 오늘날 저렇게 되었을까? 그럴 리 만무하다. 교회는 여전히 성장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유럽의 교회만을 지탄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 한국 교회는 그동안 크고 웅장하고 화려한 예배당을 세우고 세계 기독교인들이 놀랄 정도로 성장해 왔다. 그 성장의 요인은 성령의 권능이 함께한 이유도 있겠지만 초대 한국 교회가 사회의 문제에 참여한 것이 교회 성장의 초석이 되었다고 볼 수가 있다. 초대 한국 교회는 후진적인 한국 사회에 학교와 병원을 세워 사회를 계몽 시켰으며 각종 구제 사업을 활발하게 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칭찬하고 존중했다. 그런데 현대의 교회들이 사회 문제로부터 눈을 돌리고 오직 교회 자체의 성장 즉 큰 교회, 많은 성도, 많은 헌금 등에만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물량주의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으로 결코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행위를 계속하면 결국 가장 큰 상처를 받는 것은 복음과 교회 더 나아가 목회자 자신들 뿐이다. 한편 오늘날 한국 교회는 세상에서 영광스럽고 아름다워 보이지 않게 되었고 마침내 지금 한국 교회가 죽어가고 있다는 자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도리어 교회는 세상에서 조롱과 비난의 대상이 되기 일쑤이고 교회는 점점 사회에서 그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다. 한 앙케이트 조사에 따르면 기독교는 한국 사회에서 영향력을 갖지 못하는 거대 종교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섬김, 희생, 정의, 거룩함, 사랑, 겸손 등의 빛을 비추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사람들이 교회를 외면한다는 것이다. 교회가 점점 장식품이 되어가고 빛을 잃어가는 것 같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렇다면 교회가 조롱을 당할 때 어떻게 할까? 교회는 깨달아야한다. 그리고 교회를 비난하는 불신자들의 말을 무조건 멀리 하지 말고 그들의 비판을 겸허히 수용하여 잘못을 회개하고 발전의 기회로 삼아야한다. 교회에 던져지는 세상 사람들의 조롱은 사탄의 사주를 받은 불신자들의 핍박일 수도 있고 혹 실제로 교회가 저지른 큰 잘못에 대한 하나님의 객관적 견책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떠한 어느 경우이든 교회가 조롱을 받는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교회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 기도해야 할 일이다(마5:44, 행7:60). 물론 근거 없는 오해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해명하고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는 그릇된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회개하는 길밖에 없다. 회개하지 않으면 신앙 양심이 더러워지고 마음이 완악해져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막히게 되어 은혜와 축복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개하면 주님과 더욱 친밀한 관계를 형성케 하고 온전한 성숙을 이루게 하는 든든한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고로 한국교회는 회개 하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말고 회개에 열심을 내야한다. 한 랍비가 제자들에게 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죽기 하루 전에는 회개하라’ 그러자 제자들이 이렇게 되물었다고 한다. ‘스승님, 사람이 자기 죽을 날을 어떻게 알고 하루 전에 회개 합니까?’ 그러나 랍비의 대답은 늘 똑같았다고 한다. ‘죽기 전에 회개하라’ 무엇을 말해 줍니까? 곧 매일 회개함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의 사상가인 장 자크 루소는 ‘과실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그러나 과실을 회개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뜨거웠던 믿음만을 자랑하고 현재의 명목적인 믿음을 회개하지 않고 발뺌 하거나, 죄를 부인하거나, 책임을 전가 하거나, 죄의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외면하는가 말이다. 이제 한국 교회의 살길은 믿는 자든 믿지 않는 자든 교회 근방의 사람들에게 전도와 구제와 형제 사랑 하는 일을 실천하는 일이다. 그렇게 하면 교회 무익을 주장하는 불신의 사람들도 교회를 존중하고 교회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을 지니게 될 것이다. 따라서 교회가 전하는 복음 진리도 잘 수용하게 되어 전도의 문이 넓어지게 되어 교회가 쇠퇴하지 아니하고 꾸준하게 부흥될 것이다.
    • 칼럼
    • 목회자
    2016-03-17
  • 죽음의 집 이야기
    어느 건축가가 여행 중에 본 아름다운 건물들을 모두 종합하여 자신이 살 집을 한 채 지었다. 그 집은 화려한 바로크식 건축 양식을 최대한 모방 했고 실내는 규모 있고 다양하게 꾸며 동양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했다. 한마디로 그 건축가가 희망해온 아름다운 집이요. 심혈을 기울여 만든 집이었다. 마침내 온 가족이 꿈에 그리던 ‘궁전’ 으로 이사하였다. 그런데 웬일인가? 그들이 누린 기쁨도 잠시 뿐 이사한지 얼마 되지 않아 아내가 별 다른 이유 없이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말았다. 불행의 먹구름은 점점 더 짙어만 가 아내의 죽음에 연이어 그의 두 아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렇게 끔찍한 일을 당하자 그는 으리으리한 그 집이 무서워졌고 하루 빨리 그 곳을 떠나고 싶었다. 그는 집을 헐 값에 팔았고 그 곳엔 다른 사람이 이사 와 살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집에 이사와 살던 사람들도 하나, 둘.. 분명한 이유도 없이 싸늘한 시체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건물이 세워진지 7년 동안 여러 구의 시체가 나온 것. 7년 채 되던 해 당시 집주인이 관계기관에 의뢰하여 사인을 규명한 결과 건물 밑을 흐르는 하수구에서 새어나온 독이 그 집의 벽으로 스며들고 있음이 밝혀졌다. 이 이유로 그 집에 기거하던 사람들이 죽어갔던 것이다. 지금도 알게 모르게 명예와 권세와 재물과 쾌락의 달콤한 죄악의 독을 마시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음을 당하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죄에 대해 일종의 불감증을 앓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죄를 인정하기란 쉽지 않은듯하다. 언제나 자신을 속이고 그럴듯한 핑계를 찾으려 한다. 이 정도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다 보면 그럴 수 있는 것이지 결코 죄는 아니라고 여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성경에는 좋은 말씀도 많지만 기독교와 교회 자체에는 왠지 거부감이 든다’ 그리고 그 이유라는 것이 지금까지 법 잘 지키고 별다른 문제 없이 사는 자기들을 향해 항상 죄인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뿐만이 아니다. 심지어 죄를 짓고 교도소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 중 일부는 자기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세상에 죄 없는 사람들은 모두 교도소에 있다’ 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라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의 법은 도덕의 최소 부분만을 요약해 놓은 것일 뿐이다. 사람의 양심도 완전한 것 같지만 실상 그 사람이 속한 문화와 그가 가진 생각이나 지식에 따라 기준이 달라지고 왜곡되는 경우가 많다. 또 사람에게는 자기를 합리화시키는 본능이 있어서 아무리 자기가 큰 죄와 실수를 저질러도 얼마든지 이유를 들어 합리화시킬 수 있다. 때문에 사람의 법이나 양심, 혹은 자기 생각에 비추어 볼 때 옳은 것조차도 결코 완전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아무리 법과 양심, 혹은 자기 생각에 비추어 옳은 것조차도 결코 완전하다고 할 수 없다. 세상 사람들처럼 인간의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기준에 비추어 스스로 의롭다는 생각으로 교만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의를 완전하게 판단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 뿐임을 기억하며 그분의 앞에서 부지중이나 무심중에 짓는 죄를 깨닫고 자복하고 회개하여야 한다. 17세기의 유명한 화가였던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이다. 렘브란트는 네델란드에서 출생했다. 그는 루벤스와 함께 바로크 미술을 대표하는 대가로 어린 시절부터 그 명성이 높았다. 그의 그림을 사기 위해 전 유럽의 귀족과 부호들이 암스테르담으로 모여들었다. 그에게는 넘치는 부와 사랑스러운 아내 그리고 샘솟는 재능이 있었다. 부러울 것이 없는 그는 사치와 방탕이라는 덫에 너무도 쉽게 걸렸다. 이런 그를 경건한 프로테스탄트인 처갓집 사람들이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렘브란트는 이런 사실을 알고 처갓집 식구들을 조롱할 목적으로 자신과 자신의 아내를 모델로 한 탕자라는 그림을 그렸다. 피아노를 앞에 두고 그의 무릎 위에 않은 아내와 그림 밖을 향해 와인 잔을 치켜들며 건배를 제의하는 렘브란트의 모습은 탕자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의 영광은 오래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사치와 방탕으로 인해 많은 재산을 다 날리고 아내도 일찍 죽었다. 인기가 떨어져 그의 그림을 원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그에게 남은 것은 하나님이 주신 재능뿐이었다. 렘브란트는 말년의 죽음을 앞두고 가난과 배고픔 속에서 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 붓을 들었다. 그리고 그 자신을 모델로 ‘돌아온 탕자’를 그렸다(눅 15:20). 탕자의 모습을 보자. 허름한 옷을 입은 앙상하게 마른 청년이 무릎을 꿇고 한 노인의 품에 안겨 있다. 안고 있는 아버지는 아들을 향한 오랜 기다림에 얼굴 가득 주름살이 자리 잡고 있다. 그의 눈은 아들을 다시 찾은 희열과 아들의 비참한 모습으로 인한 안쓰러움이 교차되어 있다. 또한 아들만큼이나 앙상하게 마른 노인의 손은 고생으로 군데군데 빠져버린 아들의 짧은 머리를 꼭 안고 있다. 마치 이제 다시는 빼앗기지 않으리라는 굳은 결단을 보여주는 듯이 말이다.
    • 칼럼
    • 목회자
    2016-03-11
  • 참 지혜 있는 자가 되라
    노르베르트 레흐레이트 ‘너의 딸에게 들려주는 작은 지혜’라는 이야기이다. 항상 권력을 잃지 않을까 전전하는 세도가가 있었다. 그는 늘 실력 있는 경비원들을 데리고 다녔고 또 수시로 점쟁이를 불러들여 앞날을 점치거나 꿈의 길흉을 미리 판단해 보도록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상한 꿈을 꾸었다. 그는 최고의 해몽가를 불러들였다. 그 중 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풀이 하였다. ‘황송하오나 이 꿈은 제후님의 일가친척들이 모두 죽게 될 것이라는 암시인 줄 아옵니다’ 이 말을 들은 제후는 크게 노하여 그 해몽가를 사형에 처했다. 난처해진 해몽가들은 두려워하며 제후 앞에 나서길 꺼려했다. 그 때 제일 어린 듯 하는 한 해몽가가 제후 앞에 나서서 침착하게 말했다. ‘제가 그 꿈을 해몽해 보겠습니다. 제후님의 일가친척들은 모두 천수를 누릴 것입니다. 그러나 제후께서 그들보다 훨씬 오래 사실 것이라는 예시입니다’ 이 말을 들은 제후는 매우 만족해 하며 그 지혜로운 해몽가에게 포상을 내렸다. 이처럼 사람의 참 지혜는 사람들의 난제를 해결해 주고 행복의 길로 인도해 준다. 영국의 시인이자 역사가인 칼라일(T. Carlyle) 은 ‘인간에게 제일 무서운 것은 행운과 행복이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참 지혜가 없이 살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일리가 있다. 요즘 교회와 사회를 보자. 고등교육을 받고 상당한 지위와 명예와 권세와 재산을 가진 사람들이 사이비 종교에 빠지거나 아니면 자신의 가족과 사회에 몰염치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럴 때마다 배울 만큼 배우고 사회적인 지위와 명예와 권력과 그리고 넉넉한 재산을 가진 사람들이 왜 그럴까하고 의아해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간단한 문제이다. 그들은 개별적인 지식과 명예와 권세와 재산을 가졌으나 자신과 인생 전반에 대한 지혜가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 인간에게는 지혜가 중요하고 필요하다. 실례로 참 지혜를 가진 사람과 악하고 헛된 세상 지혜를 가진 사람들을 보자. 먼저 애굽의 총리대신 요셉. 그는 애굽의 시위장관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성적인 유혹을 받았다. 은밀한 이 유혹은 참으로 달콤한 것 이었다. 육체적인 쾌락만을 주는 것이 아니고 가정 총무의 자리를 확고히 다지는 방편이기도 했다. 그리고 만일 이것을 거절했다가는 자존심이 강한 여주인으로부터 어떤 보복을 받을지도 알 수 없는 상황 이었다. 적당히 타협하기 좋은 여러 여건들을 갖추고 있었다. 두 눈 딱 감고 죄를 한 번 범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가 여주인에게 한말은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 하리리까’(창 39:9)였다. 그 결과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했지만 하나님의 섭리로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 고로 우리가 진정 지혜 있는 사람들, 지혜 있는 사회와 국가가 되기를 원한다면 생각을 바꾸어야한다. 즉 거짓과 악행을 버리고 이제 정직해야한다. 정직과 성결이 지혜이기 때문이다. 정직하게 살 때 그 어떤 비웃음과 조롱을 당하고 당장은 손해 보는 것 같다. 하지만 그 끝은 성공이요 인정이다. 고로 우리도 믿음으로 정직하고 순결하게 살면 시온의 대로가 열려 요셉처럼 인생의 승리자가 될 수 있다. 애굽 왕 바로와 페르시아 시대의 총리 하만을 보자. 이 둘은 악한 세상의 지혜대로 살았던 대표적인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즉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하자 나름대로 지혜를 짜 이들을 멸하고자 했다. 하지만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이를 역이용하심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은 구원을 받고 바로는 처절한 실패와 심판을 맛보게 하셨다(출1~12장). 또한 하만 역시 나름대로의 악한 세상 지혜로 유대인들을 몰살하기 위해 함정을 팠지만 오히려 자신이 판 함정에 빠져 자기가 세운 나무에 달려 죽는 수치와 파멸을 당해야 했다(에 3:7). 고로 자기주장을 중심으로 한 세상의 지혜가 비록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가장 똑똑하고 지혜로운 것처럼 보여도 실상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분명하게 깨달아야 하겠다. 이에 러시아의 위대한 문호 톨스토이는 ‘헛된 지혜를 두려워하라 세상 모든 악이 여기서 비롯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요셉처럼 참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무엇을 구해야 할까? 성경의 이스라엘 왕 솔로몬처럼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한다. 솔로몬은 왕위에 즉위하여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구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맡기신 백성들에게 선정을 펼 수 있는 지혜를 구했다. 결국 솔로몬의 그러한 열망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았고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지혜뿐만 아니라 그가 구하지 않는 부와 영광과 수까지도 풍성히 허락하셨다(왕상3:10~14). 과연 솔로몬의 지혜는 당시 현인이 많다고 한 대국 애굽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났고 철학자요 시인으로서 삼천 잠언과 일천 다섯의 노랫말을 짓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동물과 식물에 관해서도 논할 만큼 모든 관계에서도 해박한 지식을 가졌다. 따라서 주위의 모든 나라에서 그의 명성은 널리 알려졌다(왕상 4:29~34). 고로 우리들도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자(약 1:5).
    • 칼럼
    • 목회자
    2016-02-25
  • 남 탓만 하는 사람들
    한 엄한 아버지가 신문을 보며 아들과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빵을 집으려는 아들이 실수로 우유를 엎질렀다. 그 우유는 아버지가 보던 신문까지 적시고 말았다. 순간 아들은 아버지의 눈치를 재빨리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는 아들을 매섭게 쏘아보면서 말했다. ‘조심하라고 내가 몇 번이나 말해야 알겠니?’ 이내 아들은 울음을 터뜨렸고 부엌에 있던 어머니가 달려와 식탁을 닦았다. 일주일 뒤 여느 때와 똑같은 아침 식사 시간. 이번에는 아버지가 빵을 집으려다가 그만 팔꿈치로 우유잔을 건드렸다. 식탁은 온통 우유로 뒤범벅 됐다. 아들은 아버지의 행동을 유심히 살폈다. 그때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니 우유 잔을 걸리적거리게 놓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 해야겠소’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들은 아버지 몰래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는 일반 가정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한 예화이다. 그러나 이 일상적인 이야기 속에는 다른 사람을 비난함으로 자신의 실수를 정당화시키려는 인간의 고질적인 문제가 담겨 있다. 즉 ‘잘되면 자기 탓이고 못 되면 조상 탓’의 논리가 세상에 만연해 있는 것이다. 주위를 보자. 쉴 새 없이 많은 문제들이 일어나고 있다. 또 그러한 사건과 문제들로 인해 세상은 한시도 편할 날이 없고 소란하다. 더 안타까운 것은 사건과 문제가 터질 때마다 자신에게 돌아올 질책이나 책임이 두려워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는 이는 하나도 없고 모두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한다는 사실이다. 이에 정치적으로 문제가 생기면 국민들은 정치인들을 공박하는 반면, 정치인들은 오히려 국민들을 탓하기에 이른다. 또 여당은 모든 잘못을 야당에게 돌리고 야당은 힘없는 자기들보다 권력을 쥔 여당 쪽에 모든 잘못이 있다고 주장을 하는 것이다. 일전에 유일호 경제부총리를 비롯한 경제 사회부처 장관들이 행정부는 잘하고 있는데 국회와 야당과 교육청들이 못했다는 남 탓 담화문을 발표하여 국민들을 놀라게 했다. ‘정부는 개혁입법을 최선을 다해 국회를 설득해 왔지만 더 이상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다’라며 ‘대통령과 정부가 제대로 일할 수 있도록 국민이 도와 달라’고 했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정부나 사회에서 뿐만 아니라 직장과 가정, 심지어 교회의 성도들 사이에서까지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예컨대 교회에 문제가 생기면 성도들은 목회자에게 목회자는 역으로 성도와 중직자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며 서로를 비난하기에 바쁘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 내 생각이 옳으면 다른 사람의 생각도 옳을 수 있다. 서로 역지사지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즉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아야 한다. 상대방의 주장이 옳다면 내 생각을 양보할 수도 있어야한다. 이 땅의 모든 다툼과 분열은 바로 이 같이 자기 생각만 지나치게 고집함으로 발생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자기주장이 옳을 수 있다. 그러나 상대방의 주장도 옳을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의 주장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완전하다면 서로의 주장이 다르게 나올 수 없다. 불완전하기에 관점에 따라 다른 의견이 나올 수 있고 그러다보면 자신의 주장이 틀릴 수도 있다. 고로 자신에게는 전혀 잘못한 점이 없고 상대방에게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한 걸음 물러서서 ‘내 탓이오’ 하는 겸허한 자세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하루를 다 보내기 전에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자. 오늘 하루 동안 나는 화해를 위해 몇 번이나 내 잘못을 시인했는가? ‘나 때문’ 이라는 생각을 한번 이라도 해 보았는가? 세상에서 남 탓만 하고 살다가 나중에야 ‘내 탓’을 깨닫는 한 성도의 이야기이다. 지금 살고 있는 시골 마을로 처음 이사 왔을 때 우리는 길게 뻗은 자갈길을 지나 한적한 마을 변두리에 있는 낡은 집을 개조하여 보금자리를 꾸몄다. 나는 외출할 때마다 내 발보다 훨씬 크고 딱딱한 구두를 신고 그 자갈길을 다녔다. 자칫 방심했다간 돌에 채여 넘어지기가 십상 이었다. 당시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아 부드럽고 발에 맞는 신발을 사기란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거듭되는 고충으로 인해 부드러운 신발을 사지 않으면 도저히 그 길을 걷지 못할 것 같아 큰 맘 먹고 구두 가게에서 부드럽고 발에 꼭 맞는 신발을 하나 샀다. 새 신은 바닥이 유연했으므로 울퉁불퉁한 길을 훨씬 쉽게 걸을 수 있었다. 그 일로 인하여 나는 험난한 인생의 길에서 자주 미끄러져 실패했던 것은 내가 너무 딱딱하게 대처했던 탓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참 그랬다. 나는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모든 어려운 상황들에 거칠게만 대항했지 그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부드러운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어리석게도 나는 그것들과 대항하고 싸움으로써 내 인생을 더욱 많은 상처로 점철시켰던 것이다. 일리가 있다. 이제 우리를 실족케 하는 아집과 편견과 교만의 구두를 벗고 사랑과 믿음의 신을 신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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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자
    2016-02-19
  •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18세기는 뉴잉글랜드에 있어 대각성의 시대였다. 1734~1735년과 1740~ 1741년에 걸쳐 하나님은 이곳에 놀라운 변화를 허락하셨는데 그 일의 한 복판에 조나단 에드워즈라는 전설적인 설교자가 있었다. 근시로써 원고와 촛대를 들고 행했던 그의 설교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그의 설교를 듣고 회개했다. 그로 하여금 그런 놀라운 사역을 할 수 있게 했던 원동력은 어린 시절 회심을 경험하며 영광스런 하나님을 만나고서 가졌던 ‘하나님은 영광 받으셔야한다. 그렇지 않게 사는 삶은 모두 잘못되었다’라는 확고한 의식 이었다. 그는 이 목적을 위해 스스로 수십 조항의 결심문을 만들어 체크하며 지켜갔다. 특히 이러한 확신 속에 필요를 느껴 수년간 지옥에 대해 설교 하기도 했다. 그는 왜 이처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을까? 하나님의 영광은 주님의 소원이자, 삶이며, 우리 인생의 목적이기 때문이다(소 요리 문답 제1문).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 주님의 삶을 본받아야한다. 어느 날 주님은 사람들이 혐오하는 흉한 문둥병자를 친히 손을 대어 치유해 주시면서 함구령을 내리셨지만 주님에 대한 소문은 널리 퍼져나갔다. 갈릴리뿐만 아니라 온 유대와 예루살렘에도 알려져 허다한 무리가 추종하게 되었고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속인들 같으면 더욱 자기를 선전하고 사람들에게 인기와 존경을 받으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기 위해 한적한 곳으로 피해가셨다. 즉 주님은 사람들에게 영광을 얻으실 때에 그것에 편승해 영광을 누리기보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아들이 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눅 5:12~16). 그리고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앞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 하셨고(마 26:39) 또 대제사장적 중보 기도를 하셨다(요 17:). 이는 사도 바울의 소원이기도 하며(롬 15:6) 그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이에 바울은 성도들에게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라고 권했다(고전 10:31). 이것은 바로 성도된 자의 삶의 가치요 행동이며 강령이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한다’면 이 세상에 문제될 것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오늘날 가정, 교회, 교계, 사회 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보면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과 기쁨을 추구하는 데서 발생한 것이다. 인류의 최초의 범죄도 사실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자기의 이기적인 만족과 기쁨을 위해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 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고로 우리가 혹시 교회나 사회에서 큰 공로를 세워 유명하게 되어 사람들의 인기나 존경을 받는 위치에 있다면 교만하지 말고 겸손함으로 더욱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한다. 사람들에게 경시당하고 수모당할 때보다 높임 받고 존경받을 때 교만, 명예, 권력, 물욕 쾌락 등에 걸려 넘어지기 쉽기 때문이다. 성경의 사울과 솔로몬처럼 말이다. 요즘 교회 지도자들은 어떨까? 2015년 12월 24일 교회연합신문을 보자. 세계 최대교회인 여의도 순복음 교회를 세우고 지난 2008년 은퇴한 조용기 목사가 교회로부터 200억 원의 퇴직금을 받았다. 국민일보 2015년 12월 11일자에 의하면 조 목사에게 지급된 이 퇴직금은 교회 재정위원회와 당회를 거쳐 정상적인 절차로 지출 되었고 그 중 35억 원을 소득세로 납부했으며 나머지 165억원에 대해 16억 5000만원을 십일조로 교회에 헌금했다고 한다. 몰라도 될 조 목사의 퇴직금 명세는 일부 ‘교바모’(교회 바로 세우기 장로 모임) 장로들이 원로목사를 음해한다며 교회 측이 강력 대처를 천명하여 밝혀진 것이다. 조 목사에게 지급된 이 거액의 돈은 교인들이 생활비를 쪼개고 아껴 복음전도를 위해 사용하도록 하나님 앞에 드린 헌금이다. 목사가 아무리 훌륭한 목회를 하고 교세를 성장시켰더라도 하나님 앞에 바쳐진 헌금을 도에 넘치는 퇴직금으로 받는 것은 기독교 역사상 이제까지 없었던 일이다. 이는 한국 교회에서만이 있는 일이다. 공교회의 헌금을 은퇴 목사가 생활비 외에 거액을 개인적으로 챙겨 가는 것은 옳지 않다. 천재를 횡령한 범죄이고 물욕을 버리라는 목사의 설교를 신뢰해 온 교인들을 실망시킨 것이다. 교회가 그대로 관리하고 있었다면 그 이자 만으로도 은퇴 목사에 대한 생활비를 지원하고도 남을 터인데 교인들의 피땀 어린 헌금 35억 원을 ‘세금’이란 명목으로 날린 셈이다. 또 2006년 1월 3일 본보를 보면 서울 명성 교회가 지난 12월 27일 저녁 공동회의를 열고 김삼환 목사를 원로목사로 추대키로 결정했다. 당초 명성교회는 김 목사에게 전별금으로 약 30억을 지급키로 했으나 김 목사가 고사해 이를 어려운 목회자들과 소외된 이웃을 돕는데 쓰기로 했다. 다만 명성교회는 전별금을 고사한 김 목사에게 종전과 같은 사역비를 계속 지급키로 했다. 두 목사님 중 어느 분이 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을까?
    • 칼럼
    • 목회자
    2016-02-04
  • 순교자 이그나티우스의 편지
    교부 이그나티우스가 로마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서머나교회 감독 폴리갑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다. 그는 ‘그대들은 나를 위하여 타협하지 말라, 내가 놓이기를 바라지 말라, 나는 밀알이 되고 짐승의 이빨에 가루가 되어 하나님의 깨끗한 빵이 되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형벌당하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를 소유할 수 있다면 십자가 위에서 짐승의 이빨에 뼈 가루가 되어 손과 발이 잘리더라도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겠노라, 나에게는 오직 그리스도가 있을 뿐이다’ 라고 한 후 순교했다. 서머나교회 감독 폴리갑도 A.D. 156년 어느 날 예수님을 욕하고 자신의 생명을 구하라고 종용하는 이들에게 ‘저는 86년간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분은 한 번도 제게 나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저를 구원하신 저의 왕을 욕할 수 있습니까?’ 말한 후 화형을 당했다한다. 당시 그들은 고난을 피할 수 없었을까? 아니다. 신앙을 포기하면 굳이 고난을 받지 않아도 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죽으면 죽으리라’는 일사 각오의 신앙을 선택했다. 그러나 다수의 사람이 이탈하거나 포기할 만큼 고난이 찾아오고 신앙을 버리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하게 보이는 유혹이 있을 때 성도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환난에 동참하는 것은 분명히 어려운 일이다. 비록 법은 어기지 않더라도 세상에 만연된 죄악된 규칙을 따르지 않음으로 인해 공공연한 따돌림과 사회적 고립을 경험할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반대로 오늘날 한국교회를 비롯 자유사회에는 교회와 성도에 대한 정치적 박해는 없다고 볼 수 있다. 이에 사단은 다른 방법으로 성도들을 유혹하여 넘어지게 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의 하나가 신앙을 버리지 않으면서 사업상, 직업상 등의 이유로 하나님과 교회를 멀리하고 우상 숭배를 비롯한 각종 죄악에 참여케 하고 그것을 교묘한 방법으로 합리화시켜 주어 그 죄의 자리에 머물게 하는 것이다. 예컨대 기독교인인 정치 지도자들이 표를 의식해 사찰에 가서 예불을 올리는 것이나 사업상 바이어를 접대한다는 명목으로 음란한 행위를 하는 것이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이는 교회와 성도로 봐서는 핍박을 동원한 공격보다도 은밀한 유혹과 자기 합리화를 통한 공격으로서 더 위험하다. 핍박은 사단의 공격인 것이 뚜렷이 인식되어 대처하기가 비교적 쉽지만 은밀한 유혹이나 자기 합리화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죄악에 빠지게 하기 때문이다. 이는 기독교 공인 이전에는 로마 제국의 성도들의 신앙이 굳건한데 반해 기독교 공인 후에는 로마 제국의 성도들이 급속히 타락하는 사실로도 확인 할 수 있다. 이처럼 마귀는 하찮게 보이는 작은 유혹들을 통해 성도들을 곧잘 쉽게 넘어지게 한다.마귀가 미혹하는 것을 보자. 사실 어떤 일에 실수를 한다거나 잘못을 하면 우리는 그 실패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는다. 또한 어떤 사람이 실수를 한다거나 문제를 일으키면 문제의 원인을 그 사람에게서 찾고 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아주 보편적인 것이다. 인간들은 교육이나 환경 개선을 통해 그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려 한다. 물론 이러한 방법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을 고치고 문제점을 개선한다면 좋은 일이고 필요한 일이다. 문제는 사람에게서 어떤 문제를 발견하고 그 문제를 지적하고 잘못을 인정하고 개선한다고 해서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그것과는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고 더 심한 경우 같은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환경을 개선하고 미리 교육을 시킨다고 해서 환경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사회가 발전하고 문명이 발달하고 교육 수준이 높을수록 문제가 발생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실제론 어떠한가? 그 반대인 경우도 많다. 문명의 사회이고 지식과 교육 수준이 높은 사회일수록 혹은 그런 사람일수록 문제는 더 많고 범죄성도 더 많은 것이 사실이다. 훨씬 교묘하고 악질적인 경우가 많다. 이러한 사실 모두가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은 무엇일까? 결국 문제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근원적으로 인간 배후에 인간으로 하여금 범죄를 저지르게 하고 부적응하게 하는 세력이 있는데 곧 그것이 바로 마귀란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사람들에게 주목하고 사람이상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마귀가 그렇게 성도들을 달콤한 방법으로 속이기 때문이다. 항상 자신을 주목하는 대로 만들고 거기에서 문제와 해법을 찾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탄의 유혹과 고난이 올 때 절대로 마음이 약하여 상심하지 말고 용기를 내어 주님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귀를 물리쳐야한다(마 4:4).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가 마귀와 맞서 영적 싸움을 할 때 홀로두시지 않고 천사를 파송하여 돕고(히 1:14) 또 친히 함께해 주실 것이다(요 14:18).
    • 칼럼
    • 목회자
    2016-01-21
  • 중보 기도
    중국 선교사로 활동한 한 여선교사가 중보기도에 대하여 이런 흥미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선교활동 당시 중국은 공산화되었고 그녀가 거주하던 작은 마을에도 공산군이 들어왔다. 선교사들은 감금된 채 식량과 의료 혜택이 끊기고 우편물마저 차단되는 어려운 상황에 처하였다. 그들은 다만 하나님의 도움만을 바랄 뿐이었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선교사들을 억압하고 제한했던 많은 규제와 제한들이 풀리기 시작했다. 식량과 의료혜택이 재개되고 공산군들도 선교사들을 호의적으로 대하였다. 또 선교사들이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여건도 허락되었다. 선교사들이 고국으로 돌아온 한참 후 그들은 오하이오에 있는 한 작은 교회의 성도들이 사랑하는 선교사들을 돕기 위해 며칠 밤을 세워가며 철야 기도를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하이오의 교인들이 밤을 세워가며 기도할 때가 중국에서는 아침이었으며 바로 그때부터 선교사들의 모든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오하이오의 교인들이 선교사들을 위하여 중보기도 했듯 지금 이 땅의 성도들도 민족을 위한 중보 기도에 힘써야 하지 않을까 싶다. 중보자의 기도를 생각해 보자. 중보자란 쉽게 중간에서 다리를 놓아 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서로 분리된 존재들을 연결시켜 주거나 조정해 주는 것을 말 한다. 한 예로 공인 중개사는 부동산을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을 연결해 준다. 서로의 이해가 엇갈릴 때는 공정한 입장에서 서로 유익이 되도록 조정하는 역할을 한다. 하찮게 보이지만 참 중요한 일이다. 중개사가 없다면 파는 자와 사는 자가 불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공인 중개사만이 할 수 있다. 중보기도란 전능하신 하나님께 어떤 사람을 연결해 주고 부탁드리는 일이다. 즉 누군가에게 잘못과 실수가 있을 때 하나님께 용서를 빌어주고 그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대신 간구하여 얻게 해주는 행위인 것이다. 이런 일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권세를 얻은 그리스도인만이 할 수 있다. 성경에서 ‘중보자’(Mediatdr)란 범죄한 인간과 거룩하신 하나님 사이의 단절 관계를 이어주는 이를 가리킨다. 물론 성경은 참된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라고 선언하고 있다.(딤전2:5) 모든 그리스도인도 완전치는 않지만 일면 중보자로서의 사명을 가지고 있다. 성경에는 아브라함(창18:22~33), 모세(민14:11~20) 욥(욥42:7~9), 아모스(암7:1~6) 등 중보자의 역할을 잘 감당했던 신앙 위인들이 많다. 이러한 기도의 능력을 알았기에 바울은 중보 기도를 권면하였다.(딤전2:1~2, 엡6:18, 살후3:1) 이에 하나님께서는 심판에 직면한 악한 이들에게 긍휼을 베푸시려 할 때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호소할 중보자를 요구 하신다. 고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불신자들 사이의 중보자가 되어야한다. 멸망으로 치닫는 어두운 이 세상의 죄악을 사하여 주시도록 하나님께 간구하여야 하며 세상을 향하여는 하나님 사랑과 공의를 선포하며 더욱이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음을 강력히 선포하여 그들로 죄악에서 돌이키도록 요구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종말의 때에 죄악 된 세상과 멸망당할 불신자들을 위해 눈물 흘려 중보하는 기도를 귀히 여기실 것이다. 고로 중보기도는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실천해야 할 사명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사명이자 특권인 중보 기도에 열심을 냄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을 돕고 하나님의 뜻과 영광이 만천하에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이웃을 위해 중보기도를 하지 않고 자신과 자신의 가족만을 위해 간구한다. 이는 결코 하나님께서 기쁘게 들으시지 않으실 것이다. 혹시 기도가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간구라면 돌이켜야 한다. 먼저 이웃을 위하여 간구해야한다. 믿음이 연약한 이웃을 위해, 육신이 병들거나 가난으로 고통 받는 이웃을 돌아보고 그들을 위해 간구해야 한다. 참된 기도는 사람을 살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성장시키지만 잘못된 기도는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자신까지도 망하게 한다. 종교 개혁의 선두 마차 마틴 루터는 ‘남을 위해 드리는 중보 기도는 우리를 파멸시키는 이기주의의 속임에서부터 우리를 정화시켜 줄 수 있다’고 말했고 또 기도의 거성 에즈라 바운즈도 ‘타인을 위해 중보 기도한다는 것은 고귀한 영혼과 순결하고 고상한 동기와 이타적인 마음과 열렬한 정신과 신성한 기지를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실로 서로를 위한 기도야말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귀중한 방편이 됨은 물론이다. 우리가 주안에서 한 몸이라는 사실을 그 무엇보다도 깊이 느끼게 해주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고로 성도들은 기도 제목을 나누고 서로를 위해 기도해 줄뿐만 아니라 또 나라를 위해서도 기도하자. 중보기도에는 하나님의 역사함이 크기 때문이다. 이는 세상의 부자나 권력자들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자녀들인 성도들만이 할 수 있다.
    • 칼럼
    • 목회자
    2016-01-12
  • 성도의 세상 보기와 살기
    3세기 라틴 교부의 한 사람인 카르타고의 주교 키프리아누스(T.C. Cyprianus)는 도나투스 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친애하는 도나투스, 이 세상은 포도나무 그늘 아래의 나의 정원에서 본 것과 같은 아름다운 세상이지요. 그러나 만약 당신이 나와 같이 높은 산에 올라 거친 대지를 바라본다면 당신은 내가 무엇을 보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요. 노상강도, 바다의 해적, 군대의 싸움, 도시의 현란하고 방탕함, 원형 경기장에서 환호하는 관중을 기쁘게 하기 위해 벌어지고 있는 죽음의 결투, 자기 본위의 이기심, 잔인성, 화려한 지붕 아래 있는 고통과 절망 들... 도나투스, 이 세상은 악이요,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악한 곳이요’ 그렇다. 실로 키프리아누스의 말처럼 인간의 소욕대로 이 세상은 얻을 것 많고, 갖고 싶은 것 많은 아름다운 세상이다. 하지만 우리가 복음 안에서 말씀의 높은 산에 올라 세상을 바라본다면 세상은 사단의 지배아래 있는 악한 세상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경계해야 할 세상은 어떤 곳인가? 세상의 본질을 보자. 우리는 세상을 두 가지 방향에서 볼 수 있다. 첫째, 세상은 하나님의 은혜로 창조된 선한 창조물이며 우리들로 하여금 누리도록 선물로 주셨다는 것이다. 둘째, 세상은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들의 다스림 가운데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반역하고 대항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은 늘 이 두 관점을 적절히 적용하며 살아야 한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것에 관점을 두고 살아간다면 장미빛 에덴동산의 환상에 싸여 교회와 성도들을 향하여 달려드는 마귀와 세상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는 준비를 할 수 없을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인의 고난과 핍박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반대로 두 번째 관점만 가진다면 늘 극단적인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악하다고 늘 불평하며 적대적인 태도로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즉 교회 밖의 모든 것 예컨대 하나님께서 인류 복지를 위해 일반 은총으로 주신 권력, 돈, 지식, 성 등은 다 부정하고 더러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들은 합리적으로 일을 처리하자고 말하면 곧 세상 지식을 앞세운다고 비난하며 세상의 통치자들은 모두 사단의 하수인이라고 말 한다. 상품이나 증권이 거래되는 시장도 도둑의 소굴로,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곳에 가까이 해서도 안되고 또 그러한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말 한다. 이에 세상과 평안히 지낼 수 있는 문제들에서도 괜한 충돌을 일으키게 되며 세상에서 스스로 소외된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럼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을 누구의 시각으로 볼 것인가? 세상을 보는 시각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나’의 시각이요. 다음은 ‘사람들’ 의 시각이며 마지막은 ‘하나님’의 시각이다. ‘나’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은 어떤 상항에서도 내게 이로운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 한다.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갖고 싶은 것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이 첫 번째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의 시각을 가진 이들은 사물이나 사건을 볼 때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를 먼저 고민 한다. 이렇게 행동하는 것을 사람들이 본다면 뭐라고 할까? 이것은 사람들이 보기에 좋아 보일까? 이렇듯 두 번째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은 주로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행동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 의 시각으로 보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도와 반응을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다. 대다수 사람들이 원하는 일이거나 혹 힘을 가진 사람들이 강압적으로 요구한다 해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절대로 그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시각으로 살려면 어떤 기준을 가져야 할까? 필자는 두 가지 기준을 제시 한다. 먼저 그리스도인들은 죄와 악에 대해 그 기준이 달라야한다. 세상 사람들은 사람의 눈을 기준으로 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눈을 기준으로 살아가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악한 일을 해도 사람의 눈에만 드러나지 않으면 된다고 하여 마음대로 행동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불꽃같은 눈으로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매사에 조심하고 거룩하게 살아야한다. 다음으로 그리스도인은 선행에 대해서도 그 기준이 달라야한다. 세상 사람들은 사람의 눈을 기준으로 하기에 사람들이 알아주는 한도에서만 선행을 하려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알기에 어디서든 은밀하게 선행을 해야 한다. 고로 세상 사람들처럼 옅은 눈을 기준으로 일희일비 하는 얄팍한 삶을 살아갈 것이 아니라 세상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야한다. 소극적으로는 세상 사람들처럼 살지 말고 적극적으로 예수님처럼 세상을 품고 살아야 할 것이다. 곧 죄악 된 세상을 미워하면서도 주 안에서 그런 세상을 사랑할 수 있어야한다.
    • 칼럼
    • 목회자
    2015-12-30
  • 크리스마스 이브 날 밤의 평화
    북아일랜드는 개신교와 가톨릭교도 사이에 길고 지루한 분쟁이 컸던 곳으로 정평이 난 곳이다. 수십 년의 분쟁 속에 2,500여명의 사람이 희생되기도 했다. 얼마나 싸웠는지 이런 말이 속담처럼 생겨났을 정도다. ‘아일랜드에는 개신교도도 많고 천주교도도 많지만 크리스천은 없다’ 그런데 이곳에 하나님의 은혜로 작은 변화가 일어나 큰 파장을 몰고 온 일이 있었다. 어느 해 크리스마스 이브 밤. 시드니 칼라한(Sydney Callaghan)은 감리교 목사였다. 벨파스트에 위치한 그가 시무하는 교회에서는 새벽송을 준비해 가톨릭 신자들이 모여 사는 빈민촌에 들어가기로 했다. 이것을 안 경찰 당국이 즉각 말렸다.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 하지만 칼라한 목사님은 단호했다. 성가대원들이 빈민촌에 들어가 크리스마스 캐롤을 부르자 놀라운 반응이 일어났다. 한 집 두 집 불이 켜지면서 함께 나와 크리스마스 캐롤을 부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때 칼라한 목사님은 이런 말을 남겼다. ‘얼굴을 가진 사람을 싫어하는 것은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그들은 왜 위험한 지역에서 기쁨으로 크리스마스의 캐롤을 불렀을까? 이는 주께서 성도들에게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9) 말씀하셨고 사도 바울은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 하라’(롬12:18) 권했기 때문이다. 고로 성도들에게는 세상을 화평케 할 사명이 있다. 그런데도 현대 교회와 성도들, 목회자와 장로, 성도들이 이권으로 서로 다투고 심지어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처럼 세상 법정에 송사해 교인들이 상처를 입고 오히려 교회의 권위와 하나님의 영광에 누가 되고 있다. 이 같은 교회의 분열이나 분쟁은 주님의 뜻이 아니다. 주님의 몸을 나누는 일로서 실로 용서할 수 없는 엄청난 죄악이다. 분쟁과 다툼으로 나뉘고 갈라지는 것이야 말로 육체의 일이요, 사단의 역사이기 때문이다(갈 5:20). 화평하려면 먼저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알아야 한다. 주님은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장벽을 제거해 하나 되게 하고 화평케 하기 위해서 오셨다. 그분은 이를 위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러므로 주로 어떤 장벽을 세우는 행위는 주님의 사역을 무위로 돌리고 모독하는 처사다. 만일 우리가 진정 주께 속한 자라면 이를 기준으로 또 새로운 문을 만들어 벽을 쌓고 분리하는 행동을 삼가야 한다. 대신 주께서 자신의 몸을 드려 땅의 모든 벽을 허물고 하늘과 땅의 장막을 폐하셨듯이(마 27:51) 우리도 이 같은 큰 모습으로 우리가 만든 모든 문과 장벽을 허물어 나뉘고 분리되었던 형제들을 하나로 만드는 화평케 자들이 되어야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될 것이다. 다음으로 관용의 마음을 갖고 원수를 사랑해야한다. 세상을 살다 보면 하루에도 수차례씩 이웃의 잘못을 접하게 되고 또 대적하는 사람들을 교회와 직장에서 만날 수도 있다. 그때에 우리는 믿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절제해 그들의 실수나 대적에 대해 비난하거나 대적하지 말고 그 사람의 자리에서 이해하고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며 품어 주어야한다. 만일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주께는 말씀을 불순종한 성도가 되고 또 그들과는 평생의 원수가 되어 올무가 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접할 수 없어 영혼이 병들어 가기 때문이다 원수를 어떻게 사랑할까? 순교자 손양원 목사님처럼 사랑해야한다. 그분은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범인이 사형에 해당 하는 시점에 이르러 원수의 구명을 탄원해 수사관들을 감복시켰다. 뿐만 아니라 그 범인을 사형에서 구해내 준 뒤 곧 바로 자신의 양아들로 입적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것이 바로 관용하는 마음을 가지고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이다.우리는 그동안 남들과 마찬가지로 나 자신만을 사랑하고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만을 사랑하고 살면서 이런저런 이유로 대적하는 자, 원수 같은 자, 가난한 자, 마음이 상한 자, 포로된 자, 갇힌 자들을 외면하지 않았을까? 이제 금번 성탄절을 맞아 주님의 사랑을 다시 한 번 깨닫고 이제라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떠한 사랑을 베풀어 주셨는지 기억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해 보자. 그러면 화평케 하는 자를 축복하시는(시 34:12~14, 마5:9)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마음에 진정한 희락을 얻고(잠 12:20) 만사가 형통하게 되며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을 받게 될 것이다(고전 4:5).
    • 칼럼
    • 목회자
    2015-12-19
  • 사이비 종말론 자들
    실로 이 시대는 말세의 끝자락에 와 있다. 교계의 저명한 인사들이 지금 시대를 가리켜 ‘말세지말’이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현재 세상의 종말이 어느 정도 다가왔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다만 주님이 말씀하신 종말의 징조(마 24:3~14)를 통해 그 날에 상당히 근접해 있다는 것만 짐작할 뿐이다. 그리고 현 세상이 종말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세상의 종말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주님의 초림으로부터 이 세상의 종말은 시작된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세상의 종말은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결정적으로 성취될 것이다. 고로 당장 세상의 종말이 오지 않는다고 조급한 마음을 갖지 말아야 한다. 세상의 종말은 우리의 생애 중에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에 따라 지금 세상이 종말을 향하여 진행되고 있음을 확신하고 종말을 늘 준비하며 경건하게 하루하루를 살아야 한다. 종말의식이 팽배할 때에 많은 사람들이 적그리스도 즉 이단의 미혹을 받고 실족하기 때문이다. 사이비 종말론자들 즉 이단들은 교회와 성도들을 어떻게 미혹하였는지 살펴보자. 어떤 이들은 신은 하나님 한 분이 아니라 부처, 알라 등 여럿이 있을 수 있으며 따라서 구원의 길은 그리스도 외에도 여럿 있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에 입각한 다원주의 신학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21세기의 첨단 사상이라는 포스트 모너니즘을 표방하며 스스로를 종교의 벽을 헐고 화해와 일치를 이루는 선구자로 자처 한다. 처음에는 종교 간의 대화를 주장하다가 점차 그리스도 없이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치다 급기야 ‘예수는 없다’고 하기까지 이르렀다. 그리고는 기독교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는 어두운 시대는 지나가고 모든 종교를 통해 구원을 얻는 광명의 시대가 열렸다 등의 헛소리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자기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자들이 아닐 수 없다. 예수가 없다는 말은 곧 창조주도 없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그들은 도대체 어디서 왔다는 말일까? 혹 진화론을 따라 단세포에서 왔거나 기껏해야 원숭이로부터 왔다는 말일까? 아니면 만물은 무시무종이니 전생으로부터 윤해했다는 말일까? 참 안타깝다.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이단자들의 소리를 경청하지 말아야한다. 그리스도는 만유의 창조주이시자 만유의 중심이기 때문이다(롬11:36). 어떤 자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고 하나님 자신으로 인정을 하지 않고 ‘한 인간’이라고 주장 한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고 오직 예수님의 신성만을 인정을 한다. 심지어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기적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제자들이 조작한 설화라고 주장한다. 즉 이들 이단들은 모두 성경을 보지 않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또 어떤 자들은 언제나 성경에 없는 말을 갖다 붙인다. 성경은 거듭 주님의 재림의 때는 알 수 없다하는데(행1:7) 이 말씀을 가감하여 주님의 재림의 때도 구체적인 날짜나 장소 등을 언급하는 것이다. 이에 귀가 얇은 성도들은 쉽게 속아 넘어 간다. 대표적인 예가 1992년 10월 28일 이장림 사건이다. 이처럼 교회와 성도들이 사이비 종말론에 집착하게 되면 신비주의나 맹목적인 광신에 빠지거나 아니면 시한부 종말론에 빠지기 쉽다. 그 결과 현재의 삶을 등한시 한 채 환상과 망상에 사로잡혀 비참한 삶을 살게 된다. 한 걸음 더나가 이단들은 한술 더 뜨고 나선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직접 말씀하셨다한다.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가 아닌 영적인 비밀의 말씀을 강조하기도하고 기도 중에 음성이나 환상으로 보여주셨다고 하면서 각종 거짓 이적을 보이면서까지 성도들을 거짓 교훈으로 이끌곤 한다. 그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종교를 돈벌이의 수단으로 삼는다. 즉 종교를 마치 시장의 상품처럼 거래의 대상을 삼는다. 또 어떤 자들은 주의 재림이 가까웠으니 재산이 필요 없으므로 모두 바치라고 하면서 자기는 그 돈으로 엄청난 부동산을 사들이기도 한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교회 안에도 이와 비슷한 일들이 가끔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마치 중세시대 당시 돈을 받고 면죄부를 팔았던 것처럼 성경 말라기의 말씀을 교묘하게 인용하며 바친 십일조와 축복의 양이 비례한다며 십일조를 강요하는 것 등이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는 복채나 굿 값에 따라 영험이 달려진다고 말하는 점쟁이나 무당의 행위와 전혀 다를 바 없는 것으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말씀하시는 주님 앞에서 참으로 두려운 말씀이 아닐 수 없다(마10:8). 고로 성도들은 이러한 사이비 종말론 자들의 거짓 교훈과 미혹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마7:15~23). 따라서 모든 성도는 각자 받은 은혜와 믿음을 잃지 않도록 늘 깨여 있어야 한다.
    • 칼럼
    • 목회자
    2015-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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