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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일
- 스코틀랜드의 위대한 설교자인 맥클라덴 목사가 한 가정을 방문했다. 예배를 마치고 다과를 들던 중 그 가정의 부인이 말했다. ‘목사님, 저는 주님께 너무도 죄송합니다. 소녀 시절 주님께 온전히 헌신하는 삶을 살겠노라고 작정했었는데... 돌이켜 보니 주님께 바친 봉사나 헌신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목사님은 부인에게 그 동안 무엇을 하며 살았느냐고 물었다. 부인은 한숨을 쉬며 ‘저는 하루 세끼의 음식 준비와 설거지를 했어야 했어요. 식구들의 빨래를 모두 해야 했고 또 아이들을 돌봐야 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못 했어요’ ‘자매님은 아이들이 몇입니까?’ ‘목사님, 우리 아이들은 넷이 아닙니까? 성경대로 이름을 지어 큰 아이는 마태, 다음은 마가, 셋째는 누가, 그리고 막내는 요한이지요’ 목사님은 다시 물었다. ‘그 아이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요?’ ‘목사님께서 아시는 대로 큰 아이 마태는 중국에서 선교사로, 둘째 마가는 아프리카에서 선교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우리 교회에서 파송하지 않았습니까? 누가는 제 형과 함께 중국에서 일하고 있구요. 막내 요한은 오늘 아침 나에게 말 하더군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부르시는 같다고요’ 맥클라덴 목사는 말했다. ‘그런데도 자매님은 자기의 삶을 낭비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자매님이 하늘에 갖고 있는 그 큰집이 부럽고 자매님이 주님의 보좌에 아주 가까운 것처럼 나도 그러기를 바랍니다’ 오늘 교회 안에 그리스도인들을 보자. 각각의 은사와 종류와 분량이 다른 것을 볼 수가 있다. 곧 하나님은 각 사람의 능력과 품성과 기질 등에 따라 그에 필요한 적절한 은사나 사명을 주셨다(고전 12:4~11). 즉 목회자, 장로, 정치인, 경제인, 과학자, 큰 능력자나 작은 능력자 등이 있다. 그 외에도 각 사람이 받은 은사는 다양하다. 하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깨닫지 못하고 목회자가 되어 복음을 전하는 일은 귀한 주의 일이고 그 외의 일 등은 세속적인 것이라고 생각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판단이 아닐까? 일례로 한 선교 단체에서 친선 체육대회를 개최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운동경기를 하기 전 각 부서의 사람들이 모여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시설 관리부 사람이 농담으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만일 우리 부서를 이기는 팀에게는 앞으로 화장실 청소도 안 해주고 책상도 안 고쳐 줄 거야’ 그랬더니 식당에서 일하는 한 집사님이 ‘아이고, 우리부서는 어떻고 만일 우리 부서를 이기는 팀에게는 앞으로 밥도 안해 줄 거야’ 그리고 이러한 농담이 오고간 후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즉 그 선교 단체 가운데 할 일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또 그들이 하는 일은 모두가 하나님의 선교를 감당해 나가는 데 있어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일들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제각기 합당한 은사와 사명을 주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가고 계신다. 우리 각자에게도 은사 즉 주께서 필요에 따라 주신 고유의 선물이 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선물은 무엇일까? 그 것이 어떤 은사든지 그것을 소중히 생각하고 주신이의 뜻에 맞게 다른 사람을 섬기는데 사용해야 한다. 헌데 이것은 축복이다. 이 세상에 살면서 외롭지 않으며 다른 이를 섬기면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복이다. 그러면 주께서 주신 은사를 다른 사람들과 값없이 나누려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세월을 아껴야 한다(엡 5:16). 모든 일에 때가 있기 마련이고 이때를 놓치면 그 손실이 크기 때문에 우리는 기회를 충분히 활용하도록 항상 준비하고 기다려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을 보면 기회를 만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주어진 기회를 사장시키는 사람도 있다. 인생의 성패는 기회를 어떻게 활용 하는가 좌우하는데 있는데 말이다. 만일 우리가 주께서 주시는 기회를 충분히 활용하고 준비하고 기다린다면 기회를 만드는 자가 되나 아무 준비도 되어 있지 않으면 기회를 잃고 사장하고 평생 후회하는 자가된다. 그러기에 우리는 인생이 짧고 세월은 유수처럼 흘러간다는 사실을 항상 잊지 말고 주께서 봉사의 기회를 주실 때 열심히 섬기고 준비에 만전을 기하여야 한다. 혹 재물이 없다면 기도를 통해 봉사하고 머리가 없거든 팔과 다리로 감당하며 이것조차도 없거든 환한 웃음과 친절과 칭찬으로 다른 사람들의 용기와 신앙을 북돋아 주자. 이것이 바로 주님을 섬기는 신앙인의 현명한 자세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우리의 결산의 날에 주께서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으시며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도 기억하자(눅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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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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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주의
- 쿠바에 사는 한 어부의 이야기이다. 산티아고란 이 노인은 홀아비였다. 어느 날 그는 고기를 잡기위해 멀리 멕시코만까지 갔다. 어찌된 일인지 84일이 되도록 물고기를 잡지 못하다가 85일째 드디어 ‘말린’ 이라는 물고기 한 마리를 잡게 된다. 말린은 엄청나게 크고 힘이 셌으며 사나웠다. 산티아고와 배는 말린에 의해 넓은 바다에서 이리저리 끌려 다녔다. 그때부터 산티아고와 물고기의 처절한 투쟁이 시작되었다. 다음날도 물고기의 힘은 약해지지 않았다. 산티아고는 생고기와 고등어를 먹어가며 고독과 피곤을 이겨야 했다. 3일째 되는 날 드디어 지친 물고기는 수면으로 떠올랐다. 노인은 물고기에 작살을 꽃아 배 옆에서 끌고 가려고 하였다. 하지만 물고기가 흘린 피는 상어 떼를 불러들였다. 밤새도록 상어 떼와 필사의 싸움을 하면서 새벽 포구에 도착한 노인은 오직 물고기의 앙상한 뼈만 발견할 수 있었다. 지친 그는 침대에 들어가 깊은 잠에 빠졌다. 노벨문학상을 수상케 했으며 영화로도 제작된 세계적인 문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소설의 줄거리이다. 이 소설의 지향점은 바로 ‘허무주의’ 이다. 인생은 그 어떤 목적도 없다는 것이다. 헤밍웨이는 1961년 7월 어느 날 엽총으로 자살을 하였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 허무주의가 문학, 음악. 사회, 경제, 종교 등에 깊이 침투하여 현대인들에게 큰 영향을 행사하며 기독교 진리를 왜곡 시키고 있는 것이다. 특히 허무주의가 우리의 청년, 청소년, 초등학생은 물론이거니와 기성세대도 심각할 정도로 물들어 있다는 것이다. 인생의 목적을 찾지 못할뿐더러 이 세상의 모든 삶을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여긴다. 역동성을 잃어버린 지 오래고 절망의 늪에 잠겨 있는 것이 더욱 편한 것이라 생각하며 심지어 자살이라는 엄청난 죄악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람이 허무주의 빠지면 자아가 상실 된다 자아(Ego)란 인간의 의식적인 부분을 말한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으며 자신이 깨어 있는지 잠자고 있는지 알고 있다. 또한 기억력이 있으며 확실하게 결단을 내릴 수 있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이렇게 직접 인식하고 항상 ‘나’ 라고 주장하는 부분을 ‘자아’ 라고 말하다. 물론 사람에게는 무의식적인 면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의식적인 면’ 만을 자아라고 한다. 얼마나 고귀한 것인가? 그런데 명예, 권력, 물질, 쾌락 때문에 자아가 상실된다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일까? 독일의 신학자 폴 틸리히(P, Tillich) 는 자아 상실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자아 상실이란 자아 결정의 중심의 상실이며 인격 통일의 붕괴이다. 통일 될 수 없는 분열의 충동에 의한 중심적 자아의 붕괴이다. 유한한 인간이 어느 것의 중심이 될 수 없는 결과를 가져 온다’ 그렇다. 인간이 물질을 포함한 피조계에 대하여 스스로 중심됨을 주장하여 모든 것을 소유하려고 하면 결국 그 속에 예속되어 영혼 없는 물질과 같이 되어버린다. 심각한 것은 오늘 날에도 자아를 상실한 사람들이 많다. 심한 말로 정신 나간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즉 물질, 명예, 권력, 성욕, 쾌락, 술, 도박, 게임, 인신 매매, 폭력, 이단 등으로 정신 나간 사람들이 있다. 사실 어느 정도 인간의 모든 생활은 감각 기관, 호기심에 의해 끊임없이 유혹을 당한다. 그렇다고 하여 정신 나간 상태 즉 물질이나 어떤 것으로 인한 자아 상실의 상태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맛있는 생선일수록 날카로운 가시와 치명적인 독이 있는 것처럼 이 땅의 영화와 사치 역시 생선과 같다. 즉 맛있는 생선에 가시와 독이 있는 것처럼 눈에 보기 좋은 이 땅의 영화와 사치에는 고난과 애통이라는 형벌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이를 주의 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그 가시와 독으로 심한 고통을 당하거나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왜 허무주의에 빠져 자아를 상실할까? 그것은 인생의 목적 즉 사람이 무엇 때문에 사는가,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짐승처럼 맹목적으로 살면서 동물적 본능에 의해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을 좇게 된다. 고로 인생의 목적을 모르고 짐승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창조의 본분을 망각한 처사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인생의 목적을 모르고 짐승처럼 산다면 결국은 도살당하는 짐승처럼 멸망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인생의 바른 목적을 분명히 가져야한다. 또 인생의 바른 목적을 모르고 사는 자들에게 그것을 부지런히 가르쳐할 본분과 사명이 있다. 도대체 인생의 목적이 무엇일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사람들은 맨 초두에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 묻고 그 답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렇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사는 것에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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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하는 자들에게 주라
- 박지원의 허생전의 내용이다. ‘누가 서울 성중에서 제일 부자요?’ 변 씨를 말해 주는 이가 있어서 허 생이 곧 변 씨의 집을 찾아갔다. 허생은 변씨를 대하여 길게 읍하고 말했다. 내가 집이 가난해서 무엇을 좀 해보려고 하니 만 냥을 꿔 주시기를 바랍니다. 변씨는 ’그러시요‘ 하고 만 냥을 내주었다. 허생은 감사하다는 인사도 없이 가버렸다. 변씨의 자제와 손이 허생을 보니 거지였다. 실띠의 술이 빠져 너덜너덜하고 갖신의 뒷굽이 자빠졌으며 쭈그러진 갓에 허름한 도포를 걸치고 코에서 맑은 콧물이 흘렀다. 허생이 나가자 모두들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저이를 아시나요?’ ‘모르지’ ‘아니 이제 하루아침에 평생 누군지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만 냥을 그냥 내던져 버리고 성명도 묻지 않으시다니 대체 무슨 영문인가요?’ 변 씨가 말하였다. ‘이건 너희들이 알바 아니다. 대체로 남에게 무엇을 빌리러 오는 사람은 으레 자기 뜻을 대단히 선전하고 신용을 자랑하면서도 비굴한 빛이 얼굴에 나타나고 말을 중언부언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저 객은 형색은 허술하지만 말이 간단하고 눈을 오만하게 뜨며 얼굴에 부끄러운 기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재물이 없어도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해보겠다는 일이 작은 일이 아닐 것이매 나 또한 그를 시험해 보려는 것이다. 안주면 모르되 이왕 만 냥을 주는 바에 성명은 물어 무엇 하겠느냐?’허생은 만 냥을 받자 자기 집에 들르지도 않고 바로 안성으로 내려갔다. 안성은 경기도 충청도 사림들이 마주치는 곳이요. 삼남의 길목이기 때문이다. 거기서 대추, 밤, 대추며, 석류, 귤, 유자 등 과일을 모조리 두 배의 값으로 사들였다. 얼마 안가서 허생에게 두 배의 값으로 과일을 팔았던 상인들이 도리어 열 배의 값을 주고 사가게 되었다. 허생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만 냥으로 온갖 과일의 값을 좌우했으니 우리나라의 형편을 알 만하구나’ 그는 17세기 중반 조선효종 때 경제 구조가 취약함을 한탄하였다. 자고로 사람들은 돈을 빌려 줄 때 결코 아무에게나 빌려 주지 않는다. 돈을 부탁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빌려 주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대단히 복잡하고 까다로운 절차와 요건을 붙인다. 헌데 변씨를 보자. 비록 불신자 이지만 초면의 허생에게 이름도 묻지 않고 어떤 조건도 제시 하지 않은 채 거금을 내어 주었다. 오늘 날 목회자, 장로, 성도들이 본받을 만한 인물이 아닐까? 깊이 생각해 보자. 오늘 날 우리들에게 물질이 필요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수단 방법을 다하여 물질을 모으고 저축한다. 그런데 왜 아까운 물질을 구하는 가난한 자들에게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할까? 그것은 주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쓸 곳에 쓰라고 물질을 주셨고(마 25:14, 15) 누구에게든 구하는 자에게 주라(눅 6:30)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즉 너희들은 세상 사람들처럼 까다롭게 조건을 붙이지 말고 또 사람들을 차별하지 말고 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것도 돌려받을 생각을 하지 말고 아예 ‘주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가 물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인색하여 물질을 구하는 가난한 자들에게 베풀지 않으면 그것은 큰 죄악이기 때문에 회개해야 한다.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리는 ‘돈 주머니를 회개한 자가 진정 회개한 자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돈을 생명처럼 사랑하여 더 소유하고 싶은 욕망과 탐심 때문에 베푸는 삶을 외면하고 포기한지는 않았던가? 이것을 명심해야 한다. 세상에서 소유하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말이다. 세상의 곳간을 넓히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지도 또 행복하게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쌓아두려면 영원한 곳간에 쌓아두어야 할 것이다. 즉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선용하지 않고 창고에 쌓아 두기만 하면 결국 못쓰게 되고 녹슬고 또 도적들의 사냥감이 되기 때문이다. 한동안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소위 대도들이 턴 집들은 묘하게도 모두 다 그 집 은밀한 곳에 현찰을 둔 집들만 공통적으로 털렸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우리 주변에 있는 가난한 자들이 물질을 구할 때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외면하거나 냉정하게 거절하지는 않았는가 말이다. 이제 지금 우리를 살펴보자. 우리는 재물을 쌓아 놓고만 있는 어리석은 자는 아닌지, 그리고 주님과 세상의 다른 것을 겸하여 섬기려고 하는 기회주의자는 아닌지 말이다. 고로 우리는 부에 대한 탐심, 성에 대한 탐닉, 세상의 영예와 소유에 대한 집착 등을 과감하게 버리자. 주님께서 주신 물질을 구하는 자에게 주지 않고 자기를 위해 치부만 하면 결국 하나님께서 주신 자산들이 상하여 못쓰게 되고 또 엉뚱한 자들의 손에 넘어가게 되며 평생 후회하고 후일에 주께 책망을 받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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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최대의 적 ‘술’
- 오늘 이야기는 미국 필라델피아의 한 남성도의 간증문의 내용인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집안은 필라델피아의 이름난 명문가의 하나입니다. 나의 가문은 퀘이커 교도의 형제파에 속해 있으며, 이제 천국에 계신 어머니는 한 때 그 단체의 설교가로도 활동하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7년간이나 술독에 빠져 주정뱅이로 살았습니다. 이 때문에 돈과 건강과 친구를 잃고 패가 망신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가족과도 떨어져 살았고 사회에서 따돌림을 받았습니다. 나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나는 술을 끊으려고 노력했으나 허사였습니다. 나는 여러 가지 술을 끊을 수 있다는 약도 많이 먹었습니다. 수백 번 맹세도 했습니다. 그러나 모두 무익했습니다. 누구나 나를 절망적이라고 생각 했습니다.마침내 나는 술 때문에 무서운 질병에 걸려 공립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병명은 알콜중독에 의한 진전섬망증 이었습니다. 나는 살 가망이 없었으나 독실한 어머니의 기도응답으로 예수님께 그 병을 맡기게 되었습니다. 나는 예수님께 살려 달라고 애원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나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저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얽매고 있던 무서운 죄악의 사슬은 끊어져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병 이었습니다. 이제 나는 수개월 간 술이란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나는 건강과 행복을 되찮았고, 가족과 친지들에게 쓸모 있는 인간이 되었습니다. 나는 천국 백성이 되어 거기가면 나를 기도로 이르게 하신 어머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 사람의 이야기였다.그러면 이 실화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우리나라의 술 소비량은 세계의 순위에 꼽힌다고 한다. 술을 마신 이유로는 신체적 고통을 잊기 위해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 불면증 때문에, 사교 상, 등등 술의 종류만큼이나 많은 이유들이 있다. 하지만 술을 마시는 주요한 이유 중 하나가 일시적 현실 도피와 망각의 수단이라는 것이다. 허나 술에 취해 있는 그 시간이 몽롱하고 기분이 좋고 시름을 잠시 잊게 하고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할는지는 모르지만, 실제로는 금쪽 같은 시간을 허비할 뿐이다. 고로 술에 취해 있는 그 시간은 결코 행복한 시간이 아니다. 술을 마실 때 사실상 시간과 생명을 마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술 취함으로 발단된 골치 아픈 일을 뒤처리 하느라고 시간을 허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술의 해독은 심각하다. 통계에 따르면 세상 범죄의 4분의 3이 술과 관련되어 있고, 또한 세상 범죄의 90%가 술과 관련되어 있다는 보도도 있다. 또한 의학적으로는 ;과도한 알코올 의존은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다양한 질병을 야기 시킨다고 했다. 따라서 알코올 의존자들은 질병과 사망 율이 높을 뿐만 아니라 수명도 일반인에 비해 10-12년 정도 짧은 것으로 나타났다. 오랜 기간 지속되는 음주는 뇌세포의 손상과 인격의 결함을 야기 시켜 기억 상실이나 사고와 판단 억제력의 상실을 가져오고, 심한 경우 무의식 현상과 조절 중추에 침범해 사망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또한 간과 위장계에 심각한 손상을 주며 암으로 발전될 수 있고, 심장이나 근육 내분비계와 생식 계에까지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고 한다. 현대는 ‘술 ’ 권하는 사회가 되어 모든 사람들이 술을 먹고 분별력을 잃어가는 것이 사실이다. 이에 발명가 토마스 에디슨은 ;술은 인류 최대의 적이며 대다수의 남녀를 노예로 만드는 대적; 이라고 하여 술을 멀리 할 것을 권고했다. 헌데, 오늘 날 더욱 심각한 것은 경건해야 할 우리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하는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술을 마신다고 해서 다 죄로 치부하는 것도 극단적인 태도이다. 술은 적절히 사용하게 되면 나름대로 의학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삼하 16:2, 딤전5:23). 문제는 술 마시기를 즐겨 하고, 술에 인박히는 것이다. 즉, 하루라도 술 없으면 살지 못할 정도로 술에 의존하여 허랑 방탕한 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경건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는가? 또한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이웃으로부터 술주정뱅이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면 사람들이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그리고 앞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술을 먹으면 반드시 병에 걸리게 된다는 것이다(호 7:15). 오장 육부가 술 때문에 병들게 되며 몸과 정신이 망가지는 것이다. 결국 돈과 몸과 건강과 생명과 시간과 노고와 명예 등 모든 것을 잃고 마는 것이다. 이것도 죄악이다. 옛 말에 사람의 신체발부는 부모님이 주신 것이라고 하여 그것을 손상시키는 것을 죄악으로 여겼다. 하물며 하나님이 지으신 몸을 술로 병들어 못쓰게 만드는 일이 어찌 죄악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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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최대의 적 ‘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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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식 기도의 의미
- 링컨(Abraham Licoln, 1809~1865)은 남북 전쟁이 중반으로 접어들어 한창 치열했던 무렵인 1863년 4월30일 목요일을 ‘국가적인 금식 기도의 날’ 로 정하자는 연설문을 작성한바 있다. 링컨은 연설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것은 비단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는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우리 온 국민의 의무입니다. 죄와 허물을 겸손히 고백하고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섬기는 나라들만이 축복받을 수 있었다는 숭고한 진리를 깨달아야 하며 그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를 황폐케 하는 이 남북 전쟁의 참화는 우리의 염치없는 죄에 대한 형벌이 뿐만 아니라 국가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는 징조일지도 모릅니다. 그동안 우리는 계속되는 성공에 도취되어 아무런 부족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오만해졌고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께 기도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교만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진노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들 자신을 낮추고 국가적인 죄를 고백하며 그분의 자비와 용서를 빌어야 하는 것입니다.’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든지 국난을 당하면 하나님께 금식기도를 해야 할 그 이유가 무엇일까? 금식기도는 대게의 경우 어떤 중대한 사건을 결정해야 되는 순간이나 절박한 위기에 직면하여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하나님의 도우심과 능력을 구하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실제 성경 속에서 큰 위기와 환난 앞에서 중대한 일을 두고 금식해서 하나님의 기적 같은 능력과 도우심을 체험했던 실례들은 금식에 대한 중대한 기대와 확신을 가지게 된다. 그러면 요즈음 우리나라 지도자들과 국민들을 보자. 나라가 위기에 있는데 기도하지 않는 것 같다. 즉 지정학적인 위기, 가정, 정치, 사회, 경제, 종교, 문화 등의 위기를 보고도 안전 불감증에 빠져 기도하지 않고 안일과 나태에 빠져 있다. 혹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기도를 한다지만 주님 당시 유대교인들처럼 외식으로 기도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성경을 보면 유대교인들은 금식을 많이 하는 것을 신앙 수준의 증표로 삼았다(눅 18:11). 그래서 일주일에 두 번씩은 반드시 금식했으며 어떤 이들은 그것으로도 성이 차지 않았다. 그리고 머리를 풀고 옷도 아무렇게나 입고 매우 피곤한 모습으로 길거리를 다녔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는 자기들처럼 왜 금식하지 않느냐고 따지기도 했다(마 9:14). 하지만 금식을 자주하거나 오래하는 것이 자랑이 될 수 없다. 음식을 먹지 않고 자기 몸을 괴롭히는 행동이 하나님이 원하신 금식이 아니기 때문이다(사 58:6, 7). 고로 우리는 금식의 의미를 알아야 하나님이 기뻐하신 참 금식기도를 할 수 있다. 금식기도의 의미를 생각해 보자. 첫째 죄에 대한 고백의 표현이다. 금식에 해당하는 원어 히브리어는 ‘춤’이다.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자의로 일정 기간 먹고 마시는 것을 절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동의어로 종종 쓰이는 히브리어 ‘아나 네페쉬’는 문자적으로 ‘너희는 스스로 영혼을 괴롭게 하라’(레16:29)는 의미이다. 이 두 가지를 원어상의 의미로 볼 때 ‘금식’이라는 것은 음식 먹는 것을 자의로 절제함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간절한 심정을 드러내는 것이다. 즉 ‘나는 더 이상 살만한 자격이 없는 자이므로 먹지 않겠다’는 죄에 대한 간절한 고백을 의미한다. 곧 자신의 정욕을 절제하고 하나님께 지은 죄를 회개하며 더욱 영적인 생활을 하고자 금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 중요한 일을 위하여 간구할 때 가장 널리 취하는 믿음의 자세 중 하나가 금식기도이다. 먹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먹지 않는 다는 사실은 실로 고통스럽고 심각한 일이다. 금식은 하나님께 간구하는 자의 깊은 신앙과 결단을 보여 주는 것이기에 간구의 효과를 얻을 수 있고 영적 성장에 도움이 된다. 둘째 하나님께 대한 절대 신앙의 표현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음식을 먹는 것은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이다. 사람은 먹어야 힘을 얻고 모든 활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금식이란 아무 것도 먹지 않는 것이다. 자신의 힘으로 무엇을 해보겠다는 생각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의지하므로 하나님께서 친히 해결해 주시기를 바라는 전적인 신뢰를 표현하는 것이다(삼하 12:22).셋째 하나님께 대한 절대 헌신의 표현이다. 사람은 음식을 먹어야 힘을 얻고 모든 활동을 할 수가 있다. 헌데 먹어야 할 사람이 금식하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는 것을 뜻한다. 육체적인 생명이 아니라 지금까지 자신을 위해 살아왔던 것을 포기하고 이제부터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겠다는 삶의 목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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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식 기도의 의미
- 링컨(Abraham Licoln, 1809~1865)은 남북 전쟁이 중반으로 접어들어 한창 치열했던 무렵인 1863년 4월30일 목요일을 ‘국가적인 금식 기도의 날’ 로 정하자는 연설문을 작성한바 있다. 링컨은 연설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것은 비단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는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우리 온 국민의 의무입니다. 죄와 허물을 겸손히 고백하고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섬기는 나라들만이 축복받을 수 있었다는 숭고한 진리를 깨달아야 하며 그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를 황폐케 하는 이 남북 전쟁의 참화는 우리의 염치없는 죄에 대한 형벌이 뿐만 아니라 국가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는 징조일지도 모릅니다. 그동안 우리는 계속되는 성공에 도취되어 아무런 부족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오만해졌고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께 기도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교만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진노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들 자신을 낮추고 국가적인 죄를 고백하며 그분의 자비와 용서를 빌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그들에게 남북 전쟁의 승리가 돌아갔음은 물론이다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든지 국난을 당하면 하나님께 금식기도를 해야 할 그 이유가 무엇일까? 금식기도는 대게의 경우 어떤 중대한 사건을 결정해야 되는 순간이나 절박한 위기에 직면하여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하나님의 도우심과 능력을 구하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실제 성경 속에서 큰 위기와 환난 앞에서 중대한 일을 두고 금식해서 하나님의 기적 같은 능력과 도우심을 체험했던 실례들은 금식에 대한 중대한 기대와 확신을 가지게 된다. 그러면 요즈음 우리나라 지도자들과 국민들을 보자. 나라가 위기에 있는데 기도하지 않는 것 같다. 즉 지정학적인 위기, 가정, 정치, 사회, 경제, 종교, 문화 등의 위기를 보고도 안전 불감증에 빠져 기도하지 않고 안일과 나태에 빠져 있다. 혹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기도를 한다지만 주님 당시 유대교인들처럼 외식으로 기도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성경을 보면 유대교인들은 금식을 많이 하는 것을 신앙 수준의 증표로 삼았다(눅 18:11). 그래서 일주일에 두 번씩은 반드시 금식했으며 어떤 이들은 그것으로도 성이 차지 않았다. 그리고 머리를 풀고 옷도 아무렇게나 입고 매우 피곤한 모습으로 길거리를 다녔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는 자기들처럼 왜 금식하지 않느냐고 따지기도 했다(마 9:14). 하지만 금식을 자주하거나 오래하는 것이 자랑이 될 수 없다. 음식을 먹지 않고 자기 몸을 괴롭히는 행동이 하나님이 원하신 금식이 아니기 때문이다(사 58:6, 7). 금식기도의 의미를 생각해 보자. 첫째 죄에 대한 고백의 표현이다. 금식에 해당하는 원어 히브리어는 ‘춤’이다.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자의로 일정 기간 먹고 마시는 것을 절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동의어로 종종 쓰이는 히브리어 ‘아나 네페쉬’는 문자적으로 ‘너희는 스스로 영혼을 괴롭게 하라’(레 16:29)는 의미이다. 이 두 가지를 원어상의 의미로 볼 때 ‘금식’이라는 것은 음식 먹는 것을 자의로 절제함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간절한 심정을 드러내는 것이다. 즉 ‘나는 더 이상 살만한 자격이 없는 자이므로 먹지 않겠다’는 죄에 대한 간절한 고백을 의미한다. 곧 자신의 정욕을 절제하고 하나님께 지은 죄를 회개하며 더욱 영적인 생활을 하고자 금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 중요한 일을 위하여 간구할 때 가장 널리 취하는 믿음의 자세 중 하나가 금식기도이다. 금식은 하나님께 간구하는 자의 깊은 신앙과 결단을 보여 주는 것이기에 간구의 효과를 얻을 수 있고 영적 성장에 도움이 된다. 둘째 하나님께 대한 절대 신앙의 표현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음식을 먹는 것은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이다. 사람은 먹어야 힘을 얻고 모든 활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금식이란 아무 것도 먹지 않는 것이다. 자신의 힘으로 무엇을 해보겠다는 생각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의지하므로 하나님께서 친히 해결해 주시기를 바라는 전적인 신뢰를 표현하는 것이다(삼하 12:22). 셋째 하나님께 대한 절대 헌신의 표현이다. 사람은 음식을 먹어야 힘을 얻고 모든 활동을 할 수가 있다. 헌데 먹어야 할 사람이 금식하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는 것을 뜻한다. 육체적인 생명이 아니라 지금까지 자신을 위해 살아왔던 것을 포기 하고 이제부터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겠다는 삶의 목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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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를 선대하는 밀러 목사님(Peter Miller)
- 언젠가 Bible School Journal 지에 소개된 이야기이다. 미국 독립 전쟁 시절 펜실베니아에 사는 ‘피터 밀러’ 목사님은 각계각층에서 모두 존경받았지만 유독 인근에 사는 단 한 사람만은 그를 몹시 증오했다. 어찌나 미워하고 욕했던지 사람들 사이에서도 유명할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나라에 대한 반역을 꾸미기도 했다. 이 사실이 드러나자 그는 반역죄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밀러 목사님은 이 소식을 듣기가 무섭게 워싱톤 장군에게 달려가 그의 목숨을 살려 줄 것을 애원했다. 그러나 워싱톤은 말했다. ‘미안하지만 친구를 위한 당신의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친구라고요?’ 밀러 목사님이 외쳤다.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내가 만난 최악의 적입니다’. ‘적이라고요?’ 워싱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당신은 원수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97km나 되는 먼 길을 걸어왔단 말입니까? 그렇다면 좀 별 문제군요? 당신을 봐서 그를 용서 하리다’ 워싱톤은 특사 통지서에 서명을 해주었고 밀러 목사는 즉시 사형 집행이 열리는 장소로 달려갔다. 그곳은 밀러 목사가 출발한 지점으로부터 80km나 떨어져 있는 곳 이었다. 그가 도착했을 때는 죄수가 막 사형대에 올라서려던 참 이었다. 사형수는 밀러 목사가 허겁지겁 달려오는 것을 보고 말했다. ‘저기 늙은 피터가 오는군! 오로지 내 목이 달리는 것을 보면서 복수의 기쁨을 즐기려고 에프라타(Ephrata)에서부터 여기까지 달려온 거야’ 하지만 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밀러 목사는 군중들을 밀치고 나아가 워싱톤 장군의 사면 통지서를 그에게 내밀었다. 실로 악을 선으로 갚는 다는 것은 어렵다. 말로는 쉬울지 모르나 막상 자기에게 그런 일이 닥쳤을 때는 참 실천하기가 힘들다.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고 도움을 주는 사람에게는 웃는 얼굴로 대하고 피해를 주는 사람에게는 화난 얼굴로 대하는 것은 그 누구나 할 수 있는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원수를 사랑하고 나와 핏줄과 사상과 가치관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거의 불가능하다. 허나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 밀러 목사님을 보자. 그가 악으로 선을 갚는 행동을 보며 느끼게 되는 것은 참 그리스도인 이라면 남다른 행동이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원수까지도 사랑하신 주님을 본받아 나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도 사랑하고 용서하며 그를 위해 기도하는 구체적인 행동의 결단이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이를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참으로 어렵지만 주님께서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기도하라고 하셨으니 어찌 해야 하겠는가? 주께서 왜 원수를 대적하지 말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사랑하라 하셨을까? 이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이다. 사실 폭력으로 원수를 거꾸러뜨려 복수하는 일은 한편으로는 시원하고 통쾌한 일일 수도 있다. 허나 그로인해 내가 상대편의 원수가 되고 그의 친구들과 가족들이 보복을 가해올 것이다. 복수는 복수를 낳고 더욱 큰 문제들을 발생 시킨다. 또 원수를 해하려 하는 이는 우선 자기 자신이 더러워 진다. 세상 죄와 불의에 오염되고 타협하기 쉽다. 그리고 그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대신 사단의 증오와 미움으로 가득차게 된다. 그러기에 우리는 사랑을 논하거나 그것을 주제로 이야기만 해서는 안 된다. 사랑은 이념이나 구호가 아닌 어떠한 형태로든 구체적인 실천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사랑을 단지 주제로 삼고 논하는 것으로 사랑의 실체를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행동으로 반영된 때에야 사랑은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한다. 그렇다 기독교는 분명 사랑의 종교이다. 즉 사랑을 원리로 하는 종교이다. 하지만 요즈음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로 부를 때는 그것을 인정하기 보다는 조롱하는 의미로 그렇게 부른 것 같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가 분명하고 사랑을 가르치는 것이 확실하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말로만 사랑을 외침으로 사랑이 구호로만 그치고 구체적인 사랑의 행위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보자. 혹시 형제의 사소한 잘못이나 공격에 못 이겨 복수심의 칼을 갈고 있지는 않을까? 그것을 참지 못하고 분통을 터뜨리지는 않을 까? 헌데 이러한 것은 우리의 인격의 문제가 아니다. 다만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무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고 묵상하고 이 사랑을 바로알고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주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또 하나님의 구속의 원리대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을 통해 우리의 생활 속에서 진정한 주님의 완전한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원수 대신 친구를 얻게 될 것이고 만일 그가 회개치 않으면 하나님께서 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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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를 선대하는 밀러 목사님(Peter Mil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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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여정에 동행하신 하나님
- 한 성도가 꿈속에서 자신이 걸어온 발자국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발자국은 두 사람의 것 이었다. 자신의 것이 아닌 발자국이 누구의 것인지 확인해 보니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님의 발자국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높은 산을 오르거나 고개를 넘어갈 땐 두 사람이 아닌 한 사람의 발자국만 있었다. 그가 이상스럽게 여겨 예수님께 물었더니 ‘평탄할 때에는 내가 언제나 동행하였지만 어둡고 힘든 곳을 지날 때엔 내가 너를 안고서 지나갔다’고 대답 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인생의 여정에서 동행해 주신다. 인생을 살다보면 때론 고난이나 혼자서는 도저히 헤어나기 힘든 수렁에 빠질 때가 있다. 너무 억울한 일을 당하여 그 분함을 어디에 어떻게 호소해야 할지 난감할 때도 있다. 나만이 이런 일을 당한다는 생각에 더 서럽고 고독한 적도 있다. 부부간의 갈등, 친구의 변심, 실직, 갑자기 무서운 질병에 걸려서 사경을 헤매는가 하면 채무자가 되어 하루아침에 부도를 내고 도망가는 바람에 꾸어 준 돈을 한 푼도 못 받는 경우도 있다. 또 갑작스런 사고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는 고통을 겪기도 한다. 이럴 때 우리는 흔히 통곡하며 하나님과 사람을 향하여 원망 한다. 마치 오늘로서 삶이 끝나 버릴 것만 같이.. 실제 적쟎은 사람들이 절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삶을 포기 한다. 마약이나 알콜 중독자가 그 한 예다. 그들은 대부분 삶을 포기한 자들이다. 현재의 처지가 너무 절망스러워서 미래 역시 현재와 별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암담한 생각에 상습적으로 술 마시고 마약을 복용 한다. 극단적으로 삶을 버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 자살률은 세계 5위로 인구 10만 명 당 226명이라고 한다. 그리고 하루에 평균 36명 정도가 자살한다고 한다. 허나 이것은 문제 해결에 대한 바른 자세가 아니다. 고난을 당할 때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 고난의 의미와 가치를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시기 전에 먼저 고난을 주시기 때문이다. 즉 고난을 통해 마음이 겸손해진 후에 복을 주신다. 그러므로 안이하고 태만한 불신앙을 버리고 고통을 꿰뚫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한다. 하지만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있듯이 인생 여정에서 불신앙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자꾸만 멀어져 가고 있지는 않는가? 급작스럽고 예측 불허의 일이 일어나서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쁠수록 돌아서 가라’ 는 옛말이 있다. 그러기에 가장 가까이에서 나의 고난과 억울한 사정을 알고 계시는 주님을 생각해보자. 사람들은 고난을 당할 때 염려는 해 줄 수 있어도 실제 도와주지 못할 때가 많다. 하지만 하나님은 고난을 보시고서 그냥 보고만 계시지 않는다. 고난과 역경 속에 친히 찾아오셔서 동참하시고 대신 무거움을 건져 주시며 함께 감당하신다. 고로 고난을 당할 때 나 혼자 억울함을 당한다고 생각지 말자.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과거에도 현재도 또한 앞으로도 그러실 것이다. 고난 중에서 하나님을 만난 자들은 하나 같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고백한다. 하지만 그 과정을 겪는 것은 누구나 힘겹다. ‘정말 하나님께서 식구들이 편히 거할 수 있는 전세방을 주실까’? 자녀들이 많아 이사할 전셋집도 구하기 힘든 처지에 놓인 한 집사님이 있었다. 그러나 놀라운 하나님의 손길이 거처를 놓고 기도하는 집사님께 미쳐 전셋집은 물론 몇 년 후 훌륭한 자기 집을 마련하도록 도와 주셨다. 하지만 이러한 경험이 있더라도 막상 다른 어려움에 처하면 또다시 하나님을 신뢰 하지 못하고 자신의 힘의 한계 앞에 무릎을 꿇고 만다. ‘내가 어떻게 이 엄청난 일들을 극복할 수 있을까? 나는 할 수 없어’ 하나님께 도우심을 간구 하지 않고 포기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허나 우리들이 이 경험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진리는 사람 뒤에 행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다. 하나님께서는 시련 속에서 당신을 찾는 자에게 오히려 더 큰 의미로 또한 더 큰 사랑으로 다가오신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가운데서 동행해 주시며 형통한 길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말이다. 사람이 할 수 없다고 자신의 무능력을 인정했을 때 바로 그때부터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강하신 손을 더하셔서 모든 환난에서 건져 내신다. 따라서 인간의 책임과 하나님의 은총은 비례하여 나타난다. 사람이 더 이상 책임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하나님의 은총이 전폭적으로 역사하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고로 현재 당하는 고난으로 괴롭더라도 절망하지 말고 믿음으로 고난 뒤에 섭리하시는 손길을 바라보자. 환난 중에 도우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손길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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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여정에 동행하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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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
- 중국 명나라 때 지행합일을 주장해 양명학을 발전시켰던 왕양명의 이야기이다. 당시 중국에서는 산적, 마적 등으로 인해 폐해가 심했다. 왕양명은 그들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받고 강서 지방으로 갔다. 그때 한 사람이 왕양명을 찾아와 진중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위병이 그를 가로막으면서 왕양명이 강의중이라 들어갈 수 없다고 막아섰다. 그러자 그는 ‘아니, 선생님께서 그럴 겨를이 있으십니까’라며 따졌다. 이때 위병은 강의는 날마다 선생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강의가 끝난 왕양명에게 ‘적도들이 언제 역습할지 모르는 이 위험한 중에 유유히 강의만을 하고 계시다는 것이 놀랍습니다’라며 묻자 왕양명은 이렇게 대답했다. ‘산중의 적은 무찌르기는 쉬운 일이나 마음에 있는 적은 무찌르기가 어렵다네. 그러기에 나는 매일 내 마음을 향해 도를 강의하고 있는 것 일세’ 왕양명은 왜 그의 마음을 지키려고 노력 했을까? 사람의 마음은 사고의 중심지며 의식의 원천으로써 선악의 근원지가 되기 때문이다. 즉 생을 지배하는 중심지이다. 헌데 우리는 하루에도 이러한 두 가지 마음 즉 미움의 마음이 지배하는가 하면 사랑의 마음이 생기고 고마워하는 마음이 생기는가하면 섭섭한 마음의 지배를 받는다. 이렇게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드는가 하면 저렇게 해야 하겠다는 마음이 든다. 믿음과 말씀대로 살겠다는 결심이 생기는가 하면 세상적인 방법으로 살겠다는 마음이 불쑥 들기도 한다. 만일 이렇게 기압골의 영향에 따라 발생하는 마음의 변화를 따라 모든 것을 결정한다면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일 수 없는 정신 분열증 환자일 수밖에 없을 것이고 또한 하나님의 축복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두 마음을 품은 자들에게 마음을 성결케 하라고 말씀 하신다(약 4:8). 두 마음이란 하나님과 더불어 세상과 벗하려는 마음이며 동시에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려는 마음(눅 16:13)을 말한다. 따라서 마음을 성결하게 한다는 것은 이러한 두 마음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 따르고 좇는 거룩한 마음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 중 자신의 어리석은 생각을 좇아 하나님과 함께 재물도 동시에 섬기려는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이 많다. 곧 영혼 구원을 위해 하나님을 섬기는 한편 세상의 쾌락과 축복을 얻기 위해 적당히 세상과도 짝하려 한다. 인간적으로 볼 때 대단히 지혜로운 것 같아도 착각이요, 더 나아가 어리석음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 하나님의 온전한 축복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놓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두 마음을 감찰 하신다.(살전2:4) 감찰하다는 헬라 원어로 ‘시험하다, 검사하다‘라는 뜻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참된지 그릇되지를 알아보기 위해 시험하시는 분이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옳고 그름을 분변하시기 위해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행실을 지켜보시고 계신다(대상 28:9, 렘 12:3). 그렇다면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전지하신 하나님께 어떠한 마음을 가져야 할까? 주님의 선한 마음을 본받아야한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주님의 마음은 첫째 겸손한 마음이다(마 11:29). 주님은 본래 하나님이시다. 그런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사람으로 낮아져서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창조주로서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들을 섬기는 삶을 사셨고 그들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셨다. 이것이 바로 겸손의 극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성육신과 희생의 겸손을 본받아 늘 낮은 자리에 설 줄 아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한다. 둘째 착한 마음이다(행 10:38). 주님의 행하신 모든 일은 다 착한 일이다. 병자를 고치시고 영혼을 구원 시기셨으며 죽은 자를 다시 살리셨다. 착한 일은 착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만이 할 수가 있다. 그와 같이 우리는 주님의 행하심을 보고 우리들도 착한 마음을 가져야한다. 독한 마음은 성도들 마음에 합당치 않다. 주님처럼 착한 마음을 지니고 어려운 이웃을 돌볼 줄 알아야 한다. 셋째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이다(벧전 2:21). 주님은 성부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받는 고난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우리도 십자가의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주님마음을 본받아야한다. 주님의 은혜만을 받으려고만 하지 말고 주님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주는 마음이다(빌2:7). 주님은 성부 하나님과 동등된 분이시지만 이 세상에 오셔서 오직 사랑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만을 행하셨다. 또한 사욕도 없으셨다. 이 땅의 물질에 대한 욕심이나 영광이나 정치적인 야망이 조금도 없으셨다. 무덤도 타인의 무덤을 빌리셨다. 하나님은 오늘도 이런 주님의 빈 마음을 가진 목회자와 장로와 성도를 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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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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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 덤! 덤!
- 이강백의 ‘결혼’의 내용이다. 남자가 말한다. 난 사기꾼입니다. 이 세상 것을 잠시 빌렸었죠. 그리고 시간이 되니까 하나둘씩 되돌려 줘야 했습니다. 이제 난 본색이 드러나고 이렇게 빈털터리입니다. 그러나 덤, 사람들에게 물어봐요. 누구 하나 이것이 내 것이다 말할 수 있는가를, 아무도 없을 겁니다. 모두 덤으로 빌렸지요. 눈동자, 코, 입술, 어느 것 하나 자기 것이 아니고 잠시 빌린 거예요. 남자는 관객석의 사람을 붙들고 또 말한다. 이게 당신 겁니까? 정해진 시간이 얼마지요? 잘 아꼈다가 시간이 되면 꼭 돌려주시오. 덤 이젠 알겠어요? 남자가 마지막으로 말한다. 덤, 난 가진 것 하나 없습니다. 모두 빌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덤, 당신은 어떻습니까? 당신이 가진 건 뭡니까? 무엇이 정말 당신 것입니까? 넥타이를 빌렸던 남성 관객에게 내 말을 물어 보시오. 그럼 나를 이해할 거요. 내가 당신에게서 넥타이를 빌렸을 때, 그때 내가 당신 물건을 어떻게 다뤘소? 마구 험하게 했었소? 망가뜨렸소? 아니오, 그렇진 않았습니다. 오히려 빌렸던 것이니까 소중하게 아꼈다간 되돌려 드렸지요. 덤! 당신은 내말을 들었어요? 여기 증인이 있습니다. 이 증인 앞에서, 약속하지만, 내가 이 세상에서 덤 당신을 빌리는 동안에 아끼고, 사랑하고, 그랬다가 언젠가 그 시간이 되면 공손하게 되돌려 줄 테요. 덤! 내 인생에서 당신은, 나의 소중한 덤입니다. 덤! 덤! 덤! 이 글의 주제는, 인생에서 소유의 모든 것은 빌린 것이며, 덤과 같은 것이란 것이다. 그렇다. 세상에서 인간이 소유한 모든 것은 모두 하나님에게 잠시 빌린 것이다. 자연도 모두 빌린 것이며, 인간이 소유한 명예도 지위도 물질도 잠시 빌린 것이다. 또한 누군가의 사랑할 때도 역시 상대를 잠시 빌린 것이다. 헌데 자고로 인간들은 이러한 덤 의식이 무지하고 소유욕만 강하다. 그래서 인간이 있는 곳에는 분쟁이 치열하다. 하지만 알아야한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고 없이 부르시면 이 모든 것을 두고 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 그래서 위대한 정복자였던 마게도냐의 알렉산더 대왕은 생전에 이러한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으면 관에 네 개의 구멍을 뚫어 양손과 발을 내놓아라’ 이것은 빈부귀천에 관계없이 사람은 죽을 때 빈손으로 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도 변함없이 세상의 명예와 권력과 재물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그것을 쟁취하기 위하여 온갖 부정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전생애를 소비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세상에서 얻는 것은 결국 안개와 같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어느 돈 많은 사람이 고급 승용차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가 나 차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그 사람은 눈을 뜨자마자 망가진 차를 보며 아까워했다. 이에 간호사가 한심하다는 듯이 ‘선생님, 지금 차가 문제가 아니에요. 선생님의 왼쪽 팔이 떨어져 나갔다는 말이에요’ 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눈을 돌려 왼손을 보더니 또 소리쳤다. ‘아이고 내 롤렉스시계, 롤렉스시계...’ 왜 이러한 일이 일어 나는가? 세상에서 오직 명예와 권력과 재물만이 가장 안전하고 든든한 방패막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을 보자. 가난하고 어려울 때는 사람들에게 겸손하고 낮은 모습으로 처신하던 자가 점차 명예와 권력과 재물이 쌓이면서 어느 사이에 그 태도가 달라지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그리고 점차 시간이 흘러 더 많은 명예와 권력과 재물을 갖지만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명예와 권력을 욕심내며 더 높은 곳을 탐하다가 결국 큰 실패와 파멸을 맞는 경우도 결코 적지 않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명예와 권력과 재물이 쌓일수록 넘어질 위험도 더 커지며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고로 우리는 명예와 권력과 재물이 반드시 축복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이 파멸로 인도하는 사닥다리가 될 수 있음을 명심함으로써 명예와 권력과 재물에 대한 지나친 욕심을 품지 말아야 한다. 또 축복을 받아 명예와 재물이 많아질 지라도 늘 이러한 위험이 있음을 알고 더욱 삼가하며 스스로를 돌보는 마음을 지녀야 할 것이다. 그러기에 명예와 재물이 더해진 자들은 오히려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하고 늘 겸손한 마음으로 선한 일에 힘씀으로써 받은 축복을 더 크고 신령한 축복으로 나아가는 통로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가진 자들은 청교도 정신을 이어받아 근검절약으로 재물을 축적한 뒤 이를 다시 세상에 환원시켜 수많은 도서관이나 복지 재단을 만든 미국의 부호들처럼 사회에 환원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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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 덤! 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