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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지호)퇴행성
    퇴행성 전 민 정퇴행성이란 말은 참 슬프다삐걱거리는관절보다 더 슬프다보폭 맞추며 반듯하게 걸어온 나날이제는 되돌아갈 수 없는 옛날의 말이다퇴행성이란 밀려난다는밀려나서 고독해진다는하염없이 내리는 빗소리를가슴으로 들으며멀어지는 것들 끌어 모아나는 자력갱생내일의 무릎을 세운다나이가 들면 청각이나 시력이 약해지기도 하고 퇴행성 관절염이 생기기가 쉽다. 특히 젊었을 때부터 꾸준히 운동을 해오지 않은 사람들이나 지병이 있을 경우 좀 더 이른 시기에 찾아올 수 있다. 그런데 다른 어떤 단어 보다도 ‘퇴행성’이란 단어가 붙어서인지 퇴행성 관절염이 생기면 왠지 모르게 자신이 노쇠(老衰)해졌다는 낙오된 생각이 많이 든다. 그래서 마음이 답답하고 슬픈 마음이 들기도 한다. 화자도 그 슬픔이 삐걱거리는 관절보다 더 슬프게 다가왔고 밀려난다는 느낌이 들어 삶이 고독해진다고 하소연 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 슬픈 마음을 계속해서 가진다면 슬픔은 더 커지고 고독역시 더 커지게 된다. 슬픔이 올 때 기쁨을 찾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살아있는 동안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좀더 밝고 긍정적인 면을 찾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즐거워짐을 알 수 있다. 퇴행성 관절염은 오히려 운동할 수 있는 좋은기회로 생각하고 튼튼한 관절을 위해 열심히 운동한다면 호전될 수 있다. 화자도 내일의 튼튼한 관절을 위하여 자력갱생의 길을 다짐하고 있다. 수 많은 퇴행성 관절염 환자들이 위축되지 않고 꾸준히 운동함으로 튼튼한 관절과 함께[ 삶의 활력을 되찾기를 바란다. 내 몸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이므로 건강하게 관리할 필요가 있다. 유엔에서 재정립한 평생 연령 기준을 보면 0~17세 미성년자, 18세~65세 청년, 66세~75세 중년, 80~99세가 노년, 100세~이후 장수노인이라고 한다. 그리고 요즘은 퇴행성이라는 수식어는 젊은이에게도 붙는 경우도 적지 않다. 절망은 허공에 뿌리고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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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7-01
  • (김지호)잡은 손
    잡은 손 문 진 환웬만해야이웃 눈길이라도 머물지지독한 가난가까운 촌수만 멀어져고웬만해야지긴 병치레사랑만 있으면 된다던 사람도언제냔 듯귓전에다 대놓고저승사자 나무라는 소리너덜너덜웬만한 영혼이래야세상천지그럼에도 불구하고차마잡은 손 놓지 못하시고또다시날 품어 주시는 아버지 사랑사람이 살면서 자기 뜻대로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뜻대로 잘 되지 않기에 때로는 힘겨울 때가 많다. ‘가난’이라는 것도 열심히 산다고 해도 헤어나오지 못하면 슬픔과 절망이 될 수도 있다. 가난에 허덕이다보면 친척이나 지인들마저도 거리감이 생겨 속상한 일이다. 또한 오랜기간동안 병치레를 하는 것도 서러운데 따듯한 말대신 화살같은 말을 쏘아 붙이면 환자는 정말 괴롭다. 잠언17장 22절에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고 했다. 이왕이면 우리는 상대의 상황에 따라 지혜로운 말을 할 필요가 있다. 말 한마디로 천냥빚을 갚는다 하지 않았는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들이 상대에게 큰 위안과 희망을 주기도 하지만 지나친 독침같은 언어는 건강한 사람에게도 스트레스가 되어 좋지않은 아드레날린이 분비된다. 잠언 15장 1절에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한다.”고 했다. 우리는 자신이 기분이 좋지 않을 때에도 상대의 상황이나 처지를 고려하며 지혜롭게 말을 할 필요가 있다. 화자는 그러한 애처로운 자신을 사랑해 주시고 손을 잡아 주시는 영존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에 감사가 넘쳐 마음의 눈물을 흘린다.“두려워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하신 이사야 41장 10절의 말씀이 병약하거나 어려움에 처해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힘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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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6-17
  • (김지호)그대를 향해 가는 이 길은
    그대를 향해 가는 이 길은 조 성 권그대를 향해 가는 이 길은보석 같은 불빛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보석같은 불빛에 내 눈빛을 잃어그대가 보석임을 잊을까 봅니다그대를 향해 가는 이 길은쪽빛 가득 머금은 하늘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쪽빛 하늘에 갈 길을 잃어그대를 잃어 머물고 싶을까 봅니다그대를 향해 가는 이 길은보랏빛 향기가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보랏빛 향기에 취해 내 마음 무디어져그대가 향기 임을 잊을까 봅니다그대를 향해 가는 이 길은그대로 가득하고그대만 가득하여그대를 향한 달음박질이었으면 합니다.세상에는 우리의 눈과 마음을 유혹하는 것들로 가득하다. 때로는 그 유혹이 너무 강해 한 번쯤 이탈해 보기도 하고 때로는 세상 유혹에 마음을 빼앗겼음을 깨닫고 회개하기도 한다.하늘 가는 여정은 협착하여 쉽지가 않다. 예수님께 나아가는 길이 값비싼 보석처럼 빛이 난다면 거기에 현혹되어 자신이 가야할 바를 잊은채 정로를 이탈할 수가 있다. 세상은 갖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해보고 싶은 것, 가보고 싶은 곳 등이 처처에 깔려 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모든 것을 추구하기 보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절제의 습관이 몸에 베어야 한다. 하늘 가는 길이 때로는 고단하고 나그네와 같이 외로울 때도 있지만 그것은 예수님 때문에 견딜 수 있다.이 시에서 화자는 보석같은 불빛, 쪽빛, 보랏빛과 같은 세상의 화려하고 매혹적인 것보다 오직 예수님의 향기만이, 오직 예수님만이 가득하여, 오직 예수님만을 향하여 달음박질 하기를 원하고 있다. 누가 이 화자의 간절한 소망을 헤아리지 못할까요. 이 세상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이 화자와 같다면 이 세상은 새로운 에덴으로 재창조 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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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6-10
  • (김지호)아름다운 수화
    아름다운 수화 김 윤 도지하철 통로의 현란한 몸짓들 앞에서요란하며 가난한 나의 언어는반성을 모색하고 있는 중이다나타내고 전하기 위해너무나 쉬웠던 시간과 규칙들이허물어져 버렸다최선의 눈빛과진지한 손짓 앞에선,어떤 소음도 속도도지금은경건해야 할 시간이다.지하철 통로에 마치 구경거리가 생긴것처럼 시작하는 도입부. ‘현란한 몸짓들’까지만 읽으면 마치 무엇인가 구경거리라도 생긴 것 같은 착각을 하게 한다. 그러나 화자는 그러한 몸짓 앞에서 반성을 모색중이라고 한다. 그것도 자신의 언어가 요란하고 가난하다고 하면서 말이다. 우리가 흔히 청각장애인을 보면 그냥 장애인이구나 정도로 생각하거나 자신의 귀가 잘 들린다는 것에 감사할 정도로만 생각한다. 그런데 화자는 한걸음 더 나아가 깊은 성찰을 한다. 그들이 눈빛을 서로 바라보며 진지하게 주고받는 손짓들은 자신의 살아온 삶의 이력들을 허물어 트리고 있다. 그들의 수화로 주고받는 대화의 진지함속으로 빠져들어간 화자는 그 순간이 경견해야할 정도로 마음의 변화를 느끼고 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통해 가난한자, 병든자, 소외당하는 자, 앉은뱅이, 그밖의 장애인들을 측은히 여기시고 도움을 주셨다. 화자는 비록 예수님처럼 도움을 주지는 못하지만 ‘측은지심’을 통해 자기성찰을 하고 있다.언젠가 수화를 배우면서 청각장애인들과 접할 기회도 있었고 시각장애인을 위한 봉사도 한 적이 있었다. 비록 오랜기간은 아니었지만 청각장애인들과 시각장애인들의 아픔을 가슴으로 느껴보았다. 그들은 일반적인 사람들보다 외관상 불편하지만 사고는 훨씬 밝고 긍정적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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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5-20
  • (김지호)영혼의 건강검진
    영혼의 건강검진 김 형 애건강검진을 위하여새벽 시간 그분을 찾았다.검진을 시작하신 그분은 말씀하신다보아야 할 것을 보지 않았고주저앉은 사람을 일으켜야 하는데 지나쳤고애통哀痛하는 이들과 함께하지도 않았다나를 알리지도 않는구나너는 영혼의 건강을 위하여말씀 속에 너의 영혼을 적시고육신으로 물기를 말리거라건강검진을 하려면 병원을 찾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화자는 지금 주님을 찾는다. 그것도 낮시간이 아닌 새벽에 말이다. 그것은 육신의 건강검진이 아닌 영적인 건강검진을 위한 것이다. 모두가 잠든 시간 조용히 주님 앞에 머리를 숙인다. 그 순간 주님은 말씀하신다. 마치 마태복음 25장에서 양과 염소의 무리중에 염소의 무리에 속하여 있음을 상기시켜 주신다. 우리는 살면서 내 주위의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관심을 가져봤으며 따스한 눈길이라도 줬었는지 생각게 한다. 우리는 편견없는 사랑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전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정작 도움을 줘야할 이웃들에게 다가서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예수님은 말씀을 통하여 심령을 적시라고 하신다. 그것은 성령의 단비로 가슴을 적시고 아주 작은 자에게라도 최선을 다해 도와 주라는 의미인 것이다. 예수님은 냉소적이고 교만과 아집이 팽배한 소동과 고모라 같은 이 세상을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하나님의 빛이 비춰지기를 원하고 계신다. 정화가 되면 좋겠다. 예수님은 분명 말씀 하셨다.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라고 말이다. 우리는 영혼의 건강검진을 통해 성령으로 거듭나는 삶을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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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5-11
  • (김지호)어머니의 옷장
    어머니의 옷장 엄 원 용어머니가 그러셨다우리집 정원에 목련가지 자라듯이옷장도 자라고, 싱크대도 자라고신발장도 자꾸 자라나야이제는 맨 꼭대기 넣어둔 신발을꺼내기가 너무 어려워야나도 어머니만큼 나이가 들었다.정원의 목련은 아름드리나무로 자라고옷장도 자라고 싱크대도 자라고신발장도 자꾸 자라고 있었다.이제는 맨 꼭대기에 넣어둔 신발은까치발로 서야 겨우 꺼낼 수 있었다.사람의 뼈는 태어나기 전 모태에서부터 형성되어 어른이 되어서까지 계속 영양공급을 받는다. 그러나 영양공급은 계속받지만 뼈가 계속해서 자라지는 않는다. 나이가 들어 활동양이 줄어들고 영양의 불균형으로 뼈가 약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약해진 뼈는 노화가 오면서 이상증세를 보이기도 한다. 또한 키가 줄어드는 현상도 나타난다. 그래서 청소년기 때 키하고 나이가 들었을 때의 키가 다르다. 위 시에서 연로하신 어머니는 키가 많이 줄어 든듯하다. 그래서 옷장이나 싱크대, 신발장이 점점 자라듯 높아진다고 역설하고 있다. 어머니가 힘들어하시면서 하신 말씀들을 연상기억해 내면서 화자는 문득 어머니의 위치에 서 있음을 느끼고 있다. 세월이 흘러 화자마저 그 어머니의 전철을 밟고 있음을 절실하게 깨닫는다. 사람은 누구나 나이가 들면서 생리현상으로 나타난다고 하지만 그런 일을 겪는 연로하신 분들의 경우 인생의 씁쓸함을 느끼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이제는 화자도 까치발로 서야 꼭대기 물건들을 내릴 수 있음을 통해 인생무상함을 경험하고 있다. 그래서 세월은 유수와 같다고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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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4-28
  • (김지호)몽땅 연필
    몽땅 연필 김 철 교옛 짐을 정리하다또르르굴러나온 몽당연필연필심에 침을 묻혀그림을 그려본다닳고 닳아뭉특한 몸매는삶을 달관한어머님의 모습부러질 염려도 없다 침 묻혀 그려보는그림 속에서어린 시절의 꿈나라를 본다옛 물건이지만 추억이 담긴 것이나 아끼는 것은 쉽게 버려지지 않는다. 그래서 박스에 넣어 두기도 하는데 우연히 박스를 열어보고는 옛 추억에 젖어 들 때가 있다.이 시에서는 요즘 보기 힘든 ‘몽땅 연필’을 추억하고 있다. 우연히 발견된 몽땅 연필, 또르르 굴러나온 작은 체구의 연필. 어린시절을 떠올리며 침을 묻혀 그림을 그려본다. 닳을대로 닳아버린 몽땅연필의 모습을 보면서 ‘어머니’를 떠 올린다. 온갖 것 자식 위해 희생하시고 살아오신 어머니. 자식에겐 좋은 것, 맛있는 것 다 주고 당신은 몽땅연필처럼 옷이 닳고 닳을 때까지 꿰매고 또 꿰매 입으셨던 어머니. 자식들 배고플까봐 자식부터 챙기셨던 어머니. 몸이 아파도 아픈 줄 모르고 열심히 사셨던 어머니. 그 어머니는 인내로 똘똘 뭉친 정신력이 강하셨다. 그래서 화자의 어릴 적 어머니는 쓰러질 염려도 없다고 생각했나보다.화자는 지금 몽땅 연필에 침을 묻혀 어릴적 꿈나라를 연상하고 있다. 그 작은 몽땅 연필을 통해 어머니의 모습과 사랑을 느끼고 있는 상상력은 기발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도 한 번 몽땅연필의 추억을 되새겨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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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4-16
  • (김지호)병실의 창
    병실의 창 이 명 희병실 창에서내다보는 거리는모두가기적이다걸어가는 사람 웃는 사람들황소 같은 땀을 흘리며짐수레를 끌고 가는 짐꾼초코바를 물고 달랑달랑 뛰는 아이기적…몰랐던 저 천국…! 병실 문을 나서는 그날은나의 나된기적을노래하리라.화자는 지금 어떠한 지병이나 급작스런 병으로 인해 입원 중이다. 육신이 많이 고달프거나 입원할 정도로 아플 때에는 가끔씩 마음도 우울할 때가 있다. 병실에서 창밖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동작 하나에도 생동감이 있어 보인다. 보통 때는 그냥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일상들이지만 병실에서 보는 사람들은 모두가 기적처럼 보인다. 웃는 사람, 힘들게 일을 하는 사람, 뛰는 아이 등 일상의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얼마나 부러운지 바로 “천국”처럼 보인다. 아주 평범한 삶의 모습이 기적이요 천국으로 느낄 정도면 환자의 병환이나 마음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독자라면 누구라도 느끼게 된다. 그러나 극심한 아픔 속에서도 슬픔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빨리 회복하고픈 간절함과 희망으로 가득차 있다. 그래서 병실문을 나서는 것 자체가 곧 기적이라 말하고 있다. 전도서에는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으리요. 라고 말한다. 그렇다, 부와 명예와 권력보다 소중한 것이 바로 건강이다. 그래서 화자는 지금 병실에서 건강의 소중함을 소리없이 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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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4-06
  • (김지호)해빙기
    해빙기 안 재 찬작심 백일이였나다시는 안볼 것 같이얼음장처럼 차가웁더니무슨 바람아 불어나긋나긋이 몸을 풀고심장에다 불을 지르는가나는 오늘 밤과거 따위는 묻지 않고부지런하게 시간을 엮어틈틈이 봄의 발원을 늘어놓고일을 낼 것이다생명을 움 틔울 것이다흔히 사람들이 어떠한 결심을 하고 며칠 가지 못하면 ‘작심삼일’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그만큼 자신의 결정을 행동으로 옮기기란 마음처럼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이 시의 화자는 ‘작심삼일’이라는 용어에서 ‘삼일’ 대신 ‘백일’이라는 용어를 환치시키고 있다. 한 계절이 보통 3개월 정도이기 때문에 대충 계산하여 ‘백일’이라 한 것이다.또한 계절을 사람에게 빗대어 의인화하고 있다. 겨울이라는 것이 너무 차가워 다시는 녹지 않을 것처럼 여겼는데 어느새 겨울은 봄 앞에 온 몸을 풀고 냉냉한 가슴을 녹이고 있다. 화자는 그러면서 지난 날의 냉냉했던 과거는 묻지 않고 따스한 봄의 발원을 늘어놓겠다고 한다. 그렇게 할 때만이 생명이 움트는 봄의 향연이 펼쳐질 것이기 때문이다.겨울처럼 사람도 때로는 얼음덩이처럼 냉냉한 가슴을 지닐 때가 있다. 결코 다시는 따스한 마음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지속적인 관계의 틀안에서는 자신을 녹여야만 한다. 세상은 고집불통 자신만을 내세우면서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관계가 잘 형성될 때 우리가 있고 미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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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3-17
  • (김지호)눈물의 밧줄
    눈물의 밧줄 이 성 교하늘에서 내려오는 사랑그리 빛날까산에서 다 풀어지게낭떠러지에 줄을 매었다가파른 마음에걸린 밧줄허공 중에 오래오래걸려 있길 바랬다얼마나 사랑스러웠으면 그리했을까얼마나 애처로웠으면 그리했을까험한 산길엔한 마리 산새도 울지 않고눈발이 풀풀 날리고 있다가고 오는 사람눈물의 밧줄을 생각했다화자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백설이 무척 사랑스럽게 보였을까. 1연에서부터 사랑이 넘치고 있다. 그 눈들이 가파른 산 위에서부터 아래로 쌓이면서 생긴 풍광을 보며 밧줄을 연상하고 있다. 눈은 거칠고 험난한 세상같은 산길에 조용히 내려오면서 하얗게 덮어주고는 단단히 견디고 있다. 언젠가 날이 풀리면 녹아 없어질 눈물같은 밧줄이지만 오래도록 견뎌내길 바라고 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럽고 한편으로는 눈물같아 애처로워 보였다. 강추위가 몰아치는 험한 산길. 즉 너무도 냉냉한 이 세상에 날개가 퍼덕거리는 움직임과 아름다운 노래소리를 들려주는 한 마리 새도 보이지 않는다. 화자는 눈물의 밧줄이 이어지고 있는 낭떠러지 같은 산길을 보면서 세상을 관조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왔다가 사라지지만 사는 동안은 세상에 천년만년 살 것처럼 세상에 집착하며 산다. 그러나 언젠가 눈물의 밧줄처럼 사라지는 그 날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기억해야겠다.“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장 16절)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한복음 5장 39절)우리는 이 두 말씀을 되새기면서 눈물의 밧줄처럼 짧은 생을 살지라도 영생을 위하여 가는 길이 무엇인지 정로의 길을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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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시선
    2016-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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