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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음의 문화를 생명으로(요 2:1-12)
    대나무가 위기를 극복하는 힘은 유감없이 공동체적 결속과 유연과 탄력에 있다. 그래서 지조와 절개를 자랑하는 사군자로서 유감없이 화폭에 그릴 수 있는 나무가 된다. 대나무 숲을 통해 위기를 맞은 한국 교회가 교훈을 삼아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16절에서 나에게는 이 우리에 속하지 않은 다른 양들 이 있다. 나는 그 양들도 이끌어 와야 한다.그들도 내 음성을 들을 것이며 한 목자 아래서 한 무리 양떼가 될 것이다. 산업으로 인한 생태계의 파괴 산업 사회의 팽창으로 인한 자원고갈 제국주의 국가들의 세계 지배 야욕 등은 인류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 거기에다 핵무기의 개발과 원자로의 건설 등은 더욱 인류의 운명을 불행을 초래하고 인류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이제는 한국 교회가 분열과 분쟁의 역사를 청산하고 세계에 자주민임을 선포하고 민족 평화 통일을 이루어낸 민족으로 나아가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나 혼자 선하게 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물론 지켜야 할 지조 윤리적이고 확실한 신앙적 고백 이것이 기초임에 분명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생명을 회복하는 일에 한국 교회가 나서야 할 때이다. 예수께서는 다른 우리의 양도 데려와서 한 목자 아래서 한 무리의 양떼가 될 것이라고 하셨다.여인들은 가정에서 살림을 잘 해야 한다. 알뜰히 살림을 잘하면 집을 사고 재산이 증식되고 온 가족이 편하게 살 수 있다. 남자는 살림을 잘하는 여자를 만나야 가정생활이 행복해 질 수 있다. 우리는 모든 살림을 맡은 살림꾼으로 부름 받았다.국민을 살리는 것이 정치요 나라 살림을 맡은 것이 정부가 아닌가?. 총선이 다가오고 있다.살림 잘하는 정치인이 누구인가 눈여겨보자. 이것을 바로 알지 못하면 국민을 속이는자요 이는 도적이다. 국민의 세금을 횡령하고 사리사욕을 위하여 국민의 재산을 약탈하는 강도와 목자를 잘 구분 할 수 있어야겠다.오늘 이 역사에 등장해서 민중을 억압하고 지배자로 군림한 수많은 독재자 들은 살림을 위해서가 아니라 도적질 하고 노략질 하는 강도들이다. 예수님께서도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 하고 죽이 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인자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 오셨다고” 하셨다.살리려는 사상운동이 있고 죽이려는 사상운동이 있다. 살리려는 운동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운동이요 죽이려는 사상운동은 사탄으로 부터 시작된 것이다.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려고 때려 거반 죽게 되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레위인도 마찬가지 이렇게 어느 누구도 죽어가는 그를 돌보지 않는 때 사마리아 인은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상처에 기름을 바르고 싸매주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가서 돌보아 주고 진료비를 주인에게 주면서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탁 했다.예수님은 이 사람의 이웃이 누구냐고 물었다. 이 지구상에는 여리고 도상에서 강도 만난 자들이 수없이 많다. 여기에는 사람을 죽이려는 강도가 있고 사람을 살리는 사마리아인이 있다. 사마리아인은 인종의 장벽을 넘고 유대교와 이방종교의 이데올로기 벽을 넘는 살림운동 즉 살림 운동가의 대표이다.오늘 이 시대에 교회가 맡은 가장 큰 사명은 예수님의 생명살림의 운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여리고 도상에서 강도 만난자의 죽어가는 사람을 외면하고 지나간 제사장과 레위인은 바로 우리 자신들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죽어가는 인류를 살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림의 표상이요 모형이다 이제 우리는 역사 속에서 이 민족을 살려 내는 예수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름 받은 자들이다.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음에서 살아났다고 증언 하였고 그들 자신도 부활의 신앙으로 심령이 살아났다. 복음은 살림이 되는 것이요 살림 운동이 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예수님의 죽으심은 ‘그 민족 뿐 아니라 흩어진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씀 하신 것이라고 설명해 주셨다 죽음에 살림으로의 말씀이다.2020년은 이 살림 운동이 볼 화산처럼 타오르기를 소원하고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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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애굽의 은총
    2020-03-12
  • 생명을 가꾸는 일(요 10:1~16)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를 보내셨다. 누구든지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신 것이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요 성경의 중심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것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살리시려고 오셨다. 그분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사역의 중심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것이요 죽음에서 살리신 것이다.우리나라 말로 ‘살림’이라는 말은 살려 낸다는 말이다. 요한복음 10:10절에 “내가 온 것은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고 하심으로 예수가 오신 목적은 생명 그것도 풍성한 생명을 위해서 오셨음을 선포 하셨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교회의 목적이 아닐까요? 그런데 현대의 교회들은 교회의 존재 의미와 목적을 잃은 채 값싼 은혜를 팔아 대형 주의로만 지향해가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생명을 가꾸는 일은 먼저 밭을 갈아 엎고 씨를 뿌리고 물을 공급해 주고 식물을 자라게 한다. 또한 식물이 자라는데 방해를 주는 요소를 제거해야 하고 열매를 맺도록 부단히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면 예수님은 생명 운동을 어떻게 전개 하셨는가? 예수님은 당신의 사명을 단순하게 표현 하셨다.‘나는 선한 목자다’. 선한 목자의 하는 일은 무엇인가? 생명운동은 첫째 음성을 듣고 알아주는 일이다. 음성을 알아준다는 것은 한 마디로 인간의 아픔과 기쁨 형편과 처지를 같이 공유하는 것이다. 교회는 바로 이 땅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낀 국민들의 음성을 들어 주는 곳이어야 한다. 그러하거늘 권력과 힘을 가진 사람들의 음성만 듣거나 희 희 락락하고 노래하는 사람들의 음성만 듣는다면 그 교회는 편견과 이념에 사로잡힌 교회로 바른 교회라 할 수 없다.예수님은 갈릴리 민중들에게 찾아가 그들의 복잡한 현실 속에서 터져 나오는 한숨과 탄식을 들으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고 부르시며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11:28)고 하셨다. 두 번째는 아픔을 기억해 주는 것. 이름은 그 사람만의 가진 대명사이다. 이름은 한 인간의 인격이요 가치이며 가능성과 존엄성이다. 이름을 서로 불러 주지 못하는 사이는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우리가 이름을 알아주고 그 이름을 섬겨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대접을 해주는 것이 목회요 교회가 해야 할 일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 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선지서의 본뜻이다.(마 7:12)생명 운동의 세 번째는 목숨을 던져 주는 것이다. 예수님은 오늘 성경 말씀에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양을 알고 양은 나를 안다 나는 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요한 15:10). 이 말씀에서 목숨을 바치는 서약을 하셨다. 이것은 정치인들의 구 호와는 사뭇 다르다.그들도 나는 여러분들을 위해 목숨을 바쳐 국민을 위하여 열심히 일 하겠습니다.‘고 곧잘 맹세를 한다. 국민들의 아픔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인격적인 존중도 안하면서 목숨을 바치겠다는 것은 국민들을 속이는 것이 아닌가?.그들은 자기들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무슨 맹세도 떡 먹듯이 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이익이 없는 경우에는 언제든지 배신과 배역을 물 마시 듯 하는 자들이다.이것을 예수님은 도둑이라고 규정 하였다.(요10:10)) 교회는 앞서 말한대로 생명 공동체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가 살아남는 길은 생명 공동체 의식을 가져야 한다. 이에 대해 대나무 숲을 예로 들고 싶다. 대나무는 그 몸체가 1m 이상 길쭉하게 뻗어 올라간다. 그런데 그 몸체에 비해 뿌리는 대단히 가늘고 짧게 박힌다. 그런데도 큰 폭풍이 불 때에 소나무의 큰 가지가 뚝 뚝 꺾이고 포퓰러 나무가 쑥쑥 뽑히어도 대 나무는 큰 상처를 입지 않고 살아남는다. 왜 그럴까? 대 나무는 집단으로 함께 사는 집단군거 식물 (群居 植物) 이기 때문이다. 약한 뿌리는 옆의 약한 뿌리와 베를 짜듯이 얽힌다. 결국 태풍이 불면 힘없는 가지가 부ㅤㄷㅣㅊ치지 않도록 서로의 간격을 유지시켜주며 앞의 나무가 쓰러지면 뒤에 나무가 밭쳐주고 열개 백 개가 죽 받쳐주면서 태풍을 이겨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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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애굽의 은총
    2020-02-14
  • 바닥난 인생에서 풍성한 삶으로(요 2:1-12)
    사람이 살아가면서 아침에 눈을 뜨고 숨 쉬고 하루하루의 삶을 이어가는 것이 사실은 기적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하루도 살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닌가?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첫 기적을 행하신 기록이다. 당시 상황으로서는 잔치집에 있어야 할 포도주가 바닥났다고 하는 것은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포도주는 잔치 집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으로 중요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때 마침 비어있는 항아리에 물로 채우게 하셨다. 그 물이 마시는 참 좋은 포도주가 된 것이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사람들마다 놀라고 또 흥분하여 그 진상을 알아보고 싶어진 것이다. 사람의 지각이나 경험으로는 이해 할 수도 없는 또 기대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포도주가 바닥난 잔치집으로서는 이 보다 더 경이롭고 다행한 일이 또 있겠는가? 물이 포도주가 된다. 무슨 뜻일까? 술 좋아하는 사람들의 비위나 맞추어 주기 위한 기적이었을까? 그럴 수 없다. 포도주가 모자랐다. 아마도 포도주가 모자랐던 것은 그 가정이 가난 했던지 아니면 예상보다 더 많은 손님들이 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여간 포도주가 떨어졌다. 포도주는 성서 적으로 최후의 만찬에서 나눈 예수의 피를 의미한다. 이 말은 자연적인 것은 거룩하게 변화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살과 피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썩을 것은 썩지 않을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전15:50) 하였다. 그러므로 물이 포도주가 되듯 우리도 거룩하게 변화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다다를 수 있는 거룩함은 하나님의 뜻과 완전한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히브리어 ‘카다쉬’는 거룩하다 ‘정화되다. 따로 분리되다. 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사도바울은 인간의 구원을 일컬어 “믿음으로 의롭게 여김을 받는 것”(갈2:16)이라고 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이제 여러분은 죄에서 해방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삶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그 마지막은 영원한 생명입니다”(롬6:22)라고 했다. 요한 웨슬레는 이것을 일컬어 구원이란 믿음으로 말미암아 될 뿐만 아니라 의를 행함으로 거룩하게 되는 것이라 하였다. 의인(jusyification)과 성화(sanctification) 이것이 완전한 구원이라는 것이다. 이 기적 사건은 결혼식 집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사람이 결혼한다는 것은 두 가지 큰 뜻이 있다. 그 첫째가 어른이 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육체적으로 성숙한 사람일 지라도 결혼하기 전의 사람은 어른이 될 수 없다. 어른이 된다는 말은 자기 행위에 책임진다는 말이다. 부모에게 의존하던 사람들이 이제 부터는 스스로가 자신들의 생각과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 메이슨(mason)은 그의 저서 “결혼의 신비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신성한 결혼은 신성한 의무를 요청한다. 결혼 한다는 것은 남녀가 한 몸을 이룬다는 것으로 남녀 간에 한 몸이 되는 것은 그들이 결혼한 부부가 되었을 경우이다. 현대의 많은 젊은이 들은 이 점을 깊이 새겨들어야 한다. 둘째, 결혼 한다는 것은 역사를 이어 간다는 뜻이다. 부모의 전통을 계승 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미래를 창조해 가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자식을 낳는다는 것은 가문을 유지한다는 뜻도 있고, 또한 새로운 시대를 예비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은 돈과 권력을 지향하고 있다. 좀더 자리잡힌 사람들은 예술을 통하여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려 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꿈이 제대로 구현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고 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아버지 죠셉 씨는 이와 같은 꿈을 지니고 열심히 돈을 벌고 아들을 대통령으로 까지 양육하였으나 그 가문은 결국은 좌절되고 말았다. 옛날 히브리 시인은 다음과 같이 노래하며 행복한 인생을 그리고 있다. “주님을 경외하며 주의 명에 따라 사는 사람은 그 어느 누구나 복을 받는다(시128:1-4). 수고의 열매를 거둔다는 것, 아내가 살림을 잘하고 자식들은 건강하게 잘 자란다는 것, 이것이 삶의 기쁨이요 행복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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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애굽의 은총
    2020-02-03
  • 참 빛의 증언자(요 1:5-13)
    유대인들이 세례요한에게 나아와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도대체 네가 누구냐는 것과 또 하나는 왜 물로 세례를 주느냐? 하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이 있는 광야로 모여 들자 당시 종교 지도자들 즉 성전을 이용하여 기득권을 누리던 저들은 매우 당황한 나머지 저들은 자초지종을 알아보기 위하여 조사단을 파견 하게 된다. 그리하여 세례 요한에게 네가 누구냐고 물은 것이다.바리새인들이 보낸 유대인들은 요한을 압박하기 위해 물었지만 요한은 매우 분명하게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대답한다. 당시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엘리야가 다시 세상에 온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러자 조사단이 그러면 네가 “선지자냐 하고 다시 묻는다. 여기 선지자란 모세가 예언한 예수 그리스도이다(신명기18:15, 18).당연히 세례 요한은 아니라고 대답한다.그러면 세례 요한은 누구인가? 사람들은 세례 요한에게서 전혀 다른 삶을 보게 된다. 그의 삶은 경건 자체였고 그가 증거 하는 말씀에는 능력이 있었다. 당시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성전은 말할 수 없이 부패하고 타락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종교지도자의 모습은 어떠했나? 저들의 모든 경건은 모양일 뿐 아무런 능력이 없었고. 모두가 형식이요, 외식이요 위선이었다. 이럴 때 세례 요한의 출현은 저들에게 커다란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한은 그들의 질문에 한 마디로 아니라고 대답한다.세례 요한의 주인은 내 뒤에 오실 분이신데 그가 얼마나 크신 분인가는 자신은 그의 신 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다고 한다. 오직 참 빛을 증거 하는 자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현대 교회의 모습을 살펴보자.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다양하게 말씀을 접하게 된다. 어느 때는 감동을 받기도 하고 어느 때는 목회자가 모든 것을 대신 할 것처럼 기대 하면서 그를 우러러 보기도 한다.목회자를 통하여 신비체험을 하고 전에 받지 못했던 은사라도 받으면 더욱 목회자에게 매달리려고 한다. 그러나 분명히 알자 목회자가 하는 일은 “주의 길을 곧게 하는 일 뿐이다”. 아무리 내노라 하고 소위 뜨는 목회자라 해도 세례 요한보다 더 나을 수는 없다. 요한은 참 예언이 끊어진 때에 참 말씀의 대언자였다. 그 예언자의 목소리가 말라기 선지자를 정점으로 끊어지게 된다.예언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은 시대상황은 성경에 기록할 가치가 없는 시대였다. 그런데 그 끊어졌던 목소리가 요단강에서 울려 퍼지게 된 것이다. 그 요한의 출현을 본문은 이렇게 기록한다. ‘하나님께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빛 되신 예수님이 어두움의 세상에 오실 때 그 빛 되신 예수님을 어두움의 세상에 증거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 바로 세례 요한이었다.그의 사명은 분명하다. 빛 되신 예수님을 세상 앞에 증거하는 것이고 그 빛 되신 예수님을 믿게 하는 일이었다. 분명 요한은 빛이 아니었다. 빛의 증거자였다. 빛의 증거자는 자기 빛을 나타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 빛을 조금이라도 가리게 해서도 안 된다. 전적으로 빛을 드러나게 해야 한다.주님은 이러한 요한을 가리켜“여자가 나은 자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고 칭찬하셨다. 예수님께 대한 증인의 사명은 세례 요한만이 아니고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모든 자들의 고백이어야 한다, 그런데 빛된 예수님을 증거하면서 우리의 인간적인 빛이 나타나게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의도적이든 무의식 적이든 관계없이 예수님의 빛을 우리 개인이 악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예수님의 빛을 이용해서 자기가 잘 보이고 자기 위치가 더 잘 빛나게 만드는 것은 분명 악한 행위와 다를 바 없다. 그 어떤 경우라도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해야 한다. 어느 교단에 속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속한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 더욱이 목사나 어느 부흥사나 어느 은사 체험자의 똘마니가 되게 해서는 더욱 안 된다. 요한은 저 참 빛 되시는 예수님만을 믿게 하였다. 현대 교회와 지도자들은 왜 예수님이 세례 요한을 가리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 한 보다 더 큰 자가 없다고 하신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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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애굽의 은총
    2020-01-17
  • 영광을 체험한 자(출 34:1-35)
    본문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처음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두 번째 받는 장면에서 시작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처음 것과 같은 두 돌판을 준비하게 하셨다. 모세는 시내 산에서 사십 주야를 지내면서 우상숭배 금지에 관한 계명과 반드시 지켜야 할 것과 절기에 관한 것들을 하나님께 받고. 돌 판에 새겨진 계명을 받는다.첫 번째 돌판이 깨어진 것은 백성들의 죄 때문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 돌 판은 깨뜨리지 않고 거룩한 법궤 속에 안치 했다. 이것은 첫 사람 아담이 깨뜨린 하나님의 법을 마지막 아담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예표로 보여 주신 것이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라고 하셨다. (마 5:17-18). 예수님은 사람들이 이루지 못한 율법을 온전히 이루시려 오셨다.아담이 율법의 대표라고 하면 예수님께서는 의의 대표자가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두 번째 율법은 깨어 지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율법 판을 법궤 속에 넣어둔 것은 (신 6:19)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공의와 사랑이 공존하심을 보여주신다.은혜라는 단어는 우리의 심령에 진정한 평안을 주심을 의미한다. 비록 법궤 속에 공포의 율법이 들어 있을지라도 ‘속죄소 위에 피가 있으면 우리의 심령은 진정한 평안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속죄소를 시은 좌 (施恩佐)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 은혜를 베푸시는 보좌라는 뜻이다.사도 바울이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가기를 원하는 이유는(히 4:16) 율법의 정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의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고 그들의 우상의 단들을 헐고 그들의 주상을 깨뜨릴 것을 명령하셨다.그런데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기브온 족속들의 속임수에 속아 그들과 언약을 체결함으로 두고, 두고 이스라엘의 올무가 되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가나안 땅의 거민들은 우리의 본성을 상징하기도 한다.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놓인 죄와 허물의 장벽을 제거하는 일이 가장 시급하다. 그러나 이 일은 우리 인간이 해결 할 수 없기에 예수께서 인간의 죄와 허물을 제거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이다.오늘 본문을 보면 십계명을 받기 위해서 시내 산에서 사십 주야를 금식하며 하나님과 함께 있었던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모세가 40일 동안 하나님과 교제하는 동안 하나님의 영광이 모세에게 전달되어진 것이다.모세에게 40년 동안 지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향해가는 길에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영광의 체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세가 주와 함께 사십일 밤을 그곳에 있었으나 빵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았더라.28절)가 증명 한다. 모세는 지고하신 분의 은밀하신 곳에서 전능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였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다른 곳에서 영광을 찾으려고 한다. 영광이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 자에게는 영광을 얻을 수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에서 영광의 광채를 누리기를 원하는가? 모세는 영광을 얻은 자였다. 그는 용사들과 정치가들과 문인들 사이에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영광은 얼마나 가게 될 것인가? 우리들은 어디에서 영광을 구하고 있는가? 만일 참된 영광을 구한다면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자.그리하면 우리 주님께서 주시는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요 17:22) 주님께 주신 영광을 우리도 누리게 되어 질 것이다.사도 바울은 성령의 감동으로 이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 (고후4:4)라고 하였다. 구약에는 하나님의 광채가 있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때에는 수건으로 가려져 있었다. 그런데 이 수건이 주님이 오심으로 벗어졌다.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고후 3:14)고 한다. 말하자면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 부터 감추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다 (골 1:26)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아직도 유대인의, 안목으로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않고 있어서 참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고 있다. 바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지듯 (행 9:18) “내 눈을 열어서 주의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시 119:18) 라고 기도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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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애굽의 은총
    2019-12-23
  • 현대인의 우상(출 32:10-25)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은 상식이요 경험이며 도리이다. 임금이 둘일 수 없고 남편이나 아내가 둘일 수 없다. 오직 하나를 사랑할 뿐이다. 한 분에게만 충성할 뿐 그 외에는 거짓이요 자기 분열증 현상일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나의 미래를 물질에게 맡기는 잘못된 안내자를 구하는 때가 많다. 그렇지만 황금은 결코 나의 미래를 위탁할 수 있는 안내자가 될 수 없다.1912년 4월 14일 당시 최고의 여객선 타이타닉(titanic)호가 대서양에서 침몰한 참사가 벌어졌다. 많은 일화 가운데 하나는 보트로 구출할 수 있는 사람 중 두 여자가 자기 선실로 돌아갔는데 한 사람은 성경을 가지러 갔으며 한 여자는 잊어버리고 나온 보석 상자를 가지러 갔다가 시간을 많이 소비하다 구출 보트를 놓치고 말았다고 한다. 이 여자는 이 보석상자만 가져도 충분하였는데 다른 선실에 흩어져 있는 돈이나 보석들을 많이 찾아내느라고 시간을 허비하다 침몰 당하고만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 정 우리의 몸과 마음이 얼마큼 물질에 의존하여 있음은 나 자신과 하나님만 알고 있는 사실이다. 물질은 인간생활에 필수적인 것이라 해도 하나님의 위치에 물질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금송아지의 교훈이다.인간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황금의 송아지를 섬길 것인지 그 황금을 창조한 하나님을 섬길 것인지 선택은 오직 하나여야 한다. 출애굽기에는 우리에게 두 가지 대조적인 사건을 보여 주고 있다. 두 가지 대조적 사건이란 올라가는 운동과 내려가는 운동이다.올라가는 운동, 이는 곧 영적운동이다. 심령과 몸이 올라가는 것으로 이러한 운동이 출애굽 전체를 좌우했고 이 운동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올라간 순종의 운동이었고 말씀을 받으려고 올라가는 말씀 운동이었으며 하나님을 만나 대화하는 기도의 운동이었다(출 19장). 내려가는 운동, 이것은 세속으로 물드는 운동으로 마침내 금송아지를 섬기는 운동이다. 이 운동은 다시 애굽으로 내려가는 운동이니 올라가는 가나안을 향한 운동과는 대조적인 운동이다. 이들의 근본적인 방향은 가나안행이지만 그들은 동시에 때때로 애굽에 내려가려는 성향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현재 우리에게도 위와 같은 운동이 전개 되고 있다.그러므로 바울은 고백하기를 원하는바 선은 (가나안으로 향한 성향)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애굽으로 향하는 성향)이 있도다(롬 7:19). 올라가는 성향의 클라이 막스는 십계명이고 내려가는 운동의 극치는 금송아지다. 그런데 문제는 올라가는 운동에 참여하는 자는 적고 내려가는 운동에 참여하는 자는 많다는 사실이다.그러면 내려가는 운동에 참여한 자는 불신자들이었나? 아니다. 금송아지는 불신자가 아니요 그들은 홍해를 건넜던 자들이었고 말씀을 받은 자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오늘도 이 땅에 있는 교회 가운데는 두 가지 타입의 교회가 있다. 하나는 모세 타입의 교회요 또 하나는 아론 타입의 교회이다. 모세 타입의 교회는 산위에 있는 교회로 인내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는 교회요 예언자적 입장에 서있는 교회이다. 반대로 아론 타입의 교회는 산 위에는 올라가 보지 못하고 산 아래 속에 파묻힌 교회요 현재 하나님이 안 보인다고 조급해 하는 교회요, 샤머니즘 기복 신앙의 교회이다.오늘의 교회를 엄격한 의미에서 따져 볼 때 금송아지를 만들지 않은 교회가 별로 없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화려한 예배당 외식제도 철학 과학 이것으로 만족해하고 신령한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리지 않는다.그러나 그들은 분명히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다. 그들은 일어나서 먹고 마시고 뛰 놀았다.(6절)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지 않는 자는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라고 하셨다. 평화의 왕이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헌신하지 않는 자는 어두움의 일을 왕으로 섬기는 자로서 하나님과 대적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을 섬기느냐 사탄을 따르느냐 이지 그 중립은 없다.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그들의 결단을 요구 할 때 과감하게 돌아서는 용기를 보여 주었다. 이처럼 우리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 세상 것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에는 과감하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결정 할 수 있는 용기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바란다. 사탄의 종들은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보다 보이는 하나님을 요구한다. 현대인들이 보아야 할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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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애굽의 은총
    2019-12-06
  • (경현수)마을로 가는 길
    마을로 가는 길 강 순 화산 아래 마을로 가는 길이 있다산 그림자 길어진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어디로 갈까 바람에게 길을 묻는다길 끝에 마을이 있다고산 아래 또 길이 있는 줄 바람은 안다 휘어진 산길 돌아가면 사람소리, 저녘 연기 피어오르고창문에는 꽃등이 켜진다 내리는 어둠은 불빛에 숨어들고 마을은 돌아오지 않은 누군가를 아직 기다리고 모든 생명체는 길 위에서 생애를 마친다. 사람의 여정도 길 위에 그의 삶을 얹어 둔 채, 묵묵히 가고 있다. 원하든 원하지 아니하든 선택해야만 하는 존재임을...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 을 떠올리게 되지만 강순화의 시 ‘마을로 가는 길’ 전문에서는 또 다른 빛깔의 시를 감상하게 된다. 그윽하게 우리의 삶을 반추해 보게 된다. 노란 가을 숲 길도 이제는 앙상한 나무들만 직립해 있는 겨울로 접어 들었다. 깊이 사색하게 되는 계절 앞에 눈길이 머물게 되는 시편이다.시인은 여러 갈래의 여정 앞에서 ‘어디로 갈까?’라는 물음을 던지고 있다. 산 그림자 그늘 같은 암울함과 거목이 잘린 나무그루터기라는 은유적 의미를 깔아놓고 향방을 자문자답해보지만 알 수 없는 존재의 물음이 되고 있다. 문득 내면 깊은 무의식의 세계인듯, 혹은 분명히 그의 하나님이 되신 분의 음성이 아닐까. 바람, 그 곳에서 음성을 듣는다. 숲 길은 어둡고 그 갈래를 찾을 수 없어도 그에게는 마을로 가는 길이 보인다. 분별되지 않는 초저녁 어둠이 내리는 그의 갈래길 앞에서 저녘 연기 피어오르는 마을이 보인다. 창호지 창문에 붉은 등이 켜지고 정다운 목소리도 오순도순 오가고 부엌칸에서는 달그락달그락 밥짓는 소리, 그래서 갈 곳을 안다. 마음에 묻어둔 본향을 찾는다. 어둠이 짙어도 은하의 별들이 밤길을 밝힌다. 마을로 가는 길엔 기쁨과 평온이 내려오고 있다. 마을은 오지않은 그를 붉은 꽃등 하나 켜들고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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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애굽의 은총
    2019-12-06
  • 황금 신을 믿사오며(출 32:1-10)
    본문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을 위하여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숭배하게 한 패역한 행위가 언급 되고 있다. 아론은 모세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는데 기여한 자이지만 우상을 만들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이스라엘 백성들은 40일간 하나님의 응답도 없고, 모세도 나타나 않자 눈에 보이는 신을 만들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보이지 않는 분이시며(골1:15) 사람이 볼 수 없는 분이시다(딤전 6:16). 실로 믿음은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바라는 것이다.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지 않을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과 그 분의 약속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롬 8:24).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 4:18).이스라엘 백성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변질시키고 방탕과 게으름과 먹고 마시는 육신의 요구를 채워주는 맘몬 재물의 신을 원했던 것이다. 육신의 눈에 보이는 피조물로 바꾸었으니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다(롬 1:22).오늘날 수많은 종교단체가 근본적인 사람의 진리를 인간의 욕망을 채워주는 기복주의와 신비주의 신앙으로 변질시키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들었던 금송아지는 이 시대에 있어서 인간의 현실에 맞게 변질된 신앙을 상징하는 것이다.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빌 3:19) 거룩한 하나님의 계명들을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출 19:8). 고 자신만만 했던 그들은 하나님 앞에 얼마나 거짓되고 연약한 존재인가를 실제로 증명하였다.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다(마 5:24). 왜냐하면 인간의 맹세와 약속은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 그들의 마음은 애굽을 향해 있었다(눅 12:31).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제사장인 아론에게 금송아지를 만들게 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우상숭배하게 하려는 사단의 속셈이다. 사단은 결코 알곡이 없는 곳에 가라지를 뿌리지 않는다.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노예에서 해방 시키시고 홍해를 가르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시고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망각했다(행 7:39). 오늘날 가장 큰 불신앙의 죄는 눈에 보이는 것을 찾는 것이요 가장 큰 모독죄는 창조주 하나님을 썩어질 피조물 우상으로 만드는 것이다.인간은 본래 보이지 않는 것을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생각 하면서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우상을 만들어 그것으로 위안을 얻으려 한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보이지 않는 대상에 신앙심을 갖기 힘든 존재이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에 대해 인간은 조급하다.모세는 산 위에서 지체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모세를 기다리지 않고 우상을 만든 행위는 인간의 조바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간은 우상을 만들기 쉬운 존재이다 ‘우리를 인도할 신 곧 명성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그 들의 명성을 얻게 해 줄 우상을 만들지 않고는 못 배긴다.이를 테면 과학자들 예술가들 또는 조각가들에게 있어서는 우상은 바로 그들의 작품이다.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보고 “이는... 너희 신이로다”라고 말했듯이 그들은 자기들의 작품을 절대화 시키는 어리석음에 빠지고 만다.그들이 만든 금송아지는 잘못된 안내자를 상징하고 있다. 오늘의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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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애굽의 은총
    2019-11-25
  • 왜 향단이 있어야 했나?(출 30:1-10)
    성막에는 두개의 단이 있었다. 그 하나는 놋으로 입혀 그 이름을 ‘놋 제단’이라 하였고, 또 다른 하나는 금으로 입혔기에 금단이라 불렀다. 이 두 제단은 각각의 목적도 서로 다르고 희생을 드리는데 사용되었기 때문에 ‘번제단’ 이라하였고, 후자는 향을 피우는 곳이었으므로 향단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이제 금단이나 향단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뜻을 살펴보자.성막을 지으라는 명령을 받은 후에 성막에 필요한 시설과 도구 그리고 비품을 준비 하도록 하는 중에 향을 사를 분향 단을 만들라고 하신다. 분향 단에서 향을 태우는 일은 우리가 현재 기도를 드리는 것을 상징한다(시 14:11-20).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를 불렀사오니 속히 내게 임하소서.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내 음성에 귀를 귀 기우리소서.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을 드는 것이 저녁 제사같이 되게 하소서”라고 하였다.먼저 모든 종교 의식은 외형적이고 물질적인 형태로 나타나지만 그 속에는 보다 높은 차원의 종교적 의미가 담겨 있기 마련이다. 이 분향단 역시 마찬가지이다.우리의 기도가 거룩하신 하나님께 상달되는 이유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가 있기에 가능하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교제를 나누며 기도하는 자에게 바로 곁에서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마 5:6). 또한 하나님께 드리는 향단위의 향은 불의 열기로 부터 소화되어 발생한다.이는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신앙과 정렬이 기도로 솟구치는 점을 보여준다.성경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표현 할 수 없는 아름답고 뜨거운 교제를 종종 불과 같은 관계로 나타내고 있다. 신약의 사도들의 불같은 성령의 체험이 바로 그것이다. 분 향단은 네모 반 듯 했는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중재와 그에 대한 성령의 도우시는 역사가 동시에 그리고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주님께서는 하늘의 보좌로 올라 가셨을 때 성령은 교회에 머무르기 위하여 내려오셨다.분향 단을 만들어놓고 향을 사르지 않으면 단을 쌓을 의미가 없다. 그러나 여기에서 기도는 단순히 “주시옵소서” 하는 간구만이 아니다.하나님은 “너희가 구하기 전에 너희 모든 것을 아시느니라”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주님이시다. 부모는 어린 자녀가 무엇이 필요한지를 다 알고 있다. 기저귀가 필요한지 유치원에 갈 때 학비를 준비해 주고 학용품도 옷가지도 다 준비하여 놓고 있다. 먼저 주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알고 날마다 주안에서 잘 성숙해 가기만 하면 된다. 그래도 성도는 기도해야 한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무엇을 구하느냐이다.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 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 지라(계 8:3-4)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지만 여전히 육신 가운데 있다. 이런 사실을 아신 주님께서 구원을 받은 성도들을 위하여 하늘보좌 우편에서 대언해 주시고 계신다.이 향은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에 제단의 불과 함께 계속 피게 하기 위하여 향불이 피어나는데 방해나 저해되는 방해요소를 제거해야 하라고하신다. 마찬 가지로 우리들은 기도에 방해 되거나 꺼리는 요소가 있다면 이를 신속히 제거하여 온 교회로 하여금 기도의 향기가 타오르게 해야 한다. 8절에 조석으로 등불을 정리할 때는 향단도 돌보라“고 하신다. 기도는 향불처럼 항상 붙어야하며 꺼져서는 안 된다. 만일 성소의 향불이 꺼지는 날은 이스라엘 전체의 생명이 끊어지는 상태를 의미 하는 것이니 결코 소홀이 할 수가 있겠는가? 제사장은 다른 번제나 소제를 드리지 말며 비록 하나님께 드리는 번제나 소제의 제사일 지라도 이곳에서는 드리지 못하게 하셨다. 향단에는 다른 향은 사를 수 없다.“너희는 그 위에 다른 향을 사르지 말라고 한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바라시는 방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버리고 자기 멋대로 자기하고 싶은 대로 한다면 어떻게 그 생활을 신앙 생활 이라고 하겠는가?하나님은 오직 당신의 방법과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들만을 기뻐하시기 때문이다(삼상 15:22). 이것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약 4:3). 우리의 믿음의 완성 자이신(히12:2)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문에도(마6:10)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에서도 실현되기를 기도 하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 할 때에 먼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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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애굽의 은총
    2019-11-18
  • 놋 제단의 비밀(출 27:1-8)
    본문의 내용은 놋 제단에 숨겨진 비밀의 교훈을 담고 있다. 놋 제단을 히브리 어로는 미츠바(mizbeach) 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죽임의 장소 즉 형벌이 이루어지는 장소라는 의미이다. 이 제단 역시 조각목으로 제작되었는데 제물이 불에 탈 때 타지 않도록 놋으로 겉을 입혔다. 타지 않는다는 것은 놋은 불에 잘 견디는 특성이 있어 지옥의 사망 권세가 아무리 무서워도 결코 태울 수 없는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육신은 불에 탈 수 있어도 놋 제단은 타지 않음같이 예수님은 골고다 언덕에서 죄의 심판을 받으시어 육체는 찢기었어도 부활하심으로 타지 않았음을 증명하셨다. 예수님은 생명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찾을 권세도 있음을 부활로 증명하셨다(요 10:18). 죄인이 성막에 들어갈 때 맨 처음에 대하게 되는 놋 제단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궁무진 하다. 이제 놋 제단에 대한 교훈을 살핀 후 제단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성품과 사역 그리고 성도의 구원의 은총에 대해 알아보려고 한다.놋 제단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죄를 대속 할 제물을 잡아 그 피를 단 사면에 뿌리고 불로 태워 하나님께 제사하는 장소이다. 이러한 제사는 구약 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아벨의 제사에서 시작되었는데 아벨의 제사에 나타난 짐승의 희생과 그로 인한 구원의 복음이 바로 놋 제단에 담겨진 영적 의미가 담겨 있다.그러므로 우리가 흉악한 죄에서 구원을 받으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소에 들어갈 때 맨 처음 놋 제단을 거쳐야 하였듯이 우리는 놋 제단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을 만나는 체험이 있어야 한다.바로 우리의 믿음의 출발점은 여기서부터 이어야 한다. 여기에서 나를 위해 죽어주신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한 자만이 하늘나라의 신비와 은혜를 맛볼 수 있게 되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놋 제단의 실체가 이 땅에 들어났다. 예수그리스도는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신 희생 제물이 되셨다(벧전 1:19).예수 그리스도는 이곳에서 메시야의 직임을 완전하게 수행하셨다. 놋은 금속류 중에 아주 단단한 것으로서 금이나 은보다도 훨씬 더 불에 강한 저항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신 33:25, 히 1:8).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 전지전능하심에 비해 우리의 죄가 그 분 앞에 나아가는데 얼마나 부적합한가를 생각해 보았는가? 이사야선지는 거룩한 스랍들이 자기 얼굴을 가리 우고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라”고 크게 외치는 모습을 목격하였을 때 그는 마음으로 부터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외쳤다.그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의 보좌의 엄위하신 하늘의 심오한 존귀를 목격하고 한편으로 자신의 사악함을 보았을 때 이러한 감격이 우러나왔던 것이다(롬 5:21, 히 10:11-18). 히브리서 10장 11절의 말씀대로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자주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로는 언제든지 죄를 없이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위하여 영원한 제사를 드리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회개 하는 자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구주가 되셨다.이것을 누가 증거하나?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그가 본 것을 다 증거 하였느니라(요 1:2)고 하였다.예수님 자신이 증거하셨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 하였느니라”(행 2:22).“내가 아버지께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라”(요15:26)고 하셨고 히브리서 10장 15절에는 말씀으로 증거하시는데(히 10:16)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 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15:27)고하였다.시므온의 증거: 시므온은 “주재여 이제는 말씀 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 이니이다”하니 (눅 2:29-32) 라고 하였다.요한복음 4장 28절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너희 행한 모든 일을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 칼럼
    • 출애굽의 은총
    2019-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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