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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쓴 물을 마실 때(출 15:22-27)
    언제인가 처음으로 교회를 나온 초 신자 가정에 심방을 가게 되었다. 예배를 마친 후 한 교우가 “예수 믿기로 작정하고 교회를 나왔더니 가정에 우환이 오고 시련이 오는데 안 믿어도 좋을 것을 괜히 믿은 것 같다”는 말을 하는데, 예수를 믿기 시작하면 어려움도 올 수 있다고 “시험이 오더라도 참고 끝까지 믿음생활 잘하라”는 당부를 한 기억이 난다. 신자의 가정에 우환이 있고 생활이 순조롭지 못할 때 신앙에까지 타격을 입는 경우가 종종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원망하게도 된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 하는 지를 오늘의 말씀에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첫째, 우리 인생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마라의 쓴 물과 같은 곳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광야와도 같다. 광야와 같은 세상에 살 동안 언제나 달콤하고 형통한 날만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슬픈 일, 괴로운 일도 만날 수 있다. 전도서 3장에 보면 우리가 살 동안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을 병행시키셨다고 하셨고. 이 모든 때를 주장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라고 하였다.쓴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위로와 은총을 체험케 하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에는 누구나 울음으로 태어난다. 왜 울을까? 어떤 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죽음과 함께 태어나는 인생이기에 그 울음소리는 축복의 소리가 아니라 어둠과 비탄에 찬 목소리라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육지같이 건넌 감격이 채 가시지 않은 때 물 없는 사막을 지나가게 된다.그들이 물 없는 곳을 헤매이다가 웅덩이를 만났지만 안타깝게도 그 물은 쓴 물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흘 길을 행하였으나 물을 발견하지 못하고 물을 발견했을 때 써서 먹지 못하게 되었으니 그 괴로움이 어떠하였을까? 짐작이 간다.사람이 살아 갈 때에 제일 기본적이고 필요한 것이 물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 기본적인 것조차 제공하여 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또 준다고 하여도 그것은 쓰디쓴 괴로움 뿐 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바라고 소원하고 찾는 것이 만족을 주고 기쁨을 줄 것으로 알았지만 사실은 실망뿐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사는 곳은 어디든 마라의 쓴 괴로음이 있다. 영육간의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께 있다.둘째, 우리 신앙인은 이러한 쓴물을 만날 때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 하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원망으로 시작하여 원망으로 마치다 결국 광야 죽고 말았다. 그러면 그들은 왜 원망 하였을까? 24절 본문 15:1-11절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던 그들이 이제 모세에게 원망을 한다.왜 그들은 원망을 했나?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 것이고, 둘째는 현실만 보았기 때문이고 백성들이 조급했기 때문이다.하나님께서 앞으로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게 하기 위하여 훈련과 교육을 시키려고 마라로 인도하셨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조금만 기다려 보면 알 수 있는데 원망부터 하게 된다. 디모데 후서 3장 4절 말씀에 보면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의 마음이 조급하여 진다고 했다 절제하지 못하고 사나우며 팔며 원통함을 가진다고 했다.조급하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처지에 놓이더라도 내가 하려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너희 행사를 다 여호와께 맡기라”(잠 55:22).본문 25절에 백성들이 원망하고 있을 때 모세는 백성의 원망 소리를 들으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다.모세는 나무 가지를 물에 던지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물에 던졌더니 쓴물이 단물이 된 지라고 하였다. 쓴물이 단물로 바뀌는 것은 인간의 지혜나 사람의 힘이 아니라는 말이다.주님과 함께 걷는 삶은 언제나 쉽다. 그것은 나의 힘으로가 아니라 주님의 힘으로 살기 때문이다. 출애굽기를 자세히 보면 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이 이처럼 어렵고 힘든 길인가? 의심 할 만도 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이 길이 가장 빠른 지름길이라는 것이다. 광야에서 먹을 것이 다 떨어 졌을 때도 물이 나오지 않을 때에라도 하나님께서는 해결의 길을 마련해 놓고 계신다.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길이라면 어떠한 경우라도 하나님이 해결해 주시지 않겠는가?
    • 칼럼
    • 출애굽의 은총
    2018-12-14
  • 마라의 길목에서(출 15:22-27)
    언제인가 처음으로 교회를 나온 초신자 가정에 심방을 가게 되었다. 교우가 예수 믿기로 작정하고 교회를 나왔더니 가정에 우환이 오고 시련이 오는데 안 믿어도 좋을 것을 괜히 믿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는 말을 듣고 예수를 믿기 시작하면 어려움도 올 수 있다는 얘기를 말을 하면서 시험이 오더라도 참고 끝까지 신앙생활 잘하면 복이 온다는 말을 한 기억이 난다.신자의 가정에 우환이 있고 생활이 순조롭지 못할 때 신앙에까지 타격을 입는 경우가 있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한다. 이러할 때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 하는 지를 오늘의 말씀에서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우리 인생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마라의 쓴 물과 같은 곳을 만날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광야와도 같다. 광야와 같은 세상에 살 동안 언제나 달콤하고 형통한 날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전도서 3장에 보면 우리가 살 동안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을 병행시키셨다고 하였다. 이 모든 때를 주장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라고 하였다.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위로와 은총을 체험하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 날 때에는 누구나 울음으로 태어난다. 왜 울까? 어떤 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죽음과 함께 태어나는 인생이기에 그 울음소리는 축복의 소리가 아니라 어둠과 비탄에 찬 목소리라는 것이다.오늘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육지같이 건넌 감격이 채 가시지 않은 때 물 없는 사막을 지나가게 된다. 그들이 물 없는 곳을 헤매이다가 웅덩이를 만났지만 안타깝게도 그 물은 쓴물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흘 길을 행하였으나 물을 발견하지 못하고 물을 발견했을 때 써서 먹지 못할 때 그 괴로움이 어떠 하였겠는가?사람이 살아 갈 때에 제일 기본적이고 필요한 것이 물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 기본적인 것조차 제공하여 주지 못하는 것이고 또 준다고 하여도 그것은 쓰디쓴 괴로움 뿐 일때가 많다.우리가 바라고 소원하고 찾는 것이 만족을 주고 기쁨을 줄 것으로 알았지만 사실은 실망 뿐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는 곳은 어디든 마라의 쓴 물이 있다. 둘째, 우리 신앙인은 이러한 쓴물을 만날 때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 하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원망으로 시작하여 원망으로 마치다 결국 광야 죽게된다. 본문 15장 1-11절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던 그들이 이제 모세에게 원망을 하기에 이른다.왜 그들은 원망을 했는가?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 것이고 둘째는 현실만 보았기 때문이요. 또한 백성들이 조급했기 때문이다.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게 하기 위하여 훈련과 교육을 하시려고 마라로 인도하신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조금만 기다려 보면 알 수 있는데 원망부터 하게 되는 것이다. 디모데후서 3장 4절 말씀에 보면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의 마음이 조급하여진다고 했다. 절제하지 못하고 사나우며 팔며 원통함을 가진다고 했다. 조금하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어떤 처지에 놓이더라도 내가 하앞서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는 자 되자. “너희 행사를 다 여호와께 맡기라”(잠언 55:22)했고, 본문 25절에 백성들이 원망하고 있을 때 모세는 백성의 원망 소리를 들으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다고 한다.출애굽기를 자세히 보면 왜 하나님이 인도 하시는 길이 이처럼 어렵고 힘든 길인가? 의심할 만도 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이 길이 가장 지름길이라는 것이다. 광야에서 먹을 것이 다 떨어 졌을 때도 물이 나오지 않을 때라도 하나님께서는 해결의 길을 마련해 놓고 기다리신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길이라면 어떠한 경우라도 하나님이 해결해 주시지 않겠는가?마라는 곧 고통과 고난을 상징하는 것으로 예레미아 선지자도 쑥과 담즙 같은 쓴 고난을 체험하였다. 이러한 쓴 경험을 한다 할 찌라도 마라를 극복 하는 자에게 축복이 오게 된다.원망은 저주와 징계의 조건이 되지만 기도는 용서와 축복의 요소가 된다. 하나님이 지시하신 십자가는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 너무 심할 때 그야말로 해결할 엄두도 못 내고 속수무책일 때 기도 밖에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 칼럼
    • 출애굽의 은총
    2018-12-01
  • 곤경에 대처하는 가장 좋은 방법(출 14:21-3)
    “이스라엘 백성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고 물은 그들의 벽이 되니”(22절). 우리가 하나님의 부름에 따라서 곤경을 극복하려 할 때 하나님께서 축복을 해주시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럽고 기쁜 일인가? 우리가 인생길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의 의무를 잘 이행할 때 정말 불가능한 것 같이 보이던 그 험난한 바다도 갈라져 건널 수 있게 되며 우리가 걷는 길 좌우에는 물의 벽이 마치 호위병처럼 서있게 되는 것이다.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을 때 우리의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어려움을 그 분께 의지하는 일이야 말로 바로 우리 자신을 돌보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세상은 육체를 따라 사는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다.“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갈 4:29). 우리는 구원받은 후에 모든 것이 변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육신을 정욕을 쫓는 성품은 여전히 그대로 살아 있음을 알 수 있다.그리하여 육신의 탄식이 나오게 되고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시지 않은 것이 아닌가? 라고 의심을 하게도 된다. 이렇게 육신으로는 우리를 추격하여 가나안의 안식을 누리지 못하게 하지만 홍해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 나면 곧 마음이 놓이게 된다.홍해는 육신을 장례 치르는 세례를 말한다. 예수님의 피로 씻음을 얻고 구원 받은 성도들은 곧 바로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의미로 세례를 받게 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는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 받은 이 후에 육체를 쳐서 복종 시키는(롬 8:13) 영적 싸움이 시작된다. 예수 안에 있다 할지라도 사탄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찾는다고 했다.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했다. 어느 때는 대적들에 둘러 쌓이고 쫓기어 돌파구를 찾지 못해 방황할 때도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홍해가 그들을 가로 막고 있을 때에라도 하나님은 새로운 길을 마련해 놓고 계신 것을 믿으시기 바란다.방황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를 통해 들려 주신다. 첫째 두려워하지 말라이다. 본문을 보니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라고 말씀한다. 그것은 언제나 그렇다. 우리의 눈이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지 그에게 돌이켜 세상을 바라볼 때 두려움이 생긴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 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이 ‘믿으라’는 말씀은 현재 진행형이다. 지금 계속 믿으라. 이것이 두려움의 해결책이다. 인생에 가장 큰 적은 이 두려움이요. 끝내 용기를 잃게 한다.그런데 하나님은 두려워 말라고 하신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보듯이 홍해를 가르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능히 이길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으니”(히 11:29).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오늘 본문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만나게 하시어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것이 아니고 오히려 애굽 군사를 자멸시켜 주셨다.바알스본 애굽 군대가 볼 때는 독안에 든 쥐와 같이 장소처럼 보일지 몰라도 이스라엘 주인이신 하나님이 감시 하시고 하나님이 지키시는 곳이라는 의미다.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13)고 하셨다. 이 말씀은 위기에 처한 우리에게도 방향을 제시해 주시는 말씀이다.둘째. 가만히 서 있으라 하신다. ‘13절’ 길이 막혔을 때 덤비고 서둔다고 해서 해결되어 지지 않는다. 가만히 서서 하나님께 맡길 줄 알아야 한다. 왜 그렇게 해야 할까?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막다른 골목에 처했을 우리가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선민을 홍해에서 매장시키시려고 출애굽시킨 것은 아니다.그런데 그들은 우리를 이끌어 내어 왜 죽게 하느냐고 말한 것은 길이 열리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축복하기 위하여 출애굽시키신다고 생각을 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모든 것을 믿음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 길을 열어 주신다. 우리가 염려하고 불안하고 원망한다고 문제가 해결 되는가? 우리의 머리털 하나라도 검게 하거나 키를 한 자나 크게 할 수 있는가? 가만히 서라 말씀은 조용히 서 있기만 하라는 말씀은 아닐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기억하고 새기라는 의미일 것이다.
    • 칼럼
    • 출애굽의 은총
    2018-11-16
  • 길이 막힐 때 (출 14:1-16)
    이 시대를 가리켜서 ‘총체적인 위기의 시대’라고 한다. 자연 생태계를 보자.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의 공기가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니다. 비가 올 때는 산성비가 내린다. 정치적으로 불안하다. 요즘 돌아가는 상황을 보자. 도덕적인 타락이다. 경제가 어렵다고 하지만 유명한 관광지나 유흥가를 가보면 먹자판, 놀자판이다.학교에서는 학생 불량배 써클이 수백 개가 되고, 중 고등학교 뿐 아니라 초등학생들까지 폭력 행사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종교계는 어떠한가? 교회 신자의 수가 감소하는 형편인데 감소하는 이유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의 신뢰를 상실해 가고 있다는 증표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걸 기억해야 한다. 위기는 곧 길이라는 말이 있다. 위기의 상황에도 길은 있기 마련이다. 바다에 길을 내신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도 본문에서 이 길을 찾아보자.오늘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심히 곤경에 처한 것을 볼 수 있다. 비하히롯 근처 바알스본 맞은 편 바닷가에서 이스라엘은 길이 막혔다. 앞으로 나아 갈 수도 없고 뒤로 후퇴할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형편에 처하게 되었다.이 막다른 골목에서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의 반응을 보자. 이스라엘이 목표로 하는 가나안 땅은 어떤 곳인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땅이다. 이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한다.젖과 꿀이 흐른다는 말은 넉넉하고 풍성하고 여유가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옛 말에 호사다마라는 말이 있듯이 좋은 일에는 안좋은 일도 생기는 법이다. 출애굽하는 과정에는 환란과 핍박이 있음을 각오해야 한다.애굽의 바로왕은 이스라엘을 보내지 않으려고 하다가 장자까지 전멸을 당하지 않았았든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핍박과 방해 공작이 있었듯이 우리가 천국 가나안을 향하는 우리의 앞길에도 원치 않는 고난과 시련을 만날 수 있다. 그들이 출애굽을 했지만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가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 이때에 하나님은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해 주셨다. 그런데도 다시 진퇴양난의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이곳의 지형을 살펴보면 좌우는 높은 산이 있고 앞에는 홍해 바다가 가로 막혀 있다. 우리가 하늘나라 순례길에도 이와 같이 원치 않는 장애물이 우리의 길을 가로막는 경우가 많이 있다. 때로는 결혼 문제가 우리의 믿음의 길을 방해하기도 하고 부모님의 장례식이 문제가 되기도 하고 또는 우리의 가정 문제로 또는 질병이나 사업문제 장애가 될 수도 있다.그러할 때 우리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나? 주님의 말씀을 들어 보자. 축복과 보상을 받을 때 핍박을 겸하여 받는다고 했다. “금생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으리라”(막10:30).그리스도도 안에 바르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게 되어 있다(딤후 3:12). 무릇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에게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하셨다.예수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영혼 안에 광명이 있고 예수님 박에 있는 영혼들은 어둠 가운데 있는 자들이다. 이제 먹구름이 우리의 길을 가로 막아 우리가 타파할 수 없는 많은 어려운 일들로 곤경에 처할 때 바로 그때가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실 때라는 것을 깨닫고 우리도 모세처럼 “앞으로” 라고 할 수 있어야 하며 캄캄한 바다의 일렁이는 파도를 넘어 안전하게 앞으로 나아감으로 써 그 모든 곤경으로 부터 헤쳐 나와 그 분의 구원의 손길을 바라보게 되어 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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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애굽의 은총
    2018-10-26
  • 어느 손인가?(출13: 16-18)
    드디어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령으로 홍해를 건너 광야길로의 힘든 행군이 시작됩니다. 백성들이 행군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의 가는 길을 비추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백성과 함께하시고 보호하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이스라엘이 광야 40년 동안 무사히 지낼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보호하심 때문이었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잘 보여 주신 내용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한번 택하신 백성에 대해서는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구원을 이룰 때까지 함께 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여호와의 능하신 손과 그 손의 권능의 표현이 자주 등장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손은 애굽의 압제로부터 그의 백성을 구속해 내시는 하나님의 강한 손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하나님의 손은 언제나 자비와 사랑의 손으로 이해되어 왔으나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바로의 절대 권력으로부터의 구원하시는 권능의 손으로 설명되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미치는 곳에는 언제 어디서나 모든 면에 새로운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오늘의 말씀은 바로 신약시대에 주신 말씀과 연관을 맺어 그 의미가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분이신데 그 능력이 얼마나 크신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낮은 곳까지 미치는 손, 하나님은 우리가 처해 있는 가장 낮고 미천한 자리까지 펼치십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정한 어떤 수준까지는 스스로 해결하고 그 나머지만 하나님께서 개입 하셨다면 하나님의 권능의 손은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이 오직 웅덩이의 바닥에 누워 신음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깨어져 있었습니다. 스스로 일어서거나 출발할 수 있는 아무런 힘이 없었습니다.바로 그곳에 하나님의 강한 손이 걸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손은 가장 낮은 곳에서 우리를 잡으시고 만지시기 위해 뻗어 내리십니다. 우리가 힘이 없고 헛되이 힘을 소진하여 영혼이 쇠하여졌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자리로 오십니다.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셔서 짧은 시간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한 여정을 일부러 모래투성이인 사막으로 깊숙히 인도하셨을까? 그것은 여행길에 블레셋과의 전쟁을 겪을 때 다시 애굽으로 돌아갈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400년간 애굽에 물들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간 광야에서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계셨던 것입니다.종국적으로는 우리에게 유익하게 하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을 무서워하는 연약하고 미약한 민족이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당장은 멀고 험해도 그 길을 통해 전열을 가다듬고 많은 경험을 쌓게하여 가나안의 전쟁에서 승리자로 만드시기 위함이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이 곧 인류의 구속자시며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위대한 하나님과 구속 역사를 위한 도구라는 사실과 하나님의 역사가 그들을 통하여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 가도록 역사하고 계신 것입니다. 본문을 읽으며 하나님은 우리 민족의 통일을 준비하게 하시고 예비해 놓으시고 때가 이르면 그 강한 팔로 평화 통일의 역사를 이루실 것을 역사 하시고, 평화 통일의 꿈을 이루어 주시리라 확신합니다.
    • 칼럼
    • 출애굽의 은총
    2018-10-19
  • 어느 손인가?(출13:1-16)
    드디어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령으로 홍해를 건너 광야길로의 힘든 행군이 시작됩니다. 백성들이 행군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의 가는 길을 비추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백성과 함께하시고 보호하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이스라엘이 광야 40년 동안 무사히 지낼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보호하심때문이었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잘 보여 주신 내용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한번 택하신 백성에 대해서는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구원을 이룰 때까지 함께 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그래서 본문에서는 여호와의 능하신 손과 그 손의 권능의 표현이 자주 등장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손은 애굽의 압제로부터 그의 백성을 구속해 내시는 하나님의 강한 손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하나님의 손은 언제나 자비와 사랑의 손으로 이해되어 왔으나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바로의 절대 권력으로 부터의 구원 하시는 권능의 손으로 설명되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미치는 곳에는 언제 어디서나 모든 면에 새로운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오늘의 말씀은 바로 신약시대에 주신 말씀과 연관을 맺어 그 의미가 더욱 잘 이해 할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분이신데 그 능력이 얼마나 크신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낮은곳까지 미치는 손. 하나님은 우리가 처해 있는 가장 낮고 미천한 자리까지 펼치십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정한 어떤 수준까지는 스스로 해결하고 그 나머지만 하나님께서 개입하셨다면 하나님의 권능의 손은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이 오직 웅덩이의 바닥에 누워 신음 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깨어져 있었습니다.스스로 일어서거나 출발할 수 있는 아무런 힘이 없었습니다. 바로 그곳에 하나님의 강한 손이 걸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손은 가장 낮은 곳에서 우리를 잡으시고 만지시기 위해 뻗어 내리십니다.우리가 힘이 없고 헛되이 힘을 소진하여 영혼이 쇠하여 졌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자리로 오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셔서 짧은 시간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한 여정을 일부러 모래투성이인 사막으로 깊숙히 인도 하셨을까?그것은 여행길에 블레셋과의 전쟁을 겪을 때 다시 애굽으로 돌아 갈 위험이 있었기 때문인 이유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400년간 애굽에 물들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간 광야에서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계셨던 것입니다.종국적으로는 우리에게 유익하게 하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을 무서워하는 연약하고 미약한 민족이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당장은 멀고 험해도 그 길을 통해 전열을 가다듬고 많은 경험을 쌓게 하여 가나안의 전쟁에서 승리자로 만드시기 위함이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야훼 하나님이 곧 인류의 구속자시며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위대한 하나님과 구속 역사를 위한 도구라는 사실과 하나님의 역사가 그들을 통하여 이루어 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 가도록 역사하고 계신 것입니다.
    • 칼럼
    • 출애굽의 은총
    2018-10-05
  • 표적을 볼 때에(출 12:3-20)
    본문 13절에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 찌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하나님의 시선은 집을 보는 것이 아니다. 집이 크냐? 작으냐? 단독주택이냐 고급아파트에서 사느냐?에 관심이 없으시다.. 피가 없으면 심판이 있고. 피가 있으면 넘어가겠다고 하신다. 바로 그것이다. 안전한 피난처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밖에 없다.이것이 우리의 표적이 되어야 한다. 성경에 보면 표가 찍혀 구원에 이른 자들이 나온다. 오늘 본문에 백성들이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니(출 12:7) 그 피가 바로 표적 이 되어(출 12:13) 멸하는 자로 하여금 그 피 있는 집을 넘어가 멸하지 않고 (출 12:13)구원하시겠다고 하신다.피의 표적이 있는 이스라엘은 자기네들의 공로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표가 찍혀 구원 받게 된다. 계7:1-8에서 그 이마에 인 치심을 받은 14만 4천은 땅에서 구속함을 받은 사람들인데, 그들도 역시 자기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인 치심을 받아 구원함을 받은 자들이다.에스겔 8:5-18절까지에 보면 당시 예루살렘의 죄상을 보여 준다. 그런데 그 죄에 가담하지 않고 그들이 그 죄상 때문에 탄식하며 우는 자들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이마에 표를 찍으시고 예루살렘을 멸하시는 가운데서 그들을 구해 내셨다(겔 9:4). 우리는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인 치심을 받아 구원함을 받은 자들이다. 그렇다고 생활은 되는대로 살아도 괜찮은 것인가? 은혜로 인 치심을 받아 구원에 이른 우리들은 겔 9:1-8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구원받은 자 답게 생활에 있어서도 인 치심을 받은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양을 준비하라(3절). 어린양은 무엇인가? 이사야 53장 7절에서 메시야에 대한 예언에서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 이라고 말씀하셨다. 세례 요한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 세상의 죄를 위하여 준비되신 어린 양 이시다.어린 양은 한 양이다(a, lamb). 5절에는 “어린양”(the lamb)이라고 정관사를 붙혀서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제 너희 양(your lamb)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개인의 구주로 소유하는 것이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바울처럼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출애굽기 전체를 통하여 단 한 번도 ‘양들’이라고 복수로 사용하지 않았다. 오직 한 양 갈보리의 어린양 그 양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는 분 이시다. 그 양 갈보리의 그 양이 너희 양이 되게 하라고 말씀하신다.우리 양이 아닌 너희 양이 나의 양이 되어야 한다. 그 양을 불 때에 구워 먹으라고 하신다. 먹는다는 것은 자기 것으로 삼는 의미이다. 주님은 생명의 떡이시며 생명의 양식이다. 내 살을 먹고 내 살을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요 6:54-57). 특별히 하나님은 이 달 열흘에 양을 취하였다가 이 달14일에 준비한 어린양으로 하라고 하신다. 그것은 어린양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14일을 바라보고 준비하라는 뜻이다. 그리고 남은 날 동안 애굽땅에서 쓸데없는 일에 분요하지 않도록 하라는 분부이시다. 4일 동안 살기 위해 애굽이나 땅이나 집이나 큰 물건을 사겠는가? 오늘날 우리 역시 그 4일간의 삶을 살고 있다. 곧 하나님 앞에 가게 될 것과 곧 주께서 재림하실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이 짧은 세상에서의 어리석은 일을 추구하지 않을 것이다.하나님의 약속이 내가 바라는 것처럼 빨리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결코 실망하지는 말자. 때가 이르면 반드시 그 분의 의도대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비록 지금은 힘들고 어렵더라도 인내하며 그 날을 바라며 살아가자.
    • 칼럼
    • 출애굽의 은총
    2018-09-21
  • 왜 양인가?(출 12:1-14)
    구약 성서에서 가장 의미 있는 사건은 출애굽 사건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민족적인 행보를 시작한 움직임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을 잘 설명해 주는 사건이며 이 땅에서 살아가는 교회와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잘 이해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오늘 읽은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날 밤에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행동 지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준비와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이스라엘 자손들은 애굽에 들어온 이후 430여 년 동안 애굽 사람들이 사용하던 태양력을 그대로 사용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달력을 버리고 새로운 달력을 사용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명령을 내리셨을까요? 그 달에 이루어질 일이 너무나 크고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달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떠나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달이기에 그 의미를 기념하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출애굽 사건에 매우 큰 의미를 부여하신 것입니다.오늘날도 중생의 경험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출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월절은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속받은 성도는 진정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중생은 죽음에서 영생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말을 듣고 또 나보내신 이를 믿는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 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예수께서 삭개오의 가정에 가셔서 오늘 구원이 이 가정에 이르렀다고 선포하심으로 삭개오의 삶을 다시 새 삶의 시작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눅 19:9).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주의피로 죄 씻음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나에게 출애굽의 날입니다.이 날로 시작하여 나 개인의 달력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가나안을 향한 순례의 길은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동시에 세상과는 분리의 날입니다. 애굽을 잊어야 합니다. 포기하고 이제 떠나야 합니다. 우리가 계획하고 행하는 일들이 세상적인 것으로 기록이 되는 세상의 달력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성도를 온전케 하기위해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나의 인격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 위해서 스케줄을 잡는 신앙의 달력이 되어야 합니다.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의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었습니다. 또한 사망에서 생명으로 그리고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긴 기념절기이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거듭난 그 날이 영혼의 유월절이며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고 지옥 생활을 뒤로하고 천국으로 향하는 출발점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주의 말씀 받은 그 날 참 기쁘고 복되도다. 기쁜 날 기쁜 날 주 나의 죄 다 씻은 날” 이 찬송은 오직 마음 속에 죄로 부터 출애굽한 유월절이 있는 사람만이 부르는 찬송입니다. 이것은 구 시대를 종식시키고 새 시대를 여는 출발점인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이러한 새로운 출발점으로 삼았으면 하는 소원입니다.
    • 칼럼
    • 출애굽의 은총
    2018-09-14
  • 구원의 여정(출 11:6-10)
    본문을 보면 모세는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와 백성들에게 심히 크게 보였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모세가 큰 사람 이어서가 아니라 크신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하심으로 큰 사람으로 보인 것입니다. 모세의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크게 만든 것입니다. 인간이 크게 되고 작게 됨은 하나님의 장중에 있는 것입니다. 독일의 프리드리히 대왕이 어느 날 시골 학교를 방문했는데 그 시간이 마침 지리 시간이었다고 합니다. 대왕은 아이에게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습니다. 학생: 프러시아 입니다. 대왕: 프러시아는 어디에 있지, 독일에 있습니다.독일은 어디에 있지, 유럽에 있습니다. 유럽은 어디에 있니, 이 세상에 있습니다. 이 세상은 어디에 있니, 학생이 잠깐 멈추더니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과 인간 모두는 하나님의 장중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인 우리 모두에게도 독일 학생의 마지막 대답이 고백되어져야 합니다. 우리를 앞서 가시는 하나님은 온전하신 신이십니다. ‘사람으로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으로 하여금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시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기동하여 있느니라(행 17:28). 하나님의 궁극적 관심과 목적은 인간들에게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알게 하시어 하나님의 구원 영역으로 인간들에게 들어오게 하시는 것입니다.여러분의 입술에서 손에서 눈빛에서도 하나님이 참 하나님 되심을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표징을 통해서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 (9:16)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전파되기를 원 하시는 그 이름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인 (빌2: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 소식을 온 천하에 전파하며 네 아들과 네 자손의 귀에 전하여지며 그들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해” 줄 것입니까? 철학자는 고상한 삶의 지혜를 말하고 종교가는 까다로운 교리를 말하며 정치가는 더 풍요로운 삶을 제시하고 과학자는 인류의 편리한 삶을 제시 합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 어떤 이념이나 방법도 우리의 죄를 속하고 의롭게 하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해 주지는 못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만이 우리를 정결케 하고 의롭게 하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어린양의 피를 바른 집만이 재앙을 면하였고 그 구원은 양의 피를 흘리는 희생의 결과 이였으며 완전한 피였습니다. 생축까지 구원되었고 이스라엘의 두 손에는 은금 패물이 넘쳐 났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주심은 우리에게도 새로운 삶 즉 순례자의 삶을 요구 하십니다. 다윗왕은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 (대상 29:15)라고 했습니다. 그림자는 빛이 있을 동안만 드리워지는데 이것이 그림자의 운명입니다. 나그네 인생은 의의 태양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본향인 천국을 향해서 떠나야만 합니다.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3-16). 땅에서는 주어진 사명을 다한 후 하나님의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향하 여 믿음으로 훌쩍 떠나는 인생이 복있는 삶인 것입니다. 결코 이 땅을 최종 목적지로 삼을 수 없는 철저한 이방인의 삶을 살기를 요구 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 하시고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나라와 제사 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계1:5, 6). 우리는 구원받은 무리입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신 주님께 늘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구원 받은 자로서 이 세상에 대한 기대와 집착을 버리고 하늘 가나안을 향하여 순례자의 행진을 계속해가야 합니다. 결코 세상과 벗하지 않는 삶 하늘을 바라보며 주님을 뜻을 따라 사는 삶 만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삶인 것입니다.
    • 칼럼
    • 출애굽의 은총
    2018-08-31
  • 앞서 가시는 하나님(출 11:1-10)
    바로는 캄캄한 흑암의 재앙을 당하고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로는 모세에게 두 번 다시 자신의 얼굴을 보는 날에는 죽으리라고 경고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바로 왕에게 바로의 장자로부터 여종의 장자 그리고 애굽 땅의 모든 짐승의 첫 태생은 모두 죽을 것이라는 최후의 경고를 보냅니다.바로 왕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계속 강팍케 하신 것은 이런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권능을 보여 주시려는 계획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할 때 하나님께 드릴 번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에 필요한 가축을 반드시 가지고 가야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계속 희생제를 요구하셨기 때문입니다.이스라엘 민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희생제를 통해서만 가능했습니다. 그러므로 애굽에서 기르던 가축은 참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출애굽 하기 전날 이스라엘 민족들은 하나님께 최초의 희생제물을 드렸는데 바로 그것이 어린양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원 받은 그 이후에는 예수님의 피를 잊어버리고 유월절을 망각하고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유월절의 피를 통한 죄사함을 잊어버릴 것을 아시고 성만찬을 통하여 어린양 되신 예수님을 기념하게 하셨습니다(눅 22:19). 오늘날 구원 얻을 때의 그 감격 그 기쁨 그 놀라움은 사라지고 깊은 영적 잠을 자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구원받은 첫 사랑(계2:5)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을 향한 최후의 재앙을 예비하셨습니다.오늘 이 세상 지금까지 하나님의 질서 속에서 존재하고 진행되고 있는 것은 이 땅에 구원 얻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끌어 내실 때 세상은 온통 재앙의 땅으로 변할 것입니다.애굽 땅에 요셉이 있었기 때문에 그로 말미암아 애굽이 큰 복을 받았고 오벧에돔의 집에 법궤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한 것과 같이(삼하 6:11), 이 세상은 예수님과 그분의 성도들 때문에 하늘의 복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는 캄캄한 흑암의 재앙을 당하고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로는 모세에게 두 번 다시 자신의 얼굴을 보는 날에는 죽으리라고 선포까지 합니다. 바로는 캄캄한 흑암의 재앙을 당하고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방백 들에게 여호와의 이름을 널리 전하고 참 신은 오직 하나님 자신뿐이심을 선포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출애굽을 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시키기 위해 이스라엘을 보내지 않았습니다.하나님께서 강팍한 바로의 마음을 방치하신 결과 출애굽의 시기가 모세의 호렙산의 소명 이후 약 6개월 간 지연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왜 당장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지 않으시고 그토록 많은 이적과 기사를 베푸신 이후에 출애굽을 시키셨을까하는 것입니다. 이는 첫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사백년간 침체됐던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경외를 고취시키기 위함이요, 둘째는 그들의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전하기 위함이며, 셋째는 애굽 사람들에게 출애굽 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시키고 열방들에게 두려운 여호와의 이름을 널리 전하고, 참 신은 오직 당신 한 분임을 선포하기 위해서이며,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출애굽을 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하기 위함입니다.
    • 칼럼
    • 출애굽의 은총
    2018-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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