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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려면(출 23:1~20)
- 본장에는 모세를 통해 언약 백성들에게 주어진 각종의 생활 규범들이 계속되고 있다. 십계명의 제9계명의 거짓증거, 거짓 재판 금지 조항과 함께 원수에게 선을 행하고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 것 등을 언급하고 있다. 오늘의 사회는 거룩한 사랑의 공동체내에 공의와 사랑 법과 정의가 힘이 아니라 돈이나 뇌물이 더 큰 위력을 발휘하는 세상이다. 그러나 천국은 결코 뇌물로 들어 갈 수가 없다.우리 육신은 항상 눈에 보이는 크고 많은 것 보이는 힘을 의지 하려고 하고 진실한 사람 보다 다수의 힘으로 정의를 결정 짓는 경향이 있다. 인류가 점점 발달함에 따라 대중화가 가속되어 대중사회 문화로 발달 되어 가고 있다. 이렇게 대중으로 조직된 사회는 조직을 구성하고 있기 마련인데 잘못 형성된 여론에 좌우되는 경향이 대부분이다. 이렇게 형성된 여론은 개인이나 소수에 대한 무시와 제재를 가하는 심각한 오류를 발생하고 있는 것도 부인 할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다수를 따르는 악을 범치 말라고 하신다. 성경의 정의는 단순히 많다는데 있지 않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못박히셨는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유대 군중들의 소리에 굴복한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오늘날 다수에 의한 행동과 악행들이 얼마나 많이 벌어지고 있가?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공의에 입각하여 다수의 결정이 올바르지 않을 때는 혼자서라도 담대히 진리의 편에 설 수 있어야 함을 말해주고 있다. 즉 진리에 어긋난 다수편이 되지 말라는 것이다. 아무리 이해관계가 얽힌 문제라 하더라도 정의를 추구하며 억울한 상대의 아픔을 깊이 이해 할 수 있어야 한다.사도 바울은 엡 4:22절에서 “거짓을 버리고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한 지체이다. 그러므로 성도들끼리 서로 거짓말 하는 것은 자기 지체를 속이는 것이고 자기 양심을 속이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거짓말 하지 말고 참된 것을 말하라고 가르쳐 주고 있다.하나님께서는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보거든 그 주인에게 돌려줄 것을 명령 하셨다.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지거든 못 본체 하지 말고’ 그 나귀를 도와주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원수였던 죄인들이 길을 잃고 해매일 때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고(요 14:6)무거운 죄짐을 지고 지쳐 쓰러져 있는 우리를 일으켜 세워 주시고 구원해 주셨다.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이유 중의 하나는 ‘사랑이다. 즉 율법의 완성을 위해서 오신 대속의 역사이다. 그런데 한 지체이면서도 반목과 질시와 미워함으로 이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은 슬프고도 괴로운 일이다. 나무의 뿌리가 살아 있는 한 나무의 가지를 잘라내어도 그곳에서 더 많은 덧가지들이 자라난다. 그리고 벌은 때로 주인을 쏘기도 하지만 그들은 주인을 위해 열심히 꿀을 모은다.이와 같이 우리를 괴롭 하는 원수를 위해 복을 빌 때 우리를 위하여 더 큰 은혜와 축복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자.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 3:16). 그 사랑을 받은 우리도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 하라는 명령을 내리신다. 사랑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시고 신앙은 이웃과 나누라는 것이요 이웃을 위해 쓰라는 것이다.그런데 우리는 이웃을 위해서 쓰라고 받은 하나님의 사랑은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고 자신의 성숙을 위해서 주어진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는 자신을 위해서 사용 하지 않는다. 사랑이 없는 믿음은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 유익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육신의 요구대로 살아갈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감독자요 우리의 지도자이신 성령의 뜻을 좇아 살아야 한다. 거듭난 성도들은 육신을 따르지 않고 성령의 뜻에 순종 할 때만 육신의 상징인 가나안 일곱 족속들을 쳐서 복종시킬 수가 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족속의 신을 섬기지 말고 숭배하지 말고 그들의 주상을 파괴 할 것을 명령하셨다.여기서 주상은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 있는 사각 기둥을 의미 하는데 이러한 석주들이 바티칸 광장을 비롯하여 미국, 영국 프랑스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다.하늘을 향해 솟아있는 돌기둥은 남성의 심벌로 상징되기도 하고 영적인 의미로 육신의 자아, 잘못된 성격이나 고집을 의미하기도 한다. 구원받은 성도들이 계속하여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은 아직도 마음에 주상을 파괴하지 못하고 있는 증거이다. 우리의 육신의 자아인 주상을 파괴 할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처럼 우리에게 놀라운 평강의 복을 내리실 것이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과의 싸움이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싸움에서 실제로 승리로 이끄시므로 영적인 싸움에 담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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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려면(출 23: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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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조건(출 23:1-20)
- 본장에는 모세를 통해 언약백성들에게 주어진 각종의 생활규범들이 계속되고 있다. 십계명의 제9계명의 거짓증거, 거짓재판 금지 조항과 함께 원수에게 선을 행하고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 것 등을 언급한다. 오늘의 사회는 거룩한 사랑의 공동체내에 공의와 사랑, 법과 정의가 힘이 아니라 돈이나 뇌물이 더 큰 위력을 발휘하는 세상이다.그러나 천국은 결코 뇌물로 들어 갈 수가 없다(23:1-10). 우리 육신은 항상 눈에 보이는 크고 많은 것, 보이는 힘을 의지하려고 한다. 또한 진실한 사람보다 다수의 힘으로 정의를 결정짓는 경향이 있다. 인류가 점점 발달함에 따라 대중화가 가속 되어 대중사회가 문화로 발달되어 간다. 이렇게 대중으로 조직된 사회는 조직을 구성하고 있기 마련인데 잘못 형성된 여론에 좌우되기 쉽다. 이러한 다수의 여론은 개인이나 소수에 대한 무시와 제재를 가하는 심각한 오류를 발생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다수를 따르는 악을 범치 말라고 하신다.성경의 정의는 단순히 많다는데 있지 않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못박히셨나? 오늘날 다수에 의한 행동과 악행들이 얼마나 많이 벌어지고 있나?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공의에 입각하여 다수의 결정이 올바르지 않을 때는 혼자서라도 담대히 진리의 편에 설 수 있어야 함을 말해주고 있다. 즉 진리에 어긋난 다수편이 되지 말라는 것이다.아무리 이해관계가 얽힌 문제라 하더라도 정의를 추구하며 억울한 상대의 아픔을 깊이 이해 할 수 있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장 22절에서 “거짓을 버리고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 가 됨이니라.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한 지체가 되어 있다.그러므로 성도들끼리 서로 거짓말 하는 것은 자기 지체를 속이는 것이고 자기 양심을 속이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거짓말하지 말고 참된 것을 말하라고 가르쳐 주고 있다.하나님께서는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보거든 그 주인에게 돌려 줄 것을 명령하셨다.‘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지거든 못 본 체하지 말고’ 그 나귀를 도와주라고 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였던 죄인들이 길을 잃고 해매일 때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고 (요 14:6)무거운 죄짐을 지고 지쳐 쓰러져 있는 우리를 일으켜 세워 주시고 구원해 주셨다.왜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시나? 박 씨성을 가진 사람과 김 씨 성을 가진 두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서로가 원수로 지낸다. 하루는 박 씨가 우연히 길에서 구덩이에 빠진 소를 일으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김 씨를 발견하게 된다. 자세히 보니 자신과 원수지간이었다.박 씨가 생각한다. 그저 모른채하고 지나갈까? 평소에 심보를 곱게 써야지 벌 받은 거야? 고생 좀 해봐라. 그리고 그 자리를 피하려는데 이때 양심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온다. ‘원수를 사랑하라.’ 결국 박 씨는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김가에 다가간다. 그리고 쓰러진 소를 일으키려고 애쓰는 김가를 도와 소를 일으켜 세운다. 김가 옆에서 게면 쩍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박가도 동일한 웃음을 짓는다. 서로 이제 서로 원수가 아니다. 금세 다정한 친구가 된다.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이유 중의 하나는 ‘사랑이다. 즉 율법의 완성을 위해서 오신 대속의 역사이다. 그런데 한 몸이요 지체 이면서도 반목과 질시, 미워함으로 이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은 슬프고 도 괴로운 일이다. 나무의 뿌리가 살아 있는 한 나무의 가지를 잘라 내어도 그곳에서 더 많은 덧가지들이 자라난다.그리고 벌은 때로 주인을 쏘기도 하지만 그들은 주인을 위해 열심히 꿀을 모은다. 이와 같이 우리를 괴롭히는 원수를 위해 복을 빌 때 우리를 위하여 더 큰 은혜와 축복이 기다리고 계신다.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 3:16). 그 사랑을 받은 우리도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하신다. 사랑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시고 신앙은 이웃과 나누라는 것이요 이웃을 위해 쓰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웃을 위해서 쓰라고 받은 하나님의 사랑은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고 자신의 성숙 을 위해서 주어진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는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는다. 사랑이 없는 믿음은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 유익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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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조건(출 23: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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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도 잔인하신가?(출 22:1-15)
-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위하여 사회 질서의 율례와 정의의 범위를 설정하셨다. 뿐만 아니라 이웃에게 끼친 모든 계획적인 범행이나 무관심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손해 배상의 원칙들을 주신 이유를 살펴보고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뜻을 살펴보도록 하자.본문은 절도나 담보 보관물, 차용물로 인하여 재산상의 손실에 대한 보상규례를 말씀하고 있는데 특히 도적질한 자는 몇 배로 손해를 배상하게 함으로 범죄를 예방하고 대신 과실이나 보관상 또는 차용에 의해 발생한 손해는 적법한 절차를 따라 상호간의 불만이 없고 분쟁을 해결 하도록 하라고 하는 교훈을 찾아 볼 수 있다.1절에 보면 하나님은 사람이 소나 양을 도적질하여 잡거나 팔면 그는 소 한 마리당 소 다섯으로 갚고 양 한 마리당 양 넷으로 갚으라고 하셨다. 도적질한 것을 잡거나 팔지 않고 그대로 산 채로 가지고 있어도 갑절을 배상하라고 하셨다(4절). 사실 소 한 마리 도적질했는데 다섯 마리를 갚으라는 것은 너무 무거운 배상법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도 도적질하는 자를 보호하시지 않으신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도적이 밤에 뚫고 들어옴을 보고 주인이나 다른 사람이 쳐 죽인다 하더라도 피 흘린 죄가 없다고 판결하신다. 도적은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받을 권리는 없다고 보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도적을 얼마나 미워하셨으면 이렇게까지 하라고 명령하셨을까? 도적은 항상 영적인 의미로 사람의 영혼을 도적질하는 사단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예수님보다 먼저 온자는 절도요 강도이며(요 10:1-1 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 이라고(요10) 하셨다. 사단이 우리의 영혼을 도적질 하여 죄의 종이 되게 하였으나 예수님께서는 죄인이 받을 형벌을 다 받으시고 죄 값을 다 지불하심으로 다시 찾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그 한 마리 양을 찾으시려 세상에 오셨다. 세상의 모든 영혼들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다. 도적이 밤에 집을 뚫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를 쳐 죽이면 피 흘린 죄가 없으나 해 돋는 후에는 그 피 흘린 죄를 물으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낮에 들어오는 도둑은 거의 없기도 하지만 혹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살인이 되기 때문다.이 또한 자신의 짐승이 타인의 밭의 포도원이나 곡식을 먹었을 경우에는 자기 밭의 제일 좋은 것으로 배상하라고 하신다. 여기서 중요한 가르침은 배상하라. 또는 보상 하라는 것이다.타인에게 손해를 입혔을 경우에는 반드시 배상하라고 허하시는데 이 율법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을까? 이것을 적용하여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 5:26) 죄인이 호리만한 죄라도 갚지 못하면 결단코 지옥의 영향권에서 벗어 날 수 없다.사람들은 죄를 큰 죄와 작은 죄로 구분하기도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지극히 작은 죄도 큰 죄가 된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죄인들은 하나님 앞에 죄 빚을 지고 있다. 그 빚을 갚지 못할 경우에는 의의 형벌에서 벗어 날 수 없다. 그런데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의 힘으로 그 죄값을 감당 할 수 없었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혈의 피를 흘려 그 죄값을 다 치루어 주심으로 “다 이루었다”(요 19:30)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값을 완전하게 배상하여 주셨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성도들은 부채가 없는 용서받은 자유인이 된 것이다.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받은 자도 오백 데나리온의 빚을 탕감받은 여인은(눅 7:41) 모두 죄값을 배상해야 하는 죄인들의 모습이다. 오늘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하나님 앞에 탕감받은 자유인입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하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 하리라”(요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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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도 잔인하신가?(출 2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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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규례’ 오늘날도 필요한가?(출 21:1-11)
- 본문은 십계명 외에 사회생활 속에서 지켜야 할 규례를 말씀하고 있는데 특히 노예에 관한 규례이다. 히브리 출신의 종은 반드시 7년이 되면 아무런 조건 없이 해방 시킬 것과 해방 시킬 때에 지켜야 할 규례를 말씀하고 있으며 특히 여종인 경우에는 주인이 특별히 책임져야 할 경우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먼저 남종에 관한 규례가 1-6절에 나와 있고 여종에 관한 규례는 7-11절에 나와 있다.결론부터 말하면 종과 주인의 관계는 계급제도로서 평등한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가장 위험한 요소이다. 하나님께서 사회적으로 가장 신분이 낮은 종에 관한 규례를 주시고 권리를 보장 하기 위해 세심한 배려를 하신 것은 바로 하나님의 공동체를 평화롭게 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자신보다 사회 약한 조건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그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믿음 안에서 우리와 꼭 같은 형제임을 바로 인식하고 인격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교훈이 담겨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십계명과 율례들을 주신 목적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 수 있다.네가 백성 앞에 세울 율례는 이러하니라(1) 여기서 율례란 ‘법규’를 의미하는데 십계명에 대한 시행세칙이라 말할 수 있다. 사도행전 2:23에 보면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을 가리켜 법 없는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로마 나라에도 법은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 들이 볼 때는 그들은 법 없는 이방인에 불과 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신 법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경주하는 자는 열심히 달리는 것도 중요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법대로 경기의 룰을 잘 지키며 달리는 것은 더 중요하다. 선수가 규칙을 잘 지키지 않으면 아무리 선두 주자로 달려 왔어도 메달을 딸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시간 하나님이 허락하신 규례의 의미는 무엇이고 히브리인의 종의 특징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를 살펴보자.십계명에 하나님에 관한 계명과 이웃에 관한 계명으로 되어 있는데 본문의 규례에 관한 말씀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한 율례와 이웃과의 관계에 관한 율례로 나누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노예 규례의 중심은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한 것이다. 우리는 흔히 자유가 없고 고달픈 생활을 하는 사람을 가리켜 노예 같다고들 한다. 그렇다. 그 당시 노예만큼 모질고 천대받는 존재들은 없었다. 사실 고대 사회에 있어서 노예란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 인정받지 못하고 단지 주인의 재산으로서 일종의 생산과 노동력의 도구에 불과 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혹독한 노동과 비인간적인 처우만 주어진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노예들에게 인간적인 제도가 신설 되었다는 점이다. 이 법에 따르면 주인은 자비와 긍휼로 노에를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노예들 에게는 생명과 육체를 보호 받을 권리가 주어진다. (21:6) 히브리 종들의 이 사랑과 용서의 원리에 따라 주어진 가장 큰 권리는 종이 된지 제7년에 어떤 이유나 조건도 없이 무조건 해방 시키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신명기 15:13절 이하에서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때에는 공수로 가게 하지 말고 네 양 무리 중에서와 타작마당 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그에게 후히 주어 보내라고 까지 당부하신다. 이처럼 사랑과 용서의 원리의 율례 중에 특히 여종에 대해서는 더 깊고 세밀하게 말씀 하셨다. 심지어 여종을 아들에게 주기로 한 경우에는 딸 같이 대접하라고 하신다.비록 종이라 해도 인격자로 대우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비록 노예 신분 이라 해도 하나님의 법아래 있는 하나님의 친 백성이기 때문이다.본문의 종의 규례를 보면서 자유인 이었던 사람이 종이 되어 자유를 얻는 것처럼 영적으로도 죄의 종이 되면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말씀을 생각하게 된다. 몸의 사욕에 순종하여 우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린다면 그는 죄의 종이 되어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말씀이다(롬 6:12-16). 그런데 누가 몸의 사욕을 피할 수 있으며 권세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로마서 6:17절 말씀처럼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죄의 종 이었다. 무엇보다 죄의 종으로 살다가 모두가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히브리인의 종들을 7년째 되는 해에 조건 없이 해방 시키라고 명하셨듯이 하나님은 우리를 죄의 종에서 해방시켜 주셨다. 그 뿐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을 섬기는 의의 종으로 삼아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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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규례’ 오늘날도 필요한가?(출 2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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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의 십계명(출 20:1-17)
- 오늘날 우리 사회를 돌아보면 백성들이 어디로 가고 있으며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불의와 부정은 물론 살인, 간음, 거짓말, 위증, 사기, 권력 남용하는 일이 일상화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가 거리를 달리는 것 같이 육의 쾌락만을 위한 성범죄가 줄줄이 일어나고 있으며 살인 행각 집단 자살사건, 부실건설 기업과 집권자들의 부정부패 등 매스컴에 보도하는 것은 빙산의 일각일 것이다. 왜 사람들이 이처럼 삐뚤어지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자.이는 오직 물질만능주의와 이에 따르는 쾌락추구 사이에서 나온 것이며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않는 무신론에서 연유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모든 것은 이생뿐이니 소유하고 향락하자는데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저 죽일 놈들”이라고 소리쳐도 소용 없다.이러한 때에 왜 하나님이 십계명을 주시고 지키라고 하신 의미를 다시 새겨 보자. 구약 성경의 중심은 신명기 6장 5절 말씀과 출애굽기 20장의 십계명이다. 그리고 신약 성경에서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고 오늘 본문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있다.십계명에는 이 두 가지 계명을 실행 할 수 있는 실천사항을 10가지로 말씀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구약의 십계명을 두 가지 계명으로 압축하여 말씀하셨다. 첫째는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요. 둘째는 ‘네 이웃을 사랑 하되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이다. 여기서 네 몸은 네 육신과 영혼을 포함한 ‘자신’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먼저 주 너희 하나님을 힘을 다해 사랑하는 방법은 4가지이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 하라고 한 그 사랑의 방법에는 6가지이다. 흔히 그리스도교를 말할때 사랑의 종교라고 말한다. 십계명 중에 첫째 계명부터 네 번째 계명까지의 내용이 마가복음 12;12절의 말씀에 나와 있다. 여기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 하라”는 말씀은 모든 계명의 기초가 되는 말씀이다. 이 계명은 모든 계명을 포함하는 계명이다. 우리가 이 계명 하나만 잘 지키면 자연히 다른 계명도 잘 지키게 될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 소극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을 바로 아는 사람은 하나님 외에 결코 다른 신을 섬기거나 사랑할 수가 없을 것이다.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우상을 만들지는 않을 것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주의 날을 거룩히 지키기 위해서 힘쓰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십계명에는 이 두 가지 계명을 실행 할 수 있는 실천사항을 10가지로 말씀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은 먼저 부모를 섬기게 될 것이고 주님의 몸된 교회에 나와 주일을 지키게 된다. 안식일이란 주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날이란 뜻이다. 신약에 와서는 이 날을 ‘주의 날’ 또는 주일이라고 말하지요? 즉 우리의 구세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인이 되시는 날이요 부활의 새 생명을 주신 날이기도 하다. 구약에는 천지 창조를 마치시고 쉬신 날이라 해서 안식일이지만 신약에 와서는 부활 즉 영적인 새로운 창조를 주신 날로 우리는 주일을 지키는 것이다. 우리가 주일을 지키는 것은 천국에서 영원히 안식하며 사는 삶의 그림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여 광야를 통과할 때 가나안을 안식의 세계라고 말씀 하셨다. 오늘날도 우리들에게는 이 영원한 안식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 이 땅에서 이 안식을 맛본 사람이 영원한 안식의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겉모양으로만 하지 말고 중심으로 사랑하라는 말이다. 그리고 목숨을 다하라고 하였다. 우리의 생명과 우리의 영혼 전체를 다해 우리의 모든 지식이나 지혜를 다해서 사랑 하라는 말이다. 또한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 하라고 했는데 육신의 재능이든 영적인 재능이든 나에게 무슨 힘이 있다면 그 힘을 다 기울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되 부분적으로나 머리로만 하나님을 사랑하지 말고 우리의 인격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 하라는 말씀이시다.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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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을 맺으신 의미(출 19:1-6)
- 출애굽 후 3개월이 지난 뒤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산에서 부르시고 언약을 맺으셨다. 애굽의 라암셋에서 시작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여정은 숙곳(12:27)에담(13:20)을 거쳐 엘림(15:27)으로 이어진다. 이 여정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다시 신 광야(16:2)로 르비딤(17:2, 3)으로 이어지다가 오늘 말씀의 무대 시내 광야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장막을 치고 모세는 산위로 올라간다. 이는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경배 할 것인지를 계시 받기 위함이다.시내산에 오른 모세를 다시 하나님께서 부르신다. “모세야 너는 다음과 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하나님의 위험 있는 명령조의 음성은 계속 이어 진다.“너희들은 애굽에서 나오면서 나일강이 피로 물든 사건부터 시작하여 그들의 군대가 홍해에서 몰사한 사건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겪은 사실에 대해 생생히 목격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 이르기까지 너희들을 보호하고 인도한 나의 손길을 느꼈을 것이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들이 내 말을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들은 세상 열방 중에서 내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백성이 될 것이다. 너희들은 나의 열방 사이를 중재하는 제사장이 될 것이며 다른 열방 민족과는 구별되는 택함 받은 백성으로서 오직 나만을 섬기며 나의 뜻을 수행 하는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다. 이 말을 너는 백성들에게 전하라.”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특별한 소유가 되게 하실 터인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그 분의 언약을 지켜야 한다. 여기서 언약은 하나님께서 주실 율법을 가리킨다.즉 당신의 백성의 궁극적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친히 베풀어 주신 말씀이자 하나님과 당신의 백성 사이에 맺으신 영구한 약속을 지칭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조건은 그들이 하나님의 법에 순종 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는 말씀이다.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출 19:5) 하는 것이 조건이다. 그리고 너희가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6)고 하는 것은 약속이다. 계약의 주체이신 하나님이 먼저 계약서를 내밀고 이스라엘 백성더러 의향이 있으면 도장을 찍으라는 식이다. 물론 조건을 수락하지 않으면 약속이 이루어 질 수 없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지 않고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말을 듣지 않는 백성과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께서 명령하신대로 우리가 실행하겠습니다”라고 맹세하였다. 이렇게 계약이 성립된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특별한 관계가 맺어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약 신앙의 근거가 되는 이른바 계약 사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물론 이 계약 후에는 우리가 믿는 자들과의 관계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운 계약으로 갱신되었다. 그러나 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첫째는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한 일꾼으로 부르신다는 것이요. 둘째는 그 일을 통하여 일하는 사람의 거룩함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부르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일을 시키기 위하여 부르시고 그 일을 위하여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부르신 것이다. 이 뜻을 모르면 아무리 하나님의 일이라 해도 일할 맛이 나지 않는다. 마치 보수를 못 받는 것 같고 장래성 없는 일을 하는 직장을 다니는 것 같아서이다.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면서도 행하기는 싫어지게 된다는 의미이다.교회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직분도 이 일을 하라고 허락하신 것인데 자격이 없다는 핑계로 꽁무니를 빼거나 아니면 일하라고 주신 직분을 무슨 지위나 되는 것처럼 여기고 제직 임직에서 빠지면 섭섭하다고 앵돌아서는 일도 있다. 부르신 뜻을 모르고 일을 시키는 까닭을 모르면 이렇게 된다. 죽을 수밖에 없는 목숨을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려고 지금 하나님은 일을 명하신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특별히 부르신다. 예수님께서 12 제자를 부르시고 일을 맡겨 사도로 내보내신 것(마 9:35-10:8)도 알고 보면 그들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인 하나님의 영광을 얻게 하기 위해서 부르신다. 이 약속이 곧 우리의 소망이다.이 소망 안에서 일하는 기쁨이 있어야 한다. 이 소망과 기쁨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지금 서 있는 은혜의 자리에 믿음으로 나아오게 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 할 것을 바라면서 기뻐한다(롬 5:2). 생각해 보자? 인간인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니 이 얼마나 가슴 벅찬 소망인가?영원한 생명의 빛인 하나님의 영광이 믿는 우리에게 있다니 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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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을 맺으신 의미(출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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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의 축복(출 18:9~27)
-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한 고백이 있었고 이 말을 들은 무리들은 기쁨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큰 기쁨과 감격이 그들 안에 넘쳐났을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스라엘은 아직 제사제도가 확립되지 않았고 제사장도 없었다. 그러기에 이제 드리는 제사는 그 의미가 분명히 달랐을 것이다.그의 마음에는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가득하였고 하나님을 새롭게 알게 된 것에 대하여 감사가 충만한 예배였다. 요한복음 17장 3절에 영생은 곧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하였다.우리가 의로움이 있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을 믿으므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의롭지 못한 나를 의로운 자로 인정해 주십니까? 이렇게 좋으시고 고마우신 분임을 알게되고 깨닫게 되는 것이 바로 신앙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누가복음 15:에 보면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분깃을 받아 가지고 먼데로 가서 재산을 다 탕진하고 결국 돼지를 치는 집에서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면서 생각하게 된다.‘우리 아버지 집에는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깨닫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올 때 그는 자녀의 권리를 회복하게 된다. 그는 자신이 형편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는 엄청난 최고의 대우를 받게 되어진다.우리에게 감사 할 조건이 있다면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을 새롭게 알게 된 것이 아닐까? 우리가 하나님의 놀라운 성품과 구원에 대하여 발견하는 일 보다도 더 기쁜 일은 없을 것이다.이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그의 백성을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신 사건이야 말로 감사할 일이다. 또한 하나님의 권능의 역사를 체험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깨다는 것이며, 하나님의 크신 권능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소위 지상의 모든 신보다 크시다는 사실이 입증 되었다.이스라엘 애굽에서 나왔을 때에 그들은 감사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 점차로 바로왕의 혹독한 감독 밑에서 배운 오랜 습관이 그들에게 나타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혹독한 곤경에서 구하셨다는 감격은 사라졌다.그러나 이제 이 감격을 회복하는 순간이다. 이드로는 백성과 함께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렸다. 그의 직업이 바로 제사장 아닌가?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바로알고 제사 드렸을 때 그 제사는 그가 처음으로 드린 바른 제사요. 살아있는 제사였으며 하나님께 받으신 제사였다.하나님을 발견 할 때 비로소 예배는 살아 있는 예배가 된다.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7). 그분의 사랑 가운데 뿌리를 박고 그분의 사랑을 알 때 우리는 하나님의 충만으로 채워진다. 그를 위해서 열심히 일할 때 그의 충만함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일치하는 예배, 이드로는 예배를 드린 후 번제물과 희생을 아론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들과 함께 나누어 먹었다.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뜻이다. 여기에 말하는 하나님 앞이 어디인가? 저는 구름 기둥이라고 생각한다. 기둥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들은 하나님과 교제 했다. 예배는 곧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시는 교제이다. 우리는 여기서 절제된 사랑을 볼 수 있다. 둘이 아무리 사이가 좋아도 절제 되지 않은 사랑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큰 싸움이 있은 후에 지쳐있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이드로를 만나게 하시고 그를 새롭게 하셨다. 우리들에게도 이런 만남이 얼마나 필요한지 모른다.우리는 처음 만났을 그때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면 얼마나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있으며 또 얼마나 세속에 물들여져 있는가를 발견하게 된다.우리는 더 많은 은혜를 사모해야 한다. 그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분명히 더 알게 될 것이고 놀라운 확신가운데 서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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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의 축복(출 18: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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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일을 회복하는 길(출 18:21~27)
-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살펴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평탄한 인생을 살아간 것은 아니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도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자이었지만 삶의 어려움도 있었고 박해를 받기도 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람들은 은총을 맛본 것이지 온실의 화초처럼 안락한 삶속에서 하나님을 만난 것은 아니다. 그러한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바로 모세였다.모세의 안락한 삶은 나이 사십 세가 되었을 때 애굽 사람을 죽인 것이 탄로 나는 순간 끝이 난다. 그는 모래 바람이 사정없이 몰아치는 미디안 광야에서 고달프기 이를데 없는 곳을 지나야만 했다.갈 곳도 없고 반겨 줄 사람도 없는 곳 하루 종일 뜨거운 뙤약볕 아래 방황해야 하는 곳, 그곳이 바로 미디안 광야다. 그러나 이런 것보다 더 힘든 것은 아무런 희망도 기댈 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미디안 광야는 약속된 유배지가 아니며. 그 기한이 정해진 것도 아니었다. 10년, 20년을 기다려도 상황은 달라 질 가능성은 없었다. 가슴을 부풀게 하는 언질을 주기는커녕 바로 왕은 모세를 잡아 죽이려고 했다. 그는 이미 애굽의 왕자가 아니었다. 아브라함의 피가 흐르는 히브리인임을 만천하에 드러났다. 언제 미디안의 고통이 끝날 것인가? 그의 가슴의 막막함은 마치 광야의 막막함과 같았다.이 어려운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위해 오아시스를 준비해 주셨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오아시스는 가정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날 그가 광야의 오아스를 만나 시원한 물 한 모금으로 모처럼 만난 나무 그늘에서 지친 몸을 쉬고 있을 때 그는 한 여인을 만나게 된다.‘십보라’ 그녀는 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신 그의 인생의 오아시스 이였다. 모세는 십보라를 따라 이드로의 집에 이르게 되었고 이드로는 그의 장인이 된다. 그들에게서 두 아들이 태어난다. 모세는 두 아들에게 자신의 심정을 담은 신앙 고백적 이름을 붙여 준다. 큰 아들은 ‘게르솜’이었고 둘째 아들은 ‘엘리에셀’이다.‘게르솜’이란 내가 이방에서 객이 되었다는 뜻으로 모세는 객이었고 나그네이다. 그가 비록 애굽 궁궐에 있기는 했지만 거기는 그가 있을 곳이 아니었다. 그는 히브리인이었으므로 그는 처음부터 애굽 궁궐의 나그네였다. 그리고 그 이전 그가 이 세상에 태어나던 때부터 사실은 나그네였다. 생각해 보면 우리네 인생 자체가 객이 아니겠는가? ‘엘리에셀’ 이름은 ‘참으로 아름답다’라는 뜻의 이름을 지어 준다. 첫 아들의 이름을 게르솜이라 지은 모세가 둘째 아들의 이름을 이렇게 붙이는 것은 당연하다.왜냐하면 나그네 인생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이기 때문이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나그네에게 진정 도움을 주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 뿐이시다.우리 존재가 객임을 잊지 말자. 그리고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함을 잊지 말자.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한 모세는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이웃에게 증거 한다. 인생 항로를 나그네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보호와 도우심을 경험한 인생은 마땅히 영광과 찬송을 하나님께 돌려 드려야 할 것이다. 고난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알게 하고 승리케 하는 길로 나아가게 한다.이스라엘 백성이 르비딤을 떠나 시내 광야에 이르러 진을 친 이후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모세가 전에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그의 처자와 함께 미디안에서 애굽으로 가던 도중 돌려보냈던 모세의 아내 십보라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세를 찾아온다. 당시 오랜만에 가족들을 만나게 되자 모세는 애굽에서 바로의 추격을 피해 도망쳐야만 했던 자신의 비참한 모습들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뿐만 아니라 그러한 가운데서도 자신을 끝까지 돌봐주신 하나님께의 크신 은혜를 기억할 수 있었다. 이에 모세는 가족들을 장막 안으로 데리고 가 하나님께서 출애굽을 주도하신 가운데 보여주신 위대한 모든 행적들을 밝히고 그동안 자신과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한 수많은 고난과 여호와께서 그를 구원하신 일들을 말해 준다. 이에 감동한 이드로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찬양하며 하나님 보다 더 큰 이가 없음을 고백하게 된다.(9-12)모세와 이드로의 만남에서 나타난 아름다운 모습은 그리스도인의 참된 만남이 어떠해야 함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모세가 이드로 앞에서 결코 세속적 가치 기준인 명예와 자신의 출세에 대해 자랑하지 않았다는 점 주목해야 한다. 그는 오직 일상생활 속에서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간증함으로써 이드로와 함께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교제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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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일을 회복하는 길(출 18: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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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전투의 승전 비결(출 17:8-16)
-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해서 행군하는 중에 르비딤에서 아말렉 족속들과 전투를 하게 된다. 마귀가 성도들의 약한 것에 틈을 타서 공격 하듯이 아말렉 족속이 이스라엘을 괴롭힌다. 그래서 하나님이 출애굽기 16:16절에 “아멜렉과 대대로 싸우리라”고 말씀 하신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끊임없는 전쟁의 연속이다. 9절에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 꼭대기에 서리라”고 말씀하셨다.이 싸움은 모세가 최첨단의 무기를 가지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지팡이를 가지고 산꼭대기로 올라갔다. 여기서 지팡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삶의 간증거리일 수도 있고 우리의 약점일 수도 있다. 남들이 보기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것이 나만의 지팡이가 되고 손에 있는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전쟁에서 승리케 하신다. 아말렉 백성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공격한 배경은 이렇다. 주변의 모든 나라들은 여호수아의 군대를 두려워하였다.그러나 이라엘 백성을 두려워하지 않은 백성이 딱 하나 있었다. 그것은 아말렉 사람들 이었다. 그 아말렉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공격해 오고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인도 하시는 대로 따라 가는데 왜 무서운 박해자가 나타나야 할까? 내가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서 나아갈 때 모두 다 환영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약한 부분을 공격하고 넘어뜨리려는 세력이 있다는 것이다.언제 공격해 오나? 내가 신앙생활을 잘할 때 공격해 온다. 그리고 나를 공격할 때 그냥 하지 않고 가장 약한 부분을 치명적으로 공격해 온다. 왜 내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잘 따라 가고 있는데 이러한 일이 생기는지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나?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이다.그러면 이 전쟁에서 적과 더불어 어떻게 싸워 나가야 하는가를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자. 이스라엘을 도전하던 적군들은 아말렉이었는데 오늘 우리를 대항하는 적은 누구인가? 바울은 우리 원수를 사단이라 했다(엡 6:12). 악마는 우리의 심중에다 자기 씨앗을 심어 놓았다. 그 씨앗은 어떤 역할을 하게 될까요? 우리의 영을 거스르고 넘어뜨리려는 것이다(벧전 2:11). 내 원수가 천리만리 먼데 있는 것 아니고 내 속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우리의 적은 내외적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공격해 온다. 어떤 때는 경제문제로, 어떤 경우는 불신앙으로, 향락으로, 또는 나태와 게으름으로 영혼을 고갈시켜 영혼을 죽게 만든다. 이스라엘과 최초로 만나게 되는 아말렉은 우리 육신의 상징이다. 아말렉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끈질기게 괴롭히는 종족 이었다.우리의 육신은 죽는 그 날까지 우리 그리스인들의 최대의 적이 되는 것이다.우리가 구원을 받았다 해도 우리 육신의 본성은 살아 있기 때문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로다”(롬 7:24)라는 탄식이 계속 해서 터져 나오게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자기안에 일어나는 갈등을 괴로워 하고 있다. 우리의 싸움의 적이 내 안에 있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원수로 알고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자기 부모와 원수를 맺기도하고 또는 형제와 재산 다툼으로 소송을 하기도 하며 더구나 구원 받은 성도들끼리 분쟁을 일으 키기도 한다.그러나 우리의 적이 내 안에 있음을 알자. 이 적을 발견하는 것이 최대의 발견이며 자기와 싸워서 이긴 승리가 최대의 승리이다. 많은 사람들이 일생동안 다른 사람과 원수 맺고 싸웠으나 아무도 이긴 자가 없다. 그러나 자기 안에있는 육신의 정욕과 싸워 이긴자 만이 영원한 승리자이다.아말렉은 누구인가? 그는 야곱의 형제인 에서의 후손이다. 에서는 팥죽 한 그릇에 자신의 장자 권리를 팔아 버린 세속적인 존재로서 육신에 속한 자들의 상징이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요 3:6)라는 말처럼 육의 생명으로는 천국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다. 육의 소욕을 쳐서 하나님께 복종 시켜야 성령의 사람으로 성령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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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전투의 승전 비결(출 17: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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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의 현대적 의미
- 흔히 하는 말 중 ‘금강산도 식후경’ 이라는 말이 있다. 구경이 아무리 좋다 해도 배불리 먹은 후에 하자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세상은 온통 먹자판이다. 먹음으로 만족하고 힘을 얻고 생명을 유지함으로 모두가 먹는 일에 크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먹이고 입히시는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영·육간에 먹을 것을 주시고 계신다.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자기 할 일만 열심히 하라고 하신다.이스라엘 백성에게 40년간 만나를 내려 주신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요. 사랑이며 큰 기적이다. 그러나 또 한 가지 은혜는 에수 그리스도를 이 땅위에 보내신 것이다.그들이 먹었던 떡은 육신의 욕망을 의미한다. 그들은 애굽 땅에서 고기와 떡, 부추, 마늘 등 자극적이고 육신적인 음식을 먹었는데, 이제 그런 음식을 먹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것들은 육신의 욕망을 채워주는 음식들이지만 영혼을 채우지 못하는 것들이다.오늘날 세속적인 교회에서는 애굽의 음식들로 가득 채우는 설교들을 하고 있다. 가장 근본적인 죄사함의 문제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잘만 믿으면, 헌금을 많이 내면 건강하고 그 모든 근심이 사라진다는 육신을 위한 인간의 말들이 난무하고 있다.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들은 광야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육신적인 양식을 찾았고 그것을 찾지 못하자 원망하기에 이르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형적인 불신 세상의 표본 이다. 이 세상에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 들고 갈 영혼들이 하나님의 크신 선물인 천국을 보장 받는 엄청난 축복을 받았지만 여전히 육신의 욕망은 그칠 줄 모른다. 이스라엘은 70여 일 동안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양식을 다 먹어 버렸다. 그 때 농사도 지을 수 없고 초목도 구경할 수도 없었으며 더구나 식량을 파는 자도 없는 무인지경이다. 백성들은 허허벌판 메마른 사막에서 이제 굶주려 죽게 되었다고 아우 성 치다가 모세와 아론을 다시 원망 하기 시작 하였다.그 때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시어 배부르게 먹게 하셨다. 여러분, 지상 인류의 삶의 실상을 살펴 보십시오. 현대를 사는 모든 인류는 삶의 굶주림에 배고파 한다.살고 싶으데 살지 못하고 죽기 싫은데 안 죽을 수 없는 이 현상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영원한 삶을 가지지 못한 삶에 굶주려 있는 것이다. 주님은 이런 자를 가리켜 목자 없는 양이라고 하셨다. 식량 생산량의 70% 이상이 미국을 비롯하여 캐나다, 아르헨티나, 프랑스, 오스트리일리아 등지에서 생산 된다고 한다. 땅이 커서인가? 땅이 큰 것으로 말하면 아시아에서 중국도 있고, 인도같은 나라도 있다. 아프리카의 아프리카공화국 중동의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나라는 얼마나 큰 땅을 가지고 있는가? 하나님은 이런 나라들을 통하여 세계 인류의 식량 부족을 채워 주시기도 하신다.예수님의 설교의 절반이, 부의 소유와 소유에 대한 것이었다. 그만큼 사람에게 재물 (빵·돈)은 필요 불가결한 것임을 입증해 주신 것이다. 재물에 대한 결정적인 영향력은 두 가지이다. 물질주의와 성서이다. 물질주의는 사람들에게 돈을 좋아 할 것을 가르친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성서는 ‘돈에 미혹 되지 말아라’ 돈은 정당한 방법으로 취득 하여라. 그리고 내가 가진 것은 하나님의 축복 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서의 가르침 보다 물질주의에 매료되어 살고 있다. 그래서 돈은 일만 악의 뿌리라는 악명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 분이야 말로 세상을 구원하시려 오신 참 메시야이시다(요한6:14).오병이어의 기사이적을 목도한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남긴 말이다. 예수님은 너희 재물을 땅에다 쌓아 두지 말아라. 땅에서는 좀이 먹고 녹이 슬어서 망가지며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서 훔쳐 가게 될 것이다.그러므로 너희 재물을 하늘에 쌓아 두어라. 그 분은 우리로 하여금 양식을 어떻게 보관하고 사용 하는 것이 더 안전하고 영구한 것인가를 가르쳐 주셨다. 있다가도 없어지는 허무하고 믿지 못 할 재물이 아니라 때를 따라 필요한 양식이 되는 길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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