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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규 칼럼] 신뢰회복이 최대의 희망이다.
- 나라의 구석, 구석에서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서울과 부산의 양대 시장 선거에 앞서 야기된 땅 투기 사건으로 인한 국민들의 허탈감은 쌓여만 간다. 힘 있고 권력을 가진 자들은 땅 투기로 서민들과 소상공인들이 평생 몸이 망가지도록 일해도 성취하지 못할 부를 축적하고 있으니 그 허탈감을 짐작할 만도 하다. 어찌 이런 일이 이번 정부에서만 해당하는 일 일까? 오랜 관행으로 이어져 온 것임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정직’이나 ‘신뢰’를 대소롭지 않게 또는 사소하게 여긴다. 그러나 신뢰가 무너진 사회를 상상해 보자. 택시 기사는 손님이 택시 요금을 내지 않고 내릴 것에 대비해 손님이 문을 열지 못하게 하는 잠금장치를 고안해야 할 것이고 손님과 운전석 사 이에 방탄유리를 설치해야 할지도 모른다. 또 계약서에 생길지도 모르는 모든 계약 위반의 경우를 대비해야 하므로 내용이 상당히 복잡 해 질 것이다. 그러면 사회는 내부적으로 긴장이 고조되어 갈 것이고 이로 인한 경제적 손실을 상상해 본다. 이에 대해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트러스트에서 신뢰는 문화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으며 신뢰도가 경제적 성취에 영향을 준다고 강조했다. 지금 이 나라는 매우 심각한 위기를 격고 있다. 어떤 위정자의 말도 그대로 믿기가 힘들어 졌는데 위정자들 자신이 신뢰를 상실 한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어느덧 이웃이 사라지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건전한 양심에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이기주의 부도덕한 성공 주의로 인한 신뢰 추락의 속도는 가속화 되어가고 있다. 그 뿐인가? 양심과 신뢰의 보루여야 할 교회마저도 그 가치를 상실하여 가고 세속의 가치가 또리를 틀고 않아있으니 말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신뢰 회복이 최대의 희망이라 믿는다. 경제력의 확보도 중요하나 부정부패의 척결 되고 땅으로 부를 축적 하려는 자들은 존재 자체가 어려운 상황에까지 엄격하게 다스리고 규정되어야 한다. 탁원한 전략가요 훌륭한 정치가였던 다윗왕은 하나님을 향해 “깨끗한 마음을 새로 지어 주시 고 꿋꿋한 뜻을 새로 세워 주소서”(시 51:10)라고 기도하였다. 오늘 우리는 이 나라의 정치 지도자들과 교계 지도자들이 무너져 가는 소리에 예민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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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규 칼럼] 신뢰회복이 최대의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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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규 칼럼] 인생에서 남길 최대의 장사(요한 19:30절)
- 성경의 첫 장, 첫, 구절은 ‘하나님의 창조이다. 창조는 곧 하나님의 사랑이다. 성경의 마지막장 마지막 구절은 무엇인가? 성경의 마지막 구절은 예수님의 은혜가 임하기를 간구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계22:21) 예수님의 은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예수님의 은혜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은 바울이었다.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 지어다”. 아멘 (갈 6:18) 각 교회에 편지를 쓰거나 개인에게 편지를 쓸 때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를 간절히 기 도 했다. 사도 베드로도 마찬 가지이다.(벧전3:18)예수님의 은혜가 얼마나 중요하기에 이렇게 강조 하는 것일까?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2단계 거리두기를 거쳐 3단계를 선포하는 것을 고려한다고 하 고 홍수와 태풍으로 그 어느 때 보다 위기가 강조되는 시점에 오늘 우리나라와 국민, 가정 위에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을 수 없는 시점이다. 그러면 예수님의 은혜가 왜 그렇게 귀한지 살펴보자. 첫째: 구세주로 오신 은혜.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은혜이다. 온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 하늘 보좌를 버리고 가장 비천한 자리에까지 낮아지심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 이 땅에 오신분이 아니다. 존귀 영광 찬양을 받기위해 오신 것도 아니다. 죄를 범한 인간을 구원 하시기 위해 구세주로 오셨다. 둘째: 대신 고난당하신 은혜. 누군가를 대신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돈을 빌려 줄 수는 있어도 대신 가난할 수 는 없고. 힘을 보탤 수는 있어도 대신 수모와 멸시를 당 할 수는 없으며. 약을 사다 줄 수는 있어도 대신 아플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셨다. 우리를 부요케 하시기 위해 가난해 지셨으며 우리를 치료하기 위해 채찍에 맞으시고 죄를 사함 받을 수 있으며 우리를 온전케 하기 위해 찔림을 받으셨다. (사53:5) 셋째: 대신 죽으신 은혜. 죄는 예수님과 결코 상관없는 것이다. 그러한 분이 대신 죽으신 은혜이다. “예수님은 한 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예수님은 죽으실 이유도 없으셨고 십자가를 지셔야 이유도 없으셨다. 예수님이 대신 죽으신 이유는 누가 부탁 했거나 보상을 부탁했기 때문이 아니다. 오직 모든 것을 이루시기 위함이었다. 예수님은 대신 죽으심으로 용서를 이루시고 사탄으로 부터 승리를 이루셨다, 그래서 다 이루셨다는 것이다.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구약 예언자들의 예언을 성취하셨다는 선언이다. 이 예언의 중심 과제는 무엇인가. 이 말씀은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는 말씀이다. 또한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을 열어 놓았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자기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는 사람만 내게 합당하다. (마10:38절 ) 고 말씀 하셨다. 또한 영생의 길을 열어 놓았다는 말씀이시다. 행복이 가장 큰 소망인 줄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 물질적인 부나 권력이 최고의 목적이 아니다. 에덴동산 이후 사람들의 최대의 그를 보낸 뜻을 완성한 것이다. 우리가 위대한 레오나르도다빈치의 초상화 앞에 더 좋게 하려해 봐야 오히려 작품을 그르치게 될 것이다. 이제까지 인간이 그린 작품 중 최고의 예술품으로 여겨져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서 다 이루신 작품에 그리스도의 위대한 작품인 구원에 대해 덧칠해 보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위대한 작품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서“ 다 이루었다 는 (요19:30)라고 말씀 하셨을 때 완성 된 것이다. 우리가 덧붙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람의 생명은 참으로 귀하다. 성경은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셨다. 천하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뜻하는 단어라면 우리는 온 세상보다 더 가치 있는 존재이다. 그런데 이러한 소중한 생명을 많은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입고 좀 더 나은 집을 마련하는 데 사용 하려한다. 우리가 투자 할 수 있는 대상은 우리의 생명보다 더 가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그것에 우리의 삶을 허비하는 어리석음을 멈추어야 할 것이다. 모든 존재에는 존재의 목적이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 태어남에는 생(生)목숨을 다해 이루어야 할 명(命)이 주어져 있다. 그래서 생명이다. 명이 없을 때 아직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심은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낸 이유를 즉 사명을 알고 그 명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지상에서 남길 최대의 유산이다. 지상에서 남길 최대의 투자요 장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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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규 칼럼] 인생에서 남길 최대의 장사(요한 19:3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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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규 칼럼] ‘가장 위대한 기도’(요한 17:1)
- 우리는 누구나 세상을 살다보면 큰 어려움이나 위기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어려움에 봉착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 할 때 그리스도인 이라고 하면 기도 해본 경험은 누구나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아직 그렇게 구체적인 기도를 드렸는데도 응답을 받은 경험이 없다면 너 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 함이요. 과연 우리는 하나님만큼 우리 상태에 대한 관심을 기울일 수 있을까? 우리는 본문에서 하나님의 보좌에 오를 모든 기도 중에서 최고로 위대 한 기도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 분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 하나님과 가장 가깝게 사신분이셨기에 이 기도는 가장 위대한 기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기도는 5섯 가지 주제로 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둘째는 저희를 보전해 주옵소서, 셋째는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넷째는 저희로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다섯째는 저희로 함께 있게 하옵소서. 라는 중보의 기도로 되어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첫 마디는 “아버지여”입니다. 성도의 모든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아버지여” 그것은 참으로 아버 지께 대한 애정이 넘치는 부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책을 읽듯이 공식적으로 부르는 아버지가 아닙니다. 11절의 거룩하신 아버지 25절의” 의로 우신 아버지 진실로 아버지를 부르는 자는 덕지덕지 붙은 수식어가 아닙니다. 오늘의 성도들에게 아버지에 대한 장식어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멋에 불과 할 뿐입니다. 아버지께 기도하는 성도가 “당신”이라 부르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무언가 잘못 된 것 같습니다. 오늘 교회와 성도는 아버지에 대한 진정한 사랑과 경외를 되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기도하는 자세를 배우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은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기도 하셨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그 속에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함이 묻어 있습니다. 우러러 보는 가운데는 그 좋으신 하나님께 대한 경외함이 있습니다. 말못할 가슴 뜨거운 감격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하늘을 우러러” 본 것만은 아닙니다. 그 하늘에 계신 그 좋은 신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그 믿음을 보여 주고 있다고 봅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우리도 예수님의 기도의 자세 부터 배워야 합니다. 강아지가 주인의 밥상 앞에 앉아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기다리며 주인의 숫 가락을 온전히 따라 움직이듯이 예수님의 기도의 자세부터 배워 나가야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주님의 기도는 “때가 이르렀사오니”입니다. 그때는 어느 때입니까? 자기 죽음의 때 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일 하심에 자기의 때를 아 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때를 알지 못합니다. 인간은 그 누구도 자기의 때를 알지 못하며 살아갑니다. 하루하루를 건강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 기적이고 하나님의 은혜일 뿐 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의 때를 알 뿐만 아니라 우리의 때도 아십니다. 그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사는 것은 축복입니다. 그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자식이 잘 되어야 부모가 자식을 통해 영광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반대로 자식이 잘 못하면 그 자식을 둔 부모는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고 동네를 다닐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을 실뿐 아니라. 그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이 그 사랑하는 아들로 영광스럽게 해 주실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빌 2;6-11) 철저하게 겸손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도구로서의 결단이 보이는 장면입니다. 그러한 기도가 오늘 우리에게 필요 한 때입니다. 너무 앞뒤를 재고 셈이 너무 영 약한 성도들을 하나님이 과연 기뻐하실 것인가를 생각하면 씁쓸해 집니다. 좀 바보스럽더라도 오직 하나님 아버지를 위해 살아가는 좋은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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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규 칼럼] ‘가장 위대한 기도’(요한 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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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과 관계 맺기(요한 13:34-35)
- 결혼 60주년 회혼식 잔치자리에 남편과 나란히 않아있던 권사님에게 사회자가 다가가 “이제 남은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자 “지금까지 아들 딸 낳고 행복하게 잘 살아 왔지만 다시 한 번 의미 있고 진실 된 사랑을 하고 싶다”고 대답해 손님들을 의아하게 만든 사실을 기억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60년을 남편과 살아 왔어도 아직 제대로 된 사랑을 해 보지 못한 분들이 있습니다. 권사님이 말한 사랑은 주님이 말씀하신 아가페적 사랑을 하고 싶다는 뜻을 밝힌 것입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참으로 행하기 어려운 사랑입니다. 일반적으로 쉽게 말하는 사랑과는 그 질과 그 내포된 뜻이 전혀 다릅니다.그러면 이 아가페적 사랑은 일반적인 사랑과 무엇이 다릅니까? 이 사랑은 먼저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 웃을 사랑 하라고 가르칩니다. 이웃을 사랑 하라 하셨지 만 우리에게 이웃이 있어야 사랑 하지 않겠습니까? 현대인에게는 참 이웃을 만나기가 어렵습니다.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하시면서 이웃이 되는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겠느냐?”물었을 때“라고 물었을 때 자비를 베푼 자 입니다. 라고 대답 하도록 비유 하셨습니다. 그리고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웃은 이렇게 해서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처럼 이렇게 자비를 베풀면서 이웃이 생기면 그 이웃을 사랑 하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자비를 베풀면서 이웃 만들기에 우선 힘씁시다.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이 부처님이 가르치신 덕이나 자 비보다 또는 공자님이 가르치신 인의예지보다 더 높다던지 우수 하다고 평가하기보다 우선 그리스도인 들은 누구든지 먼저 이웃 만들기를 해야 합니다. 자비의 덕으로 이웃 만들기 운동을 펴야합니다. 그리고 나서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사마리아 사람은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 하였습니다. 그 사람의 지위, 국적, 재산, 교육 수준 여하를 전혀 묻 지 않고 “보이는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 하는바 하나님을 사랑 할 수 없느니라. (요일 4:20) 고 하십니다.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 사람은 거짓말 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사랑 한다고 말하기 전에 우리의 형제를 서로 사랑하는 우애가 있어야 합니다.베드로 사도는 그의 서신에서 믿음에 덕을 더해야 할 것을 강조하면서 경건에 형제 우애를 실천할 것을 언급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사랑을 공급 하라고 하였습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형제 우애는 아직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먼저 보이는 형제간에 형제 우애의 덕을 실천하며 그 다음에 그 형제에게 아가페의 사랑을 더하라는 것이 성 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도 아직 우리 주변에는 무엇 때문에 사랑 보다는 미움과 증오가 더 큰 자리를 차지 하 고 있을까요? 그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부족한 것과 조급함으로 참지 못하는 것과 자신의 유익 만을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내 계명은 이것이니 곧 내가 너희를 사랑 한 것 같이 사 랑 하라는 것이니라. 내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라. (요14:15) 결혼 회혼 식에서 권사님의 말한 의미가 무엇인지 알 것 같습니다.가족과 더불어 의좋게 단란하게 잘 살아 왔지만 이제 아 가페 사랑으로 사랑하고 싶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주님은 우리의 영혼 구원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신 주님처럼 권사님도 주위의 영혼 구원을 위해 아가페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 보고 싶다는 순교적 사랑의 고백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깨달은 사람은 우리의 이웃에 대하여 항상 사랑의 채무자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사랑의 빚을 갚기 위하여 그 리스도의 남은 구원을 내 육체에 채울 것이라고 고백 하였습니다.그리스도의 신부된 성도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식 어 버리고 이웃에게 사랑으로 다가가지 못하는데서 한국 교회가 빛은 꺼지고 맛을 잃은 소금이 되지는 않았는가를 돌아보아야 것입니다. 채권자는 많지만 사랑의 채무자는 너무나 적은 것이 문제입니다.사랑의 채무자로 이웃 만들기에 전력을 다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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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과 관계 맺기(요한 13:3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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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사랑 하신다는 의미(요한 13:1-11)
- 성경이 성막 이라고 하면 요한복음은 성소라고 부릅니다. 또한13-17장을 지성소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13장에서 21장은 “영광의 책”입니다. 이제13장부터 그 거룩한 지성소에 주님과 함께 걸으면서 지성소의 그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빛 되신 주님의 세상에서의 사역은 끝이 납니다. 이제는 자신을 스스로 감추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이제 부터 자기 제자들과 더불어 말씀 하십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님은 유월절 양으로 오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이제 유월절 양으로 십 자가에 죽으실 것입니다. 주님이 세상에 머무실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예수님은 인간을 구원하는 유월절 양으로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해서 영광스러운 천국 보좌를 내어 놓으시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주님은 그때가 이른 줄 아셨습니다. 육신을 가진 주님으로서 그 죽음에 육신적 고통을 결코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그러나 주님은 그 때에 대한 철저한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때를 아시고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고 도리어 이 짧은 남은 때를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 하시되 끝가지 사랑 하시니라.고 요한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이란 곳이 어떠한 곳 인가를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여기 세상이란 어떤 세상을 말하는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 이 세상은 공중 권세 잡은 자가 다스리는 세상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주님을 따르는 백성들을 배척하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그런 성도를 사랑하셨습니다. 그것도 끝까지 사랑하여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끝까지” 라는 말은 상황으로 보아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까지이나 단순히 그렇게만 생각 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겠다”(마태28:20)고 약속하신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세상 끝날 까지 로 보아야 하는데 다시 말하면 여기에 끝까지 라는 “끝”은 시간적인 끝이 아니라 “완전” 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완전해질 그 날까지 라는 말입니다.천국 백성으로 주님과 함께 살 때까지 사랑한 다는 놀라운 약속이며 어떤 조건에서도 변함없이 사랑 한다는 뜻입니다 미련하고 우둔한 자를 오래참고 변함없이 사랑하셨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기초 지식도 없는 너무나 우둔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자기 사람들의 인품이 불완전해도 주님은 계속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은 모두나 약하고 불완전하고 세속적이고 우둔한 자들이었습니다. 비겁하게 자기를 부인하고 불신자가 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사랑하셨습니다.주님께서는 오늘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할 때 베드로는 그러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다 물러가고 말았습니다. 다 물러가 버린 자들을 끝까지 변함없이 사랑하셨습니다.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더 없이 사랑하셨습니다. 세상에 어느 것도 완전한 사랑을 기대하기 어려우나 예수님의 사랑은 완전하신 사랑입니다. 그들을 최대한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 죄를 위하지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흘 만에 살아나셨습니다.지금은 우리의 처소를 예비하러 천국에 가 계시면서도 자기를 반역한 죄인들을 위해서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기도하고 계십니다. 우리 주님은 시작과 끝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구원을 주시고자 착수하시면 기어코 구원을 완성하십니다. 한번 사랑 하시면 끝가지 변함없이 사랑해 주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며 살지 못해도 주님은 우리를 끝까지 책임지고 사랑해 주십니다. 세상에 주님 외에 누가 과연 우리를 끝까지 책임지시고 사랑해 줄 것입니까? 그 주님의 변치 않는 사랑을 믿고 그 믿음으로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그 사랑에 감격 하여 채무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가 많아질수록 교회의 위상은 높아지고 세상이 주님의 나라가 되고 교회는 진리의 터위에 든든하게 바로 서가게 되어 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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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사랑 하신다는 의미(요한 13: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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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김과 나눔의 지도자(요한 15:12-17)
- 사람이 제 구실을 하려면 적당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은 사람은 교육을 받고 그에 상응하는 훈련을 쌓아야 한다는 뜻이다. 훈련이 없는 교육은 아무짝에도 쓸모없게 된다. 교육과, 훈련 그리고 일 이 세 가지는 사람에게 필요 불가결한 요소이다. 사람은 크게 두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남을 지배하려는 사람들, 남을 사랑하려는 사람들이다. 남을 지배 하려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경쟁하고 빼앗고 빼앗기는 대결 상황에 휘말리다가 비명에 가거나 아니면 역사의 죄인으로 어둠속에 갇히게 된다.이것은 오늘 이 땅에서 살아온 우리들이 너무나 생생하게 보고들은 현상 들이다. 그러나 남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뭇 사람들의 비웃음과 멸시를 받는 것 같으나 사람들의 마 음을 기쁘게 하고 살맛이 나게 한다. 이것은 자존심을 버리고 자신을 무로 돌리는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그런 사람들 때문에 오 늘도 죽을 사람이 목숨을 건지고 버림받았던 사람들이 역사의 품에 안기는 일들이 일어난다.주이며 선생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남의 발을 씻겨어 주어야한다. (13절) 남을 섬긴다는 것은 예수를 닮는다는 뜻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태도이다. 그 분은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자기를 나추시고 죽기까지 순종 하셨으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다남을 섬긴다는 것은 첫째가 되는 길이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모든 사람은 꼴찌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마가 9:35). 노자의 성인 편에 있는 글이다 “성인은 자신을 잊고 남을 위함으로써 영원히 잊게 된다.” 영원히 존재하는 길은 남을 섬기는 일이다. 동서를 막론하여 남을 섬긴다는 것은 미덕중의 미덕이요 그것은 영원을 위한 길을 터놓는 길이기도 하다.봉사 한다는 것은 섬긴다는 뜻이요 나누어 준다는 뜻이다. 성서에 의하면 나눈다는 것은 너 무나 거룩하고 축복된 일이다. 나누며 사는 사람들은 위기의 시대일수록 더욱 돋보이고 위기가 도리어 복이 되는 역전의 기회가 된다. 재산이란 남을 위해서는 덕이 될 수 있어도 자 신을 위해서는 멍에가 될 위험이 크다. 오병이어는 자기를 위해서는 어린아이의 한 끼 점심거리가 될 뿐이지만 남을 위한 먹거리가 될 때에 기적이 된다.하나님은 내 손으로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려고 할 때 그 자리에 현존하신다. 나누는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아브라함 부부는 어느 날 지나가는 손님을 접대 하였다. 그러나 그 손님들은 그 집을 떠나면서 한 가지 약속을 하였다. “다음해 이맘때에 내가 반드시 너를 다시 찾아오겠다. 너희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창 18:10) 이 약속의 성취는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두 가지 사실을 터득 하게하였다.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는 분 사람의 생산 능력은 정지 되었어도 하나님의뜻은 반드시 성취 되어 간다는 뜻이다. 섬기는 사람은 언제나 겸허해야 한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한다. (마6:3)이 말은 섬기는 사람은 자랑치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요 즘 교회 성장주의 자들의 메시지는 자기를 나타내는 나팔 소리일 겸허한 자세를 보기 힘든 상황이다. 나는 언제나 낯선 사람들의 친절에 의해 살아 왔어요. ”이것은 테네시 윌리암스의 “욕망이라는 전차에 ‘나오는 주인공 브랑쉬 뒤부아의 말이다. 사람은 부지중에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도움을 입고 살아간다.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사람들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다.그래서 사람들은 늘 고마운 일들 속에 살면서도 짜증스럽고 힘겨워하며 산다.지금 즘은 그 고마운 낯선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남은 날들은 섬기며 나누어 가며 살아 갈 때 아브라함의 축복이 우리 민족과 가정들 위에 임하기를 바라고 특히 21대 초대 총선에 선택받아 국회에 입성한 선량들은 이제 자기를 밀어준 국민의 마 음을 잘 헤아리고 지도자가 갗 추어야 할 기본인 섬김과 나눔에 힘써 주기를 바란다.“그때에 임금이 그들에게 말할 것이다. 너희가 내형제 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마2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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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김과 나눔의 지도자(요한 15: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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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할 수 없는 없는 증거(요한 12:9-11)
- 우리는 종종 과거의 감추어졌던 사건들이 속속 들어나는 경우를 우리는 목격하게 됩니다. 어둠의 세력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범죄의 흔적을 지우려고 합니다. 저들은 자기들이 저지른 일들이 드러날까? 두려워하기 때문에 어떤 방법으로든지 자기들의 죄를 숨기려 합니다. 그래서 들키지만 않으려 악을 쓰는 것입니다. 마치 현대인들은 “들키지만 말아라.를 십계명의 11번째 계명으로 삼아 살아가는 것 같이 보입니다.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한 무리들은 생명의 산 증거인 나사로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면 모든 문제가 완전히었 해결 될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나사로가 살아난 것입니다. 생명의 증거가 또 하나 생겨난 것입니다. 저들은 그 증거를 없애기 위해서 나사로도 없애 버리려고 모의를 합니다. 나사로만 죽이면 해결 됩니까? 문제가 생겼습니다. 생명의 증거가 또 하나 생겨난 것 이다 저들은 그 증거를 없애기 위해서 나사로도 죽이겠다고 모의를 꾸민 것입니다. 나사로만 없애버리면 해결 됩니까? 그 사탄은 12사도도 죽이려고 했고 역사를 통해 예수님의 증거를 없애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어두움의 세력들이 성공 했을까요? 얼마 동안은 쾌재를 불렀을지 모르지만 그 그들의 만행은 천하에 들어나기 마련입니다.주님의 생명이 살아있고 주님의 전능하심이 사라지지 않는 한 저들의 수고는 헛수고가 될 것입니다. 분명 다시 살아난 나사로는 주님께 영광이 되고 있었습니다. 오늘 성경은 나사로 까닭 많은 사람이 나사로가 까닭에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예수를 통해 다시 산 사람 즉 구원 얻은 사람은 또 다른 사람을 주님께 이끌어야 하고 수 새 생명을 얻게 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모두가 나사로처럼 부정할 수 없는 예수님의 향기가 될 수 있을까요. 부정할 수 없는 예수님의 향기가 되기 원하는 사람은 무엇보다 예수님이 주시는 새 생명을 소유해야 합니다. 나사로는 진정 죽었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죽었고 썩었0습니다. 그런데 주 님은 그를 살려 주셨습니다. 나사로는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감격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귀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도 나사로처럼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이었습니다.(엡2:10) 그런데 주님이 살려 주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살려 주셨습니다. 그 생명에 대한 기쁨과 감격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사로는 말씀으로 살리셨지만 우리를 살리기 위해 주님이 십자가에 피 흘리시며 죽으셨습니다. 기억 하십시오. 그 놀라운 주님의 향기를 퍼뜨리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까? 주님의 생명의 향기를 증거자가 되기 위해서는 주님과 함께 있을 줄 아는 자라야 합 니다. 나사로는 다시 살아났을 때 그 새 생명의 기쁨 때문에 이곳저곳으로 뛰어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님 곁에 꼭 붙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사로를 본 자는 주님을 보았고 주님을 본 자는 나사로를 보았습니다. 진정 주님의 향기를 나타내기를 원하는 자는 주님과 함께 있는 생활 자체가 필요 합니다..바닷가에 오래 머물러 있는 자는 바다 냄새가 몸에 배이고 산에 가서 숲에 오래 있는 자는 산 냄새가 몸에 배이게 마련입니다.예수님의 향기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함께 오래 있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또한 에 수님의 향기를 나타내기를 원하는 성도는 예수님만 나타나게 해야 합니다. 나사로는 오직 예수님을 나타나게 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나타 내지 아니 했습니다. 한국교회 쇠퇴의 원인 중 하나는 대부분의 교역자들이 교회를 성장 시키고 부흥 시키면 내가 이렇게 해서 부흥되고 교회가 성장 했다고 간증 비슷한 말들을 듣게 됩니다. 나사로는 자신의 죽음의 간증도 없었습니다, 오직 주님 곁에 않아서 주님만 보게 했습니다. 오늘 많은 은혜 받았다는 분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다 좋고 은혜롭습니다. 그런데 정말 아쉬운 것은 그것이 결국 자기 자랑 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생명의 증거가 되는 사람은 자기는 나사로처럼 나는 사라져야 합니다. 우리 모두 나사로 같이 예수의 생명의 훌륭한 증거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할 때 한국 교회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어려움을 딛고 새로운 기회를 맞이하게 되리라고 확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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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 출애굽의 은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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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할 수 없는 없는 증거(요한 12: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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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놓아 걷게 하라
- 역사 적으로 보면 4월은 잔인한 달이였다. 그러나 또한 만물이 새로 기운이 솟구치는 희망의 계절이기도 하다. 요한복음 강해 첫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변케 하신 첫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우리는 지켜보았다. 그 외에도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과 기사가 많지만 이 모든 일들을 낱 낱이 기록 되었다면 이 세상이라도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 할 것이라고 요한은 말한다. 그 중에 예수께서 살아 계실 때 죽은 자를 살리신 기록이 세 번 있었다.마가복음에는 야이로의 딸이 살아난 기적과 누가복음 7:11절 이하에는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일이며 본문의 나사로의 살아난 기적이다. 이들의 기적 행사는 모두가 성격이 다르다.야이로의 달은 12세의 아이였고 나인성 과부의 아들은 청년이었으며 나사로는 중년 노년 이였을 것이라 짐작된다. 야이로의 딸은 그 현장에서 살려 주셨고 나인성과부의 아들은 무덤으로 가는 길에서 살려 주셨으며 나사로는 무덤에서 살려주셨다. 야이로의 딸은 부모가 있는 경우이고 나인성과부의 아들은 홀 어머니였으며 나사로는 부모가 없는 경우이다.죽음의 고통과 슬픔은 나이나 가정, 남녀나 순서도 관계없이 어디서나 찾아온다. 그러나 주님은 그 어떤 상환이던 관계없이 원하는 자들을 다시 살릴 수 있으시다. 그 주님은 조만간에 땅에 묻혀 흔적도 없이 썩어 없어질 수많은 인간들을 명령한마디로 다 살려 일으키실 것이다. 그리고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로 나누실 것이다.요한복음 5:28-29을 보자“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주님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리는 엄청난 일을 행하셨다. 그리고 나사로를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고 명하신다. 살리는 일은 주님의 일이다. 그런데 그 주님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는 귀중한 일을 우리에게 부탁 하신다.주경학자 핑크의 말이다. “하늘 이편에서 무덤의 돌을 굴러내고 베로 동인 것을 끌러 주는 일에 있어서 우리가 주님께 사용되는 일은 우리의 최고의 특권이다.” 우리는 이 놀라운 사건 이 급속히 퍼져 나가면서 이루는 놀랍고 무서운 결론을 보게 된다.첫째는 이 기적의 사건을 통해서 많은 사람이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주님께 대한 믿음이다. 그것은 나사로의 부활이 맺은 열매이다. 예수의 하신 일을 본 많은 이들이 저를 믿었으나 그중에 어떤 자들은 바리새인에게 가서 예수의 하신 일을 고하니라 (45-46) 이 기적을 본 유대인들은 여전히 두 파로 갈라져 있음을 보게 된다. 믿는 이들은 이 놀라운 사건을 통해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요한 저자는 기록 하고 있다.둘째로 고자질 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이야말로 종국적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공회의 결정을 촉진시킨 악의 유혹자들이다. 남을 충돌 질 하고 악을 도모하도록 부추기며 악에 동조하는 사악한 무리들이다. 셋째로 예수를 죽여 없애 버리므로 자기들의 안전과 이익에 해를 받지 않으려는 기득권 세력 들이다. 그들은 겉으로는 가장 거룩한 집단에 속한 자들이다. 그런 저들이 지금 가장 악한 일을 위하여 예수를 없애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의논한다.악인들이 서로 으르렁 거리면서도 서로 살기 위해서 함께 모이고 신성하게 행동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싸워야 할 대상이다. “이 사람들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결론은 당연히 그 예수를 믿고 따르는 일과 처음부터 믿지 않기로 작정한 자들이다. 그 선택의 문제는 바로 오늘의 문제로 남아 있다. 오늘도 여전히 복음과 예수에 대하여 가지는 태도는 부정적이다. 교회와 성도들의 신앙과 생활에 대하여 늘 걸고넘어지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어떤 권력 집단이나 단체는 기독교를 반기독교 적으로 흘러있다. 그러나 사는 길은 오직 한 길이다. 그 예수를 믿고 받아들이고 따르는 길 뿐이다.”이를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말씀이시다. 복음으로 억압과 착취와 불신의 거짓 이념의 신들에게 매여 있는 자들을 복음으로 풀어놓아 걸아가게 하라 21대 선거를 앞에 두고 누가 이를 행할 수 있는가?바로 살펴보고 이들에게 표를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 어느 때 보다 이단 사설로 외곡 복음이 외곡 된 인식을 벗기고 참 부활의 복음을 전해야 하겠다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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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놓아 걷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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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응답이 왜 지연되나?요11:5-8절
- 나라가 온통 대 혼란에 빠져 있다. 기독교인이라면 이런 때 기도를 하지 않을 성도는 없을 터인데 왜 하나님은 기도 응답을 지연 시키시는가? 오늘 본문에서 그 해답을 찾아보자. 나사로가 병이 들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안타깝게도 주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1초를 다투어 가면서 주님을 기다렸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저들의 화급한 마음과는 반대로 그 소식을 듣고도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병이라고 말씀 하시며 천연덕스럽게 이틀이나 더 머물러 계셨다.결론적인 말씀을 드린다면 심부름꾼이 예수님께 전갈을 가지고 왔을 때 이미 나라로는 죽어 있었다. 그리고 슬픔을 당한 자매들은 예수님을 기다리며 장례식까지 마친 상태였다. 그들의 모든 기대는 사라졌고 희망도 앗아가고 말았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이틀이나 더 머물러 계셨다. 왜 예수님은 왜 이리도 머뭇거리고 계셨을까? 여기 두 자매뿐이겠는가?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안타깝게 호소해왔던가? 그리하여 기도를 포기해 왔던가? 랍비 헤럴드 쿠시너는 왜 선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생기는가?에서 이해할 수 없는 엄청난 고통 앞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이 하실 수 있다는 우리의 기대를 꺾어버 리는 것이라고 주장 했다. 하나님의 사랑과 전지전능함 사이에서 갈등하게 될 때 하나님의 사랑은 받아들이되 그 분으전지 전능한 기대는 내려놓아야하고 접어 버리라고까지 했다. 그것은 하나님이 기적을 일으키시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 분이 그렇게 하실 수 없는 많은 여건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했다.하나님은 인생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것을 베풀고 싶어 하시지만 항상 그렇게 하실 수는 없다. 쉬운 예를 들면 경기장에서 양편이 똑같이 자기편이 이기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하나님은 어느편을 들어 주실까 하나님도 답답해하실 것이다.기도를 지연 시키는 첫째 이유는 첫째 주님의 마뭇거리심은 바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시는 주님의 겸손이다. 주님은 자기 뜻대로 모든 일을 하기를 원치 않으신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기를 원치 않으신다는 말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셨다. 그것이 두 자매에게는 주님의 이해 못 할 지체하심으로 보였을 것이다.둘째로 우리 예수님의 지체하심 그것은 사랑하는 성도에게 인내를 가르치시는 방법이다. 하나님은 필요 할 때마다 사랑하는 자식에게 받아 누리게 하시는 아버지만은 아니시다. 때로는 하나님은 성도에게 인내를 가르친다.하나님은 참을 줄 모르는 망나니를 원치 않으신다. 오래 오래 기다 릴 줄 아는 인내의 자녀를 원하신다. 인내 할 줄 아는 자녀 그 성숙한 자녀만이 천국을 소유하고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인내를 가르치셨다. “비록 더딜 지라도 기다리라 지체 되지 않고 정연 응하리라. (합2:3)셋째로 예수님의 지체하심은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이시다. 그로인해 가족들의 슬픔은 더했지만 결과 적으로 더 좋은 것을 허락 하셨다. 넷째는 주님의 지연시키심은 그들의 모든 인간적인 기대를 포기하기를 기다리는 주님의 훈련 이시다.인간적인 모든 기대가 철저하게 포기 되지 않으면 주님의 역사는 없으시다. 물에 빠진 사람은 살겠다는 허우적거림이 없어 질 때 그 때가 살려낼 때이다. 우리의 기대가 철저히 포기 되는 순간이 하나님이 역사하는 순간이다.작금에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직시해 보자. 인간의 모든 수단을 강구해 보지만 그것으로 다 가 아님을 시인 하자. “인간의 끝은 하나님의 역사의 시작이다” 이 땅의 성도가 고통당한다고 해도 그 일 때문에 이루시는 그 가장 좋은 응답을 감격적으로 믿음으로 체험하는 성도되기를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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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응답이 왜 지연되나?요11:5-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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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의 덧에 걸리다
- 프랑스에 떠도는 민담에 이런 것이 있다. 어느 젊은이가 극진히 사랑하는 아가씨가 있어 아내로 맞게끔 허락해 줄 것을 부친에게 간청을 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그 아가씨만은 안 된다. 고 완강히 거부를 한다. “실은 너희 어머니에게는 속여 왔지만 그 아가씨는 딴 데서 낳아온 아이다”고 했다.그래도 이 아들은 체념하지 않고 이번에는 어머니한테 가서 상의를 했다. 어머니의 대꾸인즉. “그렇게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라. 실은 너희 아버지에게는 속여 왔지만 너는 아버지 자식이 아니다”부모들은 자식에게 시실을 말하고 있지만 부모들의 결합은 거짓 위 에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건 심한 경우이지만 남녀 사랑이란 시간의 구분 없이 어느 만큼은 거짓으로 속이고 속는 사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사나이가 마음먹은 여인을 낚아채고 싶을 때 그 낚시 밥은 화려한 거짓말이 서려있다. 여인도 그렇다 화려한 화장 자체가 속임수다. (햄릿에서 주인공은 백분 칠을 한 오피리아를 이렇게 질책하고 있다.“신이 만들어 준 얼굴을 너희 여자들은 화장으로 속여 딴 얼굴로 만들고 있다”고 어디 화장 뿐 인가? 진짜와 가짜의 식별이 어려울 정도로 정교 하게 가짜를 만들어 낸다고 한다. 그런데 이제 사람마저도 가짜로 만들어 내고 있으니 기가 막힐 일이다. 한 때 명품과 똑같이 만들어 은밀히 유통되던 일명 짝퉁 명품이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은 적이 있다. 세계적인 유명 브랜드의 명품 가방을 전문가조차 식별이 어려울 정도로 정교하게 가짜를 만들어 낸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 교회 목회자중 가짜 가운을 걸친 목회자 들이 많다는 데에는 할 말을 잃게 된다. 혹은 많이 세상 잘 돌아 가는데 무엇 그렇게 과잉 반응이냐고도 혹은 말한다. 거짓말은 윤활유 같은 것. 물론 거짓말에는 그 성질이 악질이냐? 양질이냐? 에 따라 빛깔이 다를 수 있다.단테의 신곡에 보면 지옥 순례 길에 거짓말한 사람의 심판 장면이 나오는데 하얀 거짓말을 한 사람은 구제를 받고 검은 거짓말을 한 사람은 단죄를 받게 된다.하얀 거짓말은 다치는 사람이 없는 거짓말이고 검은 거짓말은 그 때문에 해를 받은 사람이 있는 악의 거짓말이다.요즘 사이비 종교가 어떻게 그렇게 순진한 성도들을 유인 할 수 있었을까? 사이비종교는 겉으로는 종교처럼 보이나 실제는 종교가 아니다. 사이비 종교는 ‘진짜 종교와 구별되는 ’가짜 종교를 말한다.일반적으로 사이비 종교 중에는 사교(邪敎)가 있다 이것은 사악한 종교라는 뜻이다. 사교에서는 대개 응집력이 있고 폭력, 비 윤리적 행동, 가정파괴, 집단적 공동생활 방식의 방식을 갖고 있기도 하나 반사회적이기도 하다. 이처럼 사교는 자기들만의 독특한 삶의 방식을 갖고 있기도 하며 “천국의 문처럼 다른 집단에게 기이하고 해괴한 모습으로 비치기도 한다. 신약 외경 유딧 9:3 속임수가 있는 곳에 피가 함께 한다는 말이 나온다. 외경에 나온 말이라고 무심히 지나쳤던 말이다.피를 흘린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우리 삶이 진실을 외면하고 살다가 최후에 당할 일을 깨우쳐 주는 구절이다. 우리는 눈 한번 찔끔 감으면 세상의 모든 것을 속일 수 있고 속이며 살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에 합당한 피의 보상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속임수는 어떠한 경우에서나 좋은 전술은 아니다. 속임수는 언제 인가는 그 진상이 드러나기 마련이다.순진한 기성 성도들을 온갖 속임수로 유인하여 자기 아성을 꾸리 o wl wk 던 교주의 행각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다. 한국 교회여 진리 앞에 진솔하자. 거짓의 덫에 걸리지 않게 되기를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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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의 덧에 걸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