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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 출애굽의 은총 기사

  • 제3일 길의 의미 (출 5:1-9)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드디어 애굽땅에 들어가 바로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였습니다. 모세는 바로에게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소개하였고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절기를 지킬 것이라고 분명하게 전달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영적인 교훈을 찾을 수 있습니다.바로는 세상 임금인 사단의 모형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늘날 바쁘게 살아가면서도 아무 의심 없이 무덤의 벽돌 만드는 죄인들의 모습입니다. 바로 오늘날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리는 무리의 고집인 인간 본성의 모형이기도 합니다. 결국 바로 왕의 아들이 죽었을 때 이스라엘 민족을 내어 보냈던 것은 우리들의 본성이 골고다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 믿음으로만 의인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이제 우리는 완악한 그의 행동을 통해 멸망 받을 자의 몇가지 특징을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본문을 보면 백성을 보내라는 모세의 말을 듣고 바로는 네가 말하는 여호와가 누구관데 내가 네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2절) 했습니다. 이것은 다분히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고 그분의 명예를 손상 시키려는 교만한 태도 입니다.하나님께 멸망받을 자의 태도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우리가 잘 아는 불렛셋의 장수 골리리앗을 보아도 바로에게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멸망 받을 자의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 했던 빌라도의 ‘진리가 무엇이냐? (요 18:38)라는 비소적인 물음 속에서도 하나님을 부인하고 자신을 의지하는 교만과 어리석음이 숨겨져 있음을 발견 하게 됩니다.이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 없고 눈앞의 현실에만 급급해합니다. 모세는 재차 바로에게 백성들을 보내 줄 것을 요청 했습니다(3절). 그러나 완고한 바로는 너희가 어찌하여 백성으로 역사를 쉬게 하려느냐? 거기서 너희의 역사나 하라 핏발 서린 말로 대답합니다.바로는 모세가 전한 하나님의 명령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자신의 정치적 이권에만 몰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마치 그들은 대 홍수 직전에 노아의 경계를 듣고도 현실적 쾌락에만 몰두하여 노아를 비웃던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고 소돔성에 거하던 롯의 사위나 예수님을 찾아왔던 부자청년처럼 구원의 도리의 말씀을 듣고 오히려 근심하며 돌아간 것처럼 현실 문제에 온 신경을 기울임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등한이 여기는 우를 범하고 말았습니다.그들의 결국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의해 모두가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멸망 받을 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사 5:24-25) 오히려 그 말씀을 비웃고 귀를 닫은채 자신의 현실적 문제에만 집착 합니다. 말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면서도 삶은 하나님의 말씀과는 무관하게 생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본문을 보십시오. 모세의 말을 듣던 바로는 급기야 그 말을 무시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전보다 고역을 더욱 무겁게 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한 방법으로서 그분의 백성 이스라엘을 더욱 모질게 핍박하고 있는 것입니다.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여 성도를 핍박하는 악인들이 비록 세상에서 핍박을 하면 할수록 성도는 더욱 강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애굽을 떠날 준비를 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왕이 바로 이스라엘을 보냈더라면 그들은 생각하기를 바로 왕이 허락해서 우리가 애굽에서 나올 수 있었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핍박을 받으면 받을수록 낙망하지 맙시다. 오히려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성도에 대한 그 분의 구원이 가까왔음을 알고 기뻐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요구한 것은 3일쯤 가서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기 위함 이라고 하였습니다.바로는 3일에 대한 의미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모세와 아론의 제의를 한마디로 거절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로 인하여 전보다도 심한 박해와 고역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3일 여정을 걸어야 합니다.그것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 칼럼
    • 출애굽의 은총
    2018-04-11
  •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출 4:1-9)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지팡이 니이다’.(2절) 하나님께서 모세를 택하여 애굽에서 신음하는 자기백성을 구원해내는 위대한 사명을 맡기시고자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바로 왕 앞에 보내실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아무것도 주시지 않았습니다.그냥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습니다. 목동이었던 모세에게 지팡이 하나가 유일한 무기였습니다. 그리고 단순하게, 내가 너와 함께 하시리라고만 말씀하십니다.모세를 부르시고 그를 통하여 큰일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대에도 우리를 부르고 계시며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도구로 하셔서 당신의 은혜로운 목적을 성취하여 가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 모세와 같이 쓰임 받는 일꾼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1. 현재 나에게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내게는 없는 것으로 일하시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가진 지팡이를 던지라고 하십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팡이를 땅에 던지니 그 지팡이가 무서운 뱀으로 변했습니다. 모세는 뱀을 보고 놀라서 피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네 손을 내 밀어서 그 뱀의 꼬리를 잡으라고 하십니다. 모세가 뱀의 꼬리를 잡자 그 뱀은 곧 이전의 모세의 지팡이로 변했습니다.여러분 왜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팡이를 땅에 던지라고 하셨을 까요? 목자인 모세의 손에 들려있는 지팡이는 바로 모세의 지식과 경험과 힘, 명예, 자존심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바로 모세가 의지하던 것들이 때로는 남을 해치는 무서운 뱀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40년 전 그의 엄청난 힘이 혈기로 작용했을 때 애굽인을 쳐 죽인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네 손에 들려진 지팡이 곧 희귀한 재능이 하나님의 손이 아닌 자신의 욕심과 정욕이나 혈기로 사용되면 되면 뱀이 되어서 다른 사람을 해칠 수 있다는 사실을 경고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모세에게 한정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것들을 가지고 오로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만 사용 된다면 모세의 지팡이가 뱀이 되었던 것처럼 우리의 귀한 모든 것도 남을 해치는 뱀이 될 수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갖고 있는 것으로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것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지식이 있다하여 그 지식이 교만과 짝하면 배우지 못한 사람을 멸시합니다.돈이 있다하여 그 돈이 욕심과 결부되어 사리사욕을 위해 쓰여질 때 얼마나 많은 사람에 해를 끼칩니까?모세가 뱀의 꼬리를 잡자 그 뱀이 또 다시 그의 지팡이로 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민족 해방의 큰 사명을 맡기시고 모세를 애굽왕 바로 앞에 보내 실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지팡이를 여호와의 지팡이가 되게 하여(출 4:20) 능력의 지팡이 기적을 일으키는 위대한 지팡이가 되게 해주셔서 민족구원의 대역사를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바로 왕 앞에 나아가 이 지팡이를 던지니 지팡이가 뱀이 되어서 애굽의 모든 뱀들을 잡아 켰습니다. 이 지팡이로 나일강을 쳤을 때 강의 물이 새빨간 피가 되었습니다.홍해를 쳤을 때 홍해가 갈라져 육지가 되어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왕 바로의 손에서 구원하였습니다. 광야에서 물을 얻지 못하여 목이 갈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죽게 되었을 때 이 지팡이로 반석을 치자 생수가 터져 나와 이스라엘 백성을 살렸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위대한 지팡이지만 지팡이 자체에 힘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여호와의 지팡이가 되었기 때문에 그처럼 위대한 역사를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예수님께서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 하셨을 때 유대 각지에서 수많은 사람이 몰려와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고 또 예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막 8:2-3). 이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들에게 먹을 것이 있느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이 어린 소년이 갖고 있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어 놓자 축사 하신 후 5천 명을 먹인 사실입니다.하나님께서 위대한 역사를 일으키실 때 지금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역사를 일으키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지금 현재 우리의 능력이 아주 미미하다 할 지라도 주저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어 하나님께 어떻게 사용 하시는지 주시해야 할 것입니다.
    • 칼럼
    • 출애굽의 은총
    2018-03-30
  • 왜 여호와인가? (출 3:13-18)
    무전여행을 떠난 대학생이 어느 산골을 지나다가 밤을 맞게 되었다고 한다. 인가가 드문 곳이라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멀리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것이었다. 너무나 반가워서 단숨에 달려갔다. 그런데 방문을 두드리려는 순간 모자간의 걱정스런 말소리가 들려왔다.“어휴, 먹을 게 없는데 당장 어쩌나” “어머니 할 수 없잖아요. 똥이라도 드셔야지요. 먹을게 없다고 굶으실 수는 없잖아요?” “정말 그렇구나. 할 수 없이 똥이라도 먹어야겠구나.” 아니 도대체 얼마나 가난했기에 그것을 먹는단 말인가? 문 밖에서 이 소리를 듣고만 있던 이 학생은 너무나 모자가 불쌍해서 도저히 그냥 지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주인을 부르고 문을 열어 보았다. 뭐 했겠는가? 화투판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사람이라는 존재는 완전하지를 못해서 이렇게 오해를 할 때가 많이 있다. 사람이 가장 답답할 때가 언제인가? 자신이 오해를 받으면 가슴이 답답하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고 어떻게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 있으며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누구냐? 하는 질문은 유사 이래로 계속되어온 질문이었다. 그러나 인간으로서는 그 누구도 명쾌하게 이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그리스의 철학자 풀라톤 조차도 ‘무엇이 하나님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무엇이 하나님이 아닌지는 안다’. 지극히 피상적인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 속에서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신지 확실히 알 수 있다. 하나님이 당신이 누구신지 분명히 성경 속에서 분명히 밝히셨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이 누구신지 묻는 모세의 질문에 하나님께서 답하시는 장면이다.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한 마디로 말해서 알파와 오메가로 전에도 계시고 지금도 계시고 장래에도 영원까지 계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의 철학적 산물도 아니고 도덕적 대리자도 아니고 영원히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다. 그 종교의 기원을 보면 대개 인간의 두려움을 내어쫓기 위해서 즉 액운을 없애 보려고 어떤 것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 무속 신앙이고 또는 인간의 마음을 바르게 해서 인간사회에서 질서를 잡아 보려는 데서 생긴 수양 종교가 있는데 그런 것은 인위적 종교 즉 사람이 만든 종교이다.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계시종교로 이는 영원한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알려주시고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만나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에 성령으로 오셔서 지금도 우리와 동행해 주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이시다.1. 본문에 하나님은 자신을 여호와라고 하셨다. 이 이름의 의미는 영원한 자존 자 즉 스스로계신 분이라는 말이다. 오늘성경에 보면 광야에서 양을 치고 있던 모세를 호렙산 가시덤불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신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바로의 수중에서 해방 시켜내라고 명령을 내리신다.이때 모세가 말하기를 그러면 바로가 내게 묻기를 네가 누구의 부르심을 받고 왔느냐고 물으면 무어라고 말하리이까? 고 질문을 한다. 이때 하나님께서 말씀 하시기를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씀 하시며 나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고 말씀 하신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모두 피존적 존재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존자이심으로 공간과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시고 못하실 것이 없으신 전능자이시라는 의미이다.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이 말씀은 이해하기 좀 힘든 내용이다. 그러나 그것은 정확하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속성을 밝히신 것이다. 그러므로 피조물인 인간이 결코 자존하시는 하나님을 평가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르지 자존하심에 겸손히 머리 숙이고 그 분께 경배 드려야 할 것이다.3장에서만 너희 조상의 하나님임을 네 번이나 강조 하셨는데 그 이유는 언약의 하나님 이심을 강조하시기 위해서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언약(출 2:24)을 기억 하셨다는 것은 곧 언약을 파기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나타내신 것이다. 민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모든 언약은 영원히 불변 하시다는 뜻으로 소금언약 (민 18:19)으로 맹세의 언약이 되는 것이다. 바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심을 믿을 때에 우리는 큰 위로를 받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에게 언약 하신 것을 이루신 것처럼 우리와 맺은 언약도 성취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 칼럼
    • 출애굽의 은총
    2018-03-22
  • 꺼지지 않는 불-2 (출 3:1-10)
    나무에 붙은 불은 시간의 결과에 따라 꺼지게 되어 있지만 가시떨기에 붙은 불은 꺼지지 않았다. 이 불은 하나님의 불이였기 때문이다. 40년 전에 모세는 자기의 불로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불은 하루 만에 꺼지고 말았지만 하나님의 불은 계속 타오르고 있었다.아벨의 제단에도 하나님은 임재 하셨고. 아브라함의 제단이나 엘리야의 제단에도 우리의 심령의 제단에도 하나님은 임재 하신다 .인간의 불은 꺼지게 되나 하나님의 불은 꺼지지 않는 불이다.“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눅 12:49)아무도 찾아 주지 않는 외롭고 고독한 모세에게 하나님은 신을 벗으라고 하신다. 지금까지 모세는 산에서 신을 벗은 예가 없었다. 광야에서 신을 벗고 살수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을 벗으라고 하신다. 모세에게 신을 벗으라고 하신 것은 네가 40년 동안 줄기차게 버티어 오던 것을 내가 깨뜨렸으니 이제는 네 소유권을 내놓고 항복 하라는 뜻이다. 그가 신발을 벗고 모 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자 하나님께서 그를 점령 하신다.모세가 신었던 신발은 세상의 온갖 더러운 것들이 다 묻어 있다. 그러므로 더러운 것들을 벗으라는 말씀은 물, 세례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새로워지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히브리서 12장 22절에서 밝히고 있는 참으로 위대하고도 거룩한 땅에서 부름을 받고 있는 신약의 백성들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인 줄 믿자.지금 신약의 백성 들이 서있는 자리는 시온산과 하나님의 도성과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군 천사와 거룩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낮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고 하였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 지금 그리스도인들이 서있는 곳을 말하고 있는데 히브리서 기자는 호렙산에서 임했던 그 상황과 지금 우리가 서있는 자리를 비교하며 속히 신을 벗어 거룩한 백성이 되기를 권고하고 있다.이제 모세에게 신을 벗으라고 명령 하셨던 하나님은 지금 우리가운데 영적으로 발에 신을 신고 있는 사람은 없는가? 생각과 마음속에서 더렵혀진 세상의 신을 벗어야 한다. 우리는 골로새서 3:10절의 말씀과 같이 우리를 창조하신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다.우리의 생각이 새롭게 지으심을 받아야한다. 구습을 좇는 헛된 생각을 벗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내 의지와 어두움의 일을 좇던 잘못된 습관의 신을 벗어버려야 한다.우리는 이제 신을 벗기 위해 다시금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 하자 성령의 불에 우리의 옛 신발을 태우자. 그리하여 한 없이 맑고 순수한 생각괴 마음으로 새사람이 되어 하나님께 쓰임 받는 그릇이 되어야 한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 이 말씀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보라 지금은신을 벗을 때요 구원의 날이로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교훈을 삼고 모세와 같이 광야로 나가서 신을 벗어 버리는데 전력을 다해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 하고 하나님의 역사가 있는 교회와 성도 여러분 들이 되시기를 바란다.오늘날 한국 교회를 보노라면 한편 두려운 생각이 앞선다. 점차적으로 한국교회는 하나님 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지 않나하는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한국 개신 교회가 이 땅에 뿌리 내린지 1세기 겨우 넘어 수많은 기적 적인 부흥을 이룩한 한국교회가 이제 곳곳에서 터가 무너지는 소리가 심심치 않게 들려오고 있으니 지금 한국 교회는 느헤미아의 기도가 시급히 요청 되고 있다.사회가 맘모니즘으로 회칠한 무덤이 되더라도 그리스도인 들은 거기에서 탈피할 수 있어야 한다. 지혜가 여과 장치가 준비 된 수원지를 통과해야 맑고 깨끗한 물이 가정으로 송수 되고. 오염된 사회 속에서 정화기로서의 사명을 다하는 한국 교회이기를 소원한다.
    • 칼럼
    • 출애굽의 은총
    2018-03-08
  • 꺼지지 않는 불 (출 3:6-12)
    가시나무 떨기는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여러 나무로 비유되어 왔는데, 이번에는 키가 작고 보잘것없는 떨기나무로 상징되었다. 키가 크고 늠름한 나무는 머리를 하늘높이 자랑스럽게 치켜 들고 있어 세상 사람들에게 잘 보이며 찬사도 많이 받는다. 이에 비해 가시나무는 키가 작아서 그 모습이 초라하여 사람들에게 관심 밖에 있게 된다. 그 나무에 불이 붙었다고 한다. 불은 성경에서 흔히 성령을 상징하고 있다. 그 기적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의 압박 밑에서 온갖 핍박과 고난을 당했어도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 하심으로 그들이 결코 타지 않음을 의미한다. 나무에 붙은 불은 시간의 결과에 따라 꺼지게 되어있다. 가시떨기에 붙은 불은 꺼지지 않았다. 이 불은 하나님의 불이였기 때문이다. 40년 전에 모세는 자기의 불로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보려고 하였으나 그 불은 하루 만에 꺼지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불은 계속 타오르는 불이다. 아벨의 제단에도 하나님은 임재하셨고. 아브라함의 제단에도, 엘리야의 제단에도, 우리의 심령의 제단에도 하나님은 임재하신다. 인간의 불은 꺼지나 하나님의 불은 꺼지지 않는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눅12:49). 네 신을 벗으라. 아무도 찾아 주지 않는 외롭고 고독한 모세에게 하나님은 신을 벗으라고 하신다. 지금까지 모세는 산에서 신을 벗은 예가 없었다. 그 발로 애굽 사람을 쳐 죽여 밟아버렸으니 광야에서 신을 벗고 살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신을 벗으라고 하신다. 모세가 신었던 신발에는 세상의 온갖 더러운 것들이 다 묻어 있다. 그러므로 더러운 것들을 벗으라는 말씀은 물세례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새로워지라는 의미이기도 하다.우리는 히브리서 12장 22절에서 밝히고 있는 참으로 위대하고도 거룩한 땅에서 부름을 받고 있는 신약의 백성들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인줄 믿는다.지금 신약의 백성들이 서있는 자리는 시온산과 하나님의 도성과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군 천사와 거룩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낮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고 하셨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 지금 우리 성도들이 서있는 곳을 말하고 있는데 히브리서 기자는 호렙산에서 임했던 그 상황과 지금 우리가 서있는 자리를 비교하며 속히 신을 벗어 거룩한 백성이 되기를 권고하고 있다. 이제 모세에게 신을 벗으라고 명령 하셨던 하나님은 지금 여기 우리에세또 더러 세속의 신을 벗으라고 하신다. 그럼에도 영적으로 더러워진 발에 신을 신고 계신 분은 없는가? 생각과 마음속에서 더렵혀진 세상의 신을 벗어야 한다. 우리는 골로새서 3장 10절의 말씀과 같이 우리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다. 우리의 생각이 새롭게 지으심을 받아야 한다. 구습을 좇는 헛된 생각을 벗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내 의지와 어두움의 일을 좇던 잘못된 습관의 신을 벗어 버려야 한다. 우리는 이제 신을 벗기 위해 다시금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해야 한다. 성령의 불에 우리의 옛 신발을 태우자. 그리하여 한 없이 맑고 순수한 생각과 마음으로 새 사람이 되어 하나님께 쓰임 받는 그릇으로 준비되어져야 한다. 이것이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을 향한 지상명령이시다.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이 말씀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보라 지금은 신을 벗을 때요 구원의 날이로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교훈을 삼고 모세와 같이 광야로 나가서 신을 벗어 버리는데 전력을 다해야 할 때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모세와 같이 고역으로 신음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불이 밝혀져 있는가? 점검해야 한다. 등 점검하여 불이 꺼지지 않도록 해야 하고 기름을 잘 공급해야 한다. 그러할 때 우리는 드디어 하나님께 쓰임 받게 되리라 확신한다.
    • 칼럼
    • 출애굽의 은총
    2018-02-23
  • 떨기나무 불꽃 (출 3:1-12)
    기독교는 인간이 만들어낸 종교의 범주 속에 넣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종교이기 이전에 생명 자체이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들이 고행과 인간의 노력을 통하여 하나님의 세계에 도달하려는 학문과 행동에 불과하다. 그러나 기독교는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의 종교요 계시적인 종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이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구원 을 얻고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 은혜에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1. 떨기나무 가운데 임재하신 하나님.이 떨기나무는 어떤 나무인가? 떨기나무라 불리는 이 나무는 한 마디로 버림받은 나무이다.꽃을 피워 향기를 내는 화초나 열매를 맺는 유실수나 더구나 재목으로 쓸 수 있는 나무도 아니다. 사람 뿐만 아니라 짐승조차도 가까이 하지 않는 나무요 저주 받고 버림받은 나무였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이런 버림받고 저주받은 나무에 임하셨을까? 그 이유를 생각해 보자.(1) 애굽속의 이스라엘 백성이었다.모세는 당시 처가살이하면서 장인의 양 무리를 돌보고 있었다. 동족들은 애굽 땅에서 인간 이하의 짐승처럼 노예 생활을 하고 있었다. 모세를 포함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형편은 떨기나무와도 같았었다. 인권은 물론 경제적인 착취를 당하고 종교적인 자유마저 누릴 수 없는 가련한 형편 이었다. 이스라엘 이야말로 소망은 보이지 않았고 고통의 연속이었던 어느 날 하나님은 떨기나무 가운데 임하셨던 것이다.모세는 40세에 자기의 힘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해방시키려 했으나 그는 실패 하게 된다. 광야로 도망한 모세는 40년 동안 꿈마저 사라져 버리고 소망도 사람도 가까이 하지 않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2) 우리 에게도 하나님은 임재 하신다.우리가 돌아 볼 때 가시떨기 처럼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마음속에는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성령님이 임재하고 계신다.모세가 자기 자신을 신뢰 하였을 때는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셨지만 임재 하시지는 않았다. 그것은 아무 육체라도 주 앞에서 자랑 할 수 없게 하려 하심이다(고전 1:27-31).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신다.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나갈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임재 하시게 된다구약의 예언자가 끊어진지 400여년 아무 희망이 없는 암흑시대에 가시나무 같은 곳에 예수님이 오셨다. 그러므로 자기가 가시 떨기나무같이 형편없고 보잘 것 없다고 낙심할 필요 없다. 왜냐하면 우리 에게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이다.비록 떨기나무 같이 보잘 것 없고 아무 쓸모없는 것 같이 보여도 우리 속에 하나님이 임재 하셔서 역사하시기만 하면 큰 광경을 이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 하시느냐 이다. 예수를 믿어도 하나님의 임재 하심이 없이 내가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임재 하시기만 하면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 이 형통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의 형통이다. 이 형통하게 되는 비결은 광야로 나가는 것이다그리하여 고요한 자리를 찾아서 하나님과 교통하며 그분께서 주시는 힘을 덧입으며 그분을 바로 알고 바로 배우며 자기를 발견하여 자 기 허물을 찾아 고치는 일을 하는 것이다.오늘도 하나님은 아무 짝에도 쓸데없다고 고백하고 깨어지고 낮아진 떨기나무 가운데 우리에게 임하신다. 바로 그분을 만나는 일야 한다. 바로 지금 이 그분을 만날 때이다.
    • 칼럼
    • 출애굽의 은총
    2018-02-09
  • “요셉이 죽고. 모두 죽었더라” (출 1:6-8)
    본문은 이집트에 이주했던 제1세대들은 모두 죽었고 그곳에서 태어난 세대들로 완전히 교체되었음을 가리킨다. 우리는 언제나 두 가지 종말을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요셉은 그리스도의 모형이요. 새 왕은 종말에 나타날 적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적그리스도란 예수를 믿는 자를 대적한다는 뜻이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이집트를 통치하기 시작하면서 부터 이스라엘은 말할 수 없는 박해와 고통을 당하게 된다.박해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에 대한 벌로서 이집트에 대한 깊은 적대감을 이스라엘에게 불어 넣음으로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의 위험을 만나도 이집트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먹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고 가나안에 대한 소망을 잃지 않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깊은 섭리로 보는 경해와 또 다른 교육적인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그러나 애굽에서의 압제는 이러한 면보다도 더 나은 많은 교훈을 배우게 된다. 압제는 단결을 가져왔고 함께 느끼는 슬픔은 국민 감정을 일치 시키는데 놀랄만한 촉진제가 되었을 것이다. 대장간에는 쇠보다 더 강도 높은 연장을 만들기 위해서는 불로 단련이 필요 하듯이 그들의 장래에도 수적인 증가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질적 단결이 더욱 필요했을 것이다.단적으로 말해 연단을 통하여 이스라엘인들의 마음속에는 견인불발의 민족정신이 형성되기 시작 하였던 것이다.학대를 하면 할 수록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능력과 자비가 애굽에의 해방에서 더욱 힘 있게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베이커 주석). 그리하여 고안해 낸 것이 국고 성 비돔과 라암셋을 쌓는 일이었다. 그런데 애굽 왕의 계획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우리 민족은 일찍이 하나님을 유일신 하나님으로 믿는 복음을 받아 들였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 하나님은 우리 민족을 축복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 민족을 학대 중에도 축복 하시고 번성케 하셨다.학대 받기 전에 우리 민족은 소수 민족 이었다. 일본으로부터 학대 받는 동안에 한국 민족은 강대해졌다.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학정아래 두어 강하게 함같이 하나님이 우리 한국 민족을 일본의 학정아래 두어 강하고 담대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 믿음을 유지 하는 한 이제 우리는 결코 약하지 않다. 학대 받는 민족은 망하지 않는다. 학대 받는 민족은 축복 받는 민족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민족으로 쓰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이제 우리는 학대 받는 민족이 아니다. 그러나 나라의 절반이 학대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고난을 당할 수록 강한 민족이 되고 설움을 당할수록 번영 하는 민족이 된다는 점을 잊지 말자. 하나님의 작정하신 때가 되면 우리 민족이 세계 인류를 향하여 역사를 이룰 때가 올 것으로 본인은 확신한다.압제받는 자를 하나님은 보호해 주신다. 가장 흉악한 음모가 감행됨에 따라 가장 무시 무시한 혼란 상태가 야기 되지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잃지 않고 유지 하도록 도우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자. 또한 교회를 향한 세상의 박해는 타작마당에 쌓인 곡식을 키질하는 것과 같이 결과는 유익한 열매를 맺게 되어 질 것을 확신 하자. 참된 그리스도인은 소금과 같은데 소금이 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상자 안에 모여 있어서는 안되며 그것이 필요한 곳으로 한 줌씩 들어가야 한다더욱 교회에 대한 박해는 열성적인 전도자를 사방으로 분산시킴으로써 교회를 더 부흥시키는 결과를 가져 올 뿐이다. 그런고로 박해는 교회라는 벌집을 수많은 벌 떼를 흩어 버림으로써 사방에서 꿀을 보장해 주듯 하나님은 가장 위험한 사태에 처한 그들에게 피할 길도 내어 주신다.끝으로 지금 우리가 커다란 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지만 인내로 극복하고 나가면 결국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우리 민족과 개인을 더 견고하게 하시어 가나안의 은총을 주실 것을 확신하고 나가자.기회는 다가오고 있다. 시련이 크면 클 수록 우리는 더 강해질 수 있다. 출애굽기에서 배우는 진리이다.
    • 칼럼
    • 출애굽의 은총
    2018-02-03
  • 새 지도자들에게 바란다
    관심을 모은 한국교회 2016년 9월 총회가 막을 내렸다. 통합측은 전 총회장들이 총대들 앞에서 교권과 금권에서 자유롭지 못했음을 회개하는 모습은 전 회원들의 진한 감동을 주었다.또한 기장총회에서는 예상을 뒤엎고 한신대 총장 서리 인준안을 부결시킴으로 교권에서 벗어나보려는 몸부림의 모습에서 새로운 희망의 새로운 싹을 볼 수 있었으며 감리교 선거도 과거와는 달리 큰 잡음 없이 끝난것도 성숙한 모습이라 볼 수 있다.이제 새로 선출된 지도자들에게 바란다. 지금 우리 사회를 보면 삶의 근본정신이 어떤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초대 교회는 그 시대와 사회에 새로운 정신적 기풍을 불러일으킨 것을 볼 수 있다. 교회는 지역 사회 속에서 참된 삶의 이념과 정신을 불러 일으켜 주어야 한다. 민주 사회 안에서는 참된 삶의 이념과 경제를 발전시키고 과학을 아무리 발전시킨다 해도 정신적인 참된 기반이 없다면 다면 그것은 모래위의 집과 같을 것이다. 집을 지을 때 그 기초돌을 어디다 어떻게 놓느냐에 따라 집 모양이 정해지듯이 머릿돌을 바 로 놓아야 한다. 그 다음 축조 공사가 진행 되듯이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 안에 건설함에 있어서 교회 자체가 하나의 머릿돌로서 제자리에 제대로 놓였느냐에 따라서 이 사회에 하나님 나라를 바르게 확장 되어 질 것이다.이미 알려진 대로 우리 민족의 문화적 바탕은 종교였다. 고대에는 소위 민족 종교라는 사머니즘이 짙게 깔렸었다. 우리에게 있어 종교 문화는 곧 민족 문화요 민족 문화의 뿌리는 바로 종교였다. 우리 민족 문화는 종교의 토양 속에서 자라 왔다. 종교는 이렇게 우리 삶과 같이 했고 활력소 역할을 감당해 오기도 하였다그런데 이런 종교가 세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종교적 정신 풍토를 더욱 돈독히 유지하고 발전 시켜 민족 화합에 기여하고 나아가 인류의 공영에 이바지하기를 새로운 지도자들에게 바란다.교회 안에서 분열 작용이나 하고 지도자답지 못한 자가 아무리 좋은 언어를 구사해도 응답 이 없는 메아리에 불과 하기 때문이다. 공장에서 물건을 생산해서 창고에만 쌓아 두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꼭 필요한 수요인에게 공급해 주어야 되는 것 같이 이 세상이 필요로 하는 역군이기를 소원 한다. 주님의 십자가는 장식으로 사용 되거나 묵상만 하고 찬양은 하면서도 막상 그 십자가를 져야 할 때가 오면 외면하는 지도자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지도자들이 모이면 말은 풍성한데 어느 정치 단체나 사교 단체 같거나 어떤 사업 단체나 기업 같은 실망감을 안겨 주는 일이 더 이상 없게 되기를 소원 한다. 내 나라 내 사회 내 이웃 내 민족이 한데 어울리는 하나님나라 건설을 위해 이 땅에 부패와 부도덕을 쓸어내고 아름다운 사회 건설에 지도자들이기를 소원한다.끝으로 마땅히 지도자는 당연히 진리로 허리를 동이고 정의로 가슴을 무장하고 평안의 신을 신고 머리에는 구원의 투구를 쓰고 믿음의 방패와 성령의 검을 소유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 하게 가지는 것은 두 말할 필요 없다 그렇지 않으면 앞서 말한 모든 것이 이념 운동으로 전락 할 것이기 때문이다.
    • 칼럼
    • 출애굽의 은총
    2016-10-12
  • 영혼의 웰빙
    요즘은 어느 때 보다 웰빙에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이른 아침 새벽 기도를 마치고 가까운 산이나 공원을 가보면 나보다 일찍 운동하러온 사람들로 언제나 만원이다. 생활체육을 하는 팀이며 축구팀 또는 단호흡 파룬궁 신자들이 단체로 모여 기를 묵상하는 모습들은 한편 신선하게도 보였다. 모두가 웰빙 시대의 단면을 보게 된다.잠시 있다 사라질 육체의 건강을 위해 저렇게 이른 아침 공원에 나와 자기의 체질에 맞는 운동을 하는데 영원히 살아야 할 영혼을 위한 웰빙은 없을까?뒤로 걷는 분이며 뚱뚱한 몸을 풀기 위해 운동기구에 매달려 사력을 다한다. 이렇게 육체의 건강을 위해 음식을 고루 섭취하는 일과 몸에 맞는 운동으로 체중을 감소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영혼에 맞는 웰빙은 없을까?성경 다니엘 5:22-3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벨사살을 페하심으로 바벨론이 멸망하고, 페르시아에게 나라가 넘어간 것을 알 수 있다. 벨사살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이유는 하나님께서 달아 보셨을 때 함량 미달이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이에 비해 다니엘은 왕은 바뀌고 나라가 바뀌어도 여전히 건재하였다고 소개한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저울로 달아 볼 때 함량이 충분했던 인물임을 보여 준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당신의 저울에 달아 보신다.어떻게 하면 존재의 무개를 더할 수 있을까? 세상의 저울은 무거울수록 무개는 더 올라가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저울은 그 반대로 비울 수록 무거워진다. 욕망과 교만을 버리면 무개는 더 무거워진다. 인간의 욕망은 본능에 의해 다스림 받는 짐승만도 못한 존재로 우리를 리드한다. 사자는 배가 부르면 그만 먹는 본능의 명령에 따라 영양이 코앞을 지나도 멀 둥 말 둥 쳐다보고 있어 영양이 안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은 그 본능 지배마저도 거부하게 하여 재벌소리 듣는 자들이 더 많이 가지겠다고 가족끼리 작전을 하듯 소송 싸움을 하는 것을 본다.어제는 해양의 나라인 영국에서는 옛 향수를 못잊어 하던 기득권 층의 반란에 어렵게 형성된 유럽연합이 균열이 일어나고 있다고 보도되고 있다.자족하는 마음이 없는 한 세상의 그 누구도 만족하게 할 수 없다. 그러나 감사하는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그 어떤 처지나 환경에서도 만족할 수 있다. 타락한 영혼은 욕망에 매달려 과거를 후회하고 현재를 원망하며 내일을 염려하는 가운데 주어진 삶을 허비하며 불행의 나락으로 미끄러져 빠져 들어간다.그러나 감사하는 영혼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피조물로서의 본분을 다하는 축복받은 삶을 누리게 된다. 보라매공원의 운동장을 걸으며 우거진 나무의 모습을 보며 산소 공장에서 뿜어 나오는 공기를 마시니 막힌 담이 시원하게 뚫리는 듯하다.비둘기들이 잔디에서 잔디 씨를 쪼아 먹고 있는 모습이 처량하다 준비해간 빵조각을 날리니 떼를 지어 날아든다. 적은 것을 통해 비둘기들의 고맙다는 날개를 친다.감사의 마음으로 현실을 보는 사람은 행운의 네 잎 클로버를 찾고 행복이란 세 잎 클로버를 찾는 자들이다. 네 잎 클로버를 찾아 이리 저리 방황하는 것이 아니라 네 잎 클로버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이 세 잎 클로버가 발 한가운데 존재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돌아보면 모두가 주님의 은혜인데 주신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더욱 움켜쥐려고 동분 서주했던 자신의 몸집이 너무 커진 것이 아닌가?나는 교포 선교한다고 하면서 베풂의 영성보다 좀더 선교의 확장이란 명분으로 몸집을 불리려는 뚱보의 몸집이 되어가고 있지 않은가? 베풂으로 받는 기쁨은 받을 때보다 더 크고 더 진한 감동을 체험하지 않았던가?아직도 나는 영혼의 무게가 얼마인가? 욕심의 무게는 줄이고 감사와 긍휼 베풂의 무게는 올려야겠다. 하나님의 저울에 나의 영혼의 몸무게와 믿음의 척도는 어떻게 비칠까? 생각하며 링주위를 도는 가운데 5바퀴를 돌았다. 영혼의 웰빙이 시급하다.
    • 칼럼
    • 출애굽의 은총
    2016-07-08
  • 평생 목회자의 믿음의 자화상
    오래전 전도하기가 쉽지 않은 때에 지방의 섬에서 신앙생활 하다가 자녀를 따라 교회 근처에 이사 온 권사님 한 분이 교회를 나오셨다. 얼마동안 교회봉사에 열심하던 분이 갑자기 교회를 그만 두겠다고 한다. 후에 들리는 소리로는 목사님도 ‘생명나무’에 대해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계시록을 바로 알아야 하는데 참 아쉽다는 말이 전해온다. 평생 목회의 길만 고집하고 걸어왔는데 어떻게 해서 이런 말이 전해 오는가? 하고 본인의 믿음에 점검해 보게 되었다.20세기의 광포한 독재자 히틀러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 지구상에는 문화를 창조하는 우수한 민족과 문화를 파괴하는 열등 민족과 남의 문화를 모방하는 민족이 있다. 독일의 게르만 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문화 창조의 민족이다. 현대는 우수한 민족이 세계를 지배해야 한다. 독일은 인류를 지배하고 지도할 역사적 사명과 책임이 있다. 그는 급기야 이러한 잘못 된 신념에 기초한 믿음으로 마침내 세계대전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 일로 인하여 죄없는 자들 이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었던가.성경을 부분적인 것을 픽업해서 자의로 해석하는가 하면 잘못된 맹신주의 신앙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알아야 한다.우리의 어떠한 믿음인가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 첫째는 경신(經信) 은 깊이 생각하지 않고 경솔하게 믿는 것이다. 정규 신학훈련을 거치지 않은 지도자를 믿고 따르는 맹신주의에 빠진 경우이다. 얼마 전에 어느 세미나에서 강사의 설교 가운데 한국 교회의 위기를 말하면서 목회자들이 강단에 신발을 신고 올라가는 경우를 들면서 한국교회의 위기를 말하는 것을 보았다. 자신의 성경읽는 것을 자랑하면서 하루 30장 이상 읽지 않는 목회자는 목회자 자격이 없다고 몰아친다.나는 평생 그렇게 못한 목회자이기에 대꾸할 염치도 없지만 분명 그분은 자기의 의를 들어내고 있음에 마음이 씁쓸하였다. 주님은 자기의 의를 주님의 의보다 더 들어내는 바리새주의를 경계했다.둘째는 미신신앙으로 어리석고 나약한 인간의 종교형태이다. 셋째는 맹신이다. 이성적 판단력이 없는 맹신은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덮어 놓고 믿으라고 한다. 젊었을 때 기도원의 강사가 회중들 앞에 따지지 말고 “덮어 놓고” 믿으라는 외침이 귀에 선연하게 들려온다. 한편으로 긍정적인 면도 인정하지만 폐해도 많은 것 같다넷째는 광신이다. 이것은 신앙의 가장 저급하고 가장 나쁜 형태이다. 광신주의자는 이성과 관용의 정신이 결여되어 자신의 신앙, 자기의 종교만이 옳다는 것까지는 좋은데 지나쳐 아집과 독선과 독단에 빠지는 경우는 충격적이다. 그는 절대로 남의 얘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참 믿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나의 삶과 죽음이 전적으로 하나님 안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이요 수용이다. 또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한다는 뜻이요 사람은 결코 홀로 설수 없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영으로 평화의 도구로 거듭난다는 뜻이 아니겠는가?신앙이란 관람석에서 무대 위에서 연출하는 배우들의 몸짓과 말에 울고 웃는 것이 아니라 시나리오를 몸으로 실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에 열심있는 사람은 믿음이 깊은 사람이요 남을 사랑 할 줄 아는 사람이다. 나의 믿음을 점검해 보니 솔직히 낙제 점수 수준은 면한 것 같아 스스로 위안을 받는다.
    • 칼럼
    • 출애굽의 은총
    2016-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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