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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 출애굽의 은총 기사

  • 성서가 말하는 통치 기술
    금번 총선을 통해서 민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여실히 드러났다. 정치는 물의 흐름과 같아 아래로 흐르지만 때로는 막히기도 한다. 어디에서 막히고 어느 시점에서 굽어졌는가를 잘 살펴야 한다.성서에 통치에 대한 내용을 살펴본다.“지도자들이 바르게 다스리고 재판하는 자들도 올바르게 판결을 내린다(잠언 8:16).”“참으로 지혜는 진주보다 좋으며... 지식과 분별력을 가지고 있다”(잠8:11-12). 먼저 눈에 띄는 구절이다. 지혜를 터득하지 못한 권력들은 일이 꼬일 때마다 조자룡의 (趙子龍)의 헌칼 처럼 강한 대응책을 공포한다.그러나 그런 큰 큰소리 친 정권치고 선정을 베풀었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 그러기에 잠언에서는 “지혜를 얻는 사람은 생명을 얻고 주께로 부터 은총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놓치는 사람은 자기 생명을 해치는 사람이다(잠언 8:35절) 라고 경고하고 있다.사람은 통치자들은 성서에서 뿐만 아니라 옛 사람들의 경험과 가르침은 오랜 세월 사람들 의 성패를 통하여 터득한 가르침 이라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또한 지혜의 왕 이라는 칭호를 받는 솔로몬이 후배 권력자들에게 주는 교훈이기도 하다.어느 한 순간 갑자기 깨달은 것이 아니라 시대와 인종을 초월하여 오랜 세월 동안 공감하고 터득한 보편성과 타당성을 지닌 교훈이라는 점을 바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인자와 진리가 왕을 지켜주고 정의가 그 보좌를 튼튼하게 한다(잠언 20:28). 통치자의 권위와 안전은 진리와 정의의 실천으로 이룩된다. 이승만 정권은 그 찬란한 독립투쟁의 이력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거스리고 정의를 외면함으로써 붕괴되어 버렸다유다나라가 멸망 할 때의 사회 현상을 돌아보자. 그들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멸시하고 천대하였다. 외국인과 고아와 과부를 돌보지 않고 괴롭혔다. 품삯을 떼먹고 죄 없는 자에게 죄를 씌워 억울하게 하였고,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렸다. 백성들의 악행을 일깨워 회개케 해야 할 성직자들은 불의한 자들과 야합하였다. 불의한 권력자들을 도와 그들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죄를 지적하고 경고하는 자들을 핍박하고 소외시키고 우스개 거리로 만들었다.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않은 말, 자기 마음의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전하였다. 그들은 불의에 눈 감았고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끝까지 지켜 보호해 주시리라고 주장 하였다.“네가 만사형통 할 것이다. 불의를 행하는 자들에게도 ”너희에게 재앙이 임하지 아니 하 리라“ 안심시켰다.오늘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청소년들의 성문란, 돈이면 청부 살인까지 서슴지 않는 사회 이면에 수십억씩 재산이 불어나는 권력자들의 치부, 불의와 악행이 만연되어 있다. 그 불의로 인한 양심의 거리낌을 교회나 절에 헌금함으로 씻어버린다. 많은 통치자들은 바른 말 듣기를 꺼려하고 정의가 사라진 사회에서는 주먹만 날뛰게 마련이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말은 법은 별 쓸모가 없고 주먹만 확실하다는 관념에서 온 의식구조이다. ‘공의로 다스리는 왕은 나라를 튼튼하게 하지만 뇌물을 좋아하는 왕은 나라를 망하게 한다.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말씀이다.통치자의 입에서 공의에 관한 말이 그치면 그 사회는 어둠의 세력이 판을 치게 마련이다.“주께서는 정의와 공평을 지키며 사는 것을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더 반기신다(잠언 21:3).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그 근간은 정의 실천 여하에 따라 튼튼해지기도 하고 흔들리기도 한다. 선량으로 뽑힌 자들에게 고한다.호남에서 당선된 의원이 “다 죽고 나만 살아 왔다”고 울음을 터트린 심정을 공감한다. 그렇게 어렵고 힘든 선거를 치루고 선택된 여러분은 정의, 실천의 귀재가 되어야 나라는 굳게 서고 백성은 평화를 누리며 번영의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 칼럼
    • 출애굽의 은총
    2016-04-27
  • 인생 후반전의 삶을 위해
    목회일선 에서 손을 놓고 보니 웨인지 아쉬움이 감돈다. 교회에 가면 교회 구석구석에 나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별로 없을 정도로 기력을 쏟아 부었으니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러한 생각도 무리는 아니리라 본다. 그렇다 치더라도 한 가지라도 어디 내가한 것인가? 사도 바울이 고백한대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 로라.” 고한대로 이제 돌이켜 보면 내가 앞장 설 때는 주님께서 “네 힘으로 해 보아라.고 무관심 하고 오히려 ‘주님 나는 못한다.’ 고 손을 바짝 들었을 때 주님은 맡아서 역사하신 것을 이제야 바로 깨달은 것이 격세지감이다.이제 생각해 보니 나는 대 교회 체질이 아닌 듯하다. 평생 농촌교회, 개척교회, 복지 선교회 밀알선교 00선교에 집중 하다 보니 교회를 크게 부흥 시키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다고 후회는 않는다. 그 이유는 큰 교회가 있으면 작은 교회의 역할도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교역 생활 가운데서 나대로의 행복을 복을 찾아본다. 처음 주의 부름을 받아 주님의 종이 되었을 때에 이미 택한바 된바 것을 그리고 영원한 소망 속에 살게 하셨고 복음 사역을 맡겨 주심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작은 교회를 목회 하는 중에도 눈물겨운 추억 거리들을 남겨준 성도들을 떠 올리면 눈물 자 욱이 서려온다. 생각해 보면 적은 교회를 섬긴 것이 행복인 것도 많았다.하늘에 폭격기가 뜬 것도 아닌 데 바위 덩어리 같은 것 들이 융단 폭격을 하 듯 땅으로 쏟아 진다. 재수 없이 한방을 맞은 개미는 훌랑 뒤집어 졌다가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고 풀잎에 붙어 있던 무당벌레는 집중 포화를 맞아 결국 땅 바닥으로 나뒹굴고 만다. 폭풍이 몰아치면서 검불에 붙어 애벌레의 꿈을 키우고 있던 알들도 모조리 떨어져 버린다. 거미줄에 걸려든 메뚜기는 이미 탈진 상태다. 정복자처럼 늠름한 기세로 쳐다보고 있던 거미는 재빠른 몸놀림으로 포획해 버린다. 특수 훈련을 받은 공수부대원과도 같다. 미시의 세계 땅위의 작은 세계를 확대경으로 들여다 본 모습의 일부이다. 세상은 자꾸 대형화 되면서 작은 것들에 대한 소중함을 잃어가고 있다. 건물을 지어도 고층 으로만 짓고 물건을 사도 한꺼번에 많이 사고 값은 비쌀수록 좋은 것으로 여기고 기회가 와 도 커다란 것 한방만 생각한다. 모두가 홈런만 치려고 한다. 자동차도 대형화 되어 있고 집에 있는tv도 모두 대형화 되었다.교회도 변두리에 있으면서도 중앙교회 창대, 제일00 라는 이름도 유난히 많이 눈에 뜨인다.그렇다면 모든 것이 커진다고 모두 행복하고 좋은 것일까? 대형화 추세의 이면에는 경제적인 욕심이 들어있다. 우리는 작은 것의 위력을 실감 할 때가있다.칼질을 하다가 잘못하여 손가락을 뵈었다고 생각해 보자. 신체의 극히 일부가 상처를 입었지 만 우리의 모든 감각과 신경은 손끝으로 집중하게 된다. 작은 벌레가 내는 소리에도 세미 하게 들리는 의미가 있듯 큰 것은 큰 것대로 작은 것은 작은 것대로 소명이 있다. 때로는 작은 것 들이 쌓여서 큰 것이 된다.옛날부터 “목사는 설자리는 있어도 앉을 자리는 없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의 뜻은 목사는 설교 하기는 쉽지만 평신도 자리에 앉아서 남의 설교를 듣기는 거북 하 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낮은 자리에 앉은 것이 좀 어색 하다고할까?다른 말로 표현하면 평신도가 교회에 나오면 환영 하지만 목사가 교회에 나오면 별로 달갑지 않게 대한다는 푸념도 심심치 않게 들리는 말이다. 그러기에 은퇴한 다음에는 어느 교회로 가야 할까? 하는 것이 가장 고민스러운 과제라고들 말한다.그러나 이제 마음을 비워야 한다. 은퇴하는 순간 죽은 몸이다. 목회자는 죽고 이젠 평신도로 또는 작은 자로서 소임을 다하려는 마음이 요구된다.성실하고 무성한 나뭇잎이 단풍이 들고 낙엽이 되면 비록 서글프지만 뿌리로 돌아가서 나무를 살게 하는 거름으로 변화 하듯이 낮은 자리에서 평신도를 섬기는 자로 서기를 소원해 본다.인생 전반전은 좀 부실한 경기 이였다면 이제 인생 후반전의 값있는 삶을 위해 철저히 낮아지는 일부터 익숙해 져야겠다. 이제 본 교회에 출석하며 기득권을 다 내려놓는 훈련부터 쌓아 가리라고 다짐해 본다. 인생 후반전의 멋있는 삶을 위해서.
    • 칼럼
    • 출애굽의 은총
    2016-03-24
  • 총선을 준비하는 분들에게!
    우리 교회에 새벽 기도를 열심히 나오시는 분이 계신다. 키는 외국에서 온 이방인 같고 안면은 텁수룩한데 본인의 말로는 중국에서는 한의사 자격증을 취득 하였고 미국에서는 두 주에서 자격증이 인정받는다고 한다. 부인과 자녀는 미국에 있고 혼자 교회 가까운데 기거 하면서 작은 교회임에도 다문화 등을 섬기는 것을 보고 교회에 나오게 되었노라고 한다.그런데 어느 날 실토정 예기를 하겠다며 자기는 K대 정치외교 학과를 나왔고 몇몇 분의 정치인을 거론하며 자기의 후배들이라고도 한다. 그러면서 금번 다가오는 총선에 서울에 주목하는 정치 일번지에 출마할 예정이며 남이 안하 는 특수한 방법으로 선거 운동을 해보겠다고 한다. 대화하는 중에 목사님 이번 싸움은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과 같지만 한번 해 보렵니다. 이미 결정 된 사항 같아서 격려와 기도해 주었다.인간은 누구나 정치적인 본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창조주가 인생을 지으실 때 ‘땅을 정복 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창1:23) 그러므로 인간이 범죄한 이후에도 인생은 다스리기를 원하고 반면에 다스림을 받는 것을 싫어 하는가보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이 군대 노릇을 할 때도 서로 대장이 되려고 하고 졸병 하기는 싫어한다. 결국은 힘센 아이가 대장 노릇을 하기 마련이다.이런 인생이 어쩌다 권력을 얻기만 하면 좀처럼 내놓지를 않는 것도 이해 할 만도하다. [공자]는 정치의 원리를 간단히 요약 하여 정(政)을 바로 정(政)이라고 하였다.정치는 옳은 일을 하되 바른 방법으로서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권력을 잡았다고 해서 꼭 행복한 것만은 아닌가보다.고금 동 서 양을 막론하고 정객(政客) 들이 많은 위험 중에 살아 왔으며 인류의 역사는 권력 투쟁으로 인한 흥망성쇠의 피비린내 나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권세가 있으나 저희 에게는 위로가 없도다. 전4:1]우리는 때때로 교회나 가정 일만 잘되면 일만 잘되면 그만이지 정치는 불신자 들에게 맡기면 된다는 사고방식을 갖기 쉽다. 그러나 권력을 결코 정치를 무시 할 수 없는 것이다. 무정부 상태를 상상해 보라? 그러기에 바르게 정치 할 수 있는 자를 뽑아야 하는데 그것이 그렇게 쉽지가 않은 모양이다. 자신이 정 도령이나 되는 양 선전을 뿜어 대지만 그 내면을 알 수 없는 일이고 정견이라는 것도 사탕발림인 경우가 허다하다성경도 무자격자가 권력을 쥐게 되면 세상이 어지럽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다. 잠언 30:21-23에 “세상을 진동 시키며 세상을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종이임군된 것과 미련한자가 배부른 것과 꺼림을 받는 게집이 시집 간 것과 게집종이 주모를 이 은 것이니. 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교회나 정계에 주인공을 뽑을 때 지역감정에 기대거나 인정에 치우치지 말고 참 자격자를 살펴서 세워야 할 것이다. 오늘 언론에 소개 된 제일 야당의 국회의원이 공천에 제외되자 ‘나 같은 꼰대도 필요한데 하 며 이유 없이 떠난다.’ 는 노 정객의 모습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그러면 성경이 제시하는 참 자격자는 어떤 사람일까?마태복음 20:20-28절에 “그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우편에 하나는 주의좌편에 않게 하소서”.“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 고자 하는 자는 너희 중에 종이 되어야 하리라.요즘 도시 중요 거리 대형 건물에 나부끼는 현수막을 보면 모두가 훌륭한 문구가 눈에 뜨인 다. 겉으로는 모두가 국가와 민족을 원한다지만 벼슬자리에 않기만 하면 제 권위, 제 위신, 제 자리에 손실과 상처만은 안 입겠다고 갖은 수단을 부려온 아니꼬운 자들을 가려내야 하겠는데 그것이 그렇게 쉽지만은 아니다.오직 겸손 하게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사람을 세워야 할 것이다. 지역감정을 부추기거나 권력에 아부하여 이득을 얻고자 하는 자들을 가려내는 일은 현명한 국민의 책무이다. 교회도 마찬 가지 목회자를 청빙 할 때도 교회 본질은 외면한 채 성장 일변도의 목회에 여념 이 없는 자들에 의해 교회의 위신은 땅에 추락 하고 있다. 후보자와 간담을 나누면서 “지금의 그 자세를 끝까지 유지 하세요” 정치인의 자격을 논하며 밤이 깊어 가고 있다. 우리 정치도 깊이 있는 정치의 계절이 오기를 소원한다.
    • 칼럼
    • 출애굽의 은총
    2016-03-17
  • 민족을 구원하는 교회
    새해가 되면 누구나 새로운 계획이 있게 마련이다. 그 계획이 나만의 계획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뜻 안에서의 계획인지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올 한 해 동안 신앙인으로서 나의 결정과 판단이 이웃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보는 시선이 하나님 아버지를 닮은 것인지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이루어 지 는 것인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누가6:30)‘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 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막1:15)이것은 광야에서의 시험을 극복하고 갈릴리에 돌아 오셔서 전하신 첫 말씀이다. 민족을 구원하는 일은 예수께서 가르치신 첫 주제였다. 그 일이 성취되지 않고서는 민족 구원 완성을 기대 할 수 없다. 예수께서 이 설교를 마치신 후 제일 먼저 하신 일이 병든 이를 고쳐주시는 일이었다. 풍랑을 만나 고통당하는 사람들, 굶주린 사람들을 구원 하여 주시는 일이었다. 형식화된 유대교로부터 그들을 해방 시켜주시는 일이었다.한국의 교회는 한국 민족과 함께 웃고 우는 교회가 되어야하고 민족과 함께 통곡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슬픈 역사 속에서 ‘고난 받는 종으로 수난의 역사를 같이 사는 교회가 되어야한다. 약자를 억누르는 편이 아니고 억눌린 자의 편에서 그들과 함께 신음하며 울어야 한다. 영광의 자리가 아니고 비천한자리에서 고난을 감수하는 자리로 내려와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불의를 고발한다는 것이고 사회악을 제거하는 자가 된다는 것이요. 억울한 자의 편에서가 아니고 억눌린 자의 편에서 그들과 함께 울어주는 자리여야 한다. 맨 처음 한국 교회는 한국 역사의 빛이었다.그 다음은 이 민족의 역사 속에서 고난 받는 종이었다. 그리고 이제 한국 교회는 이 민족의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되어야 한다. 그때 이 땅의 교회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한국은 빛에 짓 눌려 있고 아직도 인간의 권리와 존엄성을 지킬만한 복지 사회를 이룩하는데는 갈 길이 멀다. 더더욱 가슴 아픈 일은 남과 분단 상황을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동족이면서도 가장 무섭고 떨리는 대적 관계에 놓여 있다.이런 처지에서 개인의 구원이란 너무나 불안한 것이다. 그래서 나의 구원과 동시에 민족의 구 원에 나를 산제사로 드리는 것이 참으로 하나님께 올바른 일이요 민족의 역사를 바로 잡는 일이라 믿는다. 인간의 존엄성을 실천하고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맡기신 소명을 실현하기 위한 정치에 참여 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무가 아니겠는가?이웃의 고통을 모르면서 하나님만 아는 것은 자만을 낳게 될 것이요. 하나님을 모르면서 이웃의 고통만 아는 것은 절망을 낳는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하나님뿐만 아니라 우리의 고통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 하셨다는 것은 인간을 창조적인 피조물이 되게 했다는 뜻이다. 창세기에 보면 모두가 맑게 개인 하늘과 땅으로 가득 차 있다. 어느 한 구석에도 그늘진 종교의 흔적이나 샤머니즘적인 요소가 보이지 않는다.창세기 첫 머리에 나오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로 빚어진 살인 사건이 그 예이고 아담과 하와의 자기 기만이 그것이다. 창조주인 야훼 앞에서 떳떳하지 못했을 때 인간이 스스로 자기를 기만 했을 때 인간은 나뭇잎으로 스스로를 가릴 수밖에 없었다.역사가 하나님의 역사가 되게 하는데 교회의 사명이 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이렇게 선포 하였다. ‘뇌물을 받고 재판을 그릇되게 하거나 하거 나 가난 하다고 동정적인 재판을 하지 말라고 하였다. 가난한 사람을 없이 여기지 말고 과부와 고아를 돌보아 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계명이라고 했다.이것을 지키는 자에게 축복이 있고 어기는 자에게 저주가 있다고 했다. 야훼는 ‘나 곧 나’인 동시에 ‘나 곧 그’다 이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는 자가 예언자 이다. 모세가 밝혀준 야훼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형상 그것을 담은 것이 성경이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표이어야 한다. 민족 구원의 원년이 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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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애굽의 은총
    2016-02-26
  • 새해 신앙의 첫 사랑을 회복하자
    사랑이라는 말에 대해 묻는다면 ‘사랑하라’는 것 이상으로 더 할 말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 하여라(요한13:34) 예수님께서 이렇게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셨다.또한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을 덧붙인다. 그리스도를 믿어서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끝을 맺는다. 일단 이렇게 끝을 맺은 요한은 다시 에피소드를 추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내용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호숫가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 함께 아침을 드신 후 베드로 에게 “네가 나를 사랑 하느냐” 라고 세 번을 묻고는 나를 따르라고 마지막 유언을 남기는 장면이다.나는 요즘 이 장면을 주목하여 보고 있다. 복음의 사역자의 길을 가기로 다짐을 하였으나 고향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를 보니 얼마나 고생을 하는가? 식량도 여신도 교인들이 성미를 모아 간신이 생계나 꾸려갈 정도이고, 가을에는 교우들과 함께 산에 가서 나무를 하여 땔감을 마련하여 드리는 모습을 볼 때 처음에 먹었던 마음이 사라지게 되었다.그때마다 나는 이 말씀을 읽고 다시 힘을 얻곤 하였다. “네가 나를 사랑 하느냐?”라는 이 질문은 바로 나를 향하여 주시는 말씀이구나. 깊이 깨닫고 내 평생의 화두로 삼기로 결심하였다. 마치 주님께서 베드로를 만난 첫 순간에 베드로를 눈여겨보시고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 아니냐? 말씀하신 것처럼 나에게도 들려오게 되었다. 힘들고 낙심 될 때 우리에게 나를 사랑 하느냐?는 그 질문을 평생 새기기로 다짐을 하였다. “그러다가 요즘 요한계시록 2:4절에는 그러나 네게 나무랄 것이 있다. 그것은 네가 첫 사랑을 버린 일이다”라는 말씀을 새롭게 다가온다.에베소 교회를 위하여 참고 또 그의 이름을 위하여 잘 견딘 교회 아닌가? 그러나 그들은 주님께 바쳤던 첫 사랑을 버린 교회가 되고 말았다. 성경은 주님께 바쳤던 첫 사랑을 버린 이 교회를 향하여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서 떨어 졌는지를 생각하여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을 하라. 만일 그렇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내가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로 부터 옮기겠다”고 하신다.첫 사랑은 그것이 어떤 형태의 것이든 아름답지 않은가? 세상에는 첫 사랑이 무엇인지 조차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너무나 재 빨리 첫 사랑을 체험 하고는 재빨리 잊어버린다. 언제 내 몸과 마음을 스쳐 갔는지 조차 기억 못하는 첫 사랑이란 있으나 마나한 것이고 차라리 그것은 비극이다.첫 사랑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비록 이루어 지지 않은 사랑이라고 할지라도 두고두고 아름다운 추억이 될 수 있는 사랑일 때 해당이 된다. 만일 이와 같은 사랑을 스스로 포기 했거나 예상치 않았던 제3자의 방해를 받아 망가져 버린다면 그것은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만다.에베소교회의 경우는 ‘스스로 버린 사랑’으로 표현하고 있다. 스스로 첫 사랑을 버린다는 것은 자기 배반, 또는 자기기만이 아니면 변절일 것이다.만일 기독교 윤리학에서 첫째 되는 죄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변절’ 다시 말하면 사랑의 배반 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 주님을 배반한 변절자 가룟 유다에 대하여 주님은 노기 띤 목소리로 이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을 뻔하였다. 라고 말씀하신 의미를 이해 할 것 같다. 세상에 태어나지 않아도 좋은 사람들 -세상은 그런 사람들로 들끓고 있는 아닌지 …에베소교회는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수고도 많이 하고 참기도 잘한 교회였다. 그러나 그들은 첫 사랑을 버린 교회였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첫 사랑을 끝까지 간직 할 수 있다면 만일 두고, 두고 기억 할만한 첫 사랑을 간직하고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고 황홀한가?속히 사랑했다가 쉽게 내 던지는 사랑, 너무나 빨리 뜨거웠다가 빨리 내 던지고 쉽게 잊어버리는 사랑, 이와 같은 사랑은 있으나 마나한 사랑 있어도 그만 없어도 아쉬울 것 없는 그런 사랑 이라면 차라리 없었던 것이 좋았을지도 모른다. 이제 한국 교회는 첫 사랑을 회복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고난과 시련도 역경의 골짜기를 걸으면서도 조국을 사랑하고 고통당하는 자들을 돌아 보았던 그 열정을 어디에서 잃어 버렸는가? 물으시는 주님의 음성이 한국 교회와 요즘 첫 사랑을 잃어버린 것 같은 나에게 들려오는 듯하다. 금년 한 해가 사랑을 회복하는 원년으로 기록되기를 소원한다.
    • 칼럼
    • 출애굽의 은총
    2016-01-22
  • 새해의 각오
    구약에서 히브리어의 ‘새로움’이라는 말은 ‘하다쉬’인데, 이는 새롭게 하다. “부활하다” 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다윗이 시편 51:10절에서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이여 정직한 마음을 창조 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이 고백은 새롭게 되고자 하는 열망을 가장 아름다운 표현으로 이해됩니다. 역사는 언제나 준비된 자의 몫이었습니다. 마찬 가지로 그것은 개인도 가정도, 교회도, 국가도 예외가 아닙니다. 왜 일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일을 해야 할 것인가를 묻고 한 해를 출발 하였으면 하는 마음입니다.새 술은 새 부대에 라는 말씀과 같이 새로운 2016년은 분명 역사의 새로운 부대입니다. 2016년의 새 부대에 들어 갈 수 있는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새 각오로 열어 간다는 새로운 마음가짐을 가져 봅니다.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는 말씀은 옛 사람에게서 새 사람으로의 전환이며 육적인 삶에서 영적인 삶으로의 전환이고 나를 위한 삶에서 너의 삶으로의 전환을 의미할 것입니다. 새해 정초를 맞이하여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포도원의 무화과나무 (눅 13:6)를 다시 묵상 하여 봅니다.지방에서 목회 할 때 어느 교우가 무화과 씨를 선물해서 씨앗을 교회 차고 뒤에 심었더니 싹이 나오는데 밑에서 부터 여러 가지가 뻗어 나오더니 3년 쯤 되니 크지도 않은 투박한 나무에서 열매가 주렁주렁 열려 무화과의 맛을 알고 속성을 알게 되었습니다.장소를 가릴 것 없이 아무데나 심기만 하면 잘 자라는 볼품없는 나무가 포도원에 심어졌다는 것만으로도 주인의 파격적인 은총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돌이켜 보면 무화과의 모습에서 나 자신의 자화상을 보게 됩니다. 뚜렷한 재능도 없었던 자신을 주의 종 삼으시고 구비구비마다 사랑과 은총으로 돌아보시고 함께 하신 은총에 유구무언일 뿐입니다. 주님은 그러한 자신에게 이제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말씀과 같이 또 한 번의 2016년은 새로운 부대를 허락하셨습니다.2016년의 새 부대에 들어갈 수 있는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새 각오로 새 시대를 열어가야 하겠는데 그 공간에 무엇을 담을까? 그것은 옛 사람에서 새 사람으로의 전환하라는 명령이며, 육적인 생활에서 영적인 삶으로의 전환하라는 통보이며, 자아를 위한 삶에서 이타적인 삶으로의 으로의 전환하라는 의미로 다가 옵니다.목회를 마무리 하는 시점에서 돌이켜 보면 주인과 과원 지기의 정성과 관심에 비하면 내가 맺은 열매는 빈약하였고 스스로 자랑할 만한 것이라도 은총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것들인가 하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주인은 3년간 열매를 위하여 거름을 주고 북돋아 주고 모든 역량을 다 쏟아 붓고 열매만을 기다렸는데 시간이란 내일도 있고 모레도 있고 또 내년도 있다고 생각 하면서 당연히 해야 할 일도 미루어 놓은 채 어느덧 황금 같은 세월이 흘러가 버린 아쉬움만 남습니다.세계 제일의 하와이 촌을 건설한 키이젤은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기고한 글에 “나의 성공은 시간 활용을 잘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5시간의 잠자는 시간도 아이디어의 시간 이라고 하면서 종이와 펜을 머리맡에 두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자다가도 일어나서 그 생각들을 노트에 적어 두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체하지 않고 실행해 갔다고 합니다. 부지런한 청지기의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벌써 2015년도 을 보내고 21016년의 새해 새 아침을 맞이하였습니다. 키이젤 처럼 거창한 하와이는 아니더라도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주옵소서. 한대로 정의가 새파랗게 살아 있어 ‘유전 무전’ ‘무전 유죄’로 고통 받지 않는 나라, 속담에서 같이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나라, 건설에 쓰임 받고자 소박하지만 절실한 소원을 꿈꾸어 봅니다.역사의 어둠에는 항상 개인주의, 이기주의적인 사욕이 설치는 시대였습니다. 반대로 역사의 발전과 공동체의 기쁨에는 이타주의, 공리주의적인 정신이 기둥처럼 세워져 있었습니다.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 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 주인은 올해도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거름을 주고 기대하실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없는 자 같이하지 말고 오직 지혜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올해도 이 말씀으로 마지막 주시는 기회라 믿고 시간의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다해 볼까 다짐해 봅니다. 주인의 배려와 과원지기의 간청으로 또 한해를 주셨으니 주인의 기대에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결심 떠오릅니다. 끝으로 정신문명이 물질, 문명을 이끌어가는 바른 가치관을 세워가며 사회 풍토를 쇄신하고 도덕적 기풍을 크게 진작 시키는 일에 모든 종교, 특히 기독교회가 일어나 새일을 감당하기를 소원하며 각자의 위치에서 모든 역량을 한데 모아 구세재민(救世載民)의 청풍을 일으키는 새해 새 각오를 다짐해 봅니다.주여! 이런 일들이 금년에 안에 반드시 성취되기를 원합니다.
    • 칼럼
    • 출애굽의 은총
    2016-01-12
  • 숲길을 걸으며
    지난 주는 오래간 만에 종로에서 열리는 문학인 행사에 갔다가 청개천의 크리스마스 테마 파크 거리를 걸어 보았다. 낮에 보아도 그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섬세한 모습들이 개천 숲을 걷는 이들을 환영하듯 즐거운 개천과 숲의 걸음이었다.청개천의 길을 걷다 옛 서점을 돌아보았다. 학창 때는 한 주간이 멀다하고 찾았던 곳, 구하려 하던 서적을 만나면 사랑하는 자를 만난 듯 책 값을 따지지 않고 구입했던 추억의 장소를 물어물어 찾았다.길가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던 그때의 모습은 거의 경제 논리에 의해 일반 상가로 대치되었고 몇 서점만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는데 옛 추억을 더듬어 보며 몇 군데를 둘러보다가 어느 서점에 들르니 좁은 공간에 책들이 잘 정리되어 있는데 한눈에 들어와 접어든 책이 있었다. 책 내용을 살펴보니 글과 사진을 함께 어울려 소담스럽게 쓴 것으로 제목은 ‘숲’이었다.글의 내용도 석류 알처럼 영롱하여 글쓴이의 마음이 내 마음에 와 닿았다. 책을 구해 읽으면서 어느 새 숲속에 기대고 있는 내가 됐다. 목양의 현장은 마치 숲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별별 나무들이 제 나름대로 서있는 곳 각각 제 목소리로 산바람을 휘감는 것이 그렇고 높은 나무 작은 나무 이파리 떡갈나무 참빗 같은 침엽수 등 천태만상 이다. 숲은 속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느림’과 ‘비움의’ 교훈을 품는 삶의 수원지와 같다.숲은 편리함이나 안락함은 없는 대신 순결함과 침묵의 훈계를 껴안고 있다. 은퇴가 머지않은 시점에서 돌이켜 보면 나의 목양은 겨우 나무 가지 하나 붙들고 씨름하는 나무는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눈먼 목회였지 않았나? 돌아보게 된다. 숲만 바라보고 씨를 뿌리는 목자가 아니었나 본다. 밭을 일구는 일에는 일 년이 걸리지만 씨앗을 뿌리는 일은 하루면 충분하다. 밭을 일구는 데는 많은 땀과 수고가 필요 하지만 씨앗을 뿌릴때는 하루의 즐거움으로 채워진다. 그러나 뿌리는데도 절차가 있는 법, 밭이 돌밭인지 부드러운 흙 밭인지 확인한 후에 씨앗을 심어야 초록색 잎과 풍성한 열매를 를 기대 할 수 있는 것이다. 자연의 이치가 이러 할진데 사람들은 밭을 일구는 데는 관심이 적고 씨앗을 뿌리고 열매를 구하는 데만 관심이 있지 았았나? 나의 모습을 돌아보게 된다. 그래서 때로는 실패와 좌절 아픔으로 점철된 목회 여정 이제 생각하니 씨앗에서 싹이 트지 않은 것은 종자의 상태 때문이 아니라 그 내용을 키워갈 밭의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임을 이제야 조금은 깨닫게 된다. 밭을 먼저 일구고 씨를 뿌려야 하는 법 내 대지에서 자라는 이웃은 나의 열매이고 내 농토 에서 자라는 엉겅퀴와 잡초는 계속 일구어 가야 할 소중한 생명임을 늦게라도 깨닫게 되니 다행이다. 밭은 영원하지만 좋은 씨를 구하는 것이나 밭은 주인이지만 씨앗은 손님임을 모르거나 치 나치고 숲만 소중히 여겨 왔던가? 한국 교회도 숲만 찾아 가지 말고 밭을 일구어야 하지 않겠나? 믿음의 선조들이 일구어 놓은 밭에 열매를 즐기지 말고 새로 옥토를 만들어 야하지 않겠나?씨앗을 뿌리려는 다툼과 경쟁은 넘치지만 그것을 심은 밭은 턱없이 부족한 현실을 직시해야 할 때이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단순하고 정직한 밭이 되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자기 터라 주장하는 소리는 커가고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현대 속에서 모든 주장을 받 아 들이는 침묵의 밭이 되려는 노력은 보기가 힘든 것 같다. 한 겨울 동안 편안한 휴식을 취하였으니 내 이웃의 아픔에 우리의 사랑 덕분에 희망을 잃지 않고 싹을 틔울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 주는 밭이 되어 지기를 소원해 본다.밭은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과 비를 마시고 비옥해 지게 된다. 나의 마음 밭에 숲을 이루어 많은 사람들이 산책하며 향기를 피어나는 새해를 꿈꾸어 본다. 또한 좋은 터를 일구어 좋은 열매를 제공하는 한국 교회가 되기를 소원한다.
    • 칼럼
    • 출애굽의 은총
    2015-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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