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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의 중간선거와 한반도의 오늘
    남북 3차 정상회담과 북미 회담 이후 DNZ 지뢰제거와 유해 발굴, 여러 차례의 군사 실무회담을 통한 서해 평화지역 설정, 경의선과 서해 철도 복원 등 외면상의 평화 통일의 교류가 활발하게 진행되는 고무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 프로세스와 통일의 길을 열어 가는데 방해세력들은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우선 북한의 완전하고 불가역적인 비핵화를 전제로 한 미국의 북에 대한 조건적 재재 압박은 조금도 수위를 조절할 느낌이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 북한 역시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다. 북미의 정비례가 아니라 반비례적인 정치적 게임의 프레임이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한 요소로 보여진다. 여기에 무재인 정부의 남북 평화 프로세스를 시기 질투하는 그동안의 친일파와 독재와 학살 세력의 기득권층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최고의 적폐청산들을 막으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다. 그들은 태극기 부대이든 혹은 반 민족, 반역사적 이든 상관이 없다. 오로지 정치적이고 자본적 기득권을 수호하려는 개인적 혹은 집단적 반항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가 발전되거나 진전, 또는 후퇴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불의한 이기적 개인과 진단들의 기득권 지키는 것을 고집하기 때문인 것이다. 어느 조직이나 공동체든 이러한 자기 생색내기, 자기 얼굴내기, 자기 고시와 업적을 남기려는 졸렬한 세력들에 의해서 진리가 무너지고 울타리에 갇히는 시간들이 길어지는 것이다. 종교 세력들, 교회세력들도 여기에 합류하고 공존하고 기생하려 하면서 예외는 아닌 것이다. 평화와 정의, 진실과 진리가 어둠과 흑암 세력으로 묻혀가는 역사적 현실을 보며 우리는 가끔 삶에 대한 회의와 무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도널드 트럼프의 중간평가적인 중간선거가 이제 결과 발표만을 남겨두고 있다. 전해 오는 소식은 상원은 공회당이 자리를 지키는 승리가 확정되는 듯 하고 민주당의 하원 장악이 확정된 것 같다. 여기에서 한반도의 초미의 관심은 이러한 미국의 선거 결과가 미치는 남북의 문제이다. 미국을 중심으로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의 길을 시기 질투 방해하려는 일본의 행보들을 보면서 우리가 기도 하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광야를 거쳐야 하는지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남북 당사자, 우리들끼리의 평화와 통일의 길을 결정지을 수 없다는 것이 억울하고 슬픈 현실이지만 여전히 비껴갈 수 없는 문제라는 데 인식을 달리할 사람은 없는 것이다. 어째든 상원의 자리를 지킨 트럼프 정부는 지금까지 진행 된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 프로세스의 길을 전혀 없었던 사실처럼 되돌려 놓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북한 역시 이러한 세로운 역사적 개혁 개방의 물결을 후퇴할 수 없을 것이다. 남북의 역사적 후퇴가 진행된다면 이것은 남북의 문제를 넘어서 동북아와 세계 역사의 후퇴를 의미하고 모처럼 불어오는 세기의 평화의 바람이 중단 되는 예측할 수 없는 불행한 역사적 비극을 맞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원을 민주당에 내어 주었어도 상원을 지킨 트럼프는 다음 재선의 업적과 세계적 이목을 위해서라도 한반도의 역사적 발전을 후퇴시키지는 않으리라는 전망을 갖는다. 역사적 방향과 결과들을 정확하게 진단하거나 예측할 수 있는 사람들은 흔하지 않다. 설령 그것을 확신한다 하더라도 그 다음의 결과는 전혀 예상 밖의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일이 인간사이고 삶이라는 것은 부인할 길도 없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는 더 이상의 후퇴하는 역사가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된다는 믿음을 갖고자 하는 것이다. 만일 미국의 세계 패권의 역학관계를 통해서 우리가 원하지 않는 한반도의 현실이 발생 된다면 그것은 피차에 돌이킬 수 없는 관계의 깨어짐은 물론 상실로 이어질 수 있음을 밝혀둔다. 전시작 권 환수 시에도 한미연합사가 한반도에 주둔하기로 하였다. 그것은 아직도 냉전과 한반도의 분단극복이 매우 험한 도상에 놓여 있음을 증명하는 가장 큰 예이다. 우리들의 운명을 우리가 결정할 수 없는 냉엄한 국제 현실과 나약한 남북 당국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슬기롭고 지혜로운 실천과 행동의 기도를 신중하게 해야 되지만 한 편으로는 이러한 역사적 흑암의 고리를 단호히 끊어야 할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말도 하게 된다. 정치적 정파의 계산과 기득권자들의 자기 지키기를 넘어설 수 있는 힘은 자가 된 민중의 힘 밖에는 없다. 미국의 중간 선거를 너무나 의식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우리가 가야할 길을 멈추거나 머뭇거리지 말고 힘차게 가야만 한다. 그것이 우리들의 희망적 미래를 창조하는 하늘과 역사가 지시하는 오늘의 카이로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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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1-08
  • 용기와 결단의 통일
    가정이 하나 되는 것도 쉽지가 않은 것이 인간사이다. 그래서 ‘가화만사성’이고, 천하의 일을 하기 전에 수신제가를 말하고 있다. 성서는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 하시리라.(마 6:33) 하고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마 7: 7)라고 말한다. 그러면 얻을 것이요, 만나게 되며 열리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핵전쟁이 임박한 것처럼 긴장과 불안으로 점철 되던 한반도의 상황이 전쟁이 아닌 평화와 통일의 물결을 이룬다. 민족세계전쟁(6.25) 있기 전부터 북진통일을 장담하던 이승만은 전쟁이 터지자 3일 만에 모든 국토를 내 주는 거짓되고 허세적인 것이 만 천하에 드러나게 되었었다. 북의 김일성도 당시의 국방력과 경제력이 월등한 과정에서 남한을 무력으로 통일하려는 자신감을 넘어 선 오만함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태평양의 방위 권에서 한반도를 제외 한 미국의 앤더슨 정책의 깊은 비밀이 전쟁을 유도하였다는 설이 회자되기도 한다. 어째든 고려를 지탱해 오던 불교가 세속화 되어 타락하고 조선의 억불숭유정책으로 탄생한 조선이 성리학 등으로 이어진 실천 없는 정쟁과 논쟁 속에서 백성들과 민중들의 삶은 탐관오리들의 부패와 비리로 황폐화 되어 끝없이 추락되어 나라의 말기증상들이 엄연하였었다. 홍경래 장군들을 중심으로 한 새 역사의 크고 작은 혁명들이 전국에서 있었고 마침내 1894년 외세에 짓눌려 있던 세력들에 대항하여 분연히 일어 선 동학농민 혁명의 불길이 치 솟았다. 외세들을 오랑케라고 지칭하던 소위 ‘쇄국정책’의 반 개항 정책도 있었고 이러한 것과는 반대로 외세를 등에 업고 ‘삼일천하’의 실패한 혁명도 있어 왔다. 지탱해 오던 불교가 썩고 부패하여 사회의 기반이 무너지고, 소위 ‘역성혁명’을 일으켰던 정도전의 유교의 씨앗도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는 망국의 길이 다가 왔을 때, 한반도는 일찍이 복음의 빛이 비쳐 왔다. 소위 천주교와 개신교 합하여서 기독교이다. 천주교의 역사는 긍정적이기 보다는 부정적 요소가 지배적이다. 콘스탄틴 대제 이후의 위력적인 교회의 세계지배는 중세 때의 절정기 (5세기부터 15세기까지의 천년)뿐 아니라 그 이후에도 세계 식민지의 앞잡이로써의 카톨릭은 식민지 확장 정책을 정당화, 합리화 하는 종교적 이데올로기의 도구 역할을 십분 악용하여 왔다. 세계사를 되돌아 보건데(현재에도 그러하지만) 종교가 없는 인간생활은 설명할 수가 없다. 그것은 인간 자체가 종교적 존재이기도 하고 무엇 인가를 의존하지 않고는 스스로 서기가 어려운 나약한 존재이기도 하며 불안한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 종교는 거대 자본과 권력과 유착되어 공생과 기생을 하며 자기 생존과 공생을 살아간다. 그것은 필요악으로써 존재해야 할 운명적이고 숙명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예수는 내가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다.(요한 14:6) 신학자 떼이야르 샤르뎅은 “모든 역사의 시작과 끝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라고 말한다. 성서 자체가 알파와 오메가를 말하고 있다. 성서는 분명하게 우리는 창조주의 피조물이요. 그의 형상(Imago Dei)을 닮아 존재케 된 흙의 존재이다. 라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건널 수 없는 계곡”(K. Barth)을 건너서 믿음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정의와 사랑으로 살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는 숱한 역사의 실타래를 풀어가며 협상도 하고 카이로스적 결단을 하면서 이루어 가야 한다. 어찌 되었든 프라치스코 교황이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이 초청하면 방문을 할 것이라는 결정적인 말을 하였다는 소식이다. 종교를 배제 하듯이 살아 온 북한 사회에서 보면 새로운 혁명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혼자살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다. 한 국가도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는 국제사회에서 지탱하기 어렵다. 국가적 자존심과 자존감의 지성소는 지켜야 되지만 고도의 인내와 전략과 협상, 그리고 용기 있는 결단이 있어야 한다. 한 가정도 한 국가도 외부의 침략에 의해서 망하는 횟수보다는 내부의 분열 때문에 망하는 것이 거의 태반이다. 친일파 세력을 기반으로 하고 독재와 학살세력으로 점철된 반민족적이고 반국가적, 반역사적 세력이라 할지라도 모처럼 찾아 온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의 기회를 박탈하려는 몰상식적인 말과 행위들은 중단되어야 한다. 여야와 서로 다른 종교적 종파와 이념과 이익을 달리하는 어떤 조직이나 공동체 혹은 개인이라도 민족의 숙원인 이 길을 방해하거나 막아서는 안 된다. 선 평화 후 통일의 순서가 된다고 할지라도 마침내는 통일의 길을 중단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또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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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0-26
  • 분단의 고리를 끊어야
    우리가 사는 세상과 역사는 크고 작은 어려운 문제들이 산적해 있고 계속되어진다. 인류가 지구상에 출연한 그때부터 인간은 생존의 문제와 자연의 재앙과 재해, 질병 등 끊임없는 문제들의 연속의 삶이 오늘에 이어진다. 자연과의 싸움 속에서 생존하며 그 자연의 변화와 함께 인간들의 삶의 양태가 변화되며 소위 지식과 지혜가 쌓여가고 소위 문명과 문화의 축적들을 통하여 인간의 삶은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연뿐 아니라 인간들의 호기심과 경쟁, 소유와 탐욕들의 욕망 속에서 서로가 싸움과 전쟁을 통하여 서로를 지배하기를 원하고, 이것들은 인간이 인간을 억압하고 착취하며 싸우는 강렬한 현상들의 역사가 지속된다. 소위 4차 산업을 살고 있는 인공지능의 시대를 살게 되면서 이러한 과학과 초 기술의 시대에 이제는 전 삶의 분야에서 살 어름 판의 위기에 서 있다. 기후와 생태계, 핵무기와 가공할 살상무기와 핵무기와 원전 등 인간들의 문명과 문화적인 과학과 기술의 결과는 편리하고 풍요로운 삶의 만족이 아니라 독재와 독점 독단 속에서 양극화는 건널 수 없는 계곡처럼 심화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이러한 깊은 문제들이 산재해 있는 속에서도 한반도의 분단의 벽은 허물어져갈 평화를 갈구하는 시점에 이르고 있다. 적어도 남북의 교류가 시작되고 심화 확대 되는 것을 미국이나 유엔이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미국이 남북의 역사적 소원을 막고 평화적인 시대에 역행하는 방해 세력이 되고자 한다면 세계의 경찰국가로써의 패권국의 자리뿐 아니라 심각한 역사적 심판을 맞게 될 것이다. 소수의 국가와 소수가 자본과 권력을 독점하는 지금의 역사는 더 이상 땅과 하늘에서 환영 받을 수 없을 것이다. 4.27 판문점선언과 8.27 평양선언은 6.15와 10.4 선언의 연속성을 가지며 그것들을 구체적으로 세분화 하는 사안들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한반도의 분단의 벽을 허물고 하나 되는 사건이다. 침략자, 강대국들의 전쟁과 그 전후 처리 문제로 허리가 동간 난 길고 긴 역사 속에서 숱한 생명들은 서로 다른 이념들로 인하여 꽃 피우지도 못하고 죽어갔다. 그 억울하고 깊은 한의 부르짖음이 하늘과 땅을 울리고 이제 그 응답의 시간이 다가 오고 있는 것이다. 병이 든 것을 수술하고 새 살이 채워지기 위해서는 그러한 과정들과 회복되는 시간들이 필요하다. 물론 그 시간들을 줄일 수도 있다. 그것은 상처를 낫게 하는 자신들의 노력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너무나 서두른다면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더 큰 병을 얻을 수도 있다. 차분하면서도 신중한 절제와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병인 든 원인과 병을 앓아오던 시간이 짧지 않기에 병의 근원을 없애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서로가 자주 만나고 밥상공동체를 자주 만들고 속을 터놓는 허심탄회한 대화들이 많아져야 한다. 끊어진 철도를 잇고 도로를 만들며 먹을거리를 너로 나누고 진정과 진실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신뢰를 쌓아가야 한다. 무성한 말과 문서들이 쌓여왔다. 이제는 이것들을 실행하고 실천해야 한다. 육해공의 군사적 적대감을 철회하고 비무장 지대의 충돌을 피하는 평화의 폭을 넓혀가고 자원과 자본 기술들의 서로 교류해야 한다. 문제는 항상 존재한다. 연구를 통해서 풀어가기도 하고 경험과 체험을 통해서 해결해 가기도 한다. 아직은 상거가 멀고 민족이 하나 되는 과제는 쌓여있지만 그러나 시작이 반이듯이 분명히 진행형이 된 것이다. 움직임이 늦은 것 같지만 분명히 앞으로 가고 있다. 엄청난 역사의 비밀과 숨겨진 것들을 풀어 가는 것은 두고두고 할 일이지만 분단의 고리는 끊어야 한다. 분단 속에서 이루어진 절망과 좌절은 역사에 맡기고 새로운 민족과 역사의 희망을 써 가야 한다. 우리는 해야 되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희망을 방해할 그 어떤 세력도 없다. 여기에서 후퇴하면 한반도의 운명은 다시는 일어날 수 없다. 우리가 처한 실존들의 아픔과 슬픔들이 존재하지만 분단의 벽을 허물고 우리의 후손들은 평화와 통일조국의 터에서 사는 꿈을 구체화해야 한다. 하늘이 준 기회이고 이것을 받아 우리의 함께하는 역사의 행동과 실천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한반도의 평화가 정착되어야 세계의 평화의 꽃도 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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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0-19
  • 백두산에 오르다
    2018년 9월 18일부터 20일까지 3차 남북정상 회담이 열렸다. 비무장지대 무장해제와 함께 육해공에서 상호 불침략과 서해와 동해의 완충지대, 남북 이산가족 상시 면회소 설치와 금강산과 개성공단의 조기 가동 등 사실상의 종전선언과 연변 핵무기 영구적 폐기 선언과 동계리 미사일 발사기지 폐기 등, 비핵화의 확약을 통해서 한반도에서의 평화정착을 향한 실질적 선언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남북 정상회담 후 유엔 총회 참석차 문재인 대통령은 다시 출국을 한다. 북미 제 2차 회담을 주선하기 위하여 3차정상 회담을 공적 발표되지 않은 것을 포함 설명하고 북에 상응하는 조치들을 촉구할 것이다. 3차 회담에서의 하이라이트는 많은 것들이 있지만, 당연히 백두산을 두 정상이 천지까지 오른 것이다. 하늘도 도와서 날씨마저 좋았다. 백두산의 정산들의 등반은 단순히 그 산을 오른 것으로만 이야기될 수 없다. 일제 40년의 치욕과 분단 73년의 세월이 허물어지는 새 역사의 혁명적 사건이다.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한반도의 핵전쟁이 연출되던 상황에서 남북의 정상이 민족의 영산인 백두에 올라서 한반도의 비핵화는 물론이고 영구적 평화선언을 외치며 우뚝 선 것이다. 민족의 대 명절에 가장 큰 선물을 준 것이다. 그런데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냉전을 몰고 온 강대국이며 미국을 설득해야만 하는 상황인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는 분명하다. 미국이든 일본이든 혹은 중국과 러시아든 그 어떤 존재이든 간에 한반도의 주인은 한반도에 5천년을 살아 온 우리민족임이 확실하다.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한반도의 민중들끼리 평화와 통일의 주인 되어서 모두가 함께 백두의 정상에 올라야 한다. 우리는 그 길을 달리기 시작하였고 오늘의 쾌거는 그 목표와 목적을 향한 큰 한 걸음을 내딛은 것이다. 이 오랜 질곡의 삶을 살아오는 동안 얼마나 많은 민중들이 억압과 아픔을 통하여 통한의 죽음 같은 삶을 견디어 왔는가? 이제 그 질곡의 삶을 끝내려는 하나의 분명한 깃발이 그곳에 들어 선 것이다.살인 같은 한 여름의 폭염이 한 순간에 시원 해 지는 순간이다. 미국은 북한의 핵무기뿐 아니라 대량학살 무기들 전부를 사찰하고 폐기하기를 전제로 경제 제재를 압박하고 있다. 자신들은 세계적 경찰국가를 전제로 모든 무기를 무한 대로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적대 국가인 북한에 대해서는 모든 무기를 폐기처분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경제와 국가 강대국은 언제나처럼 약소국을 협박하고 겁박을 하며 종속적 관계를 유지하기를 말한다. 인류의 역사는 가진 자들과 힘없는 자들을 있는 자들과 강자들의 지배 역사이다. 이것은 단순히 칼 막스나 공산주의자들의 계급투쟁의 이론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들의 탐욕적이고 자기 불안 극복을 위한 소유욕의 욕구의 현실이기도 하다. 타인의 하나니 있는 것마저 빼앗아 자기 소유를 만들고 상대를 조정하고 흔들기를 하며 타인의 존재감을 짓밟아 벌이는 악이 도사려 있다. 이것은 마귀와 사탄의 역사이기도 하다.성서의 타락설 이후에 유전적 인간, ‘어린 아이도 악의 씨앗’으로 태어나는 것과 분리할 수 없는 문제와도 같다. 소위 말하는 모든 보수적 기독교와 교회는 유전적 죄는 말하고 복잡해진 조직과 구조적 인간사회와 국가 간의 구조악은 이야기 하지 않으려 한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들의 구조적 모순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지배 군이다. 그들은 사회적 변화나 잘못 된 근본적 혁명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한 움직임들은 자신들의 삶의 근거를 흔드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제 곧 뉴욕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트럼프와 만나서 3차 남북정상 회담을 가지고 공적으로 밝히지 않는 비핵화 프로그램을 설명하고 설득한다. 북한이 하는 만큼 여기에 상응하는 미국 측에 대하여 요구를 한다는 것이 전제이다. 한반도의 문제를 우리들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미국의 눈치를 살파는 지루하고 긴 역사적 정황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신 식민지적 삶이다. 진정한 독립을 이루지 못한 종속적 삶을 살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이런 점에서 남북의 평화 통일의 길은 온전한 한민족의 독립을 향하여 가는 매우 중대한 시간을 지나고 있는 것이다. 어째든 현실을 바로 이해하고 신중하면서도 단호하고 동시에 슬기와 지혜를 최대한 짜내어 이 매듭을 풀어가야 한다. 한국교회의 기도는 이 분단의 고리를 끊고 한반도 역사의 복잡한 실타래를 풀고자 하는 것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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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0-05
  • 미국과 북한, 그리고 한반도의 미래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미 대통령의 70년 적대국으로 존재해 온 정상들이 지난 번 싱가폴에서 만나 새로운 한반도 역사를 시작하자고 약속한 바가 있다. 내용은 북한은 일체의 도발적 행위를 멈추고 미국은 북한의 영구적 체제 안전보장을 해주는 것이다. 이라크의 후세인과 리비아의 가다피의 비참한 최후를 목격한 김정은 위원장으로서는 한미의 전쟁을 방불케 하는 군사훈련이 위협이 되고 이러한 위협을 극복해 보려는 북한당국으로서는 핵개발이 하나의 생존권 보장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아무리 무모하더라도 소련과 동구권이 무너진 후로 북한이 세계 패권 국가인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보면 자멸을 자초한 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물론 미국이 초강대국이라고 해도 중국과 러시아가 있는 한 무모한 한반도 전쟁을 다시 감행할 수는 없다. 중러에 앞서서 대한민국이 허락하지 않는 한반도에서 전쟁이란 있을 수가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전쟁은 미국으로 보면 무기를 소비하고 경제적 이익을 창출하는 것일 수 있으나 우리로서는 회복할 수 없는 파멸의 길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분단 73년을 살고 피붙이들이 갈라지고 찢어져 살아 온 한 번의 전쟁으로도 상처는 영원하다. 지구 역사의 어느 전쟁이라도 그것은 인간들과 자연에게 씻을 수 없는 아픔과 한의 슬픔만 남긴다. 인간의 오해와 탐욕들과 편견들로 인하여 서로가 싸움을 하고 파멸의 잔치를 벌인다. 이성을 통한 과학과 최첨단 기술들, 그리고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그리고 로봇을 통한 4차 산업의 물결이 파도치는 오늘에도 인간들은 그 쌍움과 전쟁들을 멈추지 않는다. 우리가 수많은 문제들 중 풀지 못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이다.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가? 태어나면 티끌과 먼지로 돌아가는 인간의 존재규명에 대하여 철학과 심리학, 정치와 경제 사회학 등 모든 학문과 이성을 총 동원해도 존재의 규명에 미치지 못한다. 성서는 신의 속성을 여러 가지로 말하지만 한마디로 정의와 사랑이라고 말한다. 바른 것과 다함없는 사랑이 신의 토대라는 것이다. 사랑 때문에 예수를 보내시고 십자가에 처형당하시며, 죽음을 떨치고 부활하셔서 창조와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고 계신다. 강대국들의 놀음과 점령으로 갈라진 한반도의 세월은 너무나 길었다. 일제의 침략 하에 36년 혹은 40년 일제의 식민치하를 살고 연장하여 미소의 점령으로 인하여 73년의 신식민지를 살고 있다. 이제 그러한 외세 아래의 설움과 압박의 삶을 끝내고 진정한 우리들끼리의 평화를 누리고 살고 싶다. 미국이여 그대가 진정 한반도의 동맹인가? 아니 그대들이 진정 대한민국의혈맹이고 평화를 위해 존재하는가? 그렇다면 남북의 평화를 가로막지 말고 이제 우리들의 평화를 위해 놓을 것은 놓고 도와줄 것은 도와주라. 북한이 비핵화를 진행하는 만큼의 그대들도 제재를 하난 둘 씩 풀고 서로가 평화를 향한 행동을 실천하라 북한이 믿을만한 종전선언과 체제 보장을 실현하라 서로가 신뢰를 행동으로 실천하라. 문재인 대통령께 요청한다. 포용적 정책으로 경제를 회복시키고 정치적 안정을 해 가는 것이 시급하긴 해도 한반도의 운전자, 남북미의 수석협상, 다 좋은 말이지만, 이제 외세의 굴레를 벗어나는 결단들을 실천하는 역사적 용기를 보여 주기 바란다. 물론 여러 가지 과정과 둘러싸고 있는 현실이 있지만, 지혜로운 행보가 필요할 것이지만, 그래도 이제는 민족의 자주와 주체적인 창조의 새 역사의 결연한 결단을 내려달라. 우리는 한 번, 일생을 살다가 역사의 저 편으로 돌아간다. 역사만 남고 돌아간다다. 미국이 우리를 도와주었다. 그렇다 칩시다. 그럼 이제 한반도의 미래와 운명의 역사를 남북이 결정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바란다. 당신들이 진실로 평화를 사랑하는 하나님을 믿는다면 이제는 우리민족끼리 한반도가 스스로 우리의 새 역사를 만들어 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 일본을 부추기고 동북아를 협박하거나 긴장하지 않도록 도와달라. 100년의 한을 풀 수 있도록 힘 있는 자로써 약자를 움츠리게 하지 말고, 분노하게도 말고. 우리의 미래를 우리가 결정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 내가 미국을 사랑할 수 있도록 이청을 거절하지 말고, 함께 평화를 만들어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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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9-20
  • 통일은 인간화다
    폭염과 폭우가 쏟아지고 인명 피해가 난다. 자연적 재앙과 재해는 분명 인간에 의한 인재이다. 인간의 변명은 참 쉽다. 종교적 언어가 주어지고 그것들로 용서와 사랑이라는 측량할 수 없는 합리화와 정당화가 가능하다. 본래의 자연과 역사의 후천적 자연의 재난과 재앙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우리들의 삶을 우겨 싼다. 그것은 누구의 탓이 아니다. 우리들 모두의 욕망의 결과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지구와 우주를 탐구하고 탐색한다. 그리고 파헤치고 분석하고 개발하고 계발한다. 인간들의 이러한 욕구들은 브레이크가 없다. 우리는 멈출지를 모른다. 멈출 수도 없다. 우리가 만들어 온 문명을 원망하거나 불평할 수도 없다. 그런 것들이 다 부질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만족과 행복을 기다린다. 그 행복과 만족이란 풍요와 넘치는 소유를 원한다. 그것이 물질이든 권력이든 혹은 종교적 이든 영적이든 많은 것이 소유가 되어야 불안을 떨칠 수가 있다. 더 많은 것들을 소유하려고 몸부림치며 거짓을 일삼고 서로가 물고 뜯는다. 인간들의 역사는 이러한 소유와 잔인한 정복을 위하여 서로가 죽이고 죽이는 싸움과 전쟁을 멈추지 않고 있다. 전쟁을 통하여 부를 축적해 가는 강대국들의 무기 산업은 인간과 자연의 존재들을 파멸시키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성서는 모든 것들을 창조한 하나님이 마지막으로 사람을 창조하되 하나님의 형상을 닮도록 창조하였다고 한다. 창세기 1장은 남녀를 창조했다 하고 창세기 2장은 남자를 만든 후에 깊은 잠에 들게 하고 그 갈비뼈 하나를 빼내어 돕는 배필인 여자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것은 남자의 살 중의 살이고 뼈 중의 뼈이다. 다시 말하면 남녀는 똑같은 하나로부터 창조된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가 소위 가부장적 남성 중심의 폭력적 역사로 점철된 것으로써 그동안 성적인 차별로 인하여 억압과 착취를 당해 온 여성들은 창세기 1장의 평등적 창조를 주장하며 남성의 권력과 폭력으로부터 진정한 해방을 부르짖고 있다. 이러한 양성평등은 단순히 젠더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화의 문제이다. 역사 이래로 여성들의 남성들에 의한 억압과 착취의 역사는 이제는 중지 되어져야할 일이다. 우리들의 미래를 무엇이라 확언할 수 없다. 파괴된 자연과 땅과 바다가 정상적인 회복으로 복구될지 아무도 모른다. 성적차별과 함께 존재해 온 악은 하나가 인종의 차별과 폭력이다. 이제는 권력과 하나가 된 자본의 폭력이 수많은 대다수의 민중들을 억압하고 착취한다. 아무리 선한 삶을 열심히 살려고 해도 구조 악이 도사리고 있어서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은 어떤 곳에서든지 주류사회를 꿈 꿀 수가 없다. 우리는 너무도 긴 세월 막혀버린 분단의 벽이 허물어지고 헤어진 가족과 동족들이 서로가 얼싸 안고 하나가 되는 진정한 통일을 소원하고 있다. 자본 양극화의 골이 매여지고 성과 인종, 문화와 종교적 차별이 없는 상호 존중의 인간화가 이루어지길 기도하는 것이다. 억울하고 슬픈 상처의 눈물이 닦아지는 하나가 도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이간들은 권력과 돈에 미쳐서 진정한 하나 됨의 관계를 이루지 못한다. 입을 열면 거짓이고 중상이며 살인적 비난을 멈추지 못한다. 좌우의 이념적 틀을 깨지도 못하고 작은 배려와 관용도 없다. 모든 것이 자기 자신의 울타리에 갇히기를 바라고 짜 놓은 틀 속에서 벗어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려 한다. 사도 바울의 율법과 복음의 자유를 아직도 분간하지 못한다. 통일은 인간화를 이루는 것이다. 인간이 짐승처럼 배만 불리고 온 갓 쾌락을 위하여 거짓 된 폭력을 일삼는 다면 그런 것은 아예 시작을 하지 않는 것이 낫다. 사실은 짐승처럼이라는 말이 옳지 않다. 짐승들은 자신들이 창조 된 창조의 섭리를 따라 산다. 오직 인간만이 창조의 질서를 깨고 짐승만도 못한 삶을 구가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화는 인간화이다. 통일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모든 제도와 평등과 자유의 질서가 이루어질 통일인 것이다. 양극화의 골이 더 깊어지고 성과 인종차별이 심화되며 악이 있는 채로의 그림은 그리지 말아야 한다. 유토피아가 아니라 현실적인 삶의 생명 토대 위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이제는 낡은 이념의 사움과 논쟁은 벗어야 한다. 냉전의 산물인 분단을 다시 정치 경제적 이념으로 몰고 가는 치졸함을 과감히 버려야 한다는 말이다. 인간의 가장 좋은 역사는 갈등과 분쟁, 전쟁이 없는 모두가 평등과 자유로 살아가는 것을 평화의 역사이다. 그것은 단순한 전쟁이 없는 평화가 아니라 성과 인종, 분화와 종교, 온갖 부조리한 사회적 모순이 없는 함께 더불어 사는 진실 된 사회이다. 생명을 생명답게 인간을 인간답게 상화 존중하고 귀하게 여기는 통일의 길, 바로 인간화가 성취되는 길이다. 9월에 열리는 주류교단들의 총회가 교권과 독단적 주장의 싸움터가 아니라 십자가에 피 흘리며 자본과 권력 이간들의 이기적 편견으로 처형된 그 죽음의 의미가 우리의 가슴 심연을 움직이게 할 것이다.
    • 칼럼
    • 통일칼럼
    2018-09-13
  • 통일 상상도
    사람들은 무엇이든 조급증이 있다. 촛불정국을 통해서 세워진 문재인 정부의 인사관리나 혹은 재벌개혁과 사법개혁과 검찰개혁, 그리고 방산비리척결과 군부개혁, 개헌과 지방 자치행정의 정착과 사회적 양극화의 해결과 가진 자들의 갑 질 문화의 척결 그동안 우리 사화 곳곳의 썩은 문제들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이런 실타래들을 대통령 이하 각 부처 장차관을 중심으로 하여 속도감 있게 풀어가야 한다. 그런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친일파들이 여전히 활개를 치고 독재 권력과 야합한 정경유착 세력들이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소위 전직 두 대통령들이 감옥에 가고 상당 부분 개혁의 가닥들이 잡혀 가고 있는 것 같은데 국민들과 민중들의 눈에는 아직도 상거가 멀다. 신년벽두부터 전쟁소리가 그치고 평화와 통일의 노래가 남과 북 그리고 세계를 뒤흔든다. 그러나 분단 73년과 한국 세계전쟁(6.25)의 민족상잔을 거친 상처들이 하루아침에 치유될 수 있다는 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저출산 고령화 양극화의 골들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사람들의 삶 구석구석에 널려 있다. 재벌과 중소기업의 격차와 골목시장과 자영업들의 울상들, 그리고 최저 임금 1만원 시대를 열어도 여전히 가난함 민중들은 허덕임을 벗어나지 못 하는데도 그것마저 실현이 불가능 하다.여전히 불의하고 탐욕스러운 세력들은 촛불을 비웃으며 조롱한다. 국민을 위한다는 국회의원이라는 자들의 탐욕도 그칠 줄 모르고 지방정부와 공무원들도 촛불을 짓밟고 있다. 촛불은 민중들이 들어야 하고 그 열매는 자본과 권력의 자리에 있는 자들만이 거두어 간다. 그런데 우리가 좀 더 기다려 주는 것이 낫다. 아니면 횃불을 들어 모든 추악한 것들을 불태워 버리든지 말이다. 그렇지만 남북이 열리고 서로가 오가고 그래도 전쟁소리는 그치고 평화와 통일의 춤을 추고 있지 않는가? 분단이 오래 지속되는 동안 남북의 민중들은 많은 피로감이 축적 된 역사를 살고 있다. 어쩌면 통일을 포기하고 전쟁이 없는 평화만이라도 지속되는 것으로 위로를 받고자 한다. 그래서 1민족 2국가 2체제가 되어 서로가 싸우지 않고 각자의 평화를 유지시키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전쟁과 싸움에 지치고 그래서 평화공존이 되면 그것으로 자족하려 하는 것이다. 수많은 세월 속에 그리움도 이제는 체념의 상태가 되어 진 것이다. 이것은 어느 한쪽만의 잘못이 아니라 남북을 분열, 분리시키는 식민세력들과 그것에 아부 아첨하는 자본과 권력에 미친 자들의 농간이다. 이러한 상태에 오기까지 종교 세력과 교회세력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하찮은 부귀를 위하여 지성소를 버리는 일을 서슴지 않고 살아오는 부끄러움을 어찌 피해 가겠는가? 평화와 통일을 이간질 시키는 세력들이 넘치고도 넘친다. 그 속에 기득권을 누려온 교회세력이 예외일 수 있겠는가? 세속의 자본과 권력을 쥐고 온 자들은 그렇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워 아귀다툼 하는 썩은 종교와 교회 세력들의 구체적인 회개 없이는 평화와 통일의 문이 열린들 그다지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자본과 권력에 아부한 자들이 또 다시 새로운 권력과 자본에 기생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고 불의와 거짓 된 삶으로 민중들과 역사를 속일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들이 예측되고 걸림돌이 되지만 그래도 우리는 평화와 통일의 발걸음을 중단할 수 없다. 이러한 거짓 된 교회세력들은 성서와 그 성서의 말씀들을 갈망하는 민중들의 그들의 삶의 자원으로 삼고 있다. 예수는 소유하고자 아니 하였다. 예수는 민중들의 약함을 치유하고 고쳐주었다. 막혔던 담이 허물어지고 평화로운 왕래를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곧 우리가 구가하는 행복이 아니던가? 북의 공산주의적 사회주의 체제나 남쪽의 민주주의 체제나 이제는 인민이나 민중들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운영체제가 되어야 한다. 이제는 과거 냉전체제를 고집하고 소수 특권층들의 권력유지를 위해 온 울타리를 과감히 거두어내고 갇혀 있는 우물 안의 틀을 벗어나야 한다. 민중들의 자유가 최대한 보장되고, 기층민들에 의한 진정한 삶의 행복이 만들어져야 한다. 남의 소수 독점재벌과 독재 권력의 흔적들을 지우고 북의 공산당이나 노동당의 특권계급들에 의한 사회적 기반들을 새로이 세워서 그동안 정치적 권력유지와 체제 선전의 도구로 사용한 인민과 민중들의 빼앗겼던 삶을 회복시켜야 한다. 서로가 서로를 믿고 나누고 도와주고 그리고 이 민족을 넘어서서 세계 인민들과 민중들을 살리는 평화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해야 한다. 한반도를 향한 세계 평화의 뼈대가 세워지고 그 생명이 세계를 향하여 가도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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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8-30
  • 한국교회와 평화
    오늘의 우리가 이렇게 살게 된 것은 지나 온 수많은 시간들과 세월들 속에서 인류의 조상들이 살아 온 결과로서의 오늘이다. 적어도 역사적 삶의 실체가 발견 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 부르는 것처럼 우리 민족의 조상들의 삶의 연속성과 지속적인 것들로부터의 오늘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는 단순히 과거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로서 존재하는 역사이고 우리에게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미래의 역사인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어떠한 형태의 역사의 창작물들은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가 뜻한 바 그 목적을 향하여 질주하고 있다다. 삼위일체의 신학적 교리의 하나님은 단순한 교리의 틀 속에 머물러 있는 갇혀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들과 창조물들을 아직 빚어내고 계시는 우리와 삶을 동해하고 있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초대교회 이후 중세를 거치면서 신과 교회 이름으로 혹은 성직제도가 확립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리고 우리가 아는 바, 콘스탄틴 대제의 로마가 기독교와 교회를 공인한 이후로부터 교회는 세속의 권력과 함께 해 왔다. ‘성과 속’이 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듯이 교회와 세상이 분리되어서 존재하지 할 수 없다. 그것은 한 역사와 삶의 현장에서 공존하고 때로는 대립하고 서로 각자의 길을 추구하면서도 여전히 함께 있을 수밖에 없는 두 얼굴이다. 거룩과 세속의 장부를 서로가 지니면서도 서로가 필요한 존재로써의 세상 속에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하늘의 시민권을 가지면서도 여전히 세상 속에 발을 딛고 그 세상과 함께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초월을 말하고 그 초월을 추구하고 동경하면서도 여전히 이 낮은 세상 속에 자신의 모든 것을 묻고 살아가야 하는 세상적 존재인 것이다. 인간들이 고통과 고난의 세월을 지날 때에 각종 이단들과 사이비들은 그 고통과 고난의 나약함을 파고들어 민중들의 고혈을 짜고 거짓된 신의 이름으로 착취를 멈추지 않는다.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이러한 사이비와 이단들은 삶의 고난의 현장들을 공략하여 침략하는 근성을 버리지 못한다. 소위 권력과 자본가들은 힘없고 가진 것 없는 민중들을 자신들에게 아부하며 기생하는 허위의식의 지식인들과 종교인들과 공존을 모색하며 민중들을 속이고 억압, 착취하는 일에 끌어 들여서 악한 연대를 쉬지 않는다. 교회와 종교가 이러한 민중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며 그들의 생존과 존엄성을 짓밟는 자본과 권력에게 아부 아첨하는 동안 하나님의 나라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예수는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라 하였다. 우리가 그 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고 잘리어 버려지면 불에 태워지는 땔 감이 상 아무 것도 될 수 있다.예수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기 때문이다. 남북의 평화와 통일의 길이 열리면 자본과 그와 아부 공생해 오던 교회들, 종교들이 북을 향하여 자기 자리 확대를 꿈꾸고 설계할 것이다. 어디 좋은 자리에 자신들이 축적한 자본들을 통하여 교회당을 짓고 기도원을 짓고, 등등 각 교파와 교단들 개 교회 중심의 선교의 명분을 앞세워 아귀다툼을 할 것이다. 도대체 이 민족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 교회가 할 일이 무엇인가? 지금까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 왔는가? 다시 각 종파 별로 각 교파 별로 서로 세력 다툼을 북쪽에다 심고자 혈안들이 될 것이 불 보듯이 뻔하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 통일이 되지 않았으면 하고 생각한다. 그저 교류와 왕래를 하면서 하나의 민족, 두 체제로써 한반도에서 공존하는 상부상조의 삶으로 족하면 어떨까? 우리가 꿈꾸는 하나님의 나라는 결국 기독교 왕국을 바라는 추악한 모습은 아니다. 서로를 배제하고 배타적인, 자본과 권력과 체제에 아부아첨 하는 그러한 기독교와 종교적 통일을 바라지는 않는다. 역사적 예수 베들레헴 떡집에서 태어나서 갈릴리 민중들을 치유하고 사랑했던 예수, 버려지고 병들고 떠돌이. 고아와 과부, 나그네들을 사랑하셨던 예수, 그 예수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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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8-23
  • 문재인 정부의 통일과정
    김대중 정권은 햇볕정책을 통해서 북한정권을 진정한 세력으로 동등한 대상으로 함께 하며 정상회담의 길을 열어갔다. 분단 이후의 최초의 남북정상 회담을 열어간 역사적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정부는 다시 정권을 보수 세력에 물려줌으로써 정권 재창출에 실패하였다. BBK 사건 등 각종 의문을 둘러싸고 들어선 이명박 정부는 한국교회의 절대적인 장로 대통령의 지지를 받으며 들어섰지만 거짓된 자원외교와 절대 반대하는 국민들과 민중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홍수를 막고 수자원을 확보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사실은 전국의 강들을 근본적으로 오염시키는 녹조 죽을 만들고 생태계를 파괴하는 결과의 억지사업을 국가사업으로 밀어붙였다. 이어 박근혜 정부는 국정농단으로 국격을 초토화 시켰으며, 최순실 등의 비선실세들을 통하여 국민들을 절망에 빠뜨렸다. 이러한 사건 등에 등을 돌린 민중들이 촛불을 들고 일어섰다. 그리고 마침내 박 정권은 무너져 내리고 문재인 촛불정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박 정권이 무너진 결정적 사건은 세월호와 국정농단이다. 국민의 생명을 가벼이 여긴 것과 국가의 운명을 비선 실세의 소수에게 맡겨버린 것이다. 이러한 이명박과 박근혜 정권은 북한 문제를 흡수통일에 기반을 두고 북한정권을 적으로 대하며 원수의 대상으로 여겨 분노를 키우는 것으로 대처해 갔다. 어렵사리 만든 최후의 만남의 교류장소인 개성공단을 전격적으로 차단시키고 남북교류를 원천적으로 막아버린 것이다. 따라서 촛불정부로 들어 선 문재인 정부는 이러한 앞의 정권들에 대한 불의와 부패 비리를 청산하는 적폐청산과 가로 막힌 남북의 교류와 평화 통일의 길을 열어 가는 것이다. 2년 차에 들어 선 문재인 정부는 이러한 역사적 과제를 어떻게 실행하고 있는가? 이명박과 박근혜 정권이 어지럽게 한 적폐들을 청산하고 남북의 벽을 허물며 평화와 통일의 문을 열어 가고 있는 것이다. 어떤 적폐 청산인가? 첫째는 정치적인 적폐이고, 둘째는 저출산 양극화 급진적 고령화 등 사회적 문제의 적폐들을 해결하는 것이며, 셋째는 경찰과 검찰의 적폐를 청산하는 것이다. 네 번째는 삼권분립의 균형을 이루며 권력견제의 사회정의를 이루어야할 사법농단의 적폐청산이다. 다섯 번째로 중요한 적폐청산은 삼성공화국의 적폐를 청산하며, 이와 함께 모든 재벌의 적폐를 청산하여 경제적 정의를 이루는 일이다. 정치의 독재와 경제의 소수재벌의 독점, 사상의 독단의 삼독의 청산이 문재인 정부가 이루어야 할 역사적 과제인 것이다. 이러한 청산과 함께 기왕에 열어 간 남북의 평화체제를 확고히 하며 통일의 길을 굳건하게 해야 한다. 민심은 천심이다. 민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민심을 땅과 하늘의 명령으로 알고 이런 과제를 정직하고 성실하게 실천해 가야 한다. 이것은 해도 좋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교회를 믿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역사의 주관자인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근본적으로 생명력을 상실한 상태이다. 신학도 역사적 과제와 문화적 변혁을 주도하지 못한다. 전통적인 자기 안주에 머물러 자기 직장을 고수하며 밥벌이를 하는 죽은 상태의 껍질로서 존재하는 교회가 아니던가? 이제는 교회나 종교적인 과거의 틀 속에 오늘의 문제를 맡길 수가 없는 것이다. 현대는 이러한 안이한 울타리를 거두어 내고 허물어 진정한 생명의 역사를 창조해 가야 한다. 어떤 종교이든 생명을 다한 종교는 무능하거나 무력해 지며 새로운 창조적 대안을 만들지 못한다. 문재인 정부를 비판만 하는 것은 부패한 세력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결과를 갖는다. 우리는 문 정부가 정신을 차리도록 권면하며 힘을 실어주어서 앞에서 말한 과거의 유물인 역사적 괴물들을 사라지게 해야 한다. 군 개혁의 중심인 기무사의 군 농단을 철저히 해서 기존의 기무사를 전격적으로 폐지하고 일제의 잔재인 보안대를 제거해야 한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야 할 군이 잊을만하면 군대를 동원해서 국민을 억압하고 학살하려는 쿠테타를 계획한 것이 확실한데 이것을 적당히 넘어가면 돌이킬 수 없는 화를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 가장 큰 적폐세력 중에 하나가 입법부인 국회이다. 국민들의 공복인 국회의원들이 자신의 개인 사리사욕을 탐욕 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은 참으로 참담하다.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꾼이 되어서 추악한 행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적도보다 더 뜨거운 폭염이 지속되지만 우리는 새 역사를 만드는 일을 중단할 수 없다. 정권을 잡은 정당마저 국민과 민중을 배신하는 일을 밥 먹듯이 한다. 이럴수록 문재인 대통령 당신에게 기대를 걸 수밖에 없다. 심기일전하여 촛불이 위임한 첫 사랑을 회복하여 남은 임기 중 촛불민심이 원하는 개혁과 변화를 확실히 이루며 우리민족의 꿈에도 소원인 평화통일을 길 열어 가기를 진정으로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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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8-09
  • 진보정당과 통일의 길
    소위 진보정당이 뿌리는 분단의 과정에서 좌익으로 분류되어 우익들에게 정죄 당한 과정을 겪어왔다. 특히 분단 상황에서 통일을 말할 때마다 ‘빨갱이’나 종북으로 혹은 간첩으로 몰려서 옥살이를 하거나 고문당하고 연좌제 법에나 국구보안법에 걸려서 개인은 물론이고 가정 전체가 수난을 당하고 해체 되는 아픔을 살아야 하였다. 진보란 정도나 수준이 지금보다는 나아지는 것이고 역사 발전의 합법칙성에 다라서 사회의 변화나 개혁 혹은 혁명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진보의 반대는 단순히 보수가 아니다. 진정한 보수는 변함없는 진리를 목숨을 걸고라도 지키는 가치의 존재를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진보란 보수의 가치를 반대하거나 도외시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지키고자 하는 보수를 바탕으로 그 진리를 온전하게 만들어 가고자 하는 역사발전의 법칙을 추구하고자 한다. 진보세력은 항상 거짓 된 보수 세력에 경제와 경계를 당하고 어업당하거나 짓밟혀 온다. 조선과 한국의 진보는 일제로부터 억압을 당하고 그 일제가 청산되기 전에 강대국들에 의하여 압살의 길에 들어선다. 특히 분단이 시작 되는 냉전의 출발로부터 진보의 길은 험하고 고통의 길임을 역사는 증명한다. 북조선민주주의공화국과 남쪽의 대한민국의 서로 다른 이념으로 세워진 가운데 진보의 길은 역사와 민족의 십자가의 길을 걷고 있다. 남북의 정상과 북미의 정상이 만났다고 해서 진보의 길이 평탄한 길로 들어섰다고 볼 수는 없다. 진보는 언제나 열악한 조건과 환경에서 개혁을 넘어서 혁명의 길을 간다. 진정한 진보는 부패한 자본과 불의한 권력에 타협을 원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본래 정치적 동물이다.” 하였다.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정치란 인간의 생활 하는 동안에 필요한 일반적 규칙을 만들고 보존하며 수정을 해 가는 활동이라 본다. 학문적으로 정치(politics)는 정치학으로 말해서 이러한 활동을 연구하는 학문이 있다. 이러한 정치는 불가피하게 갈등과 협력, 타협과 협상, 서로 다른 가치를 근거로 경쟁과 때로는 싸움과 전쟁을 하기도 한다. 한남 아렌트(Hanna Arend)는 정치권력을 공동행위요, 협동행위로 규정짓기도 한다. 정당은 이러한 자신의 가치와 이념을 근거로 한 권력을 붙잡아 그 가치를 역사와 인간의 삶의 현장에 실현시키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활동한다. 고대국가를 거쳐 근대민족주의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소위 복잡한 국가를 형성하고 있는 가운데 수많은 정치 이념과 정치문화가 실험되고 수정되었다. 보수건 진보건 간에 각자의 이해관계를 자신들의 이념과 목표에 따라서 가치의 실현을 하고자 한다. 여러 가지 형태의 정치는 간단히 말하면 인간들의 자기세력화를 위한 목적을 지닌다. 보수의 경우는 기존의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자본과 가진 자의 이익을 대변하며 그것에 아부와 아첨을 하면서 변화나 개혁, 혹은 혁명적 사고나 행동을 거부하고 경계하며 억압하려 든다. 일제 식민치하에서의 권력이란 식민체제의 변화를 바라지 않고 한민족을 노예처럼 부리고자 하였다. 심지어는 그들의 전쟁욕구를 채우기 위하여 성을 노예로 삼기도 하고 인간의 인격을 송두리째 빼앗고 짓밟았다. 이러한 식민지 극복을 하고자 하는 독립운동을 불량선인으로 취급하여 억압하고 고문하고 감옥살이를 하게하며 잔인하게 학살하는 것을 예사로 하였다. 거기에 인간다운 삶의 가치는 자리할 곳이 없다. 분단 이후의 북쪽의 정권은 공산당, 혹은 노동당의 특권층이 자신들의 정치권력을 유지 보전하기 위하여 특권계급을 제와한 대 다수의 민중들을 노예화 하고 그들의 자유를 제한하며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하게 하였다. 해방 공간에서의 미군정은 자신들이 짜놓은 정치 스케줄과 가치로 남한 정권을 만들고 73년을 자신들의 신식민지의 울타리에 가두어 두고 있다. 진보는 언제나 역사의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길을 걸어온다. 조봉암을 비롯하여 심지어는 우익 민족주의자들, 김구까지 특히 중도를 표방하는 건국위원회의 여운형과 김규식 등을 억압 암살하며 새로운 식민지 주인에게 철저한 복종과 아부와 아첨을 하며 진보적 정당들을 탄압하여 왔다. 진보는 정의와 역사발전에 근거하여 민중들의 삶의 질을 높이며 인간이 사는 최고의 가치와 궁극적 목표를 향하여 운동한다. 노희찬은 7-80년대 이후 살인적 독재에 저항하며 노동자들과 민중들의 삶의 질을 위한 투쟁과 싸움을 해 온 현대 진보정당의 얼굴이라 볼 수 있다. 그가 가져 온 개인적 삶의 가치를 넘어서 정의롭고 인간다운 삶을 지향하며 평화를 통한 분단모순과 계급적 기본모순을 극복하고자 고군분투한 대표적 진보정당의 얼굴이다. 그의 죽음은 자살이 아니다. 그것은 아직도 식민치하의 분단현실의 모순과 그 식민세력을 업고 자신들의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소위 썩은 보수 세력들과 진보를 이해하지 못하는 작되지 못한 대중들에 의한 정치적 사회적 타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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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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