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2-12(목)

칼럼
Home >  칼럼  >  통일칼럼

실시간뉴스

실시간 통일칼럼 기사

  • 열려라
    삶을 살다보면 앞으로 나갈 문이 닫히거나 좁은 문이 될 때가 허다하다. 심지어는 우리가 가고자 하는 문을 막는 적들이나 원수들이 너무도 많다. 사람이 사람을 방해 하는 것은 물론이고 때로는 역사적인 상황이나 세상의 환경이 문을 차단하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자연의 재앙이나 기후 재난들이 그러하기도 하다. 우리가 삶을 사는 여로나 과정에서 문이 닫혀서 주저앉고 머뭇거리며 좌절과 절망으로 삶에 대한 중단을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깊이 생각하면 이러한 문들이 닫히는 경우는 어떤 환경이나 타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이 선택한 것의 결과물인 경우가 가장 큰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지난 걸어 온 길이나 역사적인 과거를 생각하며 후회와 아쉬움으로 자책감을 가지기도 하고 극단적인 생각을 쏟아놓기도 한다. 필자가 살아왔던 지난 날, 50년대 중반 이후 이후의 대한민국의 역사는 격동의 세월이 많았다. 분단과 해방공간을 거치고 민족세계전쟁(6.25 민족상잔)을 경험하는 전재의 삶이 있었다. 물론 분단의 원인을 보면 일제의 식민치하가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전후 승전국인 미소에 의해서 남북이 갈라지고, 이 과정에서 민족구성원이 하나 되지 못한 것이 큰 아픔으로 남는다. 독립운동의 과정에서의 분열도 있었고 분단의 과정에서, 해방공간의 과정에서 강대국을 넘어설 수 없는 약한 자들로서의 분열과 좌절, 이념과 권력의지로 인한 분열, 친일 세력을 청산하지 못하고, 이런 상황에서 죄 없이 죽어간 수많은 민중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진다. 독재자와 학살자들은 탐욕과 악함으로 생명을 억압하고 압살하며 무참히 짓밟았다. 제주의 4.3에 희생으로 죽어 간 민중들, 여수 순천의 사람들, 박정희와 전두환, 노태우 등에 죽어 간 광주의 민중들, 2014년 4.16일 진주 앞 바다 차디 찬 바닷물에 묻혀 간 세월호의 학생들과 사람들, 전태일 열사 이후 김용균까지 수 없는 열악한 노동환경에 청춘도 살지 못하고 죽어 간 아들 딸들, 우리는 그들의 죽음들을 헛되지 말아야할 것이다. 주님은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 하였다.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사람은 짐승과는 다른 문화와 가치, 의미를 만들어 가는 존재이다. 이것은 본질이고 진리이며 보편적인 씨앗이다. 형태는 변한다 해도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개인과 사회, 역사 속에는 숱한 생명들이 태어나고, 싸움과 전쟁이 난무하며, 인간의 악마성과 불의와 모순들이 산처럼, 바다처럼 쌓이고 넘친다. 지금도 이러한 모순들 속에서 생명들은 안타깝게 지고 간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목적은 바로 이러한 생명들을 살리는 것이라고 성서는 기록하고 교회들은 이것을 강단에서 선포한다. 생명들이 위축되지 않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으려면 이 살리는 일들을 최선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의 오신 목적에 부합되게 살고 있는가? 정의와 사랑과, 화해와 용서, 평화와 자유가 춤추는 생명이 약동하고 희망을 품는 삶을 살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이제 닫힌 문들을 열어야 한다. 첫 째로, 남북의 문을 열어야 한다. 외세 탓만 하기는 이제 너무나 긴 세월이 지나갔다. 이제 열어야 한다. 집 없는 자는 문을 열 수 있는 기회도 없다. 집 없는 사람들이 보금자리를 가질 수 있도록 집을 가난한 민중들의 둥지가 있도록 해야 한다. 비정규직 이 수백만이 넘는다. 이들의 정규직 문이 열리기를 기도한다. 양극화를 통해서 사회적 관계의 문이 닫혀 있는데 이 문이 활짝 열려서 서로가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란다. 저출산으로 어린 아이들의 웃음을 보기 힘든 닫힌 문이 열려서 모두에게 웃음을 선물하는 새 해가 되었으면 한다. 청년들의 좋은 일자리의 문이 열려서 그들이 행복했으면 한다. 세대 간 닫힌 관계의 문이 열리기를 바란다. 지금까지 역사의 불의한 권력과 자본으로 부귀영화를 누리던 기득권 세력들의 악마적 닫힌 문들이 열려서 순한 양들이 되지는 못해도 자신들의 진정한 이기적 삶들의 닫힌 문들이 열리는 역사의 청산과 대전환이 이루어졌으면 한다. 필자가 살던 문화는 분단과 가까운 문화이다. 대중가요들은 분단을 노래하고, 독재와 학살의 시절에는 투쟁과 혁명의 노래들이 주를 이루었다. 지금의 대중가요( K-PoP) 들은 우리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문화는 생각과 행동과 실천을 좌우한다. 유교적인 문화는 지금의 젊은이들에게는 소통하기 어렵다. 문화는 소통의 언어를 창출한다. AI 4차 산업의 시대의 문화는 우리를 낯설게 한다. 기후온난화의 결과는 인간이 만든 탐욕의 결과이다. 환경의 재앙과 재난이 더 심해질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이 새 해에는 생명을 생명답게 하는 모든 닫힌 문들이 활짝 열리기를 기도한다. 남북의 문, 가정의 문, 건강과 행복의 문, 평화와 자유 평등의 문, 정의와 사랑의 완성의 문들이 열리기를 기도한다. 특히 지구 곳곳에 가난과 굶주림, 기아와 질병, 전쟁과 재난, 재앙으로 어려운 모든 민중들의 의식주의 기본 권리의 문들이 열리기를 기도한다.
    • 칼럼
    • 통일칼럼
    2020-01-06
  • 한반도의 주인이 되라
    역사에서의 한반도는 대국에 대한 굴복적인 기록과 실재적 사실들을 부인할 수가 없다. 오랫동안 중국에 대한 조공을 바침으로써 군신과 신하의 상태를 유지해 온 역사들이 있다. 고조선과 삼국시대 고구려에서는 오히려 강국으로써 대국의 위치를 자리 매김한 역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 많은 역사가 힘 있는 나라를 섬기는 굴종의 삶을 살아 온 것은 주지의 사실인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애굽으로 들어 간지 430년의 노예의 삶을 하게 된다. 벽돌 굽는 일을 비롯하여 감독들을 세워 무거운 짐을 지우고 바로를 위한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는 등의 고된 노동을 죽도록 하게한다. 노예의 신분은 인간으로써 자신의 모든 자유를 상실한 채 주인의 종으로 살아야 한다. 가족들도 강제로 팔려가고 나누어지며 평생을 한이 쌓이는 그리움과 슬픔의 눈물로 살아가야 한다. 노예는 하나님의 물건이나 재산에 불과하다. 노예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창조된 존엄성고하 고귀한 존재에서 짐승과 같이 취급되어진다. 삶에 대한 어떠한 것의 자유도 없으며 죽음을 선택할 자유도 없다. 오직 주인을 위해서 허리가 빠지는 대가 없는 노동을 하면서 죽어가야 한다. 노예에게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길이란 없다. 주인의 수족이 되어 주인의 뜻에 따라 살고 죽어야할 비참하고 비통한 현재만 있다. 노예에게서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나 설계를 할 수 있는 어떤 선택의 자유도 없다. 노예는 이 땅에서의 자신들의 운명을 창조할 길도 없고 자신들의 고통을 호소할 곳도 없으며 그러한 고난의 현실을 들어줄 어떤 존재도 찾기가 어렵다. 그래서 그들을 창조한 하나님에게 부르짖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소수의 권력자가 다수의 인권을 빼앗고 경제적 착취와 자유에 대한 억압으로 일관하여 대 다수 민중들의 평화를 짓밟아 온 역사이다. 소위 족장시대나 부족국가 동맹 시대에도 그러했고 고대국가 사회로부터 근현대 사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관습과 제도, 체제들을 통해서 자본과 권력의 양극화는 크고 깊게 인간 평등과 공정, 정의를 무너뜨려 왔다. 남녀의 성차별과 피부색의 인종차별은 물론 지역차별과 계층과 계급의 차별은 완화되기는커녕 더욱 심화 , 확대 재생산 되는 현실이 되어왔다. 이러한 모순된 사회로의 진행에 내세우는 것이 신의 이름과 국민과 백성, 민중들이 있다. 착취와 억압의 명분을 삼기 위해서 이러한 이름을 이데올로기화 해 온 것이다. 제도와 법은 강자들을 위한 것이다. 심지어 복지와 분배라는 이름으로 자행되어진 착취의 역사도 깊다. 인간들이 내새워 온 발전과 개발의 논리는 가장 위선적이고 거짓 논리임을 잘 알 수 있다.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들은 이러한 논리와 실정법의 먹이가 된 것이다. 한반도의 민중들은 같은 민족 구성원의 지배와 통치로부터, 지금은 식민 세력과 분단의 지배와 통치의 외세의 세력에 의해 진정한 자주와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현실을 살고 있다. 강대국에 의해서 분단된 오늘의 한반도는 경제대국이라는 절대 빈곤과 굶주림에서 벗어나 있는 상황으로 나름 자부심과 위로를 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의 틀과 내용은 여전히 미국의 식민지로 살고 있으며, 미국의 현대판 노예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노예는 항상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한다. 노예는 주인의 생각과 사고, 행동과 실천의지에 규정되고 제약되어 있다. 새로운 자유와 평화의 역사를 창조하는 길에는 이러한 노예적 근성을 근본적으로 벗어나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미국은 한반도의 평화의 목줄을 놓지 않으려 한다. 한반도와 동북아 거점을 통한 세계 패권을 위해서라도 한반도를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다양한 전략과 전술을 통해서 숨통을 붙잡고 있는 것이다. 북한의 핵무기 보유는 생존전략의 유일한 방법이다. 중동의 가다피와 후세인이 어떻게 죽어 갔는가를 잘 아는 북한으로써 북한에 대한 강력 제재를 풀지 않으며 완전한 비핵화를 요구하는 것은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것은 아니다 이제는 남북이 하나 되어 노예근성을 버리고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주인의식으로 임해야 한다. 평화는 타자에 의해서 오지 않는다. 통일 역시 주변국의 놀음에서는 이루어 질수 없다. 한반도의 식민 통치와 동북아 태평양 전쟁의 만행을 저질러 온 일제의 군국주의의 패전국도 분단되지 않고 살고 있다. 유일하게 한반도만이 지구의 분단국으로 남아서 노예처럼 자기 생각과 실천을 하지 못하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노예 국으로 살고 있다. 썩은 보수든 소위 진보 정권이든 이제 노예근성을 버리고 진정한 역사의 자주적 평화를 만들어 가고 통일의 길을 열어가라 12월 성탄을 맞이할 때마다 역사적 예수의 평화를 입버릇처럼 말하고 있는 교회 세력으로는 한반도의 닫힌 분단의 빗을 풀 수가 없다. 한반도의 진정한 창조의 역사가 열리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 칼럼
    • 통일칼럼
    2019-12-20
  • 한반도의 시계
    남북 정상회담을 세 번씩이나 하고 북미 정상회담을 두 번이나 한반도의 평화정착과 비핵화는 주춤하거나 중단된 상태이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북한에 대한 제재는 흔들리지 않고 지속 강화 되는 형국을 보인다. 대개의 폭력은 힘 있는 강자로부터 시작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전쟁의 참상이고 독재와 독점 독단의 3독 형상이며, 이러한 것을 통해서 힘없는 약자를 억압하고 착취하며 죽이는 살인은 악독 행위이다. 살인은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배반하는 행위이다. 창세기에서의 가인의 아벨에 대한 행위는 시기와 질투 분노의 결과이다. 북한이 미사일과 사정포를 시험하는 것은 자국의 생존을 위한 것이며 동시에 외부에 존재의 근거를 알리는 것이기도 하다. 남북은 적으로 대치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전후 처리 결과로 식민의 영향과 강대국들의 점령으로 분단된 것이다. 분단의 결과는 좌우 이념으로 인한 숱한 민중들의 죽음과 이유 없는 극단의 갈등을 낳았다. 이런 과정에서 가족과 현제 자매들끼리의 오해와 상처는 끝이 없고 조상이 대대로 살던 땅을 떠나서 낮설고 물설은 타향 객지를 살아야했다. 뿐만 아니라 아예 서로가 총을 가슴에 겨누고 적이 되어 죽고 죽이는 민족세계전쟁(6.25)의 참상을 겪어야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그것도 같은 가족과 형제들이 이념과 강대국의 점령 하에서 서로를 죽여야 하는 최악의 역사를 써야했다. 전쟁이 없는 것이 평화의 시작이다. 그리고 사회에서의 불평등이 사라지고 진정한 민주와 인간화의 완성과 성취를 이루는 자유와 평화, 생명과 정의가 춤을 추어야 한다. 남북의 교류가 보류되고 답답함이 커져간다. 이런 사간들이 너무도 오래되고 너무나도 긴 시간이 흘러갔다. 중재자, 협상자로 나서는 것도 북미 회담도 진전의 기미가 쉽게 보이지 않는다. 조금은 우려스러운 기운이 돌기도 한다. 금방이라도 평창 이전의 상태로 한반도의 긴장이 다시 조성되고 우리가 생각하는 평화의 노래는 들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필자는 이 지면을 통해서라도 남북의 민중들에게 제안한다. 그것은 아주 구체적인 대안의 방법이다. 정상들이 할 수 없는 작은 마을 공동체들이 자유 왕래를 하면 어떨까? 아니면 오래 된 이산가족 상봉을 정례화 하고 이산가족들이 사는 마을부터 서로 자유 왕래를 하도록 허락해 주면 어떤가? 서로가 만나고 생필품들과 먹거리들을 주고받는 일들을 지속적으로 하면서 만남을 중단하지 않는 최소한 인간들의 삶을 통하여 사는 것이 이것이다. 라는 평화의 가장 기본적인 것을 허용하면 어떨까? 다시 말하면 만남이 통일이다. 만남이 막혀 버린 것은 지옥이다. 사탄은 만남의 관계를 이간질하고 질투하고 시기한다. 한반도의 시계는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이제 그만 미국의 질투나 중국의 시기나 일본의 장난질은 그만두라 러시아의 방해도 있어서는 안 된다. 이제 용기를 내야할 것은 남북 당사자이다. 4대 강국들의 눈치를 살피는 한반도의 미래를 설정하지 마라 이렇게 해서는 진정한 한반도의 평화는 요원할 수도 있다. 당국과 관료들에게만 맡기는 통일의 길은 너무나 무겁고 벽이 두껍다. 남북이 문을 열어가야 한다. 거대한 강국 미국의 간교한 지배와 패권의 전략을 과감히 깨고 나가야 한다. 트럼프 같은 장사꾼이나 합리적이며 깊은 전략을 통해서 세계를 지배하려는 음흉함을 무너뜨려야 한다. 미국을 등에 업고 평화와 통일을 이루고자 하는 예속과 종속의 식민 근성을 버리지 않고는 한반도의 미래는 예측할 길이 없다. 우리 스스로의 자주 독립을 결행하지 않고는 진정한 자유를 누릴 미래는 오지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의 술에 취해서 갈피를 못 잡고 식민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슬픈 역사의 그늘을 탈출하지 못할 것이다. 평화는 누가 만들어서 먹여 주는 밥이 아니다. 우리의 통일은 누가 만들어 주는 기쁨이 나이다. 그것은 우리가 수없이 겪어 온 고통의 눈물이요 고난의 아픔이며 앞으로도 그럴 수밖에 없는 수난의 시간이 존재할 수도 있다. 북한이 말하는 새로운 길이 무엇인지 모른다. 미국을 향하여 전쟁을 불사하는 길인지 아니면 남북과 북미의 관계를 중단하고 스스로 자립 자족의 경제 건설을 한다는 것인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이 해가 다 가기 전에 진정한 물꼬가 터지기를 기도한다. 분단의 십자가를 더 지는 것은 우리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고 민족의 자존감을 허약하게 한다. 인내는 할 수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 해야 하나 한반도의 시계는 어디를 향하여 가고 있는가?
    • 칼럼
    • 통일칼럼
    2019-12-06
  • 한·미·일 공조의 첫 걸음
    근자에 한반도를 둘러 싼 평화정착이 문제와 관련하여 열 가지 국내·국제 정세들이 있다. 국내적으로는 여전히 정상적이지 못한 제1야당의 반평화 반통일 세력의 기득권 지키기가 그것이고 이러한 반성서적 세력들과 결탄한 거짓 교회들의 행태가 두 번째다. 거짓과 진실, 진리와 비진리, 정의와 불의의 논제를 진보와 보수의 진영 싸움으로 몰고 가는 교활한 기득권 세력들은 진정한 남북의 평화와 통일의 길을 막고 있다. 정치든 경제든 모두는 상식이 뒷받침될 때 공감을 얻을 수 있다. 진정한 국익을 말하면서도 여전히 일본과 미국에 대한 사대주의적 행동은 민족의 자존감과 자존심을 팔아 넘긴다.친일이든 친미든 지난 날의 잘못된 역사를 철저히 반성하고 역사를 바로 세워 정의와 사랑의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 소위 중도적 입장과 양비론적 태도로는 역사의 진리를 확립할 수 없다. 세계화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패권의 연장을 위하여 소위 무한 경쟁의 자본주의를 창출하였다. 자유주의 시장경쟁의 이러한 세계화는 오랫동안 지녀온 민족주의의 문화와 가치들을 온전히 뽑아버렸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제국주의자들의 정책이고 전략이었다.한일 군사보호협정인 지소미아 사태에 대해 일본이 강제징용 문제를 회피하고 있는 현실은 외면하고, 이를 빌미로 대한민국에 압력을 가하는 미국의 태도는 너무도 잘못됐다. 지금까지 과도한 방위비를 지불해 온 것도 모자라 5-6배의 방위비 증액을 내세워 우리를 압박하는 미국의 의도는 배신감마저 들게하는 대목이다. 모두가 아는 대로 지소미아 사태 이전 일본은 우리나라를 수출입 무역에 대한 백색국가에서 제외시켰다. 문재인 정부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통해, 3번의 남북정상담과 2번의 북미대화를 통해 한반도 평화의 길을 모색했다. 북의 김정은 위원장은 체제안전 보장과 경제 건설에 대한 사회주의적 개혁개방을 요구하고 미국은 완전한 비핵화를 요구하고 있다. 한반도의 평화는 단순한 남북의 평화를 말하지 않는다. 이 평화는 동북아 평화는 물론이고, 나아가 세계 평화를 이루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일본은 아베 정권이 들어선 이후, 신군국주의 부활을 도모하고 평화헌법 개헌을 통해서 전쟁국가를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그 뒤에 미국이 존재한다. 일본을 통해서 러시아를 견제하고 새로운 패권국으로 부상한 중국을 떨쳐내고, 그 지위를 영속하려는 전략이 숨어있다. 허나 우리나라 국회는 단일된 모습으로 민족과 나라의 앞날을 생각하는 것이 아닌 여전히 자신들의 정당과 정파 기득권 사수에 열을 내고 있다. 그 모든 피로감을 국민들이 떠안아야 하는 것은 참으로 씁쓸한 현실이다. 미국은 우리의 동맹인가? 분명 미국과 우리는 동맹이지만, 당장의 행태만 보아서는 결코 선한 동맹만은 아닐 듯 싶다. 미국은 자신들만 세계사를 독점하려는 위선을 버리고,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새로운 질서에 순응 해야 한다. 역사는 고정된 고체로 남아서는 안 된다. 그 고체를 녹여서 여러 형태를 만들 재료로 사용되여야 한다. 이제 세계의 지배는 소수 국가만의 독점이 아니라 함께 더불어 만들어 가는 공동체, 세계 운명을 창조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해방의 도리이다. 생명은 나고 죽는다. 생명은 오고 간다. 역사는 고정되지 않고, 순환하며, 흐르고 다시 흐른다. 본질과 존재의 근거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어제와 오늘을 가르친다. 이것은 국제질서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유일한 분단국가로 사는 한반도는 행복하지도 희망적이지도 않다. 국토가 초토화 되고 천만의 이산가족이 있었으며 수백만의 고아들과 무수한 부상자들이 민족끼리 있었다. 분단의 지속은 이러한 상처와 아픔을 지금도 치유하지 못하고 있다. 일제 치하에서 억울하게 청춘을 상실하고, 버려진 땅 중앙아시아 시베리아로 끌려 간 그 세월의 아픔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 꽃다운 어린 소녀들이 전쟁 성노예로 끌려간 역사를 가해자의 진정어린 사과나 사죄 없이 어떻게 치유가 되겠는가? 미국은 이러한 극악무도한 일본을 반성하고 회개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한미일 공조를 이루는 첫 번째의 걸음이다.
    • 칼럼
    • 통일칼럼
    2019-11-22
  • 분단을 사는 유일한 국가
    촛불혁명과 함께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지 3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의 검찰개혁의 목소리와 광화문의 소리들을 낡은 보수와 진보의 싸움이라고 말한다. 일제 식민치하의 고난을 겪고 광복과 해방의 날이 온줄 알았던 반도의 봄은 전후처리 문제로 미소 강대국의 남북 점령군이 점령함으로써 분단과 함께 새로운 식민지가 시작되어 74년 오늘을 지나고 있다. 북은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들어서고 소련군은 물러갔다. 남쪽은 맥아더 아래 야전사령관으로 있던 하지가 조선에 대한 물정을 전혀 모른 채로 좌우익을 받아들이는 정책을 쓰다가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우익 세력들이 미군정과 가까워짐으로 해서 김구가 암살되고 좌우합작을 추구하던 여운형도 타살됨으로써 남조선 공산당 당수인 박헌영은 북한으로 입북 하면서 남한의 좌익은 힘을 잃고 만다. 민족의 분단은 수많은 민중들을 학살하는 것 뿐 아니라 한반도 전체를 초토화 시키는 민족상잔의 민족 세계전쟁(6.25)의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풀 수 없는 한을 남겼다. 독일 역시 전후에 동서로 분단되었으나 통일을 이룬지가 20년이 넘어간다. 여러 가지 환경의 차이가 있지만 적어도 그들은 민족끼리 서로 죽이는 민족전쟁은 없었다. 그러나 통일의 날까지의 그들은 과거에 행한 정치적 행위를 철저히 반성하는 한 편 이념적으로 체제는 갈라서 있었지만 서로가 교류를 멈추지 않고 부단한 사랑을 구체적으로 지속했다. 분단을 사는 유일한 국가로써 오늘의 비통함을 느끼는 것은 단지 나만의 일이 아님을 잘 안다. 문재인 정부가 남북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남북 정상회담의 길을 3번씩이나 열고 한반도 평화통일의 운자자로 북미의 비핵화 문제 해결의 중재자로 나선지 2년여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 과정에서 남북의 오해는 커져가는 듯한 느낌이고 북미의 서로의 유익을 생각하는 계산에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및 남북의 통일의 걸음은 앞으로의 전진을 못하고 머뭇거리고 주춤거리며 헐떡이는 듯하다. 미국의 중국과의 패권과 자국우선주의 보호무역 전쟁 등을 내세우고 일본 아베의 신군국주의부활의 몸부림 등으로 한반도는 틈바구니에서 새로운 역사 창조의 동력을 잃는 것처럼 보이는 안타까움이 몸서리친다. 여기에서 그치면 안 된다. 불의를 호통치며 민주와 통일을 외치며 망명생활을 마다하지 않으시던 시대의 예언자 김재준 박사님, 목숨을 담보로 서슬 퍼런 독재가 목을 조이던 철조망을 넘어 김일성과 포옹하던 통일 꾼 문익환 목사님, 문 목사님과 함께 민주화와 통일운동을 하시면 범민연 의장을 10년 하시고 마지막 민족의 재물이 되신 평화와 통일지사 선비이셨던 흰돌 강희남 목사님, 민주화의 길을 여신 박형규 목사님, 유신독재의 긴급조치 첫 구속자로써 역사의 정기를 바로 세우셨던 은명기 목사님, 김관석 목사님, 조용술 목사님 등 민족의 분단을 헐고 평화와 통일을 열고자 하셨던 많은 스승들을 기억하며 옷깃을 다시 여미어 본다. 한국교회들은 짧은 선교 기간에 세계적 유래가 없는 성장을 자랑하여 왔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은 역사의식의 부재와 세습, 그리고 물질의 우상 섬김의 맨 앞 자리에 교회가 서 있음을 보면서 매우 반 성서적이고. 민족의 평화와 통일의 문을 여는 데는 방해세력의 장애물처럼 되어있다. 성서는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과 자연 우주적 구원상이다.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고 하나님의 나라 완성을 위하여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정의가 없는 맹목적 사랑을 해서는 안 되며 사랑이 없는 정의만을 외치면 세상은 삭막해 진다. 조국 장관의 임명 전과 퇴임 후는 여전히 정치적 사회적 이슈로 진행형이다. 북미 회담은 알 수 없고 정치인들은 총선을 앞두고 혈전을 한다. 불의한 세력에 기대어 살아왔던 수구 기득권자들과 역사적 불의에 저항하던 소위 진보 세력들 간의 오케이 목장의 결투가 진행되고 있다. 백마를 타고 백두산에 오른 김정은 위원장과 탄핵 정국에 휩싸인 트럼프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확실한 예측을 할 수 없다. 일본 천황에 대한 이 총리의 참여로 추악한 일제와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는가? 분명한 것 한 가지는 말할 수 있다. 역사를 앞으로 이끌 수 있는 유일한 주체는 민중뿐이다. 잠든 역사를 잠들지 않고 깨어난 민중만이 흔들어 깨우며 바로 세울 수 있는 것이다. 북의 인민들과 남의 민중들이 자율적으로 자유롭게 교류할 수 있는 날을 자주적이고 주체적으로 열어 가는 길 그것이 답이다.
    • 칼럼
    • 통일칼럼
    2019-11-15
  • 지구촌 어디든 억압과 폭력은 평화의 적이다
    인류사는 전쟁과 폭력, 그리고 살인의 역사이다. 성서에서 마귀 하는 일은 관계를 이간질하고 거짓말하며 살인을 해서 생명을 죽이는 것이다. 로마의 평화는 세계적인 폭력사이다. 미국의 평화주의는 자국을 위한 패권전쟁이다. 가인의 살인 이후 인류사는 탐욕과 살인으로 맥을 이어가고 있다. 이러한 폭력에 저항하는 세력들이 존재해 온 것도 서실이지만 여전히 평화는 입술에 머물기 일쑤다. 인간들의 소유욕에 무자비하게 개발된 자연, 땅과 바다와 하천은 오염되고 썩어가고 있다. 글로벌 워밍, 지구 온난화를 통한 해수면의 상승과 예측할 수 없는 기후변화와 실재적 재난과 재앙들은 인간뿐 아니라 자연의 생태계를 파멸로 몰아간다. 이 모든 것들의 시작은 인간들의 거짓과 탐욕이 문제이다. 바울과 어거스틴, 칼빈과 칼 바르트가 본 인간들의 실체는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들’이다. 여기에 들어서는 것은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이다. 구원은 믿음으로 이루어지고, 말씀으로 이루어지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함께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을 말하며, 그것이 오늘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며 어떻게 적용시켜야 할 것인가? 자기 편의대로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하고 자기 밥벌이의 이익을 위한 자기정당화, 자기합리화의 교리적 틀을 고집하면은 되겠는가? 자신들은 이 땅에서의 탐욕적, 세속적 삶을 구가하면서 민중들과 소위 교인들에게는 저 세상 적 거룩을 살도록 강요하는 이단 사이비들이 즐비해 오지 않았는가? 거짓과 이분법적, 이원론적 교리들을 앞 세워 종교적 행위들을 강요하는 반성서적 설교와 교리들은 그쳐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여기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하고 마침내 완성 되어야 한다. 초대교회 이후 중세를 거치면서 교회는 세상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지배하고 통치해 왔다. 신을 앞세워 식민지를 확장하고 약한 나라와 민족들을 억압하며, 사회적 힘없는 민중들을 착취해 오고 있다. 한국교회 초기의 선교사들 중에도 문화적 우월감을 내세우며 지배자적 입장을 취한 적이 있다. 선교사들이 물러간 이후의 교권을 쥔 자들 역시 지금까지 지배자적 위치에서 신의 이름, 예수 그리스도 이름, 성령의 이름으로, 민중들을 협박하며 으름장을 놓아서 소위 황제처럼 군림해 오지 않는가? 특히 성장을 한 대형교회 재벌들 교회일수록 이러한 모습은 대단하다. 아마 역사적 예수가 이 땅에 오신다면 이러한 교회들의 교회정화를 위해 채찍을 들며 상을 엎고 장사치들을 내어 쫓을 것이다. 소위 성직자들은 강단에서 섬김과 십자가의 예수가 우리의 죄악을 감당하여 죽으셨다는 스테레오 타입의 노래를 반복해 오지 않는가! 그들은 이러한 예수의 권세를 통하여 질병과 가난, 삶의 아픔과 슬픔을 겪고 사는 민중들을 심리적으로 억압하며 폭력을 행사한다. 예수는 귀신을 내쫓고 각종 병을 고치고 상처를 치유하며 굶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신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인가? 그것은 죽어서 가는 저 세상의 어떤 공간이 아니다. 지금 여기에서 누리는 자유와 평등 함께 더불어 사는 행복의 삶이다. 각종 악을 자본화 하여 인간의 생명과 삶을 파괴하는 모든 것들은 모아서 불살라야 한다. 인간과 자연의 생명체를 경시하며 자본의 이익과 탐욕에 둘러싸인 악마적 문화적 유산들을 중단하고 없애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들은 거짓말쟁이요, 마귀의 자식들이며 살인자들일 뿐이다. 섹스와 마약과 알콜, 그리고 도박장소를 허가하는 모든 자본가가 권력자들은 마귀의 자식들이고 살인자들이며, 거짓말쟁이들이다. 우리가 바라는 진정한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역사적 예수는 오셨고 불의한 거짓 로마 세력과 그것에 아부 아첨하는 세력들과 잠든 민중들에 의해서 타살되셨다.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강조하는 신중심의 신학과 신앙은 많은 지배자들과 탐욕 자들의 이데올로기화 된 것이 사실이다. 분명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자요 구세주이다. 그렇지만 이제 분명히 말하되 이단들과 사이비들과 탐욕 자들, 거짓말쟁이들로부터 해방될 예수이다. 섬김의 예수, 섬김의 교회, 섬김의 사람들을 교인이고 신자이며 성도이다. 거룩한 직은 섬기는 직업이다. 창조를 정복이라고 해석하여 전쟁을 합리화하고 살인을 정당화 하는 폭력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 복잡한 인류사와 인간사를 한마디로 간단히 말하고 해결할 수는 없다. 분명한 것은 탐욕적 폭력과 억압 , 전쟁과 살인의 행위를 중단해야 한다. 자본을 불리기 위한 인간 삶의 파괴적 상업을 중단하고 해체하며 없애야 한다. 인간이 달려 온 역사는 정말 비관적이다. 핵무기와 원자력 같은 문명의 악마와 함께 각종 편의 상품들이 인류를 망하게 할 것이라는 것을 의심할 수 없다.
    • 칼럼
    • 통일칼럼
    2019-10-24
  • 문화와 평화
    사람들이 동물과 다른 척도를 문화적 존재라고 말한다. 문화의 정의는 여러 가지로 표현되고 말해 진다. 문화는 그림과 글, 음악과 문학, 종합예술인 영화 등 그 분야가 모든 삶의 전 분야에 영향을 미친다. 문화의 시작은 언어네 있다. 고대 언어로부터 현대의 언어는 사람들의 일상사에부터 특별한 일 모두를 망라하고 있다. 사람들의 삶의 만족은 단순이 의식주에 머물지 않고 삶의 경험들을 기록하고 나태 내며 작품 등으로 나타내어 후대에 전하고 싶은 문화적 욕구들이 강하다. 이러한 문화는 자신들이 살아가는 역사적 현장과 분리 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그 영향을 받아 만들어 진다.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현실과 상황, 사람들의 욕구와 충족하려는 반향들, 종교적인 관계들이 문화적 표현의 틀과 울타리를 형성하기도 한다. 초기 기독교의 박해 시의 문화와 주후 313년 콘스탄틴 대제 이후 국가와 밀접한 관계를 형성한 기독교와 교회의 문화가 현저하게 다르고 5세기부터 15세기 중세 천년의 기독교와 교회문화 이러한 영향으로 각인 되어진 유럽의 문화와 16세기 종교개혁 이후의 문화와 문예부흥 시대를 거친 계몽주의와 이성주의 시대를 거치는 동안의 각각의 문화가 전혀 다르다. 문화는 언제 하늘에서 자존적으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삶 전체의 양식의 총체적 영향을 받고 관계 하면서 다양하게 만들어 지고 형성화 된다. 같은 시대라고 자신들의 삶의 자리에서 다르고 다양하게 표현되고 창작되며 창조된다. 동시대를 살면서도 자본과 권력을 가지고 지배하는 자들의 문화와 그들로부터 억압과 착취를 당하는 사람들의 문화가 전혀 다르게 만들어 지고 표현 된다. 또한 정치적 이해관계와 기업의 이해관계, 재벌기업과 중소기업을 하는 사람들의 문화가 다르게 형성 된다. 가진 자는 지배하고 없는 자는 그들의 폭력과 억압 착취에 대하여 저항문화를 만들어 낸다. 그런 것들의 현상은 사회학에서는 계층문화와 계급문화로 부르기도 한다. 같은 장르의 소설이나 문학 작품이라도 각자가 태어 난 나라와 지역, 가정환경, 성장과정, 그리고 온전한 가정과 혼자 된 가정에서의 말과 생각, 사고들이 다르다. 문화화 된다. 또한 이민자들의 삶의 문화적 양상과 조국에서 삶을 살아 낸 사람들의 문화가 전혀 다르다. 동양의 유불선의 종교의 정서를 가진 문화와 유교적 영향을 받고 성장하고 창작 한 사람들의 문화가 출발과 결론이 다르다. 같은 동양의 문화라 해도 일본과 중국 한국의 문화가 전적으로 다르고, 한국이라도 백제와 고구려 신라의 문화가 다르며, 통일 신라와 고려의 문화가 다르다. 조선 오백 년의 유교 문화가 다르며 각자의 문화 정체성 또한 다르다. 각 나라의 초기와 중기 말년의 문화가 다르며, 조선의 유교적 문화와 조선말의 초기 기독교가 전래 된 후의 문화가 다르다. 문화는 시대의 정신과 공존하며 싸우고 투쟁하고 때로는 극렬한 전쟁을 하면서 생존과 발전을 모색하기도 한다. 일제의 식민 치하의 문화와 전후 냉전 체제 하의 분단 문화가 다르며, 민족세계전쟁(6.25)의 전쟁 문화와 전 후의 문화가 다르다. 노자와 장자의 동양문화와 영국의 홉스와 베이컨, 프랑스의 장자끄 루쏘가 말하는 문화가 다르다. 미 제국주의가 말하는 문화적 충발과 과정 그 양식이 다르고, 산업혁명 당시의 문화와 지금의 21세기 현대적 문화가 전혀 다르다. 컴퓨터와 인터넷의 정보와 지식사회의 문화가 다르며, 4차 산업의 인공지능(AI) 시대의 문화가 현저히 다른 것이다. 사람들의 노동의 일자리를 로봇이 대행하며 블록체인과 암호화폐가 지배하는 시대가 전혀 다른 문화를 써 갈 것이다. 수력발전소와 화력 발전소가 전기를 공급하전 시대의 문화와 원자력 발전소가 전기를 양산하는 시대 그것들의 복합적 문화가 지배하는 양상들이 다르다. 과거의 재래식 무기들로 전쟁하던 시대와 지금의 핵무기와 고도의 스타워(star war)가 존재하는 현대 전재의 문화가 전혀 다르다. 자연과 함께 공존 하며 살던 고대의 시대와 자연을 개발의 명목으로 폭력적 착취를 하며 살아가는 문화가 다르다. 사람들은 하늘을 품고 살 수가 없다. 그러한 한계를 지니고 있는 존재가 하늘이 되려고 하늘 흉내를 내는 것이 왜곡된 문화를 만들어 낸다. 우리가 진정한 생명의 문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자연과 함께 공존하는 삶의 방식을 선택해야 하며 하늘의뜻을 거절하는 역천의 행위를 중단하고 겸손한 삶의 여정을 살아야 한다. 그것은 진정한 인간화와 삶의 근본을 아는 하나님의 길을 따르는 문화인이 될 것이다. 성숙된 문화인은 자신을 깊이 성찰하는 사람이다. 자신을 뒤돌아보며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겸허한 자로 설 줄 알며, 미래를 새롭게 설계하는 사람이다. 오늘의 세계 문화는 폭력과 착취의 문화이다. 거짓과 진실을 상실한 문화이다.
    • 칼럼
    • 통일칼럼
    2019-10-16
  • 교회 밖의 평화
    기독교 중세 교회에서의 논쟁 중 하나가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였다. 이 말을 처음 쓴 사람은 3세기의 성 씨프리아누스이다. 이 말의 뜻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어떤 이름이나 방법과 수단의 구원의 통로는 없다는 말이고, 당시의 가톨릭교회 외의 구원도 없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교회의 시작이고 머리가 되시는 역사적 예수의 출생은 서구의 땅이 아니라 중동 지역 다시 말하면 오리엔탈 문화권의 동방지역 베들레헴이다.(떡집. 한문으로는 병점이다.) 중세 5세기에서 15세기까지 천년의 세월 서구 유럽 세계는 온전히 가톨릭교회의 세계 안에 갇혀 있었다. 우리가 다 아는 바대로 베들레헴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지역은 소위 유대교와 이슬람교와 기독교 3대 종교의 발상지이다. 그런데 이러한 3대 종교는 그때로부터 21세기 지금까지 서로 대립관계에 있으면서 원수의 관계로 지내고 있다. 한 아버지 밑에서 난 자식들이 여전이 으르렁 거리며 분쟁과 싸움과 전쟁을 일삼고 있다. 인류의 전쟁 유발의 원인을 여러 가지로 분석하여 이해할 수 있으나 그 중 제일이 소위 종교적 신념이나 신앙의 근거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과 함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과 교리는 모든 것들에 대한 배타성을 강하고 원천적으로 지니고 있다. 이러한 신앙의 고백 위에 소위 성전(Holy war)을 멈추지 않고 있다. 물론 이슬람 역시 그렇고 유대교 역시 이러한 자기 신앙의 중심에서 서 있다. 불교는 이와 사뭇 다른 길을 주장하고 있다. 십자군 전쟁 뿐 아니라 서구 열강의 식민지의 명분의 밑바닥에는 이러한 기독교의 성전의 개념이 자리 잡고 있고 유럽의 반유대주의에 근거한 히틀러의 살인적 광기의 역사 역시 이러한 기독교의 신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교회가 말하는 ‘거듭남과 중생, 다시 남, 새로운 사람, 새 생명,’ 이것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성프란시스가 모든 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 탁발승이 되었다. 그가 노래한 평화의 노래는 지금도 우리에게 가슴 뭉클한 기도가 된다. 그는 노래한다. 우리가 주님의 평화의 도구가 되게 하며, 사랑과 화목을 심으며, 절망 가운데 소망을 심고, 주는 자의 복을 바라며, 자기를 부인하여(버려)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기를 기도 한다. 위로 받기보다 먼저 타인을 위로 하는 자가 되라고 한다. 우리는 지금 한반도의 평화의 도구가 되고 있는가? 우리는 과연 새로 거듭난 생명으로 살고 있는가? 역사적 예수는 산상수훈에서 평화의 도구가 되라고 말씀하고 있다.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고 천국이 그들의 것이 된다는 것이다.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는 화평과 화목, 평화를 이루는 자들의 것이라는 것이다. 천국은 단지 사후 세계의 어느 공간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평화를 만들어 가는 곳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분단을 막지도 못하였고 분단을 치유하려는 노력보다는 분단의 이념에 편승하여 자기 뱃속을 채우려 한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북한의 교회는 버려졌고 남한의 교회는 자본주의와 불의한 권력들에게 공생과 기생을 하며 살아 왔음을 변명할 길이 없다. 한반도의 평화 프로세스의 시계는 어디에 머물러 있는가? 아직도 미국의 외세에 묶여 있고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질투하고 시기하는 일본의 신 군구주의가 웅크리고 있으며,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중국과 러시아 등 강대국들과 세계적 이해관계의 틈바구니에 있다. 성서가 말하는 평화는 무엇인가? 그것은 교회 안에 갇혀 있는 평화인가? 교회 밖에는 평화가 존재하지 않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교회 안은 과연 평화를 말하고 평화를 실천하며 교회가 가연 평화의 도구로써 존재하는가? 평화는 강력한 무력의 힘과 살생의 무기에서 오지 않는다. 정말 평화를 입증하려면 지구상의 핵무기 뿐 아니라 모든 촉력을 중단하고 살인적 무기들을 폐기하며 내 몸처럼 타인의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 먼저가 되어야 한다. 교회가 교회로써 존재의 의미를 회복하려면 먼저 자기를 부인하고 교회의 담과 벽을 헐어 버리고 평화의 도구가 되어 평화를 실천하는 평화를 만드는 개인과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교회가 자기 안의 울타리에 갇혀서 구원의 교리로 밥벌이에 연연하면 다시금 개혁이 아니라 진정한 역사의 혁명적 세력에 맞서게 될 것이다. 교회여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성령과 역사, 사람과 자연 앞에서 정직을 회복하고 진정한 평화의 도구가 되어라. 오늘 우리는 남북의 평화 프로세스에서 여러 가지 장애물을 목격하고 있다. 일본 아베의 한반도 평화에 대한 시기와 질투경제적 보복과 미중의 패권 싸움과 무역전쟁 등 어려운 문제를 풀어야할 시점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교회들이 진정으로 겸손을 실천하며 이러한 한반도의 분단 극복의 평화를 만드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존재의 의미인 것이다.
    • 칼럼
    • 통일칼럼
    2019-09-27
  • 조국이여 굳세어라!
    문재인 정부의 과정의 공정 기회의 평등 결과의 정의는 모든 통치와 정책의 기조를 이룬다. 적폐청산을 중심으로 국정농단과 대국민 사기형의 전직 통치자들을 감옥에 보냈다. 이것은 나라와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인 것이다. 법을 어기고 국민을 속이며 인간의 양심과 기본적 가치를 짓밟는 모든 권력이나 자본에 대한 준엄한 잣대를 대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조국 법무장관 후보자의 가족 신상 털기가 모든 언론과 세상을 소란케 하고 있다. 조국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그를 공격하는 친일과 독재, 학살 세력, 다시 말하면 불의한 권력과 자본의 모든 부귀영화를 다 누린 존재들이 발악을 한다. 역사의 주체인 민중들을 무시, 멸시 천대하며 살아 온 악하고 교활한 세력들이 조국을 짓밟고 있다. 물론 필자 역시 70년대 열악한 산업 현장에서 먹지 못하고, 배움은 포기하며 결국은 병들어 죽음을 경험한 일이 있다. 수많은 어린 노동자들이 임금 착취와 비인간적 생활을 통하여 병들고 죽어 가는 것을 직간접으로 보고 살아 왔다. 권력과 자본을 가진 자들의 횡포와 잔악함, 교활함을 바닥에서부터 처절하게 경험하고 지금도 그러한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소외 된 삶을 살아가는 변두리 사람이다. 그래서 특권을 누리고 산 사람들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소위 금 수저 출신이고 엘리트적 삶을 살아 온 조국후보자를 보면 이런 생각을 하고 싶지 않다. 필자는 흙 수저 출신이고 지금도 가장자리의 삶을 살고 있지만 금 수저 출신 모두가 불의한 삶으로 지탄받는 다는 것은 편견일 것이다. 조국을 비판 하는 세력들과 언론들은 조국의 출신과 가족 신상 털기를 통해서 그를 낙마 시키고자 혈안이 되어 있다. 민심이 아니라 조국을 끌어 내리기 위한 가짜뉴스 생산과 확대 재생산을 위해 모든 수단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그야말로 파국지세의 무차별 공격이다. 조국과 윤석열의 하나 된 검찰개혁과 사법부를 바로 세우는 일을 추진하는 것이다. 그동안 자한당과 그 전신인 친일 독재 학살 사기 농단 세력과 그 잔재들의 거짓된 역사를 바로 세우는 첫 걸음이라 본다. 자본의 재벌 중심과 불의한 권력과 공권력의 폭력과 억압, 착취들을 가려내고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들의 억울하고 서러운 모든 것들을 밝히 드러내야 한다. 침략자들과 신식민지 세력들의 한반도 분단의 지속과 반 평화통일 세력들의 존재를 직시해야 한다. 조국 후보자의 가족과 형제들, 자녀들, 그들은 분명 금수저들인 것 같다. 없는 자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위 강남 좌파로써 역사의 불의에 저항하고 몸부림치는 모습을 본다. 우선 티비에서 조국을 비판하는 자들의 면면은 그럴만한 자격들이 없다. 그들은 권력을 쫓아 살거나 불의한 권력을 만드는데 협력하여 기생하던 존재들이 아닌가? 그들이 언제 민중들의 억울한 삶과 서러운 눈물을 닦아 주려 하였는가? 주국이 우상은 아니다. 우상이 될 수도 되어서도 안 된다. 다만 그를 통해서 역사의 막힌 한 곳을 뚫어서 생명이 숨 쉬게 하면 그만이다. 역사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 역사는 만들어 가는 것이고 살아 숨 쉬는 것이다. 그 주체는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다. 지금까지의 역사는 갖은자들의 역사요 힘 있는 자들의 역사였다. 이제는 진정으로 역사의 주체이면서도 멸시와 천대를 받아 온 민중들의 역사적 토대를 든든히 만들어야 한다. 민중은 계급도 아니고 혁명 세력만도 아니다. 진정한 지식인과 힘 있는 자라면 이제부터의 역사는 민중이 주인 되는 역사를 인정하고 자리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것은 정의로운 역사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힘과 자본을 가진 자들의 역사를 벗어나서 지금까지 삶의 소외와 상처를 참고 살아 온 사람들의 진정성을 받아 주어야 한다. 그러나 민중들이 대접 받는 세상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그것은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한다. 조국 후보는 이러한 민중들이 새 역사를 만들어 갈 수 있도록 법의 정의를 세워야 한다. 국가보안법으로 간첩을 만들고 삶의 발판을 흔들어 대고 서지 못하게 한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어왔는가? 얼마나 많은 약자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며 한을 쌓아 왔는가? 거리로 내어 몰리고 직장을 잃고 집 없이 나그네로 노숙자로 떠돌이로 살게 되었는가? 조국이 해야 될 일은 이러한 법의 정의를 통해서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들의 눈물을 닦고 진정한 인권이 바로 서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조국을 지지하고 굳세게 서기를 바란다. 자한당과 친일독제 학살 세력은 사력을 다하여 조국의 낙마를 막는 이유를 알 수가 있다. 그것은 자신들의 과거의 죄가 드러나고 기득권과 부귀, 자본과 권력을 통한 영화를 지속하고자 하는 것이다. 썩은 권력에 기생과 공생을 해 온 교회 종교 세력들을 기대하기 힘들다. 필자는 다시 말한다. 역사 바로 세우고 민중들의 한을 풀어주는 의미에서 조국이 굳세기를 바라는 것이다. 조국이어 굳세어라.
    • 칼럼
    • 통일칼럼
    2019-09-05
  • 군국주의 부활과 한반도의 평화
    아베정권은 소위 수출규제와 하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하는 각의 의결을 결행하였다. 한반도 강제 침략의 과정에서 전쟁 성노예와 강제징용의 인권과 노동 착취에 관한 정당한 한국 대법원 판결을 부정하려는 침략적 반성 없이 다시 한 번 노골화 하였다. 인류가 바라는 보편적 가치는 모든 사람들의 인권을 존중하고 평화를 살고자 하는 것에 대한 반역사적 제국주의적 행태가 아닐 수 없다. 역사는 일차적으로 각 민족과 각 국가와 나라 자신들의 몫이다. 나라가 망하는 것은 외세의 침략보다는 내부의 분열이나 내부의 허약함과 무능, 부정의한 정파적 싸움에 있다. 사실 현대적 국가는 매우 복잡한 역사적 과정과 결과를 통해서 형성되었다. 간단하게 국가적 가치와 의미를 단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국가의 존재와 그 국가를 운영하는 정당들의 성격이나 행태는 정의나 진정한 국민과 민중을 위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이나 부귀영화를 추구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국가나 국민, 민중을 위해서 산다는 것은 표면적인 것뿐이고 기실 자신과 자신의 가정, 혹은 자기의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해서 산다는 것이다. 소위 대중이나 서민, 필자가 경험한 역사의 주체인 민중조차도 완전한 역사를 만들어 가는 지혜가 있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도적 권력과 자본을 소유하고 있는 집단이나 개인보다는 국가와 민족의 우기에 직면해서 그것을 극복해 가는 용기와 결단은 민중들이 감당해 왔다는 역사적 결과들을 부인하기 어렵다. 우리가 역사의 완전성을 기대하는 낙관론을 말하기는 쉽지 않다. 절망스런 상황에서 희망은 싹트기도 한다. 역사적 예수는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하였고 그리고 복음의 중심은 평화를 만들어 가는 것에 있다고 본다. 평화의 성취는 그 평화를 이루어갈 대상이 있다. 다시 말하면 평화의 전제는 혼자가 아니라 너라는 상대와의 관계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아베의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에 이어서 화이트리스에서 한국을 제와한 것을 공개적으로 게제 선언하였다. 한반도의 평화프로세스에 대한 시기와 질투, 한국에 대한 일본을 능가하려는 경제 발전에 대한 제약적 행위가 구체적인 이융ㄹ 수 있지만 더 근원적인 이유를 보면 조선반도에 대한 강제늑약체결과 강제 병합의 침략적 죄악들을 반성하거나 사죄를 하지 않는 것, 그리고 최근의 전쟁 성노예와 강제징용에 대한 인권유린에 대한 진정한 사과와 배상을 하지 않는 가장 악한 비인간적 국가 행위이다. 우리가 히틀러 나치에 대한 죄악상을 반성하고 사죄 배상하는 독일 정부와 일본군국주의의 죄악상에 대한 반성과 사죄 배상을 하지 않는 일본을 보면 금방 비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어째든 분단 74년을 지나는 지금 우리는 매우 어려운 역사적 시험대에 서 있다. 미국의 자본주의 적 고도의 장사꾼 정치와 미중의 패권 싸움과 무역전쟁, 여기에 대한 미북러의 단결된 행태, 일본을 움직여서 한국에 대한 경제적 보복 등 예측 불허의 연출들이 지속 확대되고 있다. 북미의 다른 계산, 더 정확히 말하며 미국의 자국 우선주의의 이익과 계산을 통한 북한 가지고 놀기와 남북의 진정한 자주적 교류와 평화적 실행을 흔들고 있다. 어령운 상황일수록 우리는 더 진중하고 침착하며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사고와 결단, 행동을 실천해야 한다. 그러나 신중한 판단을 하되 이제는 어떤 역사적 한계를 극복해야만 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제는 외세를 의존하는 공식적 외교를 하되 그것만을 의지하는 틀을 넘어서야만 한다. 평화는 전쟁이 없는 것을 말한다. 어떤 경우에도 전쟁은 없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평화의 완성은 아니다. 평화는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억울한 일은 당하는 약자가 없어야 한다. 인간이 가진 본질적 원죄가 있지만 우리가 사는 사회적인 범 죄, 즉 인권이 유리되는 사회적 구조악들과 차별, 불평등이 있어서는 안 된다.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의 인권이 손상되지 않도록 배려하고 제도적인 것들을 정착시켜야 한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불의한 세력들의 정의와 진리, 생명에 대한 악의 결정판이다. 복잡한 현대 국가에서 약자들과 힘없는 자들의 인권은 유리되기 십상이다. 우리가 남북의 평화적 교류와 진정한 민족의 통일을 원하는 것은 이러한 모든 비인간화의 불의를 근본적으로 막고자 하는 하나님나라의 건설을 위한 기도의 실천이다. 누구도 어떤 이유로 차별받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 특히 공권력을 통한 억압이나 폭력이 있어서는 된다. 일본의 제국주의적 아베의 강제징용에 대한 경제적 보복의 행태는 아직도 우리가 진정한 자주 독립을 이루어야할 시기에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칼럼
    • 통일칼럼
    2019-08-22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