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2-05(목)

칼럼
Home >  칼럼  >  통일칼럼

실시간뉴스

실시간 통일칼럼 기사

  • 3.1 혁명 100주년과 한반도의 평화
    우리는 3.1혁명 100주년을 맞는 한반도의 대 전환의 카이로스를 맞고 있다. 근자에 일어난 고 김용균 씨의 죽음과 그리고 베트남 하노이에서 있을 북미 2차 정상회담을 앞에 두고 있다. 3.1혁명은 일제의 잔악한 한민족 민중들에 대한 억압과 탄압과 착취에 분노와 저항의 진정한 독립과 생명회복 혁명이었다. 제국주의의 억압과 민중에 대한 압살로서는 지배의 탐욕과 욕망을 성취할 수 없다는 진리에 입각한 증거요 증언자들의 함성을 토해 낸 것이다. 여기에는 민족종교인 대종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들의 한계가 있을 수 없고 다만 불의에 대한 굴종과 비굴함 비겁함의 차이만 있었다. 3.1 혁명은 단순히 몇 사람의 촉발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늘이 인간에게 내린 생명 본질의 폭발이요 보편적 존재 가치의 발로인 것이다. 그것은 누구도 포기할 수 없고 포기해 서는 안 되는 생면근거의 바닥이 억압과 불의의 땅을 뚫고 하늘로 솟구친 하늘과 땅의 일치의 운동이요 하나로부터 시작되는 자연의 큰 움직임 인 것이다. 외세의 침탈과 저항의 씨앗이 무섭게 튀어 오른 것이고 생명의 피를 흘려서라도 지켜야만 하는 모두의 밀알들의 함성이었다. 이러한 인간 역사의 시작 그 이전 태초부터의 힘의 연속으로 민중들의 저항이 물줄기가 동학으로 꽃 피고 3.1혁명으로 역사의 지진을 낳고 제주 4.3민중혁명과 여순 혁명 4.19 혁명과 5.18 민중혁명과 6.10 항쟁 그리고 마침내 2017년의 촛불혁명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제 다시 한민족의 새 생명의 기운이 시작 되어 모든 혁명이 농축된 대 전환이 시작 되었다. 그 누구도 이 새 역사의 대세를 막을 수도 없고 막아서도 안 된다. 혁명이란 역사를 바로 세우는 생명운동이다. 분단을 통해서라도 권력의 야욕을 채우고 군사 쿠데타를 통해서라도 추악한 욕심과 욕구를 담아보려는 불의에 굴복해 서는 안 된다. 우리는 썩을 것에 진리를 값싸게 팔아서는 안 된다. 이와 관련해서 미 제국주의의 탐욕의 행보는 한반도의 73년의 허리를 동강내고 지금까지도 한민족의 운명을 조롱하고 저울질 한다. 이제는 이러한 외세의 두려움을 과감히 끊어 내고 진정한 독립을 이루어야 한다. 독립은 타자를 무시하고 멸시하는 이기적 독립이 아니다. 그것은 진정한 모두의 평화를 만드는 시작인 것이다. 나와 너가 함께 구원의 방주에 들어가고 주언 진 생명들이 꽃을 피우며 풍성한 삶의 행복을 구가하는 것이다. 평화는 타자의 것을 빼앗는 것으로는 이루어질 질 수 없다. 오히려 내가 가진 힘과 물질 뿐 아니라 모든 소유를 개방하고 그들과 공유하는 실천으로부터 시작된다. 베트남 전쟁은 미 제국주의의 탐욕과 그것에 대한 욕구의 들러리가 된 박정희의 야욕이 합쳐진 불행한 전쟁이었다. 그것은 있어서는 안 될 잔악하고 추악한 전쟁 놀음이었다. 32만의 대한민국 젊은이가 고엽제를 맞으며 그들의 생명을 담보로 5천명의 생명이 죽어 갔으며 그들의 전쟁 임금은 박정희에게 착취당하였다. 모택동은 인간의 역사에 있어서 전쟁이란 ‘불가피한 것’이다. 라고 말한바 있다. 신학자 칼. 바르트(K. Barth)가 말했듯이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악의 씨앗’을 가지고 온다. 는 말을 다시 한 번 깊이 새겨야 한다. 우리 속에 있는 더럽고 추악한 각 종 탐욕들을 말씀의 능력과 성력의 능력으로 절제하고 제거할 수 있는 근거의 평화를 만들어 가야 한다. 창조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상품화해서 맘몬과 권력의 괴물을 만들어 내고 여전히 인간의 바벨탑을 허물지 않는 지금의 문명과 문화 거짓 된 예언들은 자멸과 함께 심판으로 허물어질 것이다. 30년 후에는 지구상의 환경 난민은 20억을 돌파하게 된다는 미래학자들의 말은 현실화 되고 있다. 핵과 생화학 등의 무서운 무기뿐 아니라 인간의 탐욕적 문화로 허물어져 가는 기후와 각종 환경의 파괴는 이러한 무기들의 괴력을 넘어서고 있다. 3.1 혁명 100 주년을 맞이하지만 여전히 역사를 왜곡한 무리들은 5.18 망언과 함께 발악을 하고 있다. 그 더러운 입들로 국민과 민중을 팔고 자신들의 욕망의 허기를 채우고 있다. 그러나 땅에 뿌려진 생명의 씨앗들은 멸종될 수 없고 멸종 되어서도 안 된다. 바람은 아직도 불어오고 춤추는 나무들이 봄을 만들고 있다. 여전히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있고 허물어진 존재의 터를 회복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 진정한 화해와 용서는 평화를 만드는 주체들로부터 이루어진다. 그리고 어떠한 절망 가운데서도 생명의 존엄과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자들이 곧 역사를 바로 잡는 동력이 된다. 비우고 비워서 채워지는 생명의 발아들이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한반도를 넘고 동북아를 넘어 유라시아 남미와 아프리카 온 세계의 땅 끝까지 그리고 마침내 온 우주 모두에 이르기까지 충만해 지기를 기도한다.
    • 칼럼
    • 통일칼럼
    2019-03-21
  • 3.1혁명 100주년과 한반도의 평화
    우리는 31.혁명 100주년을 맞는 한반도의 대 전환의 카이로스를 맞고 있다. 근자에 일어난 고 김용균 씨의 죽음과 그리고 베트남 하노이에서 있을 북미 2차 정상회담을 앞에 두고 있다. 3.1혁명은 일제의 잔악한 한민족 민중들에 대한 억압과 탄압과 착취에 분노와 저항의 진정한 독립과 생명회복 혁명이었다. 제국주의의 억압과 민중에 대한 압살로서는 지배의 탐욕과 욕망을 성취할 수 없다는 진리에 입각한 증거요 증언자들의 함성을 토해 낸 것이다. 여기에는 민족종교인 대종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들의 한계가 있을 수 없고 다만 불의에 대한 굴종과 비굴함 비겁함의 차이만 있었다. 3.1 혁명은 단순히 몇 사람의 촉발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늘이 인간에게 내린 생명 본질의 폭발이요 보편적 존재 가치의 발로인 것이다. 그것은 누구도 포기할 수 없고 포기해 서는 안 되는 생면근거의 바닥이 억압과 불의의 땅을 뚫고 하늘로 솟구친 하늘과 땅의 일치의 운동이요 하나로부터 시작되는 자연의 큰 움직임 인 것이다. 외세의 침탈과 저항의 씨앗이 무섭게 튀어 오른 것이고 생명의 피를 흘려서라도 지켜야만 하는 모두의 밀알들의 함성이었다. 이러한 인간 역사의 시작 그 이전 태초부터의 힘의 연속으로 민중들의 저항이 물줄기가 동학으로 꽃 피고 3.1혁명으로 역사의 지진을 낳고 제주 4.3민중혁명과 여순 혁명 4.19 혁명과 5.18 민중혁명과 6.10 항쟁 그리고 마침내 2017년의 촛불혁명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제 다시 한민족의 새 생명의 기운이 시작 되어 모든 혁명이 농축된 대 전환이 시작 되었다. 그 누구도 이 새 역사의 대세를 막을 수도 없고 막아서도 안 된다. 혁명이란 역사를 바로 세우는 생명운동이다. 분단을 통해서라도 권력의 야욕을 채우고 군사 쿠테타를 통해서라도 추악한 욕심과 욕구를 담아보려는 불의에 굴복해 서는 안 된다. 우리는 썩을 것에 진리를 값싸게 팔아서는 안 된다. 이와 관련해서 미 제국주의의 탐욕의 행보는 한반도의 73년의 허리를 동강내고 지금까지도 한민족의 운명을 조롱하고 저울질 한다. 이제는 이러한 외세의 두려움을 과감히 끊어 내고 진정한 독립을 이루어야 한다. 독립은 타자를 무시하고 멸시하는 이기적 독립이 아니다. 그것은 진정한 모두의 평화를 만드는 시작인 것이다. 너와 내가 함께 구원의 방주에 들어가고 주언 진 생명들이 꽃을 피우며 풍성한 삶의 행복을 구가하는 것이다. 평화는 타자의 것을 빼앗는 것으로는 이루어질 질 수 없다. 오히려 내가 가진 힘과 물질 뿐 아니라 모든 소유를 개방하고 그들과 공유하는 실천으로부터 시작된다. 베트남 전쟁은 미 제국주의의 탐욕과 그것에 대한 욕구의 들러리가 된 박정희의 야욕이 합쳐진 불행한 전쟁이었다. 그것은 있어서는 안 될 잔악하고 추악한 전쟁 놀음이었다. 32만의 대한민국 젊은이가 고엽제를 맞으며 그들의 생명을 담보로 5천명의 생명이 죽어 갔으며 그들의 전쟁 임금은 박정희에게 착취당하였다. 모택동은 인간의 역사에 있어서 전쟁이란 ‘불가피한 것’이다. 라고 말한바 있다. 신학자 칼. 바르트(K. Barth)가 말했듯이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악의 씨앗’을 가지고 온다. 는 말을 다시 한 번 깊이 새겨야 한다. 우리 속에 있는 더럽고 추악한 각 종 탐욕들을 말씀의 능력과 성력의 능력으로 절제하고 제거할 수 있는 근거의 평화를 만들어 가야 한다. 창조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상품화해서 맘몬과 권력의 괴물을 만들어 내고 여전히 인간의 바벨탑을 허물지 않는 지금의 문명과 문화 거짓 된 예언들은 자멸과 함께 심판으로 허물어질 것이다. 30 년 후이면 지구상의 환경 난민은 20억을 돌파하게 된다는 미래학자들의 말은 현실화 되고 있다. 핵과 생화학 등의 무서운 무기뿐 아니라 인간의 탐욕적 문화로 허물어져 가는 기후와 각종 환경의 파괴는 이러한 무기들의 괴력을 넘어서고 있다. 3.1혁명 100 주년을 맞이하지만 여전히 역사를 왜곡한 무리들은 5.18 망언과 함께 발악을 하고 있다. 그 더러운 입들로 국민과 민중을 팔고 자신들의 욕망의 허기를 채우고 있다. 그러나 땅에 뿌려진 생명의 씨앗들은 멸종될 수 없고 멸종 되어서도 안 된다. 바람은 아직도 불어오고 춤추는 나무들이 봄을 만들고 있다. 여전히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있고 허물어진 존재의 터를 회복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 진정한 화해와 용서는 평화를 만드는 주체들로부터 이루어진다. 그리고 어떠한 절망 가운데서도 생명의 존엄과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자들이 곧 역사를 바로 잡는 동력이 된다. 비우고 비워서 채워지는 생명의 발아들이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한반도를 넘고 동북아를 넘어 유라시아 남미와 아프리카 온 세계의 땅 끝까지 그리고 마침내 온 우주 모두에 이르기까지 충만해 지기를 기도한다.
    • 칼럼
    • 통일칼럼
    2019-02-22
  • 트럼프의 국정연설과 한반도 평화
    2019년 미 대통령 트럼프의 새해 국정연설은 자신의 경제정책에 대한 자화자찬의 잔치였다. 그리고 미 자국의 보호정치 우선정치에 모든 것을 할애하였다. 그의 연설 전반에서 세계의 약소국가들에 대한 배려와 진정한 평화의 진정성은 찾아보기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짤막한 한반도에 관한 언급은 깊은 관심의 대상이었다. 물론 미 자국의 입장에서 자국의 유익을 위한 전제에서 말한 것이라 해도 한반도의 자손으로써 필자에게는 가슴 흔드는 언급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의 역사는 개인뿐 아니라 국가 모두가 각자의 이해관계와 유익에 의해서 갈등하고 싸우고 전쟁을 일삼는 가운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산업혁명의 굴뚝사회를 시작으로 발전 된 자본주의는 자연과 생태계의 오염과 파괴를 자행하여 오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자연환경과 기후의 변화를 가져오고 2050년에는 적어도 20억의 자연 재앙 등으로 인한 환경난민이 발생할 것이라는 미래 학자들의 견해가 만만치 않다. 우리가 믿는 성서와 그 성서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와 교회는 정복의 교리를 중심으로 식민지 시대를 확장해 왔고 개신교탄생의 종교개혁 이후 역시 절대적 희망은 무너진 지 오래이다. 서구 사회는 종교와 함께 이성과 학문을 발전시켜 왔고 동양의 문화는 자연을 중심으로 인간의 삶의 도리를 가르쳐 왔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와 문화는 갈등과 싸움 속에서 서로가 영향을 주고받아 왔고 긍정과 부정을 겪으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로의 지배적 힘을 기르기 위해서 인간의 역사를 한 순간에 파멸시킬 핵무기와 각종 대량 학살무기를 소유하고 있다. 서로가 전쟁을 경계하고 살상을 멀리 하면서도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서는 여전히 대리전쟁을 치르기도 하고 알 수 없는 무기 경쟁을 멈추지 않고 그것들을 부추기는 상황을 연출하기도 한다. 민족분단 70년을 사는 한반도는 분단을 악용하며 사는 친일과 독재 학살세력들과 이 세력들을 극복하려는 민중들의 몸부림의 세력들이 고투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의 기독교와 교회들은 어떤 존재들인가? 바로 그러한 거짓 된 세력들과 함께 어우러져 더 타락한 역사를 만드는 주체처럼 앞장서고 있다. 인간 각자 실존들 죄의 타락과 함께 역사적이고 제도적이며 구조적인 악의 뿌리는 더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오늘 트럼프는 2월 27-28일 이틀 동안 베트남에서 북미 2차 정상회담을 공적으로 발표하였다. 북미 정상회담의 세부적인 사항들을 조율하기 위해서 스티브 비건이 평양을 방문하여 김혁철과 함께 회담을 진행하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과 좋은 관계이며 잘 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다고 말하고 있다. 북은 종전선언과 경제재제 해제를 바라고 있고 미국은 북에 대하여 완전한 비핵화를 요구하고 있다. 서로가 주고받는 협상이 간단치가 않고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장과 불안의 삶, 전쟁의 소리와 분단의 아픔과 연속적인 갈등, 이 분단의 고리를 끊고 잘린 허리가 제 기능을 되기를 바라고 있다. 촛불정부 아래서 여야의 공방들은 들끓고 있다. 그동안의 적폐들을 만들어 온 세력들의 억지와 생떼, 간교한 정치적 술수들이 남북의 평화의 길목의 발목을 잡는 다. 그러나 역사의 대세와 물결을 막지는 못할 것이고 평화를 갈구하는 민중들의 소원을 약화시킬 수 없을 것이다. 인간들의 첫 째 욕구는 의식주 그중에서도 배고픔을 면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진정한 행복을 완성할 수 없다. 문화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희망은 나와 너가 함께 행복을 구가하는 것이다. 한반도의 평화의 과정은 이미 시작되었고 분단 종식의 선언도 출발되었다. 함께 먹고 마시며, 춤추고 모임을 갖고 노래하며 미래를 창조해야 할 것이다. 어린이는 어린이대로 청소년과 청장년은 그들대로, 나이 먹은 사람들은 나이 먹은 사람들대로 만나고 함께 더불어 먹고 마시며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다. 정상들끼리 만나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교류의 열매를 맺기는 어렵다. 남북의 민중들이 만나야 한다. 각 분야의 민중들의 활발하고 자유로운 왕래를 통해서 분단은 극복되고 쌓였던 갈등과 분열의 상처들이 치유될 수가 있다. 역사적 예수가 이 땅에 와서 선포한 것은 여러 모순들과 죄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 생명의 복음과 평화를 만들어 갈 것을 강조한 것이다. 평화는 모든 악의 세력과 흑암 권세들을 물리치고 타락하고 탐욕에 빠진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구원의 길을 선포한 것이다. 이 번 베트남에서의 2차 북미 정상회담이 봄이 오는 계절과 함께 한반도의 역사의 봄이 열리는 사건이 되기를 기도한다.
    • 칼럼
    • 통일칼럼
    2019-02-14
  • 성서의 평화, 한반도의 평화
    성서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기록되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성서는 창세기를 통해서 우주만물이 창조와 창조의 목적 ‘창조의 꽃’이라 불리는 사람의 창조가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언급되고 있다. 창세기는 또한 인간의 타락과 원죄 하나님의 비를 통한 심판을 말한다. 그리고 창세기 12장에서부터 등장하는 아브라함의 메소포타미아의 그의 고향 우르를 떠나서 하란에 도착한 이야기, 그의 아들 이삭과 손자 야곱 이름 하여 3대 족장의 이야기, 그리고 야곱이 이스라엘의 이름을 얻어 12 아들을 얻은 이야기 특히 요셉의 이집트로의 이주와 그곳에서의 드라마 같은 이야기를 싣고 있다. 성서는 단순히 이스라엘이라는 지리적 한계에 국한 시키는 한 민족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류의 시작과 삶의 목적 가치 등으로 이해되기 시작한 역사 이전부터 오늘과 다가올 완성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이러한 성서의 이야기는 그런데 단순히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과 그들의 모순들을 피해 가지 않고 적나라한 모든 모습들을 이야기 하고 있다. 사람들의 나약함과 허물들, 질투와 시기, 탐욕과 죄의 연속, 질병과 전쟁, 죽음과 정의와 사랑들을 빼놓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기록하고 있다. 성서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람들의 삶의 모든 안가 밖을 이야기 한다. 지금까지가 구약성어의 이야기라면 역사적 예수가 온 이후의 이야기는 사람들의 생각과 이해를 넘어서는 이야기들로 신묘막측(辛卯幕側)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야기 한다. 하나님을 체험한 느낌은 ‘두려움과 떨림, 신비’의 세계가 펼쳐진다. 우리는 그분 앞에서 죄에 대해서는 두려움과 떨리는 마음으로 서게 된다. 사람의 이성과 학문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세계를 보게 되는 것이다. 구약에서의 평화는 서로의 싸움과 전쟁을 그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고 꿈꾸게 된다. 이집트로부터 해방을 얻은 이스라엘민족은 200년간 부족동맹체로 평등과 정의를 중심의 가치로 살았다. 사람이 사람을 지배하거나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평등과 자유 그리고 정의가 이루어지는 사회를 산 것이다. 그러다가 사울을 시작으로 왕정이 들어서고 전쟁과 정복의 다윗 왕을 거쳐서 그의 아들 솔로몬 때에는 경제가 가장 풍성한 경제대국을 이루기도 하였다.솔로몬의 화려한 부귀영화와 튼튼한 외교 풍부한 경제가 과연 평화를 이루었는가? 이러한 부는 나라가 분단되고 마침내는 이스라엘이 지구에서 2천 년 동안 사라지는 떠돌이 역사를 살게 된다. 지금의 세계는 맘몬의 신에 붙잡혀서 물질과 자본의 강한 힘의 울타리에 갇히게 되었다. 지구의 남북의 양극화와 한반도의 남북의 부의 차이와 대한민국에서의 재벌중심의 경제 안에서의 골 깊은 양극화 여기에 평화는 부재하다. 평화의 선전은 하나의 있는 자들의 없는 자에 대한 이데올로기에 불과 하고 위선적인 껍데기에 불과하다. 평화는 전쟁이 없는 곳에서 시작된다. 평화의 완성은 차별과 차이가 없는 평등과 자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곳에서 되어 진다. 평화는 거짓이 판을 치고 위선적이며 불의가 홍수처럼 넘치는 곳에서는 생성되지 않는다. 예수의 평화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면서 시작된다. 하나님의 때 카이로스가 시작 되었으니 너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가? 무슨 죄를 고백하고 어떤 잘못 된 삶의 방향으로부터 뒤돌아서야 하는가? 하나님의 때가 시작 되었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사람들이 자기 멋대로 산역사는 심판을 받아야 하고 자기가 가던 방향으로부터 완전히 돌아서야 한다. 불의와 부패에 길들여지고 강자에 아부하고 아첨하며 약한 자를 멸시하고 천대하며 살 던 잘못 된 죄의 삶을 청산하고 돌아서야 한다. 나와 나만의 가정, 나만의 기업, 나만의 국가 외에 다른 것들이 죽어가는 것에 무관심하고 오히려 그들을 짓밟는 잔악하고 살벌한 승자독식이나 약육강식의 정글의 법칙을 고집하던 것들로부터 돌아서야 한다. 여기서부터 비로소 평화는 시작된다. 평화는 과거의 역사를 잊는 것이 아니라 그 역사들로부터 교훈을 얻어 다시는 그러한 삶을 되풀이 하지 않는 자각과 깨달음을 얻어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다. 지금도 우리의 평화를 가로막는 악의 세력들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다. 미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과 러시아 등 4대강국들의 이해관계와 남북한의 차이들, 더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 속에 잔존하는 친일세력과 독재, 학살 세력들을 물리쳐야 한다. 하나님의 평화를 훔쳐서 거짓 평화를 말하는 세력들의 악한 전략과 생각들을 분쇄해야 한다. 한반도의 평화는 입으로만 되지 않는다. 정신 차려야 한다.
    • 칼럼
    • 통일칼럼
    2019-01-31
  • 평화의 노래
    구약성서의 샬롬(shalom)을 우리는 ‘평화’라고 이해한다. 2018년 한반도의 노래는 평화가 중심을 이루었다. 독일 통일의 예를 들어 많은 사람들은 통일보다는 선 평일을 주창하고 통일은 후음으로 말하고자 하였다. 평화가 지속된다면 통일은 따라올 것이고 동시에 통일이 온다면 평화는 지속될 것이다. 구약성서에서 샬롬은 482회나 출현하고 그것의 동사인 샬렘(shalem-완전하게하다)는 103회가 나타난다. 명사 샬롬은 237회 셀렘(shalem-화목제)87회 19회 형용사 샬렘(shalem-완전한)은 36회가 표현된다. 샬롬은 사전적 의미로는 완전, 건전, 복지, 평화 등으로 이해된다. 야웨(하나님)가 다스리는 가운데 그가 정의를 요구하며 그러한 정의의 열매가 곧 샬롬인 것이다. 이로한 평화의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과 진실이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춘다.(시 85:10) 의로운 열매가 곧 평화요 그의 결실이 영원한 평안을 주는 안전을 유지케 하는 것이다. 이러한 평화는 혼자의 독주가 아닌 조화이며 이웃과의 아름다운 사랑의 관계 속의 조화를 살게 하는 것이고 이기적이고 독선적이고 독점과 독재를 온전히 극복한 공동체를 지키는 중심의 힘인 것이다. 정치의 독재와 경제의 독점, 사상의 독단의 진정한 샬롬과 평화를 이룰 수 없다. 정의는 올바른 관계를 유지케 하는 것으로 사랑과 함께 약방의 감초와 같다. 감초의 성분은 모든 약제에 들어 있는 독성을 중화 시키고 각자의 약 성질이 흩어지고자 하는 것을 한 곳에 모아서 병을 치료하는 약의 효능을 온전하게 발휘하도록 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약방의 감초인 것이다. 우리가 성서의 하나님을 알고 치유와 고침을 선포하고 행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의 삶을 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써 이 세상의 감초가 되어야 한다. 평화를 알고 평화를 만들며 평화를 행동으로 구체화 시키는 평화의 실천자들은 독재와 독점 독선의 삼독을 가장 경계하고 멀리한다. 예수는 평화를 만드는 자가 되라고 하신다. 또한 평화보다는 검을 주러 왔다고도 말씀 하신다. 전자는 소극적 의미의 평화라면 후자는 보다 더 적극적인 의미에서 평화를 위하여 정의의 검을 통해서 평화를 만들어 가는 의미의 평화를 말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불의와 거짓 된 평화를 중지시키고 너와 내가 더불어 잘 사는 진정한 평화를 위한 삶의 실천을 말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오늘의 남북은 이런 점에서 진정한 평화가 성취된 상황이 되지 못한다. 아직도 분단의 깊은 골들과 전쟁의 흔적들이 도처에 상존해 있고 온전한 독립을 이루지 못한 외세가 평화의 길을 방해하고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사회는 수출 6000억 달러를 자랑 하듯이 말하고 있지만 박정희 때부터 추구해온 수출주도정책은 농민과 노동자 민중들의 생명을 담보로 억압과 착취를 통해서 이루어져 온 재벌중심의 추악한 결과물일 뿐이다. 이러한 수출의 결과는 메울 수 없는 경제적 사회적 양극화를 이루고 다국적 자본과 외세 그리고 재벌 자본을 중심으로 여전히 민중들의 삶을 삶의 주변으로 내몰고 억압하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이것은 성서와 예수가 말하는 평화의 시작도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자본권력과 그 자본을 양산하는 거짓 평화를 말하는 권력의 속성들에 아부와 아첨을 하며 공생과 기생하는 종교와 교회들의 존재를 무의미 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정한 평화의 시작을 정의에 입각해서 바르게 실천해야 한다. 재벌과 다국적 초국적 기업 그리고 그 자본에 기대여 권력을 잡고 있는 거짓되고 위장된 세력들에게서 평화를 기대할 수는 없다. 평화는 소수만의 독점 속에서 부르는 노래가 되어서는 안 된다. 여전히 열악한 노동의 현장에서 삶을 마쳐야 하는 노동자들과 땀의 대가도 받지 못하는 농민들의 아픔과 상처가 치유되지 못하는 현실에서 평화는 없다. 외세에 의존해서 권력을 보존하려는 매국적 정치인들에게서 평화를 찾고자 하는 것은 우물에서 숭늉을 찾는 일과 같다. 노동의 현장과 매일 매일 삶의 고달픈 민중의 허약한 삶의 터전을 외면하고서 평화는 오지 않는다.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전쟁은 당연히 억제 되어야 하고 보다 더 온전한 삶의 회복이 이루어 질 때 평화의 노래는 그 가치를 빛나게 될 것이다. 일제로부터 시작된 사할린의 동포들과 세계에 흩어진 민족들의 동족들에게 진정한 평화가 오며 남북의 이산가족의 온전한 회복과 치유를 통해서 사법부와 검찰 경찰 등 이 사회의 크고 작은 권력들에게 억압을 당한 민중들의 억울함과 한이 풀어지는 곳에서 진정한 평화의 노래는 불리어 지게 되는 것이다. 이 새해에는 약자와 없는 자들의 쌓인 억울함이 풀어지는 모두의 평화의 노래가 있기를 기도한다.
    • 칼럼
    • 통일칼럼
    2019-01-17
  • 평화의 노래
    구약성서의 샬롬(shalom)을 우리는 평화라고 이해한다. 2018년 한반도의 노래는 평화가 중심을 이루었다. 독일 통일의 예를 들어 많은 사람들은 통일보다는 선 평일을 주창하고 통일은 후음으로 말하고자 하였다. 평화가 지속된다면 통일은 따라올 것이고 동시에 통일이 온다면 평화는 지속될 것이다. 구약성서에서 샬롬은 482회나 출현하고 그것의 동사인 샬렘(shalem-완전하게하다)는 103회가 나타난다. 명사 샬롬은 237회 셀렘(shalem-화목제)87회 19회 형용사 샬렘(shalem-완전한)은 36회가 표현된다. 샬롬은 사전적 의미로는 완전, 건전, 복지, 평화 등으로 이해된다. 수학의 안전과 신체의 안전, 건전을 말하고, 행복과 번영, 육체적 건강과 평화, 평온, 만족을 나타낸다. 평화 또한 우정과 조화 또는 함께 사는 올바른 인간관계를 나타낸다. 그것은 동시에 전쟁을 억제하고 양자 사이에 맺는 평화의 관계를 말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과의 간계 계약관계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평화의 언약(brit shlomi)을 파기하지 않는 하나님과의 약속의 언약을 말하는 것이다. 야웨(하나님)가 다스리는 가운데 그가 정의를 요구하며 그러한 정의의 열매가 곧 샬롬 인 것이다. 이로한 평화의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과 진실이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춘다.(시 85:10) 의로운 열매가 곧 평화요 그의 결실이 영원한 평안을 주는 안전을 유지케 하는 것이다. 이러한 평화는 혼자의 독주가 아닌 조화이며 이웃과의 아름다운 사랑의 관계 속의 조화를 살게 하는 것이고 이기적이고 독선적이고 독점과 독재를 온전히 극복한 공동체를 지키는 중심의 힘인 것이다. 정치의 독재와 경제의 독점, 사상의 독단의 진정한 샬롬과 평화를 이룰 수 없다. 정의는 올바른 관계를 유지케 하는 것으로 사랑과 함께 약방의 감초와 같다. 감초의 성분은 모든 약제에 들어 있는 독성을 중화 시키고 각자의 약 성질이 흩어지고자 하는 것을 한 곳에 모아서 병을 치료하는 약의 효능을 온전하게 발휘하도록 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약방의 감초인 것이다. 우리가 성서의 하나님을 알고 치유와 고침을 선포하고 행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의 삶을 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써 이 세상의 감초가 되어야 한다. 평화를 알고 평화를 만들며 평화를 행동으로 구체화 시키는 평화의 실천자들은 독재와 독점 독선의 삼독을 가장 경계하고 멀리한다. 예수는 평화를 만드는 자가 되라고 하신다. 또한 평화보다는 검을 주러 왔다고도 말씀 하신다. 전자는 소극적 의미의 평화라면 후자는 보다 더 적극적인 의미에서 평화를 위하여 정의의 검을 통해서 평화를 만들어 가는 의미의 평화를 말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불의와 거짓 된 평화를 중지시키고 너와 내가 더불어 잘 사는 진정한 평화를 위한 삶의 실천을 말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오늘의 남북은 이런 점에서 진정한 평화가 성취된 상황이 되지 못한다. 아직도 분단의 깊은 골들과 전쟁의 흔적들이 도처에 상존해 있고 온전한 독립을 이루지 못한 외세가 평화의 길을 방해하고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사회는 수출 6000억 달러를 자랑 하듯이 말하고 있지만 박정희 때부터 추구해온 수출주도정책은 농민과 노동자 민중들의 생명을 담보로 억압과 착취를 통해서 이루어져 온 재벌중심의 추악한 결과물일 뿐이다. 이러한 수출의 결과는 메울 수 없는 경제적 사회적 양극화를 이루고 다국적 자본과 외세 그리고 재벌 자본을 중심으로 여전히 민중들의 삶을 삶의 주변으로 내몰고 억압하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여전히 열악한 노동의 현장에서 삶을 마쳐야 하는 노동자들과 땀의 대가도 받지 못하는 농민들의 아픔과 상처가 치유되지 못하는 현실에서 평화는 없다. 외세에 의존해서 권력을 보존하려는 매국적 정치인들에게서 평화를 찾고자 하는 것은 우물에서 숭늉을 찾는 일과 같다. 노동의 현장과 매일 매일 삶의 고달픈 민중의 허약한 삶의 터전을 외면하고서 평화는 오지 않는다.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전쟁은 당연히 억제 되어야 하고 보다 더 온전한 삶의 회복이 이루어 질 때 평화의 노래는 그 가치를 빛나게 될 것이다. 일제로부터 시작된 사할린의 동포들과 세계에 흩어진 민족들의 동족들에게 진정한 평화가 오며 남북의 이산가족의 온전한 회복과 치유를 통해서 사법부와 검찰 경찰 등 이 사회의 크고 작은 권력들에게 억압을 당한 민중들의 억울함과 한이 풀어지는 곳에서 진정한 평화의 노래는 불리어 지게 되는 것이다. 이 새 해에는 약자와 없는 자들의 쌓인 억울함이 풀어지는 모두의 평화의 노래가 있기를 기도한다.
    • 칼럼
    • 통일칼럼
    2019-01-03
  • 국가보안법과 통일의 길
    역사적으로 국가보안법의 시작은 일제 때부터이다. 소위 불경선인들을 체포 억압과 고문을 하려는 독립운동에 대한 탄압의 일환으로 시작 된 것이다. 분단 이후 좌익 탄압과 제거를 위한 것으로 심화 확대 되었고 특히 찬양 고무 죄 등을 악용한 것 등은 최악의 법적 죄로 남아 있다. 국가보안법 “제8조는 국가의 존립. 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情을 알면서 반국가단체의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와 회합, 통신 기타의 방법으로 연락을 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한반도의 평화 진전을 위한 새로운 역사적 현실 속에서 이러한 법의 존재는 모순일 뿐 아니라 소통과 교류를 막는 악법이 아닐 수 없다. 국가기밀을 누설한 죄가 아니라면 일상적인 회합이나 소통의 과정까지를 간첩 등으로 몰아서 처벌하고 신체가 억압 되는 것은 평화를 가로 막는 것이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 불의한 권력과 정권에 대한 순수한 비판까지를 반국가단체로 몰아가는 것은 권력유지를 위한 억압적 악법이 되는 것이다. 1948년 12.1일 전문 6조와 부칙으로 구성되어 출발하여 남로당과 지하조직의 좌익 탄압을 목적으로 시작되고 1949년 1.19일 법률 85호의 전면개정 및 제128호가 1950.4.21.일 개정되었으며, 1958.12.26.일 전면개정이 있었다. 개정된 전문 3장 40조와 부칙으로 제 3차 개정된 주요 내용은 본법의 목적(제1조)와 함께 그 적용과 해석에 있어서 국민의 구널리와 자유가 부당하게 제한되는 것, 주의규정을 두었었다. 동시에 국가기밀과 적의 개념 정의 규정(제4조와 5조)를 두고 제2조(죄의 형)에서 개정 전의 처벌규정을 재정일하면서 이적목적의 국가기밀 탐지. 수집. 누설 등의 죄(제11조 내지 14조)와 외국이나 북한지역 등의 불법왕래 잠입 등의 죄 (제 19조) 미수 및 예비. 음모죄(제28조) 및 필요적 몰수. 추징과 자격규정의 병과규정(제30조) 등을 신설하고, 제 3장의 특별형사 소송규정에서 보석허가 결정 및 구속적부심에 으한 석방결정에 대한 즉시 항고(제33조, 제 35조), 참고인의 구인. 유치(제34조), 사법경찰관의 구속기간의 연장(제36조), 증거능력의 확대인정(제37조), 법원 구속기간의 갱신(제38조), 공소보류(제39조), 및 군 정보기관의 본법을 위반한 일반인에 대한 수사권 인정(제40조) 제도 등을 신설한 것이다. 이러한 법 개정은 소위 6.25 민족세계전쟁의 냉전 전쟁이 있은 후에 변경 강화 된 것이다. 이후 1960. 6.10, 4.19 이후 정치적 상황에 따라 국가 보안법을 전문 2장 16조 및 부칙으로 전면 개정 하였다. 주요 내용은 반국가단체 구성원 등의 목적수행 죄를‘군사목적’과 ‘일반목적’으로 구분하여 조정하며(제2조, 제3조) 불고지죄를 신설(제9조)한 것 등이다. 5.16 군사쿠테타 이후에는 국가보안법을 보충한다는 의미에서 반공체제를 강화하기 위해서 전문 11조 및 부칙으로 된 반공법을 제정하게 된다. 주요 내용은 반공법反共法의 목적을 공산계열의 활동을 봉쇄하여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자율 확보를 위하여 반공체제를 강화하는 것으로 규정하고(제1조), 반국가단체에 가입. 가입권유(제3조), 반국가단체나 구 구성원이 활동에 대한 찬양. 고무. 동조 등과 이적단체의 구성. 가입 및 이적표현물의 표현물의 제작 등 (제4조), 반국가단체 구성원과의 회합. 통신. 금품수수(제5조), 불법지역에로의 탈출. 잠입(제 6조), 편의제공(제 7조) 및 불고지(제 8조) 등을 규제하는 것 등이다. 이러한 국가 보안법의 통합국가보안법은 1980년 12월 31일 전면 개정을 보게 된다. 주안점은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의 중복 유사점을 조정 불가피 하고, 냉전체제로부터 화해와 유화 국면에 대한 현실적 적용, 1972년, 7월 4일의 ‘남북의 자주적 통일방안 모색의 남북 7.4 공동성명)의 발표와 1973년이 남북긴장완화, 6.23 선언 등의 평화통일 외교정책 등의 남북 상황 지향점의 새로운 인식 등이 그것이다.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국가 안보의 관점에서 법은 지켜지고 운영 되어야 함은 마땅하다. 문제는 이러한 법의 원칙과 철학을 외면하고 남북의 분단 상황을 악용하여 안보 팔이 정권유지를 통하여 죄 없는 국민과 민중을 억압, 탄압하며, 생명을 빼앗는 악법으로 이용되어 왔음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이제 한반도의 상황은 진정한 소통과 교류를 통한 평화와 통일의 길로 빠르게 나아가고 있고 북의 비핵화와 북미의 수교가 이야기 되고 종교가 금지된 나라에 교황의 방북이 강하게 거론되고 있다. 단순한 남북의 평화와 통일이 아니라 미중러일의 4대 강국뿐 아니라 세계가 마지막 냉전 체제가 무너지고 진정한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를 통하여 세계 평화를 기대하는 바이다.
    • 칼럼
    • 통일칼럼
    2018-12-21
  • 다름을 인정할 때 통일이 찾아온다
    우리는 일제치하를 넘어 광복과 해방을 맞이하였다. 그리고 바로 그때 분단은 시작되었다. 그 세월이 70여 년이 지나가고 있다. 남북 당국은 조선민주주의공화국으로 남은 미군정과 본토의 지지를 통한 이승만의 분단국가 가 세워졌다. 그리고 5년이 되던 때에 미국이 남한을 태평양 방위전선에서 배제하면서 소련과 중국 등의 지지아래 민족세계전쟁(6.25)을 겪게 된다. 남북은 초토화 되고 수많은 사람들의 살상과 전쟁 중 양민들의 학살이 자행되었다. 부상자들과 부모를 잃은 고아들이 거리를 메우고 이들이 사람 수출로 일컬어지는 전쟁 입양아들은 세계로 흩어져야 했다. 1904-5년의 청일 러일전쟁이 외부 세력들에 의해서 한반도는 대리전쟁 터가 되었고 침략으로 얽혀진 민족의 삶의 현장은 억울한 울부짖음과 한의 계곡이 된 것이다.우리는 절대로 독립국가가 아니고 지금도 미국의 허락이나 승인이 없으면 평화와 통일의 길을 협박 받는 슬픈 역사를 살고 있다. 경제 양극화는 오늘도 민중들의 고통을 깊고 확대 재생산 하고 있다. 저출산과 고령화의 빈곤은 이러한 독재정치와 분단 상황에서 강요된 독단의 사상과 경제의 독점들의 악한 구조가 우리의 숨통을 조이고 있는 것이다. 이념과 사상뿐 아니라 우리의 삶의 모든 것들이 다른 것으로 오랜 비바람을 맞고 왔다. 겉으로는 같은 것 같지만 다름으로 꽉 차 있다. 생각고 현실, 희망과 전망들이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세계 어떤 민족들이 갖고 있지 않는 같은 말과 언어 문화가 있다. 긴 세월 다른 것들의 두꺼운 껍질이 있지만 이 모든 것을 벗겨 낼 생명의 씨앗들이 있는 것이다. 사람의 본질 속에 있는 소유와 탐욕들이 있고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의 평화와 통일의 길을 중단할 수도 없고 멈출 수가 없다. 미국의 패권과 압박이 있고 미중의 무역전쟁과 패권 다툼이 있다. 또한 일본의 검은 속셈이 있고 군국주의 부활의 음모가 있다. 동시에 러시아의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여러 가지 상황들이 존재한다. 미중러일 4대 강국이 한반도의 이익을 둘러싸고 있는 복잡한 속내들이 있지만 그러나 이러한 모든 현상과 현실들을 극복하고 우리가 갈 길을 가야하는 것이다. 만물의 창조는 너무도 다르다. 종과 과가 다르고 존재의 가치와 의미들도 다르다. 사람들의 생김새가 얼마나 다르고 사물의 인식이나 가치관 들이 다른가? 민족과 언어가 다르고 그들의 역사와 문화가 전혀 다르다. 그들이 추는 춤이 다르고 노래도 다르다. 각자의 고통도 다르고 그들이 겪는 고난도 다르다. 그들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다르고 철학이 다르다. 남과 북은 본래 하나의 문화와 언어를 가지고 살아 왔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동질성을 깊이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지가 끝이 나고 소위 해방과 광복이 찾아오는 순가 미소의 냉전체제의 덫에 걸려서 북한은 공산 사회주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고 남은 미군정과 짝을 지은 대한민국의 반쪽 국가가 세워졌다. 마침내 이러한 분단은 민족상잔의 민족 세계전쟁을 경험하고 그 이후 분단 70년을 살고 있다남북의 분단의 역사와 문화와 언어를 오랫동안 공유해 왔지만 분단과 전쟁을 겪고 70년의 오랜 세월 속에서 서로 다른 생각고 이념, 체제 속에서 깊은 이질적 존재들이 자리 잡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현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역사적 뼈 속에 깃들여 있는 한민족 한핏줄의 동질성을 부인하지 못한다. 창조물은 무수히 많다. 그럼에도 모두가 다르다. 그 모든 것들이 함께 존재하며 세상을 이루고 공존한다. 모든 피조물들이 다름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데 유독 사람이라는 존재들만 다름을 인정하려 들지 않고 이기주의와 자기중심의 탐욕과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조회를 이루고 함께 더불어 평화롭게 살기를 말하고 있다. 심지어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아들까지를 내어주어서 진정한 평화의 삶을 구가하기를 원하고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서로의 다름을 부정하며 탐욕과 전쟁과 싸움 독재와 독점, 독단을 중단하지 않는다. 이러한 것은 평화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파괴하는 악의 근본이다. 자연과 역사의 평화의 삶은 다른 피조물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떠난 사람들의 탐욕에서부터 시작되어 굳어진다. 모든 것이 자기를 이해하기를 바란다. 나와 너가 함께 더불어 살기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것은 평화를 부정하는 악이다. 남북의 평화를 이루고 종국으로 통일을 이루려면 서로 다름이 존재하는 것은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이러한 다름의 조화를 이루어 함께 더불어 집을 지어가야 한다. 평화와 통일은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시작됨을 명심해야 한다.
    • 칼럼
    • 통일칼럼
    2018-12-14
  • 김정은 위원장의 남한 답방
    한반도 평화 통일의 길은 녹녹치가 않다. 일제의 잔재들과 분단의 강대국들의 자국에 대한 이해관계를 통한 동북아의 패권 다툼의 속내들이 복잡하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미국의 남한 주둔 70년의 세월은 그들 자국에 대한 이익의 손을 놓기가 매우 어려운 형국인 것이다. 대한민국이 미군 주둔 기지 세계 최대이고, 미국의 방산 업체들의 최고의 고갱이며, 한반도를 둘러 싼 동북아의 세계 패권 전략의 가장 중심 기지라는 점 등이 그것이다. 분단과 민족 세계전쟁(6.25)을 통해서 모택동의 중국공산당의 유익을 구축하고 미국의 경제공항 이후의 새로운 경제도약의 발판이 되었으며, 패전국이었던 일본의 경제가 다시 살아났다. 한반도의 전 국토는 초토화 되었으며, 400만의 전쟁 살인과 천만의 이산가족, 그리고 수백만의 전쟁고아들이 생겨나서 국내외로 충당되었다. 이러한 전쟁으로 인하여 16개국의 참전 국 젊은이들이 희생되었으며 53개 국 수많은 나라들이 후방 지원 등으로 전쟁에 대한 피로와 공포를 느껴야 했다.이승만의 터무니없는 북진통일론의 망상과 함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남조선 해방의 통일 전선과 전략들이 엉키고 뒤 섞기는 가운데 미소와 중일 등의 속셈들과 맞아 떨어진 참혹한 전쟁 놀음이 한반도를 황폐시킨 것이다. 북침이냐 혹은 남침이냐 혹은 유도설이냐 등의 추후 전쟁원이 규명들은 아직도 뜨겁다. 그러나 이미 전쟁은 수없는 상처를 안겨 주고 분단의 영구화 내지는 고착화를 이루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이제 이런 분단의 비극과 상처들을 아물게 하려는 나름의 기회가 왔다. 그런데 이러한 평화와 통일의 길을 방해 하려는 반통일 세력들이 자기 울타리를 강화 하려고 몸부림 한다. 이러한 평화와 통일의 훼방 세력들은 안팎으로 우글거린다. 일제와 독재와 학살 세력들, 자국의 이익과 패권을 놓지 않으려는 주변 강대국, 특히 미국의 속셈이 가장 무섭고도 위협적이다. 인간들이 살아가는 가장 첫 번째의 방어적 움직임은 자기 혈족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다. 다음은 자신들이 소유인 공동체나 집단 혹은 자기 이익 영역이다. 이것을 양보하거나 손을 놓는 일은 죽기보다도 싫은 것이다. 미국은 북의 무조건적 완전한 비핵화를 강력하게 요구하면서 북에 대한 각종 재재는 더욱 강도 높게 하고 있다. 강대국의 오만과 약소국의 자존감의 파멸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사실 북이 핵을 갖기 오래 전에 이미 한반도에는 핵우산이라는 이름하에 미국의 핵무기가 많은 양이 존재해 있었다. 소비에트공화국이 붕괴되고 동유럽이 무너지며, 공산권이 와해되는 과정에서 북한은 자신들의 생존 자체가 의심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력들은 북한이 스스로 자멸하거나 외부의 힘에 터전이 상실되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박정희는 우리가 다 아는 바, 핵무기를 만들려고 1000명의 학자들을 연구자로 세웠고 전두환의 12.12 사태 이후로 정통성을 인정받으려는 조건으로 한국에 대한 미국의 핵무기 생산 연구를 초기화 시키는 요구를 수용하였다. 어째든 북한은 이러한 새로운 세계 질서가 재편 되는 상황에서 그들 자신의 생사 여부를 책임지는 일환 등으로 핵무기 개발 정책을 시도하고 지금까지 달려 온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바대로 핵 강국 미러와 프영과 인도 파키스탄 중국 이스라엘 등 세계 여러 나라들이 핵을 보유하고 있다. 일본 역시 상황 만 되면 핵무기 생산을 언제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한반도는 남북 모두가 비핵화를 소망하고 평화를 소원한다. 현대 세계 전쟁의 주국을 보면 거의가 강대국이 주도한 것을 본다. 이유로는 여러 가지가 있다. 폭력의 시작은 대개의 경우 힘 있는 강자들의 전유물이다. 거대 글로벌 자본과 강대국들의 권력의 야합이 여러 가지 이유들을 만들어 무자비하게 살상을 멈추지 않고 있다. 때로는 정의의 이름을 앞세우고 때로는 창조주와 예수 그리스도 의 사랑까지도 상품화 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사이비와 이단들은 이것들의 빌미로 정통에 도전하며 악을 행한다. 어쨋든 한반도의 종전선언이 속히 이루어지고 영구적인 평화협정이 체결되며 마침내는 평화적인 민족의 통일의 열매가 있기를 기도한다. 이것을 위해서 김정은 위원장의 년 내 남한 답방이 속히 성사되며 이후에 내년 초의 2차 북미 정상회담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이다. 경고해 두건대 이러한 8천 만 민족의 소원을 방해 하고 짓밟는 세력들은 역사가 끝난 후에도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다.
    • 칼럼
    • 통일칼럼
    2018-11-30
  • 통일의 길, 십자가의 길
    성서가 말하는 복음은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들이 살고 있는 하늘에서 낮고 낮은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그것을 신학적 용어로 성육신(Incarnation) 사건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낮은 땅에 오신 목적은 구원이다.(Salvation of human and nature=Universal)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 길은 방향이요, 진리는 본질이며, 생명은 목적이다. 예수의 삶의 요약은 첫 째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선포요, 악의 세력을 추방하는 일이며, 병든 자를 치유하는 일이고, 말씀을 통해서 제자를 삼는 교육과 훈련을 통하여 썩고 병들고 죽은 생명들과 역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회복해 가는 일이다. 소위 보수적인 교회들은 개인과 영혼의 구원을 말하고 진조적인 교회는 개인과 실존의 온전한 구원을 위해서는 사회와 역사적인 구조악과 불의와 부패 비리가 만연한 사회를 하나님의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전인적(영혼과 역사, 개인과 사회)구원을 강조한다. 성서는 에덴동산(기쁨의 동산)에 있는 선악과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그 열매를 따 먹은 불순종을 원죄로 규정한다. 칼 바르트는 어거스틴, 칼빈과 함께 인간의 ‘전적타락’을 말하고 인간의 원죄를 인정한다. 그는 아기 역시 “악의 씨앗”을 가지고 태어난다. 하였다. 바울과 함께 어기스틴, 이후 루터, 칼빈과 바르트의 소위 개혁정통교회(Church of Reformed)는 성서의 원죄를 인정하고 있다. (루터교회는 개혁교회 와는 교회사적으로 구별하긴 하지만) 우리는 교회사적으로 초대 교회 이후, 주후 325년 니케아 회의 이래로 로마의 콘스탄틴의 기독교 공인 후의 기독교와 교회의 타락, 특히 중세(5세기부터 15세기 종교개혁 이전까지)까지의 타락한 교회를 말한다. 권력과 자본의 결탁에 의한 성직자의 매매와 독점, 교회 안의 성적 폭력과 인간들의 거룩의 위선된 이중적 현상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러나 루터와 쯔빙글리, 칼빈의 종교개혁 이후 자본주의 파묻혀 심지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들의 탐욕과 쾌락의 도구로 삼아서 신을 상품화 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들을 무엇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여러 가지 복잡한 세계사들 속에서 우리가 사는 한반도의 역사적 상황과 소위 분단 극복의 평화 프로세스는 무엇을 의미 하는가? 성서가 말하는 구원의 복음을 교회는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교회가 권력과 자본에 아부와 아첨, 혹은 공생과 기생을 해 오면서 분단을 매개로 한 거짓 된 종교적 행위로 밥벌이를 해 왔다. 과연 한반도에서의 성서가 말하는 구원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들 각각의 개인적 실존과 한반도에서 온전한 구원을 방해하는 악의 세력은 무엇인가? 그 실체들을 명확히 밝혀내고 그것들의 복음의 능력으로 추방해야 한다. 얼마나 물질과 황금을 쌓아야 탐욕의 창고를 채울 수가 있는가? 얼마나 화려한 교회당을 가져야 하나님나라의 평화를 누릴 수가 있는가? 성서는 노아의 홍수를 말해 준다. 우주적 파멸과 물로써 지구의 종말은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핵전쟁과 무서운 살상무기들, 자연과 생태계의 파괴, 하천과 바다 강의 오염, 미세먼지와 지구 온난화 이 모든 인간의 욕망의 결과로 빚어진 재앙들을 인간의 이성과 학문을 통해서 극복할 수는 있는가? 인공지능의 소위 4차 산업까지의 모든 정보를 독점하는( 예. 구글) 세력들에 의해서 세계의 민중들을 거짓된 삶의 노예가 되어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반도의 평화의 완성은 결코 쉬지 않은 길이다. 미국을 축으로 하는 중국과 일본 러시아, 유럽 등 그들 자국의 이익과 이해관계의 그물망에서 빠져 나오기가 쉽지 않다. 물론 그 주범은 미국이다. 아니 중국도 될 수 있고 우리의 희망을 짓밟고 질투해 온 일본일 수도 있다. 우리의 평화는 그냥 오지 않는다. 그것은 악과의 투쟁에서 승리해야만 쟁취할 수 있는 고난과 고통, 몸부림의 실천에서만 가능하다. 생존을 위한 고도의 전략과 우리 자신들의 몸을 던지는 곳에서만 희망의 씨앗을 볼 수 있다. 지구 남북의 양극화와 우리가 사는 한반도의 양극화, 그리고 이 대한민국에서의 양극화와 뒤틀린 역사를 바로 잡아야만 가능하다. 평화와 통일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다. 악한 세력들의 발악과 시기와 질투를 이겨내야 할 일이다. 우리는 이 싸움과 투쟁에서 주저앉거나 머뭇거려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내 속에 있는 더러운 악의 세력들을 성령의 불로 태우고 십자가의 거룩한 피로 깨끗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기도하는 평화와 통일, 부활과 구원의 날은 반드시 올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 칼럼
    • 통일칼럼
    2018-11-16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