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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칼럼] 홍성표 목사의 ‘청년과 역사’
- 청년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정신적 신체적으로 한창 성하거나 무르익은 시기에 있는 사람. 특히 남자를 일컫고 장래가 유망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청년은 아직은 세상적으로 때가 덜 묻은 시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럴까 청년의 나이를 20대에서 30 대로 본다면 이는 벌써 모든 것을 갖춘 나이이고 왕성한 비젼을 가질 수 있는 나이이다. 물론 형편과 환경에 따라서 이러한 것들이 다를 수 있다. 요즘처럼 천민자본주의가 지배하는 현실에서는 금수저가 흙 수저보다는 더 빨리 사회 각 분야의 정상에 오를 기회가 많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좋은 학원을 가서 점수를 올리고 좋은 가정환경에서 좋은 학교를 가고 그래서 사회적으로 빨리 성장하는 자리에 오를 수가 있는 것이다. 근자에 우리 사회에는 모든 분야가 썩은 냄새가 진동하다 그 중에서도 언론이 그렇다. 가짜뉴스가 판을 친다. 단순하게 유튜브 뿐 아니라 기존의 기성 보도 미디어 매체들이 진실과 사실 보다는 조작된 언론 프레이를 하고 있다. 소문이 진실을 만들어 내고 가짜가 진짜처럼 위장되고 포장된다. 사람들은 어떤 소문과 보도에 대하여 깊게 생각하거나 그러한 사실을 따져볼 여유나 시간들이 없다. 그래서 표현되는 말이나 돌아가는 사실을 믿는 예가 거의 전부이다. 특히 분단 상황에서 반공 이데올로기를 통한 국가보안법을 통하여 수많은 가짜 간첩들을 만들어 내고 독재와 학살 사기 농단 정권들이 언론을 통제하고 압박하며 권력에 복종을 강요하는 현실이 오래 동안 지속되어 왔다. 세계적 혁명들의 주체들은 청년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우선 신체적으로 젊고 기동력이나 순발력도 빠르기 때문이며 수순성이 있기 때문에 현실에 안주하거나 머뭇거림이 없이 자신을 역사의 변혁에 기투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경험의 부족을 말하지 않더라도 신중함이나 깊이 사색하고 결단하는 것보다는 경솔함이 있는 것도 사실이며 불의와 타협하는 영악함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신체가 젊다고 해서 정신이나 생각이 젊은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썩은 물에 쉽게 몸을 담그며, 삶의 가치나 존재의 의미를 버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현실의 기회주의자가 되기도 쉽고 불의를 정의로 포장하기도 하며 진실을 외면하고 거짓된 현실주의에 타협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준비하기 보다는 쉽게 성공주의나 한탕주의에 빠지는 일도 많다. 전통적 가치나 의미를 인정하지 않고 불만과 원망으로 치닫는 경우도 많다. 지금 우리 사회는 민족의 분단과 함께 동서의 분열과 세대 간의 갈등의 골이 깊어간다. 먼저는 기존의 기성세대들의 잘못이 있기에 개혁이나 혁명적 저항의 사고가 일어나는 것은 막을 수 없다. 최근 야당의 젊은 대표가 미국 사회의 현상인 동화(melting pot) 보다는 함께하는 가치의 셀러드볼(salad ball)을 이야기 하며 비빕밥 이야기로 사회적 현상을 말하고 있다. 우선은 이러한 소위 정치적 돌풍이 청년의 위치들을 정의 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등장한 청년 대표는 국정논단으로 등장한 박근혜 키즈이다. 소위 미국의 유수한 대학으로 말해지는 하바드 출신이다. 세계적인 대하표적 대학을 말할 때는 단연 미국의 하바드나 예일 프리스톤 등을 말한다. 미국은 여전히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강국이다. 그러니 그 곳의 유수한 대학이라면 사람들의 귀는 솔깃하다. 한국에서는 과거의 경성제국대학의 후신인 스카이 대나 연세나 고대를 나와야 한국 사회의 상층부에 진입하기가 쉽다. 태어난 것이 뛰어나거나 아니면 금수저이거나 라는 환경의 청년이면 사회적 상층부에 의치하기가 수월한 것은 상당히 사실적 현실이다. 자본의 위력이나 자본과 연결된 권력의 상층부에 존재하는 청년들의 현실적 미래는 쉽게 열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이러한 자본과 권력의 환경이 독과 악이 되는 경우도 제법 많다. 청춘과 청년의 비유는 거의 맞아 떨어진다. 지금의 계절이 바로 청춘의 계절이고 청년의 시절이다. 자본이 존재를 결정하는 썩은 자본주의 현실이 우리에게 주는 삶의 의미와 가치는 무엇인가? 자본과 권력의 중심에서 멀리 있는 역사와 삶의 주체인 민중들에게는 희망이 없는 것인가? 세상에 가장 불쌍한 난민들, 떠돌이들은 희망이 없는 절대 절망의 존재들인가? 코로나의 한복판에서도 가진 것이 없고 힘없는 민중들(난민. 떠돌이, 나그네. 고아. 과부)들은 무슨 존재인가? 그들의 태어남과 성장과 과정들은 어둠으로 일관하는 것이 운명이고 팔자인가? 그들에게서 종교란 무엇인가? 그들에게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무엇인가? 그들에게서 기독교와 교회는 무엇인가? 종교들도 교회도 자본과 권력의 친구이다. 민중들은 자본과 권력에 속고 종교와 교회에게도 속고 속아주며 사는 어리석은 존재인가? 코로나의 재난은 우리가 사는 한국 사회와 남과 북과 그리고 세계적으로도 엄청난 경제적 삶의 양극화의 깊은 골을 만들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청년은 무엇인가? 청년들은 이 현실과 역사에 대한 대처와 준비를 어떻게 만들어 가야할 존재로 서 있어야 하는가? 신체도 정신도 그리고 영적인 젊음을 유지 하고 역사의 정의와 사랑, 생명과 평화, 평등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주체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현실주의에 함몰 되어서 자기 계산만 하는 썩은 청년으로 서 있다면 그것은 청년이기를 포기하는 이기적인 존재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청년이여! 진정한 청년이 되어 청년의 역사를 만들어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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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칼럼] 홍성표 목사의 ‘청년과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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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칼럼] 홍성표 목사의 ’평화와 통일은 하나다‘
- 우리는 1945년 분단 이후 75년의 분단과 신식민지를 살고 있다. 분단의 중심 역사에는 민족세계전쟁( 6.25)의 민족상잔이 있다. 천만의 이산가족과 수백만의 고와와 과부, 전쟁 부인( 특히 미군과 가족을 이룬 여성들과 미군 기지촌에서 성노예로 살아 온 분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가족과 형제자매들, 친구들과 고향들을 잃고 살고 있다. 일제의 식민지가 분단을 제공 하고, 전 후 처리 문제로 강대국들(특히 미소)가 북쪽에는 소련군 점령군이 남쪽에는 미 점령군이 들어왔다. 광복과 해방 된 나라가 신탁과 찬탁의 치열한 논쟁이 있었고, 새로운 식민지를 향한 강대국들의 역사적 재단이 있었다. 그리고 북에는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이 들어서고 남쪽에는 권력의지에 빠진 미군정 후원에 이승만이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했다. 그리고 민족세계전쟁(6.25)에 대한 여러 가설들이 이기는 하지만 참혹한 전쟁이 시신이 산을 이루고 피가 강과 바다를 이루며, 억울한 생명들의 부르짖음이 하늘과 땅에 사무쳐 있다. 이 전쟁은 분단을 영구화 하는 가장 큰 민족적 상처와 풀지 못할 한을 담고 있다. 전쟁의 외적이고 내적인 요인들이 있고, 민족 무능한 현실과 지도자들의 한계가 노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전후 처리를 핑계로 강대국(특히 미소)의 탐욕적 침략이 근본임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크고 작은 민족과 갈등이 있어왔다. 북에서는 그나마 일제의 매국적 청산이 되었지만 남에서는 오히려 일제의 잔재 세력들을 기반으로 국가의 기반이 형성 되었다. 체제와 이념이 다른 두 나라가 한반도에 정착하면서 인민들과 민중들의 삶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비극적 역사가 심화 확대, 재생산 되었다. 부정과 불의, 부패와 비리의 정권이 들어 서는가 하면, 국민과 민중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야할 군부 세력들이 반란을 통해서 탱크와 총을 들고 독재 국가를 세워 민주주의의 새싹을 짓밟고. 국민과 가난하고 힘 없는 민중들의 저항을 억압하며 착취를 멈추지 아니했다. 여기에 더하여 민중들과 국민들을 학살하는 민족세계전쟁(6.25) 이후 가장 많은 사람을 탄압한 군부 정권이 태어났다. 일제 잔재 세력들을 청산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일제에서 교육을 받은 박정희와 그 후예인 전두환 노태우 등이 푸른 금수강산을 폭력으로 물들인 것이다. 이승만 역시 이런 저런 이유들로 인하여 숱한 민중들을 학살하고 이 배후에는 미국이 존재한다. 이런 과정에서 정의 사랑을 실천하고 생명을 살려야할 교회는 불의한 이승만과 독재와 학살 정권을 찬양하며 하나님과 성서를 모독하고 자신들의 입신양면과 부귀영화를 위해서 악한 세력을 찬양하고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들을 억압하고 착취 하는 데 공생과 기생의 길을 걸어 왔다. 6.15 선언과 10,4 선언 등을 통하여 남북 정상들이 만나고 2018년은 문재인 정부에 의해서 남북 정상이 세 번 씩이나 만나고, 북미 정상들이 세 번 씩이나 만났다.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을 통한 영구적 한반도 평화 정착을 이룰 수 있다는 분위기가 한반도를 넘어 세계를 휩싸이게 하였다. 그러나 다시금 한반도의 앞길은 알 수가 없는 형편이 되었다. 여전히 한반도를 둘러 싼 미주의 패권 전쟁과 4대 강국들 (미중러일)들의 자국의 이권과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반대 하는 교묘한 외교와 정책들을 구사 하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전대미문의 세계적 팬대믹(대유행)의 질병의 재난마저 패권 경재의 도구로 활용 되고 있다 대한민국은 미중의 패권 다툼의 샌드위치 속에서 양쪽의 눈치를 살펴야 되고 정말 지혜와 슬기가 필요한 중대한 역사적 시점에 놓여 있다. 질병의 대 유행은 세계와 우리 사회의 양극화를 심화 확대 시키고 있다. 양극화의 골은 건널 수 없는 계곡과 강을 이룬다. 여전히 다국적 기업과 초국적 기업, 그리고 강대국들의 권력이 백신을 독점하고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들은 고통의 심화를 경험하고 있다. 성서는 정의와 사랑의 완성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과 인간의 질적인 차이’는 건널 수 없는 계곡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처형과 죽음의 구속으로 영생의 길이 열려 있다. 그러나 죄악의 죽음으로부터 살 수 있는 길은 진정한 회개가 있어야 한다. 예수 팔이, 분단과 통일 팔이, 민중 팔이, 국민과 서민 팔이, 평화를 말하며 탐욕적 생활을 끊지 못하는 거짓 된 상황에서 통일을 이룰 수는 없다. 광복과 해방이 외세에 의해서 이루어진 결과는 분단과 민족상잔의 참담한 결과를 낳았다.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말씀, 원천으로 돌아가야 한다,(ad fontes), 정말 정직하고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자기를 비우고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의 길을 가야 한다. 우리의 잘못은 모두 우리 자신들의 탓이다. 통일의 길은 권력과 자본의 탐욕을 버리지 않고는 오지 않는다. 남과 북이 이러한 것들을 함께 내려놓아야 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와 지도자들이 나오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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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칼럼] 홍성표 목사의 ’평화와 통일은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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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칼럼] 홍성표 목사의 ‘가부장적 역사 반성과 미투 운동의 현실’
- 성서에는 2개의 창조론이 존재한다. 창세기 1: 27절에 모든 만물을 창조 한신 후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 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 하시고 라고 말씀 하신다. 또 하나의 창조에 관한 말씀은 창세기 2: 20-25절의 말씀에 있다.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그가 잠들매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이것을 남자에게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지로다. 말씀 하신다. 대개의 경우 전통신학은 창세기 1장의 것보다는 창세기 2장을 다루어 왔다. 거의 모든 주류 신학이 그랬다. 즉 가부장적 중심의 삶을 살아 온 사회와 역사가 남성 중심의 삶을 강조하는 문화를 살다 보니 가부장적 남성 중심의 신학을 전개 하는 방식으로 창세기 2장을 거의 모든 신학의 중심 뼈대로 이용한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이 차별에 저항 하고 약자들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성적 차별과 문화적 차별을 당해 왔다는 자각을 하면서 이러한 가부장적, 남성 중심의 신학은 도전을 받게 되고 젠더 문제와 약자들의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문화는 혁명적 도전을 받기 시작한 지 꽤 시간이 흐르게 된다. 그것은 단순한 여성신학이나 해방의 논리가 아니라 인간 모두의 인권을 주장 하고 특히 약자와 가진 것이 없이 성을 착취당해 온 억압으로부터 인권과 인간 해방 운동으로 자연이 방향을 지향하게 되었다. 조선 시대의 여성들에 대한 삼정도와 칠거지악 같은 것을 보면 여성들이 얼마나 남성들의 차별과 사회적 역사적 착취와 억압을 당해 왔는지를 알 수가 있다. 그래서 성소수자의 인권 뿐 아니라 모든 여성들의 인권과 해방을 외치는 운동으로 우리 사회에 자리 잡아 가고 있다. 이 중 중심적 이슈가 성희롱과, 성추행, 성폭력은 사회적 공감을 얻어서 가해자라고 지목 되면 무조건 피해자 중심으로 몰아가는 강력한 처벌과 심판으로 몰아간다. 3선의 서울 시장이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서울 시장이 바뀌고 정부 여당은 큰 어려움에 직면하기도 하였다. 필자는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의 문화와 사고, 행동들은 분명히 반성과 철저한 회개가 필요하다고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 피해자의 인권이 철저히 보장 되고 그 아픔이 치유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피해자 중심의 일방적 주장을 통하여 가해자로 지목된 인권이 말살되고 한 순간에 허물어지는 일은 절대 반대한다. 피해자의 인권은 물론이고 가해자라고 일방적으로 몰아 부치는 인권과 삶도 존귀하다. 피해자 중심의 진술만 듣고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의 삶이 무너지고 극한 상황으로 간다면 너무도 억울할 것이다. 적어도 쌍방의 의견을 충분히 들어 보고 인지해서 공정한 판단이 내려져야할 것이다. 그리고 피해자 중심이라고는 하지만 상식도 없는 가사를 쓰는 소위 언론들도 정직하고 사살을 확실히 한 후 공정한 기사를 쓰도록 해야 할 것이다. 만일 피해자 중심이라는 전제로 가해자로 지목된 삶이 억울하게 무너진다면 그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미투 운동이 제 대로 자리 잡으려면 이러한 모순 된 말과 몰아기기 식의 인권에 대한 폭력적 운동. 일방적 협박과 공격 등 모순 된 미투 운동에는 동의할 수가 없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매우 긴 가부장적, 남성 중심만의 역사는 바꿔져야 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 미투 운동으로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되도록 몰아가기 식의 미투 운동은 반대한다. 지금은 모든 것이 전통적 가치와 문화가 무너지고 새로운 가치의 혁명적 문화가 태풍과 광풍처럼 몰아치고 있다. 특히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의 권위주의가 발부치기 어려운 사회가 되었다. 특히 대한민국의 문화적 하나의 기질은 새로운 것이 나타나면 불 일어나듯 하다, 일제의 미 청산과 미군 주둔의 신식민지를 75년 살고 있는 한과 억울함을 어떻게 풀 수 있겠는가? 완전한 속국으로 살고 있다. 말이 우방이고 동맹이지 미 제국주의의 사슬에 얽매여 이 틀을 벗어나기 쉽지 않다. 적어도 남과 북이 영구 평화협정을 맺고 자유로운 왕래와 교류를 하는 날이라도 왔으면 한다. 세대 간의 가치관과 급격하게 변화 하는 문화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 세상과 문화는 변하게 되어 있다. 잘못된 역사는 바로 잡아야 한다. 그렇다고 어느 하나가 일방적으로 심판을 받는 비상식적 운동과 문화는 그 자체가 저항을 받게 된다. 남녀가 평등한 양성 평등의 세계가 뿌리를 내려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평등 공동체가 완성 되려면 그 누구도 억울함이 없는 진정한 인권과 인간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여전히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의 문화는 견고하다. 미투가 진정으로 뿌리 내려야 한다. 그것은 단순한 여성의 젠더의 차별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 특히 약자들의 인간해방과 인간화 인권이 이루어져야 한다. 미투가 상식을 벗어나는 폭력적 미투가 아니라 모두가 끄덕일 수 있는 인권과 특히 피해자 중심으로 방향을 설정 하되 그 과정에서 억울한 사회적 인민재판식의 미투는 동의할 수 없고 깊은 공감을 얻기도 힘이 될 것이다. 한국에서 언론처럼 추악하고 더러운 존재가 없다.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인간과 역사에 대한 깊은 성찰도 없고 철학도 없는 일방 통고식 보도는 절제 되어야 하고 사라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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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칼럼] 홍성표 목사의 ‘가부장적 역사 반성과 미투 운동의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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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칼럼] 우리가 원하는 것들
- 원시부터 지금까지 본능적으로 인간들은 생존을 위해 존재했다. 자연과 싸우고 그리고 인간과 인간들이 서로를 지배하고 지배당하는 불편한 관계를 하며 지내왔다. 남녀의 차별과 신분의 차별, 그리고 인종의 차별을 당연시 하고 수많은 비극과 불평등의 세월을 보내 왔다. 본능을 억제하지 못하고 조절할 능력을 상실하면서 상대를 멸시하고 자신의 부속물처럼, 같은 인간을 노예처럼 부려왔다. 이런 역사를 이루는 텀욕과 욕망은 여전하다. 많은 문화와 학문과 과학 등 문명을 거듭하지만 이러한 인간의 악하고 거짓 됨 모습은 계속된다. 이성을 강조하든, 종교를 앞세우든 나와 이기적 집단들의 행복이 강조되고 자신과 이해관계가 없는 상대는 하나의 먹잇감으로 처리한다. 전력이라는 것을 두고 죽이고 ,전쟁을 하며, 연극이 아닌 실제적 살인을 멈추지 않는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사회주의 등 많은 체제를 말하고 사상들이 등장하지만 인간의 비열하고 악랄한 실태는 갈수록 더 잔인하고 교활하다. 정의와 사랑을 말하지만 이것은 이리의 모습을 감추기 위한 양의 가죽에 불과하다. 코로나가 어디서 시작되었고, 언제 종식 될지 아무도 모른다. 어떤 의도로 만들어졌는지, 혹은 생태계의 파멸의 연장선에서 세계적 현상이 되었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여전히 인간들은 영토 싸움, 패권 싸움, 무역 싸움들을 포기하지 않고 그럴 수도 없다. 범죄 할 수 있는 각종 상업적 사업들을 홍수처럼 만들어 놓고 그러한 범죄자들을 수용할 감옥들을 만드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오늘 날 코로나의 재난은 인간의 탐욕과 모순적 삶의 양태의 결과이다. 분단 상황에서 여전히 우리는 미국에 의존되어 있거나 종속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다. 트럼프에서 바이든으로 미 행정부가 바뀌었어도 여전히 우리는 그들의 예속적 눈치와 이해관계를 따져야 한다. 한반도 조선에서 벌어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결과로 우리는 일제의 강제 병합을 이루었다. 그리고 1905년 을사늑약의 해로부터 40여 년간을 일제 식민통치를 거치고 1945년 8월 15일에 광복과 해방을 맞이한 그날 이후 우리는 미소 강대국에 분할된 분단체제를 살게 되었다. 북의 인민민주주의공화국과 남의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승만의 단독 정부 수립 이전의 해방공간의 미군정의 3년의 시간은 분단의 종속화, 제도화를 반영구적으로 울타리를 둘러 친 치욕의 강화였다. 일제 때보다 더 긴 신식민의 세월이 시작된 것이다. 한반도의 미래는 이러한 영구적 식민통치를 고집하는 미국과 새로운 세계 패권으로 부각된 중국의 싸움에 샌드위치가 되어 매우 어려운 역사적 상황을 맞게 된 것이다. 세계화는 질병의 세계화도 이루었으며, 인간의 끝없는 욕망의 추구로 그 종국을 예측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국내적 분열과 반민족 세력의 잔재들로 인하여 진정한 민족과 나라의 정기를 회복하기는 매우 어려운 가운데 있고 자본과 권력의 깊은 유착은 사회적 양극화의 골을 깊고 넓게 확대 재생산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코로나의 형국에서 이러한 경제적 , 문화적, 사회적 양극화는 건널 수 없는 계곡이 되고 있다. 여전히 열악한 노동 현장들 속에서 노동자는 죽어 가고 있고, 그들의 생명과 인권은 푸대접을 받고 있다. 세계 경제 10대 대국이라는 양적 발전을 해 왔지만 여전히 노인과 청소년 자살률은 OECD 1등 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저출산 역시 사회적 경제 양극화의 결과이다. 상대적 박탈감에 사는 체념적 자살이 증가하고 있는 사회는 분명히 깊은 우울증과 각종 질병에 빠져 있는 어둠과 죽음의 그늘이 도사려 있다. 교육의 인성과 윤리 도덕은 상실되고 인간 본질의 회복은 요원하다. 코로나 상황에서 보여주는 교회의 모습들 역시 세상과 사회를 섬기는 자세가 아니라 오히려 교회가 세상과 사회를 불안하게 하는 반사회적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그동안 성장 일로를 달려 왔던 교회 세력들은 코로나를 지나며 그 고통들을 수용할 여유를 완전히 상실한 광란의 몸짓을 하고 있다. 물론 교회 구성원 전체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교회가 분단세력들과 친일 세력들, 반민족과 반역사적, 반민중적, 약자들의 삶을 애써 외면해 온 자기 반성과 회개를 하지 않으려 하는 모습은 처참하기도 하다. 한국의 교육의 역사가 정부관리를 목적으로, 혹은 정치와 정치의제를 실현하는 것으로 일관하여 그들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들의 자본과 권력에 편승하고 의존하며 자기 배부름을 꾀해 온 결과로 진정한 사회적 나눔과 분배의 이웃 사랑에 역행 해 오고 있는 것이다. 화려하고 거대한 예배당을 건축하고 그 웅장한 울타리 안에 교인들을 가두어 놓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협박을 통하여 교회의 양적 성장을 도모해 온 것이다. 이것은 교회가 반성서, 반 예수 그리스도를 모색해 온 것인데, 그런데도 코로나의 재난 속에서 여전히 회개의 진실성을 보이지 않고 역행하고 있는 것이다. 수없이 말해 온 것처럼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검찰공화국의 해체와 친일과 독재의 잔재들이 청산 되어야 하고 동시에 진정한 성서로 돌아가는 구체적인 행동과 실천이 없고서는 미래의 희망을 창조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성서의 한 분 하나님, 한 분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성령님은 수천수만의 신이 되어 이 땅을 어지럽게 하고 있다. 정통의 철저한 회개와 반성이 없으면 이단 사이비들의 약화는 쉽지 않다. 우리 모두의 정직한 나로 돌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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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칼럼] 우리가 원하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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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칼럼] 홍성표 목사의 ‘바이든의 등장과 한반도의 미래’
- 트럼프의 4년 동안 한반도 분단의 벽이 활짝 열리는 줄 알았다. 종전이 선언되고 평화협정이 이루어지며 최고의 당국자들과 문화 체육인들뿐 아니라 기업과 정치, 학술과 종교 사화 전반의 민중들과 인민들이 함께 만나는 교류가 활성화 될 것이라는 기대가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개성의 남북 연락사무소가 폭파되는 안타까움으로 남북의 문제는 문재인 정부 초기로 돌아가는 답답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일제로부터 싹튼 분단의 시작이 75년을 지나 76년째가 되었다. 트럼프가 미국의 패배 대통령으로는 최고의 선거 결과를 얻었지만 미국은 존 바이든을 선택하였다. 선거의 불복과 최초의 국회의사당 폭력적 반란 사건으로 미국은 반쪽으로 나누어진 분열의 상태가 되었다. 코로나로 41만의 사망자가 생기고 하루에 10만 이상의 확진자와 4천명 이상의 죽음이 더해지고 있다. 코로나로 인한 소위 과학과 기술 선진국이라고 자부하던 유럽과 미국 등의 나라들이 맥을 못 추고 있다. 인간들의 자연에 대한 난 개발의 폭력과 탐욕적 문명의 결과로 발생한 코로나 바이러스의 질병사가 불안과 공포의 날들을 연출하고 있다. 세계화, 지구촌이라는 인류의 문명사가 대전환을 이루고 있다. 백신이라는 예방적 의술이 어떤 희망을 줄 것인지는 몰라도 21세기의 현재의 문명의 시계는 모든 사람들에게 우울증을 깊게 하고 있다. 불안은 공포를 낳고 절망을 만들어낸다. 트럼프의 백인 주류사회와 인종차별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연합국을 이루고 사는 미국이 법을 통해서 통제를 하고 울타리를 만들어 내고는 있지만 언제인가는 모래처럼 무너질 수 있을 것이다. 세계화와 지구촌 이전부터 식민지의 확장과 정복의 야욕은 소위 다문화(Multi- cultural) 사회를 만들어 냈다. 반만년 이라는 긴 세월 동안의 문화적 동질성을 가지고 살아 온 한민족은 하나의 민족이라는 전통과 역사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러한 주장을 할 근거는 오래 전부터 사라졌다. 대한민국도 이제는 다문화 사회가 도어가고 있고 이미 세계의 다민족들이 살게 된 현실이다. 이제 지구는 어느 한 특정한 민족을 주장해서는 존재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미국이 북미에 자리를 잡고 난 후 세계 모든 지역에서는 아메리칸 드림을 통해서 그곳에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미국이 독립한 지 3백여 년이 흘러왔지만 이민들의 나라가 된 그 기초가 트럼프가 집권한 4년 동안 극렬하게 분열의 토대를 만들어 놓았다. 백인 중심의 인종 차별과 함께 소수 인종들을 차별화 하는 정책들을 노골적으로 실천해 갔다. 이러한 트럼프와 그를 지지하는 극우 백인 세력들이 미국을 분열시킨 상태이다. 트럼프가 백악관(White House)에서 물러나긴 하였지만 미국은 이미 큰 상처를 남기고 분열 된 채로 쉽게 회복되지 못할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트럼프의 정책은 미국 우선주의와 백인 중심의 회복을 설계해오고 실천해 왔다. 트럼프가 등장하면서 한반도에는 새로운 평화가 열리는 듯한 여화가 시작 되었다. 남북정상이 세 번씩이나 만나고 북미 정상이 두 번이나 만나는 등 오랫동안 막힌 담이 허물어지는 희망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자국의 이익을 우선 시하고 장사적 계산을 하는 트럼프의 통치는 하난의 커다란 역사적 사건으로 막을 내렸다. 부풀어 오른 열기구를 타고 공중에 올라가려다 그 열기구가 바람이 빠져 급격하게 땅위로 추락한 현실이 된 것이다. 미중의 무역 갈등과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불신, 세계적인 경제구조의 미래를 쉽게 담보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분열된 미국 사회가 어떻게 변신하고 예전의 힘 있는 미국이 될 것이지는 매우 불투명하다. 중국이 부정하려 하지만 우한발 코로나가 세계적 펜데믹을 연출하게 된 이 상황들에 대하여 어떠한 역사적 행동으로 귀결될지도 모르는 형국이다. 미중의 신냉전과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세계적 문명의 흔들림과 역사의 대전환기에서 한반도의 운명은 어디로 갈 것인가? 북한이 핵을 가진 나라라고 하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고 이것을 빌미로 한 미국과 남한의 비핵화의 요청은 모든 희망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현실이 되고 있다. 북의 생존을 위한 핵무기에 대하여 남한 역시 군비를 증비하고 이러한 상황에 대처할 수밖에는 없는 이중, 삼중의 고통에 직면하고 있다. 그렇다고 모든 희망을 버리고 절망에 사로잡혀 주저앉을 수만은 없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기독교의 전통과 역사를 이야기 하면서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트럼프는 당면한 국내의 코로나 위기를 극복하며 분열 된 미국 사회의 일치와 회복을 모색하는 일만도 매우 힘에 겨울 것이다. 그동안 반 미국적인 트럼프의 정책들을 원상복귀하려는 노력들이 결코 쉽지 않은 일들로 산적해 있다. 마스크의 착용화와 전 국민 100일 마스크 착용 권고, 코로나19의 대응 조정관을 신설하고 코로나 19의 지원확대 및 연방부채에 대한 지급 일시 중단, 파리 기후협정 30일 이내 복귀, 세계보건기구(Who)탈퇴 절차 중단, 인구조사에서의 미등록 이민자 제외한 조처 뒤집기, 불법체류 미성년자 등 추방 유예제도(DACA)강화, 멕시코와 국경장벽 건설 중단, 이슬람 7개국 입구 제한 폐지, 리이베리아 이민자 추방 조처 취소, 트럼프 행정부의 악의적이고 극단적인 이민정책 철회, 환경, 보건, 국익에 어긋나는 트럼프 조처 되돌리기 (캐나다 원유 도입 파이프 건설 취소), 애국교육 촉진하는 1776위원회 폐지, 직장에서 성적 지향, 성정체성 차별금지, 규제 완화 (규제 1개 도입 땐 기존 규제 2개 폐지 )되돌리기, 공무원 새 윤리 규정 등이 바이든이 트럼프의 행정을 파기하면서 미국 사회를 본래 대로 회복시키는 행정 명령들이다. 이제 역사는 코로나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질 것이다. 백신 접종이 이루어진 후 우리는 과연 과거의 일상적 생활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 기독교와 교회, 아니 종교는 이러한 질병 사회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바이든과 함께 하게 되는 한반도의 미래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과연 미국 우선주의에서 진정한 동맹으로서 한반도의 막힌 담을 헐 수 있는 최소한의 기반을 만들 수 있겠는가? 문재인 정부가 1년 4개월 남아 있다. 경거망동을 하지 말고 차분하고 신중하게 새로운 미래를 준비해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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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칼럼] 홍성표 목사의 ‘바이든의 등장과 한반도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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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칼럼] 홍성표 목사의 ‘코로나 시대의 통일’
- 2019년 12월에 발생한 콜로나 바이러스의 질병이 한국과 지구촌 전체를 흔들어 대고 인간이 만들어 온 문명을 조롱하며 지나고 있다. 소위 선진국이라 칭하는 서구 유럽과 경찰국가로 세계 패권 1등 국가로 자처 해 온 미국 등이 휘청거리고 있다. 화이저 모더나 아스트로나제 등 서구 국가들의 백신 개발과 중국 러시아 등의 백신 개발과 함께 한국도 백신 개발을 하고 있다는 보도이다. 촛불들을 통해서 기작된 문재인 정부와 180석 가량의 국회의원 정당을 가진 민주당의 정치적 이슈는 검찰개혁으로 일관해 왔다. 검경의 수사권 분리와 공수처 출범이 구체적인 내용이다. 언론들은 이러한 이슈들을 진영 싸움 등으로 몰아대고 반역사적 혼돈을 초래한다. 자칭 윤총장과 검사동 일체 조직들의 민낯이 이 과정에서 다시 한 번 철저히 드러나고 검찰공회국의 해체가 답임을 모든 국민들이 철저히 알게 되었다. 신년이 되면서 정인 아이의 충격적 죽음과 함께 중대재해법 이란의 한국 유조선 납치 미국대선 불복에 대한 트럼프지지 세력들의 미국 국회의사당 난입 사건 그리고 민주당 대표의 자칭 대통령들의 사면 논의 등이 이슈화 되고 있다. 중대재해법은 분명하다. 그것은 지금까지 산업화를 통해서 그나마 한국 경제를 받쳐 온 노동자들의 생명이 더 이상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그러한 열악한 산업 현장을 생명 안전 현장으로 바꾸자는 것이고 이러한 노동 현장을 무시하는 기업의 크기 고용의 현장을 구별하지 않고 지켜내자는 사회적 역사적 인간적 합의사항이다. 한 생명은 소우주이다.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진보편적 진리를 무시하고는 인간 세계의 모든 것은 위선이고 거짓이 될 수밖에는 없다. 이것을 말하는 기독교나 소위 고등 종교들도 침묵하고 있다. 종교의 본질은 정의와 사랑의 완성이다. 정의와 사랑은 생명을 지키고 보호하며 살리는 것이 목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관이나 무관심 하는 것은 사이비이거나 이단이며 종교를 빙자하여 밥벌이 하는 집단이나 개인에 불과하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라고 하신 것을 이분법적으로 해석하거니 이원론적으로 이해하여 반성서적 놀이를 하는 것이다. 잠든 민중들을 속이며 종교팔이를 하는 것이다. 역사를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생명들이 충만하게 사는 것을 지향하고 때문에 자연과 공존하고 나만이 아니라 나와 너가 함께 더불어 행복을 구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코로나의 재난 속에 강취위가 계속되고 중소 상공인뿐 아니라 그보다 더 어려운 민중들이 삶을 지탱하기 어려운 혹독한 겨울을 지나고 있다. 문 정부 하반기를 지나고 있지만 무엇 하나 뚜렷한 개혁이나 혁명적이 것들이 눔에 보이지를 않는다. 행정부와 입법 기관 사법부 삼권의 모든 권력을 쥐어 주었지만 추위에 떨며 촛불을 든 민중들의 마음에 와 닿는 것은 찾기 어렵다. 여전히 가진 자들과 기득권자들의 야합 이외에 보이는 것은 없다. 소위 야당들은 정권을 회복하거나 권력의 확장을 꿈꾸는 것이 목적이기에 그들을 나무랄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하라고 대통령과 입법 사법의 삼권을 다 쥐어주었는데 허덕거리고 눈치보고 무능한 존재로 세월을 다 보내고 있는 것이다. 민중들의 5년의 세월은 무엇인가? 그들은 거주할 집도 없고 코로나 이전부터 가난으로 삶을 견뎌 왔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운 겨울에 몸을 떨며 촛불을 들었다. 코로나로 인하여 민중들의 삶은 벼랑 끝에 섰다. 일할 장소도 생존의 사업장도 잃어버렸다. 구치소에 갇힌 수용자들과 교도소에 갇힌 수용자들은 여러 가지 실정법을 어긴 죄인들이다. 죄가 확정된 사람들은 교도소에 있고 구치소에는 죄의 유무를 기다리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 둘 모두가 사회에서 일정 기간 격리되어 있다. 자유가 차단 된 것이다. 인간에게 가장 소유한 것은 자유이다. 그리하여 모든 민주 국가의 헌법에는 인간의 기본권들이 명시 되어있다. 프랑스 혁명의 구호가“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 하니 않았던가. 우리는 구약성서 중 하나인 출애굽기서가 이스라엘(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 선민) 백성들이 430년 애굽 바로의 폭압적 통치에 대한 해방과 자유의 부르짖음(체아카)을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진정한 자유는 민중들의 피를 먹고 자란다. 일제로부터의 독립과 해방을 위한 자유, 분단 이후의 평화와 통일을 향한 자유, 독재와 학살 하에서의 해방과 자유를 향한 투쟁과 저항, 사기와 국정농단 하에서 적폐청산과 검찰개혁 등을 향한 촛불혁명 민중들의 자유를 향한 저항 등은 인간화의 역사인 것이다. 정인 아이의 죽음을 통해서 현대를 사는 인간들의 타락의 극치를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중대재해법이 기득권자들과 가진 자들의 입장을 견지하는 한 진정한 자유의 기대는 기대하기 어렵다. 소위 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하며 세계 경철국가 노릇을 해 온 미국국회의사당의 난입 사건을 보며 백인들의 왜곡된 인종차별적 정치 행위가 존재함을 다시금 확인한다. 검찰공화국의 자기 기득권 지키기와 이것을 부추기는 국민의 힘당, 일명 구김당 등 잔재 세력들의 행태를 언제까지 보아야 하나? 지금까지 기득권을 누려온 잔재들의 세력이 사리질 때 진정한 자유의 시작이 올 것이다. 북도 남도 이 코로나의 시대에 진정한 평화와 통일을 바란다면 혁명적 발상 전환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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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칼럼] 홍성표 목사의 ‘코로나 시대의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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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칼럼] 전태일과 노동현실
- 지금부터 50년 전 평화시장 통일사 미싱사의 재단사로 일하던 전태일 열사는 당시의 800만에서 100만이 가까운 노동자들에 대한 열악한 산업현장을 역사와 한국사회에 고발하며 자신의 존재를 불태웠다. 어린 여공들의 지치고 병든 육신들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심정으로 사회 각 부분에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서 소리치고 호소를 하면서 각고의 노력을 다 했다. 그의 마음에는 항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십자가를 간직하고 있었다. 영혼의 구원을 설교하며 외치던 교회들은 노동자들의 억압과 착취에 대한 사회적 모순과 불의에 대해서는 침묵을 하고 무관심 했다. 창세기의 원죄는 말하고 모든 것이 운명인 것처럼 치부하고 거짓된 평화를 말하고 있었다. 박정희의 기업 중심과 소수 재벌 중심의 성장은 목표를 두었지만 노동자들의 생명이나 미래에 대한 설계는 없었다. 고향과 농촌을 버리고 이농한 노동자들은 우선 거주와 입의 풀칠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어떤 조건이나 환경이든지 참고 또 참으며 일을 해야 했다. 쉬는 날도 없고 밥 새워 잠을 미루고 일을 해도 방 하나 얻을 수도 없고 한 참 나이에 주린 배를 채울 수도 없었다. 어린 소녀 노동자들은 그렇게 열악한 산업현장에서 일 하면서도 고향의 동생들의 학자금을 대고 부모의 약값을 대야만 했다. 어린 소년 소녀 가장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희망을 접고 가족을 위하여 병들고 죽어가야 했다. 그들이 밤 새워 먹지 못하고 일하는 것은 조국의 영광과 부흥을 위해서 하는 애국의 길이었다. 자원이 부족한 대한민국에서의 경제 발전은 노동집약적인 노동자들의 삶을 억압하고 착취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전태일 청년은 이러한 답답하고 숨 막히는 노동현실을 세상에 알리고 우리도 사람이다. 기계가 아니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고 외친 것이다. 그러나 사회 각계각층에게 갖은 방법으로 호소를 해도 거기에 관심을 갖거나 대담을 하는 반응은 없었다. 그는 삼각산에 가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기도하였다. 하나님도 말씀이 없었다. 그러나 세미하게 조용히 주의 말씀이 들려 왔다. 처음부터 자신의 몸에 기름을 뿌리고 불을 붙일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세상도 하늘도 자신의 몸부림치는 기도에 답이 없었다. 그렇지만 하나의 응답이 최후에 찾아 온 것이다. 그것은 너 자신의 몸 전체를 노동현장과 한국 역사와 사회 속에 바치라는 것이었다. 한 인간은 소우주이다.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 우리도 사람답게 살고 싶다. 인간화를 외친 하늘의 소리였다. 그의 몸을 태우며 외친 기도는 이 사회 전체를 흔들어 댔다. 그것은 예수가 로마의 식민 권력과 불의한 권력을 등에 업은 매판 세력들로부터 부자비한 십자가 처형을 당한 것처럼 이 사회의 악마적인 세력들의 무관심과 멸시 천대의 불에 붙어 역사와 사회의 재물이 된 것이다. 전태일 열사가 예수는 아니다. 그러나 예수처럼 역사의 불의한 십자가에 처형된 것이다. 잠자던 학생들과 지식인들이 깨어나 이러한 열사의 몸 기도에 동참하였고 함께 몸부림치기 시작하였다. 소수 재벌 경제 정책을 실시하던 박정희의 반란 세력들은 이러한 기도의 모습을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으로 좌익 빨갱이로 몰고 갔다. 거룩한 생명의 죽음을 자살로 치부하면서 교회는 그 죽음을 모욕했다. 불의한 권력과 자본에 기대며 아부 아첨하는 교회 밥벌이 세력들은 비굴하고 비겁하게 열사의 진실을 덮어갔다. 교회들은 열사의 죽음을 자살이라 명하며 이것은 지옥에 갈 일이라고 저주하며 거짓 평화를 말하였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외면하고 부활을 신비화 하며 몸의 죽음과 몸의 부활을 내팽개치고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천국을 말하며 외면해 버렸다. 타자를 위한 삶이나 책임 연대는 없었다. 열사의 죽음은 운명이고 가문의 저주이며 있어서는 안 될 시대적 반역이요 못된 저항이었다. 역사의 사후에 노동운동은 들불처럼 번져 갔고 학생 노동자들이 무수히 쏟아지며 연대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을 교회는 방해 하고 불의한 권력의 이데올로기를 지원하며 함께 저항하는 노동자들과 학생, 깨어 가는 민중들을 좌파와 빨갱이, 간첩 등으로 몰아댔다. 열사가 돌아가신지 50주년이 지나간다. OECD 경제개발 협력기구 전체에서 한국은 자살률 1위이다. 여기에 산업재해로 인한 사망률은 수 십 년간 1위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다. 1년 남짓 되는 코로나의 희생은 4-5백에 불과 하지만 년 간 산업재해 사망은 공식적으로만 2020명이고 비공식적 통계는 이보다 4-5배 더 많다. 그러나 교회들은 여전히 알 수 없는 저 공간에 천국을 가리키며 예수님이 말씀한 너희 중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는 가르침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누구인들 자신의 생명에 대한 귀함을 모를까? 누군들 자신의 생명이 자신의 것만이 아님을 알지 못하는가? 예수님은 말씀 하신다. 한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다. 지금도 열악한 노동현실 속에서 존귀한 생명들이 집을 나가면 돌아오지 않는다. 누구의 아버지요 남편이며, 누구의 형제요 자매이며, 누구의 친구이고 친척이다. 노동자들의 저임금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다며 소수의 재벌과 기업들이 권력과 유착되어 부귀영화를 누려오고 있다. 촛불혁명 정부가 들어섰다. 무엇을 혁명하고 있는가? 부정과 부패와 비리, 군부 독재와 학살, 사기와 농단의 친일의 잔재와 분단 팔이, 민중 팔이, 서민과 국민 팔이 들이 자기 울타리에서 즐기고 산다. 비정규직과 코로나로 그나마 삶터를 상실한 국민들은 어디로 가야 하나 인간이 인간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세상은 언제나 끝이 나냐? 자본과 권력의 중심에서 삶의 변두리와 주변부로 밀려나서 사는 가난하고 약한 힘없는 민중들의 삶은 언제나 상대적 박탈감을 벗어나 보나 언제나 다치지 않고, 떨어지지 않고, 깔리거나 끌려들거나 죽지 않는 노동현실을 맞을 수 있을 것인가? 힘든 노동과 생명의 위협, 상사의 갑 질로 인한 극단적인 일들이 없는 세상을 볼 것인가? 10대 경제 대국을 말하지 말고 수출 대국을 자랑하지 마라. 녿아들 2천오백 만 삼천만이 서로 함께 진정한 평등 공동체. 진정한 행복 공동체를 만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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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칼럼] 전태일과 노동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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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칼럼] 지금 여기에서
- 코로나는 계속 되고 삶에 대한 염려와 어려움도 지속된다. 인간 각 개인 실존의 삶도 있고 나라와 사회, 민족과 국가적인 문제들도 여전하다. 긴 세월 동안에 있었던 사건들이 한 시간에 해결되기를 기대하는 것도 잘못일 수 있다. 트롯 열풍이 조중동을 포함해서 공중파 모두에게 열병처럼 번지고 있다. BTS가 어떻고 또 나훈아의 콘서트에서 발언이 어떻고 떠든다. 가수와 대중가요와 역사가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지 모른다. 또 그러한 연예인들의 노래와 삶이 대중적 문화와 대중들의 삶에 상당한 영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처한 역사와 무슨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그냥 내버려둬라. 가수와 그들의 말과 그들의 사생활이 한반도와 코로나의 상황과 한반도의 분단과 무슨 상관성이 있는가? 그것이 신학적이고 교회적인 문제와 어떻다는 것인가? 연예인들은 인기를 먹고 살고 그들의 인기를 위한 대중의 정서를 잘 파악해야하는 기회를 포착해야 한다. 강 장관의 부군이 보트를 타던 미국을 가든 인간의 개인과 실존적 선택권과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단지 그러한 자유와 선택이 타자와 함께 사는 사회와 역사에 누를 끼쳐서는 안 될 것이다. 선택의 문제는 자유이다. 자유를 누리는 것은 개인적인 문제이다. 그러나 국민과 역사적 정서를 읽는 것은 사회적 감각의 문제이다. 미국의 대선을 앞두고 트럼프의 코로나 확진의 문제가 매우 중요한 것처럼 생각이 든다. 방역을 우습게 생각하고 환자의 입장에서 타자의 건강을 생각하는 것이 상식일진데 자신의 위치와 함께 사는 사람들의 입장을 배려하거나 생각하지 않는다면 지도자로서는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모든 것은 상식의 소통이 필요하다. 사실 우리가 온전해서 타자의 행위를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이러한 비판들은 타자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을 향한 성찰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코로나로 인하여 모든 것이 거리가 커졌다. 아무리 마음이 중요하다고 보더라도 직접 얼굴을 맞대고 소통하는 것보다 비 대면으로 하는 관계는 한계가 있다. 코로나는 인간의 모든 것을 우습게 만들고 있다. 마스크를 쓰고 살아가야 하고 거리를 둬야한다. 이제는 한 그릇을 쓰는 것조차 어렵게 되었다. 모두가 따로따로 해야만 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삶의 양극화이다. 특히 경제적 양극화이다. 코로나가 지속 되는 과정에서 중소 상공인뿐 아니라 자영업자들의 삶, 임대료를 지불하고 살아야 하는 모든 사람들(임대교회 역시)의 현실은 말로 표현하기조차 어렵다. 티비를 켜면 아프리카의 참상들과, 난민들의 참상과 코로나의 참상들이 우리의 시야와 가슴을 친다. 우리들이 이러한 문제들을 하나니라도 해결할 수 있는가? 하여 전통적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한다. 그리하면 그 기도가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다. 기도는 보이지는 않지만 그 기도의 간절함을 주께서 들으시고 응답해 주심을 믿는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자도 되게 하고 각종 질병들을 고쳐주고 치유하신다. 우리가 겪는 상처와 배신의 아픔과 이별의 슬픔까지도 치유해 주신다고 믿는다. 아버지가 아들의 요구를 끊임없이 들어 주듯이 하나님 아버지는 그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간청하는 모든 것을 들어 주신다고 믿는다. 만일 기도가 응답이 되지 않거나 살려 달라는 자가 죽으면 믿음이 없다고 믿거나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말하면 된다. 고대 이스라엘의 자신들의 계약을 깬 결과로 고난과 고통의 삶을 살거나 탐욕과 배신을 하신다는 믿음이다. 삼국 시대 이후 융성한 불교가 인간의 마음을 자리하고 다스렸는데, 불교가 타락한 것이 아니라 불교를 주장하며 앞세운 인간이 타락한 결과로 유교가 등장하였고, 유교 5백년에 유교를 강조한 인간이 타락하여서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게 되었다. 그것이 곧 기독교의 한반도 상륙이다. 기독교(카톨릭의 구교는 200년이 지났고, 개신교는 135년을 지나고 있다)가 들어 온지 백년과 이백년을 지나가고 있다. 기독교와 교회가 타락하였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타락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타락한 것일까? 기독교가 주장하는 교리와 불교와 유교가 말하는 진리가 다르다. 아니 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질적인 차이” 하나님과 인간의 질적인 차이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차이가 아니던가? 신이 인간과 만물을 만들었지만, 언제인가부터 인간이 신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황금송아지라는 신, 자본주의라는 신, 권력이라는 신, 욕망과 탐욕이라는 신, 거짓말과 바벨탑이라는 신, 자신을 하나님, 혹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신이라고 사기와 사이비들, 이단들의 신, 권력과 자본을 결탁하여 세계를 지배하는 신, 인간을 순간적으로 살상하여 지배하려는 무기의 신, 자연을 자신의 소유로 만들어 욕망의 깨진 독을 채우려는 신, 타인을 이용하여 자기 존재를 과시하려는 신, 타인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자리에서 이제는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아 존재의 근거를 상실한 것도 깨닫지 못하는 모르는 채 하는 망각의 신들을 만들어 낸다. 태초에는 창조주가 인간과 만물을 만들었지만, 지금은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신을 만든다. 불교나 유교가 타락한 것이 아니다. 창조주와 예수 그리스도가 타락한 것이 아니다. 마귀의 후예요 살인자의 후예이며, 거짓말쟁이의 후예인 인간이 타락한 존재인 것이다. 인간이 할 일은 단 한 가지이다. 회개하고 진실로 참회하고 용서를 비는 것뿐이다. 인간이 한 일이라곤 거짓과 살인과 죄를 진 것뿐이다. 주여! 죄인들이 회개할 수 있는 능력을 주옵소서! 용서는 당신의 뜻이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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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칼럼] 지금 여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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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칼럼] 코로나와 역사의 대전환
- 이단 사이비 사교집단 신천지 발 중심의 코로나 전국 확산 공포의 물결에 이어 다시 2020년 8월 15일 전광훈 목사 등과 정치집단들의 야합으로 이루어진 집회를 통해서 초기 방역에 비교적 성공적이라고 평가 받던 한국이 다시금 전염병의 전국 확산 공포를 맞았다. 코로나와 지구온난화의 기후 변화로 물 폭탄을 맞은 국민들과 서민들의 삶이 시름에 젖었는데 사이비 청교도 후예들과 이기적 정권회복을 찾는 정치집단들의 결집이 다시금 국가와 민중들 서민들의 경제와 삶을 위협하는 현실을 만들고 있다. 이러한 소위 보수를 자칭하며 태극기와 성조기 일장기들을 흔드는 집단들 이것을 조장하는 미통당 전후 세력들이 자신들은 이들과는 무관하다는 오리발을 내밀고 있다. 헤롯과 같은 간교한 여우들이 창조주와 성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짓밟고 있다. 한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주님의 말씀을 조롱하고 생명 살리기 위해서 오신 예수의 구원과 해방적 삶을 비웃는 행동을 서슴없이 하고 있는 것이다. 친일과 분단팔이로 자신들의 정권과 기득권 부귀영화를 누리던 자들이 자신들의 예 영화를 회복하고자 갖은 추악한 야합을 쉬지 않고 있다. 미통당의 5.18 40주년이 다 지나가는 시간에 무릎을 꿇는 쇼를 누가 그 진정성을 믿을 것인가? 북미회담의 빈손과 미중의 무역 등 패권 다툼과 코로나 공방, 군사적 훈련과 시진핑의 한국 방문 회담, 북한의 slbm 잠수함 건조, 미일의 군사훈련 등 한반도 주변의 안 밖의 상황은 어떤 역사적 연출이 될지 아무도 모른다. 코로나의 전국 유행을 알리는 위중한 상황에도 의사들은 자신들의 집단 이익을 위해서 장기 파업을 주장하고 실행하고 있다. 사이비 이단들과 함께 사회 전 분야에 썩은 냄새들이 진동을 한다. 이웃과 타인을 위해서 헌신과 봉사, 희생정신들은 사라지고 개인과 집단의 이기작 이익공동체가 사회를 혼돈과 카오스로 빠뜨리고 있다. 그동안 교회는 한국 천민자본주의 성장에 기생, 혹은 공생을 도모하며 나름대로 자기 삶을 즐겨왔다. 물론 풍족한 대형교회라고 하면 전체 교회의 3%정도이나 이러한 신의 이름과 성서를 상품화하여 많은 혜택을 누려온 것은 부인할 길 없다. 정규신학대학을 졸업하여 목사가 된자나 군소 신학을 졸업하여 목사가 된 자들이나 혹은 신의 은총으로 성직의 이름을 가지게 되자들 모두 나름의 삶을 누려온 것이다. 그러나 이제 한국사회는 과거의 어리석은 대중이나 잠든 민중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평균적으로 보면 소위 평신도 층의 지식과 정보 수준이 목사를 능가하는 경향들이 많다. 물론 교회 성장 1세대 시기의 영향력이 아직은 남아 있는듯하다. 그렇지만 코로나와 함께 혁명적 사화문화 변화와 함께 교회 역시 예외가 아니다. 대면에서 비대면(uncontact & on-contact) 사회FH 전환 되는 것은 막을 수가 없는 것이다. 정부가 하는 일은 국만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것이 제일의 의무이고 권리이다. 이러한 일에 훼방을 하고 오히려 전염병을 전국으로 확산 시키는 일을 한 자는 교회탄압, 종교탄압 운운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존 칼빈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정부에 대하여서는 저항을 해야 한다고 하였고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미친 운전사’는 끓어 내려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정 반대의 경우이다. 정부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려는 정부의 소임을 선하게 지키려는 것이고 이러한 생명 지키는 일에 전염병을 확산 시키는 일은 성서와 하나님의 뜻에 역천하는 행위이다. 이러한 것을 탄압으로 규정하거나 말하는 것은 오히려 성서의 말씀과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망령된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지금 상황은 코로나로부터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다. 코 로나는 세계화와 지구촌 세계를 새롭게 규정하고 있다. 인간이 대면하고 가까이 만나는 것을 축소하거나 막아서고 있다. 예수가 온 것은 생명을 살리는 것이 목적이고 인간의 모든 포로와 억압으로부터 자유와 해방의 구원을 위하는 것이다. 예수는 갈릴리 민중들의 억압과 포로 된 삶을 자유와 해방을 선포하고, 그들을 질병으로부터 치유하며, 악한 마귀와 귀신 악의 모든 세력, 즉 생명을 왜곡 시키는 불의한 세력들로부터 통전적인 해방을 이루어 주셨다. 사탄, 악의 세력은 거짓을 일삼으며, 교활한 여우 헤롯처럼 악한 자들과 꾀를 만들고, 죄인들과 길을 함께 걸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는 것을 즐겨한다. 인간은 매우 현명하고 영리하며 강한 것 같은 존재 같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이성과 학문 문화들이라는 것이 이번에 코로나 바이러스를 접하며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 가를 확인하게 된다. 이기적 탐욕과 욕망을 통하여 이루어 온 모든 바벨탑 같은 결과들이 다 버려질 쓰레기보다 못한 허상들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남는 것이 있다면 서로의 생명을 지키고 살리는 일이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빙자한 썩은 정치 집단들과의 야합을 통해서 자기 존재를 부각시키고 드러내고자 하는 추악한 일을 속히 중단하고 버려야 한다. 사랑제일교회 발 전국의 확진 자들의 증가가 시시각각 보도되고 있다. 중대형 교회나 자리가 잡힌 교회들은 개척교회나 미자립 교회들보다는 훨씬 덜 어렵다. 서로가 돕는 과정, 나눔의 과정에서 여기서도 이웃 사랑의 선행이 필요할 것이다. 국가나 사회, 각자가 있는 삶의 현장에서 서로가 돕거나 나누는 사랑의 실천이 필요한 시기일 것이다. 콩 한 조각이라도 나누어 먹던 조상들의 좋은 전통과 미덕을 살리는 일이 필요할 수도 있다. 나라와 나라 사이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들 모두가 함께 더불어 이 코로나의 위기를 극복해야 할 것이다. 이 극복의 길에 기독교나 교회가 솔선수범 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 지금 이 시기는 냉철한 이성과 정의로움, 그리고 따듯한 사랑의 실천이 필요하다. 어려운 재난의 시기에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돌보는 일을 우선적으로 해야 한다. 의식주의 기본권과 그들의 인권이 훼손 되지 않도록 서로를 배려하고 위로하며 격려하는 상호의 돌봄이 필요한 시간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수의 마음을 품고 예수의 심장으로 이러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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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칼럼] 코로나와 역사의 대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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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칼럼] 역사의 시간
- 지금 세계사의 시간은 어렵고도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그러나 지난 인류사가 어렵지 않던 시절이 있었던가?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계를 흔들고 있는 상화이고, 미국 주도의 세계 패권의 힘이 중국과 맞서는 현실을 가볍게 여길 수 없다. 경제적으로 G2에 올라오고 타이완과 홍콩 등의 한 국가 주장과 시진핑 주석의 사회주의(신 공산주의?)의 강한 드라이브는 과거 영국의 홍콩 식민지역사의 경험에 비취어 오늘 날 자본주의, 즉 미국과 서구 세계에 대한 강한 저항과 자존심의 싸움이기도 하다. 장개석은 소위 그리스도인 이었다. 문화혁명을 통해서 장개석을 타이완으로 몰아 낸 모택동은 중국을 공산당으로 통일하고 자본주의를 받아 드리며 잠자던 중국을 세계 역사의 무대 전면에 올려놓았다. 기독교와 자본주의는 해석하기에 따라서 맞아 떨어지는 부분이 상당하다. 영국으로부터 아편전쟁을 겪고 150년 식민 경험을 한 이후 홍콩을 돌려 받은 중국은 개혁 개방과 함께 세계의 새로운 강대국의 반열에 올라 서 있다. 미소의 냉전에 대하여 이제는 미중의 신 냉전 시대가 도래 한 듯하다. 미중의 패권 전쟁에 반환 된 홍콩은 국가보안법이 통과되고 홍콩의 민주 시민들의 앞날은 매우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이러한 변화된 세계적 상황은 한반도의 역사적 시간과 매우 밀접한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남북의 분단 속에서 지금까지 한반도를 점령한 미군의 통치는 계속 되고 특히 남한의 대한민국은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역사를 이루어가지 못하고 있다. 북의 공산 사회주의와 남한의 썩은 자본주의는 상충된다. 김정은도 자본주의 시장에 대한 개방 정책을 생각하고 있지만 미국의 비핵화와 제재 정책 등으로 쉽게 풀리지 않고 있다. 촛불혁명을 내세우는 문재인 정부가 하반기를 가고 있다. 친일, 독재와 학살 사기 농단 세력의 후예인 미통당과 그동안의 분단팔이에 세뇌 당해 온 세력들은 남남 갈등을 부추기는 현상은 여전하다. 세계의 재편과 동북아의 새로운 정세와 동남아시아와 유럽의 변화와 아프리카와 남미 등 세계는 뒤 틀려 가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의 시간을 잘 파악해야 한다. 분단의 문제는 쉽게 풀리지 않는다. 인간의 심연을 들여다보면 하나의 문제가 풀어지면 또 다른 문제가 대두된다. 전쟁과 싸움은 코로나가 잠잠 하면 새로운 바이러스가 등장 하는 것과 같다. 보수는 보수대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 하고 진보는 서님과 민중들을 팔아서 자신의 욕구를 채우려 한다. 미통당은 썩고 부패한 세력이라고 치자. 민주당의 국회의원들이 여러 채의 집을 가지고 있으면서 하는 부동산 정책은 거짓이다. 정말 인간다운 인간을 찾기 힘들다. 거룩을 내세워 밥벌이 하는 종교귀족들도 그러하다. 역시 답은 잠에서 깬 민중이다. 민중은 누구인가? 현실의 자본과 권력의 중심에서 항상 소외된 삶을 사는 변두리 사람들이다. 이들은 기득권에 매여 있지 않다. 이들의 깨어난 힘들의 연대적 개혁과 혁명의 길만이 답이다. 오늘의 삶은 존재보다는 소유와 정복에 있다. 진정한 가치와 의미를 상실한 인간들이 무엇인가를 자신의 소유로 만들어야만 불안한 마음과 정신을 잠시나마 안정감을 찾을 수가 있는 것이다. 크고 작은 문제들이 끊임없이 꼬리를 문다. 이러한 문제들에 사람들은 이골이 나있다. 한 시도 쉬지 않고 늘어나는 인간들의 문제에 대하여 사탄들 악한 세력들은 춤을 춘다. 악한 세력들이 하는 일은 악을 도모하고 죄인들과 같이 가며 오만한 자리에 앉고자 한다. 이 세상에는 악한 세력과 선한 세력들이 공생하며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다.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과 처지는 다를지라도 유사한 고통과 고난들은 곁을 떠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운 환경에 대하여 대처하거나 이것을 극복하는 것들의 방법은 전혀 다르다. 사람들은 평화와 행복을 갈구한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와 행복들은 혼자만으로는 이루어 낼 수가 없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삶의 환경은 유기체적인 네트워크가 형성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나와 너가 함께 사는 사회적 동물이고 정치적 동물이며 관계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는 너를 부르고 너는 나를 부르며 서로가 필요로 하는 존재로 있기 때문이다. 역사와 시간은 마주쳐 흐른다. “도전과 응전‘의 반복을 통해서 더 큰 도전과 응전을 경험하며 산다. 가장 어려운 문제는 인간이란 존재의 깊이를 이해하는 일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크고 작은 것들은 산처럼 쌓이고 큰 바다를 이룬다. 작은 빗방울들이 모여 내를 이루고 강을 이루며 마침내는 큰 바다의 대양을 이룬다. 역사의 시간은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떤 문제들을 가슴에 안고 흐르고 있다. 슬픔과 눈물, 억울함과 고통의 잉태를 통하여 새 생명을 탄생시킨다. 시간은 ”영원한 현재“를 가르친다. 생명의 출산은 신비롭고 위대하다. 한 생명은 저 우주와 동일하다. 한 생명의 의미와 가치는 인간의 생각과 이성으로는 저울질 할 수 없고 계산할 수 없다. 인간이 인간을 조종하고 인위적으로 만들려 한다면 그것은 이미 생명 자체의 손실을 가져오고 극단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 사회는 매우 살벌하고 냉철하다. 어떤 잘못들을 구분하기도 힘들고 용서라든지 이해를 하려는 아무런 공간이나 노력들이 보이질 않는다. 역사의 존재적 시간은 지금도 운동하고 있지만 이것을 담보해 낼 인간들의 움직임은 보이지를 않는다. 창조주를 말하지만 그의 뜻은 아랑 곳 하지 않는다. 창조는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아름다움을 짓밟는 것들이 홍수를 이룬다. 우리는 역사가 시간을 창조 하도록 허락해야만 한다. 진정한 생명의 가치와 진리를 실현 시키려면 창조와 역사는 분리 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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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칼럼] 역사의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