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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난민과 예수, 그리고 한반도
    7~80년대 필자는 서남동 교수와 안병무 교수 그리고 한신 교수님들과 함께 민중신학을 알게 되었다. 아니 그분들에게서 민중신학을 직접 배우고 토의하고 세미나 등을 가졌다. 민중들은 고대에도 그리고 중세를 지나 계몽시대와 근 현대까지 존재한다. 시대마다 민중의 모습은 문화적 현실에 따라 다르다. 역사는 대개의 경우 있는 자와 가진 자의 역사로서 기술된다. 삼성에서 일하다 병이 들어 죽은 노동자의 이름은 그저 안개와 같을 뿐이고 이병철이나 이건희 이재용은 역사의 전면에 거론된다. 권력자와 지배자 그리고 자본가들의 역사는 중심에 있고 그들로부터 억압과 착취를 당하며 희생물이 된 민중들은 기억조차 하지 않으려 한다. 먹을 곳이 있는 곳에 벌레들과 기생충들이 모여든다. 특히 살아 있는 권력이나 자본가의 주변에는 아부와 아첨꾼들 거짓된 레위인들이 우글거린다. 구약성서의 배경은 거의 4천년 이상이고 신약성서는 2천년을 넘어서 있다. 한국에 기독교의 원년을 카톨릭은 1784년 개신교는 이후 1884년이나 1885년을 논한다. 1882년 조미 수호조약이 있고 1894년에는 동학농민혁명이 있었다. 그리고 1905년과 을사늑약, 테프트-카쯔라의 미일을 통한 반도와 필리핀의 지배 승인의 야합이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1910년은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치욕적 민족 식민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 일제의 억압과 교활한 통치의 시대를 지나는 동안 우리 민족구성원들은 강제의 이주민 아니 난민들로써 만주와 우라지보스톡과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에 흩뿌려졌었다. 그리고 우리의 아리따운 소녀들은 일본의 탐욕적 정복의 전장 터에 성노예로 끌려가고 우리의 젊은 청년들과 아비들은 그 전장터의 총알받이로 죽어갔다. 그들은 분명 난민이었다. 분단 이후의 북으로부터 내려 온 사람들과 한국세계전쟁(6.25)으로 인한 1000만의 이산가족과 수백만의 사상자들, 그리고 고아와 과부 나그네들이 한반도를 뒤 덮었다. 그들은 분명 난민이었다. 월드비전을 비롯한 많은 NGO들은 그 전쟁과 함께 지금도 존속하고 있다. 성서는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의 430년의 노예 살이의 억압으로 그들의 한의 소리, 부르짖음(체아카)을 들으셨다. 하나님께서 40년 궁중살이를 떠나 살인자로 미디안 광야에서 외롭게 떠돌던 모세(물에서 건진자)가 80세가 되던 그 나이에 해방의 깃발을 들고 앞장서라 명하시고 60만 장정들과 그의 권속들을 데리고 탈출(EXODUS)을 명 하신다. 난민들은 억압과 죽음의 질곡 속에서 떠도는 나그네요 떠돌이요 민중이며 피난처와 보호처가 필요한 세상의 권력과 자본의 중심으로부터 아니 자신들의 민족과 국가와 사회 종교들로부터, 그리고 자신들로부터도 소외된 버림받은 존재들이다. 물론 그중에는 많은 세월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었던 한국 사람들처럼 코리안 드림을 꿈꾸는 제 3세계 가난한 민중들이 있다. 좀 더 나은 삶의 환경과 질을 높여보고자 하는 직업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세계화는 다문화이며, 다민족화이며 이제 민족이나 국가적 차원을 넘어서는 세상을 살고 있다. 물론 대한민국의 자국의 보호와 위험을 막는다는 존재의 원칙적 자세들을 이야기 하는 것을 인정한다 치더라도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본시에 나그네요 떠돌이요 난민인 히브리인들이요 하비루. 하삐루, 혹은 암-하렛츠, 곧 땅의 사람들이다. 지금까지의 강대국들과 다국적, 초국적 기업들의 야합은 인간을 생명체로 보지 않고 하나의 자기들을 위한 탐욕의 도구들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모든 난민들은 이들과 또한 이들과 밀통을 통한 야합의 결과로 발생한 힘없는 민중들이다. 무기장사들과 이들을 부추겨서 난민들을 조장하는 간악한 탐욕꾼들의 야합이 그 속에는 도사려 있는 것이다. 예수 시대에도 구약 시대에도 인간이 태동한 그때부터 실상의 난민들은 존재했었다. 그들은 떠돌이, 민중이라 부른다. 나라를 빼앗기고, 고향에서 쫓겨나고 가족과 흩어져야 하는 난민들의 역사가 세계사이다. 인간들은 착각의 존재이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삶의 터전이 영원히 흔들리지 않고 반석이라고 믿는다. 자신이 가진 부동산과 재물들, 권력들이 언제나 자신을 지켜 주리라고 혼돈 속에 산다. 자신의 젊음과 자신의 건강이 언제나 행복한 오늘을 만들어 줄 것이라 생각한다. 아마도 가장 똑똑하고 지혜로운 존재라고 자만과 오만에 빠져 사는 인간들의 이성과 학문, 기술들이 자신들을 구원해 주리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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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7-12
  • 역사의 주체는‘민중’이다
    지금까지의 역사와 정의 평화는 궁중 중심사요, 지배자와 강자 중심이며, 권력과 자본가의 중심이자, 힘 있는 자와 가진 자들의 역사이었다. 그것은 동시에 여성을 배제하고 소외 시킨 가부장적 남성중심의 역사이었다. 민중이란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으나 그 초점은 바로 권력과 자본, 문화와 사회, 종교와 학문, 정보와 지식 등 인간 삶의 모든 중심으로부터 소외 되고 밀려 난 변두리와 주변부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대 다수의 사람들을 총칭한다. 그들은 권력과 자본가들, 강자와 힘 있는 자들, 그리고 자신들이 노동을 통해서 만든 생산물로 부터까지 배제와 소외를 당하고 사는 억울한 자요 억압과 착취를 당하는 자이며, 서리서리 한을 쌓고 사는 자들을 말한다. 촛불혁명의 주체이면서도 그 촛불권력자와 자본가들로 부터까지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사는 자들을 말한다.일제를 거쳐서 해방공간에서의 남북의 미소 점령군에 의한 통치, 군부 유신 독재세력과 박정희 몰락 후의 신군부 전두환 노태우의 세력들, 김종필을 중심으로 1997년 민주정권을 이루지 못한 김대중 김영삼 등의 유신 군부 독재 세력과의 정치적 야합은 민중들을 배신한 권력의 탐욕적, 반역사적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추악한 악의 세력들은 사이비 종교 세력들의 아부와 아첨을 통해서 민중들에게 아편을 주사하는 것으로 유지 지탱된다. 지금까지의 역사란 이러한 민중을 탄압하고 압살하고 속이는 불의한 권력들과 자본가들, 그리고 사이비 언론들과 사이비 종교 세력들의 야합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들이다. 고대로부터 이러한 악의세력들에게 저항과 투쟁으로 일관된 싸움을 통해서 역사의 바름과 정의를 세우고자 하는 민중들의 크고 작은 운동들은 지속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 움직임들은 불의하고 악한 세력들에게 언제나 짓밟히고 억압당하며 희생물의 퇴적이 되어 온 것이다. 팍스로마나 세력과 야합된 기독교 세력은 유럽과 서구사회의 인간의 탐욕을 충족시키는 식민지 확대 세력의 영양분으로 오늘까지 명맥을 유지 시켜 오고 있다. 서구 기독교세력은 이들의 지배와 통치의 수단과 방법의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넉넉하게 해 오고 있다. 소위 로마를 거쳐, 대영제국의 “해가지지 않는 나라”그리고 청교들에 의해서 아메레카 인디언들의 정복과 학살 억압의 역사를 이룬 ‘경찰국가’와 다국적 초국적 기업들이 있기까지 역사적 예수를 팔아서 그 상품으로 오늘의 불의한 세력유지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는 것이다. 소위 촛불정부를 운운하며 중정을 만들어 정보와 공작정치로 분단의 현실과 상황을 십분 악용하며, 농민과 노동자들의 저곡가 저임금의 착취와 그들에 대한 정치적 억압과 탄압, 유신 독재의 중심에 있는 김종필, 일제의 죄사함도 제대로 받지 않은 채 오히려 밀담을 통해 민족의 한과 억울함을 서푼에 팔아넘긴 그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의 훈장을 추서하는 눈속임은 여러 가지 정치적 현실과 타개를 생각한다 할 지리라도 역사청산과 국민들의 바른 역사교육 차원에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문재인 대통령을 지지했고 지지하는 사람으로서 분명히 말하고자 한다. 진정한 적폐청산 없이는 참 평화와 민주, 통일의 길은 반쪽이 될 수밖에 없다고 단언한다. 역사의 청산은 뒤로 미루고 보류할수록 어려워진다. 그러한 행태는 왜곡을 낳고 또한 새로운 적폐를 쌓게 할 뿐이다. 진정한 지도자는 역사에 아부아첨 하는 사람이 아니라 당시의 삶에 대하여 ‘예’ ‘아니오’를 분명히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정치적 타협이나 협상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상징적 역사현실을 무시하는 것은 미래의 역사를 회복할 수 없는 지경으로까지 끌고 갈수 있는 것이다. 평화와 통일은 남북의 민중들을 역사의 주체로 인정하고 그 중심에 놓아야 한다.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민중들의 역사의 중심으로부터 주변과 변두리로 몰아가는 것은 거짓된 평화요 거짓된 통리 행보이다. 우리의 평화와 통일의 길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그 길은 멀고도 먼 상황이다. 그러나 반드시 이루어질 평화요 통일이다. 남북의 상황은 변화의 지축을 흔들고 있고 한반도 주변국들의 역사적, 외교적 틀이 흔들리고 새롭게 짜여지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다극화 되고 다변화된 역사를 충실히 성찰하고 시대적 하늘의 소명과 사명을 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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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6-28
  • 센토사 평화와 고요의 시작
    2018년 6월 12일 고요와 평화의 섬 센토사에서 민족분단 73년, 한국세계전쟁(6.25, 16개국 직접참전 37개국 후방지원)이 일어난 68년, 전쟁휴전 38년 그 날에 성조기와 인공기가 펄럭이는 그 앞에서 북미의 정상들이 웃음을 지며 악수를 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공동합의문은 내용은 ①북미의 평화와 번영을 이루는 새로운 관계수립 ②양국의 한반도에 대한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평화구축의 노력 ③2018년 4월 27일의 판문점선언의 재확인과 북한의 한반도에 대한 완전한 비핵화를 위한 작업의 약속 ④북미의 확인된 전쟁포로, 전쟁 실종자들의 유해를 즉각 송환 수습의 약속 등이다. 지난해까지 우리 한반도는 핵전쟁의 공포에 시달려야 하였다. 매일 신문과 방송 모든 미디어 매체들은 북미의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공언하고 핵과 미사일의 위력을 자랑하였다. 미국의 폭력적 발언에 이에 응수하는 북한의 대응들은 한반도 뿐 아니라 동북아와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는 발언들을 홍수처럼 쏟아냈다. 전후처리로 남북에는 각각 소련과 미군의 점령군들이 한반도를 장악하고 자신들의 세게 패권을 위하여 친소와 친미의 분단국가를 세우고 마침내는 씻을 수 없는 민족끼리의 동족상잔의 전쟁을 일으키고 이러한 한민족의 죽음과 상처들을 기반으로 미국의 경제적 불황을 극복하고 일본이 다시 일어나며 중국 역시 그들의 체제 안정과 국가적 기반을 다지는 일에 한반도를 짓밟아 버려왔다. 한반도의 세계전쟁(6.25)는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의 강제병합으로 인한 40여 년의 식민지통치의 결과이다. 그들의 강압적이고 교활한 통치가 미국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투하로 끝나는 해방과 광복은 일본의 속국의 패전으로 말미암아 한반도 역시 패전국으로써 미국과 소련을 위주로 하는 전승국의 전후처리에 달려 있었다. 영국의 처칠과 소련의 스탈린 그리고 미국의 루스벨트의 세 강국이 거두들의 손 안에 한반도의 운명이 달려 있었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루스벨트는 한반도가 적어도 40여년을 보호국으로써 있어야함을 역설하고 신탁을 주장하였다. 김구를 중심으로 한 임정의 존재를 무시하고 1882년 조미 수호조약과, 1905년 태프트-카쯔라의 밀약을 통해서 일본으로 하여금 한반도에 대한 실질적 지배를 승인해준 역사와 함께 또 다시 자신들의 패권 야욕을 들어낸 것이다. 민족의 독립의 과정에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모두 치열한 운동을 전개해 왔다. 그 때의 목표는 오직 하나 민족의 독립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전후처리 문제에 직면하여 북은 소령의 점령군이 남은 미국의 정령군이 차지하면서 미국의 소련에 대한 남군저지를 막는 전략이 필요하고 이러한 전략을 지킬 이데올로기는 소위 좌익세력을 억압하고 우익세력을 보호하면서 분단 된 남한 만의 국가를 세우는 일이었다. 다시 말하면 분단은 세계대전의 시작에서부터 잉태되고 있었고 일제의 식민지는 그것을 확정짓는 역사적 비운을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역사의 과정 속에서 숱한 죽음과 아픔, 상처와 슬픔의 사연들은 헤아릴 수 없이 있었다. 이 길고도 지리한 세월 후에, 이제는 때가 되어 남북이 만나고, 북미가 만나서 휴전을 종전으로, 종전을 영구적인 평화협정으로 근거지우고 남북교류의 활성화를 시작으로 종국에는 통일의 길을 활짝 열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란 무엇인가? 불완전하고 모순덩어리인 인간들이 만들어 가는 역사란 도대체 무엇인가? 선과 악의 공존과 성령과 악령의 대립 속에서 우리가 취할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인가? 성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 온 역사적 예수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정의와 사랑의 동전의 양면을 품에 안고 얽혀진 실타래를 풀어가며 쌓여진 상처를 치유하며 슬픔의 눈물을 닦아주며 함께 더불어 생명의 역사, 해방의 역사, 화해의 역사, 통일의 역사를 이루어 가야 한다. 우리는 서로 억눌려 온 역사의 모든 짐을 벗어야 한다. 싸움과 전쟁을 멈추고 신이 원하고 모든 사람이 바라는 모두의 행복을 구가해야 한다. 북미가 이루지 못하면 이제는 우리민족 끼리 이 분단의 벽을 허물고 건널 수 없는 계곡을 건널 수 있는 평화와 통일의 다리를 든든히 놓아야 한다. 여기에는 보수와 진보가 없다. 역사적 친일세력과 분단을 악용한 독재와 학살세력들을 청산하고 역사의 기초를 바로 세워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새 역사의 중심에는 그동안억압과 포로 되어 있는 변두리와 주변부에서 한과 억울함, 가난과 착취를 당해 온 대다수의 민중들이 존중되고 대접받는 통일이 되어야 한다. 잘못은 인정할 수 있어야 하고 진정한 반성과 회개하는 것에 대한 통 큰 용서와 받아들임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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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6-20
  • 춤추는 통일
    수십 년 이전에 필자가 한신에 들어가기 전 적어도 40년은 되었을 어느 해에 수유리 소재 송암교회에서 민주화 보고 집회 후 뒤풀이 마당에서 문익환 목사님께서 덩실덩실 춤추시던 모습이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진다. 기장은 60년대부터 7~90년대까지 민주화와 통일의 기도를 행동으로 실천해 오는 교단이다. 7~80년대에 박정희의 저곡가 저임금 수출주도형 중심의 정책으로 농민들과 노동자들의 임금과 삶을 억압하고 착취하며 그들의 희망을 짓밟았던 그 시절에 그래도 예루살렘의 성전중심의 권위 있는 제사장보다는 흑암의 갈릴리 이방 사람들, 생산자이면서도 생산물로부터도 소외당하고 인간이하의 대접을 받던 그 시절에, 기장은 자본주의 성장과 편승하여 재벌과 불의한 권력에 기생하지 아니하고 병들고 가난하며 힘없이 사는 변두리 사람들, 자본과 권력의 중심으로부터 약자와 삶의 현장의 변두리로 내 몰리며, 주류사회 인들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는 받고 사는 민중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친구가 됐다. 절망을 희망으로 살도록 하나님의 정의가 강물같이 흐르고, 정의의 바탕 위에 사랑과 용서, 민족의 화해와 평화, 자유와 평등. 외세를 배격한 진정한 자주와 민족. 민중 주체의 통일을 부르짖고 몸으로 실천하였다. 현재의 기장은 교인수가 많이 줄어들고 리더쉽도 예전 같지가 않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의 부재를 다시금 살리려면 다시금 겸손하게 과거의 향수에 젖어 지나간 추억만 되새김질 하는 게으름과 나태에서 벗어나서 예수와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우고 상품화 하는 자본주의 찌꺼기를 붙잡는 껍질들과 자만을 과감히 버려야 한다. 근자에 며칠 동안은 한반도와 주변정세가 춤을 추고 있다. 4.27 남북정상회담 이후 한미 멕스센더 연합훈련 등으로 북한은 한미의 진위를 의심케 되었고, 여기에 대한 강경한 담화 등으로 예측할 수 없는 협상과 국제 장사꾼인 도널드 트럼프의 6.12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 취소와 이후의 전격적인 통일각의 남북 제 2정상회담 등 정말 숨 막히는 연출들로 밤잠을 설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만큼 통일의 길은 살얼음판 같고 동시에 통일에 대한 73년의 민족적 염원이 얼마나 절실한가를 알고도 남는다. 한반도의 분단을 초래한 남북의 분단고착의 시작은 미소의 전후처리에 있고 특히 루스벨트의 40년 한반도의 정치적 보호주장과 신탁에 있다. 미국은 1882년 조미수호조약과 1905년 태프트- 카쯔라의 밀약으로 일본에게 한반도의 실질적 지배를 승인하였다. 조선반도와는 한 번의 의견 교환도 없이 그리고 마침내 2차 대전 후의 전승국의 갑질을 하며 북은 소련이 남은 미 점령군이 오늘까지 신 식민지 군 통치세력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미국은 자국의 이익과 동북아 패권을 유지, 지탱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던가. 그리고 40년 동안의 식민지 군국주의의 역사와 그 부활을 학수고대 하는 일본이고 다음으로 한국세계전쟁에 참여해서 국가의 안정과 경제적 근거를 확고히 하고 다시 미국과 패권 싸움을 시작한 중국 왕 서방의 음흉한 계산, 그리고 과거 한반도의 북쪽 점령군의 맛을 톡톡히 본 북극곰의 러시아일 것이다. 그리고 한반도의 지정학적 입장을 잘 알고 있는 영국과 프랑스 등 과거 식민지 확장 정책으로 세계를 지배 하였던 강국들의 계산이 깔려 있을 것이다. 다시 국제 장사의 두목 중 하나인 부동산 업자 트럼프가 전격적 취소를 하였던 6.12 싱가폴 북미정상 회담 개최를 위한 북미 실무회담을 성김과 최선희가 판문점에서, 그리고 북한 노동당 대남담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이 폼페이와의 만남을 위하여 워싱턴으로 날아갔다. 한반도의 통일은 춤추고 있다. 그래도 좋다.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춰서 통일의 날 이루어지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시편 23편은 주님이 목자 되시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시인은 고백한다. 그러나 분단을 살면서 심연의 고통을 알고 있는 한민족은 통일이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는 것이다. 통일문지기, 아니면 통일의 청소 꾼이 되어도 좋다. 통일은 누군가와 만나는 것이다, 통일은 누군가와 나누는 것이다. 통일은 누군가와 사랑을 하는 것이다. 통일은 누군가와 새로운 희망을 만드는 것이다. 통일은 누군가와 새 역사를 가슴에 쓰는 것이다. 통일은 누군가와 희망을 설계하고, 통일은 누군가와 역사의 새 지평을 여는 것이다. 통일은 누군가와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고 보듬는 것이며, 통일은 함께 손에 손을 맞잡고 쓰러질 때까지 덩실덩실 춤사위를 돌리며 춤추는 것이다. 통일은 흰돌 강희남 목사가 말씀 하셨듯이 자본과 권력의 중심에서 변두리로 밀려나서 주류사회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사는 민중들이 역사의 주체가 되어 그 중심에 서는 것이며, 다시는 눈물과 억울함과 슬픔, 그리고 절망과 좌절이 없는 하나님의 나라. 민중들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다. 너무 기뻐서 주체할 수 없도록 춤을 추는 춤추는 통일을 위해서 우리 모두 일어나 빛을 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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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6-08
  • 살얼음판과 통일
    사람의 삶과 역사적 내일의 결과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최선의 준비와 기도가 요청된다. 한반도의 분단의 시작은 전후처리 문제로 미소 냉전체제하에서의 국제적 요인 혹은 외부적 요인과 함께 해방공간에서의 미군정의 대한정책과 국내적 요인의 좌우의 분열의 내제적 요인 등이 이야기 된다. 카이로 선언 이전부터 루수벨트 정부는 한반도의 전후처리 문제에서는 40년의 신탁통치를 설정하고 한반도의 당시의 정세를 열강의 보호국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1882년 한미 수호조약이래 일제의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와 1905년의 태프트-카쯔리의 밀약을 통해서 이미 미국은 한반도에 대한 일제의 지배권을 승인하였다. 전후처리 이후의 강대국의 세계패권 전략에 의해서 한반도는 이미 분단의 과정이 확정되고 있었고 이러한 과정에서 미국은 3.8선을 분단선으로 획정하는 결정을 한민족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결정해 버린 것이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 한반도에서 치러진 사실은 한반도가 일제를 중심으로 한 열강들의 탐욕적이고 침략적인 노골적인 극단적 표출의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그토록 원하던 광복과 해방은 타율적 힘에 의해서 되어 지고 분단으로 이어지고 한국세계전쟁의 민족상잔을 겪어야만 했다. 2018년 4월 27일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서 한반도의 전쟁중지의 종전선언과 한반도의 영구적인 평화협정을 약속하고 있다. 분단 상황의 시작이 열강들의 힘에 의한 것이라는 국제적 요인이 있었듯이 이러한 정전선언과 평화협정 역시 한반도 주변 강대국 미국을 중심으로 하고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일본 등 자국의 이익추구를 계산하는 국제역학 관계의 셈 안에 갇혀 있다. 그래서 국민의 정부의 김대중 김정일의 남북정상회담의 6.15선언은 7.4 공동성명과 남북 기본합의서 등을 포함하여 자주 민주 평화 그리고 우리들 만족끼리라는 한반도 주체체력을 중심으로 한 통일정책을 합의 선언한 바 있다. 그리고 노무현의 참여정부 말기에 남북정상의 2차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진 10.4 선언의 내용이 문재인 정부로 하여금 구체적인 실천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본다. 민족의 통일국가를 원하는 시도는 일제치하의 독립운동 초기부터 있어왔다. 그것은 우리 민족구성원 누구나가 바라는 꿈에서도 소원이다. 73년이 되는 분단시대를 살면서 이제 역사의 새로운 방향은 달라지는 것을 깊게 느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내일은 살얼음판이다. 항상 진중하고 신중한 발걸음을 해야만 할 이유이다. 돌다리도 두드리며 가야하고 그러면서도 역사의 전환을 위한 용기 있는 결단을 필요로 한다. 역사는 지혜와 용기를 함께하여 전쟁의 종지부와 영구적인 평화협정을 완결지어야 한다.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를 말하지 않는다. 불의와 부패 비리가 없는 상태, 그리고 저 출산의 원인이 사라지고 양극화의 골이 메워지며 함께 더불어 존중되고 서로가 신뢰하며 진정한 민주와 정의가 실현되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상태를 말한다. 한 사람의 평화가 완성된다고 해서 전체의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전체의 평화가 이루어진다고 해서 한 사람의 평화가 되어지는 것도 아니다. 개인과 전체의 구원은 나누어질 수 없는 함께와 전체의 문제이다. 사람들은 각자의 삶의 현장과 그가 처한 환경과 상황이 있다. 우리는 그 한 사람의 평화와 생명을 관심해야 한다. 동시에 우리는 그 한사람이 사는 전체적 역사가 구조악으로 치닫는 것을 수정하고 변화시키며 관심해야 한다. 민족 전체의 생명과 역사를 외면하고 단순한 정파의 목적을 위해서 민족과 국가의 정도를 그르치는 사람과 무리들은 해로운 존재가 틀림없다. 종교는 존재한다, 그러나 그 종교는 생명들을 치유하고 살리는 구원을 돕는 봉사와 섬김이 존재의 이유이다. 종교가 불의한 세력과 자본에기대어 진정한 진리와 평화를 무너뜨리는 세력과 유착된다면 그러한 종교적 집단은 역사의 발전과 개인을 위해서라도 불필요하다. 민중의 고통과 고난의 중심에서 종교는 그들을 절망에서 희망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인도하며 위로와 격려를 해야만 한다. 종교개혁의 정신은 “ad fontes 원천으로 돌아가라.”이다. 그리고 그 개혁은 새롭게 하시는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매 순간 계속 되어야 한다. 종교는 권력과 자본에 대한 감시를 통해서 민중들의 평화를 지켜내고 각 개인의 실존적 삶의 평화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종교귀족이 되어 자본과 권력에 공생하거나 기생하는 종교는 사기꾼이다. 그것은 성서와 역사적 예수의 삶과는 무관하다. 평화 그것은 너와 나의 평화이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평회이다. 우리가 함께 누려야할 평회이다. 4.27 정상회담과 판문점 선언을 시작으로 6.12일의 북미회담 그리고 한반도의 주변세력과의 계속적인 회담들을 통해서 진정한 평화가 오도록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분단 상황을 청산하고 진정한 평화의 땅과 역사를 우라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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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5-18
  • 만남이 통일이다
    2018년 4월 27일 11년 만에 남북 정상회담은 분단의 상징인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12시 온 종일 진행되었다. 3000여 명의 내외신 기자의 세계 각국에 실시간 타정 되는 회담은 한편의 역사 드라마였다. 우리에게는 일생 한 번의 삶의 시간이 주어져 있다. 73년의 분단 상황에서 사람들은 통일보다는 1민족 2국가 2체제의 존속 안에서 종전을 선언하고 전쟁이 없으며 북한의 비핵화와 체제보장을 통한 평화협정을 체결하자는 것이 회담 시작과 지금까지의 주된 내용이다. 사람은 함께 살든지 아니면 자주 만나고 밥상공동체를 마주 대하면서 관계가 깊어지고 정도 들면서 확대 재생산 된다. 종교적 내세를 생각하고 오늘의 고통을 미래에 대한 새로운 세상으로부터 이겨내고자 한다. 우리의 희망은 무엇인가? 현세에서는 건강하게 장수하는 것을 모두가 바란다. 근자의 평균 수명은 100세라고 한다. 구약의 모세는 120을 살면서 모압 평지에서 흰 머리를 휘날리며 430년의 이집트의 노예살이로부터 구원과 해방을 실행하였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인격이 수치감이나 모욕감을 느끼지 않고 ‘나와 너’의 인격적 삶이 되어 지기를 바란다. 동물과 짐승과는 달리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은 존재가 지닌 격이 있다. 그것이 인격이다. 이것이 무시되거나 멸시의 대상이 되면 그것은 존재의 본질이 부서지고 깨어진다. 사람들의 본질을 악한 것으로 보는 순자가 있고 선한 것으로 보는 맹자가 있다. 성악설과 성선설이 그것이다. 두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은 교육이다. 사람의 본성이 악하니 교육이 필요하고 사람의 본성은 선하지만 사회가 악하니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노장 사상을 깊이 받은 장자크 루쏘는 그의 교육론 에밀에서 인간의 타락을 자연과의 멀어짐, 자연과의 분리로 보았다. 자연의 일부분인 사람이 자연과의 공존을 살 때 인격이 손상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판문점의 도보다리를 다정하게 걸으며 의자에 앉아 자연의 숲의 향기를 마시며 격이 없는 대화를 한 남북의 두 정상의 모습을 보는 남북의 민중들이나 세계의 시선은 역사의 놀라운 드라마를 감동적으로 바라 보았다. 바람과 새 소리를 들으며 그 속에서 되어지는 속삭임의 대화는 분명 한반도의 새로운 지각변동을 몰고 올 것이 분명하다. 남북의 끊어진 철도가 이어지며 도보로, 자전거와 자동차와 열차로, 그리고 공중과 해상의 모든 길을 열어 놓고 당국자뿐 아니라 남북의 전 민중들과 남녀노소 직위와 입장들을 총망라하여 자유로운 여행과 교류가 이루어지고 신의주를 거쳐 베이징으로, 온산을 넘어서 북간도와 우리지보스톡과 모스크바 중앙아시아 유라시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꿈이 아니라 현실로 이어지려는 순간이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레는 하루하루이다. 이제 5월말이나 혹은 6월 초순경에 북미회담이 예정되어 있다.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요구하는 미국과 미국의 북에 대한 체제 보장과 안정 경제적 지원 등을 중심의제로 한 북미 정상회담이 열리 것이다. 아무리 우리민족 끼리를 말해도 오래세월 분단의 과정에서 미국과 중국, 러시아와 일본 등 주변국들의 협력이 있어야만 평화가 이루어지고 끝내는 통일의 길을 순탄하게 열어가는 것이다. 북은 중국을 의지하고 러시아의 협력을 통하여 미국과의 협상을 이끌어 내려는 것이고 미국은 지금까지 그러하였듯이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에서의 자국의 이익을 최대로 이끌어 내는 국가 간의 비지니스를 짜낼 것이다. 인간들이 만든 역사란 서로의 자기유익을 중심으로 한 욕구충족을 이루려는 것으로 점철되어 있다. 민족의 자주와 주체적인 통일의 길, 평화를 담보로 하는 통일의 길을 만들어 가고자 부단히도 기도해 왔지만 이제는 그것의 결실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주변국들을 자동차에 태우고 고도의 외교술과 있는 지혜를 다 짜내어 역사적 열매를 따내고자 한다. 섬기는 리더쉽의 진정성을 가지고 역사의 닫혔던 빗장을 풀고 억울한 자의 한을 풀고 절망을 희망으로 창조하며 어둠을 가르고 동터 오는 새벽의 역사를 쓰고 있는 것이다. 민족의 문제를 자기 유익을 위한 정당과 정치적 목적으로 발목을 잡아끌어 당기는 추악한 모습들이 방해 요소로 다가와도 새롭게 열리는 도도한 역사의 파도를 잠재울 수는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더 이상 중단하고 멈추거나 포기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도전과 응전’을 통해서 평화의 탄탄대로와 다시는 전쟁과 싸움이 없는 생명의 길을 열어가야 하는 것이다. 새로운 역사의 잉태와 해산은 만나는 것이다. 자주 만나고 밥상공동체를 차리고 먹고 마시는 가운데 열매를 갖게 되는 것이다. 새로 시작된 한반도의 봄의 역사를 막을 자는 아무도 없다. 열려라 ‘에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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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5-10
  • ‘평화’ 새로운 시작
    무던히도 추웠던 지난겨울이었다. 그러나 평창 올림픽이 시작 하는 때와 같이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은 신년사를 통하여 한반도의 평화의 포문을 열었다. 물론 이것은 문재인 정권초기의 베를린 선언을 통하여 언제 어디서든지 남북한의 만남을 통하여 평화통일의 길을 열어갈 것을 강조한 바 있다. 13년 만의 남북의 길이 막힌 길을 광야에 내고 이리와 사자와 맹수들이 어린 양과 함께 노는 평화의 그날이 올 것을 받아들이면서 지난 10년 동안 남북은 긴장과 전쟁논리에 시달려야만 하였다. 한반도에서 전쟁은 다시 있어서는 안 되고 그러한 조짐을 영구적으로 차단시켜야 한다는 평화의 봄이 이제 시작된 것이다. 북은 비핵화를 통하여 체제의 안정과 영구보장을 얻어내고 남은 북의 비핵화를 통하여 전쟁과 긴장으로부터 영구적인 평화의 터를 구축하여 진정한 남북교류의 활성화와 통일의 기반을 다져간다는 것이 목적이다. 국가의 최고의 권력을 가진 전직 두 대통령이라는 사람들에 의하여 국민과 민중들은 철저한 배신의 역사를 경험하였다. 그리하여 더 이상 앉아서 좌시할 수 없는 하늘의 뜻과 역사적 사명으로 촛불을 높이 들어 혁명의 횃불을 타오르게 하였다. 촛불혁명의 의미는 진정한 정의와 평등을 기반으로 한반도의 항구적인 평화의 기틀을 공고히 하며 분단의 벽을 헐어서 완전한 상처의 치유를 이루어내며 그것의 최종적인 결과를 통일이라는 이름으로 얻고자함이다. 남북한 예술단과 태권도 단원들의 교류가 있었고 다시 가을을 기다리는 문화교류가 암시되어 있다. 이제 드디어 4월 27일 판문점의 남북정상회담이 코앞에 다가서고 한민족의 운명을 가를 카이로스적 시간이 우리를 잠 못들게 한다. 성서의 가치는 평화를 통한 정의와 자유 생명의 하나님나라의 완성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죽음 너머의 세계에서가 아니라 오늘 여기에서 고난과 고통을 사는 민중들의 삶의 한 복판에서 이루어질 나라인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한 사람과 전체의 인간 존엄성이 지켜지고 인족과 성차별은 물론 인간 사회 전반에 걸친 모든 차별을 폐지하고 주어진 그대로의 인격과 상호적인 관계가 바른 관계로 이어지는 것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인 것이다. 역사적 예수로 오신 성육신적 사건은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 처형되기까지의 고통을 증거 하신 것이다. 이러한 십자가의 관의 의미는 인간을 사랑하는 것으로써 하나남 스스로가 모든 이간들과 역사 앞에서의 본을 보여주신 최고의 가치는 모든 죄를 용서하는 것뿐 아니라 서로가 섬기고 각각의 존재자체를 인정하며 존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봄이 온다는 소식은 확실히 전달되었다. 그것은 분명히 새로운 시작이다. 남북 정상회담을 근거로 북미회담이 약속 된 가운데 남북은 각자가 중국과 러시아 등 한반도를 둘러 싼 자기 방어적이며 미래에 대한 새 길을 여는 열정적인 외교를 펼치고 있다. 한반도의 마지막 운명을 결정짓는 당사자는 남북 민족주체이다. 그러나 분단을 전후로 한 한반도의 역사 전개는 민족세계전쟁과 함께 길고 지루한 시간 속에서 우리의 깊은 상처의 두께는 쉽게 벗겨내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민족의 주체인 남북뿐 아니라 우리를 둘러싸고 지켜 본 미중러일 등 세계 각국들에 대한 설득과 그들에 대한 협력을 이끌어 내는 외교적 지혜와 용기들이 필요하다. 성서의 역사는 모든 인간사와 결부되어 있다. 우리가 이루어야할 하나님나라에 대한 완성은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어린양이 이리 떼와 함께 뛰놀며 어린이가 독사 굴에 손을 넣어도 해를 당치 않는다는 것이다. 지난 역사의 마디마디는 나름의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모든 것들은 지나칠 수 없는 사건의 가치가 있고 이해와 해석이 숨어있다. 그것들 각자는 새로운 희망과 미래를 이루기 위한 뼈아픈 점검과 각고의 교훈을 얻어내야 한다. 역사의 중심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다. 사람의 중심에는 인권과 존귀함의 가치가 있다. 그것은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생명존중의 가치이다. 바다와 하천의 오염과 땅이 썩어가는 생태계의 파괴는 인간의 생명을 위협한지 오래이다. 핵무기와 화학의 살상무기가 인류의 존재 자체를 파멸로 이끌고 있다. 종교는 거룩과 세속의 이중장부를 셈하고 역사적 고통을 죽음 저 너머의 세계로 숨기려한다. 인간의 불의와 거짓 된 행보, 탐욕의 결과로 돌이킬 수 없는 조의식과 도덕적 불감증으로 병들어 있다. 인공과 로봇문화의 4차원의 문화가 인간성과 살아 있는 관계성을 대신하며 살아 있는 문화 창조에 대한 의심을 하게 한다. 살고 죽는 생사화복의 문제를 신에게 돌리며 운명론을 강조하는 종교적 행태는 인간들의 책임적 가치를 추락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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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4-25
  • 이명박 장로 대통령 구속과 한국교회
    2017년에 이어 2018년 3월 22일 소위 한 나라의 대통령이 부패와 불법 비리혐의 등 수많은 죄목으로 구속수감 되었다. 소위 박근혜 정권은 국정농단이라는 수치스러운 죄명으로 이명박 전 대통령은 대통령직을 이용한 권력형 부정비리와 직권남용의 불법사찰의 좌파 종북몰이에 몰두해 오는 국민감시를 해왔음이 밝혀졌다. 우리는 일제치하의 민족적 고난을 통해서 성서의 고난의 하나님을 생각해 왔다. 한국 개신교 132년의 세월은 민족과 역사의 암울한 현실에 새로운 생명의 빛과 희망의 되었음을 부인할 길이 없다. 민족의 자주권과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일제의 폭압 속에서 살아 온 그 긴 민족 역사의 겨울은 해방과 광복이라는 그 순간에 다시 민족분단을 가져 오고 민족 세계전쟁을 통해서 통한의 한을 쌓아 왔다. 미소 강대국의 점령군과 민족내부의 냉전이데올로기의 분열로 인한 수난과 고통의 세월은 말로 다할 수 없다. 근자에 평창 올림픽을 기화로 막혔던 남북의 대화와 교류가 재개되고 남북정상회담과 남북미. 혹은 남북미중, 남북일, 한중일, 남북미중러일 등의 다자 외교를 통한 한반도 종전선언과 영구적 평화협정을 통한 평화장착의 잉태가 해산을 기약하는 중재한 민족적 기로와 카이로스를 맞고 있다. 첫째는, 남북 당사자, 우리들끼리의 문제이고 역사적으로 얽힌 주변국들의 도움을 협력을 끌어내는 일 등, 매우 신중하고 진중한 태도와 깊은 지혜를 짜내어서 나갈 길이다. 경솔하고 경거망동한 생각과 행동은 금물이다. 그렇다고 머리만 싸매고 방안에 박혀서 끙끙 앓는 모습도 결코 창조적 역사의 길을 만들어내는 모습은 될 수 없다. 역사에서 기회는 그리 자주 찾아오지 않는다. 한국교회는 감리교 장로인 이승만을 칭송하며 대통령을 만드는데 기여했다. 그러나 결과는 민족의 장래를 그르치는 불편한 진실의 역사적 흔적과 상처만을 깊게 하였다. 반쪽의 나라를 세우는 과정의 모습이나 국가 설립 이후의 행보, 특히 민족분단 전쟁의 와중에서의 민간인 학살과 5.10 선거 과정에서의 4.3 제주 민중항쟁 동안에 2만 5천- 3만 명이상의 민간인 학살 사건은 통일의 길목에서 그 진실을 밝히고 확실한 역사적 토대를 만들어야할 민족 분단의 제 2의 비극이다. 여기에 영락의 서북청년들이 주축이 되었다는 사실은 모두 가 다 아는 사실이다. 두 번째는 충현교회 장로였던 김영삼 대통령이다. 그는 민주화의 과정에서 혼신을 다하는 정치인이고 그리스도인 이었다. 그러나 부정한 정권세력과의 합당을 통해서 탄생한 것만큼이나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에 떳떳하지 못한 일들이 많다. 이제 다시 기독교 장로인 세 번째의 대통령을 세워야 한다고 이명박 장로를 역사의 전면에 내세워 한 나라의 생사를 그에게 맡겼다. 그런데 그가 대통령이라는 자리에 입문한지 10여 년 후에 3평 남짓한 작은 감방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의 죄목을 상상을 초월한다. 언론에 보도된 것 만해도 천문학적 뇌물과 불법비자금 조성이 있고 이 외에 불법사찰과 4대강과 자원외교, 불법 자료유출 등 수없이 불거지는 죄목들은 실타래와 같다. 그는 대교회 장로이다. 이름만 대면 소위 한국교회 대표적 강남의 교회와 목회자가 시무하던 장로인 것이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과거 전두환과 노태우가 나란히 감방에 구속 된 것처럼 지금 역시도 박 전 대통령과 이 전 대통령이 함께 감옥에 들어간 것을 보면 나라와 국가의 국격이 말이 아니다. 이것은 나라의 망신이기 전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요. 전도와 선교의 문을 좁게 하는 것이며 고개를 들 수 없는 부끄러운 일입니다. 세계 교회사에서 유례없는 교회성장을 주창해 오던 한국교회의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추악한 사건이다. 대형교회의 교회 세습과 크고 작은 각 교단들의 교회들의 분규의 모습은 중세 이후의 타락한 교회 이상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진보와 보수의 진영 이데올로기를 교회 안으로 끌어들여서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의 이분법적인 사기행각을 벌여 온 교회의 부끄러운 모습들을 보며 주님을 향한 십자가를 대할 수가 없다.필자가 쓴 소리를 한다. 교회는 분명 반통일 세력이다. 아니 반통일 세력이었다. 자본과 권력에 아부하고 거짓과 불의에 공범으로 행하며, 거짓 예언자와 거짓 평화의 복음으로 거룩과 세속의 이중장부를 셈하며 살아 왔다. 이제 우리는 탐욕과 거짓으로부터 진정한 회개를 하여 다시금 주님을 향한 생명선교를 지향해야 한다. “정의와 사랑은 동전의 양면이다” 한민족의 평화정착과 통일의 길은 단순한 한민족의 길이 아니다 동북아와 세계를 향한 역사의 대전환이다. 이제라도 교회가 성서와 예수께로 돌아가야 한다. “욕심은 죄를 낳고 죄는 사망을 낳는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우리 속에 들어 찬 탐욕과 불의와 거짓을 버리고 민족을 살리는 생명의 길, 통일의 중심에 서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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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4-11
  • 한반도와 통일의 로드맵
    고도의 최첨단 전략무기들이 한반도의 하늘과 바다 그리고 땅을 가득 채웠다. 북미의 핵전쟁의 단초적인 말들이 풍성한 역사의 폭풍들이 연출되었다. 그런데 1월 1일의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신년사를 기점으로 평창올림픽에 예술단과 응원단과 선수단이 초청 방문하고 김영남과 특사로 온 김정은의 유일한 친 여동생 김여정 특사가 친서를 통해서 문재인 대통령을 정식 초청하자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어 북한에 정의용 특사 단장과 서훈 국정원 원장을 비롯한 단원들이 전격적으로 김정은을 만나고 돌아와 4월의 남북 정상회담을 확정하고 돌아 왔다. 다시 정의용 단장과 서훈 원장이 미국을 방문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서 방북결과를 설명한 자리에서 김정은과 트럼프 대통령이 5월 북미 정상회담을 표명했다. 한반도의 상황은 급격하고 숨 가쁘게 돌아가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원칙과 함께 중재외교를 통해서 남북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까지 오는 극적 전환점이 이야기 되고 있다. 정신을 차리고 신중한 사고를 할 만큼의 여유를 가질 수도 없는 어지러운 현상을 맞고 있다. 분단 73년과 정전 65일을 맞이하는 올 해의 역사적 프로그램의 전개는 획기적일 수밖에 없다. 분명한 것은 한반도의 분단의 역사적 상황은 평화정착과 민족 통일의 길이 성취되어야 한다. 분단이 오기까지의 일제하의 역사와 민중들의 억압사와 그리고 2차 대전 이후의 미소의 냉전에 의한 분단세월이 하루 속히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는 것은 우리 모두의 기도가 아닐 수 없다. 미국의 한반도 주둔의 역사를 다양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겠지만 미국에 바라는 대한민국의 바람은 자국의 이익보다는 한민족의 평화통일의 길인 것이다. 중국의 새 패권 싸움과 일본의 한반도 침략의 진정성 있는 역사적 반성의 요청되는 중요한 시기라고 아니할 수 없다. 미중일러의 한반도를 둘러 싼 강대국들의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길에 한민족 중심의 남북 자주 민주적 민족중심끼리의 통일의 지지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이러한 주변국들의 협력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대한민국이 하나되는 모습이 절대 필요하다. 모처럼 온 민족의 평화정착과 통일 교류의 길목에서 여야의 정파나 당파적 유일을 위해서 분열의 가중이나 소위 진보와 보수의 진영 싸움의 조장으로 덕을 본 타락한 정치적 행태를 중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사에 대한 진정한 반성과 이들을 음으로 양으로 지지하고 협력 공생해 온 교회와 종교 세력들도 참회의 기도와 민족의 장래를 위한 진실의 기도를 해야 할 것이다. 남북정상과 북미 정상회담들이 분단의 벽을 허물고 평화통일의 길을 열어갈 것인지는 설레임의 희망을 기대할 수도 있지만 아직도 이러한 기쁨의 잔을 들기에는 수많은 가시방석과 돌자갈들을 들어내야 되는 가꾸어 가야할 노력들이 산재해 있다. 핵무기 완성을 선언한 북한의 진정성도 있어야 하고 중재하는 대한민국의 지혜와 용기가 무한히 요청된다. 자국의 이익과 세계 패권전략을 위해서 약소국들을 요리하고 사는 미국과 주변 4대국들의 세계 평화를 지향하는 참신성 있는 협력되어 있어야 한다. 이러한 당국들의 평화행진을 뒷받침하고 소원하는 대한민국 민중들의 적극적인 민간 평화운동과 통일 운동이 있어야 한다. 민족의 평화통일을 자신들의 정략적 유익을 위해서 방해하려는 세력들이 발을 붙여서는 안 된다. 사회 각 분야에서의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들은 이제는 모두의 본이 되는 삶을 행동과 실천으로 증명해야만 한다. 언론들이 이러한 운동들을 왜곡하거나 자본과 권력에 기생하는 모습이나 종교와 교회가 이들 권력들에게 기생하는 일들은 이제 중단해야 한다. 분단의 긴 세월 동안 우리가 겪고 상처 받은 것들은 말로나 글로도 다 형언할 수 없다. 이제는 분명이 새로운 희망의 역사를 창조해 가야 한다. 우리 각자 한 사람들의 말과 행동과 실천이 중요한 때다. 문화적 상황은 어제와 같을 수 없다. 그러나 보편적 가치와 진리의 본질은 변할 수 없다. 진리란 모두가 인정할 만한 상식이다.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해야할 삶의 발걸음으로 전진해야 한다. 사람이 가진고 있는 약함을 넘어서서 새로운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가야만 한다. 한반도의 시계는 매우 급박한 것처럼 움직이고 있다. 이것은 오랫동안의 쌓여 온 기도와 실천에 대한 결과이다. 이번의 하늘이 준 기회를 겸손히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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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3-21
  • 통일 신뢰회복이 살 길
    인간은 사회적동물이다. 다른 말로하면 관계적 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서로가 이해타산 적이거나 상대로부터 무엇인가를 얻고자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들, 한미의 전략적 무기들의 총출동들은 서로의 이익이 전제되어 있다. 한미일의 공조체제와 유엔의 북한에 대한 경제적 압박의 강화 현상들은 북에 대한 보다 더 강한 생존방어 능력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되고 한반도의 긴장조성은 커져만 갔다. 김정은 위원장의 신년사는 평창동계 올림픽을 하나의 기회로 삼고 평화적 제스처의 전략을 구상 발표하게된 것이 사실이다. 수년 동안 남북은 핵 핵 거리며 한반도의 땅과 하는ㄹ 바다에는 미국의 최첨단무기들이 가득하였다. 북은 자존을 위해서 핵실험과 미사일을 개발하고 미국은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에서 패권을 보존하고 새로 부상하는 중국에 대한 견제와 함께 일본을 부추겨서 러시아와 중국을 경계하는 것이다. 뉴스 매체의 거의가 매일 전쟁 위기를 보도하고 남북 갈등과 남남 갈등을 조장한다. 이 중심에 소위 가짜 보수를 자처하는 교회와 기독교가 자리하고 있다. 기독교 인구가 얼마이든 남한 사회에 끼치는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성장과 함께 진정한 민족과 나라 살리는 역사적 행보 보다는 오히려 반역사의 자리에서 반통일적 역할의 핵심세력이 되고 있다. 어찌 되었든 평창은 남북의 새로운 만남의 전기가 되고 문화 체육의 교류 등이 교차되는 형국이다. 평창 올림픽 이후를 염려할 것은 없다. 한반도의 분단은 세계사적 분단인 것을 출발로 하였기에 그 숙제를 푸는 것 역시 우리만의 힘으로 안 된다는 것쯤은 누구나 짐작하는 바이다. 그러나 부부 간의 문제를 외부에서 상담한다 해서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남북문제도 그러하다. 6자회담 4자회담 등 주변 국가들로부터의 협력을 끌어내는 것도 필요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역시 당사자 간의 문제이다. 우리가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남북은 유엔에서 인정한 각각의 나라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말은 서로를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존중해 주는 것이 대화의 시작이다. 그것은 역사적 필연이다. 미국은 지금까지 힘으로 한반도의 문제를 풀려고 하였다. 그러나 강제적 무력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한반도 분단의 현실임을 인정해야만 한다. 힘을 전면에 내세울수록 평화의 기반은 깨어지고 긴장과 전쟁의 분위기는 떠날 길이 없다. 모든 관계는 신뢰 위에서 발전한다. 신리는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인정하며 약속한 것들을 지켜 나갈 때 조성되고 형성된다. 일반적인 협박이나 억압적 굴종을 강요한다면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다. 모든 관계는 이러한 신뢰가 기반이 되고 이것을 바탕으로 발전해 간다. 남북한 당사자들은 이러한 신뢰구축을 위해서 작은 약속이라도 지켜가며 관계를 다져가야 한다. 서로를 불신하는 믿음이 없이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믿음이 없이는 구원은 없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은총의 믿음과 정의의 바탕 위에서 사랑의 열매가 맺어진다는 믿음을 구체화 하고 육화시키는 실천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세상은 변화무쌍하고 흔들리며 배신과 갈등이 난무한다. 이러한 삶의 현장을 바라보면서 살아계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한 순간도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구가할 수 없다. 제천 참사와 밀양참사가 우리들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천하보다 귀하다는 예수님의 한 생명에 대한 말씀이 귓전을 때린다. 생명은 엄격히 말하여 우리의 소유가 아니다. 내 몸의 정자와 난자가 합쳐진 것이라고 하여 인간의 소유물이 아니다. 창조주가 모든 만물을 만들은 우주와 같이 한 생명 속에 하나의 우주가 담겨져 있다. 그 각자의 우주를 소홀히 한다면 인간의 미래는 희망을 기대하기 어렵다. 4차 산업( AI 인공지능) 알파고 로봇과 빅데이터의 물결이 친다 하지만 여전히 인간의 생명은 하나의 우주로서 존재한다. 죽음은 생물학적 죽음뿐 아니라 사회학적이고 정치학적인 구조 악으로부터 오는 죽음들이 널려 있다. 인간들의 탐욕으로부터 일어나는 전쟁들의 범죄와 죽음들, 거짓과 불의로부터 일어나는 죽음들, 허물과 약함으로 일어나는 실존적 죽음들까지 죽음의 행태나 모양도 여러 가지이다. 이 모든 것들 중에 가장 악한 것은 공권력으로부터 자행되는 죽음의 폭력들이다. 그것의 극치가 전쟁이다. 소위 문명을 추구해 온 인간들의 죽음의 무기들은 한 순간에 우리가 사는 삶의 터전들은 태워버리고 흔적도 없게 할 수 있다. 우리의 종말에 대한 내일에 대한 예견은 아무도 할 수 없다. 이러한 불행을 막을 수 있는 길은 서로가 믿고 살 수 있는 신뢰의 터를 쌓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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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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