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칼럼
Home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실시간뉴스

실시간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기사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어쩐다지요. 야속하게 가 버린 분의 생각 때문에요”
    과거 유달리 저에게 문자를 자주 보내주셨던 한 여성도가 있었습니다. 직장 생활하면서 미주알고주알 같은 이야기, 삶의 고달픈 사연까지 문자를 보내왔습니다. 삶이 힘든 만큼 관심을 갖고 기도해 달라는 의미였겠지요. 어떨 땐 “목사님께서는 어쩜 그렇게 시도 잘 쓰시고 노래도 잘 하세요. 짝짝짝” 하는 문자도 보내 주셨습니다. 저는 목양적 차원에서는 답을 해 줄 때도 있었지만 그리 하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엄연히 저는 목회자이고 그 분은 여성도였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성가대도 열심히 하셨고 성가대를 서지 않는 저녁예배 때는 꼭 앞자리에 앉아서 설교에 은혜를 받던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문자가 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1월 중순쯤 되었을까요. 2부 예배를 마치고 본당에서 4층 계단으로 올라오는 길에 그분과 마주쳤습니다. 왠지 얼굴이 창백하게 보였습니다. 화장을 안 해서 그랬겠지 하고 저는 “집사님, 안녕하세요?”만 하고 제 방으로 올라왔습니다. 제 방에서 특별 기도를 받을 분들이 줄을 서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일저녁예배가 끝나갈 무렵 그 분의 소천광고 소식이 강단으로 올라왔습니다. 제가 깜짝 놀라 동명이인인가 하고 강단에서 공개적으로 물어보았더니 그 분이 맞다는 것입니다. 저는 방망이로 뒤통수를 사정없이 한 대 맞은 느낌이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교역자회의 때 담당 교구교역자에게 자세히 물어보았습니다. 내용인즉 몇 년 전에 난소암에 걸려 완치가 되었는데 연말에 다시 재발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항암치료 받는 것을 거부하다가 갑자기 위독해져서 그만 천국으로 떠났다는 것이죠. 저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 그 분은 암과 투병을 할 때, 나에게 기도해 달라는 한 마디 문자를 보내지 않았을까. 암의 고통이 그렇게 컸을 텐데 왜 힘들다는 문자 한 마디, 위로 받고 싶다는 한 마디의 문자도 보내지 않았을까. 고통스러워서 잠들지 못하는 밤, 어떻게 그 고통과 싸웠을까.’ 저는 월요일 오전부터 용인시장님과 함께 지역 영세 상가를 돌아다니고 오후에는 총회회관에 가서 총신대 정이사 문제 해결을 위하여 회의를 인도했습니다. 그리고 저녁 늦게 장례식장에 찾아가서 가족들을 위로하고 기도해주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담당 교역자에게 물어보니 이미 아침에 발인을 해버렸다는 것입니다. 저는 소리를 버럭 지르며 나무랐습니다. “그런 일이 있으면 나에게 데려와서 기도를 받게 해야지요. 교인들을 어떻게 관리하는 겁니까.” 당장 남편 집사님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곤하게 주무시는지 전화를 안 받았습니다. 그래서 여성도가 쓰던 핸드폰에 문자를 보냈습니다. 제가 문자를 보낸다고 이 세상을 떠나신 분이 어찌 문자를 보겠습니까마는. “집사님! 어쩌면 그리도 야속하게 떠나셨나요. 오늘 조문을 가려고 했더니 아침에 발인했다 해서 너무 기가 막혔어요...(중략) 천국에서라도 이 목자의 심정을 알아주시라고 부질없는 문자를 보내봅니다. 이젠 고통도 아픔도 없는 천국에서 영원한 평화와 안식을 누리세요.” 그날 저녁은 도대체 잠이 안와 거의 꼬빡 밤을 새웠습니다. 김용택 시인이 쓴 ‘어쩐다지요’라는 시가 맴돌았습니다. “오직 한 가지 당신 생각으로 / 나는 날이 새고 / 날이 저뭅니다...(중략) 어쩐다지요 / 나도 말리지 못합니다.” 순간, 머릿속에서는 우리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애달픈 연서를 쓰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 부디 정기적으로 건강검진을 해 주세요. 이렇게 야속하게 떠나버리면 안되잖아요.” 이틀 후 남편 집사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연거푸 누구냐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진짜 소강석 목사님 맞느냐”고 엉엉 우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 담임목사님이 맞으십니까? 집사람을 일찍 데려간 하나님이 원망 되어서 목사님도 한동안 미워했습니다. 저는 어찌하면 좋습니까? 죽고 싶네요.” 제가 전화로나마 위로하고 기도를 해 드렸습니다. 인생은 이토록 슬플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슬픔이 있기에 우리에게는 그리움이 있고 그 그리움은 아름다운 시와 음악과 예술을 만들어내곤 합니다. 더구나 우리에게는 죽음 너머에 영원한 천국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영원한 그리움 속에 살고 죽는 것이 아닐까요.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1-03-07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이 세상에 우연은 하나도 없습니다”
    저는 군산제일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군산제일고등학교의 전신은 전킨 선교사가 세운 ‘영명학교’였습니다. 그후 영명학교의 교장이 연세대학교 세브란스 국제진료소 소장이신 인요한 박사님의 할아버지인 린튼 선교사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영명학교 학생들과 멜본딘여학교(현 영광중,고등학교)학생들이 태극기를 들고 나가 장터에서 3.1운동을 주도한 것입니다. 그때 린튼 선교사는 학생들의 3.1운동을 막지 않고 오히려 뒤에서 도와주고 3.1절 만세 시국선언문까지 작성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미국 애틀랜타로 건너가서 3.1운동의 진상을 알렸고 그의 이야기가 애틀랜타 국제신문에 보도 되었습니다. 급기야 이 소식이 미국의 백악관에까지 전달이 되었고, 장롱 속 고서로 묻힐 뻔 했던 3.1운동의 기록이 전 세계에 다 알려진 것입니다. 그런데 린튼 선교사는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신사참배 반대를 했습니다. 그 일로 조선총독부의 요주의인물이 되어 결국 미국으로 강제추방을 당한 것입니다. 원래 영명학교를 세운 분은 전킨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유니언 신학교를 졸업하고 1892년 11월 3일 한국에 도착한 선교사입니다. 그런데 군산지역에서 열정적인 선교 활동을 펼치다 그만 풍토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세 아들 모두가 풍토병으로 모두 죽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낙심하지 않고 계속 전도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동료 선교사들은 그의 건강을 생각하여 사역지를 전주로 이동시켜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를 세우고 고아원까지 설립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풍토병이 제발하여 결국 1908년 1월 2일 43세의 젊은 나이로 이 땅에 묻히고 맙니다. 제가 제일고를 다닐때는 린튼 선교사나 전킨 선교사에 대해서 전혀 몰랐습니다. 그것도 모른 채 교회를 다니고 신학교를 다녔습니다. 먼 훗날에야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제가 필라델피아의 장로교 선교 역사박물관에 갔을 때 선교사들의 편지들이 수두룩 쌓여 있는 것을 봤습니다. 특별히 린튼 선교사와 전킨 선교사, 영명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 본 것입니다. 저는 가난한 촌로의 아들이어서 남원에서 학교를 다니는 게 맞습니다. 만약에 타지로 갔다면 전주로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군산으로, 그것도 하필이면 군산제일고등학교로 간 것입니다. 그래서였는지 전킨 선교사의 선교정신, 린튼 선교사의 저항정신이 저도 모르게 깊이깊이 심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마다 저는 세상에 우연이라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는 그 분들의 가르침을 전수받거나 역사를 전혀 알지 못했는데도 저도 모르게 그분들의 소명정신과 신앙의 혼이 제 안에 들어와 있지 않습니까? 이걸 무의식적 전이 현상이라고 해야 할까요? 2년 전,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해서 군산제일고등학교와 멜본딘여학교(현 영광중,고등학교)에 가서 특강 할 때 신묘막측한 하나님의 섭리에 저는 가슴이 뭉클하기만 했습니다. 제가 지금 이 난국에 우리 총회를 섬기고 한교총을 섬기는 게 결코 우연은 아닐 것입니다. 요즘 한국교회 연합을 위해서도 온 신경을 써야 하는데, 저는 총신 정이사 문제로까지 모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마저도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절대주권 안에 있고 그 분의 경륜 안에 있다고 봅니다. 지금 우리가 코로나 때문에 당하는 고통, 어려움도 다 주님의 섭리 안에 있습니다. 주님은 결코 실수가 없으십니다.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뜻과 계획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1-02-28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뒷마당 총회장이어서 감사합니다··· ”
    지난 수요일 저녁예배 시간에 홍경호 부목사님이 설교를 하셨는데 설교 중에 하나님의 뒷마당이라는 이야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의 고향이 강원도인데 강원도에도 뒷마당이 있었나봅니다. 그런데 어린 시절 집 앞마당에서 한참 신나게 놀고 있을 때 집안에 어르신이 오시거나 마을 손님들이 오시면 부모님이 무조건 뒷마당에 가서 놀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뒷마당은 참으로 후미지고 어둡고 쓸쓸한 곳이었지요. 홍 목사님 역시 ‘아, 우리 집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어둡고 습기 차고 외로운 공터로 느껴졌답니다.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기 전에 광야라는 뒷마당으로 가게 하셨지요. 마찬가지로 본인에게도 인생에서 두 번의 뒷마당 경험이 있다고 고백하셨습니다. 첫 번째 뒷마당은 군목 생활 중에 진급을 하지 못하여 전역을 할 수밖에 없었던 뼈아픈 경험이었습니다. 그 후로도 그분의 인물이나 학벌, 설교의 능력으로 볼 때 당연히 좋은 교회의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아야 했는데 이상하게 일이 어그러지게 되어 우리교회에 부목사님으로 오시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뒷마당은 최근에 사모님께서 갑상선암이 발견되어 수술을 하게 된 일입니다. 하지만 결국은 하나님께서 그런 뒷마당의 경험을 통해서 자신을 연단하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시더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 뒷마당이라는 말이 콱 꽂혀왔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저도 뒷마당 총회장이지 않습니까? 코로나 이전의 총회장님들은 행사가 많았습니다. 미국, 캐나다, 남미, 유럽, 일본 할 것 없이 해외 행사도 많이 초청받아 다니셨습니다. 그리고 융숭한 대접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교단 총회장뿐만 아니라 한국교회 최대 연합기관인 한교총 대표회장이 되었지만 해외 한 번도 못 나가고 국내에서도 변변한 행사 한번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가장 바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 사역은 앞마당 사역이 아니라 뒷마당 사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아무리 바쁘게 뛰어다녀도 칭찬은커녕 비난과 원망을 받기가 일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뒷마당’이라는 이야기가 너무 큰 은혜가 된 것입니다. 저는 젊었을 때 원 없이 해외를 다녔던 사람이라 해외행사에 큰 미련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제가 교단총회장과 연합기관의 대표회장으로서 해외를 다니며 자주 주일을 비우면 우리교회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아무래도 교회가 침체가 되고 영적으로 다운이 될 수가 있겠죠. 저부터도 내면세계가 황량한 사막이 될 수 있고요. 그러나 다행히 제가 뒷마당 총회장이 되어서 해외를 나가지 않기 때문에 기도와 묵상의 시간이 더 많고 주일예배와 철야기도회를 한 번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아니, 수요예배도 거의 안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한편으로는 너무나 다행이고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저는 코로나 상황으로 인하여 뒷마당 총회장으로 끝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저는 비록 뒷마당 사역을 한다 해도 기쁜 마음으로 앞마당 사역을 준비하고 더 넓히는 사역을 할 것입니다. 제 이후 다른 총회장과 다른 연합기관의 대표회장들이 앞마당에서 더 잘 사역하실 수 있도록 열심히 뛰고 또 뛸 것입니다. 뒷마당에서 한국교회의 앞마당을 더 넓히는 일을 하겠습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1-02-21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시대와 사회를 절망하고 있는 이들에게 보내는 이생축의 연서”
    ‘이생망’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서는 ‘헬조선’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더니 헬조선이라는 기관차 뒤에 여러 가슴 아픈 객차 같은 신조어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인구론’, “인문계의 90%이상이 논다” ‘이태백’, “20대의 태반이 백수”라는 말이죠. 그러다가 ‘삼포’ ‘오포’, ‘칠포세대’라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내 집 마련과 인간관계를 포기할 뿐만 아니라 꿈과 희망마저 포기한 세대라는 말입니다. 아니, 몇 가지가 되었든지 다른 것도 다 포기해야 하는 ‘N포 세대’라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그러다가 ‘이생망’이라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이번 생은 망해버렸다”는 말입니다. 이 시대의 사회좌절을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생망이라는 의식 세계관이 젊은이들에게 집단 우울증을 만들게 하고 심지어는 자살률까지 높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삼포, 칠포, N포를 외치고 이생망을 외치는 사회라 할지라도 저는 당당하게 ‘이생축’의 삶을 제안합니다. “이번 생은 축복이었다. 축복을 받아 내 인생은 너무나 찬란하고 눈부셨다.”이런 삶을 이생찬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생망의 삶을 살 수밖에 없었지만 그 이생망의 운명을 이생축의 삶으로 바꾼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야곱, 요셉, 야베스, 룻, 라합, 밧세바와 같은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생축, 이생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저 역시 이생망의 사람이었습니다. 불신가정에서 예수를 믿고 집에서 쫓겨난 후 신학교에 가서 굶기를 밥 먹듯 한 사람이고 신학생들 사이에서 망이나 망소이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곧 죽어도 저는 성경책 맨 첫 페이지 하얀 빈 공간에 이렇게 써 놓고 항상 읽었습니다. “소강석, 너는 다음 시대에 큰 종이 될 거야. 너는 여호수아 같은 종이고 다윗 같은 종이고 바울 같은 종이 될 거야. 하나님이 너를 크게 들어 쓸 거야. 그러니 너는 강하고 담대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마라. 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가장 많이 전하는 종이되리라.” 그리고 거울을 볼 때 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소강석, 넌 어쩌면 그렇게 다윗을 닮았어? 어쩌면 그렇게 넌 모세를 닮고 여호수아를 닮았어? 네가 봐도 멋지잖아. 큰 종처럼 보이잖아. 그러니까 말하는 것도 큰 종처럼 말하고 걸어 다닐 때도 큰 종처럼 걸어 다녀라.” 이렇게 축복언어의 씨를 뿌리고 또 뿌리다 보니까 어느새 그 축복언어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코로나로 인하여 더욱 힘든 시기입니다. 여기저기서 이생망이라는 말들이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추운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는 헤엄을 치고 있고, 눈보라 속에서도 매화는 꽃망울을 트지 않습니까?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 희망은 여전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함박눈이 아무리 펑펑 온다 할지라도 봄을 덮을 수 없듯이, 이생망의 먹구름이 아무리 자욱하게 우리의 삶을 덮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의 희망만큼은 덮을 수 없습니다. 이번 주는 음력으로 하면 새해 첫 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해를 맞아 우리도 아무리 이생망의 어두운 안개가 덮쳐도 다시 한 번 일어나 이생축, 이생찬의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이생축, 이생찬이라는 축복언어가 한국교회와 우리 사회를 덮어버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어서 빨리 코로나의 절망과 어둠이 물러나고 찬란한 축복의 아침이 밝아왔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새에덴의 성도들과 함께 이생축, 이생찬의 눈부신 길을 걸어가고 싶습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1-02-1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외롭고 슬플 때가 있어요. 그러니까 사람이지요.”
    지지난 주 목요일에 백암교회 손병회 안수집사님의 큰 따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아버지가 위독하신데 마지막으로 소 목사님을 한 번 보고 싶다고 하시네요.” 우선 전화를 바꿔달라고 해서 위로를 해 드렸습니다. “집사님, 저는 평생에 집사님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제가 꼭 내려가서 뵙겠습니다. 제가 내려갈 때까지 꼭 살아계셔야 합니다.” 그리고 간절히 기도를 해 드렸습니다. 그러자 90세 노인이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도저히 틈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계신 병원이 전남 순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총회와 한교총의 공적 사역을 위한 빡빡한 스케줄로 도저히 틈을 낼 수가 없었습니다. 밤을 새워서라도 가려고 했지만 코로나 때문에 밤에는 면회도 안되었습니다. 큰 따님으로부터 다시 전화가 왔습니다. 아버지가 하루 종일 병실 문만 바라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행여나 소 목사가 병실 문을 열고 찾아올까하고 말입니다. 아들과 딸들이 와도 그리 반가워하지 않았는데 제가 오기를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전화로 위로의 말씀을 드리고 기도를 해 드렸습니다. 기도를 해 드린 후 이렇게 약속을 했습니다. “손 집사님, 제가 내일 저녁 늦게 출발을 하여 이른 아침에 뵙겠습니다. 제발 그때까지만 꼭 살아계셔야 합니다. 그런데 집사님, 저를 만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어요. 하나님을 붙잡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꼭 붙잡으면 마음 속 깊은 평화를 느끼실 거예요.” 그런데 수요일 아침에 일어나보니 그 따님으로부터 문자가 와 있었습니다. “목사님, 아버님께서 소천을 하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도 소 목사님의 이름을 부르시고 또 주님, 주님을 부르시다가 가셨습니다. 장례식장은 화순으로 옮기겠습니다.” 저는 너무 어이가 없고 슬프기 짝이 없었습니다. 손 집사님은 제가 20대 초반 시절, 백암교회를 개척할 때 정말로 충성스러운 교인이셨습니다. 부락주민들이 150명, 200명이 와서 교회를 못 짓도록 저의 멱살을 잡고 얼굴에 침을 뱉을 때 달려와서 육두문자를 쓰며 그들과 싸우셨습니다. “야, 이 0 같은 놈들아, 우리 소 전도사님이 힘이 없어서 참고 있는 줄 아느냐. 너희 같은 놈들 천국가고 복 받으라고 참고 있는 줄 알아라 이놈들아.” 그 분은 그 동네의 유지이셨거든요. 그런 분이 일부러 부락 사람들 들으라고 또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소 전도사님, 절대로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교회를 지을 때까지 전도사님을 끝까지 지켜드릴 것입니다.” 열 일을 제치고 화순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영정사진 앞에서 마음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손 집사님, 서로가 약속을 못 지켰네요. 이런 슬픔과 아픔도 있네요. 이제 외로움도 슬픔도 없는 저 천국에서 영원히 평안을 누리세요.” 정호승 시인의 말마따나 우리의 육체는 슬프고 외로울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외로우니까 사람이지요. 대한민국에서 제일 바쁜 목사가 화순까지 내려간다니 감동에 감동을 먹고 2시간 전부터 백암교회 목사님, 장로님, 몇몇 분들이 와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곳으로 이사 간 저희 교회 반가영 집사님도 오셨고요. 가슴속 깊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눈물은 가슴에서 내장으로 흘렀습니다. 올라오면서 스스로 이런 위무를 하였습니다. 이런 사랑으로 인한 외로움과 슬픔이 시가 있게 하고 음악을 만들며 예술이 있게 하는 거라고. 제가 설교나 여러 에세이에 손병회 집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분이 제 시의 중심에 있지는 않았습니다. 어쩌면 이제부터는 저에게 슬픔을 안겨주고 떠나간 손 집사님이 제 시의 모티브가 되고 바탕이 될 때가 많을 겁니다. 아니, 그 분에 대한 추억과 슬픔의 사연이 제 시 속으로 언제든지 걸어 들어올지도 모르겠습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1-02-07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멀리 내다보며 조금만 더 참고 감내해요”
    교회사가인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초대교회 시대에 이교도들은 전염병에 감염된 환자들을 내쫓아 버렸고 죽은 시신들을 오물처럼 취급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전염병 환자들을 찾아가서 기도해 주고 돌봐 주었다고 합니다. 기독교인들의 돌봄만으로도 사망률을 크게 줄였고 이로 인해 기독교가 로마에 공인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종교사회학자인 로드니에 의하면 이러한 기독교인들의 사랑과 봉사 때문에 기독교가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게 됩니다. 팬데믹 시 초대교회는 예배를 드리는 것 못지않게 환자들을 돌보는데 치중을 하였습니다. 종교개혁시대에는 더 그랬습니다. 특별히 제네바에서 칼빈을 중심으로 한 종교개혁자들은 예배 못지않게 목사의 환자 심방을 의무화 하였습니다. 흑사병 감염을 두려워하여 환자의 심방을 거역하는 목사는 면직할 정도로 환자 심방 사역에 치중을 하도록 했습니다. 그때 용기 있는 불랑쉐 목사, 마티우 목사 등이 자원하여 흑사병 환자들을 찾아갔지만 곧 감염이 되어 사망을 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제비뽑기를 하여 한명은 병원심방을 하고 또 한명은 코론티난(quarantine, 격리 당해 있는) 가정에 심방을 하게 했습니다. 당시에도 감염병을 예방하기 위하여 격리를 시켜 놓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에게도 위로와 격려, 소망을 주는 심방을 했던 것입니다. 초대교회와 종교개혁시대에도 사제들은 허들링 목회를 한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영혼만중요시한 것이 아니라 육체의 생명도 존중하였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환자들을 시 당국이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직접 돌보고 치료해야한다고 주장을 할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전염병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대처를 한 것이죠. 이러한 종교개혁자들의 목회사역의 교훈을 오늘 우리 현실에는 어떻게 반영을 할 수 있을까요? 당연히 예배가 교회의 생명이고 본질이기 때문에 반드시 예배를 지키면서도 환자들을 돌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의료진들이 환자들을 다 돌보는 현실에서는 교회는 방역수칙을 잘 지키고 교회에서 확진자를 안 내는 것이 간접적으로 의료봉사에 참여하는 것이고 환자들을 돌보고 이웃을 배려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솔직히 교회가 우리만의 이너서클, 우리만의 카르텔로만 존재하려고 했을 때 무더기 확진자를 낸 사례가 많았습니다. 요즘 회자되고 있는 특정 선교회나 단체 등 코로나감염병과의 전쟁 상황에서 무더기 확진자를 내어서 얼마나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는지요. 광주의 어떤 교회는 계란투척까지 당하였습니다. 이제부터라도 교회는 다시 자성하고 집단 확진자들을 내지 말아야 합니다. 더 이상 한국교회 브랜드와 이미지를 추락시키면 안 됩니다. 정말 소탐대실의 실수였습니다. 요즘 시대는 아무리 제품이 좋아도 기업의 이미지가 추락해버리면 그 회사의 물건을 사지 않습니다. 복음이 유일한 구원의 진리인데 우리의 실수로 복음의 진보를 막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땅을 치고 가슴을 치고 싶습니다. 우리가 복음의 진보를 위해서라면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우선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만 얻으려고 무리수를 두는 것보다 조금 절제하며 감내하는 것도 생각해 봐야합니다. 정부의 방역에 미숙함이 있고 교회가 잠시 부당한 대우를 받는 면이 있다 하더라도 복음의 진보, 넓게 보는 선교전략, 다음세대까지 이어갈 교회 부흥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조금만 더 참고 감내할 수 없을까요. 우리만의 소리를 내고 규탄하는 것보다 초대교회 지도자들처럼, 종교개혁자들처럼 국민을 위로하고 희망을 주며 감동을 주는 교회가 될 수는 없을까요.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1-01-31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허들링 처치가 되어야 할 때입니다··· ”
    지난 1월 21일 오전에 한교총 신년기자회견을 하였습니다. 지난번에는 제가 ‘영택트’라는 말을 썼는데, 이번에는 ‘허들링 처치(hurddling church)’, ‘찬란한 바보’라는 키워드를 제시하였습니다. 코로나19의 고통과 상처 속에서 우리만의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아픔에 동참하며 치유하는 새로운 교회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의미를 담아 담화를 이어갔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 속에서 한국교회가 왜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는지 답을 찾아본 결과, 가장 큰 요인으로 ‘한국교회의 공교회성 결핍’과 ‘리더십 부재’의 문제라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개교회 성장에 집중하는 동안 공교회와 대사회적 역할과 책임을 소홀히 하였습니다. 리더십의 부재는 위기상황을 대응함에 있어 많은 혼란이 있었을 뿐 아니라 감염병 예방을 위한 실천과 대응에도 허점이 나타났습니다. 이제 한교총은 교계의 분열된 리더십을 원 리더십으로 통합하고, 교단과 교회, 목회자와 성도들이 함께 연합하여 공교회 세움과 사회적 리더십을 강화해 나갈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대사회 신뢰도를 회복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첫째, 윤리와 도덕성 회복, 둘째,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것, 셋째, 생명존중과 건강한 가정을 기초로 한 국가 비전 제시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사회적 신뢰회복을 위해 교회주의의 담 안에만 게토화 되지 않고, 사회적 감수성과 공감능력을 가지고 복음의 사회적 지평을 넓혀가야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감염병 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그들을 치료하기 위해 뛰어든 것처럼, 종교개혁시대 성도들이 두려움 없이 환자를 돌보는 일에 앞장선 것처럼, 한국교회 초기 선교사들이 백신을 들여오고, 환자들을 돕기 위해 피와 땀을 쏟은 것처럼, 사회적 고통에 동참하며 치유하는 허들링 처치(hurddling church)의 모형을 세워나가야 합니다. 코로나19는 인류에게는 겸손을, 한국교회에는 신앙의 본질과 원형교회 회복이라는 시그널을 주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세계사적 축의 전환’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일지는 모르지만 비대면 온라인 사회로의 전환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거부할 수 없는 현상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한국교회는 교회와 예배의 본질은 더욱 강화하되, 사역의 방식은 언택트를 넘어 영혼과 영혼을 잇게 하는 영택트를 취하는 영적 역설적 슈퍼 처치를 세워가야 할 것입니다. 남극의 펭귄들은 영하 50도의 혹한의 추위를 허들링의 사랑으로 이겨냅니다. 그런데 펭귄들이 바닷가에 도착하여 먹이를 구해야할 때 퍼스트 펭귄이 위험을 무릅쓰고 가장 먼저 뛰어 든다고 합니다. 이어령 교수님의 표현대로, 한국교회는 이제부터 우리 사회의 퍼스트 펭귄이 되고, ‘찬란한 바보’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 땅에 복음을 전했던 선교사들이 찬란한 바보가 되고 허들링의 사랑으로 우리 민족과 시대를 섬겼던 것처럼, 이제부터 그들의 신앙과 정신을 이어받아 2021년을 퍼스트 펭귄, 찬란한 바보, 허들링 처치를 시작하는 원년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러한 내용으로 말씀을 드렸더니 대부분의 언론사들이 한국교회가 ‘허들링 처치’, ‘찬란한 바보’의 교회가 되어 사회의 고통에 동참하며 치유하는 새로운 교회의 모형을 제시하였다고 보도를 하였습니다. 이제 정말 시작입니다. 공교회 세움과 원 리더십의 회복, 허들링 처치를 통한 한국교회의 브랜드와 이미지 회복을 위한 새 길을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교회부터 먼저 찬란한 바보가 되어야하겠지요.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1-01-2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스트롱맨이었던 제가 소통과 공감의 지도력을 발휘하는 것이 참 어려웠습니다.”
    한교총에서 작년 11월에 어느 전문 여론 조사 기관에 의뢰하여 ‘한국교회의 코로나 대응, 공적 교회 인식, 연합기관의 필요성, 한국교회에 대한 신뢰도’ 등에 대한 주제로 비기독교인 1,000명, 기독교인 1,000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했습니다. 지금은 다시 2차로 ‘코로나 상황 속 한국교회 예배’에 대한 여론조사를 하고 있는데, 다음 주쯤 발표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여론조사 기관 대표가 저에게 뜻밖의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작년 한 해 저의 기사나 댓글, 연관어를 수집하여 빅데이터로 분석해 보니까 제가 가장 많이 한 말이 교회였습니다. 11,664건이 나왔습니다. 두 번째가 하나님, 세 번째가 목사, 그 다음이 코로나였습니다. 제가 얼마나 교회와 하나님 중심의 삶을 강조하면서 코로나 방역과 예배 회복을 위해 노력했는가를 보여준 데이터였습니다. 더 기가 막힌 선물은 저에 대한 이미지와 감성 추이를 분석한 결과입니다. 저에 대한 이미지가 가장 좋고 긍정적일 때가 5월이었습니다. 저는 5월에 총회장도 아니었고, 한교총 사회정책위원장일 뿐이었는데 예배 회복을 주도한 것입니다. 그것도 제 멋대로 현장예배를 강행하자는 것이 아니라 정부와 조율 하고 한교총을 앞세워서 합리적으로 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저에 대한 긍정적 감성의 댓글들이 폭발하였습니다. 또 한 번 저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와 댓글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때가 10월이었습니다. 왜 10월에 저의 긍정적인 이미지가 높아졌냐고 하니까, 그때 제가 일간지 기자들 앞에서 공개사과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제가 공개사과를 한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가 사회적 비전과 가치를 제시하지 못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했으며 코로나에 대한 선제적 방역을 대처하지 못한 것을 자성하며 이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포스트 팬데믹 처치를 더 영광스럽게 세워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걸 어느 기자분께서 제가 공개 사과를 했다고 써 버린 것입니다. 그러자 거기 오지 않는 기자들까지 그 내용을 그대로 받아써 버린 것입니다. 이 일로 저는 일부 유튜버들로부터 오해 아닌 오해를 받고 공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도 몰랐는데 기독교인들 뿐만 아니라 비기독교인들로부터 최고의 응원과 긍정적인 언어들을 선사 받은 것입니다. 공개사과 해프닝으로 내부의 공격만 받은 줄 알았더니, 사회적으로는 오히려 교회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와 분노를 중화시키고 저에 대한 이미지가 역으로 상승되게 하였던 것입니다. 여론조사기관 대표가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목사님, 오늘 우리 사회는 교회가 과격하게 싸우며 자기 소리만 내는 것보다는 소통하고 공감하며 겸손하게 자성하는 모습, 사랑으로 낮아지는 모습, 양보하는 모습, 희망과 격려, 위로를 주는 모습을 원하고 있습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들으며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원래 저는 강인한 사람이고 외골수였습니다. 오죽하면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수요저녁예배를 드리기 위해 공수부대가 쫙 깔린 금남로를 죽음을 각오하고 찬송을 부르며 걸어간 사람이 아닌가요. 그런데 지금 이 시대는 스트롱맨을 역겨워하고 소통과 공감의 사람이 사람을 움직이고 시대를 이끌어가는 모습을 봅니다. 저는 원래 스트롱맨이지만, 요즘은 총회장과 한교총 대표회장으로서 균형감 있는 스탠스를 취하면서 예배 회복을 위해 모든 소통과 공감의 지도력을 발휘하였습니다. 이 일이 정말 어렵기도하지만 그래도 곧 그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만족할 순 없지만 그 첫 열매를 금주부터 맛보게 될 것입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1-01-17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제 안에는 새 풀이 돋아나고 있습니다. 성도들 마음에는 꽃이 피겠지요.”
    글쎄, 요즘 왜 이러는지, 저는 잠을 설치곤 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저는 소풍 가기 전날이나 운동회 전날은 가슴이 설레어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저는 모든 면에 긍정적이고 낙관적인데 중요한 일을 앞두고는 지금도 잠을 설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연말에도 그랬습니다. 제가 성탄예배와 송구영신예배를 회복하기 위해서 백방으로 뛰었거든요. 그러나 결실을 맺을 만하면 몇몇 교회와 어느 선교단체에서 확진자를 내 버리는 것입니다. 너무나 분한 마음에 그때도 며칠간이나 잠을 설친 적이 있습니다. 특히 12월 30일 밤은 더 그랬습니다. 생전 처음 맞아보는 송구영신예배를 앞두고 한편에서는 걱정도 되고 설레기도 했습니다. 다음날 오전 10시 반부터 시간 단위로 화상 줌을 통하여 계속 축복안수기도 시간을 갖기로 계획을 해 놓았기 때문이죠. “과연 성도들이 얼마나 호응을 할 것인가, 진짜 이번에도 온라인을 통해서이지만,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강력한 영적 역설적 슈퍼 처치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잠을 설치고 나면 몸이 무겁습니다. 그러나 10시 30분부터 화상 줌으로 꽉 차게 들어온 성도들을 보면서 심장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을 향하여 모든 진심을 다해서 축복기도를 하였습니다. 성도들은 제가 한꺼번에 기도를 해 줄줄 알았는데, 전부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불러가면서 기도하니까 감동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이러기를 7번, 그 뿐 아니라 중간 사이사이 현장으로 기도를 받으러 온 사람들까지 기도를 해 드렸습니다. 송구영신예배 시간이 되니까 현기증이 확 느껴졌습니다. 그래도 화상 줌과 유튜브에 참여한 성도들을 바라보고 생각하니 꿈에 젖어서 날아가는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다음날과 그 다음날도 오전과 저녁으로 하는 신년집회 뿐만 아니라 화상 줌으로 축복을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교회에 미처 들어오지 못한 성도들은 드라이브 스루를 통해서 부목사님들께 기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주일날도 예배를 여섯 번이나 인도했습니다. 저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 지금도 꿈만 같습니다. 물론 그렇게 하고 나서 저는 바람에 쓰러져 있는 풀잎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자동차 스루를 통해서 기도 받은 분들, 아직도 일일이 제가 기도해 드리지 못한 분들을 생각하면 송구한 마음만 생겨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런 상황에서 되레 작년보다 헌금이 더 많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모일 수 없는 상황, 만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도 말이죠. 사실 저는 이번처럼 헌금을 강조안 한 적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저 절절포(절대 절대 포기하지 말자)신앙만 외쳤거든요. 그랬더니 현장에 모일 때보다 성도들이 더 많은 은혜를 받고 더 예배를 사모하며 더 많이 헌신을 한 것입니다. 몸이 땅으로 빠져 갈수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황무지와 폐허에서도 꽃은 피어나는구나. 그러나 그냥은 안 되지. 어려운 상황일수록 목회자가 주님의 이름으로 땀과 피와 눈물을 흘릴 때 성도들의 역설적 헌신과 희생도 있는 거야. 그리고 이런 상황 중에서도 강력한 영적 역설적 공동체가 이루어지는 거야. 목회가 이런거지.” 몸은 녹초가 될수록 제 마음의 대지에서는 새 풀이 돋아나는 역설을 느꼈습니다. 제 마음 속에 새 풀이 돋아난다면 성도들의 마음속에는 꽃이 피어나지 않을까, 그 날 저녁은 그런 생각을 하며 잠을 청했습니다. 성도들의 마음속에 꽃이 피는 꿈을 꾸며 말이죠.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1-01-10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새해에 드리는 기도 “비가(悲歌)를 그치고 연가(戀歌)를 부르게 하소서”
    주님, 저 멀리 보이는 깜박이는 등대의 불빛이 보이십니까? 우리는 코로나의 광풍이 휘몰아치는 밤바다를 건너고 있습니다. 불안하고 두려웠고 우울하고 지쳤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암울한 밤바다를 건널 수 있었던 것은 저 바람이 휘몰아치는 바다 어딘가 당신이 서 계시리라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아직 코로나 팬데믹의 광풍은 끝나지 않았고 우리는 여전히 그 바다를 건너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코로나 팬데믹의 검은 안개가 자욱한 중에도 여전히 동해에서는 붉은 태양이 장엄한 몸짓으로 솟구치고 그 새해의 일출은 신비로운 에덴동산에서 비추던 심원의 빛으로 우리의 지친 영혼을 비춰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당신의 사랑과 은혜의 손길은 우리 안에 시들어버린 희망의 화롯불을 다시 살아나게 하여 곧 팬데믹의 광풍을 사라지게 할 것입니다. 주님, 이제 우리 모두 2021년의 찬란한 일출과 함께 지난해의 절망과 비난, 혼란과 분열의 비가(悲歌)를 그치고 화해와 포옹의 연가를 부르게 하소서. 또한 다시 하늘순례자의 발걸음으로 신발끈을 동여매며 어둠에 잠긴 산을 넘고 절망의 협곡을 지난 후 새벽 하얀 서리 내려앉은 강물 소리를 따라 가슴 벅찬 희망과 화해의 행진을 시작하게 하옵소서. 어두울수록 별은 빛이 나고 절벽 끝에 피어난 꽃은 잔인할 정도로 향기를 발하는 것처럼, 지난해 거친 광야의 절망과 어둠의 시간을 이겨내고 맞은 우리의 새해는 더욱 더 눈부신 꿈으로 빛나게 하옵소서. 주님, 2021년은 팬데믹의 절망과 잿빛 저항을 물리치고 새로이 비상하는 원년이 되게 하옵소서. 민족의 들녘에 상처를 조장하는 파괴적 외침은 사라지고 서로가 서로를 연모하고 그리워하는 세레나데의 소리가 메아리치게 하옵소서. 길을 잃은 청춘의 별들과 불 꺼진 도시의 텅빈 거리, 도탄에 빠져 신음하는 상처 입은 꽃들의 눈물을 닦으며 다시, 첫 새벽의 심장 박동을 깨우게 하옵소서. 반달리즘으로 인하여 파괴되어 버린 음악, 예술, 문화 공연이 살아나서 산성화된 국민들의 정서가 다시 순환되게 하시고 감성이 말라버린 우리의 사회가 다시 회복되게하소서. 이를 위해 한국교회가 먼저 가슴을 치며 주의 제단에 눈물을 쏟고 회개와 통곡소리로 신 사도행전의 아리아를 부르게 하옵소서. 주님, 2021년 새해, 팬데믹의 어둠을 깨우는 눈부신 아침의 태양이 떠오르고 있습니다. 거친 황무지에서 라일락꽃을 피우는 잔인한 생명과 사랑의 소네트가 차가운 산야의 쓰러진 나무와 꽃들을 깨우며 울려 퍼집니다. 한국교회가 그 생명과 부활의 한 중심에서 다시 한 번 세계 위로 비상할 무지갯빛 높고 푸른 나래를 펼치게 하옵소서. 올해는 반드시 한국교회가 하나됨의 역사를 이루게 하시고 코로나의 파고를 당당히 이겨내며 열방 앞에 새 역사, 새 날의 아침을 선포하게 하옵소서. 다시 한국교회 안에 뜨거운 감격과 통회, 눈물과 헌신의 역사가 이어지며 예배 회복의 폭풍이 일어나게 하옵소서. 성령의 임재사건을 통하여 예배를 향한 사모함과 부흥의 영성이 활활 타오르게 하옵소서. 코로나의 위기를 넘어 한국교회의 연합과 세움의 대역사를 이루는 대반전의 역전드라마가 펼쳐지게 하옵소서.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1-01-03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