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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님의 무덤 앞에 꽃다발을 드리며
    님께서 잠들어 계신 무덤 초입에 노란 들국화가 피어 있네요. 저 옆엔 패랭이꽃도 피어 있고요. 님께서 이 곳에 묻히신지 30년이죠. 저는 11년 전부터 님의 무덤을 다섯 번째 찾아옵니다. 11년 전 어느 날 밤, “믿음의 사람, 효암 백남조” 라는 책을 읽으며 밤을 지새웠지요. 가슴이 뛰고 눈시울이 젖어 새벽기도 시간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1913년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 죽전리라는 두메산골에 태어나 어린 나이에 대구로 가셔서 부산으로, 부산에서 일본으로 청운의 꿈을 키우다가 다시 서울로, 그리고 부산으로 내려가셔서 그 꿈의 나래를 펼치시던 당신... 마침내 당신께서는 복음을 들으시고 하나님께 미친 삶을 사셨지요. 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빚진 자가 되셔서 주의 이름으로 자선을 베풀며 눈물로 씨를 뿌리는 삶을 사셨습니다. 사업이 조금씩 일어나면서 고향에 성산교회를 세워주시고 성산초등학교까지 지어서 헌납하셨습니다. 또한 구절양장같은 길을 시원한 신작로 길로 내 주면서 고향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셨죠. 섬기시던 부전교회 대지 일부를 헌납하셨고 누구보다도 부전교회 건축에 헌신을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 수많은 교회에 땅을 헌납하시고 교회당을 건축해주셨습니다. 그런 때 우리 총회는 WCC 문제로 허허벌판 오지로 갈라져 나와 가슴 시린 새벽 순례자의 삶을 출발해야 했습니다. 신발 끈을 동여매고 새벽 광야를 걸어야 했지만,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신학과 신앙, 그리고 교단의 정통성은 우리 것이었지만, 그러나 외형적으로는 맨발, 맨손, 맨땅 뿐이었습니다. 신학교마저 남산에서 쫓겨나 이리저리 배회해야 했던 서럽고 눈물진 광야 생활, 그때 님께서는 총신대학교 건립을 위해 사당동에 학교 부지 1만 8천 평을 사서 아낌없이 헌납하셨습니다. 그것도 공장 아래에 있는 양철집에 늙으신 노모님을 모시면서 말이죠. 자기 집 하나 변변히 짓지도 못한 사람, 노모 한 분도 편안히 모시지 못한 불효자식 주제에 어떻게 그런 위대한 결단을 하실 수 있었단 말입니까? 그 산으로 첩첩이 둘러싸인 두메산골 중에 산골에 태어난 촌뜨기 출신이 어떻게 그런 큰 믿음의 배포를 가지셨단 말입니까? 장로님께서 그런 헌신을 하지 않으셨다면 회사의 부도는 충분히 막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사업의 부도를 막지 못하여 당신은 감옥 생활을 하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하나님께 원망하지 않으시고 총신대 부지를 헌납한 것을 후회하지 않으셨다지요. 님의 눈물 젖은 헌신으로 오늘 우리 교단은 우리나라 최대의 교단이 되었고 총신대학교 역시 우리나라 최대의 신학대학으로 발전을 하였습니다. 저는 장로님을 만나본 적도 없고 소싯적에는 알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장로님이 가신 후 장로님에 대한 전기를 읽고 나서 한국교회 목사 중의 한 사람으로서, 아니 우리 교단의 목사로서 너무도 감사하고 빚진 자의 마음으로 11년 전 님께서 누워계신 무덤 앞에 꽃다발을 드리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후로도 우리 교회 장로님들과 함께 세 번을 왔습니다. 오늘 님이 태어나시고 자라셨던 성주지역 복음화대성회에 와서 다섯 번째로 꽃다발을 들고 왔습니다. 오늘은 참으로 송구하고 부끄럽고 무거운 마음으로 왔습니다. 요 근래에 와서 우리 교단과 총신에 장로님과 같은 분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총신대학교는 교권을 쟁탈하기 위한 전투장이 되어 버렸고 그 결과 관선이사들이 학교를 관리하며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천국에서 이 모습을 보신다면 장로님의 마음이 얼마나 비통하시겠습니까? 그러나 천국에는 눈물과 애통과 비통함이 없으시겠지요. 저는 총신대 문제를 대화로 풀기를 원했고 관선이사가 들어오는 것을 심히 우려한 목사였습니다. 그러나 저의 우려가 틀리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부디 관선이사가 들어오는 쪽을 선택한 분들의 생각이 맞기를 눈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장로님의 묘 앞에 송구한 마음으로 꽃다발 하나를 헌화합니다. 정말 송구스럽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이곳에 왔지만 다음엔 기필코 장로님의 뜻과 헌신의 목적이 회복되는 기쁨을 가지고 달려오겠습니다. 벌써 찬바람이 불어오는 가을이 되었네요. 이제 조금 있으면 님의 무덤을 에워싸고 있는 사방의 산에는 붉은 단풍이 들겠죠. 그러나 제가 다시 찾아올 때는 총신의 봄을 가지고 오겠습니다. 그때는 님의 무덤 주변에 연분홍 진달래가 피어 있고 진분홍 할미꽃도 피어 있겠지요. 그날이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신 부활절이면 참 좋겠습니다. “오, 하나님, 한국교회에 백남조 장로님 같은 분은 더 이상 없는가요? 아니, 우리 교단에 제2, 제3의 백남조는 다시 태어나지 않는 건가요. 우리 교회가 제2의 백남조 역할을 하게 하옵소서. 우리 교회 장로님 가운데도 제2, 제3의 백남조가 나오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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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8-10-07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죽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
    지지난 주 목요일 저녁엔 포항지역 지진피해 위로를 위한 희망콘서트에 남진 장로님과 함께 갔습니다. 가보니까 포앙중앙교회에 사람들이 입추의 여지가 없이 모였습니다. 역시 남진 장로님의 저력을 보았습니다. 남진 장로님이 콘서트를 하기 전에 제가 나가서 소망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여러분, 이곳에서 여러분을 만나 뵙게 되어서 정말 반갑습니다. 이곳에 지진이 발생했을 때 얼마나 놀라셨습니까? 얼마나 두려워하셨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살아 있으니까 이런 두려움도 느끼고 놀라신 것 아니겠습니까? 쓰러진 고목이나 죽은 나무는 절대로 바람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시든 꽃잎도 찬 서리가 내리고 눈보라가 쳐도 전혀 두려움을 느끼지도 않습니다. 살아 있는 나무만이 바람이 불 때 가지가 흔들리고 찬 서리가 내리고 눈보라가 칠 때 추위를 느끼기도 하고 두려움을 느끼기도 하는 것이지요. 이번 포항지역에 지진이 일어나 큰 피해를 당했지만 인명피해는 없었지 않습니까? 천만다행이었지요. 우리가 큰 피해는 당하였지만 그러나 이렇게 살아 있으니까 이런 고통도 느끼고 아픔도 느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죽은 자는 지진이 와도 모르고 벼락을 맞아도 모릅니다. 미국 애리조나주에 무서운 태풍이 불어 닥쳤습니다.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어요. 거친 허리케인은 집과 농작물, 가축들까지 모두 날려버렸어요. 농부들은 태풍이 쓸고 간 폐허에서 절망의 탄식만을 토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때 무너진 닭장 속에서 벼슬이 찢기고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된 수탉 한 마리가 비틀거리며 걸어 나왔어요. 수탉은 날개를 퍼덕이며 무너지지 않은 담장 높은 곳으로 올라갔어요. 그리고 동녘의 해가 떠오르기 전 붉은 여명을 향하여 목청껏 소리를 쳤어요. “꼬끼오!” 농부는 이 모습을 보고 용기를 얻었어요. “그래, 나도 저 수탉처럼 다시 일어나자.” 우리의 현실이 비록 폐허의 잿더미와 같을지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목청껏 노래하는 수탉처럼 우리도 다시 한 번 희망을 외쳐야 합니다. 아무리 밤이 깊어도 내일의 태양은 반드시 뜨지 않습니까? 첫 새벽길을 떠나는 순례자의 시린 가슴으로 다시 신발끈을 동여매고 길을 떠납시다. 희망의 “꼬끼오”를 외칩시다. 그럴 때 다시 저 동해바다의 아침에 떠오르는 붉은 태양처럼 우리 포항지역에 찬란한 내일의 희망의 아침, 소망의 아침이 밝아올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여러분과 포항지역에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봐도 심플하고 단아하고 소망이 넘치는 메시지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장학금 2천만원을 김문기 장로님으로 하여금 전달하도록 했습니다. 솔직히 2천만원을 가져갈 때는 약간의 부담을 갖고 갔는데, 가서 보니까 2천만원이 너무나 적은 돈이었습니다. 그래서 김문기 장로님으로 하여금 전달하도록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남진 장로님 콘서트를 하였습니다. 남진 장로님의 공연과 콘서트를 많이 봤지만 어떻게 갈수록 더 젊어지시고 청중을 장악하는지 노래 중간 중간에 하는 간증도 일품이었습니다. 콘서트를 하자 온 청중이 난리가 난 것입니다. 오빠를 외쳐대며 야단법석을 떨었어요. 저는 몸살 끝자락에 있었기 때문에 소망의 메시지만 전하고 바로 나와서 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바로 나올 수가 있어야지요. 그래서 한 두 곡만 듣고 나오려고 했는데 노래 한 곡 한 곡, 간증 한 마디 한 마디에 푹 빠져 들어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저의 바닥난 체력으로는 거기에 끝까지 앉아 있을 수 없었지만 남진 장로님의 감동적인 콘서트가 저를 꼼짝도 못하게 했던 것이죠. 제가 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끙끙 앓으며 식은땀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나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죽어 쓰러진 나무는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고 시든 꽃잎은 찬 서리가 내려도 두렵지 않지만, 살아 있는 나무만이 바람에 흔들리고 가을이 되면 낙엽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사실 저도 살아있으니까 몸살도 앓고 남진 장로님의 희망콘서트에 끝까지 참석할 수 있었던 거지요. 지진을 당한 분들도 살아 있으니까 아픔과 고통을 느꼈던 것이고요. 저는 교회 올라와서도 얼마나 신경 쓸 일이 많았는지 모릅니다. 제 주변의 가까운 분들이 저를 신경 쓰게 할 때가 있거든요. 그리고 거반 중노동보다 더 격한 심방 사역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봐도, 살아 있으니까 그런 아픔도 겪고 격한 사역도 감당해 내는 거죠. 저는 이러한 희망의 메시지가 지진을 당한 포항 시민들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 새에덴 성도님에게도 위로와 희망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살아 있으니까 삶의 꽃과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기도 하고 비에 젖기도 하고 때로는 낙엽을 만들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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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8-09-26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해석의 갈등을 넘어선 교회
    저는 지난 3일 동안 대구 반야월교회에서 있었던 대한예수교장로회 103회 총회(합동)에 참석했습니다. 무리한 남미일정과 귀국하자마자 쉬지도 못하고 빡빡한 목회일정을 소화하느라 결국 감기 몸살을 앓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총회 현장에도 늦게 도착했고 월요일과 화요일에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총회에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우리 총회는 수요일 저녁으로 마쳤습니다. 저의 경험상 이렇게 빨리 끝난 총회는 처음 봤습니다. 이승희 총회장님께서 특별한 지혜와 회의 리더십을 발휘했기 때문입니다. 총회 기간에 하루에 한 사람이 두 번 발언은 못하도록 하고 그것도 2분 이상 발언하지 말 것을 결정을 해 놓고 시작하니까 빨리 끝난 것입니다. 아무래도 일부 발언하기 좋아하는 분들은 불만이 있었다고 하지만 저는 몸도 좋지 않아서 빨리 끝나니까 너무나 좋았습니다. 지금까지 총회의 모습은 한 안건을 가지고 충돌을 하고 격돌하는 모습이었습니다. 한 하나님을 섬기는 목사, 장로이지만 같은 사안을 놓고 찬성, 반대가 치열하고 한 치의 물러섬 없이 자기 주장만이 옳다고 내세우는 것을 봤습니다. 저는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프랑스의 철학자인 폴 리쾨르가 떠올랐습니다. 그는 ‘해석의 갈등’(한길사)이라는 책에서 해석학적 순환을 통한 새로운 인간이해와 기독교적 세계관을 제시하였습니다. 그에 의하면 똑같은 사건도 보는 각도와 측면에 따라서 해석과 판단이 다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해석이 다르기 때문에 갈등과 충돌을 야기 시킨다는 것이죠. 그에 의하면 모든 시대마다 시대를 해석하는 키가 있다는 것이죠. 예컨대 근현대에 이르러서는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시각으로 시대를 해석하려고 했고, 사회주의와 시장경제라는 키(key)로 시대를 해석하려고 했습니다. 요즘에 와서는 진보적인 시각과 보수적인 시각이 해석의 갈등을 이루고 있지요. 또 정의의 시각과 사랑의 시각도 충돌하곤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의 갈등이 교회 안으로도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교인들도 성경을 자기 입장에서 보고 하나님을 자기편으로 끌어 들여서 해석의 갈등을 일으킵니다. 그러다보니 그들이 주장하는 말에는 다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그 일리와 일리가 교회 안에서 충돌하는 것입니다. 한국교계가 분열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충돌하고 분열하는 이유는 다 자기들이 주장하는 해석의 일리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도 얼마나 반대를 위한 반대, 상생이 아니라 보복과 파괴, 조악한 말꼬리 잡기나 조롱이 판을 치고 있습니까? 무조건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우기며 상대방을 공격하고 무너뜨리려고만 합니다. 이것을 심리학적으로 ‘선택적 지각’ 혹은 ‘확증편향’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가면 갈수록 교회나 교회의 행위를 바라보는 시각도 다르고 해석도 달라질 것입니다. 그래서 폴 리쾨르는 이 세상의 어떠한 사상과 철학도 시대를 온전히 해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나 시대를 온전히 꿰뚫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진리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닙니까?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적어도 그 진리를 믿는 사람이죠. 그렇게 볼 때 무조건 시류와 시대논리로 교회 잘잘못을 따지고 자기 편견으로 상대를 정죄하는 것은 일리의 노예가 될 수 있는 것이죠.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떤 사건을 보고 해석하는 키(key)가 언제나 성경이어야 하고 그리스도여야 하며 성령의 감동과 하나님의 뜻이어야 합니다. 아무리 시대정서나 자신의 편견으로 해석을 잘하고 일 결정을 잘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공동체를 분열시키거나 어느 한 쪽을 파멸시켜서 그것이 하나님께 누가 되게 한다면 얼마나 무지하고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 인간적으로만 보면 다윗도 너무나 부정적인 면이 있었습니다. 그는 무엇보다 밧세바를 범한 죄인이었습니다. 물론 회개하였지만요. 그리고 죽기 전에 솔로몬에게 요압과 시므이를 죽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떤 성경학자는 다윗을 아주 부정적으로 비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어떻게 보셨느냐는 것이죠. 하나님 보시기에는 다윗의 생전에도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했고 그가 죽은 후에도 얼마나 칭찬해 주셨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시대 흐름을 간파하고 트렌드를 관통하는 지혜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만큼은 시대정서나 논리, 혹은 자신의 일리에만 갇혀서 서로 갈등하고 다투다가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파괴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고 예수 그리스도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관점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총회는 참으로 성총회였습니다. 우리 새에덴교회도 해석의 갈등을 넘어서 하나님이 왕이시고 진리되시는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는 거룩한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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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8-09-17
  • [소강석 목사의 목양 칼럼] 소목사, 소통 목사
    우리 교인들이라면 잘 아시다시피 저는 유교문화가 강한 보수적인 가문에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 여아보다 남아선호사상이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물들었구요, 게다가 보수신학을 공부하면서 여성 사역자들에 대한 사고가 보수적 편향성에 치우쳐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전 우리 총회의 여성 사역자 지위향상 개발위원회 위원장님이신 고영기 목사님으로부터 ‘여성 사역자 지위향상과 사역개발을 위한 실제적 방안’에 대해서 목회적 차원에서 연구발표를 해달라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 주제를 연구하면서 여성 사역자들에 대한 편향적 사고를 다시 한 번 깨달았고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이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총신대 신대원 출신들 가운데 출중하고 뛰어난 여성 사역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성 사역자 안수를 금하는 우리 교단의 헌법 규정 때문에 출중한 여전도사님들이 다른 교단에 가서 안수를 받고 목회를 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총신에서 교육을 잘 받고 결국 다른 교단에 가서 그 교단의 살을 찌우는 것이 안타깝게 느껴졌습니다.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여성들이 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능력이 출중함에도 불구하고, 졸업하여 목사안수를 받고 교회에서 대우와 존경을 받는 남성 사역자에 밀려 그냥 심방전도사와 교육전도사에 머무는 여성 사역자들을 보면서 굉장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할 수 있으면 여성 사역자들의 지위향상과 사역 개발에 있어서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발표를 하려고 하였습니다. 먼저 발표를 하기 전에 논문을 몇 사람에게 보내 보았습니다. 총신대 신대원 교수이시고 저희 교회 연구목사님이신 양현표 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목사님, 여성 사역자들의 지위향상과 사역개발에 대해서 아주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제안하는 것은 좋지만 여성 사역자들의 안수 쪽으로 가는 하나의 징검다리나 그 수순의 이미지로 비춰질 수가 있습니다. 여성 안수는 신학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정치적으로 예민한 사항이기 때문에 발표 수위조절을 적절하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아직 공청회도 하지 않았는데 “소강석목사는 여성 안수를 주장하는 쪽으로 논문을 발표했다”는 헛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몇몇 총회 어른들이 “발표할 때 경계선을 넘지 말라고...” 충고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최대한 차분하면서도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발표를 하였습니다. 현장 분위기로 봐서도 여성 사역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고 감사와 만족의 눈빛도 느꼈습니다. 그런데 결론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오늘 발표한 발제문은 여성 사역자의 안수문제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데 역사 속 교단들의 흐름을 보면 이상하게 여성 안수의 허용이 신학적 자유화로 가는 결정적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합니다. 프린스턴신학교가 그랬고, 미국의 PCUSA 교단이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단은 여성 사역자의 지위향상과 사역개발을 위해서 심각하게 고민하고 적극적으로 결정하되, 이 과정이 신학적 진보와 자유화의 서곡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교단의 신학적 자유화만큼은 반드시 막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저는 바로 다음에 국회에서 광복절 기념식 행사가 있어서 자리를 떠야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 여성 선교사가 질의와 응답 시간에 자리에도 없는 저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한국에서 여성 안수를 허용하는 교단들은 다 극단적 진보주의입니까” 제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명쾌한 답변을 했을 텐데요. 사실 저는 여성 안수를 분기점으로 해서 신학적 진보와 자유화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우리 교단만큼은 절대로 신학적 진보와 자유화를 막아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을 뿐이지, 여성 안수를 허용한 교단이 극단적 진보주의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거든요. 우리 교단이 신학적 본질과 가치를 잘 지켜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인데요. 그런데 또 어느 언론에서는 마치 제가 여성 안수가 신학적 진보로 가는 길이 되었다고 주장한 것처럼 써 놓은 것입니다. 제가 국회를 좀 늦게 가더라도 질의와 응답 시간까지 남아 있었을 걸 하는 후회를 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오해와 소통 부재가 빚어낸 결과이지요. “아, 이렇게 소통이 중요하구나. 항상 자기 입장에서 이해하려고 하면서 불통을 낳게 되고 오해를 낳게 되는구나...” 생각지도 않는 질문과 오해를 받게 되면서 다시 한 번 소통의 중요성을 깨달게 되었습니다. 목회현장에서도 이따금 그런 오해와 불통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요즘 양방향 소통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며, 소목사야말로 더 확실한 소통 목사가 될 것을 다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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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8-09-11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아군에게는 총을 겨누지 않으리’
    지난 월요일 국회대강당에서 NAP 독소조항 반대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 출범식에 참석했습니다. 가보니까 여당 국회의원들은 안오고 야당 국회의원들만 왔습니다. NAP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여야를 초월해서, 크리스천의원들이 서로 손을 잡고 독소조항을 수정하도록 해야 하는데 정말 아쉬웠습니다. 더구나 야당 국회의원들은 NAP에 대한 문제를 안보, 경제, 국가 기본 정책까지 싸잡아서 함께 비판하는 것입니다. 물론 야당의 의원들이야 그런 입장일 수밖에 없겠지만 마치 그 자리가 야당을 위한 포럼의 자리로 둔갑을 해 버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니, 그 자리는 마치 반정부운동의 자리와 같았습니다. 저는 출범 메시지를 맡았는데 제 차례가 와서 강단으로 올라갔습니다. 저는 미리 준비한 원고를 접어두고 즉흥적인 메시지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최대한 균형적인 메시지를 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여러분, 저는 정치인이 아니고 목회자입니다. 그래서 중립적이고 균형적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남북정상회담과 평화조약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응원하고 박수를 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NAP안에 있는 독소조항은 참으로 우려스럽습니다. 인권이 무엇입니까? UN 인권 헌장 29조를 보면 윤리, 도덕에기초를 하고 공익에 반하지 않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국가 인권위원회는 인권의 본질을 왜곡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서구에서의 인권운동의 선도자는 윌버포스고 미국에서는 마틴 루터 킹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래봬도 마틴 루터 킹 퍼레이드 재단에서 국제평화상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당시 마틴 루터 킹 보다 더 과격하고 급진적 인권운동을 했던 마르콤 엑스가 있었습니다. 그는 조지아주와 몇몇 주에서 백인들을 다 쫓아내버리고 흑인공화국을 만들자고 주장했습니다. 백인들을 적폐 중의 적폐로 생각하고 흑백간의 편가르기를 하는 인권운동을 했던 거지요. 물론 그는 일부 흑인들로부터 마틴 루터 킹 보다 더 큰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우리 중의 대부분은 그에 대한 존재 자체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러자 뒤에서 막 “그만해, 그만해, 내려와!” 이런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조금 전에 한 야당의원이 법무부의 인권정책을 마련한 담당관을 비판하자 “죽여, 죽여!”를 외친 사람이었습니다. 정말 극단적인 생각과 표현을 하는 사람이지요. 그러나 저는 계속 메시지를 이어갔습니다. “반면에 왜 마틴 루터 킹은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고 존경을 받고 있습니까? 그는 흑인과 백인을 화해시키고 통합하는 평화적인 인권운동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저 조지아주의 붉은 언덕에서 흑인과 백인이 함께 손을 잡고 살아가는 그런 세상을 꿈꾸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훗날 그의 비도덕적인 과실들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노벨평화상을 받게 되었고 여전히 미국 사람들이 그가 탄생한 날을 기념하여 공휴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도 편가르기식 선동을 하지말고 정말 소통하며 통합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특별히 정부가 인권운동을 앞세워 편가르기식 선동을 하지 말고 상호 간에 표현의 자유를 존중하면서 소통하고 화해하고 통합하는 인권정책을 펴야 합니다.” 그랬더니 또 그 쪽에서 막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내려와, 지난 번 국가조찬기도회 때 문재인을 상찬했던 것부터 회개해!” 그래도 저는 아랑곳하지 않고 메시지를 이어갔습니다. “지금 우리는 한반도에 평화의 꽃씨를 뿌리고 북한의 핵 폐기와 종전선언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면 언젠가는 피흘림이 없는 복음적 평화통일이 이루어질 수도 있을 텐데 그때 이러한 극단적 인권정책이나 조례를 북한 주민들이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또한 과연 북한 지도부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우리 정부는 심각한 고민을 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도 우리가 하나가 됩시다. 우리 한국교회 뿐만 아니라 타종교도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종교는 사회의 마지막 항체요 보루요 저항인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저항인자가 되어서 이 독소조항을 수정하도록 합시다. 이를 위해 우리 모두가 하나 되어 끝까지 싸웁시다” 그러자 우레와 같은 함성의 박수가 나왔습니다. 물론 도중에도 함성의 박수가 나왔습니다마는, 그러나 소리를 질렀던 몇몇 분들은 자기중심의 확증편향성과 선택적 지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한 마디로 극우 중의 극우의 확증편향성을 가진 사람들이죠. 지금 우리는 보수가 되었건 진보가 되었건 절대로 편가르기를 하면 안 됩니다. 무조건 동성애를 인권으로 포장해서 선동정치를 하려고 하는 진보 쪽도 큰 문제이지만, 아군에게 총질을 하면서까지 극우적인 확증편향성에 사로잡혀 과격한 발언을 하고 좌충우돌하는 사람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극우건 극좌건 무조건 편가르기식으로 우리 사회를 선동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편가르기를 하는 것은 정말 쉽지요. 극단에 서서 상대를 비판하고 증오하는 거야 정말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상대와 서로 소통하고 설득하며 대화로 풀어나가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어렵지만 그것이 크고 진정한 지도자의 길이지요. 솔직히 저는 그 분들 보다도 건강한 교회 생태계를 위해 더 많은 희생과 헌신과 눈물을 쏟은 사람입니다. 이런 일을 위해서 얼마나 배후에서 활동하고 후원하고 희생했는데요. 저 또한 정말 극단적인 발언과 행동을 해야 할 때는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아도 될 때에는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죠. 저는 그런 극단적이고 과격한 행동을 하는 사람에 대해서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마음속으로도 그들에게 총질은 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함께 손잡고 일해야 하니까요. 공항으로 출국하는 길은 하늘이 캄캄하고 비가 쏟아져 차가 몹시 막혔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맑은 하늘을 꿈꾸며 저는 비행기와 함께 이륙합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8-09-02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웃고 있어도 눈물 나는 자리
    지난 8월 21일 밤, 저는 잠을 설쳤습니다. 어린 시절 소풍을 가기 전날 밤처럼 말이죠. 다음날, 단국대에서 저의 명예문학박사 학위 수여식이 있었거든요. 저는 논문을 써서 두 개의 석사학위와 이어 목회학박사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저의 모교인 광신대학교에서 명예신학박사를, 백석대학교에서는 명예철학박사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백석대학교와 장종현 총회장님이 제 가슴 속에서 떠나질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명예문학박사는 정말 제 가슴을두근거리게 하였습니다. 목회자가 명예문학박사를 받는다는 것은 거의 없는 일이기에 총장님 옆에 앉았던 저는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정말 눈물이 나려고 하였습니다. 저의 순서가 오기까지 많은 졸업자들의 석박사 학위 수여식이 있었습니다. 논문을 쓰느라 그들 모두가 얼마나 수고를 하였겠습니까? 그들의 학위 수여식 중 제 머릿속에는 지나온 삶의 여정이 스쳐갔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문학적, 예술적 감성과 상상력이 컸던것 같습니다. 라디오 연속극을 들으면 상상의 나래를 펴고 꿈속으로 날아갔고 동화책이나 소설책을 읽으면 그 이야기가 펼쳐지는 문학적, 예술적 사유를 꿈속으로까지 끌고 갔지요. 만약 제가 일반대학교를 갔더라면 국문과나 영문과를 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거룩한 소명을 받으면서부터 오랫동안 문학적 사유를 중단하고 절필을 하였습니다. 오로지 신앙의 투혼을 불사르며 영적 사유에 정진을 하였지요. 그러다가 어느 정도 목회의 길을 다지게 된 후, 다시 문학적 향취를 회상하며 펜을 들고 글을 쓰며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문학을 전공하지 못한 사람이 글을 쓰기 때문에 그것은 독학이요 습작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였는지 저의 글은 붉은 고원에서 고독하게 쓰여져야 했습니다. 그렇게 쓰여진 제 글은 저 고원의 계곡 아래로 내동댕이쳐지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수많은 산간 협곡을 지나고 오지를 넘어 저의 길, 저의 세계를 개척해 나갔습니다. 목사이기에 설교만 열심히 하면 될 걸, 왜 그토록 글쓰기에 도전하고 문학의 지평을 열고자 했는지... 그러나 그런 문학적 목마름과 갈망 때문에 부지런히 시를 쓰고 책도 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 메이저 일간지에 글쓰기 도전도 하였지요. 하지만 목회자가 비난당하던 시대에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는 깊은 계곡 아래에 떨어져야 하는 절망도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산기슭이나 계곡의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썩은 고기만을 찾아다니는 하이에나가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 산정 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 죽더라도 도전에 살고 죽는,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되고 싶었습니다.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순 없잖아요. 문학적 사유와 잠재력을 갖고 태어난 사람이 그래도 제가 쓴 글의 흔적일랑 남겨둬야지요. 묻지마세요. 왜 그리도 힘들게 고독한 저 붉은 고원, 아니 눈 덮인 저 킬리만자로의 정상을 오르려고 하느냐고요. 굶주리고 고독한 문인의 불타는 영혼을 아는 이 없으니 또 어떠하겠습니까? 마침내 저는 마음으로 잠시 오른 킬리만자로의 정상에서 여름의 푸른 강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름 강을 넘어 푸른 초원을 만날 수 있었지요. 그래서 목회자로는 유일하게 주요 일간지에 글을 쓰고 각종 문학상을 받는 꿈같은 일을 누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목회자가 거의 받지 않는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 자리에서 태연한 척 웃고 있어도 온 몸이 긴장되고 눈물이 날 수 밖에요. 저는 답사를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총동문회 회장처럼 키높이 발판대를 마련해 주었으면 좋았을텐데 학교 직원이 제가 엄청 키가 큰 줄 알고 그것을 준비해 주지 않아서 애를 먹었습니다. 그러나 기억나는 것은 저의 진심이고 울먹이는 가슴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선포적 사역을 많이 하였지만 글쓰기에는 부족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글을 많이 써서 그의 사후에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칼빈도 루터보다 많은 글을 남겨서 더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지요. 이제 제 글에 삶의 진액을 담고 싶습니다. 그 글로 세상의 그늘을 지워나가고 싶습니다. 제 글이 세상에 꿈이 되게 하고 싶습니다. 아니, 제 글이 작은 별 하나가 되어서 어둔 세상을 반짝이며 복음 선교에 한 줌의 중보가 되고 교회의 이미지를 격상시키는 별빛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다가 조용필이 불렀던 저 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 가죽을 남기고 죽고 싶습니다. 단국대학교와 장충식 이사장님께 하나님의 무궁한 축복이 있기를 바라고 새에덴 성도 여러분 모두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8-08-28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추억은 날개를 타고 오다
    제가 예수 믿고 신학교를 간다고 집에서 쫓겨나 군산 시내를 전전긍긍할 때였습니다. 그 때 주로 군산명석교회(현 군산 사랑의 교회)에서 잠을 잤습니다. 옛날에 얼마나 추웠습니까? 난로 하나도 못 피우고 맨 의자 위에서 침낭 하나 가지고 기도하다 잠을 자다 그렇게 밤을 보냈습니다. 얼마나 많이 굶었는지 눈이 쑥 들어갔습니다. 낮에는 주로 신학교 시험 준비를 위해서 성경을 보고 그 와중에도 가슴이 뜨거우면 전도를 하러 다녔습니다. 그러던 중에 군산개복교회에서 부흥회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당시 개복교회는 군산 에서 가장 큰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그 집회를 참석했는데 강사는 피종진 목사님이셨습니다. 피종진 목사님은 당시 전국과 세계적으로 부흥회를 다니시는 분이었습니다. 역시 집회를 가보니까 대단한 부흥강사였습니다. 분위기 자체도 다른 교회 부흥회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청중을 압도하는 부흥강사의 찬양과 메시지, 울렸다 웃겼다하는 생동감 넘치는 카리스마에 완전히 매료되었습니다. 그 때 하얀 양복을 입고 부흥회를 인도하시는 목사님의 모습은 환상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금식을 하면서 개복교회 지하실에서 잠을 자고 새벽기도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새벽기도를 하면서 보니까 사람들이 강단에 안수기도를 받으러 가는 것입니다. 그 때는 새벽집회, 낮 집회, 밤 집회, 그것도 목요일, 금요일까지 했던 때인데, 지금 생각해보면 새벽에 그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안수기도를 받았으니 강사님이 얼마나 피곤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남들이 안수기도를 받으니까 저도 한 번 끼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제 머리에 손을 얹는 순간 온 몸에 불이 확 임하는 듯한 감각을 느꼈습니다. 게다가 목사님께서 손을 얹고 기도해주시는 내용이 기가 막혔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지금은 정처 없는 몸인 것 같지만 내가 너에게 다윗의 권능을 주노라. 내가 다윗처럼 능력을 주어 너를 복되고 귀하게 사용하리라. 주여, 성령께서 감동하신대로 꼭 이 아들을 강건하게 사용하여 주옵소서.” 저는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아멘, 아멘”하며 엉엉 울어버렸습니다. ‘아, 어떻게 저 분이 내 상황을 알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다윗 같은 은혜를 주시고 능력을 주신다니...’ 하루 종일 감격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새벽이 되어서 사람들이 또 기도를 받으러 가는데 갑자기 의심하는 마음이 들어왔습니다. ‘목사님이 누구에게나 그런 기도를 하시는 거 아니야’ 그래서 제가 반대쪽으로 가서 기도를 좀 엿들었습니다. 그런데 보니까 사람들마다 기도가 달랐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기도를 받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기도를 받으러 갔습니다. 혹시라도 목사님이 저를 기억할까 싶어서 말입니다. 사실 불이 다 꺼진 상태이기 때문에 아무리 천재라도 기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 어제보다 더 감동 있는 기도를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권능을 기름 붓듯 부으시리라. 다윗의 권능뿐만 아니라 바울의 능력으로 너와 함께 하여 끝날까지 내가 너를 존귀하게 사용하리라. 걱정하지 말고 부름받은 길을 걸어가거라.” 그래서 저는 목사님 앞에 무릎을 꿇고 “목사님, 죄송합니다. 잘못 했습니다”하면서 사죄를 드렸습니다. 저는 집회를 참석한 이후에 피목사님을 만나 본 적도 없습니다. 가난한 신학생이 어찌 감히 그런 분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그저 제 마음에만 담고 살아온 것이지요. 그런데 가락동 개척교회 시절에 이 분을 부흥회에 모시려고 사모님께 여러번 전화를 드렸습니다. 그 때 사모님이 목사님의 부흥회 일정을 짜셨는데 다 짜여져서 도저히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목사님께 기도 받고 은혜 받은 사람인데 단 하루라도 오실 수 없느냐”고 사정을 하였습니다. 그 때가 연말이었는데 목사님께서 송구영신예배를 위해서 쉬셔야 한다고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한 주 집회는 그만 두고 단 하루라도 모시고 싶다고 했는데도 사모님이 허락을 안 해 주셔서 그 때는 상처가 참 컸습니다. ‘아, 단 하루도 못 오시는가...’ 그래서 그 분을 모실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그 이후로는 우리 교회가 부흥회를 안 하고 제가 자작부흥회를 했으니 모시질 못한 거지요. 그런데 제가 요즘 나이가 먹으면서 자꾸 피목사님이 떠올랐습니다. 그 때의 지울 수 없는 추억이 날개를 타고 저의 가슴으로 자꾸 찾아오면서 “제 형편에서만 생각하고 상처를 입은 제 자신이 속 좁은 사람이었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다음 주일 저녁에 1일 부흥회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이 분을 진작 모시지 못한 후회하는 마음이 가득합니다. 다음 주일저녁 뜨거운 은혜를 사모합니다. 그때 추억은 날개를 타고 저에게 날아오고 제 마음 또한 그때의 아련한 추억으로 날아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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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8-08-19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친구의 무덤에 꽃을 피우리’
    어린 시절 잊을 수 없는 친구가 있다. 내가 살던 마을 작은 교회 담임전도사님 아들이었다. 나는 유교적이고 불교적 전통을 중시하던 아버지 밑에서 자라서 그랬는지 그 친구를 무던히도 괴롭혔다. 예수님이 부처님 앞에서 도망가는 그림을 그려놓고 친구를 골리기도 했다. 그가 울면 좋아서 괴롭히며 때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선생님이 들어오면 “너 왜 우니” 하고 철저하게 착한 아이처럼 위장을 했다. 그래서 하루는 그 친구의 어머니가 학교로 쫓아왔다. 담임선생님께 “저 놈이 우리 아들을 때린다”라고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나의 철저한 위장 때문에 선생님은 친구 어머니께 “이 아이는 모범생이라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다음 날 학교에 가서 그 친구를 골려주었다. 그 친구는 그렇게 놀림을 당하면서도 “강석아, 같이 예수 믿고 교회 좀 다니자. 내가 너를 꼭 천국으로 인도하고 싶어”라며 끈질기게 전도를 했다. 그런데도 나는 교회를 나가지 않았다. 아무리 성탄절에 사탕을 주고 부활절에 공책을 준다고 해도 더 어긋 바라진 심정이었는지 나가지 않았다. 친구와 헤어진 것은 중학생이 된 뒤 친구 아버지가 목사가 되어서 다른 지방의 큰 교회로 부임하면서부터다. 세월은 물처럼 흘러 나는 목사가 되었고 목회를 하면서도 이따금씩 친구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이 밀려오곤 했다. 친구에 대한 그리움도 생겼고 언젠가 친구에게 사과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몇 년 전 그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TV에서 나오는 내 설교 방송을 보고 연락을 했다는 것이다. 지방이었지만 친구는 사업도 잘되고 모든 것이 형통하다고 큰 소리를 뻥뻥 쳤다. 나는 먼저 전화로 사과부터 했다. “친구야, 그때는 내가 너무 미안했어. 방송 설교를 들으면서 얼마나 나를 욕했니? 미안하다. 내가 한번 내려갈게.” 그런데 얼마 뒤 전화를 했더니 결번이라는 안내 음이 흘러나왔다. 왜 그럴까, 몹시 궁금하였지만, 또 세월은 화살처럼 흘러가버렸다. 그러다가 어찌어찌해서 소식을 알게 되었는데 친구는 위암 말기 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바빠도 친구를 위해 기도해주러 한번 내려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 주쯤 뒤에 금쪽같은 시간을 내서 지방병원으로 내려가 보았더니 이미 친구는 하늘나라로 갔고 이제 막 발인을 했다고 했다. 아, 어쩌면 이럴 수가 있을까.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몇 년 전 통화할 때 이미 사업은 부도가 났고 무척 힘들게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친구가 전화번호만 바꾸지 않았더라면 친구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워주었을 텐데, 어쩌면 스트레스를 덜 받아 암도 들지 않았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니 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마침내 친구가 죽어서야 나는 꽃다발을 들고 친구의 무덤을 찾았다. 친구의 시신은 화장을 해서 납골묘를 하였다. 나는 반 평도 안 되는 친구의 작은 무덤 앞에 고개를 떨구고 꽃다발을 헌화하며 용서를 구했다. 마음속으로 이렇게 속삭이고 또 속삭였다. ‘친구야, 네가 나보다 먼저 천국에 갔구나.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니 지금은 하늘나라에서 나를 보고 있겠지. 미안하다. 그런데 그때 왜 전화번호를 바꿨어. 너랑 통화만 되었어도 내가 네 손을 잡아줄 수도 있었을 텐데….’ 인생은 왜 그럴까. 친구가 살았을 적에는 시간을 못 내고 왜 죽은 후에야 아쉬워하며 그리움을 느끼게 된단 말인가. 참으로 미련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애써 쓸어내리며 친구의 무덤 앞에 꽃씨를 한 줌 뿌려놓고 왔다. 이미 봄은 지나갔지만 무덤 앞에 꽃씨는 싹을 틔울 것이고, 올해는 피지 않더라도 내년에는 꽃을 피우리라고 기대를 하면서. 아니, 참으로 속절없기는 하지만 내년 봄에 다시 와서 꽃씨를 뿌려야지.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8-08-12
  • [소강석 목사의 목양 칼럼] 선험적 고난 체험
    지난 주는 30주년 다큐제작을 위해 촬영하느라 완전 땀으로 멱을 감아버렸습니다. 봄이나 지난 번 3M 트립 때 촬영을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서로 소통이 부족해서 별도의 시간을 내야 했던 것입니다. 111년 만에 최고의 더위를 기록한 때에 그 험한 용화산기도원을 올라갔으니 얼마나 더웠겠습니까? 기도원에 올라가서만 촬영을 한 것이 아니라 올라가는 길, 내려오는 길을 여러 번 찍었습니다. 게다가 올라갈 때 앞모습을 찍죠, 또 뒷모습을 찍죠, 심지어는 올라가는 발을 찍는다고 하지요, 그러니까 얼마나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 했겠습니까? 또 경관이 좋은 곳은 내려올 때도 다시 찍었으니 말이죠. 내려와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와이셔츠는 그만두고 넥타이까지 촉촉해져 버렸습니다. 저는 추위는 잘 참지만 더위는 정말 못 견디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군산사랑의교회와 남원까지 가서 대낮에 뙤약볕 아래서 촬영을 하는데 얼굴이 얼마나 새카맣게 익어 버렸겠습니까? 또 화순백암교회에 가서 촬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튿날도 촬영을 위하여 일찍 무등산제일기도원으로 갔습니다. 저 혼자 가는 것이 아니라 정권사님을 부축하고 가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냥 가면 좋을 텐데 PD께서 정권사님이 먼저 앞장서서 가고 제가 다시 내려가서 뛰어 오면서 “권사님, 왜 이렇게 잘 가세요? 팔순 노인이 되어가지고 이렇게 빨리 가시면 돼요” 이렇게 정권사님께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달려가다가 갑자기 허리가 삐끗한 것입니다. 그러니 기도원으로 올라가는 길도 힘들었지만 촬영할 때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촬영을 마쳤으면 그 때라도 빨리 내려와서 치료를 받았어야 했는데 정권사님이 기도원에서 라면도 드시고 삶은 감자도 드시고 싶다고 하셔서 두 시간 가까이 앉아서 이야기를 하며 라면과 감자를 먹었습니다. 제가 그만큼 정권사님을 잘 섬긴다는 거겠죠. 정권사님께서 교회에서는 밥도 잘 못 드시고 감자를 삶아드려도 안 드시는데, 그곳에서는 드시고 싶다고 하니 권사님을 배려해 일부러 기다렸던 것이죠. 그런데 등받이 의자에 앉았다고 두시간 동안 기도원에서 내려오는데 허리가 장난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겨우겨우 내려와 광주 한의원에 가서 찜질도 하고 침도 맞으며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차를 타고 올라오는 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휴게소에서 화장실 가는 길도 김문기장로님의 부축을 받아야 할 정도였습니다. 차 안에서 생각해 보니, 이것은 장년수련회를 앞두고 은혜를 방해하려는 마귀의 시험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문득 2015년 장년여름수련회가 생각이 났습니다. 저는 그 때 수련회 기간 중에 갑자기 신장결석으로 통증이 찾아와 숨도 쉴 수 없는 고통과 싸워야 했습니다. 신장결석을 앓아본 사람들은 알지만 산모가 아이를 낳는 고통보다 크다는 것이 바로 신장결석의 통증입니다. 한 번 통증이 시작되면 허리가 끊어질 정도의 고통이 오고 숨도 못 쉬며 꼼짝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상황에서도 모르핀까지 맞으면서 육체의 한계와 고통을 초월해 집회를 인도했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몸이 불편하니까 저로서는 부족하고 아쉬운 마음이 가득했지만, 투혼의 몸부림으로 설교하는 제 모습에 성도들이 더 역설적인 은혜와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번에도 마귀가 어떻게든 은혜를 방해하고 못 받게 하려고 시험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간절하게 기도하였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은혜를 방해하고 시험을 주려는 모든 마귀의 역사는 물러가라.” 그러면서 침도 맞고 최선을 다해 치료를 받았습니다. 동시에 저는 이런 생각이 스쳐갔습니다. “허리를 다치니까 정말 꼼짝도 못하네. 아, 인간이 이렇게 나약하구나...” 그렇습니다. 우리가 두 발로 걸어 다닐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합니까? 허리가 썽썽하다는 게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런데 간절히 기도하며 하룻밤을 자고 일어났더니 허리가 진짜 절반 가까이 좋아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유송근 장로님 친구인 이종덕 물리치료학박사님이 제 허리를 만져주자 거의 다 좋아졌습니다. 그래서 금요일부터는 조심스럽게 심방도 다닐 수 있었습니다. 정말 매일매일 사는 게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며, 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니 저도 마찬가지이지만, 우리 성도들이 장년여름수련회에 참석할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은혜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아픈 게 일종의 선험적 수난이고 대표적 고난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장년여름수련회에 행여라도 있을 수 있는 안전사고에 대비하여 제가 미리서 선험적이고 대표적인 고난을 체험했다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아니 그렇게 되기를 기도하며 오히려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저 역시 이번 수련회에 주실 은혜와 축복을 더욱 더 사모하며 기도합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8-08-05
  • [소강석 목사의 목양 칼럼] 어느 안티 크리스천과의 대화
    저에게 인간적인 유일한 행복의 시간이 있다면 산행을 하는 것입니다. 산은 저에게 있어서 항상 주님의 품속 이미지요, 제 영혼의 안식처로 형상화된 공간입니다. 그래서 산에 가면 저만 누릴 수 있는 영육간의 케렌시아를 만끽합니다. 아니, 새로운 세계로 떠나는 것 같고 몸과 마음이 정화되는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1년에 한 두 차례라도 깊고 큰 산을 가보는 게 소원입니다. 장로님들과 함께 그런 산에 가노라면 목사와 장로 딱지를 떼어버리고 그저 동무가 되고 마냥 어린애가 되지요. 그러나 시간에 쫓겨 사느라 큰 산은 그만두고 불곡산 같은 곳에도 못 갑니다. 그저 겨우 이따금씩 교회 뒤편에 있는 야산을 가곤 합니다. 그것도 주로 일과가 다 끝나는 저녁에 갑니다. 그런데 하루는 오후 늦게 갈 수 있었습니다. 늦은 오후였지만 날씨가 정말 후덥지근하였습니다. 땀이 얼마나 흐르는지 눈으로 들어갔습니다. 제가 땀이 나면 눈으로 줄줄 흘러 들어가는 것을 우리 교인들은 다 아시잖아요. 그래서 중간에 벤치에 앉아서 좀 쉬었습니다. 그러자 동행한 비서들이 부채질을 해 주었습니다. 그러다가 잠깐 벤치에 누워 있었는데 갑자기 어떤 분이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누워 있는 사람, 소강석목사 맞지요” 그래서 제가 일어나서 “예 맞습니다”라고 했더니, “당신 이래도 되는 거야? 당신이 왕이야? 이 사람들도 똑같이 더울 텐데 왜 당신만 부채질을 받는 거야? 큰 교회 목사가 이래도 되는 거야” 제가 동물적 감각으로 “오늘 큰 물건 하나 만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아이구, 죄송합니다. 보시기에 불편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랬더니 그래도 계속 반말을 하면서 대형교회 목사들을 싸잡아서 욕하는 것입니다. “나도 옛날에 교회를 다녔지만 목사 꼬라지, 교회의 부패한 모습이 보기 싫어서 안 다닌다”고 하는 것입니다. 갑자기 화가 나기도 했지만 죄송하다는 말로 끝날 문제가 아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어서 전략적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래서 저도 화를 버럭 내면서 “아니 죄송하다고 하면 됐지 선생님이 무슨 자격으로 그런 이야기를 하십니까? 뭐가 그렇게 불만이어서 시비를 걸어요? 죄송하다고 하면 알았다고 하고 가면 되지 왜 끝까지 시비를 거는 거요? 나하고 이야기 좀 합시다.” 그러면서 거의 반 강제로 벤치에 앉혔습니다. 그랬더니 계속 같은 말만 반복을 하는 것입니다. 안 되겠다 싶어서 “산에 올라가면서 이야기나 합시다”하면서 이야기를 쭉 했습니다. 제가 느끼기에 그 분은 정의감도 있고 선악에 대하여 경계선이 분명한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공익을 위한 의협심도 있는 것 같았습니다. 특히 이 시대의 부조리한 사회 모습과 불공평함에 분노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어떤 면에서 확증편향성을 갖고 있고, 분노조절장애가 있지 않나 하는 나름대로 감을 잡고 거기에 맞춰서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제 짐작이 어느 정도 맞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진심을 담아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가 산을 좋아하고 산에 오르면 동심의 세계에 온 것 같으며 오늘 같은 경우는 너무 땀이 나고 저혈당 증세도 온 것 같아서 쉬면서 부채질을 받고 있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저의 삶의 내면을 면면히 주고받았습니다. 그랬더니 이분이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연 것입니다. “사실 저도 한동안 H교회를 다녔습니다. 심지어는 새에덴교회도 몇 번 나가봤지요. 그래서 소목사님이 설교하는 모습에 박력도 있고 인간적으로 의리가 있고 남자다움의 성품을 가졌음을 느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내면의 이야기를 털어 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려오는 길에는 서로 형님, 동생의 관계를 맺기로 하고 교회도 나오기로 했습니다. 그 분은 제가 대단한 호화주택에서 살고 차도 벤츠를 타고 다니며 호화판 삶을 사는 줄 알았다는 겁니다. 그러나 아직도 골프채 한 번 잡아 보지 못했다는 사실과 산 아래 주차 되어 있는 제 카니발 차를 보더니 그제야 하는 말이 “목사님도 이제는 골프 좀 치고 쉬시면서 사역을 하세요”라고 하면서 기회 되면 자기 사무실에 와서 기도도 해 달라는 것입니다. 돌아오는 길에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저는 그 분을 통하여 이 시대의 정말 괴짜 같은 ‘안티 크리스천’ 겸 ‘안나가 신자’의 내면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에게는 나름대로의 정의감과 개혁정신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반면에 교회와 목사에 대한 상처와 오해가 깊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도 인내하고 끝까지 소통하며 설득을 하면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목사와 교회를 이해하게 된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소통과 설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우쳤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사람이 다니는 산에서 앞으로 저는 공인으로서 절제되고 자제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글을 쓰는 지금도 그 형제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잠시 그 형제를 축복합니다. 아니, 이 시대의 모든 안티 크리스천 겸 ‘안나가 신자’들을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그들이 유목민으로서 배회를 멈추고 다시 하나님의 목장으로 돌아오도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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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8-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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