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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그래도 감사하는 이유”
- 지난 화요일은 어느 신학대학교에 가서 설교를 하고 왔습니다. 설교뿐만 아니라 신학대학교 채플의 노후된 영상 시설까지 저희 교회가 교체를 해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전날 저녁, 제가 하필이면 어느 지상파 방송의 고발 프로그램에 나오는 어느 교회 분쟁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유튜브로 본 것입니다. “서로 함께 개척을 한 교회가 어떻게 설립자와 후임자 간에 다툼이 있고 교인들이 그렇게까지 싸울 수 있을까. 어쩌면 저렇게 서로를 비난하고 정죄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잔상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잠이 부족한 상태로 신학교를 갔죠. 그래도 어쨌든 제가 강단 체질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다행히 젊은 학생들과 소통하는 설교를 할 수 있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단 몇 분이라도 빨리 차로 가서 쉬면서 교회로 오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총장실에 도시락을 준비했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설교를 하는 도중에 제 핸드폰에 불쾌한 메시지가 몇 개 들어와 있었습니다. 저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 그리고 저에게 지난날 그토록 인간적으로 충성했던 사람이 아무것도 아닌 걸 가지고 오해의 문자를 보내온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 배신감이 들고 불쾌한 마음이 들었지만, 총장님과 식사를 하는데 전혀 내색하지 않고 밥을 먹었습니다. 밥은 먹었지만 생각은 아주 유치한 문자에 있었던 거죠. 그런데 하필이면 도시락 반찬 속에 돌이 있었던 것입니다. 반찬을 살살 씹어 먹어야 되는데 제 마음에 약간 불편한 분노 같은 게 있어가지고 그냥 반찬을 콱콱 씹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 돌이 팍 씹힌 것입니다. 그 돌을 꺼내놓고 보니까 얼마나 단단한 돌이었는지, 게다가 입안에서 더 큰 돌이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큰 돌을 자세히 봤더니 돌이 아니라 오른쪽 어금니가 부러져버렸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총장님과 다른 교수님께 말도 못하고 끙끙 앓으며 왔습니다. 그 길로 당장 죽전 중앙로에 있는 다봄치과에 갔습니다. 그랬더니 원장님이 이렇게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이가 충치 먹은 것도 아니고 아주 건강한데 무슨 돌을 그렇게 세게 씹었길래 이렇게 상해 버렸습니까?” 그러면서 크라운을 씌우는 것도 현재로서는 애매하고, 그렇다고 또 마취해서 뽑기도 애매하고, 우선은 견딜 수 있도록 상한 이에 옷을 입혀주겠다며 곧장 임시치료를 해주셨습니다. 제가 많은 생각을 해봤습니다. “왜 하필이면 그 돌이 나한테... 돌 있는 도시락이 총장님이나 다른 교수님한테 갔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왜 하필이면 나한테, 그리고 왜 설교 중에 마음을 상하게 하는 문자가 와가지고 그렇게 돌을 씹게 만들었는가...” 이성적으로 생각해 볼 때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좋은 일을 하고 기분 좋게 식사를 해야 되는데 생니가 나가버릴 정도로 돌을 씹었으니 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가 잘 안 되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사탄이 저를 시험하는 거였습니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어떤 성도가 교회에 와서 헌신기도를 받고 돌아가는 길에 접촉사고가 난 일이었습니다. 하필이면 교회를 와서 저에게 헌신기도를 받고 가는 중에 그런 일이 있으면 제가 얼마나 미안하겠습니까? 그래서 전화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괜찮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시려고 그런 겁니다. 더 큰 사고가 나지 않는 게 감사할 뿐입니다. 목사님, 기도 많이 해주세요.” 그 생각이 떠오른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무조건 감사해야 되겠구나! 그래도 감사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째는 이가 두 개, 세 개가 부러진 게 아니라 하나만 부러져서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시험이 교인들에게 임하지 않고 차라리 내가 당한 것을 감사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보다 더한 일이 일어나지 않고 지나가게 하신 것을 감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삶을 살아가면서 이런 일이 없으면 좋겠지만 그래도 우리 그리스도인은 감사해야 합니다. 저는 청년시절에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사고가 나서 왼쪽 광대뼈 위로 얼굴을 갈아버린 적이 있습니다. 언뜻 보면 모르지만 거울 가까이서 보면 저만 알 수 있는 흉터 자국이 있습니다. 저는 그걸 ‘은혜의 상흔’이라고 여기는데요, 마찬가지로 제가 부러진 이를 혓바닥으로 감지할 때마다 “이 역시 감사의 상흔이다. 이걸 생각할 때마다 항상 더 감사해야 되겠다. 무조건 감사해야 되겠다”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 글이 하나님께 헌신을 하면서도 좋은 일이 아닌 조그마한 시험이라도 온 분들에게 조그마한 위로가 될 수 있기를 바라고 공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저의 감사로 인하여 하나님이 더 넘치는 위로와 좋은 일을 공급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또 헌신을 하면서 잠시 마음이 상했던 분들도 이 글로 인하여 위로를 받고 감사로 더 큰 승리와 기적을 경험하시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의 감사로 더 좋은 소식, 더 좋은 기적이 공급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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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그래도 감사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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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거저 받았으니 거저 드립니다”
- 저는 설교를 할 때 중간 중간에 찬양을 하고 비록 찬양이 아니더라도 곡조 있는 예화로서 일반 노래를 부를 때가 있습니다. 인간은 음악적 존재입니다. 음악 없이는 살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모세도 운율과 곡을 섞어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암송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신명기31:19) 성 프랜시스 역시 거리와 시장, 광장에서 설교를 하고 복음을 전할 때면, 평민들에게 익숙한, 당시 유행하던 민요나 대중가요에 복음 가사를 입혀 그들에게 복음을 전달하였습니다. 그때 당시의 사제들은 전부 고상한 라틴어로 설교를 했고, 평민들은 설교를 알아듣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성 프랜시스는 시장에서 장터 언어로, 대중가요에 복음 가사를 입힌 노래로 평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구원을 하였습니다. 그뿐입니까? 존 칼빈도 시편 쥬네브 찬송을 만들 때, 다는 아니지만 일부 찬송은 당시 유행했던 프랑스 민요나 대중가요에 시편 말씀을 가사로 붙였습니다. 저 역시 전도집회나 복음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기 위해서 성 프랜시스나 칼빈처럼 대중가요를 복음적으로 개사해서 부를 때가 있습니다. 사실 찬송가에 나오는 ‘하늘가는 밝은 길이’, ‘천부여 의지 없어서’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신자 되기 원합니다’ 등도 다 그 당시 민요와 흑인영가에서 차용했습니다. 그리고 아리랑이라고 하는 곡은 캐나다와 미국에서 찬송가 곡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설교 중 예화가 없는 설교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예화는 어차피 다 세상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볼 때, 일반 예화는 곡조 없는 예화이고, 노래는 곡조가 있는 예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성도들과 소통하고 감동을 더 하기 위해서 설교 중 찬송도 부르고 특별한 경우 곡조 있는 예화로 일반 노래도 선용하는 것이죠. 과거에는 주지주의적인 설교를 하였지만 요즘은 감성과 에토스가 있는 설교를 해야 하기 때문에 음악을 활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면 갈수록 애로사항이 많아져 갑니다. 유튜브에 설교 영상을 올리면 노래의 저작권에 걸리는 것입니다. 다른 노래의 저작권이라면 모르겠는데 3.1절이나 8.15 광복절을 맞아 ‘애국가’를 부르는데도 저작권에 걸리는 것입니다. 또한 어버이주일을 맞아 ‘어머니 은혜’를 불렀는데 이것 역시 저작권에 걸리는 것입니다. ‘애국가’나 ‘어머니 은혜’와 같은 노래는 진짜 국민의 노래가 아닙니까? CCM은 말하기도 어색할 정도로 저작권에 제한을 받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 스텝에게 빨리 저작권 단체에 비용을 지불해서 언제든지 자유롭게 부를 수 있도록 하라고 했는데 저작권을 관리하는 단체도 한두 군데가 아니어서 만만치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업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누가 저에게 권면을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도 작사를 하거나 작곡한 노래를 저작권협회에다가 등록을 하세요. 특별히 ‘사명의 길’ 같은 경우는 어지간한 교회 성가대에서 다 불렀고 해외에서도 많이 부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마 목사님께서도 저작권등록을 하면 저작권료를 꽤 많이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과거의 노래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정말 좋은 가사를 쓰고 좋은 곡을 작곡하여 저작권협회에 등록을 해 보세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그게 무슨 떼돈을 버는 거라고요. 제가 저작권에 걸려 상처를 입었다면 저라도 남에게 그런 상처를 안 줘야 되지 않겠습니까? 물론 저작권은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저는 음악 공부도 안 한 사람이고 국문과 출신도 아니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문학성과 음악성을 거저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저는 저작권료보다 제가 만든 노래가 하나님을 위해 더 많이 쓰임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거저 받았는데 거저 줘야 되는 것이 신앙의 정신과 가치가 아니겠습니까?” 그랬더니 그 분이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목사님, 듣고 보니까 참 그러네요. 정말 존경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목사님께 더 큰 은혜를 주시고 더 큰 복을 주신 것이 아닙니까? 생각해 보면 목사님도 문학성과 음악성을 거저 받은 것이겠지요. 하나님이 몹시 기뻐하실 것입니다. 저작권은 세상의 영역이라면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은 은총의 영역이고 거룩의 영역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제가 60권 가까이 책을 썼는데 누가 제 책에서 설교를 인용하거나, 책을 쓰는데 풋 노트를 달지 않고 인용한 경우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래도 저는 한 번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해 아래 새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마저도 쓰임 받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저는 부흥회나 세미나에 가서 설교나 강연을 한 후 어떤 분이 제 설교나 강의 원고를 달라고 하면 그냥 바인더 채로 줘버립니다. 이렇듯이 저는 앞으로도 거저 받은 은혜를 거저 드리고 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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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거저 받았으니 거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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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용종 있어요?”
- 10여 년 쯤이었을까요. 제가 태어나서 난생 처음으로 종합검진을 받을 때였습니다. 종합검진을 처음 받았으니 대장내시경도 처음 받은 것이죠. 저는 그때까지 종합검진 같은 것은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제가 최선을 다해 기도하면 하나님이 저의 건강을 지켜주시리라 믿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변에서 여러 사람들이 권유를 했습니다. 누구도 대장내시경을 했는데 대장에서 용종이 몇 개가 나왔고, 또 어떤 분은 7개, 8개가 있어서 그것을 다 제거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용종을 그대로 두면 암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그러니 빨리 종합검진을 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대장내시경을 받게 되었습니다. 수면 마취를 받기 전에 저의 관심은 “과연 내 속에도 용종이 있을까? 아니야, 없을 거야. 나에게는 절대로 용종이 없을 거야” 하는 기대감을 갖고 한편으로는 긴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수면 마취가 완전히 안 된 것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수면 마취 중에 닥터에게 느닷없이 물어봤잖아요. “선생님, 제 안에 용종이 있나요?” 그랬더니 하얀 가운을 입은 닥터가 이렇게 중얼거리는 겁니다. “이 양반 마취가 왜 제대로 안 된 거야? 약 좀 더 넣어.” 그래서 제가 뭐라고 응대한 줄 아십니까? “이 양반이라니요? 나는 목사입니다.” 그러자 닥터가 말씀하시기를 “예, 알고 있습니다. 용종 하나도 없습니다. 깨끗합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다시 잠이 들었습니다. 그 뒤로도 두어 번 대장내시경을 했지만 이런 경험은 없었습니다. 그냥 잠든 채로 내시경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 다 용종이 전혀 없다는 결과를 통보받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검사결과도 깨끗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난 화요일에 이재훈 의료목사님이 새로 개원하는 다건연세내과에서 종합검진을 받게 되었습니다. 전날 개원예배를 드리고 병원 시설을 둘러보는데 새로 개원한 병원이기 때문에 들어가자마자 호텔 프런트와 같은 분위기를 느꼈고 내과뿐만 아니라 가정의학과도 개설하여 여성들의 자궁경부암과 유방암까지 진단을 할 수 있게 했습니다. 너무 깨끗하고 시설이 좋아서 가까이에 있는 동네 대학병원과 같다고 할 수 있지요. 제가 다음 날 받을 내시경실을 둘러보니까 아주 깨끗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느꼈습니다. 경험한 분들은 아시겠지만, 전날 저녁 장 청소를 하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게다가 가슴까지 설레여서 예약 시간보다 30분이나 먼저 병원을 찾았습니다. 정말 어린 시절 소풍 가는 것처럼 들뜬 분위기였고 설레이는 가슴을 억누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제가 다건연세내과 개원 제1호 환자로 내시경을 받기 때문이죠. “이번에도 용종은 없겠지? 어찌 내 안에 용종이 있을 수 있겠어?” 제가 얼마나 들뜬 기대감으로 가득했는지 이번에도 수면 마취 중에 눈을 뜨고 이렇게 물어봤습니다. “저 용종 있었나요? 용종 없죠?” 그러자 이재훈 원장님(목사님)이 “없습니다. 깨끗합니다.” 그 말을 듣고서야 다시 잠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제가 물어봤죠. “제가 마취 중에 분명히 그런 질문을 했죠? 그리고 용종 없다고 대답하셨죠?” 원장님이 답하기를 확실하게 질문을 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왜 그랬을까요? 저와 함께하신 하나님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용종이 있을 수도 있죠. 그러나 저는 없다고 확신을 했고 그런 기대를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기대가 컸으면 수면 마취 중에 깨어나서 그런 질문을 했겠습니까? 또 하나 제가 다건연세내과 1호 내원 환자로서 가슴이 뛰지 않을 수 없죠. 제가 병원에 가기 전에 이런 생각을 했거든요. 용종이 없고 깨끗한 결과가 나오면 하나님께서 다건연세내과병원이 정말 형통하고 번성하는 걸로 전제를 하고 상상을 할 것입니다. 이 생각이 얼마나 간절하고 기대가 컸으면 수면 마취 중에 눈을 부릅뜨고 그런 질문을 했겠습니까? 그냥 모든 걸 의료진에게 맡겨두고 편히 잠들어도 되는데, 그리고 잠시 후에 결과를 알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에 대한 저의 기대감과 다건연세내과에 대한 간절함이 가득했다는 것이겠지요. 이 다음에도 대장내시경을 받을 때 수면 마취 중에 그런 질문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제 생각과 상상대로 제 안에 용종이 하나도 없었듯이 다건연세내과가 더 형통하고 번성하기를 바라는 것이죠. 앞으로 다건연세내과병원이 더 많은 사람들의 건강을 위해 섬기고 주민 보건에 귀하게 쓰임 받고 형통하는 병원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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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용종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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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역사는 기억되고 공감되어야 하죠.”
- 지난 목요일 오전 저는 서울올림픽 레거시포럼 조직위원회 회의에 참석을 하였습니다. 그날은 원래 총신대 신대원 설교 일정이 있었는데 이 모임에 참석을 하려고 날짜를 바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또 다른 일정이 생겨서 이곳으로 갈까, 저곳으로 갈까 전날까지 고민을 하다가 레거시 모임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서울올림픽 레거시’란 1988년 서울올림픽대회의 정신과 가치를 기억하고 그 정신을 계승하고 알리는 조직인데요. 대한민국 역사에 있어서 88서울올림픽은 대한민국의 내면과 외면, 무형과 유형의 문화를 통째로 바꾼 사건이지만, 하나의 사건으로만 남아 있고 그 정신과 가치가 제대로 계승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88서울올림픽의 정신과 가치를 기억하고 계승하는 조직이 출범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서울올림픽 레거시 포럼’입니다. 이 모임은 장차관 출신이나 체육계 인사들로 구성돼 있는데, 저도 기독교계를 대표해서 위원으로 참석을 하였습니다. 이 회의에서 어떻게 88서울올림픽의 정신과 가치를 계승하고 더 발전시킬 것인가에 대한 의견을 발표하였습니다. 의견 중에 두드러진 내용은 88서울올림픽의 정신과 가치가 계승되려면 청소년들에게 체육 교육을 활성화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학교 교육은 전부 공부 위주가 아닙니까? 체력은 국력이란 말은 절대로 올드한 슬로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컷 공부를 하여 좋은 대학을 갔지만 한참 자라나는 과정에서 체력을 단련시키지 못하면 중년이 되어 건강을 잃고 단명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죠. 그러면 학교 교육 시스템부터 바꿔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 학교나 지역마다 청소년 스포츠센터를 짓는 운동을 하자는 것입니다. 여러 의견들이 있었지만 제가 듣기에는 이 의견이 가장 공감이 되는 부분이었습니다. 그런 얘기를 듣고 나부터도 생활체육을 일상화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건강은 운동과 직결이 되는데 나도 생활체육을 통해서 건강관리를 잘해야 되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발표할 차례가 되자, 저는 마이크를 들고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역사는 기억이 되고 공감이 되며 미래로 계승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88서울올림픽 레거시 포럼의 존재가 국민에게 얼마나 존재감을 불어넣고 공감을 주느냐가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국민들께 88서울올림픽의 정신과 가치를 더 알리고 공감하도록 하기 위해서 한 가지 제안을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몇 부작의 다큐를 만들어 공영방송에 방영을 하는 것입니다. 88서울올림픽의 그 영광의 순간들, 그리고 그 주역들의 그때와 오늘의 얼굴을 비춰주면서 역사적 의미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국민들로 하여금 그때 그 추억의 세계로 돌아가게 하고 우리 국민 모두가 우리 시대에 다시 한번 서울올림픽을 개최하는 열망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너무 좋은 의견이라고 박수소리가 가득하였습니다. 우리 국민 모두가 다 그렇거니와, 저는 특별히 88서울올림픽을 잊을 수 없습니다. 바로 그 해에 저도 우리 새에덴교회를 개척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88서울올림픽의 역사와 우리 교회의 역사는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제 삶의 역사와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정말 88서울올림픽의 역사가 국민들 모두에게 소중한 가치와 의미로 기억이 되고 미래의 새로운 꿈과 도전으로 연결되기를 기도하였습니다. 물방울 하나하나가 모여 강물을 이루고, 별 하나하나가 모여 은하수로 빛나고, 모래 한 알 한 알이 모여 은빛사막을 이루듯 국민들의 마음이 하나로 모아져서 우리 생전에 다시 한번 ‘어게인 서울올림픽’이 개최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역사는 기억이 되고 공감이 되며 미래로 계승시키고 발전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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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역사는 기억되고 공감되어야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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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새순이 나르샤”
- “새에덴의 꽃, 생명 / 순장들이 모인 은혜 넘치는 / 이 좋은 시간과 공간에 / 나를 택하여 주사 더 큰 사명으로 날아오/르게 하시니 더욱 주님 높이 섬기며 / 샤론의 꽃을 피우겠습니다.” 이건 지난주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있었던 ‘새순이 나르샤’ 시간에 어느 순장이 저에게 보낸 ‘새순이 나르샤’로 지은 6행시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느 순장은 ‘맨발의 소명자’로 6행시를 썼습니다. “맨 처음 교회를 간 건 그저 예쁜 여학생 때문이었습니다. / 발치에 앉아 멀리 떨어져서 들은 제자 베드로의 배신 이야기에 의로운 분노가 타올랐습니다. ‘나라면 그렇게 배신 안 한다. 사내 대장부가 3년이나 따라 다녔으면서 배신을 하냐?’ / 소리치듯 내뱉은 마음의 소리에 / 명령이 내려오듯 제게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 자녀로 삼아주시고 주님의 종이 되게 하셨습니다.” ‘새순이 나르샤’라는 프로그램은 코로나 이후 소그룹과 생명순(구역)을 살리기 위한 중간 그룹의 모임이었습니다.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100명에서 150명 단위로 교회 카페에서 교회오빠인 담임목사와 교회언니인 순장들과의 영적인 따뜻한 대화와 소통을 하는 시간을 갖았습니다. 코로나 상황에서는 겨우 교회를 유지하고 회복을 하였지만 이제 코로나의 검은 파도가 휩쓸고 간 자리에서 새로운 부흥과 성장을 이루어야 할 시기이지 않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생명순(구역)이 살아야 되고 생명순이 살기 위해서는 생명순장(구역장)들과의 긴밀한 소통과 관계성이 필요하다고 여겨졌습니다. 제가 먼저 격려의 메시지를 하고 성도들이 저에게 묻고 싶은 것을 엽서에 적어서 주면 그걸 일일이 다 대답을 해 주었습니다. 어느 한 장도 가볍게 취급하지 않고 진솔하고 성심성의껏 일일이 다 대답을 해주니까 그곳에 모인 성도들이 감동을 받은 것 같았습니다. 후문에 의하면 가까이에서 단둘이 이야기하듯 그런 분위기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교구마다 직접 만든 선물을 저에게 전달을 하였습니다. 어떤 교구는 자신들이 직접 만든 케이크, 또 김밥, 저의 캐리커쳐와 제 시를 캘리그라피로 쓴 액자 등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어떤 교구에서는 저에게 노벨문학상을 준다고 메달을 만들어서 목에 걸어주기도 하였습니다. 또 다른 교구에서는 콩나물 꽃다발을 가지고 왔습니다. 새순이 콩나물처럼 막 자라라고 말입니다. 그런 후에 순장들과 함께 가수 이선희의 ‘그중에 그대를 만나’를 개사해서 함께 노래를 불렀습니다. “♪ 그렇게 대단한 기대까지 바란 적 없다 생각했는데 / 그대 하나 떠나간 우리 교회 이제 그대 아님 채울 수 없소 / 별처럼 수많은 사람들 그 중에 성도로 만나 / 꿈을 꾸듯 새에덴을 이루고 / 주님의 은혜로 벅찼던 우리가 예배로 만나고, 그 모든 건 기적이었음을, 그 모든 건 은혜이었음을...” 그리고 제가 마무리 축복기도를 하고 일일이 한 분 한 분 다 악수를 하였습니다. 천 명이 넘는 순장들이 한꺼번에 모이면 그냥 하나의 집회로 끝났을 텐데, 교회 카페에서 100명, 150명 단위로 모이니까 느낌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역시 작은 공간이 주는 분위기의 효과가 크다는 것을 다시 느꼈습니다. 서로 작은 공간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악수를 하며 아이컨택을 하니까 정말 가까이에서 단둘이 데이트(?)한 것 같다는 말이 나올 수도 있었겠죠. 이러기를, 어떤날은 하루에 몇 번씩 하니까 보통 힘든 것이 아니었지만 끝나고 잠시 누우면 진짜 순장들이 새순이 되어 날아오르는 환상이 보이는 듯했습니다. 정말 콩나물 꽃다발처럼 생명순들이 쑥쑥 자라 오르는 생각이 들어왔습니다. 글을 쓰는 이 시간에도 변함없이 교회오빠인 담임목사를 응원하고 추앙하고 지지해준 교회언니인 순장들이 너무 고맙게 느껴졌습니다. 이를 계기로 해서 우리 교회는 ‘새순이 나르샤’할 뿐만 아니라 ‘생명이 나르샤’하고 ‘부흥이 나르샤’하게 될 것입니다. 코로나 이후에 새로운 부흥의 역사를 쓰고 불멸의 성장 신화를 쓰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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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새순이 나르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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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땅과 하늘의 찬양대가 앙상블을 이루는 순간”
- 정말 꿈같은 시간이었습니다. 아니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바로 지난 주일 저녁에 본당을 성도들로 가득 채운 채 ‘할렐루야’를 찬양하였을 때 말입니다. 그것도 주일 오전예배 때도 아니고 밤 예배 때 말입니다. 지난 부활주일은 보통 부활주일이 아니었습니다. 2시에 광화문에서 한국 기독교 140년 역사만에 최초로 2023 부활절 퍼레이드를 인도하였습니다. 사실 저는 교단 총회장을 하였고, 한교총 대표회장을 하였기에 실무대회장을 한다는 것은 옷에 맞지 않았지만, 이영훈 목사님과 CTS 방송에서 간곡하게 요청을 하여 맡게 되었습니다. 또한 오후 4시에는 한교총 주최로 대통령이 참석하는 한국교회 부활절연합예배에서 축시 순서를 맡았고 저녁에는 우리 교회 부활절 칸타타 행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두 개의 행사가 겹치다보니 막상 퍼레이드 행사에는 못 오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저라도 참석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부활주일 3부 예배만 끝내고 바로 광화문으로 출발하여 겨우 시간 내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지도자는 책임을 지는 사람이기에 그렇게 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4시에 영락교회에서 열리는 한국교회 부활절연합예배에 참석하여 기념시를 낭독하였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은 콩밭에 있었습니다. ‘부활절 퍼레이드에 적지 않은 성도들이 동원이 됐는데 이분들이 지쳐서 저녁에 안 오면 어떻게 하나. 정말 3층 본당까지 성도들이 가득 찰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염려를 왜 저만 하였겠습니까? 우리 교회 실무진들도 저와 같은 염려와 고심이 깊었을 것입니다. 사실 제가 부활주일 저녁예배 행사를 하자고 했을 때 오후에 부활절 퍼레이드 행사가 있어서 좀 무리가 되지 않을까하는 의견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도자는 결단 해야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한 번 해 보자고 밀어붙였습니다. 그러자 팀장회의에서 새에덴의 모든 성도들이 퍼즐 스티커를 부착해서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참석하여 예배가 시작될 때부터 본당 3층까지 꽉 채웠습니다. 저는 본당을 가득 채운 새에덴의 성도들이 ‘할렐루야’를 찬양하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뛰었습니다. 새에덴 연합찬양대가 ‘죽임 당하신 어린 양’, ‘살아계신 주’를 비롯해서 ‘할렐루야’까지 칸타타를 정말 잘했습니다. 연합찬양대가 주축이 되었지만 모든 교인들이 다 일어서서 ‘할렐루야’를 찬양할 때 정말 너무 아름다웠고 꿈을 꾸는 것만 같았습니다. 언젠가 예배시간에 온 성도들이 의복을 하나로 통일하고 찬양하는 시간을 갖기를 원했는데 그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찬양대도 몇 주 전부터 토요일마다 나와서 연습을 하고, 전교인이 자발적으로 참석을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진짜 꿈을 꾸는 것 같았습니다. 아니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가슴이 뜨거워지니까 눈시울도 뜨거워졌습니다. 본당 3층에 있는 성도들에게 달려가서 격려해 주고 싶을 정도로 감사했습니다. 저도 이렇게 기뻐하는데 하나님은 얼마나 기뻐하셨겠습니까? 제가 감사기도를 할 때 죽전의 하늘이 열리면서 우리 교회 찬양대와 하늘의 찬양대가 함께 만나서 하늘을 진동시키고 땅을 진동시키는 앙상블을 이룬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정말 죽전의 하늘을 찢고 하나님의 임재와 운행하심이 가득한 순간이었습니다. 저녁예배가 끝나고 자려고 하는데도 잠이 안 오는 것입니다. 수면제를 먹었는데도 두어 시간 만에 또 깬 것입니다. 그러면서 계속 머릿속에서 환영처럼 “할렐루야, 할렐루야”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꿈과 현실이 서로 교차되면서 현실이 꿈이 되고 꿈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잠 못 드는 밤이었지만 너무 행복했습니다. 꿈 없이 잠들지 않고 꿈 없이 깨지 않는 삶은 여전히 연속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거룩한 욕심이 생기고 또 도전하고 싶은 것입니다. 추수감사주일에는 ‘할렐루야’ 못지않은 전교인 연합찬양을 또 한 번 해 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때는 하얀 옷이 아닌 추수를 상징하는 노란 옷을 입고 해보고 싶다는 도전과 거룩한 욕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때의 모습이 또렷한 잔상으로 남아 있고 제 안에서 ‘할렐루야’ 찬양이 계속 메아리치고 있습니다. 녹화영상을 볼 때마다 그때의 감동이 되살아나고, 특별히 지난 목요일 7시 반에 CTS 방송에서 녹화중계가 방영되었을 때 정말 가슴이 울컥거렸습니다. 그날 참석해 주신 성도들께 다시 한번 감사하고 부활절 계란을 3만 3천 개나 기증해 주신 송성은 집사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모든 영광 하나님께 올려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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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땅과 하늘의 찬양대가 앙상블을 이루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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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꿈은 길 위에서 잠들지 않는다
- 저는 지난주 월요일 우리 총회 산하 농어촌 목회자부부수양회에서 말씀을 전하기 위해 베트남 하노이에 도착을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온 김에 ‘일상적인 투어가 아닌 의미 있는 관광을 할 수 없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작년에 한국 베트남 수교 30주년 행사를 주관하신 우리 교회 최진영 집사님(코리아헤럴드 대표)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여기에 온 김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명소나 혹은 유력한 분을 좀 만날 수 없습니까?” 그랬더니 당장 베트남 대통령 친구이자 5선 국회의원과 저녁식사 자리를 만들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보다도 더 의미가 있는 게 없습니까?” 했더니 “그러면 스타레이크시를 방문하시면 어떻겠습니까?” 하는 것입니다. 그곳은 하노이에 있는 60만 평의 노른자 같은 땅에 서울 강남과 같은 특별한 신도시를 건설하고 있는 곳인데, 우리나라의 대우건설이 투자하여 지금까지 개발을 주도해 왔다고 합니다. 1차 사업은 다 완공이 되어 이미 2천 여 세대가 입주하여 있고 2, 3차 사업도 진행되고 있어 추후 빌라와 아파트가 계속 건설될 뿐만 아니라 베트남의 국회, 11개 행정부처 등이 들어올 예정이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듣고 “그러면 그런 곳을 가보고 싶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마친 다음 날 스타레이크시를 방문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안국진 현지 법인장과 직원들이 친히 나오셔서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시는 것입니다. 스타레이크시는 1996년부터 시작되었다는 설명을 듣고 제가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러면 처음으로 이 사업을 꿈꾼 드림 메이커가 누구였습니까? 혹시 김우중 회장이 입안한 거 아닙니까?” 그랬더니 “맞다”는 것입니다. 김우중 회장이 베트남에 와서 “아, 여기는 정말 호텔과 오피스텔 그리고 신형 아파트와 빌라 등의 새로운 신종 사업이 필요하다”고 하며 이런 신도시 건설의 꿈을 꾸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여러 건설회사가 참여했지만 다른 기업들은 다 그만두고 대우건설이 끝까지 해 왔다는 것이구요. 저는 도시 모형도만 보지 않고, 자동차를 타고 이동할 뿐만 아니라 직접 거리를 걸어 다니면서 투어를 했습니다. 그리고 아파트 맨 꼭대기 층에 올라가서 뷰를 보니까 감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멋있게 도시를 건설할 수 있는가? 우리나라의 건설회사 하나가 아직도 사회주의 체제인 나라에 와서 어떻게 허가를 받아서 개발을 하고 신도시를 만들 수 있는가?” 저는 대한민국 국민인 것이 너무 감사하고 대우건설을 추앙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또한 비록 그 꿈을 본인이 이루지는 못했지만 꿈꾸는 자도 아름답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김우중 회장의 꿈이 더 아름답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 순간 언젠가 제가 쓴 ‘꿈은 길 위에서 잠들지 않는다’라는 문구가 생각이 났습니다. 저 또한 꿈의 인생이었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집에서 쫓겨난 이후에 고독한 별빛 아래서 잠들고 차가운 새벽이슬을 맞으며 깨어나는 외로운 길 위의 인생이었습니다. 120원짜리 점심을 사 먹을 돈이 없어서 수돗물로 배를 채우는 가난한 신학생이었지만 기도원에 올라갈 때면 소나무들을 저의 성도라고 생각하고 설교 연습을 했습니다. 점심값을 아껴서 책을 사 보며 밤마다 지혜의 등불을 밝혔습니다. 바로 이런 꿈이 있었기에 길 위에서 쓰러지고 잠들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눈을 비비며 길을 걷고 또 걸었습니다. 저라고 해서 왜 좌절과 상처가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꿈은 그 길 위에서 잠들지 않고 계속 걷게 하였고 오늘의 저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꿈은 길 위에서 잠들지 않습니다. 물론 잠시 잠들 수 있으나 꿈에는 길이 있기 때문에 또 일어나 걷게 됩니다. 그것이 허상이요 야망에 불과하다면 포기하고 싶을 것입니다. 아니, 좌절하고 절망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꿈은 길 위에서 잠들지 않고 걸어가고 또 걸어가게 합니다. 우리가 꿈을 꾸면 그 꿈은 내 생전에 이루어지든지, 천국 간 후에 이루어지든지 누군가에 의해서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일단 꿈을 꿔야 합니다. 그리고 그 꿈이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면 좋겠지만 내 자녀를 통해서 이루어져도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 모두 아름다운 뷰티플 드리머(beautiful dreamer)가 되어 길 위에서 잠들지 않을 찬란한 별빛의 꿈을 꾸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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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꿈은 길 위에서 잠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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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지도자는 선각자여야 합니다”
- 이 세상에는 현자와 우자가 있습니다. 우자는 가르쳐줘도 모르고 현자는 가르쳐주면 아는 자입니다. 그런데 가르쳐주지 않는데도 싹을 보고 미래를 아는 사람을 명자(明者)라고 하고, 싹이 보이지도 않지만 기미만 보고도 미래를 예측하는 사람을 철인(哲人)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싹도 안 나고 기미도 안 보이는데 미래를 꿰뚫어 보고 예측하며 그것을 대비하는 사람을 선각자(先覺者)라고 합니다. 지도자는 미래를 내다보고 대안을 세우는 선각자여야 합니다. 코로나가 왔을 때 저는 교단 부총회장으로서 몇 분의 교회사 교수들로부터 자문을 받은 후, 한국교회 지도부에 칼빈의 ‘쿼런틴’(quarantine) 즉, 격리 시스템을 제안했습니다. 유럽에 흑사병이 창궐할 때 중세 가톨릭 사제들은 공간의 권위를 지키기 위하여 무조건 성당으로 모이라고 했습니다. 그걸 주도한 교황이 클레멘트 6세였습니다. 그 결과 성당이 집단감염의 진원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하였고 중세 가톨릭은 몰락을 자초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선각자적 시각을 가지고 미래를 예측하고 대비하였습니다. 그는 먼저 구빈원을 만들어서 사회봉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흑사병이 왔을 때 구빈원 자체가 쿼런틴, 즉 격리시설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는 일반 성도들에게도 쿼런틴 시스템을 적용했습니다. 그래서 노약자는 물론 일반 성도들도 교회로 오지 말고 집에서 격리를 해 있으라고 했습니다. 대신 성직자들이 찾아가서 예배를 드려 주었습니다. 당연히 교회에서는 비록 소수였지만 성직자들을 비롯하여 건강한 사람들, 혹은 중요한 사람들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칼빈은 예배의 존엄성을 끝까지 지키면서도 이웃 사랑과 생명 사랑을 실천한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의 종교개혁 운동은 제네바 시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계속 발전을 거듭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당시는 제가 부총회장 때라 나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훗날 내가 총회장이 되고 한교총 대표회장이 된 후 한국교회에 쿼런틴 시스템을 제안하고 정부와는 협상을 하며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잡아 균형을 맞출 수 있었습니다. 물론 비난과 공격도 많이 받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극단적인 입장을 취했다면 엄청난 언론의 공격을 받고 교회의 대사회적 이미지는 곤두박질쳤을 것입니다. 또한 총회장 임기 때 저는 총신의 임시이사 문제를 해결하고 정상화를 이루어냈습니다. 사실 다들 불가능하다고 말하며 손을 놓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동안 소통과 신뢰를 바탕으로 쌓아온 사회적 네트워크와 인맥을 최대한 활용하여 총신의 정상화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총회 이사회를 구성할 때도 교육부가 여성 이사를 파송하기 전에 총회가 선제적으로 여성 이사를 추천하자고 했습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105회 총회 때 기여 이사제를 시행토록 결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일부 정치권에서는 “당신은 총회에서 매장된다. 당신은 정치적으로 죽는다” 하면서 반대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응대했습니다. “나는 백번 죽어도 좋습니다. 총신이 발전하고 총회가 잘 될 수 있다면, 나는 총회에서 쫓겨나도 좋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걸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이제와서 후회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마는. 아니나 다를까, 교육부에서 3명의 여성 이사를 선임하였습니다. 저는 어쩔 수 없이 총회 입장에서 반대 성명서를 내고 기자회견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이후로도 저는 반대를 하였지만 다른 분이 교육부를 상대로 소송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총회장 이름으로 소송을 해야 한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총회장 이름으로 소송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총신이 부당한 손해와 불이익을 당하게 된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닫고 곧바로 소송을 취하했습니다. 요즘일수록 새삼스럽게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지도자는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판단하고 헤아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 눈앞에 있는 현실만을 바라보고 교권적 안목으로 일을 처리하려고 하지 않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지금 우리 총회와 총신에는 진정한 선각자적 지도자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과거에 허허벌판에서 다시 교단을 일궈낸 선진들은 이런 선각자였지 않았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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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지도자는 선각자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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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상남자보다 중요한 것은··· ”
- 수요일 저녁 예배에 갑작스럽게 미국 뉴욕에서 목회를 하시는 김성국 목사님이 오셔서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분은 퀸즈 장로교회 장영춘 목사님의 지도아래 목회 훈련을 받고, 아주 충직하게 부목사 생활을 하였던 분입니다. 장영춘 목사님은 뉴욕에서 목회를 하시면서 디아스포라 세계 한인 목회자들을 하나로 묶는 세미나와 포럼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때 저희 교회도 적지 않은 후원을 해 주었는데요. 한번은 장 목사님이 한국에 오셨다고 해서 제가 식사를 대접했는데, 다음날 캄보디아로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님 얼굴이 밝아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캄보디아에 가지 마시고, 한국에서 쉬셨다가 미국으로 가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캄보디아 선교지에 꼭 가야 된다고 하시며, 그 마음을 꺾지 않으시고 가셨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소식을 들었습니다. 캄보디아에서 뇌졸중이 와서 급히 미국으로 가셨다고 말입니다. 전화를 해보니까 언어도 불편하신 듯 느껴졌습니다. 사모님께 자초지종을 들으니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런데 중풍에 어떤 특수 약재가 정말 효과가 있다는데, 미국에서 구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 얘기를 들으니까 더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그래서 어찌어찌해서 그것을 하나님 은혜로 구하여 오전 비행기를 타고 뉴욕까지 갔습니다. 제가 갔더니 목사님이 너무 감격해서 막 눈물을 흘리시는 것입니다. “소 목사님이 의리가 있고 신의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토록 상남자인 걸 몰랐습니다. 그간 한인 목회자를 섬겨준 것도 감사한데, 약재까지 가져온 게 너무나 고맙습니다.” 저는 그 분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 드리고, 그날 저녁 비행기로 다시 왔습니다. 돌아와서 계속 전화로 확인해 보니까 그걸 드시고 아주 좋아지셨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 세월이 흐르고, 그 일은 세월 속에 묻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장 목사님을 모시고 부목사를 하다가 퀸즈 장로교회 담임 목사가 되신 김성국 목사님을 대면하니까 그때의 일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김 목사님도 “온 교인들이 소 목사님의 그 헌신과 섬김에 위로를 받고 큰 힘을 얻었습니다. 정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라고 설교 서두에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때 장 목사님께서 하셨던 그 한마디가 요 며칠 동안 계속 뇌리에 스쳐 갔습니다. 그 단어는 바로 ‘상남자’라는 단어입니다. 돌이켜 보면, 저는 상남자의 길을 걸어왔다고 자부합니다. 항상 약자를 보면 보호해 주고 싶고, 지켜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강자 앞에 전혀 굴하지 않는 용기와 패기가 넘쳤던 사람이었고, 무엇보다 의리와 신의를 중히 여기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오죽하면 한동안 우리 교회 당회에서 “믿음이 없으면 의리라도 있자”를 슬로건으로 삼았겠습니까? 모름지기 남자로 태어났으면 상남자가 돼야 합니다. 대장부가 돼야 합니다. 제가 키는 작아 어찌 보면 소인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저의 가슴 안에는 대장부의 심장이 꿈틀거리고 있고, 대장부의 기상과 결기가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그것이 전부가 아니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이 뇌리를 스쳤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것이고, 하나님의 종으로 사는 것이라고요. 그런데 하나님의 종이라면 무엇보다도 소명감으로 가득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요즘 하나님께서 저에게 온유와 겸손의 훈련을 시키십니다. 옛날 같으면 누가 저를 욕하거나 비방을 하면 당장 찾아가거나 전화를 했을 것입니다. 버럭 화를 내며 “왜 그러냐”고 그럴 텐데, 요즘은 그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참는 훈련, 또 온유 훈련, 겸손 훈련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제가 누구보다 배짱이 있고, 용기와 결기가 가득한 사람이잖아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참아야 할 때는 참고, 온유해야 할 때는 온유하게 만드십니다. 어느 현인의 말처럼 말이 되지 않는 사람과 말을 섞으면 ‘실언(失言)’을 하게 되고, 말이 되는 사람과 말을 하지 않으면 ‘실인(失人)’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이 되지 않는 사람들과는 아예 말조차 꺼내지 않으셨던 것을 보지 않습니까? 글을 쓰는 이 시간, 상남자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종이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가슴속에 새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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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상남자보다 중요한 것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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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봄의 약속은 어디서 오는가
- “이제 곧 봄이 오려나봐 / 너는 웃고 있는데 / 난 이별의 말을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 겨울나무도 아무 말이 없어 / 숲 속 나무의자에 앉아 / 우리가 함께 지나온 시간들을 회상하는데 / 바람이 분다 / 꽃이 나만 홀로 남겨놓고 / 산을 내려가네 / 나는 산에 있고 / 꽃은 마을로 간다.” 이 시는 제가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 쓴 시집, ‘꽃으로 만나 갈대로 헤어지다’에 나오는 ‘꽃’이라는 시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꽃은 김춘수의 꽃과는 반대되는 꽃입니다. 김춘수의 꽃이 시적화자와 연결이 되고 관계를 맺는 꽃이라면, 이 시의 시적화자는 꽃과 분리되어 잠시지만 스스로 고독과 고립을 숙명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스스로 꽃과 분리되어 망각의 시공간 속으로 은둔하고 싶어 하는 자아입니다. 코로나의 공포감과 우울함 사이에서 고뇌하는 시적화자는 잠시 어떤 위로와 관계 맺음보다는 오히려 외로움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어느 곳으로도 피할 수 없고, 누구도 믿을 수 없는 폐허와 같은 세상 속에서 혼자 남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죠. 사실 이 모습은 꼭 시적화자의 모습이기 전에 현대인의 모습을 묘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가 여기서만 끝나면 시가 아닙니다. 여기서 시는 반전이 있어야 합니다. 꽃이 나만 홀로 남겨놓고 산에서 내려가 버리는 것이죠. 그래서 얼핏 보면 꽃과 나는 완전히 분리되어 나는 산에 있고 꽃은 마을로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꽃이 마을로 내려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들에게 봄이 확실하게 오는 것이 아닙니까? 코로나 때문에 갈대처럼 헤어져 고립되고 황폐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사이로 화사한 꽃들이 내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서로 꽃으로 만나서 그들 스스로가 꽃이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시적화자도 어쩔 수 없이 꽃과 합일이 되어 마을로 내려가서 꽃으로 만나고 꽃과 같은 세상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꽃’이라는 시는 그냥 서정성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언자적 요소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19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갈대처럼 헤어져 고독을 숙명으로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언젠가 반드시 우리는 꽃으로 다시 만나 화해의 봄, 희망의 봄, 미래의 봄을 함께 맞게 될 것을 노래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봄은 반드시 옵니다. 아니, 코로나 팬데믹도 끝나고 이미 봄은 왔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거리에 보면 마스크를 쓴 사람도 많고, 안 쓰다가도 사람들이 가까이 오면 또 쓰기도 합니다. 또 실외에서는 마스크를 안 쓰다가도 실제로 행사장에서는 다시 다 쓰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 다 마음으로는 산으로 가는 것입니다. 올 겨울은 유난히 길었습니다. 혹독한 날씨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의 혼란과 갈등이 우리 사회를 겨울왕국으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난방비 폭탄이 터지고 물가가 상승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더 얼어붙게 하고 있습니다. 저도 올겨울에는 코로나 때에도 꿈쩍하지 않았던 고뿔이 들어서 힘겨운 싸움을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잠을 잘못 잔 탓에 약지 손가락의 마비가 아직도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분명히 봄은 옵니다. 어떤 추위도, 어떤 겨울도, 심지어 아무리 꽃샘추위가 오고 봄을 시샘한다 하더라도 봄은 옵니다. 앞으로도 한 번쯤 더 눈이 올지 모르고 또 꽃샘추위가 올 것입니다. 그것이 아마 겨울을 더 길게 할지도 모릅니다. 특별히 여기저기서 들리는 뉴스와 사건, 사고들이 우리의 겨울을 더 길게 할지도 모릅니다. 한국교회 역시 말도 안 되는 가짜뉴스와 헤이트 스피치 등으로 갈등과 분열의 골을 더 깊게 할지도 모릅니다. 그런 거짓을 생산하고 조장하는 사람들도 문제지만 또 그것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도 문제입니다. 사실을 직접 알아보지도 않고 무조건 거짓뉴스에 현혹되어 레밍효과나 쏠림현상이 나타나면서 한국교회의 겨울은 더욱 길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봄은 옵니다. 그냥 날씨가 따뜻해져서 봄이 오는 게 아니라 꽃송이 하나로 봄이 오지요. 매화가 됐든, 목련이 됐든 분명히 제일 먼저 핀 자그마한 꽃송이 하나로 봄이 올 것입니다. 저는 그 꽃송이 하나 피우기 위하여 지금도 앙상한 숲 한 가운데서 연둣빛 봄을 꿈꿉니다. 봄길은 차가운 겨울 숲에서 시작하고 봄의 약속은 겨울의 소원에서 시작하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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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봄의 약속은 어디서 오는가